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강,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요한계시록 14:8절을 보면
“또 다른 천사 곧 둘째가 그 뒤를 따라 말하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모든 나라를 그 음행으로 인하여 진노의 포도주로 먹이던 자로다 하더라”
성경의 모든 말씀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지금 본문 말씀만을 보고는 도저히 무슨 말씀을 하고 있는 가를 이해하기가 힘이 듭니다. 그러나 이 말씀이 무엇을 뜻하고 있는 가를 성경을 통해서 이해를 하게 되면 답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사람들은 늘 똑 같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진노를 받을 일을 똑 같이 행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가장 오해를 하고 있는 것이 마치 자기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일을 하지 않고 또 그런 일에서 마치 자유로운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나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물론 어느 실수는 다시는 안 할 수도 있습니다.
술을 즐겨 먹던 사람이 신앙생활을 하고 난 후에 은혜를 받고서 금주를 선언하고 다시는 입에 술을 대지 않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술을 끊은 그 사람도 다른 부분에 있어서는 역시 똑 같은 실수를 되풀이 하고 있습니다.
술을 끊은 것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물론 그 자체로만 해도 그 사람의 의지가 얼마나 대단하고 또 그런 일을 한다는 것은 참으로 대단한 일임에 틀림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술을 끊은 그 사람이 모든 면에서 완전하냐 하면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누가 자신 있게 실수를 되풀이 하지 않는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이스라엘을 보시기 바랍니다.
사사기만 읽어 보아도 우리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될 일을 이스라엘이 되풀이 하면서 죄악을 범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사를 세우셨을 때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 같다가도 사사가 죽고 나면 또 이방신을 섬기고 타락을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기독교 역사를 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특별한 사람을 세워서 복음을 바로 전파를 하게 하면 아주 잠시 후면 교회는 어김없이 타락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개인도 마찬가지고 교회도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붙들어 주시지 않으면 어김없이 타락의 길로 접어들어 가는 것을 성경을 통해 깨달을 수 있습니다.
나를 보면 압니다.
늘 후회를 하고 사는 것이 바로 인생입니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별로 잘못한 것이 없게 보이지만 내 양심에 비추어 보면 역시 똑 같은 실수를 되풀이 하고 살아가고 있는 내 자신을 보면 모든 사람 역시 똑 같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인생은 다 같습니다.
어느 한 단면에서 볼 때 분명히 실수를 되풀이 하지 않는 것 같이 보일지라도 그 사람의 모든 면을 살펴보면 그 역시도 실수를 되풀이 하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술을 끊은 그것 하나만을 생각하면서 마치 자기가 실수를 되풀이 하지 않는 것으로 주장을 한다면 또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말한 다면 그 사람은 아직 복음이 없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안 됩니다
왜 안 되냐면 우리 육신은 연약하기 때문에 안 됩니다
진토와 같이 바람이 불면 흩어져 버리고 비가 내리면 무너져 버리는 체질을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에 우리는 안 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것을 인정하지 못하면 그 다음부터는 자유 할 수 없고 신앙생활 자체가 힘이 들기 시작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오히려 더 구속을 당하고 있습니다. 구속당하는 이유가 자기 존재를 모르고 또 가식적인 삶을 살고 있기 때문에 더욱 구속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실수를 한다면 간단합니다.
그러나 실수를 안 한다고 하면 그 다음부터는 힘이 들어 집니다.
실제 매일 반복을 하면서 죄를 짓고 있는데 반복해서 죄를 안 질 수 있다고 하면 반복해서 죄를 짓고 살아가는 그 사람은 마음에 가책을 받게 되고 또 스스로 정죄에 빠지게 되어 있습니다.
가식이 문제입니다
그것을 포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집에서 강아지를 기르는데 그 강아지가 너무도 영특해서 만약 사람과 같이 행동을 한다면 강아지가 귀여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거부감이 들 수 있습니다. 강아지는 실수도 하고 또 내가 보기에 무언가 부족해 보여야 예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강아지입니다
그런 강아지를 보면서 사랑들은 더 사랑을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만약 강아지가 대 소변을 화장실에서 보고 자기가 먹는 밥도 알아서 챙겨 먹고 목욕도 자기 스스로 한다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강아지가 아니라 오히려 징그러운 존재가 되고 말 것입니다
사람도 사람다워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사람답기를 거절하고 있습니다.
교회에 있는 사람들을 보면 자기가 사람이라는 것을 잊은 듯 하고 마치 신이 되려고 하는 것 같이 행동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 행동들이 지나친 가식에서 나온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물론 바르게 사는 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으로서 당연히 도리를 행하면서 사는 것이 왜 나쁘겠습니까? 그 자체를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포장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능력도 안 되는 사람이 어떤 일을 과하게 하려다 보면 그것이 오히려 가식으로 보여 진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거룩한 모습 참 좋습니다.
그러나 그 거룩한 모습 때문에 이스라엘은 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들이 왜 그렇게 거룩한 모습을 추구했느냐 하면 하나님을 조금이라도 더 잘 섬기고자 하는 마음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들을 가식이라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지금 이 시대는 가식이 넘쳐 나고 있지만 오히려 이스라엘은 진정성을 가지고 거룩한 모습을 보이고자 노력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올무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들이 어떤 마음을 가지고 했든지 연약한 자기들을 포장하는 수단이 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진실 된 마음을 가지고 했지만 그것이 오히려 가식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 인생들을 하나님께서는 가장 싫어하십니다.
왜 싫어하는가 하면 한 가지를 포장하게 되면 또 다른 것을 포장하게 되고 그러다 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 그것에 깊이 빠져 버리고 마는 것이 바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잘 섬기고자 율법을 지켰지만 그것으로 인하여 은혜를 거절하는 우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하나의 행동이 발전을 하다 보니까 그런 엄청난 일을 하고 만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내가 하나님을 잘 섬기고자 하는 그 행위가 이스라엘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역시 이스라엘과 같이 똑 같은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바벨론이 그랬습니다.
또 이스라엘이 역시 똑 같이 그랬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바벨론의 실수를 그리고 이스라엘의 실수를 성경으로 기록해 놓았지만 이 시대도 역시 그들과 똑 같은 실수를 되풀이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다르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제가 보는 이 시대의 세계 교회를 보면 역시 바벨론의 전철을 그리고 이스라엘의 전철을 그대로 답습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실수를 한 것을 성경에 기록을 해 놓았는데 이제는 그런 실수를 다시 하지 않아야 함에도 역시 그들과 같은 길을 걸어가고 있는 교회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또 다른 천사 곧 둘째가 그 뒤를 따라 말하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무너졌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바벨탑을 쌓고 있습니다.
바벨탑을 쌓고 있는 그 시대에 하나님께서 강림하셔서 바벨탑을 무너뜨리고 또 이스라엘이 쌓고 있던 바벨탑을 주님께서 십자가로 무너뜨렸지만 역시 지금 이 시대 똑 같은 바벨탑을 쌓고 있습니다.
자기가 쌓고 있는 바벨탑이 무엇인가를 모릅니다.
바벨탑을 열심히 쌓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믿음이라고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율법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이라고 착각을 한 것같이 이 시대도 역시 자기들의 생각으로 하나님으로 섬기려 하면서 또 다른 바벨탑을 쌓고 있습니다.
왜 바벨탑을 쌓았습니까?
노아 홍수 이전에는 비가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홍수가 있은 후에는 비가 내리기 시작을 했습니다. 자주 비가 내리다 보니까 사람들은 자기들이 또 다시 멸망을 당할 것을 두려워 하다가 바벨탑을 쌓기 시작했습니다.
바벨탑을 쌓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이 왜 바벨탑을 쌓았는가를 그리고 바벨탑을 쌓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안다면 바벨탑을 쌓는 것은 얼마나 큰 죄인가를 깨닫게 됩니다.
창세기 9:15-16절을 보면
“내가 나와 너희와 및 혈기 있는 모든 생물 사이의 내 언약을 기억하리니 다시는 물이 모든 혈기 있는 자를 멸하는 홍수가 되지 아니할지라 무지개가 구름 사이에 있으리니 내가 보고 나 하나님과 땅의 무릇 혈기 있는 모든 생물 사이에 된 영원한 언약을 기억하리라”
하나님께서 노아 홍수 후에 언약을 하셨습니다.
다시는 물로 사람들을 심판하지 않겠다고 언약을 하셨습니다.
그 언약으로 무지개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비가 올 때마다 하나님께서 혹시 자기들을 또 다시 멸망을 시키지 않을까 하는 염려를 했습니다.
믿지를 않았습니다.
바벨탑을 쌓은 이유는 하나님의 언약을 믿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바벨이라는 지역은 평지라서 비가 조금만 와도 금세 넘치는 그런 지역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비만 오면 사람들이 두려워했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사람들이 마음을 합하여 바벨탑을 쌓았습니다.
스스로 살기 위해서 바벨탑을 쌓았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믿지 못하고 자기들 스스로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보면서 자기가 구원을 하기 위해서 대를 높이 하늘에 닿게 쌓은 것이 바로 바벨탑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언약을 믿었다면 그들은 절대로 바벨탑을 쌓을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믿음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믿음에 있어서 가장 기초적인 것이 바로 약속입니다
약속이 수단되는 것이 믿음입니다. 약속을 하고 그것을 행하는 것을 믿는 것이 바로 믿음인 것입니다
누구를 믿습니다.
그런데 그가 100번의 약속을 하고 그 백번을 다 지켰다면 그를 확실하게 믿을 수 있습니다. 그 후에 또 다른 약속을 한다면 누구라도 그의 약속을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100번 약속을 하고 99번을 지키고 한번을 어겼습니다. 그 후에 다시 약속을 하게 되면 그가 99번의 약속을 지켰을지라도 완전하게 믿을 수 없는 것이 바로 믿음인 것입니다
바벨탑은 그림자입니다
바로 지금 이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약속에 따르는 믿음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라는 말씀입니다 그들이 약속을 믿지 않은 것을 거울삼아서 우리가 어떻게 약속을 믿어야 하는 가를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 바벨탑 사건을 기록하셨습니다.
성경의 모든 사건은 우연히 없습니다.
이 시대 믿음을 가진 성도들이 그 사건을 통해 보면서 믿음을 바로 가질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놀라운 섭리로 그런 일련의 사건들을 기록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 사건을 통해서 그들과 같은 실수를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이 시대도 역시 하나님의 언약을 믿지 못하고 자기들이 바벨탑을 쌓으려고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없으면 바벨탑을 쌓습니다.
뻔히 무지개를 보면서도 믿지를 못하기 때문에 바벨탑을 쌓는 일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런 일을 노아 홍수 이후 그 시대 사람들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도 똑 같은 일을 하고 말았습니다. 믿음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바벨탑을 무너뜨리셨습니다.
아니 믿음에 반역을 한 그 시대 사람들에게 징계를 하신 것입니다
바벨탑을 쌓은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무지개 언약을 믿지 않고 스스로 살기 위해 탑을 쌓아 하늘에 닿게 하려고 했던 그들을 응징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바벨탑을 무너뜨리셨던 것입니다 지금 이 시대도 바벨탑을 쌓으면 반드시 무너뜨린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믿지 않고 어떤 가시적인 것을 보이려 하는 모든 행위는 하나님의 언약을 거절하는 행위라는 것임을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믿음을 가르쳐 주고 있지 어떤 행위를 가르쳐 주고자 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행위에 대한 것은 이미 우리는 세상 초등학문을 통해 익히 배웠고 무엇이 선한 일이고 악한 일이라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모든 나라를 그 음행으로 인하여 진노의 포도주로 먹이던 자로다 하더라”
바벨탑을 쌓은 것은 음행입니다
무엇이 음행인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사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내가 율법을 완전히 지켜서 내 스스로로 사는 방법이 있고 다른 하나는 창세기부터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약속을 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방법이 있습니다.
이 두 가지를 함께 행하는 자는 음행하는 자입니다
내 스스로 살려고 노력을 하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살려고 하는 이 두 가지를 함께 취하고자 하는 사람은 모두 음행을 행하는 사람입니다
노아 홍수 후에 사람들이 하나님을 안 믿었습니까?
그들은 홍수 사건을 직접적으로 체험을 했기 때문에 그 당시 사람들은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잘 믿은 사람들이었습니다. 홍수가 나서 자기들이 죽을까 두려워했던 사람들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들이 하나님의 존재를 알고 믿었다는 것을 의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안 믿어서 바벨탑을 쌓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잘 믿고 있었지만 그들은 약속에 대한 믿음을 몰랐습니다. 행위로는 하나님을 아주 잘 믿고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무지개를 보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이 싹트고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도 혹시나 하고 있습니다.
무엇으로 혹시나 하고 있느냐면 율법으로 혹시나 하고 있습니다.
내가 율법을 안 지키면 혹시 죽는 것 아니냐 하는 마음이 이 시대 신앙인들에게 가득 차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율법으로 살려고 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잘 섬기고 있었지만 구약에 예언이 되어 있는 메시아를 기다리면서도 혹시 율법을 잘못 지키면 죽지 않을까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더욱 더 율법에 대해서 연구를 하고 그것을 지키고자 노력을 했습니다. 바로 두 가지 방법을 다 취한 것입니다.
살기 위한 두 가지 방법을 다 선택을 한 것입니다
물론 사람들이 생각에는 참 좋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언약을 하셨는데도 다른 방법을 찾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겠다는 거절의 의사 표시가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3:12절을 보면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라 이를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율법과 믿음은 다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라고 분명하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과 믿음은 다른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 정신나간 사람들은 믿음이 있으면 행위가 좋다고 말 합니다.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라고 분명하게 말씀을 하고 있는데 믿음과 율법이 마치 연결이 되어 있는 것처럼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무엇이라고 말씀을 합니까?
율법을 따르는 자들은 율법을 지켜야 산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는 방법에는 믿어서 사는 것과 율법을 다 지켜서 사는 것 이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이것을 혼합을 하는 것을 음행이라고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반드시 이 두 가지 중에 하나만을 선택해야 합니다.
이 두 가지를 다 취하는 것이 음행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것과 또 다른 하나는 율법을 다 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을 모르는 사람들은 지금도 이 두 가지 방법을 다 취하고자 스스로 바벨탑을 쌓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무너뜨린 그 바벨탑을 지금도 쌓느라고 수고를 아끼지 않고 있습니다.
그것이 음행이라는 것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니 그것을 오히려 하나님에 대한 열심이라고 생각을 하면서 더욱 더 열심을 내고 있는 것이 사람들입니다 바벨탑을 쌓은 그들이 그랬고 또 이스라엘이 그랬고 지금 이 시대 대다수의 신앙인들이 그렇게 행하고 있습니다. 혹시나 하는 그 마음이 스스로를 올무에 걸리게 만든다는 것을 모르고 바벨탑을 쌓고 있습니다.
믿음이 아니고는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입니다. 그러나 오직 예수라고 입술로는 그렇게 말하는 그들이 율법의 행위를 하고 있습니다. 지금 교회 안에 얼마나 많은 율법이 성행을 하고 있으며 그것을 안 하면 마치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 같이 주장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음행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자기 육체를 가지고 음행을 하면서 그것이 발각이 나도 남편으로부터 사랑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하물며 우리 마음과 심장까지도 헤아리시는 하나님 앞에서 음행을 하고 전혀 마음에 거리낌조차 없는 것이 바로 사람들이 계속해서 행하는 악한 행위입니다
진노의 포도주를 먹이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니 그것을 먹고 있는 사람들이 더 좋아하고 있고 그 맛을 한번 본 사람은 취해서 비틀거리면서도 그것을 도무지 끊지를 못한다는 것을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먹이는 사람보다 그것을 먹는 사람들이 더 좋아하고 그 맛에 혀가 길들여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주 맛있게 먹고 있습니다.
그리고 흠뻑 취해서 마음껏 음행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에 대한 열심이라고 굳게 믿으면서 자기 영혼이 사망의 그물에 걸려 있는지 조차 깨닫지 못하고 그것을 먹기 위해 즐거워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시대 사람들의 모습이며 마지막 때의 모습입니다
진노의 포주주가 무엇입니까?
로마서 4:15절을 보면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느니라”
율법은 진노를 이룹니다.
왜 진노를 받게 되느냐면 모든 율법을 항상 다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자기가 지키고 있는 몇 가지를 보면서 아주 맛이 좋은 포도주에 길들여져 있습니다. 그것이 진노를 받게 하는 것임을 깨닫지 못하고 그것을 먹으려고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눈물을 흘리면서 기도를 합니다.
진노를 받기 위해서 율법을 지키는 그것을 자기도 할 수 있게 해 달라고 하면서 밤을 새워가면서 철야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음행에 흠뻑 빠져서 더 깊은 나락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음행은 달콤합니다.
육체적인 것도 마찬가지겠지만 영적인 음행도 역시 너무도 달콤하고 맛있기 때문에 그 음행의 포도주에 맛이 길들여져 있는 사람은 죽어도 그것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어느 정도로 벗어날 수 없느냐면 곡식을 찧는 공이로 찧어도 그 미련이 벗겨지지 않다고 잠언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무너뜨렸습니다.
노아 홍수 후에 약속을 믿지 않고 바벨탑을 쌓는 그것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그 바벨탑을 무너뜨렸습니다. 또 율법으로 살려고 하는 이스라엘을 보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로 그 율법을 폐해 버리셨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시대도 역시나 똑 같은 일을 하면서 진노의 포도주에 흠뻑 취해 있습니다.
분별하시기 바랍니다.
내 스스로 살려고 하는 모든 행위가 바로 음행입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은 사단이 주는 것입니다 나를 살려 주시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구원을 얻는 두 가지 방법을 다 취하지 않고 오직 예수만을 바라고 믿는 성도만이 마지막 때에 구원을 받을 줄 확신합니다.
믿으세요.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음행을 하지 마시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성도가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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