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니라(요6:63.)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약속이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

로마서 강해 -

로마서 강해 141강, 믿음이 연약한 자

윤주만목사 2018. 11. 2. 07:10


로마서14:2절을 보겠습니다. (258)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연약한 자는 채소를 먹느니라

 

믿음이 연약한 자입니다

복음이 전해지고 있는 교회라 해도 믿음이 연약한 자는 늘 있기 마련입니다 지금은 초대교회와는 많이 다릅니다. 그러나 역시 복음이 전파되고 있는 관점에서 보면 다를 것도 없다는 것을 또한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그 당시에도 여러 가지 이유로 해서 믿음이 연약한 자가 있었습니다.

 

고린도전서8장의 말씀입니다

그와 같은 경우에도 믿음이 연약한 자가 있습니다. 그리고 복음을 전하다보면 아직까지 믿음의 장성한 분량에 까지 이르지 못한 사람은 늘 교회 안에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도 처음 복음을 들었을 때는 역시 그들과 마찬가지로 영의 일의 깊은 것을 다 받아들이지를 못 했습니다 저 역시도 이 모든 말씀이 단번에 깨달아지지가 않았습니다.

 

그들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 성도들과 같이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으로 장성한 분량에 충만한데 까지 이르지 못했을지라도 우리는 그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왜 받아야 하는가를 이제 14장 뒤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어느 누구도 이 복음의 말씀을 처음부터 깨달은 사람이 없고 또 한 번에 들어서 깨달을 수 있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들입니다

그들은 무엇이든지 단번에 이루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마치 믿음인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분명히 믿음은 단번에 주시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그러나 그 역사를 우리가 믿는다 해도 마치 도깨비 방망이와 같이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로마서14장에 와서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같이 믿음이 단번에 주어지고 있다면 사도 바울은 14장에 와서 이 말씀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13장까지에서 복음에 대해서 자세하게 말씀을 했기 때문에 지금 이 말씀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먼저 복음을 들어야 합니다.

그렇게 복음을 들었어도 지금 사도 바울은 믿음이 연약한 자가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13장까지의 말씀을 다 들었다 해도 그 중에는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는 사람이 있고 또 믿음이 연약한 자가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너무도 당연한 일이라는 것을 우리 성도님들은 알고 있습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복음을 전하고 나서 혹시라도 믿음이 연약한 자가 있으면 그들을 받으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연약하면 어떻게 됩니까?

당연히 의심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성령이 오심으로 해서 내 안에서 역사를 하기 때문에 때로 인간적으로 생각할 때 의심이 들더라도 바로 감동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 성령이 오시지 않은 사람은 의심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이제까지 지나온 과정을 생각하면 이 의심하는 것을 지극히 당연하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사람에 따라 다릅니다.

어느 사람은 복음을 들으면 쉽게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어느 사람은 로마서13장까지의 복음을 들어도 어느 말씀에 대해서 의심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의심을 하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니라 지극히 정상적이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고 그것을 또한 인정을 해야 합니다.

 

의심을 합니다.

물론 반박을 하는 것과는 다르다고 생각을 합니다. 의심이라는 것은 자기가 확실하게 알 수 없을 때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내가 복음을 들었지만 그것에 대해서 확신을 할 수 없을 때 의심이 됩니다. 사람은 이성이 있기 때문에 성경에서 영의 일을 들으면 의심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의 의심하는 바입니다

그가 영의 말씀을 듣고 어떤 말씀에 대해서 의심을 하더라도 비판을 하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가 설령 그 말씀에 대해서 알지 못할지라도 그것을 지적해서 부정적으로 말을 하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복음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그가 복음을 듣지 않았다면 그가 이해를 못하고 있는 것을 지적해서 부정적으로 말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복음의 말씀을 들었기 때문에 그것을 부정적으로 이야기를 하면 그가 근심을 하게 되고 때로는 아주 실족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씀을 드립니다.

그가 의심하는 바가 있습니다. 어느 말씀에 대해서 의심을 하고 있다고 하면 그 말씀에 대해서 네가 그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을 보니까 너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 될 수 없다고 하면 그는 정말 예수 그리스도를 안 믿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아니 믿음이 있어 보이는 사람이 자기를 부정적으로 이야기를 하면 포기를 할 수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입니다

그는 복음을 전하면서 정말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을 하기 위해서 얼마나 수고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고 있는 사도 바울의 마음을 우리가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아니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들이 얼마나 구원을 받기를 원하시는 가를 로마서14장을 통해서 또 다시 깨달을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하나님입니다

우리 인생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구원하시는 모든 구속의 일을 이루셨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 주셔서 믿음으로 역사를 해서 구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일이 사람의 이성으로는 깨달을 수 없기 때문에 사도 바울을 통해서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모든 언어를 통해서 말씀을 해 주시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사람들은 성경을 너무 쉽게 보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드리는 저 역시도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하는데 있어서 한계를 느끼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주 조금이나마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들을 얼마나 사랑하시고 또 우리가 구원을 받기를 원하시고 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사랑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들을 얼마나 사랑을 하시는 가를 알아야 합니다. 썩어 없어지는 우리 인생들에게 영의 새로운 생명으로 살리셔서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지혜로는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깨닫지를 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빛이 비추고 있지만 그 빛을 애써 외면을 하고 있습니다.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다 먹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믿음이 약한 사람은 채소만 먹습니다.”

 

성경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말씀을 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전혀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저 자기들의 감성으로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것을 보면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 감성이 아니라 우리는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시는 가를 조금이나마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압니까?

어느 정도를 알고 있습니까? 구원을 받는 우리 성도들까지도 사도 바울은 우리가 청동거울을 보는 것과 같이 희미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희미하게 볼 수 있는 그것으로 우리를 구원하시고 있지만 인생들은 자기들이 꽤나 지혜가 있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노래를 부릅니다.

그런 노래를 부르면서 감성에 젖어 자기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것으로 착각에 빠져 들어가고 있습니다. 복음을 듣고 있고 알고 있는 우리 역시도 하나님의 사랑을 아주 희미하게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희미하게 알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런 노래를 부를 수 없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다 아는 것과 같이 감성에 빠져 노래를 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습니다.

그리고 연약한 자는 채소만 먹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이 두 사람을 갈라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이제까지는 복음과 율법에 대해서 명확하게 이분법으로 말씀을 했습니다. 그러나 14장은 복음을 들은 사람들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연약한 자는 채소만 먹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로마서14장은 이분법을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들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가를 말씀하고 있고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들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기를 원하시고 있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입니다

복음이 전해지고 있는 교회 안에 이렇게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는 사람이 있고 연약한 자는 채소만 먹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모두 사랑하고 있습니다. 복음 안에서 교제하고 있는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 모두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모두가 구원을 받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사도 바울을 통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14:26절을 보겠습니다. (173)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생명입니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영원한 생명은 이 시대 기독교인들이 알고 있는 두루뭉술한 그런 것이 아니라 분명하게 성령으로 난 영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영은 우리 육신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생명으로서 그것을 요한복음에서는 하나님께 로서 난 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 주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난 후에 부활할 것을 말씀을 하고 있지만 그 말씀을 듣자 제자들이 근심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영원한 생명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을 하면서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말씀을 합니다.

이제 처음으로 성령에 대해서 말씀을 하면서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보내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그가 우리와 함께 있는가 하면 성령이 오심으로 해서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한 영의 생명에 대한 모든 것이 생각나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모든 것입니다

아무 것이나 가지고 모든 것이라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에서 모든 것이라고 하면 만사형통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무엇에 대해서 모든 것인가 하면 진리에 대해서 모든 것이고 그 진리가 생명이라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성경을 자의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아니 앞에 있는 말씀과 뒤에서 하고 있는 말씀은 다 잘라 버리고 그 말씀만 보고 마치 만사형통이 되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먹는다고 말씀을 하니까 목사들이 하는 모든 말을 자기들이 받아들이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것이 아닙니다.

아니 이 세상의 있는 것은 모든 것에 들어가지가 않습니다. 썩어 없어지는 것을 가지고 모든 것이라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반드시 영원한 생명에 대해서 모든 것이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기독교인들은 자기들이 교회 안에서 듣는 말을 가지고 또 그 말을 듣고 행위로 나타내는 것을 보면서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보혜사 성령입니다

그가 어떤 모든 것을 가르칩니까? 영원한 생명에 대해서 모든 것을 가르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생명에 대해서 성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하고 있는 샤머니즘을 보면서 모든 것이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입니다

우리가 생명을 얻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관심이 없습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이 성경을 왜 주셨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오직 영원한 생명을 우리 인생들에게 주시기 위해서 성경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 성경에서 생명을 얻게 하시고 있지만 사람들의 이성적 지식으로는 모든 것을 깨달을 수 없어서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 주시고 있습니다.

 

세상은 모릅니다.

이 성령을 받지도 못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주님께서 세상이라고 말씀을 하니까 마치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을 말씀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주님이 지금 누구를 세상으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그것은 이스라엘의 바리새인들을 세상으로 말씀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성령에 대해서 알지도 못하고 받지도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교회 안에 있습니까?

착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교회는 구원의 방주가 아니라 세상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 세상에서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그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주님이 주시는 영원한 생명이 내 안에 탄생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17절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세상을 말씀하고 제자들에게 너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정말 조금만 주의 깊게 보면 주님께서 말씀하는 세상이 누구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는데도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이스라엘의 바리새인들과 같이 성경을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면서 세상에서 벗어나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세상입니다

이 세상은 모두가 율법주의입니다 그 세상에 있는 사람은 절대로 성령이 오시지 않습니다. 교회 안에서 율법을 지키면서 성령이 오셨다고 하는 사람들은 다 종교에 의해서 미혹을 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런 세상 사람이 아니라 이제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해서 우리에게 성령이 오셔서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은 성도입니다

 

모든 것을 먹으시기 바랍니다.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해서 자기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탄생이 된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설령 복음을 듣고 이 모든 것이 믿어지는 역사가 없을지라도 내세를 생각한다면 복음을 계속해서 들어야 합니다. 로마서14장은 복음을 들은 성도들에게 생명이 있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령이 오셔야 합니다.

반드시 우리에게 보혜사가 오셔야 합니다. 그가 오시면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반드시 성령이 오셔야지만 영원한 생명에 대해서 모든 것을 가르치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생명입니다

교회 안에서 행하는 모든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생명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생명은 우리 육체와 어떤 연관이 있는 생명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온 생명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생명에 대해서 모든 것을 가르치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먹고 있습니까?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아무 것도 먹지 못하고 있습니다. 영의 생명에 대해서 듣지도 않았고 알지도 못하고 있는 그들은 아무 것도 먹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도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이 말씀을 보고 자기들이 모든 것을 먹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보고 있습니까?

그리고 문자를 알고 있습니까? 그것으로 모든 것을 먹는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 인생은 아무리 지혜가 있어도 성령이 오시지 않으면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에 대해서 절대로 깨달을 수 없습니다. 아니 설령 누군가 이 생명에 대해서 말씀을 해도 절대로 그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신명기22:5절을 보겠습니다. (295)

여자는 남자의 의복을 입지 말 것이요 남자는 여자의 의복을 입지 말 것이라 이같이 하는 자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한 자니라

 

모든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모든 것을 먹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아니 성령이 오시지 않으면 안 됩니다 저 역시도 성령의 감동을 받기 전에는 구약의 율법을 보고 도무지 무슨 말씀을 하고 있는지를 몰랐습니다. 아니 율법에 대해서 의문을 가졌지만 기독교에서 말하는 그대로 시민법이 폐하여졌다고 하니까 더 이상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그럴 것입니다

지금도 기독교 안에 있는 사람들은 이 신명기에 있는 말씀을 보고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분명히 구별하시기를 원하시고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이렇게 살라고 이 율법을 정해 놓았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방의 민족들 중에는 남자가 여자의 옷을 입고 여자가 남자의 옷을 입는 것을 보고 하나님의 백성은 그런 가증한 일을 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성도입니다

그리스도편지에 와서 복음을 듣기 전에는 이 말씀을 보았어도 그냥 스쳐 지나갔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우리 역시 기독교인으로 있을 때는 사실 사람의 이성으로 생각을 해도 남자가 여자의 의복을 입고 여자가 남자의 의복을 입는 것은 그리 좋게 생각이 안 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가증히 여기신다고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순전히 제 생각을 말씀 드립니다.

여자가 남자의 의복을 입습니다. 그래도 그것은 어느 정도 봐 줄 만합니다. 그런데 남자가 여자의 의복을 입는 것은 도무지 봐 줄 수가 없습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순전히 제 개인의 생각입니다. 우리가 이성적으로 생각을 해도 지극히 당연하게 생각이 되기 때문에 성경을 문자 그대로 보면서도 아무 생각을 하지 않고 우리 이성을 따라 하나님께서는 더욱 가증히 여기시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성령이 오시기 전입니다

우리 인생은 성경을 그렇게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오시면 모든 것을 가르치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무엇에 대해서 모든 것인가 하면 영생에 있어서 모든 것을 가르치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가르치시면 하나님께서 가증히 여기시는 일을 하지 않을 수 있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증히 여기십니다.

그 일을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적으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율법을 통해서 우리에게 영생을 얻는데 있어서 해서는 안 되는 일을 말씀을 하고 있고 성령이 오심으로 해서 이 말씀에 대해서 바로 가르치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모릅니다.

성령이 오시기 전에는 신명기의 말씀을 아무리 보아도 모릅니다. 아니 누군가 설령 이 말씀에서 복음을 깨달았다고 해도 그 말씀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누군가 성령을 오셔서 이 말씀을 깨닫고 말씀을 해도 이 말씀을 듣는 자에게 성령이 오시지 않으면 그 말씀을 먹을 수 없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남자입니다

그리고 여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남자와 여자를 차별을 하시지 않고 있습니다. 우선은 그런 기본적인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성경에서 남자와 여자를 어떻게 비유로 말씀을 하고 있는가를 알아야 이 말씀이 깨달아질 수 있습니다. 물론 그것을 깨달을 수 있게 성령이 오셔서 역사를 하고 있고 또 그 말씀을 듣고 먹을 수 있게도 역사를 하고 있습니다.

 

남자는 구원을 받은 성도입니다

여자는 교회에 나와 있지만 아직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미 그리스도편지에 설교에서 말씀을 많이 했기 때문에 굳이 여기서 다시 설명을 하지 않아도 이제는 알고 있습니다. 신명기의 남자는 생리적인 남자와 여자를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이 전해지고 있는 교회 안입니다

그 안에는 남자가 있고 여자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를 남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고 아직 율법을 지키고 있는 사람을 여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가 생리적으로 남자냐 여자냐를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듣고 믿은 성도는 남자고 아직 율법을 지키고 있는 사람은 여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이 말씀을 전합니다.

그럼 어떻게 생각을 합니까? 성령이 오신 성도는 이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먹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아직 성령이 오시지 않은 사람은 복음을 듣고 어떻게 생각을 하는가 하면 그럴 수도 있겠구나하고 그 말씀을 받아들지는 못할지라도 생각을 하게 됩니다.

 

또 어떤 사람이 있습니까?

교회 안에서 율법주의에 빠져 있는 사람은 성경을 이상하게 해석을 한다고 하면서 그런 말씀이 어디에 있느냐고 하면서 아예 처음부터 거부를 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는 이렇게 세 사람이 있는데 지금 로마서에서는 복음을 듣고 있는 사람을 말씀하고 있고 그 중에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는 사람과 연약한 자는 채소만 먹는 사람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보혜사 성령입니다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가르치십니다. 무엇에 대해서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있는가 하면 우리가 구원을 받는데 있어서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있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성령이 오셔서 모든 것을 가르치시면 교회 안에서 복음이 전해지고 있고 그 안에는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는 사람이 있고 또 연약한 자는 채소만 먹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입니다

로마서 강해를 하면서 율법에 대해서 많이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편지를 통해서도 많이 말씀을 했습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성령이 오셔서 이 모든 말씀을 먹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교회 안에서 남자로 살아가면서 여자의 의복을 입지 않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지 않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모든 것을 먹습니다.

어떻게 해야 모든 것을 먹을 수 있는 믿음이 있습니까? 신명기에 있는 율법을 보았으면 모든 것을 먹는 성도는 절대로 여자의 의복을 입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교회 안에서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복음이 전해지면 교회 안에는 이것을 먹지 못하고 채소만 먹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을 드립니다.

채소만 먹는다고 해서 그가 율법주의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그가 아직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없다 뿐이지 교회 안에서 복음을 듣고 있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듣고 있다면 그가 비록 이 말씀을 먹지는 못하더라도 모든 것을 먹지는 못하더라도 율법을 지키는 일은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꼭 율법만이 아닙니다.

이 시대 모든 교회는 찬송가를 부르고 있습니다. 이 찬송가의 문제도 사실은 심각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도무지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아니 찬송가를 부르지 말라고 하면 아마도 저를 이단으로 생각을 할 것이 분명하고 아예 대화 자체도 하지 않으려고 할 것입니다

 

지금 사도 바울이 그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복음이 전해지고 있는 교회 안에서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연약한 자는 채소만 먹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어떻게 먹을 수 있습니까? 그것을 주님께서 요한복음에서 보혜사를 말씀하시면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성령이 오셔야 합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교회에만 나오면 아니 교회에 나와서 자기들의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시인을 하면 마치 성령이 오신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있는 문자를 아는 것으로 자기들에게 성령이 오셨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절대 아닙니다.

반드시 복음을 들어야 합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이 로마서를 통해서 1-13장까지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복음으로 시작을 해서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를 13장까지 정말 자세하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 믿는 성도들에게 성령이 오심으로 해서 모든 것을 먹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입니다

성경의 문자를 아는 것으로 모든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제까지 기독교인들을 보면 그들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아예 처음부터 복음을 듣지를 않았습니다. 아니 생명에 대한 말씀을 아무 것도 듣지를 못 했습니다

 

생명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은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 성도를 사도 바울이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초대 교회 안에는 아직 믿음이 연약해서 채소만 먹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직 연약할 수 있습니다.

그럴지라도 우리는 모든 것을 먹을 수 있게 계속해서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모하는 자에게 지혜를 주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비록 지금은 이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없다고 해도 지혜를 구하면 꾸짖지 아니하시고 후히 주시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정말 안타깝습니다.

그리스도편지를 통해서 복음을 전하면 사람들이 말씀을 보다가 다시 율법주의로 돌아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내가 설령 채소만 먹는다 해도 이 말씀이 성경과 맞는 것 같으면 다시 보고 또 보면서 하나님께 은혜를 구해야 하는데 사람들이 영원한 생명에 대해서 너무 쉽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듣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기를 원하시고 있지만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9:35절을 보겠습니다. (14)

예수께서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습니다.

그리고 연약한 자는 채소를 먹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말씀을 드리고 있지만 로마서14장은 13장까지의 말씀을 다 들은 사람들에게 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영의 일을 생각하면 사도 바울의 말씀을 충분히 깨달을 수 있습니다

 

연약한 자입니다

사도 바울은 생명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육체적으로 어느 것이 연약한 것을 말씀을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영생을 얻는데 있어서 연약하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듣고는 있지만 연약한 자는 영의 말씀을 다 먹을 수 없어서 채소를 먹습니다.

 

영생의 일입니다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천국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이 천국에 가는 일에 대해서 이스라엘은 병든 자가 많이 있었고 약한 것이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천국복음을 전파하시면서 이것을 고쳐주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연약한 자는 채소를 먹습니다.

우리 인생은 처음부터 천국복음을 깨닫고 태어난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병든 자이고 또 약한 자라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천국에 가는데 있어서 병들고 약한 우리 인생들을 위해서 주님이 오셔서 천국복음을 전파해 주셨습니다. 주님 자체가 천국복음이고 주님께서 부활하시고 난 후에 성령을 보내주셔서 그 복음을 깨달을 수 있게 역사를 해 주시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있어서 천국복음입니다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주님에 대해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믿을 수 있게 성령을 보내 주심으로 해서 이 시대 우리가 천국복음을 듣고 믿고 있습니다. 그 사람을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천국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그 복음을 전파하심으로 우리 약한 것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는 그 말씀을 들었어도 그것을 먹을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었습니다. 주님께서 부르신 제자들도 주님이 이 세상에 계실 때는 모두지 무슨 말씀을 하는 줄을 몰랐고 심지어는 부활을 하신 주님도 알아보지 못 했습니다

 

천국복음입니다

주님께서 말씀을 하심으로 해서 우리 약한 것을 고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에게 성령이 오시기 전에는 모두가 약한 자로 살아가고 있었다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복음을 전파하셨지만 그것을 먹지를 못했고 믿지도 못 했습니다

 

주님이 천국복음을 전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을 하시기를 추수할 것은 많되 일군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군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천국복음을 전파하시지만 제자들에게 성령이 오시지 않아서 그 말씀을 깨닫지를 못하고 있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추수하는 일군입니다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씨를 뿌리셨습니다. 그리고 난 후에 주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셔서 사십일이 지난 후에 하늘에 올라 가셨습니다. 그리고 난 후에 하나님께서 제자들에게 성령을 보내 주셔서 그들이 천국복음의 말씀을 깨닫고 주님이 씨를 뿌려 놓은 세상에서 일군으로 일을 해서 추수를 했습니다.

 

성령이 오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인생은 천국복음에 대해서 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느 누구도 인생의 지식으로는 주님께서 말씀을 하신 천국복음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반드시 성령이 오심으로 해서 천국복음을 먹을 수 있고 그런 성도를 믿음이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채소입니다

성경에서 채소는 나쁜 의미 보다는 좋은 의미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채소를 먹는다고 해서 그가 전혀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뜻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 말씀을 드립니다. 지금은 비록 연약해서 채소를 먹고 있을지라도 하나님께서 그에게 성령을 보내 주시면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는 자가 된다고 믿고 있습니다.


복음을 듣고 있습니다.

다만 그에게 아직 성령이 오시지 않아서 역사를 하고 있지 않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언제든지 성령이 오시면 그 역시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어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그것을 말씀을 하면서 비록 그가 연약할지라도 너희가 받되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천국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시대 우리가 성령의 감동을 받은 사람의 목소리를 통해서 듣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복음이 전파가 되고 있지만 교회 안에는 아직 믿음이 연약한 자가 있다는 것을 늘 생각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약한 것을 우리가 담당해야 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로마서14:3절을 보겠습니다. (258)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못하는 자는 먹는 자를 판단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저를 받으셨음이니라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먹는 사람은 먹지 않는 사람을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않는 사람은 먹는 사람을 비판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도 받아들이셨습니다.”

 

천국복음이 전파가 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13장까지 복음에 대해서 말씀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 성도가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는 믿음이 있는 성도가 있어서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연약한 자는 채소를 먹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참 어렵습니다.

늘 성경을 보고 있지만 어렵습니다. 물론 어느 사람에게는 쉽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14장의 말씀을 보고 난 후에 설교를 작성하는데 어려움이 많이 있었습니다. 4절까지 쓰고 나면 이상해서 반복했습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있어서 사람의 열심으로 하면 안 된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고 있습니다.


성경의 제목입니다

물론 제가 그 제목을 본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제목이 있고 그리고 나서 12절까지 마무리가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142절까지 설교를 쓰고 나서 3-4절을 쓴 후에 성경을 보면 뭔가 모르게 앞뒤가 맞지를 않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고생했습니다.

거의 일주일을 넘게 이 말씀 때문에 도무지 풀리지가 않아서 썼다 지우기를 반복을 했습니다. 늘 성경을 볼 때마다 주의를 하고 있지만 정말 14장은 어렵게 성경을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냥 봐서는 잘 모르지만 성경을 풀다보면 앞에 썼던 말씀과 뒤에 나오는 말씀이 일맥상통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잘 이해를 하시기 바랍니다.

문장의 연결을 볼 때 14장은 1-2절까지가 한 말씀입니다 그리고 3절부터가 같은 문장의 연결이라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이것이 풀리지가 않아서 보고 또 보기를 반복했는데 정말 어렵다는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저 역시 성경을 얼마나 쉽게 보고 있는가를 새삼 깨닫고 있습니다.

 

복음입니다

사람들에게 반드시 복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너무 쉽게 성경을 봄으로 해서 복음이 다른 복음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물론 제가 썼다 지우기를 반복했어도 그것이 다른 복음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문장의 연결이 어색하다면 그것 역시 다른 사람들에게 의심을 주기 때문에 옳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먹는 자는

성경이 얼마나 어려운 가를 말씀드립니다. 먹는 자라고 하니까 아마도 거의 모든 사람이 1-2절의 말씀을 보고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는 자로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 역시 그렇게 성경을 보고 풀다가 계속해서 이상하게 말씀이 연결이 되는 것을 보고 여기서 막혀서 더 이상 나가를 못하고 있었습니다.

 

3절에서 먹는 자입니다

어떤 사람이 아닙니다.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는 자가 아닙니다. 그런데 성경은 꼭 그렇게 보입니다. 이것이 풀리지가 않으면 이제부터의 말씀이 뒤죽박죽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다 그렇게 성경을 보고 있습니다.

 

14장을 쉽게 생각했습니다.

정말 13장까지의 말씀을 풀고 나서는 이제는 난해한 말씀이 없는 것으로 생각하면서 그냥 쉽게 성경을 풀 것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도무지 앞으로 나가지를 못 했습니다 앞에 있는 말씀을 보고 먹는 자는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는 사람으로 생각을 했고 먹지 않는 자는 연약해서 채소를 먹는 사람으로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아닙니다.

지금 3절부터는 2절까지 말씀의 연결이 아닙니다. 그것을 연결해서 보면 절대로 풀리지 않는 말씀입니다 사실 2절까지의 말씀은 13장의 연결이라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그리고 이제 3절부터 새로 시작을 해야 하는데 성경이 이렇게 편집이 되어 있다 보니까 사람들이 성경을 보고 깨닫는다는 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믿음이 연약한 자가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제 3절부터는 새로 시작을 하면서 먹는 자와 먹지 않는 자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3절부터의 말씀을 연결을 해서 보면 절대로 성경을 바로 풀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성경이 이렇게 편집이 되어 있어서 쉽게 생각을 하면서 연결을 해서 보고 있습니다.

 

사도행전15:36-41절을 보겠습니다. (214)

수일 후에 바울이 바나바더러 말하되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 하니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한가지로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 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녀가며 교회들을 굳게 하니라” 

 

먹는 자입니다

그리고 먹지 않는 자입니다 성경에서 연관이 되는 말씀을 찾으려고 며칠을 생각했는데도 비유가 될 수 있는 말씀이 전혀 생각이 나지를 않아서 사도행전의 말씀을 가지고 말씀을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저는 머릿속에서 확실하게 알겠는데 설명을 하려고 하니 딱히 생각나는 성경말씀이 떠오르지가 않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을 드립니다.

로마서142절까지는 그것으로 마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3절부터 다시 생각을 해야 합니다. 2절의 말씀과 연결을 해서 성경을 보면 풀리지가 않습니다. 아마도 사도 바울은 142절까지 쓰고 143절부터 새로 시작을 했으나 성경을 편찬하는 사람들이 장절을 나눌 때 성경을 바로 깨닫지를 못해서 이러한 일이 있는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먹는 자입니다

그리고 먹지 않은 자입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2절까지의 말씀을 연결을 해서 보면 풀리지가 않습니다. 아니 설령 스스로 설교를 쓴다 해도 뒤에 가면 이상한 말씀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2절까지의 말씀을 연결을 지어서 말씀을 풀면 먹는 자와 먹지 않은 자를 잘못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142절까지입니다

로마서13장까지의 복음을 들은 사람을 비유로 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복음을 들은 사람이 있지만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는 사람이 있고 또 믿음이 연약해서 채소를 먹는 사람이 있다고 말씀을 했습니다. 이 두 사람은 복음을 함께 들었던 사람입니다

 

성경의 비교입니다

우리는 정말 주의를 해서 보아야 합니다. 거의 모든 성경은 교회 안에 있는 구원을 받는 사람과 구원을 받지 못하는 사람을 비교를 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141-2절의 말씀은 복음이 전해지고 있는 교회 안에서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는 사람과 복음을 들었지만 아직 연약해서 채소를 먹는 사람을 비교를 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3절부터입니다

교회 안에서 복음을 듣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 중에서 먹는 자가 있고 먹지 못하는 자가 있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14장을 쉽게 생각을 했는데 이 말씀을 깨닫기까지 정말 보름 정도의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3-5절까지를 썼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풀리지가 않아서 쓰다가 보면 이상해서 다시 지우고 쓰기를 반복했습니다. 그리고 딱히 비유가 될 수 있는 말씀을 성경에서 찾을 수가 없어서 더 어려웠던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2절까지의 말씀을 연결을 해서 쓰다가 보니까 그런 일이 계속해서 발생을 했는데도 사람의 지혜라는 것이 한계가 있다는 것을 다시 느낍니다.

 

잘 이해를 하시기 바랍니다.

먹는 자와 먹지 않는 자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은 구원을 받은 사람입니다 이제까지 거의 모든 말씀이 구원을 받는 사람과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을 비교를 해서 말씀을 했는데 143절부터는 구원을 받는 두 사람이 교회 안에서 행하고 있는 일을 비교를 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있습니다.

먹는 자도 믿음이 있습니다. 그리고 먹지 않은 자도 믿음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고 이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제가 로마서 강해를 쓴 사람들의 글을 다 보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14장의 말씀을 바로 풀고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앞에 있는 말씀들도 바로 풀지 못하는 사람들이 뒤에 있는 말씀을 어떻게 풀 수 있습니까?

 

거의 모든 강해입니다

아마도 먹는 자를 믿음이 있는 사람으로 그리고 먹지 못하는 자를 믿음이 없는 사람으로 풀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뒤에 가서 말씀이 이상하게 꼬이는데도 사람들은 그렇게 성경을 억지로 풀어서 스스로 사망의 길로 가고 있으면서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과 바나바입니다

1차전도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갈라디아서 강해를 할 때 이 말씀을 잠깐 보았습니다.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에 유대에서 온 거짓 형제가 와서 할례를 행하게 함으로 해서 그 문제를 가지고 다투었지만 결론이 나지를 않아서 예루살렘으로 가서 사도들과 만나서 율법에 대한 문제를 결론을 내리고 이제 다시 전도여행을 떠나기를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비유가 될 말씀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생각을 하다가 그래도 이 말씀이 적절할 것 같은 생각을 가지고 말씀을 드리고 있습니다. 로마서143절의 말씀에 먹는 자와 먹지 않는 자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은 구원을 받는 사람이고 서로 생각의 차이가 있는 사람입니다.

 

성경입니다

정말 어려운 말씀들이 많이 있습니다. 율법에 대한 문제는 그래도 어느 정도 해결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율법 외에는 참으로 어려운 말씀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 바른가 아니면 복음에 거치는 일인가를 정확하게 분별이 안 되는 일들이 종종 있을 수 있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다보면 주변에 죽음을 당하는 사람이 있고 문상을 가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가서 기도를 하면 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 역시 이제까지 그렇게 해 왔습니다. 그런데 이제 성경에서 복음을 깨닫고 있습니다.

 

어떻게 합니까?

우리는 기독교인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아주 작은 것 하나라도 그들과 같아서는 안 된다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미 종교가 되어 있기 때문에 그 종교에서 정해서 하는 대로 하고 있다고 생각을 하면 됩니다. 그런데 우리 성도가 그들을 따라 한다는 것은 맞지 않다고 생각을 합니다.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저는 가볍게 목례를 하는 것이 맞는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중에 누군가는 다르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목례를 하는 것도 하지 말라고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그냥 우리나라에서 내려오던 전통대로 절을 해도 괜찮다고 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에게서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저는 가볍게 목례를 하겠습니다.

여러분이 하고 싶은 대로 한다고 해서 제가 그것을 반대를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누군가 기도를 하고 있다면 그것은 반대를 하고 싶습니다. 기도만 하지 않는다면 절을 해도 상관이 없고 또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상주와 인사만 한다 해도 상관이 없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부분을 가지고 다툴 수도 있습니다.

 

서로 생각이 약간 다릅니다.

그런데 어떻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까? 나는 내가 옳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 사람은 저 사람이 옳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옳다고 생각을 하는 사람은 자기는 먹는 사람이고 저 사람은 먹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저 사람 입장에서 보면 또 마찬가지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과 바나바가 다투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아서 잘 알고 있듯이 이 일은 서로 다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다투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심히 다투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바나바가 잘못되었다고 또 사도 바울이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생각의 차이입니다

사도 바울의 입장은 그런 것 같습니다. 한번 배신을 한 사람은 또 다시 배신을 한다고 생각을 하고 이것이 세상의 도리로서도 맞지 않는다고 해서 마가를 다시 데리고 가는 것을 심하게 반대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나바는 비록 마가가 1차전도 여행을 가서 힘들어서 되돌아왔다 해도 그의 믿음을 의심하지 말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누가 먹는 사람입니까?

그리고 누가 먹지 않은 사람입니까? 제가 볼 때는 바나바가 먹는 사람과 같이 보이고 사도 바울이 먹지 않는 사람과 같이 보입니다. 로마서14장을 잘 이해를 하시기 바랍니다. 먹는 자가 낫다는 것이 아니고 또 먹지 않는 자가 낫다는 것도 아닙니다.


누가 낫다고 하는 것은 순전히 우리 인간의 생각입니다.

지금 사도 바울은 로마서14장에서 그것을 말씀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두 사람 다 구원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먹는 사람도 구원을 받은 사람이고 먹지 않는 사람도 구원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서로 입장에서 보면 자기가 먹는 사람과 같이 생각이 될 수 있습니다. 실제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볼 때는 바나바가 더 낫습니다.

그러나 복음의 일로 볼 때는 꼭 바나바가 낫다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비록 심히 다투고 끝까지 마가를 데리고 가지 않았을지라도 바나바도 복음을 전하는 일을 했고 또 사도 바울도 복음을 전하는 일을 했다는 것을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충분히 깨달을 수 있습니다.

 

참으로 어려운 말씀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이 말씀을 하고 있는가 하면 이제 복음을 다 깨달은 성도들이 스스로 판단을 할 수 있고 또 서로 각자의 생각을 가지고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면 내가 볼 때는 저 사람은 먹지 않는 것과 같이 보일 수 있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내 입장입니다

나는 먹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 사람은 먼지 모르지만 먹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전하는 일을 생각하면 나도 복음을 전하고 있고 저 사람도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지금 사도행전에서 바나바와 사도 바울이 그렇습니다. 서로 심하게 다투고는 있지만 그들이 무엇을 위해서 다투었는가 하면 복음을 위해서 다투었습니다.

 

누가 잘 했습니까?

결과적으로 볼 때는 둘 다 잘 했습니다. 내가 생각할 때는 내가 먹는 자고 저 사람이 먹지 않는 자 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복음을 전하는 일로 볼 때는 두 사람 다 똑같이 복음을 위해서 일을 했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다보면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교제를 나누고 있습니다.

언제까지 우리의 교제만 있다고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여기에 계시는 분들 중에는 저보다 더 복음을 잘 전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는 제가 받은 복음 안에서 전하고 있습니다. 또 그 사람은 그 사람이 받은 복음 안에서 전하고 있습니다. 서로 전하는 복음이 다르다는 것이 아니라 복음은 같지만 세상에서 살아가는데 있어서는 약간의 생각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저는 문상을 가서 목례만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곳에서 가르치는 분이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한다면 거기서 배운 사람은 그 사람을 따라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복음이 변질이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서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생각을 합니다.

나는 먹고 저 사람은 먹지 않는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것이 실제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저 사람이 먹는 것과 같이 보이고 제가 먹지 않는 것과 같이 보일 수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저 역시 복음을 전하고 있고 저 사람도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보통의 생각입니다

우리가 사도행전을 보면 바나바가 잘 한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사도행전의 말씀을 보면 사도 바울이라는 사람이 어떠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한번 자기 생각에 싫으면 끝까지 반대를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복음을 가진 사도들이지만 역시 사람인지라 생각의 차이는 있을 수 있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먹는 자입니다

그리고 먹지 못하는 자입니다 먹는 자가 내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먹지 못하는 자가 내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상황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설령 먹는 자일지라도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또한 내가 먹지 못하는 자와 같이 고집을 부리고 있다고 해서 먹는 자를 판단하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10:35절을 보겠습니다. (205)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

 

먹는 자입니다

그리고 먹지 못하는 자입니다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못하는 자는 먹는 자를 판단하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이 두 사람은 이미 구원을 받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성경을 보아야 합니다.

 

구원을 받은 사람입니다

내가 먹는 것과 같이 생각이 된다고 해서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면 안 됩니다 또 내가 먹지 못한다 해서 먹는 사람을 판단을 해서도 안 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사도 바울은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하는 가운데서 일어나는 일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업신여기다.

사전에서는 교만한 마음으로 낮추어 보거나 하찮게 여기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판단하다. 일정한 논리나 기준에 따라 성립한다고 인정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업신여기는 것은 복음을 전하는 사람을 교만한 마음으로 낮추어 보거나 하찮게 여기는 것을 말하고 있고 그것은 자기가 먹고 있다고 생각을 하기 때문입니다

 

판단하다

일정한 논리나 기준에 따라 성립한다고 인정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알고 있는 복음의 기준을 따라 그것을 인정을 하기도 하고 또 인정을 하지 않기도 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알고 있는 복음과 조금 다르다고 생각을 하면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교회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은 성도로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지만 여러 가지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율법과 같이 정해진 것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지키지 않으면 됩니다. 그러나 꼭 정해진 것이 아니라면 누구는 먹는 자와 같이 보일 수 있고 누구는 먹지 못하는 자와 같이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은 모두가 구원을 받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설명이 어렵습니다.

비유의 예가 거의 없다보니까 설명하기가 더 어려운 것 같습니다. 내가 먹는 자인가 아니면 먹지 못하는 자인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자기들이 알고 있는 지식이 더 난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런 것이 아니라 구원이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그것은 내 영혼이 구원을 받는 일입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는 것을 알고 성경을 보아야 합니다. 사람들이 본질을 잃어버릴 때가 많이 있습니다. 나에게 있어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늘 생각하면서 살아가야 하는데 사람들은 매너리즘에 쉽게 빠져 그 본질에서 벗어나는 것에 집착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내가 먹는 자입니까?

내가 먹지 못하는 자입니까? 내가 먹는다고 해서 먹지 않는 사람을 업신여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또 내가 먹지 못하는 자라고 해도 먹는 자를 판단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구원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받으셔야 합니다. 저를 받으셨다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저를 구원을 하셨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누구를 받으셨습니까? 먹는 자도 받으시고 먹지 못하는 자도 받으셨다는 말씀입니다 둘 다 받으셨기 때문에 업신여기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고 또 판단하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이 누구입니까?

로마서13장까지의 말씀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나도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었고 저 사람도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는 먹는 것과 같이 보이기도 하고 먹지 못하는 것과 같이 보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받으셨습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그 사실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먹고 있습니까? 내가 먹지 않고 있습니까?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받으시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기가 먹는 것을 보고 있고 또 먹지 못하는 사람은 자기가 먹지 못하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성도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었습니다.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런 성도는 어떻게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가 하면 주님을 위하여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오셔서 이루신 구속의 일을 위하여 살아가고 있습니다. 내가 어떻게 주님을 위하여 살 수 있는가 하면 구원을 받으면 주님을 위하여 살 수 있습니다.

 

둘 다 마찬가지입니다

먹는 자도 구원을 받기 위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먹지 못하는 사람도 구원을 받기 위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업신여기고 있고 판단을 하고 있다면 그는 본질에서 벗어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미 구원을 받은 사람들끼리는 그런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받으셨다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로마서14:4절을 보겠습니다. (158)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뇨 그 섰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제 주인에게 있으매 저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저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니라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우리가 누구이기에 남의 종을 비판합니까? 그가 서 있든지 넘어지든지, 그것은 그 주인이 상관할 일입니다. 주님께서 그를 서 있게 할 수 있으시니, 그는 서 있게 될 것입니다.”

 

먹는 자입니다

그리고 먹지 못하는 자가 있습니다.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못하는 자는 먹는 자를 판단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저를 받으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먹는 자인가 먹지 않는 자인가는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를 받으셨는가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말씀하고 있습니까?

누구는 먹는 것과 같이 행동을 하고 있고 누구는 먹지 않는 것과 같이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 순전히 사람의 이성에 그렇게 보일지라도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못하는 자는 먹는 자를 판단하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두 사람입니다

둘 다 믿음이 있는 사람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다만 사람의 이성에 그렇게 보일 수 있어도 하나님께서 저를 받으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받으셨다는 말씀은 그가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는 말씀과 같습니다.

 

남의 하인입니다

누가 남의 하인입니까? 이 세상에서 복음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 우리 성도를 그렇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는 먹는 자로 살든지 아니면 못 먹는 자로 살든지 다 주님의 하인이라는 것을 알고 이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금 사도 바울이 왜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늘 복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셨다는 것을 늘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 성도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는 그 자체가 복음이 전파가 되고 있습니다. 물론 직접적으로 복음을 전하지는 않을 수 있으나 우리가 함께 모여 예배를 하는 것 자체가 복음을 전하는 일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성도의 삶입니다.

우리가 그냥 산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성도를 살게 하셨습니다. 왜 우리 성도가 있는가 하면 분명한 것은 우리 성도를 통해서 복음이 전파가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종이라고 비유로 하고 있고 또 하인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분명히 주님의 하인이며 종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5:9절을 보겠습니다. (332)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신 것이라

 

남의 하인입니다

내가 먹습니까? 함께 복음을 들었던 형제가 먹지 않고 있습니까? 내가 먹지 않습니까? 함께 복음을 들었던 형제가 먹고 있습니까? 나도 주님의 하인이고 함께 복음을 들었던 형제도 역시 주님의 하인입니다 그런데 그 하인을 우리가 판단을 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왜 판단할 수 없습니까?

우리의 구원은 순전히 하나님의 능력에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무엇을 잘 해서 구원을 받는다면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면 어느 누구도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단지 자기 이성의 생각이 약간 차이가 난다 해서 구원을 받는 성도를 판단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저를 하나님께서 받으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신 자를 사람이 판단하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받으셨습니다.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탄생이 되어 있는 그의 영을 받으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구원을 받았습니까?

우리가 그 사람을 볼 때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가 하는 말을 들어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가 율법의 행위를 하지 않고 교회 안에서 외식을 하지 않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함께 예배를 하면서 주의 만찬을 나누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누가 그렇게 했습니까?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 주셔서 그의 안에 성령으로 말미암아 탄생이 된 영이 있습니다. 그렇게 성령으로 말미암아 탄생이 되어 있는 그 영이 있는 성도를 누가 세우셨는가 하면 하나님께서 세우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가 설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하나님의 능력으로 세움을 입고 있습니다.

 

남의 하인을 판단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종입니다 그러면 저 사람 역시 주님의 종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가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었다면 주님의 종입니다 그런데 그 종이 서로 내가 먹는다 해도 아니면 내가 먹지 못한다 해서 서로 판단을 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일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먹습니까?

누가 세우셨습니까? 주님이 세우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먹지 못하고 있습니까? 역시 하나님께서 세우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아니 설령 그가 넘어진다고 해도 우리가 판단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가 설지라도 하나님이 세우시고 그가 넘어질지라도 하나님이 넘어지게 하시고 있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너는 누구뇨

구원은 우리 인생이 개입할 문제가 아닙니다. 내가 볼 때는 저 사람이 넘어지는 것과 같이 보일지라도 저가 세움을 받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람의 이성을 따라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사도 바울 역시 누가를 보고 그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바나바와 심히 다툰 후에 따로 전도 여행을 떠났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봅니다.

정말 때로는 인간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 있습니다. 노아도 그렇습니다. 술을 먹고 취한 것은 노아인데 저주를 받은 것은 가나안이 받았습니다. 사람의 이성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지만 노아는 이미 하나님께서 받으셨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가장 이해를 못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바로 알아야 합니다. 노아는 이미 하나님께서 받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노아가 아무리 잘못을 했더라도 노아는 저주를 받을 수 없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왜 저주를 받을 수 없는가 하면 그를 하나님께서 받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노아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해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구원입니다

우리 신체의 구원이 아니라 영의 구원입니다 사람들이 이 구원에 대해서도 잘 모르다보니까 성경이 풀리지가 않고 있습니다. 먹는다 먹지 않는다는 사실 육체를 통해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렇게 육체를 통해서 나타나는 것을 보고 그 사람을 판단을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저를 받으셨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가 세움을 받았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육체를 통해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역사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받으신 것은 육체가 아니라 그의 안에 있는 영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먹는 것과 먹지 않는 것은 육체를 통해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것을 보고 판단을 하게 되면 사실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문상을 가는 문제만 해도 그렇습니다.

지금은 제가 그래도 정확하게 말씀을 드릴 수 있기 때문에 그대로 하시면 된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많이 흘러서 제가 죽고 그런 것이 잘 분별이 안 될 때는 충분히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 문제가 닥치면 정말 세상을 살면서 아무 것도 하지 못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먹느냐 먹지 않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도 율법의 행위만 그리고 외식만 하지 않으면 저는 좋다고 생각을 합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세움을 받아서 구원을 받는가를 늘 생각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육신의 일이 있습니다.

지금 사도 바울도 그것만 아니면 된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옷은 입은 성도가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해서는 안 됩니다 그 일만 아니라면 누가 먹느냐 먹지 않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저를 세우시고 있는가가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고린도전서6:14절을 보겠습니다. (269)

하나님이 주를 다시 살리셨고 또한 그의 권능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시리라

 

성도의 구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은 성도는 이미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제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않으면 우리는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런 성도로 세상을 살아가지만 많은 일들이 우리 앞에 주어지고 있습니다. 우리 앞에 어떤 일이 있다 해도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께 세움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위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세움을 받아 구원을 받기 위해서 살아가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육체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육체가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는 않지만 그 육체로 살아가고 있고 그것이 누구는 먹는 자로 누구는 먹지 못하는 자로 나타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을 보고 판단하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판단을 하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는가 하면 먹는 자도 그렇고 먹지 못하는 자도 역시 그렇습니다. 모두가 하나님께 세움을 받아 영생을 누리기 위해서 살아가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의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으로 구원을 하셔서 세우시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아무리 강조를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다른 것을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께 로서 세움을 받아야 합니다. 영혼 구원을 받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복음을 다 알고 믿고 있는 성도가 자기의 먹는 것으로 먹지 않은 것으로 형제를 판단함으로 해서 형제가 거치게 된다면 안 된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세움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 권능이 주께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에서는 그의 권능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권능이 우리에게 임하고 있습니다. 그 권능을 믿고 있다면 내가 먹는 것으로 먹지 못하는 것으로 형제를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