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니라(요6:63.)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약속이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

은혜와 진리의 말씀

101강,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윤주만목사 2019. 6. 11. 06:49


101,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빌립보서 3:7-9절을 보면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아직도 구약의 이스라엘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과 예수님이 오시고 난 후에는 구약에서 밝히 보이지 않았던 복음을 사람들이 성경을 통해서 어느 정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참 빛으로 밝히 보여 주고 있지만 아직도 구약의 율법과 규례를 따라 살려하는 사람들이 다수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율법을 지키기 위해 살았습니다.

왜 그들이 율법을 그렇게 지키기 위해 노력을 했느냐면 그림자로 가려져 있는 구약의 성막을 제대로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성막의 모든 기구와 그리고 제사 제도를 바로 볼 수 있었다면 그들은 그렇게 율법에 목을 매지 않아도 되었을 것입니다

 

실체가 안 보였던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그림자만 보였고 실체는 안 보였습니다.

그림자를 보면 답답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무엇인가를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물론 그림자로 분별을 할 수 있는 것도 있지만 어느 것을 보면 그림자가 꼭 호랑이 같은데 실체를 보면 그것이 나무 수풀일 수도 있습니다. 바로 그림자는 실체와 같을 수도 있고 또 다를 수도 있습니다.

 

빛도 다릅니다.

우리 눈으로 볼 수 있는 빛은 참 빛이 아닙니다.

내 눈에 선하고 의롭게 보이는 것은 그림자이기 때문에 그것이 참인지 거짓인지는 사실 그림자만을 보고는 분별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그림자를 보고 철썩 같이 믿고 있습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그 빛에 속습니다.

자기가 눈으로 보고 있는 그 빛이 너무 선하고 의롭게 보이는 그 빛이 거짓일 수 있다는 것을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 모든 종교는 이렇게 눈에 보이는 빛을 보고 따라가고 있지만 성도는 눈에 보이는 그 빛을 보는 것이 아니라 눈에는 안 보이지만 지혜로서 밝히 볼 수 있는 참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라가고 있습니다.

 

참 빛은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지금 눈에 보입니까? 예수를 믿는다고 종교적인 행위를 하는 사람이 그럼 참 빛입니까? 물론 그 중에는 참 빛을 가지고 밝히고자 하는 복음을 가진 성도도 있고 대다수가 비추고 있는 그 빛은 사실 참 빛이 아니라는 것을 바로 분별해야 합니다.

 

사람이 행하는 것은 참 빛이 아닙니다.

그가 설령 복음을 위해 밝게 비추고 있을지라도 그것은 역시 참 빛이 아니라 그림자입니다 그림자는 언제든지 그 형상이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물론 그 그림자가 맞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는 영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거의 대부분의 그림자는 실체와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지금 천사처럼 보이고 있습니까?

그것이 물론 천사일 수도 있지만 사단일 수도 있습니다.

이것을 분별하려면 정말 성경적으로 복음이 확실하게 자리하고 있지 않고는 절대로 분별을 하지 못 합니다. 거의 대부분은 사단을 보고 마치 천사인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어떠했습니까?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들은 율법이라는 빛을 보고 따라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사단의 회였습니다. 독사의 자식들이었습니다. 예수님 만에 그것을 분별하시고 회칠한 무덤이라고 말씀을 하셨지 어느 누구도 그들이 하는 율법의 의를 보면서 잘못되었다고 책망을 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책망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이미 커다란 사단의 회가 되어서 진리를 가진 자들을 대적하고 또 진리를 외치는 자들을 죽였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눈에는 그들이 흠 없는 율법의 의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을 따라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눈을 뜨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깨어나시기 바랍니다.

교회 나왔다고 눈을 뜬 것이 아니고 깨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스라엘을 통해 배우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었지만 모두가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광야라는 교회에서도 그들의 다수는 하나님을 믿지 않다가 결국 광야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지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복음은 아주 작게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시고 난 후에 지난 2000여 년 동안 교회의 다수는 소수를 핍박하였고 또 그들을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다만 초대 교회만 로마에 의해 핍박을 받았지 나머지 시대는 교회가 복음이 있는 성도들을 죽였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다수를 따라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람의 눈에는 다수가 맞는 것처럼 보입니다. 아니 다수를 따라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다수는 늘 위험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0:5절을 보면

그러나 저희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신 고로 저희가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광야는 교회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신앙인들에게 예표를 삼고 있습니다. 저희의 다수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이라고 다를 것 같습니까? 광야 교회의 다수를 기뻐하시지 않은 것 같이 지금 이 시대도 다수를 기뻐하시지 않고 있습니다.

 

천주교를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이 거의 1500년 동안 다수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종교 개혁이 일어나고 그들의 실체를 보니까 그들은 역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다수였습니다. 내가 다수에 포함이 되어 있다는 것은 그만큼 위험이 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소수의 이단들을 가까이 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다수는 타락의 길을 걸어가고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나는 남은 자가 되어야 합니다.

다수가 되어 그저 목적도 없이 이성도 없이 짐승처럼 끌려가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 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다수의 특징은 늘 눈에 보이는 것을 신뢰를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이 시대는 율법과 복음이 혼재해 있습니다.

한 마디로 정의를 내린다면 영적으로 음행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수는 그것이 음행이라고 생각을 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이 하나님에 대한 열심이라고 생각을 하면서 더욱 깊은 음행의 늪에 빠져 들어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심각한 것은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자기가 행하고 있는 율법이 그리고 행위가 자기 영혼에게 얼마나 해가 되고 있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도리어 더욱 열심을 내면서 마치 그렇게 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신앙적으로 열심을 내고 있는 그 열심이 얼마나 해가 될 것을 모르고 깊은 음행에 빠져 들어가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누구입니까?

그가 어떠한 삶을 살았다는 것을 모르지 않을 것입니다.

이 시대도 사도 바울과 같은 삶을 살기 위해서 낮 설고 물 설은 외국 땅에 나가서 선교의 사명을 감당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방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자기 목숨까지도 아까워하지 않는 사람이 바로 사도바울입니다

 

빌립보서 3:4-6절을 보면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니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내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사도 바울은 육체를 신뢰할 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요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고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선민으로서 전혀 부족하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다 해로 여겼다는 말씀입니다

내가 교회의 장로요 권사요 또 한 번도 주일을 빠지지 않았고 십일조를 한 번도 떼어 먹지 않았고 내 평생에 신앙에서 벗어난 적이 없어서 모든 사람으로부터 칭찬을 바고 저 사람은 분명히 천국에 갈 사람이라는 말을 들어도 그것이 다 해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지금 무슨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사도 바울이 자기가 살아온 평생의 모든 삶이 다 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사도 바울이 해로 여기는 그것을 붙잡기 위해 열심에 열심을 내면서 마치 그렇게 하지 않으면 구원을 받지 못할 것으로 마음속에서 생각을 하고 있고 또 그렇게 하지 못하는 사람을 보면서 마음속에서는 정죄를 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말씀을 드립니다.

혹시라도 내 마음에 이러한 생각이 있다면 그 사람은 생각하는 그것으로 망하고 말게 될 것입니다 내가 믿는 그대로 됩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어떻게 믿느냐에 따라 그대로 되어 진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히브리서에서 믿음을 뭐라 말씀을 합니까?

보이지 않는 것의 실상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보이지 않는 것을 내가 믿는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뜻입니다 내가 이런 행위가 필요하다고 하면 그렇게 되어 지고 또 오직 믿음으로 된다고 믿으면 믿는 그대로 되어 진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행위를 자랑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살아가는데 있어서는 유익이 될지 몰라도 내 영혼이 구원을 받는데 있어서는 오히려 해가 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해야 하지만 그 신앙생활이 오히려 자기 영혼에 있어서는 해가 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내가 이웃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오히려 내 영혼에는 해가 되어 돌아오게 됩니다.

제가 이웃을 사랑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보다 더 이웃을 사랑해야 하지만 그래서 흠이 없어 칭찬을 받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지만 그것이 내 영혼에 해가 되어 돌아 올 수 있다는 것을 모르면 차라리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아니 어쩌면 내가 할 수 없는 처지에 있는 것이 도리어 내 영혼에 축복이 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을 때 스스로에게는 얼마나 유익했겠습니까? 유익했기 때문에 예수를 만나기 전에는 바리새인으로서 촉망을 받고 칭찬을 받는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의롭다 함을 인정받고 또 사람들로부터 신임을 얻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을 잘 해보시기 바랍니다.

모든 예배에 빠지지 않고 매일 시간을 정해 놓고 기도를 하고 교회에 나가 봉사도 하고 헌신도 하고 사회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볼보고 하는 이 모든 일이 사도 바울과 같이 자기 육체로는 유익이 될 수 있어도 영혼 구원을 얻는데 있어서는 해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만 율법이라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지금 이 시대에 하고 있는 모든 신앙생활도 보이지 않는 율법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그는 이스라엘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습니다. 자기는 유익하다고 열심을 내고 있지만 그 열심이 그리스도를 얻는데 있어서 해가 된다면 그것처럼 불행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가장 슬픈 일입니다

그래서 주여, 주여 하면서 선지자 노릇을 하고 신앙생활을 열심히 한 그들이 밖에 쫓겨나 슬피 울며 이를 가는 일이 있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할 때는 자기에게 유익이 되어 모든 칭찬을 받고 있었는데 자기 영혼에는 해가 되어 돌아와서 멸망의 길로 빠지고 맙니다.

 

시대를 분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영적으로 깨어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지금은 율법이 있는 구약을 살아가고 있는 때가 아니라 율법에 폐해진 성령의 감동을 받고 살아가는 시대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율법과 싸우고 있고 행위로 칭찬을 받기 위해서 그것이 또 유익이 되고 있다면 그는 영적으로 지각이 깨어 있지 못한 사람입니다.

 

내 육체에 유익이 되고 있는 그것이 내 영혼에 해가 됩니다.

제가 아무 것도 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니라 성도는 복음을 전해야 하는 사명이 있기 때문에 이 세상 사람들보다 더 선하고 의롭게 살아야 하는 것에는 더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율법이 없으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 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사도바울은 흠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가 어떻게 살았는가를 제가 말씀을 드리지 않아도 너무 잘 알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렇게 산 그것조차도 해로 여긴다는 말씀입니다 이방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때로는 강도를 당하기도 하고 배고픔과 추위와 싸워야 했고 또 동족으로부터 고소를 당해 옥에 갇히기도 했습니다.

 

사도바울은 모든 성도의 이상입니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산 그 모든 것을 해로 여긴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방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그리고 결국 순교의 제물이 되어서 죽는 그것까지도 사도 바울은 해로 여겼습니다. 정말 철저할 정도로 자기의 의를 드러내지 않기 위해서 사도바울이 고민을 하고 그것 때문에 어떻게 해야 하는 가를 깨닫기 위해 성령의 감동을 받기 까지 생각을 깊이 했던 것을 서신서 전체에 그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해로 여겨야 합니다.

여러분이 하고 있는 모든 행위가 다 해가 된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가는 결국 버림을 받게 되고 말 것입니다. 이 싸움에서 지는 사람은 절대로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오히려 그 해가 되는 그것을 얻기 위해서 눈물을 흘리며 기도를 하고 있고 아무리 힘이 들어도 기꺼이 감당을 하고 있습니다.

 

참 아이러니컬합니다.

자기를 죽이는 해가 되는 그것을 얻기 위해서 더 노력을 하고 있는 그 사람들을 보면 볼수록 안타까움을 금치 못하게 됩니다. 여러분이 행하고 있는 신앙적인 모든 행위는 여러분의 육체에는 유익을 줄 수 있어도 영혼에 있어서는 해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기 바랍니다.

 

물론 해가 되는 것을 안 할 수는 없습니다.

저도 해가 되고 있지만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해가 되는 것을 누구보다 열심을 다해 하고 있지만 그것보다 그리스도를 알기 위해 제 모든 것에 집중을 하고 있습니다.

 

내 행위는 해가 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얻기 위해 예배를 하는 것은 너무도 고상한 일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예수를 알기 위해서 그 고상한 것을 찾기 보다는 해가 되는 것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성경공부를 합니다.

그런데 그 성경공부가 예수를 아는 성경공부가 아니라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가 어떻게 행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가르치고 있고 그것은 결국 해가 되는 것을 가르치는 일입니다 내가 행위를 배우고 있는가 아니면 예수를 배우고 있는가 하는 것은 너무도 중요한 일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무엇을 배우고 있는지 조차 모르고 있습니다.

 

행위를 배우면 해가 되고 예수를 배우면 내 영혼이 구원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행위를 배우고 있고 그것을 자랑하면서 그것이 마치 예수를 배우는 것으로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특히 전도 왕이라고 간증 집회를 하는 것이 얼마나 자기에게 해가 된다는 사실을 모르고 어두움의 일에 참여하고 있음에도 그것을 아주 자랑스럽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어떻게 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서 자기 이방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수고한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때로는 눈물을 흘리고 정말 어떤 곳에서는 사도 바울을 천사와 같이 대했을 정도로 완전한 삶을 살았지만 그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고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절대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잃어버릴까봐 또 누가 안 알아줄까봐 서운해 하고 있고 칭찬을 받기 위해서 자기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해가 되는 그것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손에서 놓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자기가 행한 모든 수고를 어떻게 했느냐면 배설물과 같이 버렸습니다.

 

내가 한 모든 행위는 배설물입니다

사도 바울이 한 행위도 배설물이고 내가 한 의롭고 선한 행위도 모두다 배설물입니다 그것을 모르는 사람은 복음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것을 버리는 사람만이 그리스도를 얻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배설물을 오히려 자랑스럽게 생각을 하고 심지어는 간증 집회를 하고 다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자기를 발견하기 위해서 자기가 한 모든 수고를 배설물과 같이 버렸습니다. 그렇지 않고는 자기 영혼이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이 문제에 대해서 누구보다 고심을 했던 것을 보게 됩니다. 바로 이 빌립보서도 사도바울의 그런 심정이 그대로 나타나 있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나를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나를 발견하려면 내가 가니 모든 의와 선한 행실 그리고 모든 신앙생활을 한 행위를 다 잃어버려야 합니다. 아니 배설물과 같이 버려야 합니다. 그렇게 버리는 사람만이 사도 바울과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단도직입적으로 말씀을 합니다.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라고 분명하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 얼마나 많은 율법이 교회 안에서 성행을 하고 있는 가 냉정하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아직도 구약의 절기를 지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율법에 속해 있는 것을 너무도 많이 행하고 있습니다.

자기들은 그것이 믿음이라고 말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말인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이스라엘도 자기들이 율법을 지킬 때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하면서 지켰습니다. 이것은 꼭 해야 한다고 하는 그것이 있다면 그것이 믿음으로 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율법입니다

 

삼가 지키는 것이 법입니다

지금 교회 안에서 삼가 지키고 있는 것이 얼마나 많이 있는 가를 냉정하게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삼가 지키고 있는 그것을 지각이 없는 교회 안에 있는 다수는 믿음이라고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무엇인가를 모르기 때문에 자기가 삼가 지키고 있는 그것을 보면서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삼가 지킨다는 것은 꼭 지킨다는 것입니다

제가 일일이 말씀을 안 드려도 교회 안에서 삼가 지키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쉽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말씀을 드려도 모른다면 여러분은 결국 율법주의에 미혹이 되어 이스라엘과 같이 버림을 받게 될 것입니다

 

내 행위는 다 해가 됩니다.

아주 가슴 속 깊이 새겨 두시기 바랍니다.

아니 한 시라도 그 사실을 잊어버리는 순간 그리스도의 의를 얻을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하고 또 명심해서 절대로 내 생각에서 떠나지 않게 하시기 바랍니다.

 

내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닙니다.

이 율법은 내가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행한 모든 선하고 의로운 행위들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의 의는 이것에서 난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오직 믿음입니다.

이 믿음은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라고 갈라디아서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 다수의 사람들은 자기 행위를 보면서 믿음으로 행한다고 어법에 맞지 않는 이상한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행위와 믿음은 서로 다른 것이라고 사도 바울은 분명히 말씀을 하고 있는데도 자기 행위가 믿음으로 하고 있다고 이상한 주장을 합니다.

 

신약은 법과의 싸움이 아닙니다.

그 법은 이미 2천 년 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모두 폐해버렸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그 법과 싸우고 있다면 그는 예수를 믿는 사람이 아니라 이스라엘과 같이 구약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제는 내 의와 예수 그리스도의 싸움입니다.

선하고 의롭게 살아야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서 그 안에서 나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내가 행한 모든 선하고 의로운 일을 잃어버리고 또 그것을 배설물과 같이 버려야 합니다. 그렇게 행하는 성도만이 그 영혼이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