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니라(요6:63.)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약속이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

은혜와 진리의 말씀

39강, 성경을 기록한 목적

윤주만목사 2019. 5. 9. 06:52


39, 성경을 기록한 목적

 

요한복음 20:31절을 보면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약 1400여 년 동안에 40명 이상의 저자를 통해 성경을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이 성경이 수 천 년 동안 그대로 보존되어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 있습니다. 물론 성경을 이렇게 쉽게 구할 수 있고 볼 수 있는 시대는 불과 100여년 정도 밖에는 되지 않았습니다. 인쇄술이 발달을 했다 해도 서민들까지 성경을 보기에는 무리가 있었습니다.

 

또한 중세 시대에는 일반 사람들은 성경을 가질 수 있는 경제적 여력이 있어도 법으로 금했기 때문에 개인적으로는 성경을 볼 수 없었습니다. 지금 이 시대를 사는 사람들은 많은 축복을 받았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모든 사람들이 쉽게 볼 수 있는 시대가 되었지만 오히려 교회는 더 타락을 하고 있습니다.

 

일반 성도들이 볼 수 있는데도 성경 지식에 대해서는 거의 무지에 가깝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 이유는 물론 타락한 목회자들의 책임도 있지만 성경 말씀을 사모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많이 읽고 있지만 그 안에 있는 복음의 비밀을 사모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그저 문자적으로만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참으로 오묘합니다.

한 구절의 말씀을 해석하는데 있어 문자적으로도 해석이 가능하고 영적으로도 해석이 가능합니다. 세상 어느 책도 이렇게 기록이 된 것이 없습니다. 그 만큼 하나님의 말씀은 신비롭기 까지 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나 너무도 안타까운 것은 성경을 너무 쉽게 해석을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대할 때 모든 가능성을 열어 두어야 합니다.

문자에 집착하거나 아니면 영적인 해석에 집착을 하거나 또 구속사적인 관점에 집착을 하게 되면 그 순간부터 다른 해석은 보이지 않게 됩니다. 이 모든 가능성을 열어 두고 해석을 해서 그 답이 분명히 나와야 합니다.

 

양면성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왜 그런 말을 하냐면 성경이 문자적으로도 해석이 되고 영적으로도 해석이 되기 때문에 사람들은 양면성이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만약 양면성이 있다면 우리는 성경을 볼 필요도 없습니다. 어느 해석을 보고 그것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성경의 답은 하나입니다

만약 답이 두 개라면 아니 그 이상의 답이 나온다면 우리는 천국에 갈 수도 없고 하나님을 바로 믿을 수도 없습니다. 물론 양면성이 있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나 구원에 관한 말씀은 절대로 양면성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일반 삶에 대한 것은 시대에 따라 기록한 저자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생을 얻는 그 문제에 관해서만은 절대로 양면성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을 기록한 목적은 사람이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영생을 얻는데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그것은 오직 믿음으로 가능한 일입니다 영생에 대한 말을 하면서 오직 믿음이 아닌 다른 것을 포함 시키려 하는 자체가 이단적인 사상이고 양면성을 주장하는 다른 복음에 미혹된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믿음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믿음이 무엇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수많은 사람들과 선지자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섭리하시고 역사하신 것입니다 이 세상 모든 종교와 그에 따르는 경전들은 모두 행위를 강조하는 책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다릅니다.

성경은 우리가 행위로는 완전할 수 없기 때문에 대신 완전할 수 있는 믿음의 방법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조금 더 선한 가 악한 가를 논하는 자체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완전하신 분이기 때문에 조금 더 선하다는 것으로 인정을 받을 수 없습니다.

 

요한계시록7:9절을 보면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작은 얼룩이라도 있으면 안 됩니다

아니 점과 흠이 있으면 흰 옷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흰 옷이라고 하니까 우리 눈으로 대충 보고 하얗다는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이 흰 옷은 마치 새 것과 같이 아주 작은 점도 있어서는 안 됩니다

 

내 양심에 비추어 보세요.

정말 내 마음과 행위가 하얀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누가 보아도 티나 흠을 잡을 만한 것이 없다면 그 사람은 희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그렇게 흰 사람이 없습니다. 내 눈에 보기에는 그가 선하게 보인다 해도 그 역시도 더럽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 흰 옷은 행위의 옷이 아닙니다.

내가 입을 수 있는 옷이 아니라 입혀 주어야 입을 수 있는 옷입니다 내가 노력해서는 하늘에 갈 수 있는 흰 옷을 입을 수 없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자체가 이단적인 사상이고 복음을 거절하고 있는 행위입니다 성경은 이 흰 옷을 입는 방법에 대해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바로 그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이 아니고는 그 어떤 방법으로도 하나님 앞에 갈 수 있는 흰 옷을 입을 수 없습니다. 만약 그 흰 옷을 입는데 믿음이 아닌 다른 것이 포함이 된다면 그것은 모두 다른 복음이며 거짓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직 믿음이 아니고는 어느 누구도 이 흰 옷을 입을 수 없습니다.

 

조금 하얗게 보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 마음과 폐부까지도 감찰을 하십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설 때에는 내 평생의 모든 살아온 삶이 마치 파노라마처럼 펼쳐져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께서 입혀 주시는 이 옷이 아니고는 감히 어느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고개를 들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성경을 기록한 목적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기 위해서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기록을 하시고 그것을 보는 사람들이 아! 이래서 예수를 믿어야 하는 구나하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기록했습니다.

 

예수를 기록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문자에 집착하다가 예수를 못 보고 있습니다. 성경을 해석하면 그 답이 예수가 나와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아! 이래서 우리가 예수를 믿어야 하는 구나하는 답이 나와야 성경을 바로 해석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을 수 있게 해야 그 해석이 바르다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나와야 합니다.

나를 구원하시는 메시야로 답이 나와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을 보고도 해석을 하는데 그 답이 나오지 않는다면 그는 성경을 잘못 해석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구약을 율법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구약에 율법을 기록했습니까? 예수를 기록했습니까?

 

요한복음5:39절을 보면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 하는 것이로다

 

모든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기록한 말씀입니다

성경을 보면서 율법이 보이면 아직 내 눈이 가려져 있다는 증거입니다 구약을 보면서도 예수가 나와야 내 영적인 눈이 떠져 있고 영생에 대해서 사모를 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구약을 보면서 율법을 보고 있습니다.

 

율법은 아주 작은 부분입니다.

또 그 율법을 기록한 것은 그것을 보고 자기 죄를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죄 사함을 받으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율법을 보고 그것을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아니 자기들이 지키는 어느 특정한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마치 영생을 못 얻을 것처럼 은근히 겁박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과 예수는 두 남편입니다

생명을 얻는 방법은 율법은 항상 다 지키든지 아니며 예수를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얻어 내가 의로운 사람이 되든지 이 두 가지 방법 밖에는 없습니다. 이 둘을 함께 섬기면 음행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예수를 믿든지 아니면 모든 율법을 항상 다 지키든지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합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자기 스스로는 하나님 앞에서 흰 옷을 입고 나갈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의 의를 얻어 흰 옷을 입고 하나님께 담대하게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직 믿음으로 가능한 일입니다

 

이것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 성경을 기록하셨습니다.

구약 전체는 오실 예수를 그림자로 기록해 놓아서 그것을 신약을 통해 우리가 구약을 해석할 수 있는 것입니다 구약은 그림자이고 신약은 실체 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눈앞에 보이신 것입니다 무슨 말씀이냐면 이스라엘은 실체를 못 보았기 때문에 구약을 보면서도 깨닫지를 못했습니다.

 

양을 잡아서 번제 단에 제사를 드리면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실체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번제 단을 보고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쉽게 말씀을 드리면 100년 전에 사람에게 지금 우리가 일상으로 사용하고 있는 휴대폰의 그림자를 보인다면 도무지 무엇인가를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림자를 보고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실체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구약은 바로 그런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구약을 보면서 그대로 해석을 하고 받아들인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구약 사람들에게 휴대폰의 그림자를 보인다면 자기들 마음대로 생각하고 그것을 자기 마음대로 칭할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이스라엘은 양을 잡아서 드리는 것에 집착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온전케 할 수 없는 양을 잡아서 드리면서 자기 죄가 사해 질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실체를 보고 있는 우리는 어떻습니까? 그런 제사로는 온전케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그것을 폐해 버리고 온전케 할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실체가 보였습니다.

그러면 이제 그 실체를 믿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실체를 보고서도 아직 그림자를 따라가며 헤매고 있습니다. 그림자를 분별하지 못하고 아직도 이스라엘과 같이 아니 이스라엘도 이제는 하지 않는 것을 지금 이 시대 기독교인들이 하고 있습니다.

 

성막은 그림자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이 성전 된 것을 그림자로 보여 주셨습니다. 또한 절기는 그림자입니다 그런 절기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구속을 이루실까 하는 것을 실체를 보고 알았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그림자를 보며 그것을 그대로 행하고 있습니다.

 

믿음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첫 열매가 되셔서 하나님께 드리신 맥추절을 우리가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되는데 그것을 육체적으로 지키고 있습니다.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셔서 우리에게 소망을 주신 것을 이제 실체로 보았는데도 그것을 믿으려 하지는 않고 맥추절을 지키고 있습니다.

 

맥추절을 지키는 것은 그림자입니다

마치 휴대폰의 그림자를 보면서 그것을 마치 신비한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자기 마음에 정성을 다 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는 것입니다 맥추절을 통해서 첫 열매로 드려진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는 것을 가르쳐 준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맥추절을 구약의 제사 제도가 다 폐해진 이 시대에 지키고 있습니다.

 

예수를 안 믿겠다는 것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우리 눈으로 실체가 드려진 것을 보았는데도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셔서 하나님께 드려진 것을 신약 성경을 통해서 뻔히 보고도 아직도 그림자를 보고 정성껏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없으면 행위를 따라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림자를 본 이스라엘은 예수를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지금도 그림자를 행하고 있다면 예수를 믿는다 하고 있지만 실제는 그에게 온전한 믿음이 없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과 다를 것이 무엇입니까? 이미 하나님 앞에 첫 열매가 드려져서 마침이 되었는데도 아직도 첫 열매를 드리는 의식을 행하고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부정하는 것과 다를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시기 바랍니다.

 

갈라디아서2:16절을 보면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내가 흰 옷을 입는 것은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예배도, 절기를 지키는 것도, 내 입술로 찬양을 하는 것도, 기도를 하는 것도, 내 몸으로 내 이웃을 사랑하는 것도, 모두 행위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마음으로 믿는 것이고 행위는 내 몸으로 나타나는 모든 것이 행위입니다

 

제가 예배도 드리지 말고 찬양도 부르지 말고 기도도 하지 말라고 지금 이 말씀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직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우리는 그런 행위들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행위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내가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분명히 분별할 수 있는 성령의 감동을 받아야 합니다.

 

행위와 믿음은 동전의 양면입니다

물론 믿음이 좋은 사람도 행위가 좋을 수 있고 믿음이 좋은 사람이 행위가 나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행위를 따라고 있는 사람과 믿음을 따라가고 있는 사람은 그 본질이 다르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믿음을 따르는 성도는 행위를 강조하지 않지만 행위를 따르는 사람은 행위를 강조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 성경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해탈의 경지에 오르는 종교가 아닙니다. 그것은 세상 종교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는 이유는 이 세상에서 얼마나 선하고 의롭게 살아가기 위해서 보는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그리스도이심을 믿기 위해서 보는 것입니다

 

또 너희로 믿고...

예수를 믿으라는 말씀입니다

믿는 것은 종교적인 행위와 다른 것입니다 불교를 믿고 천주교를 믿고 기독교를 믿고 할 때 이 믿는 것은 종교적인 행위입니다 우리가 믿는 것은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세상 어느 종교도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는 종교가 없습니다.

 

왜 믿어야 합니까?

 

요한복음11:25절을 보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예수님은 부활이요 생명이십니다.

그 예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아니고는 불가능 합니다. 내가 영원히 죽지 아니하려면 반드시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어야 합니다. 나를 구원하시는 메시야로 믿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생명을 얻을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물론 율법을 항상 다 지키면 되지만 이 세상에는 율법을 다 지킨 의인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불가능 합니다. 그런데도 성경을 보면서 믿으려 하지는 않고 무엇을 어떻게 행할까를 고민하고 있습니다.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는 아주 쉬운 방법이 있는데도 믿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믿지를 못하기 때문에 행위를 집착하는 것입니다

믿지 못하기 때문에 무언가 찜찜하고 불안하기 때문에 혹시 이러다가 천국에 가지 못하는 것 아니가 하는 마음 때문에 행위에 집착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 행위가 조금 좋아지면 안심을 하다가 또 죄가 보이면 불안해서 안절부절못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3:12절을 보면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감을 얻느니라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나에게 온전한 믿음이 있으면 담대합니다. 불안할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믿음이 없고 자기 행위를 보기 때문에 무언가 모르게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어 있습니다.

 

믿음을 아는 성도는 담대합니다.

설령 내가 한편 강도가 되어 있을지라도 주님께서 나를 생각하고 있으면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믿고 있습니다. 왜 담대하냐면 이 세상 죄를 예수님께서 모두 지고 가셨기 때문에 내 죄를 보는 것이 아니라 내 죄를 지고 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온전하게 믿지를 못하기 때문에 불안 합니다

 

내가 무엇인가를 해야 안심을 합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는 성도는 내가 하나님께 해야 할 모든 일과 또 세상에서 해야 하는 모든 일을 예수님께서 단번 제사로 다 드리셨다는 것을 믿기 때문에 평강을 누릴 수 있습니다. 내가 해야 하는 것이 남아 있다면 늘 그것을 해야 하기 때문에 불안 하지만 내가 해야 할 것이 없다면 편안 한 것입니다

 

아이들이 숙제가 없으면 얼마나 즐거워합니까?

그러나 숙제가 있으면 그 숙제를 해야 하기 때문에 그것을 다 하기 까지는 마음이 평안할 수 없습니다. 행위라는 숙제가 남아 있는 사람은 그 숙제를 죽을 때 까지 해야 하기 때문에 예수를 믿는다 하면서도 성령 안에서 평강과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서 믿음을 배우세요.

아브라함이 무엇을 했고 이삭이 무엇을 했고 야곱이 무엇을 했고 하는 행위를 배우지 마시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에게 야곱에게 어떻게 믿음을 주셨는가를 배우시기 바랍니다. 그것을 위해 아브라함을 이삭을 야곱을 기록한 것이지 그들이 우리 보다 더 월등하고 행위가 뛰어 나서 기록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성도의 믿음이란 무엇인가 바로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생명을 얻는데 있어서 반드시 그 이름을 힘입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성도의 믿음이라는 말씀입니다

 

그 이름의 뜻이 무엇입니까?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입니다 나를 구원해 주실 분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믿으라는 말씀입니다 나를 구원해 주실 분입니다 내가 구원을 얻는데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에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구원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 이름이 힘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믿음이 아니고는 불가능 합니다. 믿지 않고는 믿음이 무엇이라는 것을 모르고는 그 이름을 힘입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 죄를 다 지고 가셨으면 뭐 합니까? 내가 죄를 안 지려고 노력하는 것은 예수 이름을 힘입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 죄에 내 죄도 포함이 되어서 다 지고 가셨다는 것을 믿는 것이 바로 그 이름을 힘입는 것입니다 예수가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리시고 또 흠도 점도 없이 의롭게 사시고 내가 해야 하는 모든 일들을 다 지고 가셨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단순히 예수님이 하신 것으로 끝나면 그 이름을 힘입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것이 내가 한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내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오히려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던 자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고 나니까 자기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것을 믿을 수 있었습니다.

 

오직 믿음입니다.

여기에 어떤 행위를 포함시키고자 하는 모든 것은 다 다른 복음이며 이단적인 사상입니다 성경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기 위함이며 또 우리로 믿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성경을 기록했습니다.

 

신앙적인 행위와 믿음을 혼동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거듭 말씀 드리지만 내 신앙적인 모든 일들은 행위며 믿음은 내 마음에 있습니다. 그것을 분별하지 못하면 결국 이스라엘과 같이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행위에 의지하다가 버림을 받게 됩니다. 이스라엘이 버림을 당한 것은 신앙적인 행위가 나빠서가 아니라 그들의 마음에 믿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니 믿음이 무엇인가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나에게 믿음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는 것이며 내 마음에 있는 것입니다 이 믿음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는 성도가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