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니라(요6:63.)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약속이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

로마서 강해 -

로마서 강해 143강, 우리 중에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가 없고

윤주만목사 2018. 11. 19. 08:29


로마서14:7절을 보겠습니다. (258)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로마서14장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정말 주의 깊게 보아야 합니다. 이 시대는 성경을 너무 쉽게 보고 있습니다. 성령이 오시지 않으면 누구나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사람의 이성을 가지고 성경을 보면 종교인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이제까지 기독교인입니다

문서로 남겨져 있는 그들의 글을 보면 성경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를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을 그렇게 봄으로 해서 그가 어떻게 되는가를 성경이 가르쳐 주고 있지만 그것조차도 깨달을 수 없어서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면서 살아가고 있지만 자기들이 영의 일을 하면서 살고 있다는 착각 속에 빠져 있습니다.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사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지금 이 시대 우리가 성경을 보고 복음을 볼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입니다 그 은혜를 받은 성도는 하나님께 늘 감사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감사는 자기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거함으로 주님의 날에 부활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성령의 감동으로 역사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날을 중히 여깁니까?

어느 날을 중히 여기고 있습니까? 우리가 모여서 복음을 듣고 있는 날을 중히 여기고 있습니다.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있는 그 날을 중히 여기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는 주의 만찬을 나누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만찬을 나누는 날을 우리는 중히 여기고 있습니다.

 

물론 초대교회와 다릅니다.

그때는 지금과 같이 과학이 발달이 안 되어 있는 시대입니다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면 그때 들어야 합니다. 그때 듣지를 못하면 다시 들을 수 없기 때문에 날을 중히 여겼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과학이 발달을 해서 문서로 남겨 놓고 있고 또 영상을 편집을 해서 언제든지 다시 들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그렇게 듣고 있는 성도도 구원을 받는다는 것에 대해서 부정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의 만찬을 나누어야 합니다. 실제 우리 모임에 와서 듣고 있는 성도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차이가 있다는 것을 많이 느끼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의 만찬을 나누는 날을 중히 여기고 그 날에 모여서 복음을 들어야 합니다.

 

날을 중히 여기시기 바랍니다.

주일을 중히 여기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주일 역시 안식일과 같은 날이기 때문에 그것을 중히 여기는 것은 율법을 지키는 일이고 그것은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는 일이기 때문에 도리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거절하는 행위가 된다는 것을 이제 우리 성도님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모이는 날입니다

복음이 전파가 되고 있는 날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이루신 구속의 일이 이루어짐으로 해서 내가 구원을 받고 있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먹습니다.

누구를 위하여 먹습니까? 주를 위하여 먹습니다. 우리는 모일 때마다 주의 만찬을 먹고 있습니다. 그것을 요한복음에서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를 인하여 살리라 이것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먹고 있습니다.

우리가 유월절을 먹고 있습니다. 왜 먹고 있는가 하면 주를 위하여 먹고 있습니다. 어떻게 주를 위하여 먹고 있는가 하면 우리가 먹음으로 해서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이루신 구속의 일이 내 안에서 역사를 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주를 위하여 먹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먹고 있습니다.

그것을 아무나 먹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편지를 통해서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있는 사람은 지극히 적습니다. 내가 먹을 수 있는 것은 내가 지혜가 있어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먹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사실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누가 성경을 보고 복음을 말하고 있습니까? 이제까지 기독교를 보시기 바랍니다. 아니 이 시대만 보아도 우리가 얼마나 큰 사랑을 받고 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기독교인이 20억 명이 넘습니다.

그런데 복음을 깨닫고 있는 사람이 지극히 적습니다. 적은 정도가 아니라 거의 없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 중에서 우리가 먹을 수 있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 사랑이 우리에게 임하고 있기 때문에 이 시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먹고 있고 그 믿음으로 우리가 구원을 받고 있습니다.

 

먹으시기 바랍니다.

영생을 얻으려면 반드시 먹어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도 우리에게 무교병을 먹으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무교병을 먹고 있는 사람이 지극히 적습니다. 아니 그것을 먹일 수 있는 사람이 없어서 모두가 우상의 집에서 우상의 제물을 먹고 있으면서도 자기들이 무엇을 먹고 있는지를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구원을 받은 성도입니다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고 있고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잘 이해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구원을 받게 복음을 주시고 이 시대 그것을 듣고 영생의 소망을 바라보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먹는 자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먹지 않는 자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지난 시간에 이미 말씀을 드렸지만 이 두 사람은 구원을 받은 우리 성도라는 것을 말씀을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삶 속에서 누구는 먹는 자로 살아가고 있고 누구는 먹지 않는 자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는 자유합니다.

모든 일에 있어서 자유하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문제만 아니라면 정욕을 위하여 교회 안에서 육신의 일을 도모하는 일만 아니라면 어느 일에 따라서는 먹는 자로 보일 수도 있고 먹지 않은 자로 보일 수도 있지만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고 있고 먹지 않은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않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입니다

그가 우리 성도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오직 구원을 받아 영생을 위해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로마서 14장에서 가르쳐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말씀의 의미를 깨닫지를 못하고 그저 성경에 보이는 문자를 보고 또는 자기들의 행위를 보고 먹는다고 먹지 않는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주를 위해서 사시기 바랍니다.

영생을 얻기 위해서 살라고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이 영생에 대해서 너무 쉽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먹고 있는지 먹지 않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주를 위해서 산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우리 가운데는 자기만을 위하여 사는 사람도 없고, 또 자기만을 위하여 죽는 사람도 없습니다.”


이제 명확합니다.

로마서143절부터의 말씀은 구원을 받는 성도들에게 하고 있는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참으로 이 말씀이 풀리지가 않아서 15일 정도를 성경을 보고 또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시대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볼 때마다 복음을 볼 수 있게 역사를 하고 있다는 것을 저는 믿고 있습니다.


우리 중에는

더 이상 명확한 말씀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은 구원을 받은 우리 중에 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로마서143절부터의 말씀은 구원을 받은 사람들에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구원을 받는 성도는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가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영생의 일입니다

우리가 왜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까? 그것은 오직 단 한 가지 영생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그것 외에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주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구속의 일을 이루셨습니다. 그 구속의 일이 우리 안에서 역사를 함으로 해서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거하고 있고 그 영으로 말미암아 주님이 오시는 날에 부활의 신령한 몸을 입습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이 아닙니다.

정말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은 우리에게 천국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이 천국은 말로 표현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내가 가히 사람의 말로 이루지 못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고 사도 요한은 거의 비유로 해서 같더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신명기16:22절을 보겠습니다. (288)

자기를 위하여 주상을 세우지 말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느니라


성경입니다

우리에게 영생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영생을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본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이것에 대해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성령이 오셔서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심을 받는 성도만이 알 수 있습니다.

 

기독교인입니다

그들과 우리 성도가 성경을 보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같은 성경을 보고 있지만 그들이 말하는 것과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이것이 성경입니다 물론 기독교인들은 그들이 지혜가 있어서 성경을 바로 보고 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진리로 인도함을 받고 있는 성도는 그들이 얼마나 잘못 보고 있는가를 알고 있습니다.

 

유아적입니다

이 시대 기독교인들이 얼마나 초등학문에 빠져 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들은 자기들이 지혜가 있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보는 눈이 거의 180도 다르게 보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 볼 수밖에 없는가 하면 그들에게는 성령이 오시지 않았고 우리에게는 성령이 오심으로 해서 진리로 인도함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정말 이상합니다.

조금만 주의 깊게 보면 성경에서 말씀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 시대는 거의 거꾸로 보면서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자기를 위해서 사는 것이 무엇인지 주님을 위해서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성경을 보면서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합니까?

성경을 잘못 보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으면 주님을 위해서 산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세상 사람은 자기를 위해서 살아가고 있고 교회 안에서 율법을 지키고 있는 자기들은 주님을 위해서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주를 위해서 살기 위해서 교회 안에서 행위에 더욱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로마서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 중에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는데 자기를 위해서 사는 것이 무엇인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아니 로마서13장까지의 말씀에서 복음을 듣지를 못해서 14장에서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지 조차 모르고 있습니다.

 

자기를 위해서 사는 자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모두가 자기를 위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기를 위해서 살아가고 있으면서도 왜 자기를 위해서 살아가고 있는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로마서14장을 이야기를 하면서 자기들은 주를 위해서 살고 있다고 말을 하고 자기들과 다르면 자기를 위해서 살고 있다고 정죄를 하고 있습니다.


나를 위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을 신명기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레위기26장에서도 자기를 위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지 말찌니 목상이나 주상을 세우지 말며 너희 땅에 조각한 석상을 세우고 그에게 경배하지 말라 나는 너희 하나님이 여호와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상, 주상, 목상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다 자기를 위하여 세우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신명기에는 하나님께서 미워하신다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이 시대는 교회 안에 수많은 우상이 세워져 있고 주상과 목상이 세워져 있으면서도 그것을 깨달을 수 있는 지혜가 없습니다.

 

영생입니다

성경은 영생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영생을 생각하지 않고 있다 보니까 성경을 보면서도 도무지 무슨 말씀을 하고 있는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해서 사는 자가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실제 이 말씀 그대로 복음을 듣고 믿음이 있는 성도는 자기를 위해서 사는 자가 없습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이 시대 교회는 모두가 자기를 위해서 살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 자기를 위하여 주상을 세우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너무 많은 우상들을 세우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우상이라는 것을 어느 누구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자기를 위하여 주상을 세우고 있습니다.

신명기에서 율법으로 정해 놓으셨습니다. 그러나 이 율법을 보고도 주상이 무엇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주상을 알고 있다면 절대로 교회 안에 주상을 세우지를 않습니다. 아니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알면서 자기들의 교회 안에 주상이 세워져 있지 않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우상입니다

주상과 같은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미워하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미워하십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오셔서 하실 일을 사람들이 한다고 하기 때문에 미워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구원을 받기를 원하시고 있는데 이 주상을 세움으로 해서 구원을 받지 못하게 하기 때문에 미워하시고 있습니다.

 

영생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모세를 통해서 자기를 위하여 주상을 세우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주상을 세움으로 해서 그가 구원을 받을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미워하시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 주상을 미워하시는가를 모르고 그저 막연하게 하나님께서는 우상을 미워하신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까지 말씀을 했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는데 있어서 두 가지의 의를 말씀을 했습니다.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율법을 완전케 하심으로 해서 우리가 믿음으로 얻는 의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순전히 주님께서 지키신 율법의 의를 내 것으로 가져옴으로 해서 내가 의롭다 하심을 받아서 구원을 받고 있습니다.

 

다른 하나입니다

그것은 율법을 지키는 의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율법으로는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아니 율법을 지키는 것을 악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지체에는 선한 것이 없는데 그것을 지키려고 하는 자체가 악이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선한 것이 없어서 구원을 받을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미워하십니다.

 

구원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습니다. 실제 복음을 듣고 믿는 성도는 자기를 위해서 살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는 자기를 위하여 주상을 세우지를 않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율법을 지키지 않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 있는 거의 모든 사람은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일

자기를 위해서 주상을 세우는 일입니다 이것이 무슨 일인가 하면 로마서7장에서 악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내 속 곧 내 육신에는 선한 것이 거하지 않아서 내가 원하고는 있으나 원치 아니하는 악만 행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 시대 기독교인 전부는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주상을 세우고 있습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 미워하시고 있습니다. 왜 미워하시는가 하면 그것이 다 악한 일이기 때문에 미워하시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분명히 내 속 곧 내 육신에는 선한 것이 없어서 악만 행하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육신으로 율법을 지키는 행위가 이렇다는 것을 어느 누구도 깨닫지를 못하고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까?

자기를 위하여 살고 있습니다. 그것을 신명기에서는 자기를 위하여 주상을 세우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레위기에서는 우상을 세우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 교회 안에 이렇게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우상이 만연을 하고 있지만 율법을 지키고 있는 그들이 주를 위하여 살고 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우상입니다

로마서를 시작하면서 이 우상에 대해서 말씀을 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시대는 우상이 무엇인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구원을 방해를 하는 모든 행위가 우상이 되어서 사람들을 사망으로 끌고 가고 있지만 성령이 오시지가 않아서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율법 단 한가지입니까?

율법이 아니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교회 안에서 하고 있는 단 한 가지의 행위가 우상이 되어 있습니다. 그 우상을 보고 사람들은 자기도 그렇게 되고 싶어 합니다. 그렇게 우상에게 모두가 빠져 있지만 깨달을 수 있는 지혜가 없어서 우상을 세우는 일에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누가복음12:21절을 보겠습니다. (115)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성도입니다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분명하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있다면 그는 성도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자기를 위하여 살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있다면 그는 어리석은 사람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성경이 이렇게 말씀을 하고 있지만 이 말씀을 보고도 자기를 위하여 사는 것이 무엇인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성경을 모르면 어떻게 됩니까?

교회 안에서 자기를 위하여 살고 있으면서도 자기를 위하여 살고 있다는 것을 모르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 평생을 자기를 위하여 살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을 아주 잘 믿고 있다는 착각에 빠져 이 부자와 같이 살아가게 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고도 이 말씀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습니다.

교회 안에 이런 자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성도들 중에는 이런 자가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고 있는 성도는 한 사람도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부자입니다

한 부자를 비유로 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말씀을 보면서 도무지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한 부자라고 말씀을 하니까 자기는 부자가 아니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늘 말씀을 드리지만 교회 안에 있는 사람은 세상에 대해서 부자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한 부자는 교회 안에 있는 부자 전체를 대표하는 한 부자입니다

 

율법 한 가지입니다

그것이 사람을 부자로 만들고 있습니다. 물론 율법을 전체 잘 지키는 사람에 비하면 가난하게 생각이 될 수 있지만 하나도 지키지 않고 있는 세상 사람에 비하면 그도 부자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어느 한 가지라도 율법을 지키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한 부자가 자기를 위하여 살고 있습니다.

어떻게 자기를 위하여 살고 있습니까?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고 하나님에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를 부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어느 한 부자를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시대 교회 안에서 율법을 한 가지라도 지키고 있는 모든 사람을 비유로 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재물을 쌓아 두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을 보면서 사람들이 참으로 많이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지 말라고 말씀을 하니까 마치 이 세상에서 사용하는 재물을 말씀하는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고 자기에게 재물이 있으면 이런 말씀을 보면서 스스로 정죄에 빠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 재물을 쌓아 두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정도의 차이입니다

누구는 많이 쌓아 두었습니다. 누구는 적게 쌓아 두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재물의 단위를 정확하게 말씀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이 말씀을 세상에서 사용하는 재물로 보면 누구라도 정죄를 받을 수밖에 없고 그것이 스스로 정죄가 되어서 사망에 이른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영생의 말씀입니다

지금 주님께서 무엇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영생을 얻는데 있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영생을 얻어야 하는데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는 사람은 하나님에 대하여 부요치 못해서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둡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위하여 부요치 못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늘 말씀을 드리지만 두 가지를 가지고 비교를 해서 말씀을 하면 어느 것 한 가지를 하면 어느 것 한 가지는 못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주 작은 것이라도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고 있는 사람은 하나님에 대하여 부요치 못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둘 다 할 수 없습니다.

반드시 어느 것을 하면 어느 것은 하지 못 합니다 그런데도 이 시대는 성경을 자기들의 마음대로 보고 있습니다. 재물도 쌓아두고 있고 하나님에 대하여도 부요하려고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실제 이것을 문자적으로 보면서 교회 안에서 그렇게 살아가면서 스스로 정죄에 빠지고 있습니다.

 

어떻게 합니까?

재물을 쌓아두는 것에 있어서는 정죄를 받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는 하나님에 대하여 부요하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비록 재물을 조금 쌓아 두고는 있지만 나는 하나님에 대하여 부요한 자로 살아가고 있다면서 스스로에게 안위를 주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안 됩니다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그런 재물이 아니라 율법의 의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기본적인 비유의 말씀도 깨닫지를 못하다보니까 자기들이 교회 안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줄을 모르고 거대한 종교가 이끄는 대로 끌려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막연하게 자기들은 하나님에 대하여 부요하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부요합니까?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지 마시기 바랍니다. 자기를 위하여 단 하나라도 재물을 쌓아두고 있는 사람은 절대로 하나님에 대하여 부요한 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부요한 자가 되려면 먼저 앞에 있는 말씀을 바로 알고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어서는 안 됩니다


율법의 의입니다

어느 한 가지라도 내가 지키고 있다면 그것은 재물이 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율법을 지키면서도 그것이 재물이라는 것을 꿈에도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면서도 그것이 자기를 위하여 지킨다는 것을 모르고 종교가 하나님을 위하여 율법을 지킨다고 하니까 거기에 모두가 미혹이 되어서 율법을 지키는 일에 열심을 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율법 누구를 위하여 지킵니까?

제가 이런 질문을 하면 거의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성도로서 살기 위해서 지킨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이 지키고 있는 율법을 보면서 하나님을 위하여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면서도 그것이 자기를 위하여 지키고 있는지 하나님을 위하여 지키고 있는지도 모르고 막연하게 다수가 지키니까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악한 일입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7장에서 죄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그냥 도덕적인 죄가 아니라 구원을 받지 못하는 죄라고 이미 말씀을 드렸습니다. 구원을 받지 못하는 죄면 그것이 누구를 위하여 지키고 있는가를 아주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율법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은 그것이 구원을 받지 못하는 죄라는 것을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지킵니까?

그것은 사람의 생각입니다. 성경은 절대로 그렇게 말씀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성경을 보는 사람들이 막연하게 그럴것이다 라는 생각에서 그렇게 말을 하고 있고 사람들은 가기들의 이성으로 생각해서 그것이 맞기 때문에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율법 자기를 위하여 지키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일이 악이라는 것을 알면 그것이 구원을 받지 못하는 죄라는 것을 알면 절대로 지키지 않습니다. 성경은 그것을 분명하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율법에 대해서 기초가 되어 있지 않다보니까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자기를 위하여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 율법을 지키는 행위를 보면서 천국의 백성이 되었다고 하면서 부자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까?

그는 절대로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자가 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도 율법을 지키는 부자를 비유로 해서 이렇게 율법을 지키면서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는 자는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할 수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보고도 사람들은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왜 지킵니까?

주님께서 말씀하신 이 비유를 깨닫지를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그들이 이 비유의 말씀을 깨달았다면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는 일을 절대로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바리새인과 마찬가지로 사람의 이성을 가지고 성경을 보다가 이 시대 역시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입니다

사도들이 복음을 전할 그때에는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이 생명을 아까워하지 않으면서 순교를 당하면서 전한 복음이 불과 한 세대가 가고 나니까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는 사람만 있게 되었습니다.

 

빌립보서1:21절을 보겠습니다. (319)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습니다.

또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 성도가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에 대해서 다 말씀을 하고 난 후에 우리 성도가 사는 것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로마서143절부터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은 성도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구원을 받는 성도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또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누구를 위하여 삽니까?

그것을 8절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는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말씀을 보고 더 맹목적으로 빠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은 먼저 구원을 받은 성도가 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먼저 구원을 받은 성도가 이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하면 자기를 위하여 살지 않고 자기를 위하여 죽지 않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입니다

그는 구원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는데 있어서 성도들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가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구원은 잊어버리고 그저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으로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모든 말씀입니다

구원을 생각하면서 보아야 합니다. 구원을 생각하지 않으면 말씀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구원을 한번 받으면 그것으로 끝이 나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 성도가 구원을 받는 것은 일회성이지만 그러나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부지런하게 성경을 보면서 이것을 붙잡으려고 해야 합니다.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방에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가 어떻게 살았는가를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어느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그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나타내기 위해서 살았다고 해도 전혀 틀리지가 않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그는 자기가 죽었다는 것을 늘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죽었습니다.

왜 사도 바울이 죽었습니까? 사도 바울 자신을 위해서 죽었습니까? 그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나타나기 위해서 죽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면서 자기가 나타나는 것을 정말로 싫어했습니다. 어느 한 가지라도 자기가 나타남으로 해서 복음이 가려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실제 죽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가 없다고 말씀을 하니까 마치 그 육체가 죽는 것으로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영의 일을 비유로 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실제 죽는 것이 아니라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 자기를 죽은 자와 같이 나타내고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죽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하면서 죽었습니다. 어떻게 죽었는가 하면 자기의 의가 전혀 나타나지 않게 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에도 아볼로가 무엇이며 바울이 무엇이냐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죽은 자로 복음을 전했지만 그래도 사람들은 사도 바울을 보았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죽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것이 성도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이유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또 주님께서 우리에게 부탁을 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정말 그 일에 열심을 내야 합니다. 우리가 하는 그 일을 통해서 한 영혼이 구원을 받는다면 그보다 더 귀한 일은 없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역설적으로 우리가 복음을 전하면 전할수록 우리는 자꾸 살아나게 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그것을 죽이기 위해서 정말 애를 썼다는 것을 우리가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기 때문에 누군가 사도 바울을 인정해주면 그것이 결코 나쁘지 않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보다 사실 이것을 죽이는 것이 더 힘들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자기를 위하여 죽습니다.

왜 죽습니까? 내가 복음을 전하고 나서 버림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물론 그런 일은 없지만 아무튼 성경이 그렇게 말씀을 하니까 우리는 늘 이것을 생각하고 있어야 합니다. 내가 버림을 받지 않을지라도 나에게서 복음을 듣는 그 사람이 나를 보다가 버림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우리 성도는 죽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나를 위하여 죽습니까?

그것이 아니라 내가 복음을 전했기 때문에 그 복음이 역사를 하게 하기 위해서 내가 죽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는 이렇게 죽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죽는 것이 나를 위하여 죽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 역시 죽었습니다. 그가 죽음으로 해서 자기 안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를 나타내고 있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도는 이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나를 위하여 죽지 않습니다. 누구를 위하여 죽습니까? 내가 복음을 전하면 그 듣는 사람을 위하여 죽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 하고 있는가 하면 내가 죽지 않으면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자기를 죽이고 있습니다.

 

성도가 죽습니다.

그것이 나만을 위해서 죽습니까? 성도가 이 세상에서 죽은 자와 같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가 하면 그렇게 함으로 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로마서의 말씀을 전혀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죽은 자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세상 어느 누구도 자기가 한 일에 대해서 죽으려 하지 않지만 우리는 천하보다 더 귀한 영혼을 살리는 일을 했어도 죽은 자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나에게서 복음을 듣고 있는 그 사람을 위해서 죽고 있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죽으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 아무리 큰일을 했다 해도 죽어야 합니다. 그것이 죽지 않으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가 될 수 없습니다. 이 시대 기독교가 왜 다른 복음에 빠져 있는가 하면 자기들이 죽어야 하는 이유를 모르고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고린도후서6:9절을 보겠습니다. (292)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는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성도입니다

우리 성도를 세상이 받아들인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제가 복음을 전하면 사람들이 오해를 합니다. 진리를 처음 접하고 나면 마치 하나님께서 자기 안에서 역사를 하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도리어 살려고 하는 사람들이 가끔 있습니다.

 

죽는 자 같습니다.

우리 성도는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볼 때 그리고 세상 사람들이 볼 때 죽는 자와 같다는 것을 늘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아니 죽는 자가 되어야 우리가 복음을 전하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성경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도는 이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이 볼 때입니다

아니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보입니다. 속이는 자 같습니다. 무명한 자입니다 죽은 자입니다 징계를 받은 자입니다 근심을 하는 자입니다 아무 것도 없는 자입니다 성도가 이렇게 보인다는 것을 늘 생각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시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거꾸로 살아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의 이성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성령이 오시면 나를 이렇게 인도하시고 있습니다. 누가 우리가 전하는 복음을 들을 수 있습니까? 이 시대 우리가 복음을 전하지만 이 말씀을 듣는 거의 모든 사람이 우리를 속이는 자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복음이 있다는 것이 그렇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다수가 다들 율법을 지키라고 하면 율법을 지키지 말라고 하는 우리가 속이는 자가 됩니다.

 

우리는 무명한 자입니다

우리 중에 누가 유명한 사람이 있습니까? 사람들이 성경을 보면서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면서 여러 가지 기적이 나타나고 하는 역사가 있으니까 꽤나 유명했던 것으로 생각을 합니다. 물론 복음이 처음 전파가 되었을 때는 그럴 수 있으나 그 후에 사람들은 유명한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유명한 신학자입니다

그들이 쓴 글을 보시기 바랍니다. 복음이 전파가 되었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도들이 죽은 이후에는 이미 복음이 사라졌습니다. 그 후에 세상적으로 유명한 사람들이 나와서 그들의 글이 내려오고 있지만 그들은 복음을 알지 못했던 것으로 보이고 있습니다.

 

성도는 죽는 자입니다

왜 죽고 있는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나타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어떤 일을 하면 자기를 나타냅니다. 그러나 우리는 생명에 관한 일이기 때문에 우리가 나타나면 안 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가 되어서 역사를 함으로 해서 그가 구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죽은 자로 살면서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가 없습니다.

누구를 위하여 죽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죽고 있습니다. 이 복음만이 사람들에게 생명을 줄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 있는 거의 모든 사람들은 복음을 전한다고 하면서 죽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아니 어떻게든지 자기가 살아있다는 것을 나타내려 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위해서 삽니까?

영혼 구원을 위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가 죽는 것도 다 이 영혼 구원을 위해서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서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성도는 이렇게 복음을 위해서 살아가고 있지만 교회 안에 있는 다수는 죽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죽는 자 같습니다.

그것을 로마서에서는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가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도는 이 세상에서 이렇게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에 우리가 영원한 생명으로 부활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천국을 선물로 주시고 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교회 안에는 죽는 자가 거의 없습니다.

 

로마서14:8절을 보겠습니다. (25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

 

우리입니다

지금 누구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로마서14장은 구원을 받은 우리 성도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구원을 받은 우리 성도가 어떻게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가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정말 이 복음을 위해서 살아가고 있고 주님께서 부탁하신 일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인생들이 구원을 받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외에 어떤 것으로도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성도가 먼저 구원을 받습니다. 그리고 구원을 받는 성도가 세상에서 복음을 전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실 이 구원은 오직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역사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이 구원이 내세의 일입니다 그리고 내세는 우리 인생의 언어로 설명이 안 되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까 제가 구원에 대해서 말씀을 드려도 때로는 정말 아무 의미가 없는 것과 같이 느껴지고 있습니다. 구원이라는 것이 참으로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할 수 있으면 참 좋은데 그렇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생명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 생명이 너무 단단하게만 느껴지고 있습니다. 또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인생의 언어로 표현을 한다는 것이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다보니까 구원을 받는 성도도 자기가 어떻게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것을 모를 수 있습니다

 

아니 받아들이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설명을 하는 저 역시도 참으로 어렵게 느끼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인생은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로마서의 말씀을 보면 때로는 성경이 너무 영적으로 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인간의 삶에 대해서는 전부 무시를 하는 것과 같이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삽니다.

얼마나 힘이 든 일입니까? 저 역시도 어려서부터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가장 어려웠던 것이 이 말씀이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산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정말 막연하면서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모를 때가 많이 있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그때는 복음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때는 구원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이런 말씀들이 내 안에서 걸림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 말씀을 보고 막연하게 생각을 하면서 자기들의 이성을 따라 알고 있는 것으로 주를 위해서 살고 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모르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누가 주를 위해서 살 수 있습니까? 아니 늘 걸림이 되는 말씀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고 이 말씀을 안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모르니까 자기들이 알고 있는 것으로 주를 위해서 산다고 말을 하고 있고 그런 행위들을 보면서 서로 그렇게 격려를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주를 위해서 사시기 바랍니다.

어떤 행위를 하라고 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주를 위해서 살라고 말씀을 하니까 기독교인들은 자기들이 어떤 일에 열심을 내는 것을 보면서 주를 위해서 산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특히 목사들은 세상일을 하지 않고 목회를 하는 것으로 자기들이 주를 위해서 사는 것과 같이 말을 하고 있습니다.

 

누가 주를 위해서 삽니까?

목회를 하고 있는 목사들이 주를 위해서 살고 있습니까? 이제까지 거의 모든 목사들이 그리고 신학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이 말씀을 보면서 자기들이 주를 위해서 살고 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특히 이단성이 강한 교회일수록 자기들이 주를 위해서 산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서 신앙생활의 행위를 자랑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유명한 목사입니다

그리고 신학자들입니다 그들의 예화를 이야기를 하면서 주를 위해서 평생을 살다가 주님에게로 갔다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기독교사를 통해서 나타나고 있는 사람들은 주를 위해서 산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누가 주를 위해서 살았습니까?

어거스틴이 주를 위해서 살았습니까? 칼뱅이 그리고 웨슬레가 주를 위해서 살았습니까? 제가 이런 말을 하면 기독교에 있는 사람들은 심하게 반발할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로마서에서 복음을 보아서 알고 있듯이 이 사람들은 그리고 이 사람들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주를 위해서 살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주를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그가 신학자로서 위대한 삶을 산 것이 주를 위해서 산 것입니까? 그가 쓴 글이 후세에 전해지고 있고 그가 세운 기독교 교리가 전해지고 있다고 해서 주를 위해서 살았다고 할 수 있습니까? 그런 것으로는 주를 위해서 살았다고 말을 할 수 없습니다.

 

누구입니까?

먼저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어야 합니다. 그리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아야 하는데 이제까지 교회사를 통해서 나타나고 있는 거의 모든 사람은 육신의 일을 했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육신의 일을 했는가 하면 종교인으로서 육신의 일을 하면서 살았습니다.

 

신학자입니까?

그가 목사입니까? 그것으로 주를 위해서 살았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에 얼마나 많은 제사장들이 있었습니까?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사람의 이성에는 유명한 신학자고 또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감히 따라갈 수 없는 일을 했다 해도 그가 육신의 일을 했다면 주를 위해서 산 사람이 아닙니다.

 

열왕기상8:13절을 보겠습니다. (524)

내가 참으로 주를 위하여 계실 전을 건축하였사오니 주께서 영원히 거하실 처소로소이다 하고


모든 기독교인들입니다

그들은 입에 바른 말로 주를 위해서 산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들이 어떻게 주를 위해서 살고 있는가를 간증을 하고 있습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자기들이 한 행위를 가지고 주를 위해서 산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간증을 듣습니다.

지금은 거의 듣지를 않고 있지만 예전에는 들었습니다. 그때 목사들이나 유명한 사람들이 나오면 자기들이 어떻게 주를 위해서 살았는가를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듣고 사람들은 자기들도 주를 위해서 살겠다고 하면서 그렇게 살려고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간증이라는 것이 다 그런 효과를 얻기 위해서 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성도입니다

사도 바울은 구원을 받은 우리 성도가 살아도 주를 위해서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주를 위하여 살고 있습니다. 어떻게 주를 위하여 살고 있는가를 열왕기에서 솔로몬을 통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제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내가 참으로 주를 위하여 계실 전을 건축하였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전에 계신다는 것을 누구나 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늘 성전을 건축하려고 하는 마음을 가졌고 그것을 솔로몬 왕 때에 건축을 했습니다.

 

보이는 성전입니다

그것은 이 시대 보이지 않는 성전을 예표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전에 계십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 성전이 모두 무너지고 보이지 않는 성전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과 같이 보이는 성전에서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은 성전이 우리 안에 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받고 있습니다.


주를 위하여 건축했습니다.

이 성전이 무엇이라는 것을 우리는 다 알고 있습니다. 이 성전은 저의 육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입니다 이스라엘은 이렇게 보이는 성전을 건축함으로 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었습니다. 그 성전을 보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믿었습니다. 물론 아주 지극히 적은 사람이 성전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았습니다.

 

성전을 건축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하시는 모든 일을 나타나게 했다는 말씀과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늘 말씀을 드리지만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에서부터 출발이 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가 알아야 믿을 수 있고 그렇게 믿을 때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거하시게 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주를 위하여 건축을 했습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은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말로는 주를 위하여 산다고 하지만 어떻게 사는 것이 주를 위하여 사는 것인 줄을 모르고 사람의 감성을 자극하는 말로 하고 있습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했습니다.

만약에 그가 구원을 받지 못했다면 그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했다는 말씀은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 믿었다는 말씀과 같습니다. 성전은 저의 육체이기 때문에 비록 보이는 성전을 건축했을지라도 구약은 그림자이기 때문에 이 말씀을 통해서 솔로몬이 믿음이 있었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주를 위하여 사는 것입니까?

이 세상에서 보이는 것으로 무엇을 하는 것이 주를 위하여 사는 것입니까? 보이는 교회를 건축을 하고 그 안에서 주일 마다 예배를 드리고 하는 것이 주를 위하여 사는 것입니까? 그것은 이미 구약을 지나오면서 다 그림자로 남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성전을 건축해야 합니까?

솔로몬과 같이 성전을 건축해야 주를 위하여 사는 것입니까? 분명히 맞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솔로몬과 같이 보이는 성전을 건축하는 것이 주를 위하여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성전이 지어져야 주를 위하여 사는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전을 건축해야 합니다.

구약에 솔로몬은 보이는 성전을 건축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보이는 성전을 건축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우리에게 그림자이기 때문에 보이는 성전을 건축했습니다. 그것은 분명히 주를 위하여 하는 일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그림자를 따라가서는 안 됩니다

 

주를 위하여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분명히 성전을 건축하는 일입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보이는 성전을 건축하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구약에 있는 말씀을 바로 알고 어떻게 성전을 건축해야 하는 가를 알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성경의 문자를 보고 주를 위하여 산다고 하는 그들이 성전은 건축하지 않고 행위에 열심을 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3:16절을 보겠습니다. (26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성전을 건축해야 합니다.

성전도 건축하지 않은 사람은 절대로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아니 성전도 건축하지 않은 사람은 주를 위하여 산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주를 위하여 살려면 반드시 성전을 건축해야 하고 그 성전을 보고 믿음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구원을 받는 성도만이 주를 위하여 산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주를 위하여 사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이루신 구속의 일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감성적으로 주를 위하여 산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분명히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성전이 건축되어야 합니다. 성전이 내 안에 있는 성도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고 그 사람이 주님이 이루신 구속의 일을 이루고 있는 사람입니다

 

어떻게 삽니까?

성도는 성전을 건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가라지는 성전이 저의 육체라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성전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이 시대 누가 성전을 건축하고 있습니까? 성전에 대해서 알아야 성전을 건축할 수 있는데 성전을 알고 있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구약에서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했습니다. 솔로몬은 보이는 성전을 건축했습니다. 그러나 그 성전이 이제 우리 안으로 들어왔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있는 성도들에게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문자를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말을 하고 있습니까? 자기들이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하면서 성령의 전이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 시대 기독교인들이 성령을 받았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 문자를 아는 것으로 이 문자 그대로 교회 안에만 있으면 자기들이 성전을 건축한 것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고 성령의 전이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알지 못하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알고 있다고 말을 하려고 하니까 감성적으로 이야기를 하면서 우리가 하나님의 전이라고 하면서 성령이 우리 안에 오셨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문자를 아는 것으로 성령이 오셨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그들이 어떻습니까?

성전이 그들에게 지어져 있습니까? 솔로몬은 보이는 성전을 지었습니다. 그러면 주를 위하여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고린도전서의 성경의 문자를 아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 어떻게 하나님의 성전이 지어져 있는 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성전이 어떻게 자기 안에 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성전이 되었습니까? 솔로몬이 지은 그 성전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서 믿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성전에 있는 기구 하나하나는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이루시는 일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입니까?

그러면 이 모든 것을 다 알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냥 성경의 문자를 보고 그것을 아는 것으로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하는 것은 너무도 어리석은 자의 이야기와 같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영생은 그런 막연함이 아니라 진리로 인도함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입니다

성막에 대해서 자세하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편지에서 성막에 대해서 거의 모든 것을 말씀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성막을 아는 것을 우리가 믿고 성령이 오심으로 해서 우리 안에 그 믿음으로 역사를 해서 그리스도의 영이 거하고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를 위하여 사는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막을 보았습니다.

이스라엘은 보이는 성막을 눈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그 성막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이루신 구속의 일을 알아 믿고 있습니다. 그렇게 성막을 알고 믿을 때 내 안에 성령이 오셔서 믿음으로 역사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솔직히 말씀을 드립니다. 이 시대 성막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됩니까? 제가 알기로는 거의 없습니다. 그런 그들이 주를 위하여 산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성막에 대해서 알지도 못하는 그들이 성전을 짓지도 못하고 있는 그들이 주를 위하여 산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누가 주를 위하여 살고 있습니까?

성막도 모르는 그들은 주를 위하여 산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성경에서 성막을 보고도 그것이 무엇인가를 모르고 있는 사람은 주를 위하여 사는 자가 아니라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런 기초가 안 되어 있는 사람은 성전을 건축할 수 없고 그런 사람은 성령이 오실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주를 위하여 살고 있습니까?

그러면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게 하고 있으면서 주를 위하여 산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지키고 있는 율법의 행위로 더럽게 하고 있지만 그것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는 주를 위하여 사는 자가 아니라 악한 사람입니다 그것을 고린도전서에서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죄를 짓지 말라고 하니까 더 더럽히는 율법의 행위에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그 자체가 죄라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깨달을 수 있는 지혜가 없습니다.

 

죄를 짓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하면서 죄를 짓지 마시기 바랍니다. 율법을 지키지 말라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로마서7장에서 율법을 지키는 것이 죄라고 말씀을 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율법을 열심히 지키고 있는 그들이 주를 위하여 산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주를 위하여 사는 자가 아니라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주를 위하여 삽니다.

주님이 이루신 구속의 일을 믿음으로 해서 주님께서 이루신 구원의 일이 나에게서 역사를 해야 주를 위하여 산다고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산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주를 위하여 사는 사람은 없고 모두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는 죄를 짓는 일에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1531절을 보겠습니다. (283)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삽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그 구속의 일이 내 안에서 역사를 해야 합니다.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은 아무리 그가 주를 위하여 산다고 감성적으로 호소를 한다 해도 그는 주를 위하여 사는 자가 아니라 자기를 위하여 살고 있는 사람입니다 반드시 구원을 받아야 주를 위하여 산다고 말을 할 수 있습니다.

 

말로만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분명히 우리 구원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구원은 성령이 우리에게 오심으로 해서 우리 안에서 믿음으로 역사를 하고 있습니다. 성령이 오시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말씀일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고 있는 성도는 우리 안에서 역사를 하고 있다는 것이 믿어지고 있습니다.

 

어떻게 믿어집니까?

그것은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막을 보았으면 그 성막에서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이루신 일을 알아 믿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늘 말씀을 드리지만 믿음이라는 것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성령이 내 안에 오심으로 역사를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구원을 받는 성도가 주를 위하여 살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삽니다.

또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늘 악한 자들과의 싸움이 그 앞에 있었습니다. 그는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 날마다 죽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의를 행하는 것이 무엇이고 죄를 짓는 것이 무엇이라는 것을 모르면 절대로 죽을 수 없습니다.

 

죽어야 합니다.

어디서 죽어야 합니까? 우리는 죄에서 죽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죄에서 죽지를 않고 있습니다. 죄에서 죽으라고 말씀을 하니까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짓고 있는 도덕적인 죄를 안 지려고 노력을 하고 있고 그것이 도리어 율법을 지키는 일에 열심을 내게 하고 있습니다. 주를 위하여 죽으라는 말씀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죽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성도는 죽는 것이 무엇인가를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이성에는 죽는 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쉽지 않지만 그래도 우리는 주님이 이루신 구속의 일을 알기 때문에 주를 위하여 죽는다고 사도 바울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 성도는 이 말씀 그대로 주를 위하여 죽고 있습니다.

 

죽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죽는가를 알아야 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죽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도리어 죄를 짓는 일에 더욱 열심을 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율법의 행위를 버려야 죽을 수 있는데 이 시대는 율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왜 우리가 죽습니까?

왜 우리가 죄를 짓지 않습니까? 왜 우리가 율법을 지키지 않고 있습니까? 이 모든 일이 주를 위하여 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이루신 구속의 일이 내 안에서 역사를 함으로 해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는 자는 절대로 죽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입니다

나는 날마다 죽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무엇에 대해서 날마다 죽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는가 하면 죄에 대해서 날마다 죽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죄를 짐으로 해서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게 할 수 있기 때문에 날마다 죽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죽어야 합니다.

그런 성도만이 주님이 이루신 구속의 일이 역사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죽지를 않고 있습니다. 아니 왜 죽어야 하는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어떻게 죽어야 하는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런 그들이 성경의 문자를 아는 것으로 자기들이 죽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주를 위하여 죽었다고 하는 그들이 매일 죄를 짓고 있습니다.

 

주를 위하여 입니다.

왜 주를 위하여 입니까?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구속의 일을 이루셨습니다. 그 구속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을 받고 있습니다. 그럼 이제 우리는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어야 그 구속이 우리 안에서 역사를 함으로 해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영생입니다

정말 사도 바울은 끝까지 이 영생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영생을 얻는 우리 성도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이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문자를 안다고 하는 그들이 감성적인 말로 사람들을 미혹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 가도 모르고 왜 죽어야 하는가도 모르는 그들이 교회 안에서 온갖 미사여구를 다 쓰고 있습니다.

 

성경입니다

우리에게 영생에 대해서 분명하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늘 우리는 지혜를 구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이 영생이 단번에 주어지는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지만 그래도 우리는 주를 위하여 살기 위해서 아니 구원을 받기 위해서 이 일에 열심을 내야 합니다.

 

누가 주를 위하여 살고 있습니까?

또 누가 주를 위하여 죽고 있습니까? 이 시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성경을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그저 문자를 아는 것으로 자기들이 그렇게 산다고 하면 그렇게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실상은 그들이 죽지 않아서 매일 죄가 넘치고 있고 그 죄로 인하여 사망의 길고 가고 있지만 사람의 이성으로 깨닫지를 못해서 악인의 길로 가고 있습니다.

 

주님이 이 세상이 오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심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믿지를 않고 있습니다. 왜 믿지 않고 있는가 하면 하나님의 성전이 그들 안에 지어지지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17:9절을 보겠습니다. (177)

내가 저희를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우리 성도입니다

늘 말씀을 드리지만 육체를 보지 마시고 영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육체의 사람이 아니라 영의 사람입니다 성경을 보아도 이 영을 생각하고 있고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도 이 영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에 있는 종교인들과는 전혀 다르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내게 주신 자입니다

하나님께서 주님에게 주신 자가 있습니다. 그것을 주님께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기도를 하고 계시는데 그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세상이 누구입니까?

주님이 자기 땅에 오신 이스라엘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기도를 하는 것은 이스라엘을 위함이 아니라 우리 성도를 위함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보면서도 교회 안에만 있으면 아버지께서 주신 자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세상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사람들은 불교의 사상에 빠져 성경을 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것입니다

우리가 누구입니까? 아버지께서 주님에게 주신 자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주님의 것이 된 우리는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은 우리가 주님의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주의 것입니다

어떻게 주의 것임을 알 수 있습니까? 그것을 사도 바울이 이제까지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말씀을 보고 교회 안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자기들이 주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고 있는 그들은 주의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이루신 구속의 일이 내 안에서 역사를 해서 구원을 받은 성도가 주님의 것이라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