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니라(요6:63.)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약속이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

은혜와 진리의 말씀

54강,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윤주만목사 2019. 5. 16. 06:46


54,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유다서 1:3-4절을 보면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우리의 일반으로 얻은 구원을 들어 너희에게 편지하려는 뜻이 간절하던 차에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너희를 권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노니 이는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음이라 저희는 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니 경건치 아니하여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색욕거리로 바꾸고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니라

 

기독교는 믿음의 종교입니다

성경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 믿음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성경을 기록하셨고 그 성경을 보면서 성도는 믿음을 얻게 됩니다.

 

믿음에 대한 오해가 너무 많습니다.

아니 솔직히 말씀을 드려서 믿음에 대한 오해의 벽을 깬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다는 것을 저는 많이 느낍니다. 자기가 행하는 것이 믿음인지 아니면 그것이 행위인지 조차 분별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지금 교회에 나온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오해를 하면 안 됩니다

다른 것은 다 오해를 해도 괜찮지만 믿음에 대한 것을 오해하는 순간 자기 영혼은 사망으로 끌려 내려간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말씀을 하시는데도 이 믿음에 대해서 오해를 하고 있다는 것은 자기 생명을 포기하는 것과 같습니다.

 

믿음으로 십일조를 드립니까?

아마 교회에 나온 거의 모든 사람은 그렇게 대답을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것은 믿음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믿음에 대해서 바로 안다면 그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렸지만 예수님께서 그들은 믿음이 없어 멸망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안 믿었습니까?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했지만 자기들이 드리는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가 행위라는 것을 몰랐고 그것을 믿음으로 오해를 했기 때문에 더욱 더 행위에 대해 열심을 내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하는 우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그것이 믿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면 그들은 절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기들이 지키는 율법이 믿음이 아니라 행위라는 것을 알았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행위와 믿음을 분별하지 못한 이스라엘은 자기들을 구원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예수를 죽이고 말았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교회 안에서 행하는 일들을 분별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이스라엘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행위를 보고 그 믿음을 판단하고 있습니다. 행위와 믿음과는 전혀 다른 본질의 것인데도 행위와 믿음을 어떻게 하든지 연결을 시키고자 노력을 합니다.

 

행위 : 사람이 의지를 가지고 하는 짓.

믿음 : 어떤 사실이나 사람을 믿는 마음.

행위와 믿음의 사전적인 뜻입니다 두 단어의 사전적인 뜻을 보아도 쉽게 이 둘은 하나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행위는 쉽게 말씀을 드리면 자기가 의지를 가지고 자기가 행하는 어떤 행동을 행위라고 합니다. 그리고 믿음은 어떤 사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창세기부터 행해오신 사실과 그를 믿는 마음입니다

 

행위는 내 쪽에 있는 것이고

믿음은 내 쪽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상대에게 있는 것을 내가 마음으로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내 몸으로 하는 모든 것은 행위고 상대가 한 행위나 사실을 내가 마음으로 믿는 것은 믿음입니다. 가장 문제는 성경을 보면서 국어적인 뜻을 전혀 이해하려고 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개역성경은 검증이 된 성경입니다

히브리어 헬라어와 검증을 해서 그 번역이 거의 완전하게 되어 있는 성경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 성경을 보면서 우리는 국어를 바로 이해를 해야 성경을 오해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래도 십일조를 믿음으로 한다고 주장을 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믿음으로 한 것이 아니라 내 마음에 의해 자의적으로 한 행위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만약 십일조를 예수님이 하셨다면 그것은 믿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한 이상 그것은 믿음이 될 수 없으며 그것을 믿음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한 마디로 국어의 뜻도 모르고 성경말씀을 자기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사람입니다 행위와 믿음이라는 단어의 뜻만 알아도 그런 말을 하지 않을 수 있는데 단어의 뜻을 모르니까 믿음으로 십일조를 드린다는 이상한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립이 될 수 있습니까?

단어의 뜻을 안다면 믿음으로 십일조를 드린다는 말은 참으로 이상한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 말이 된다는 것을 너무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율법주의에 빠져 그 사상에 미혹이 되어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 말이 아주 당연하게 들려지는 것입니다

 

단 한 가지만 보아도 내가 율법주의인가 아닌가를 알 수 있습니다.

자기 자의로 하는 행위를 보면서 그것을 믿음과 연결을 시키려고 하는 생각을 하고 있다면 무조건 율법주의에 빠져 있는 사람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성경 말씀도 그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3:12절을 보면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라 이를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율법은 행위입니다

사도 바울은 분명하게 행위는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라고 정의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자기가 어떤 행위를 하면서 그것을 믿음으로 했다고 주장할 수 있습니까? 그렇게 말하는 것은 믿음에 대해서 아직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도가 이 세상에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가를 제가 설명을 해 드려야 합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아직도 믿음에 대해 초보이며 아직 밥을 먹지 못하고 죽을 먹고 있는 사람입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복음을 전하면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하는 질문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수 십 년을 한 사람이 그런 질문을 한다면 그 사람은 이제까지 교회에 나와서 무엇을 한 것입니까?

 

행위만 열심을 낸 것입니다

믿음을 모르기 때문에 어린아이와 같은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비밀을 아는 성도라면 당연히 내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가를 알 수 있고 아니 솔직히 교회에 안 나온 세상 사람들이라도 자기가 어떻게 이 세상에서 살아가야 하는 가를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수십 년을 교회 다는 사람은 자기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가를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직 믿음입니다.

믿음이 아니고는 어느 누구도 구원을 받을 수 없으며 이 믿음을 행위와 연결시키려 한다면 그는 영적인 죄를 짓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스라엘이 자기들이 행하는 행위를 보고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했지만 그들은 믿음이 무엇인가를 몰랐기 때문에 멸망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우리의 일반으로 얻은 구원을 들어 너희에게 편지하려는 뜻이 간절하던 차에

 

일반이 무엇입니까?

특별하지 아니하고 평범한 수준, 전체에 두루 해당되는 것. 이 바로 일반입니다 내가 무엇을 특별하지 않아도 얻은 것이 바로 일반입니다 모든 사람이 평범하게 다 얻을 수 있는 것이 일반입니다

 

믿음은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왜 특별하지 않은가를 앞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믿음이란 내 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상대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특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실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 사실은 이미 성경에 다 기록을 하셨습니다.

 

그것을 믿는 것이 특별한 것입니까?

사실 믿음이라는 것은 특별한 지식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뛰어난 능력이 있어야 되는 것도 아닙니다. 왜 그러냐면 그것은 내 편에 있는 것이 아니라 믿어야 하는 대상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내 편에 있다면 그것은 일반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이 특별하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얼마나 특별합니까? 어려서부터 고아와 과부를 보살피고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고 안식일을 철저히 지키고 하는 그것을 보니까 특별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감히 고아와 과부가 따라올 수 없는 그리고 세리가 따라올 수 없는 일을 행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자기 믿음이 특별하게 생각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상이 한 것을 믿는다면 특별할 것이 없습니다.

내가 십일조를 내든 못 내든 대상은 똑 같은 일을 했고 십일조를 내는 사람도 못 내는 사람도 대상이 한 일에 대해서는 똑 같이 믿을 수 있기 때문에 믿음은 바로 일반적인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내가 무엇을 해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대상이 무엇을 해서 내가 그 사실을 믿음으로 해서 구원을 얻었기 때문에 이 구원은 모든 사람에게 일반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자기 행위를 보고 구원이 마치 특별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스스로 멸망한 이스라엘을 따라가고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물론 구원은 특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선택하신 것은 아주 특별한 일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어떤 행위를 해서 되어진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인 것이기 때문에 절대로 특별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아주 지극히 일반적인 구원입니다

 

그래야 공평할 것 아닙니까?

만약 구원이 어떤 특별한 행위가 포함이 된다면 그것을 행할 수 없는 고아와 과부는 원천적으로 배제가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지극히 불공평하신 분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되어 진 그 사실을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아주 일반적이 일입니다

 

어렵다고 하는 자체가 이단적인 사상입니다

그러나 이 시대 많은 사람들의 생각 속에는 구원이 일반적인 것이 아니라 아주 어려운 것으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되어지는 이유는 믿음과 행위를 자꾸 혼합을 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라는 확실한 기초위에 자기 믿음의 터를 세우면 결코 어렵지 않을 텐데도 사람들은 자꾸 행위를 썩으려고 하다 보니까 구원이 어렵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율법주의에게는 구원이 어렵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비밀을 아는 성도들에게는 믿음처럼 쉬운 것은 없습니다.

내가 해야 할 일이 있어야 어렵지만 믿음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이루어진 사실에 대해서 내 마음으로 믿기만 하면 되기 때문에 너무도 쉬운 것이 됩니다.

 

성도는 분명히 이 세상에서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내가 가진 복음을 전해야 하기 때문에 내가 함부로 살면 내가 복음을 전해도 그들이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성도가 세상에서 살아가야 하는 삶입니다. 그렇다고 그것이 믿음이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것을 믿음과 연결을 시키려 하기 때문에 오히려 기독교인들이 더 지탄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행위를 요구하는 그들의 행위가 바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성자 같은 사람이라고 해도 실수는 하기 마련이고 그 단한번의 실수는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모든 것을 불신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믿음이 좋으면 행위가 좋다는 말을 하게 되면 결국 자기 스스로 모순에 빠지게 되고 내가 전하는 복음을 세상 사람들이 결코 받아들이지 않게 됩니다.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너희를 권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노니

 

믿음이 좋아집니까?

믿음이 어느 때는 좋아 졌다가 어느 때는 나빠집니까?

그것은 믿음이 무엇인가를 모르는 사람들의 말입니다 그것은 믿음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행위를 보기 때문입니다 자기 행위를 보니까 행위가 조금 좋아지면 믿음이 좋은 것처럼 생각되고 행위가 나빠지면 믿음이 없는 것으로 오해를 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내 편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루어진 사실을 믿는 것이며 대상이 어떻게 행했는가를 믿는 것입니다

내 행위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은 좋아 졌다 나빠졌다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루어진 사실이 좋아 졌다 나빠졌다 하거나 대상이 좋게 행동을 했다 나쁘게 행동을 했다 하면 내 믿음이 좋아 졌다 나빠졌다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조금도 흠이 없는 분이시며 어두움이 거할 수 없는 분이십니다.

그런 분을 믿는데 내 믿음이 좋아졌다 나빠졌다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행위가 좋아졌다 나빠졌다 한다는 뜻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습니다. 지금 그렇게 말하는 것 아닙니까?

 

믿음이 나빠질 수 있습니까?

그렇게 말하는 것은 하나님이 지금 잘못 하고 있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신실하신 분이라고 믿는 사람이 자기 믿음이 요즘 나빠졌다고 말하는 것은 한 마디로 하나님이 요즘 잘 못하고 있다는 말과 똑 같은 것입니다 그럼에도 지금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수시로 믿음이 좋아졌다 나빠졌다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믿는 성도가 믿음이 나빠졌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 말은 하나님 요즘 참 나쁘게 행하고 계시네요. 하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그런 사람을 하나님께서 구원을 하시겠습니까? 자기를 나쁘다고 하는 사람을 구원하시겠습니까?

 

무심코 하는 그 말이 스스로를 멸망가운데로 빠뜨립니다.

믿음의 비밀을 모르기 때문에 그런 말을 아무 거리낌이 없이 자기 입술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 믿음이 나빠졌다고 하는 말은 하나님이 이루신 구속의 경륜이 나쁘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이유가 바로 행위와 믿음을 분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무엇인가를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을 나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단번에 주시는 것입니다

왜 단번에 주는 것인가 하면 성경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루신 사실을 한번 믿으면 그것이 구원을 받을 때 까지 지속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거짓이 없으시고 신실하시기 때문에 내가 그 사실을 알게 되면 단번에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유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너희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힘써 싸우라고 하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교회사를 통해서 보고 또 현재 교회를 보면 알겠지만 이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부정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율법주의 사상 때문입니다

율법주의 입장에서 보면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는 자기들이 사람들을 이용하는데 있어서 방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말씀하는 것과 믿음이 나빠졌다 좋아졌다 할 수 있다는 것과 교인들이 유형의 교회에 충성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이 어느 편이 좋은 가를 생각하면 됩니다.

 

믿음은 구원과 직접 연결이 됩니다.

그렇다는 것을 부정하는 교회가 있다면 그것은 부조건 이단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드러나는 이단이 있는가 하면 구원을 믿음으로 받는다고 하면서도 은근히 행위를 요구하는 교회가 많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결국 적은 누룩이 온 덩이를 퍼지게 만들듯이 아주 작은 행위 하나가 결국 율법주의에 빠지게 되기 때문에 유다는 힘써 싸우라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해 힘써 싸우시기 바랍니다.

내가 믿음에 있는가 아니면 율법주의에 미혹이 되어 있는 가를 분별하려면 이 말씀만 생각해도 됩니다.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내 마음에 가지고 있는 가를 스스로 확증해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어떤 행위를 보고 믿음을 판단하는 말을 하고 있다면 그는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부정하는 사람입니다

 

이는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음이라 저희는 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니 경건치 아니하여

 

사람들이 모릅니다.

왜 모르느냐 하면 가만히 들어왔기 때문에 모릅니다.

남이 모르게 살그머니 들어와서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부정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들은 늘 그래왔듯이 행위와 믿음에 대한 정확한 분별을 하지 못하게 만들어 마치 자기 행위가 믿음인 것으로 오해를 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지금도 모릅니다.

실제 다수의 사람들은 가만히 들어온 자들을 거의 분별을 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들이 진짜 인 것으로 오해를 하고 그들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늘 그래왔듯이 다수를 따라가다가 결국에는 멸망을 당하고 맙니다. 교회 안에 가만히 들어온 자들을 분별하지 못하면 결국 그 교회는 모두 사망의 길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모르니까 당하는 것입니다

언제까지 모르냐면 예수님께서 오실 때까지 모릅니다.

모르다가 자기는 참 믿음을 가지고 있는 줄 알고 있다가 예수님께서 오셔서 그들을 심판 하실 때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가만히 들어왔으니까 속고 있다가 예수님이 오시고 난 후에 자기가 속은 것을 알고 이를 갈며 원망을 해 보지만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여기에 넘어 집니다

사단이 얼마나 지혜롭다는 것조차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은근히 부정하면서 행위를 요구하다가 결국에는 모든 사람들이 행위에 빠지게 만들어 버립니다. 그 행위를 보고 마치 자기가 믿음이 좋은 것으로 착각을 하게 만들어서 주님 오시는 그 날까지 깨닫지 못하게 만듭니다.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색욕거리로 바꾸고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니라

 

은혜를 모릅니다.

그러다 보니까 색을 쫓아가는데 자기가 전혀 색을 쫓는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그것이 하나님에 대한 열심인 것으로 오해를 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은혜는 은혜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러나 가만히 들어온 율법주의자들은 은혜를 자꾸 행위로 갚으라고 요구를 하면서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바로 갈라디아 교회가 가만히 들어온 율법주의자들에 의해 은혜를 색욕거리고 바꾼 교회입니다

 

잠언 6:25-26절을 보면

네 마음에 그 아름다운 색을 탐하지 말며 그 눈꺼풀에 홀리지 말라 음녀로 인하여 사람이 한 조각 떡만 남게 됨이며 음란한 계집은 귀한 생명을 사냥함이니라

 

바로 음녀에게 미혹이 되면 색을 쫓게 되어 있습니다.

두 남편을 좋아한다는 말씀입니다 율법과 복음의 두 남편을 좋아하면서 율법의 아름다운 색을 쫓아가게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율법을 잘 지키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세상 모든 사람은 선하고 의롭게 살고자 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행위에 한번 미혹이 되면 빠져 나올 수 없게 됩니다.

 

나는 아니라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사람 중에 선하고 의롭게 살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더구나 하나님을 믿겠다고 교회에 나온 사람이라면 말을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의 심리를 툭 건드려 주기만 하면 되기 때문에 교회 안에 율법주의가 기승을 부리는 것입니다 믿음의 비밀을 모르면 모두가 율법주의에 빠지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합니다.

어떻게 부인을 합니까? 교회 안에 있는 자들이 감히 예수를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 믿어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부인하면 아마 모두가 그 교회를 떠나갈 것입니다 창세기에서 뱀이 하와를 미혹한 것 같이 직접적으로 부인을 하는 것이 아니라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갖지 못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게 만드는 모든 행위는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행위라는 것을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로 구원을 선물로 받았는데 그 선물의 값을 지불하게 만들고 또 천국에 가기 위해서 어떤 행위를 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마치 그런 행위가 있어야 천국에 갈 수 있는 것처럼 믿음과 행위를 교묘하게 섞어 버리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 것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루신 구속의 사역을 아주 슬며시 바꾸어 버리면 자연스럽게 예수를 부인하는 것과 같은 사상에 빠지게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을 드렸지만 자기 행위를 보고 믿음이 좋아지고 나빠지고 하는 것에 미혹이 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자연스럽게 부인이 되고 만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해 힘써 싸우시기 바랍니다.

지금 한국 교회도 이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강하게 전하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입니다 오히려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전하면 심지어는 이단으로 공격을 받고 있을 정도입니다. 얼마나 교회가 진리에서 멀어졌는가를 아는 척도가 바로 이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가지고 싸우고 있는 가를 생각해 보면 됩니다.

 

이것을 부인하는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단번에 죽으심으로 우리 모든 죄가 사하여 지고 우리가 구원을 받게 된다는 것을 부인하는 것이 바로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이 믿음을 굳세게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붙잡는 성도만이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지 않는 성도며 그런 사람만이 주님께서 오시는 그 날에 구원을 받을 줄 확신합니다. 말씀을 분별해서 구원에 이르는 성도가 되시기를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