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니라(요6:63.)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약속이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

로마서 강해 -

로마서 강해 139강,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윤주만목사 2018. 10. 17. 23:06


로마서13:13절을 보겠습니다. (258)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빛의 갑옷을 입자

사람의 어떤 행위로 입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기들이 행하는 행위가 빛인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 더욱 더 행위에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생명의 빛을 낼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주 안에서 빛입니다

주 안이라는 말씀을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 안이라고 하니까 자기들이 교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하면서 주여 주여 하는 것으로 주 안에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만 있으면 마치 주 안에 있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 육체를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영의 일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육체입니다

우리가 주 안에 있을 수 있습니까? 주 안에 있다는 것을 행함으로 나타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씀하는 행함은 이 시대 교회 안에서 기독교인들이 행하는 행위와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기독교인들의 행위는 율법의 행위고 성도들이 주 안에서 행함을 나타내는 것은 율법의 행위를 버리는 행함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빛의 자녀입니다

빛의 자녀처럼 행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성경을 오해를 해서 빛의 자녀처럼 행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빛의 자녀처럼 행하는 것은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빛의 열매를 맺어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인생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열매를 맺어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 인생들이 맺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맺어 주셨습니다. 이렇게 맺어 주신 빛의 열매가 우리 성도들에게 있다는 말씀입니다

 

어떻게 있습니까?

믿음으로 있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맺어주신 빛의 열매가 우리에게 있고 그것을 우리가 믿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모든 구속의 일을 믿는 그것이 바로 주님이 맺어 주신 빛의 열매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빛의 열매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것을 로마서에서는 빛의 갑옷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빛의 갑옷은 우리가 믿음으로 입을 수 있습니다. 입는다고 하니까 마치 옷을 입는 것으로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 인생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적인 표현입니다

 

믿음입니다.

그것을 입는다고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빛의 열매를 맺어 주셨습니다. 그 빛의 열매를 우리가 믿음으로 우리가 세상에 빛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세상에 빛이 된 우리 성도를 가르쳐서 빛의 갑옷을 입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반드시 이 빛의 갑옷을 입어야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이 시대는 성경을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아니 성경을 보면 거의 문자적으로 보고 이 빛의 갑옷을 자기들의 어떠한 행위를 통해서 입은 것을 보이려고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도리어 그것이 빛의 갑옷을 입는 것을 방해를 하고 있지만 지혜가 없어서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입습니까?

영의 일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입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영의 일을 사도 바울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오직 믿음이 아니고는 입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계속해서 우리에게 믿음을 말씀을 하고 있지만 이 시대는 믿음의 비밀을 몰라서 무엇을 어떻게 믿어야 하는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인생입니다

우리가 행하는 모든 행위는 빛이 될 수 없습니다. 사람의 이성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보려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도 없고 깨달을 수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제까지의 모든 기독교인들은 사람의 이성으로 신학이라는 것을 공부를 하고 그 안에서 배운 그것을 가지고 지혜를 깨달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빛의 자녀처럼 행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우리가 어떤 행위를 하는 것을 말씀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우리는 선을 행할 수 없는 인생입니다 그 인생이 어떠한 일을 한다 해서 그것이 빛의 자녀와 같이 될 수 있습니까? 사도바울은 우리에게 그것을 말씀하는 것이 아니지만 이 시대는 거꾸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 전제조건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어두움에 있었습니다. 이제 그 어두움의 일을 벗어 버리고 빛의 자녀처럼 행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어두움을 벗어 버리고 빛의 자녀처럼 행하라고 하니까 도리어 더 어두움의 일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거꾸로 보다보니까 아니 성경을 보아도 도무지 무슨 말씀인가를 모르니까 자기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점점 더 어두움의 일에 열심을 내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행하는 모든 행위입니다

그 행위는 다 어두움의 일입니다 내가 교회 안에서 하나님을 위한 일이라고 하는 그 모든 행위가 다 어두움의 일입니다 제가 이 시대 교회 안에서 행하고 있는 모든 일이 어두움의 일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도무지 받아들이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예배를 드립니까?

찬송가를 부릅니까? 기도를 하고 있습니까? 여러 가지 헌금을 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전도를 하고 있습니까? 그 외에도 내가 하고 있는 종교적인 모든 행위는 다 어두움의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 시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하고 있는 그 행위들이 다 빛의 자녀와 같이 행하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아닙니다.

내가 행하는 모든 행위는 다 어두움의 일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하신 모든 일은 빛입니다 이 어두움의 일을 벗어버리고 이제 복음을 들은 성도는 빛의 갑옷을 입자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하신 일을 우리가 믿자는 말씀입니다

 

반드시 어두움의 일을 벗어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진심으로 믿습니까? 아니 조금도 의심이 없습니까? 그럴지라도 여러분이 하고 있는 그 행위는 어두움의 일입니다 그 어두움의 일을 벗고 이제는 빛의 갑옷을 입어야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낮에 행동하듯이, 단정하게 행합시다. 호사한 연회와 술취함, 음행과 방탕, 싸움과 시기에 빠지지 맙시다.”

 

낮입니다

그리고 어두움입니다. 사람들은 성경을 이 세상 책으로 보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낮과 어두움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저 자기들의 이성을 따라 좋게 생각이 되면 낮이라 하고 있고 그것이 나쁘게 생각이 되면 어두움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기초입니다

이런 말씀의 의미도 모르고 성경을 본다는 것은 그에게 불행한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낮이 무엇인지 그리고 어두움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그가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우리의 상식입니다 빛이 있으면 낮이라 하고 있고 빛이 사라지면 어두움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해가 뜹니다.

그러면 낮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해가 지면 어두움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초등학생이라도 이것은 다 알고 있습니다. 그것을 낮은 그저 좋은 것으로 어두움은 나쁜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면 정말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영의 일입니다

그 일에 있어서 낮을 말씀을 하고 있고 어두움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성경을 보면서도 낮이 무엇인지 그리고 어두움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아무리 성경을 보아도 이렇게 쉬운 말씀도 보이지가 않고 있습니다. 사람의 이성이라는 것이 얼마나 진리를 막고 있는가를 알아야 하는데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이성입니다

거기에 영의 일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낮이 무엇인가 어두움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낮과 어두움은 함께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해가 뜨면 반드시 어두움이 물러가게 되어 있고 해가 지면 어두움이 찾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11:9-10절을 보겠습니다. (16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낮이 열두 시가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

 

비유입니다

주님께서는 거의 모든 말씀을 비유로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영의 일을 비유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서 이런 비유의 말씀을 모르면 그는 소경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성경을 보는 모든 사람들이 비유를 모르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을 하시고 있습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라고 말씀을 하시니까 유대인들이 참지를 못하고 돌로 쳐 죽이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하나님이라고 비유를 들어서 말씀을 하니까 그 비유를 알아들은 유대인들이 감히 하나님이라고 하니까 돌을 들어 쳐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말씀을 들으십니다.

그 나사로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시려고 하니까 제자들이 조금 전에 유대인들이 돌로 쳐 죽이려 했는데 다시 그리로 가려 하시느냐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낮이 열두 시가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모릅니다.

제자들도 주님의 말씀을 모르고 있습니다. 몰론 제자들은 나중에 그 말씀의 의미를 알았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 성경을 보고 있는 사람들은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도무지 모르고 있습니다. 사람이 낮에 다니면 빛을 봄으로 실족하지 않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실족

발을 헛딛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깜깜한 밤에는 사람들이 발을 헛딛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이 세상의 일을 가지고 비유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낮에는 발을 헛딛을 일이 거의 없습니다. 물론 낮에도 한눈을 팔면 발을 헛딛을 수 있습니다.

 

서울에서는 잘 모릅니다.

이 말씀이 실감이 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오셨을 때는 밤에는 전기가 없었습니다. 그 당시는 밤에는 온전히 하늘의 별과 달의 빛을 의지해서 다닐 수 있었습니다. 달이 없는 밤에는 자기 발밑도 잘 안 보였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 그 세상의 일을 가지고 영의 일을 비유로 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주님을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빛이 있으면 낮입니다. 그러나 그 빛이 없으면 어두움이 됩니다. 주님께서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않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함께 계시기 때문에 너희가 실족하지 않을 수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밤입니다

어두움이 있는 때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계시지 않은 때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 빛이 어두움을 비추매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빛입니다 우리를 비추는 생명의 빛입니다 우리는 이 빛에 비췸을 받아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어두움입니다.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율법의 행위를 했습니다. 그 율법의 행위를 어두움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모든 행위는 다 어두움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이루신 구속의 일은 다 빛입니다 우리 성도는 낮에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교회 안에 다수입니다

그들은 다 어두움에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 시대 어느 종파를 막론하고 율법을 지키지 않는 교회는 없습니다. 제가 이제까지 아는 모든 교회는 다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더 많이 지키느냐 조금 덜 지키느냐의 차이지 모두가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렇게 율법을 지키는 모든 사람들을 어두움에 다니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빛에 있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빛에 있기 때문에 어두움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 성도는 낮에 사는 것과 같이 살아가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서 천국은 밤이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거기에는 어두움이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은 빛입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빛이라는 말씀입니다 그 빛에 우리가 비췸을 받아 우리에게 생명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빛에 비췸을 받지 않고 있는 사람은 다 어두움에 있습니다. 교회 안에 있다고 해서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해서 빛에 있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실상은 빛이 없으면서도 교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가 어두움의 일을 하고 있다면 빛이 없습니다. 그가 율법을 지키고 있다면 그는 빛에 거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가 율법을 지키고 있다면 그는 낮에와 같이 단정하게 행하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어두움에 있는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빛에 있어야 합니다.

세상의 이성적인 빛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에게 참 빛입니다 그분만이 우리에게 빛을 비춰주시고 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은 유대인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게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전체 율법을 지켜서 어두움에 있었고 기독교인들은 자기들이 정한 율법을 지킴으로 해서 어두움에 있습니다.

 

깨닫지를 못 합니다

빛에 있는지 어두움에 있는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성경을 아무리 보아도 빛이 무엇인가 어두움이 무엇인가를 모르고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율법의 행위에 모두가 빠져 있습니다. 그렇게 율법을 지키고 있는 사람은 단 한 가지라도 율법을 지키는 사람은 빛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두움에 있음으로 반드시 실족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밤입니다

진짜 어두운 밤을 경험해 보시기 바랍니다. 정말 내 발 밑도 안 보이는 어두움에서 걸어보시기 바랍니다. 더구나 그 길이 평탄한 길이 아니라 험악하다면 반드시 실족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육의 빛도 그런데 영의 빛을 모르면 그 사람은 반드시 실족을 해서 넘어지게 되어 있고 그 넘어짐으로 해서 사망에 이른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성도입니다

우리는 낮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느 낮에 살아가고 있는가 하면 우리에게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 데 비취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말씀을 듣고 우리 마음에 생명의 빛이 떠오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이 시대는 이 빛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아니 모두가 어두움에 있어서 빛을 못 보고 있습니다. 빛이 어두움에 비취지만 어두움이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왜 어두움이 깨닫지를 못하고 있는가 하면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고 있고 사랑한다고 하지만 실상은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4:11-12절을 보겠습니다. (332)

또 너희에게 명한 것같이 종용하여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 이는 외인을 대하여 단정히 행하고 또한 아무 궁핍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단정하라

사람이나 그 차림새, 태도가 흐트러짐이 없이 깔끔하면서 반듯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세상에서 말하는 단정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말하는 단정함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서 말씀을 하고 있는 영의 일에 있어서 단정함을 생각해야 합니다.

 

낮에와 같이 단정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하는 것이 낮에와 같이 단정한 것인가를 성경을 통해서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저 문자를 아는 것으로 자기들의 행위를 단정하게 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영의 일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영의 생명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다는 것을 늘 생각하고 있어야 합니다.

 

교인들입니다

그 겉모습은 참으로 단정합니다. 그들이 얼마나 겉모습을 단정하게 꾸미려고 하는가를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 역시 율법주의에 있을 때 겉모습을 단정하게 꾸미려고 노력을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성도로서 당연히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마음이 있습니다.

 

성경입니다

육체의 일로 보면 모든 성경이 다 그렇게 보입니다. 거기서 사고의 전환이 없으면 안 됩니다 물론 사람의 지혜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을 구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자기들이 교회에만 나오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다수의 대중 앞에서 말을 하면 마치 성령이 오신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단정합니까?

누가 단정합니까? 목사가 단정합니까? 신부가 단정합니까? 아니면 절에 있는 스님이 단정합니까? 단정한 것으로 따지면 거의 비슷비슷합니다. 그래도 제가 보기에는 절에 있는 스님들이 더 단정하지 않을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육체의 모양을 보고 단정하다고 하는 사람은 성경을 전혀 모르는 사람입니다

 

우리 성도입니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낮에만 단정합니까? 그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낮에는 보고 있습니다. 그렇게 이 세상의 이성에 따른 것을 비유로 해서 낮에와 같이 단정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낮을 마치 이 세상의 낮으로 생각을 하고 있고 자기들이 하고 있는 신앙생활을 낮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영의 일입니다

영에 일에 있어서 태도가 흐트러짐이 없이 깔끔하면서 반듯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시기를 알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자다가 깰 때가 되어서 이제 우리 구원이 처음 믿을 때 보다 가까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믿음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일에 있어서 태도가 흐트러짐이 없이 깔끔하면서 반듯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우리 성도의 태도가 흐트러지지 않은 것입니까?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는 것이 우리 성도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흐트러짐이 없이 깔끔하면서 반듯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너무 모릅니다.

이 시대는 거의 문자적으로 보다보니까 성경의 의미를 전혀 생각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솔직히 말씀을 드려서 절에 있는 스님들이 불경을 보는 것보다 더 유치하게 성경을 보고 있습니다. 그런 그들이 사람의 언어로 감동을 주기 위해서 이 세상에 있었던 사람들의 일을 예화로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마도 그럴 것입니다

이 단정에 대한 말씀도 이 세상에 어느 목사의 이야기를 예화로 해서 어떻게 하는 것이 단정한 것인가를 사람의 말로 할 것이 분명합니다. 영의 일에 있어서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단정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다 육체의 일로 만들고 있습니다.

 

단정하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는 말씀입니다 거기서 흐트러지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다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를 통해서 계속해서 율법을 지키지 말라고 여러 가지 비유를 통해서 말씀을 하고 있지만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낮입니다

이 세상의 낮입니다 보는 눈이 있어서 사람들이 가능한 단정하게 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밤이 되면 사람들이 흐트러진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영의 일을 비유로 해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실제 이 세상의 낮과 밤을 비유로 해서 우리 영의 일에 있어서 낮에와 같이 단정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행해야 합니까?

그것을 사도 바울이 너희에게 명한 것같이 종용하게 자기 일을 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하라는 말씀입니까? 교회 안에서 목사들이 시키는 일을 종용하게 순종을 하면서 자기에게 맡겨진 일을 하라고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그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성도들에게 명한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영생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명령이 영생이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 영생에 대해서만 복음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이 영생에 대해서 너희가 구원을 받으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이 명령에 대해서 자기 일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영생을 받으려면 성경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깨달아 믿어야 합니다. 이 일이 자기 일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자기 일이 무엇인가를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자기 일입니다

예배를 드리는 것이 자기 일입니까? 교회 안에서 직분을 맡아서 묵묵히 일을 하는 것이 자기 일입니까? 교회에 나가서 그 교회에서 하는 모든 일에 따라 하는 것이 자기 일입니까? 그런 것은 하나님의 명령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일입니다

 

영생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성경에서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야 합니다. 이 일을 하기를 힘쓰라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이 시대는 종교가 시키는 일에 깊이 빠져 있습니다. 자기가 무슨 일을 해야 하는 줄도 모르고 그저 종교가 시키면 그 일이 자기 일인 것으로 생각하고 그 일에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자기 일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우리 성도는 이 일을 하기를 힘쓰고 있습니다. 정말 이 영생의 일만 하기에도 시간이 부족합니다. 솔직히 종교에서 하는 그 일을 할 시간이 어디 있습니까? 경쟁이 치열하고 살기에도 바쁜 세상에서 종교의 일을 하는 순간에 자기 일을 전혀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자기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외인에 대해서도 단정히 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믿음이 없는 사람들에게 우리 행함이 있는 믿음을 보이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부요하게 되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율법주의는 도무지 이해를 하지 못 합니다 우리가 행하는 단정함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아니 우리에게 하나님을 믿고 있느냐고 물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럴지라도 우리는 믿음의 비밀을 알고 있기 때문에 단정히 행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낮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비취셨습니다. 무엇을 비추셨는가 하면 생명의 빛을 비춰주시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 빛에 있는 사람은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구원에 있어서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이 성도로서 살아가고 있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신명기21:20절을 보겠습니다. (295)

그 성읍 장로들에게 말하기를 우리의 이 자식은 완악하고 패역하여 우리 말을 순종치 아니하고 방탕하며 술에 잠긴 자라 하거든

 

방탕입니다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성경을 바로 보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나쁜 의미로 말씀을 하고 있으면 교회 안에 있는 절대 다수의 사람들이 실제 이 시대 이렇게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교회 안에 있는 절대 다수의 사람들이 방탕하고 있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도무지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아니 자기들은 잘하고 있는데 다른 교회에 있는 사람들이나 세상 사람들이 방탕하게 살고 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교회 안에서 하나님을 가장 잘 믿고 있다고 생각하는 그들이 방탕하고 있습니다.

 

누가 방탕한 자입니까?

그 아비의 말이나 어미의 말을 순종치 아니하고 부모가 징책하여도 듣지 아니하는 사람이 방탕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방탕한 자는 그 성읍의 모든 사람이 돌로 쳐 죽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악한 일이라고 말씀을 하면서 너희 중에서 이같은 악을 제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참 무섭습니다.

아비나 어미의 말을 잘 듣는 사람이 있습니까? 정말 순종만 하면서 산 사람이 있습니까? 우리는 이 율법을 보면 자신이 없습니다. 육체적으로도 우리는 그렇게 살지를 못 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그런 육체의 말씀이 아니라 영의 일에 대한 비유의 말씀입니다

 

아비입니다

하나님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어미입니다 교회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과 교회의 말씀을 듣지를 않고 있는 자식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들에게 영생을 얻으라고 하고 있고 교회를 통해서 이 영생의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순종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 시대 기독교인들입니다

누가 아비의 말이나 어미의 말에 순종을 하고 있습니까? 물론 그들은 순종한다고 말할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영의 일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징책하여도 듣지를 않고 영생에 대해서 듣지를 않고 율법을 지킴으로 해서 복음에 복종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돌로 쳐 죽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교회 안에 있지만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악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이 방탕한 자가 누군가를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아니 자기들이 방탕에 빠져 있으면서도 자기들이 하나님을 잘 믿고 있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14:8절을 보겠습니다. (413)

또 다른 천사 곧 둘째가 그 뒤를 따라 말하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모든 나라를 그 음행으로 인하여 진노의 포도주로 먹이던 자로다 하더라

 

술 취하지 말라

이 시대 기독교인들이 얼마나 문자에 갇혀 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술 취하지 말라는 말씀을 보고 술을 안 먹고 있습니다. 누구라도 혹시 술을 먹으면 그것이 스스로를 정죄를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은 비유입니다

만약에 우리 성도가 술을 마시지 말아야 한다면 노아부터가 그 구원이 취소가 되어야 합니다. 노아는 방주에서 나와서 술에 취해서 자기 아랫도리를 벗고 자면서도 몰랐습니다. 그가 얼마나 많은 술을 마셨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노아 뿐 아니라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술을 즐겨 마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까?

왜 주님도 즐겨 마신 술을 마시지 않습니까?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제가 술을 많이 마시라고 조장을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술을 마시는 것이 전혀 믿음에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진노의 포도주입니다

로마서에서 율법은 진노를 이룬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율법을 지키는 것을 성경은 비유로 해서 술 취하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요한계시록에서는 진노의 포도주를 먹이던 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교회 안에서 율법을 지키게 했던 사람들에게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술입니다

두 가지를 비유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령에 취하는 것을 비유로 하고 있고 율법을 지키는 것을 비유로 하고 있습니다. 이 두 가지를 비유로 해서 에베소서에서는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이 두 가지의 술을 함께 마실 수 있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는 사람이 있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성도는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지 않습니다.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이 시대 교인들은 자기들이 성령을 받았다고 하면서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렇게 율법을 지키고 있는 사람은 성령이 절대로 오시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에서 두 가지를 가지고 비교를 해서 말씀을 할 때는 하나를 하면 하나는 못 합니다

 

술 취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교회 안에서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문자를 삼가 지키는 행위를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러한 행위를 하고 있는 사람은 성령이 아직 오시지가 않았습니다. 그가 아무리 성령이 오셨다고 주장을 해도 그 한 가지만 보아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이 시대를 보시기 바랍니다.

율법을 지키지 않는 교회가 있습니까? 늘 말씀을 드리지만 이 율법의 문제가 해결이 안 되면 그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은 사망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율법을 지키면서도 진노를 받지 않는다고 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자기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면 그는 불쌍한 인생이 되고 맙니다.

 

요한복음8:41절을 보겠습니다. (160)

너희는 너희 아비의 행사를 하는도다 대답하되 우리가 음란한 데서 나지 아니하였고 아버지는 한 분뿐이시니 곧 하나님이시로다

 

음란

음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왜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이 말씀을 하고 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성경에서 나쁜 의미의 말씀은 우리에게 경계를 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이 시대 기독교인들 거의 전부가 이 음란에 빠져 있습니다.

 

육체입니까?

우리나라가 음란에 빠져 있다고 말을 합니다. 물론 전체적으로 볼 때 음란에 빠져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런 육체의 일을 말씀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사람이 사는 세상에서 이 음란이 사라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일입니다

이 시대 역시 교회 안에서 음란을 행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경계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기들이 음란에 빠져 있으면서도 세상 사람들이 음란하다고 하면서 자기들은 그런 일을 하지 않고 하나님을 잘 믿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누가 음란합니까?

주님께서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너희 아비 행사를 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우리가 음란한 데서 나지 아니하였고 아버지는 한 분뿐이시니 곧 하나님이시라고 대답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 스스로가 음란하다는 것을 말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너희는 너희 아비 행사를 한다고 하니까 지기들이 음란한데서 나지 않았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입니다

그들이 그들의 아비의 행사를 했습니다. 그들의 아비의 행사가 무엇입니까? 그들은 자기들의 육적인 조상 아브라함의 믿음을 좇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자기들이 하나님을 잘 믿고 있다고 말을 하고 있지만 실상은 그들은 율법을 지키는 음란에 빠져 있었습니다.

 

생명입니다

우리 인생이 생명을 얻을 수 있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을 두 남편이라고 로마서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율법을 온전히 다 지켜서 그 의로 말미암아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율법 외에 나타난 하나님의 한 의를 내 것으로 가져와서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일입니다

 

이 두 가지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생명을 얻는 일에 있어서 두 남편을 섬기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두 남편을 섬기는 여자를 음란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 그러니까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율법을 지키고 있는 사람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입니다

그들은 아브라함의 행사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율법 외에 나타난 하나님의 한 의를 믿지 않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율법을 지키는 일을 했습니다. 그런 그들이 스스로 음란에 대해서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 두 가지를 함께하고 있는 모든 사람은 교회 안에 있지만 음란에 빠져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음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이것을 육체의 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의 일을 우리에게 말씀을 하고 있지만 성경을 보면서도 음란한 것이 무엇인가를 전혀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 그들이 세상에서 그런 것을 보면서 자기들이 안 그렇게 하는데 세상 때문에 자기들이 타락을 한다고 하면서 비난을 하고 있습니다.

 

육체의 음란입니까?

물론 우리는 육체로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런 육체의 일을 말씀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그 육체의 일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다 지고 가셨습니다. 이제 영의 일로 우리는 그런 음란을 행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비췸을 받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은 교회 안에서 이 음란에 빠져 있습니다.

 

베드로후서2:2절을 보겠습니다. (385)

여럿이 저희 호색하는 것을 좇으리니 이로 인하여 진리의 도가 훼방을 받을 것이요

 

호색

여자와 성관계 맺는 것을 좋아하는 것을 사전에서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세상의 이성에 따르는 말입니다 지금 우리 육체의 일을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영의 일을 비유로 해서 우리에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비유의 말씀을 깨닫지를 못하면 교회 안에서 그렇게 평생을 하다가 사망에 이르게 됩니다.

 

여자입니다

교회를 여자로 비유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여러 가지로 비유를 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호색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교회는 좋은 의미보다는 나쁜 의미로 많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사람들이 이 교회와 호색을 하기 때문입니다

 

교회와 호색합니다.

이해가 안 될 수 있습니다. 실제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비유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호색에 대해서 구약에서는 아세라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아세라를 섬기는 일은 이 시대 교회와 호색하는 일이라는 것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아세라를 섬겼습니다.

그것을 선지자들을 통해서 음란이 행하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 교회는 사실 다 아세라라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그들이 그 교회를 섬기느라 진리를 아는데 있어 너무도 게으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마치 세상의 여자와 성관계를 갖는 것을 좋아하는 것과 같이 교회와 그렇게 간음을 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거짓 선생입니다

가만히 들어온 이단들이 있습니다. 이 시대 교인들이 거짓 선생을 압니까? 그렇다고 가만히 들어온 이단을 알고 있습니까? 그저 자기들의 이성에 따라 거짓을 말하고 있고 또 자기들의 종교와 다른 교회를 이단이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가만히 들어왔습니다.

안다는 말씀입니까? 모른다는 말씀입니까? 실제 이 시대 교인들은 이단을 분별을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들어와서 교회와 호색하게 만들고 있지만 자기들이 하는 행위를 하나님을 믿는 성도가 해야 하는 당연한 일로 생각하면서 그 일에 아주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교회를 섬긴다고 말을 합니다.

누가 교회를 섬깁니까? 교회는 섬김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교회를 아름답게 하는 모든 행위가 실상은 다 호색을 하는 행위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 하고 있는 사람들이 하고 있는 모든 행위가 호색을 하는 행위지만 성경을 문자로 보면서 자기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디도서3:9절을 보겠습니다. (350)

그러나 어리석은 변론과 족보 이야기와 분쟁과 율법에 대한 다툼을 피하라 이것은 무익한 것이요 헛된 것이니라

 

쟁투

다투어 싸우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무엇으로 싸우고 다투겠습니까? 이제까지 교회사를 보시기 바랍니다. 물론 그들이 교리를 가지고 싸움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 교리의 마지막으로 가면 결국에는 율법의 문제가 있습니다.

 

율법입니다

율법이 있는 곳에는 다툼이 있습니다. 반드시 다툼이 있기 마련입니다 이 시대 십일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들이 무엇을 가지고 다투고 있습니까? 십일조를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다투고 있습니다. 자기들이 하고 있는 그 십일조를 하라고 다투고 있습니다.

 

십일조 뿐 입니까?

유대인들을 보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식사를 하실 때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먹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장로의 유전을 범했다고 하면서 다툼을 일으켰습니다. 사실 이 손을 씻지 않고 먹는 문제가 이 시대 어떻게 우리 앞에 있습니까? 유대인들은 식사를 하기 전에 반드시 손을 씻고 먹었고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기도를 하고 먹고 있습니다.

 

이것이 같습니까?

틀립니까? 제가 이것이 같다고 하면 아마도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거의 다 반발을 할 것이 분명합니다. 어떻게 유대인들이 손을 씻고 먹는 것과 자기들이 기도를 하고 먹는 것이 같으냐고 하면서 저에게 따질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같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먹었습니다.

성경을 보시기 바랍니다. 어느 사도가 먹을 때에 기도를 하고 먹었다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까? 주님이 오셔서 오천 명을 먹이시고 사천 명을 먹이실 때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신 것을 가지고 기도의 정당성을 이야기를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런 그들이 왜 주님이 술을 마신 것을 그렇게 반대를 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식사기도 율법입니다

율법에 대한 정의를 아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율법에 기록이 안 되어 있어도 교회 안에서 교인들이 삼가 지키는 것이 있다면 다 율법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이 행하는 삼가 지키는 모든 행위가 다 율법이고 그 율법은 반드시 다툼을 일으키게 되어 있습니다.

 

다투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싸우지도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으로는 다투고 싸울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율법의 행위는 반드시 다툼과 싸움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실제 교회 안에서 지키고 있는 모든 율법의 행위가 다툼이 되고 있습니다.

 

이단의 기준이 무엇입니까?

물론 교리적인 문제도 있습니다. 자기가 하나님이라고 하는 사람은 더 이상 논쟁할 가치도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이단은 율법의 문제를 가지고 다투고 있습니다. 자기들보다 더 많은 율법을 지켜도 이단이 되고 자기들보다 덜 지켜도 이단이 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율법은 다툼을 일으키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고린도전서3:3절을 보겠습니다. (265)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시기입니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을, 또는 그의 잘된 일이나 좋은 점을 샘을 내고 미워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세상에서 말하는 시기입니다. 시기라는 단어의 뜻을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이렇게 영의 일에 있어서 시기를 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아직까지 성경이 다 기록이 되지도 않았고 사도들은 각자가 성령의 감동을 받는 대로 복음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교회 안에 시기가 있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누가 시기를 하고 있는가 하면 육체에 속한 자들이 시기를 하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시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특히 복음을 전하는 일로 시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또 누구에게서 복음을 듣고 있는가에 따라서 시기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 성도는 이 세상에서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으면 됩니다. 그것이 누구든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런 일이 있습니다.

물론 지금 우리는 저에게서 복음을 듣고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몇 사람이 되면 반드시 고린도교회와 같이 육체에 속해서 시기를 하는 사람들이 나올 수 있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누가 복음을 전하면 어떻습니까?

 

문제는 복음입니다

그가 복음을 전하는가 아니면 거짓을 전하는가가 중요합니다. 사실 바울이면 어떻고 아볼로면 어떻고 베드로면 어떻습니까? 우리말에 꿩 잡는 게 매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구원을 받으면 되지 그 이상을 생각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있을 수 있습니다.

언제까지 저 혼자서 복음을 전하라는 법은 없습니다. 혹시 모르겠습니다. 우리 중에 있을지 모르고 또 우리가 모르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정말 그러한 일이 있다 해도 우리 성도는 복음만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육체를 가지고 시기를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저는 솔직한 심정입니다

누군가 저보다 더 복음을 정확하게 전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에게서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늘 이 강해를 작성하고 하는 이 일이 쉽게 않다는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정말 육체의 것을 가지고 우리는 시기를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대로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구원을 받는 성도가 가장 지혜가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 모든 일입니다

교회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입니다 이 시대 교회 안에서 이 일들이 다 일어나고 있습니다. 왜 이러한 일이 있는가 하면 그들이 낮에와 같이 단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교회 안에 있지만 이러한 일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방탕합니다.

술 취해 있습니다. 음란을 행하고 있습니다. 호색하고 있습니다. 쟁투하고 있습니다. 시기하고 있습니다. 낮에와 같이 빛에 있어서 단정하지 못한 사람들은 교회 안에서 다 이러한 일을 하고 있지만 자기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로마서13:14절을 보겠습니다. (258)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으십시오. 정욕을 채우려고 육신의 일을 꾀하지 마십시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일들은 교회 안에서 율법을 지키는 행위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성경입니다

좋은 의미의 말씀은 그렇게 하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그리고 나쁜 의미의 말씀은 교회 안에 있는 거의 모든 사람이 다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아도 그 말씀의 뜻을 모르기 때문에 바다 모래 같은 다수의 사람들은 자기들이 무엇을 하는 줄도 모르고 그저 교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누가 봅니까?

그것 한 가지만 생각해도 됩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성경을 그렇게 보고 있지 않습니다. 좋은 의미의 말씀은 자기들이 하고 있고 나쁜 의미의 말씀은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이상한 신으로 만들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교회 안에 있지도 않은 일을 왜 말씀을 합니까? 더구나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도 안 믿고 또 성경도 안 보고 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경계로 말씀을 하셨다면 하나님은 참으로 이상한 분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을 모르는 어리석음에 빠지는 그 자체가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오직 그리스도로 옷 입으시기 바랍니다.

14절의 말씀은 13절의 말씀을 반복을 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13절에서 말씀을 하고 있는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라는 말씀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으라는 말씀이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는 말씀은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교회 안에 두 사람이 있습니다.

한 사람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은 사람이 있고 한 사람은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늘 말씀을 드리지만 이렇게 비교를 해서 말씀을 할 때는 한 가지를 하면 다른 한 가지는 안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었습니까?

그 사람은 절대로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함께 하고 있습니다. 할 수 없는 것을 하게 만들고 있고 그렇게 하는 것이 믿음이 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사단입니다

이 두 가지를 함께 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사단을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사단은 자기들의 이성에 아주 나쁜 일만 하고 있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 정도로 이 세상 모든 사람이 사단의 일을 쉽게 알 수 있다면 에덴에서 아담은 절대로 선악과를 따 먹지 않았습니다.

 

광명의 천사입니다

사단이 어떻게 일을 하는 가를 이미 성경을 통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의 이성으로 보면 사단에게 미혹이 되어 있는 사람이 이렇게 보인다는 말씀입니다 진짜 선지자 같이 보이고 또 광명의 천사와 같이 보인다는 말씀입니다

 

인생이 알 수 있습니까?

절대로 알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의 이성으로는 분명히 하나님을 믿는 사람과 같이 보이기 때문에 이 시대도 수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종교에 따라가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일이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는 일이라는 것을 알면 과연 사람들이 지금과 같이 율법을 지키겠습니까?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으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구원을 받으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적 표현으로 옷 입으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영의 일을 우리가 알아듣게 말씀을 하고 있지만 이 시대는 진짜 자기들이 옷을 입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영의 일입니다

이것을 육의 모양으로 나타내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옷을 입으라고 하니까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가운을 참으로 좋아하고 있습니다. 목사도 가운을 입고 성가대도 가운을 입고 심지어는 교인들까지도 가운을 입고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옷이 아닙니다.

그런 옷을 입는다고 그가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그가 구원을 받았다는 표시가 됩니까? 자기 안에 생명이 있는 사람은 겉으로 나타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기 안에 생명이 없는 사람은 생명이 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여러 가지로 사람들의 눈과 감성을 자극을 하면서 그런 것으로 믿음을 보이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3:27절을 보겠습니다. (306)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그리스도로 옷 입으시기 바랍니다.

옷을 입으라고 하니까 이 시대 갈라디아서의 말씀을 보고 자기들이 육체적으로 하고 있는 종교 안에서 행하고 있는 세례를 받는 것으로 마치 그리스도로 옷 입은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그런 육체의 세례는 우리 구원과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세례입니다

이 시대는 정말 뭐 하나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그런 육체의 세례를 받아야 합니까? 그리고 그런 종교 안에서 행하고 있는 세례를 받음으로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까? 세례도 종교에서 나온 부산물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세례에 대해서는 이미 말씀을 드렸습니다.

굳이 여기서 다시 말씀을 안 드려도 세례가 무엇인가를 우리 성도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교회에 나와서 학습을 받고 나서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의무적으로 세례를 행하고 있습니다. 그 세례를 받는 것으로 자기들이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믿음입니다.

너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교회 안에서 육체에 행하고 있는 세례로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이 아니라 우리가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믿습니까?

사도 바울이 그것을 너희가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성령을 받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초대 교회에 사도들이 복음을 전했고 그 복음을 듣고 믿는 성도들에게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그렇게 성령이 오신 것을 다시 말씀을 해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았고 그렇게 세례를 받은 사람을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육체의 세례가 아닙니다.

이 시대는 성경에 세례라는 말씀이 나오면 그것을 다 육체에 세례를 받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에 교인 하나가 들어오면 그 세례를 받게 하기 위해서 정말 정성을 다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단지 종교적인 의식에 불과한 그 세례를 자기들의 이성으로 거룩하게 받게 함으로 해서 마치 갈라디아서의 말씀을 이룬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런 그들이 이 갈라디아서 말씀을 보면 어떻게 생각합니까?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는 이 말씀을 보면 어떻게 생각합니까? 자기가 세례를 받았으니까 이제 그리스도로 옷 입었고 그리스도로 옷 입었으니까 구원을 받았다고 믿게 만들고 있습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데 종교 안에서 행하고 있는 육체의 세례가 사람들의 생각을 그렇게 사로잡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이 교회 안에서 하고 있는 행위가 그를 멸망하게 만들고 있지만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아니 제가 세례에 대해서 반대를 하면 아마도 이단이라고 공격을 할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스도로 옷 입으시기 바랍니다.

이 말씀을 하기 위해서 갈라디아서423절부터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율법의 행위를 하고 있는 사람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가 아니고 또 그런 사람은 그리스도로 옷 입지 않은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지금 종교에서 행하고 있는 세례가 율법이 되었습니다. 아마도 제가 그들이 물을 뿌리고 물에 들어가서 하는 그 행위가 율법이라고 하면 어느 누구도 인정을 하지 않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그 또한 교회 안에 들어오는 사람들에게 삼가 행하고 있는 행위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세례도 율법입니다

우리는 그런 세례를 받은 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성령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성령이 우리 안에 오셔서 진리 가운데로 인도를 하시고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탄생이 되는 것을 성령 세례라고 하고 있고 그 세례를 받는 자만이 그리스도로 옷 입은 성도라는 말씀입니다

 

육체에 세례를 행합니까?

그것 역시 육신의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육체가 하는 모든 일들은 다 육신의 일입니다 왜 교회 안에서 세례를 받는가 하면 자기가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입니다. 또한 율법을 지키는 것 역시 자기가 성도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지지키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로 옷 입으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입습니까? 성경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우리에게 성령이 오십니다. 그것을 갈라디아에서는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성령이 오시지도 않았으면서도 성경의 문자를 보고 육체에 세례를 하면서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오직 믿음입니다.

어떻게 믿습니까? 반드시 복음을 들어야 믿을 수 있습니다. 그 복음을 듣고 믿는 성도만이 예수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종교적인 의식으로 하는 그 세례는 그리스도와 합하여 받는 세례가 아니라 종교 의식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영의 일입니다

육신의 일에 빠지지 마시기 바랍니다. 영의 일을 하는 성도는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 교인들은 영의 일이 무엇인지 육신의 일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육신의 일이라고 하는데 자기들이 육신으로 일을 하면서도 그것을 깨달을 수 있는 지혜가 없습니다.

 

다 믿음입니다.

유대인들과 똑같이 소득의 십일조를 내면서도 유대인들이 하면 그것이 율법이고 자기들이 하면 믿음이 되고 있습니다. 참으로 교회 안에만 들어오면 사람들은 생각까지도 어린아이가 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소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평생을 소자로 살아가면서도 그저 신앙의 연조만 쌓인 것으로 성경의 문자를 보고 장성한 자가 된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5:19절을 보겠습니다. (308)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빌립보서3:4절을 보겠습니다. (321)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니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육체의 일입니다

우리가 갈라디아서를 강해를 하면서 이 육체의 일이 무엇인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육체의 일을 19절에서 21절까지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일을 하는 자는 분명하게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이 시대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은 다 이러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자기들이 육체의 일을 하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육체의 일이라는 것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육체의 일을 하면서 도리어 그것이 하나님에 대한 일이라고 하면서 더욱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육체의 일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갈라디아에서만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도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고 말씀을 하니까 정욕이라는 나쁜 의미의 단어만 생각을 하고 자기들은 정욕으로 일을 하지 않고 진심으로 하나님을 위해서 일을 한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했습니까?

그것이 내 육체로 했다면 육체의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진심으로 했어도 육체의 일이고 내가 신앙생활에서 잘 보이기 위해서 했어도 육체의 일입니다 어떤 생각을 가지고 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느 것으로 했느냐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육체로 했습니까?

지금 어디서 하는 일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세상을 살아가는 일을 사도 바울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세상을 살아가는 일이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분명히 사도 바울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육체의 일은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육체의 일이 현저합니다.

아주 많이 있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교회 안에서 사람들이 이 육체의 일을 아주 많이 하고 있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이 시대 기독교라는 교회 안에서 얼마나 많은 육체의 일을 하고 있습니까? 그러나 교인들은 자기들이 육체로 하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육체의 일로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의 말씀입니다

이 시대 교인들이 거의 전부를 하고 있습니다. 한 가지라도 안 하고 있는 교회는 없습니다. 그런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다고 말을 하고 있고 자기들이 천국에는 반드시 간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육체의 일도 분별을 하지 못하는 그들이 천국을 유업으로 받았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문자를 보고 그렇게 말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예배를 하고 율법을 지키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자기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않고 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실상은 그들이 모두가 육체의 일을 도모하고 있습니다.

 

누가 육체의 일을 더 많이 합니까?

우리나라에 3대 종교가 있습니다. 기독교, 천주교, 불교가 있습니다. 어느 종교가 육신의 일을 가장 많이 도모를 하고 있습니까? 사실 기독교인들이 육신의 일을 가장 많이 도모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의 이성을 가지고 보아도 기독교인들은 너무 이기적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은 정욕에 빠져 육신의 일을 도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서 하고 있는 모든 일들이 다 육신의 일입니다 사실 간증하나만 보아도 기독교인들이 그 간증을 하기 위해서 얼마나 육신의 일을 도모하고 있는가를 쉽게 알 수 있는데 그 일에 더욱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육체의 일이 무엇입니까?

그것을 사도 바울이 빌립보서를 통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가 유대인으로 살았을 때 어떻게 살았는가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철저한 율법주의자였습니다. 그 율법주의자를 육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자기 육체에 대해서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육체의 일을 했을 때 어떻게 일을 했는가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히브리인으로서 율법을 잘 지켰다고 말을 하면서 흠 없는 율법의 의를 가졌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안에서 육체의 일에 빠져 있는 사람은 사도 바울이 바리새인으로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육체의 일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바리새인으로서 모든 율법을 지켰고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자기들이 정해 놓은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렇게 율법을 지키는 일이 육체의 일이라는 것을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다 소경이 되어서 육체의 일에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육체의 일을 하면서도 자기 육체를 보면서 예수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았고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3:1절을 보겠습니다. (304)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도모하다

사람이 어떤 일을 이루려고 대책과 방법을 꾀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누가 우리를 꾀고 있습니까? 그것을 갈라디아서를 통해서 사도 바울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유대로부터 온 거짓 형제가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한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에 와서 성도들을 꾀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니 이 시대는 이미 율법주의가 된지 오래 되었습니다. 기독교라는 종교는 벌써 율법주의가 되었습니다. 그들이 왜 종교를 만들었는가 하면 바로 육신의 일을 도모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단의 미혹을 받은 광명의 천사들이 교회 안에 나타나 자기들의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게 만들고 있지만 그 종교 안에 있는 사람들은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사망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 합니다 사실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성경을 모른다는 것이 얼마나 비극적인 일입니까? 그것을 유대인들을 통해서 이미 보여주셨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했지만 성경을 몰라서 자기 땅에 오신 하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악을 행하고 말았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모든 일을 하시고 부활하셔서 하늘에 올라 가셨습니다. 그런데 이방의 교회 역시 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모두가 율법주의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들이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는 일 또한 비극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교회는 계속해서 육신의 일을 도모하는 일에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낮에와 같이 단정하게 행하면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정욕을 이기지 못해서 육신의 일을 도모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믿음이라고 하면서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오직 예수입니다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하신 일 외에 내가 교회 안에서 하는 모든 일이 다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는 일임을 바로 기억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