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니라(요6:63.)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약속이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

로마서 강해 -

로마서 강해 140강, 믿음이 연약한 자를

윤주만목사 2018. 10. 25. 07:05

로마서14:1절을 보겠습니다. (258)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

 

정욕입니다

성경을 보면서 그저 단순하게 그 단어의 뜻만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정욕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나쁘다 보니까 그것을 사람의 이성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이 생각할 때 나쁜 것이 있으면 그것을 정욕이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너무 단순합니다.

이제까지 수많은 신학자들과 목사들이 성경을 봤지만 어느 누구도 이 정욕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자기들이 종교 안에서 하고 있는 모든 행위는 진실 된 마음에서 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그것이 정욕이라고는 생각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나쁜 것만 정욕이 아닙니다.

사람의 이성에 좋은 것 역시 정욕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기들의 이성에 좋다고 생각이 되는 것은 정욕이 아니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실상은 교회 안에서 경건의 모양을 내려고 하는 모든 행위가 아니 하나님을 잘 믿는다는 것을 보이기 위한 모든 행위가 정욕에서 나오고 있지만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교인들의 모든 행위입니다

그것이 어디에서 나오고 있는가 하면 사람의 이성에 따르는 정욕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그것을 정욕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보고 있지만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깨닫지 못함으로 인하여 이 시대 역시 모두가 정욕에 빠져서 나오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예배를 드립니다.

사실 우리나라 기독교만큼 예배에 욕심이 많은 나라가 어디 있습니까? 일주일에 10여 차례가 되는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제가 이것이 정욕이라고 하면 저를 더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할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종교에 의해서 하고 있는 그런 모든 행위가 다 정욕에서 나온 것임을 깨닫지를 못하면 그는 육신의 일을 도모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기독교입니다

그들은 이미 뿌리 깊게 샤머니즘에 빠져 있습니다. 자기들이 열심을 내고 있는 그런 행위들이 다 정욕에서 나온 것이지만 그들은 도무지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정욕에 빠지니까 그것이 샤머니즘으로 발전을 하고 있지만 자기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조차 모르고 있습니다.

 

성경을 보시기 바랍니다.

예배를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거기서 지나치면 모두가 사람의 정욕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또 찬송가를 불러야 하는가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역시 거기서 지나치고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열심이 아니라 사람의 정욕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무엇에 대해서 기도를 해야 하는가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불의의 삯이 무엇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들이 해야 하는 기도를 모르고 불의의 삯을 위해서 기도를 하고 있다면 그것 역시 정욕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헌금입니다

누가 헌금을 했습니까? 성경에 연보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연보는 모두가 가난한 교회를 돕기 위해서 했습니다. 그들의 육체의 어려움을 보고 돕기 위해서 연보를 했습니다. 지금과 같이 예배 때마다 헌금을 하지도 않았고 자기들의 교회의 재정을 넉넉하게 하기 위해서 헌금을 하지 않았습니다.

 

왜 이런 일들을 합니까?

다 사람의 정욕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자기들이 그런 일을 함으로 해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고 또 그에 따르는 보상 심리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이 시대 십일조를 하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갚아 주신다고까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육신의 일입니다

제가 이것이 육신의 일이라고 하면 이 시대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저를 비판할 것을 알고 있습니다. 자기들이 하나님을 믿는 행위가 정욕이라고 말을 하면 얼마나 기분이 나쁘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이 깨닫지를 못하더라도 분명하게 말씀을 드립니다. 이런 정욕에 빠져 육신의 일을 행하고 있는 사람은 절대로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다 정욕입니다

사람의 이성을 가지고 성경을 보지마시기 바랍니다. 절대로 성경을 깨달을 수도 없고 구원을 받을 수도 없습니다. 아니 도리어 정욕에 깊이 빠진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아니 자기들이 하고 있는 행위가 정욕이라는 것조차 깨닫지를 못하고 평생을 신앙생활을 하면서 정욕에 빠져 살다가 주님이 오실 때 바깥 어두운 곳에 쫓겨나게 됩니다.

 

육신의 일입니다

한글만 알아도 쉽습니다. 육신의 일이 무엇인가를 모릅니까? 내가 내 육신으로 어떠한 일을 하고 있다면 그것은 다 육신의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서도 육신의 일이 무엇이라는 것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만 육신으로 일을 합니까?

그것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사람도 역시 육신으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자기들의 육신으로 예배를 드리고 있고 찬송가를 부르고 있고 기도를 하고 있고 헌금을 하고 있고 또 교회 안에서 여러 가지 행위들을 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일들을 육신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교회 안에만 들어가면 사람들은 정신까지도 빼앗기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분명히 육신의 일을 하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교회 안에만 있으면 성경을 보아도 그 말씀이 무슨 말씀인가를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에 대한 열심이 너무 강하기 때문입니다 그 열심이 정욕이라는 것을 깨닫지를 못하고 자기들이 하고 있는 일은 육신의 일이 아니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육신의 일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고 자기들은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누가 봅니까?

이 로마서를 누구에게 보냈습니까? 이 세상 사람들이 성경을 보고 있습니까? 이 기본이 되는 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마치 세상 사람들이 성경을 보는 것과 같이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보는 시각이 바꾸지 않으면 절대로 성경이 바로 풀어질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 안에 있는 일입니다

사도 바울이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교회 안에 있는 자기들은 다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은 사람이고 세상 사람은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면서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다수입니다

교회 안에 있는 다수가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통해서 이 말씀을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실제 이 시대 절대 다수의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수많은 행위들을 하면서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여러분은 믿음이 약한 이를 받아들이고, 그의 생각을 시비거리로 삼지 마십시오.”

 

오직 믿음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은 오직 믿음이라고 사도 바울은 계속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이 믿음이 없이는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을 수 없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는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는 역사가 있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계속해서 이 믿음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시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성경을 보면서도 이 믿음에 대해서 전혀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아니 자기들이 다 믿음이 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종교 안에서 하고 있는 행위를 보면서 믿음이 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알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믿음이 어떻게 임하는 가를 알아야 합니다. 내가 믿고 싶다고 해서 믿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지금 로마서13장까지의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말씀이 무엇인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영생을 얻으라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로마서13장까지입니다

사실 이 말씀만 바로 알아도 누구나 믿을 수 있습니다. 그것을 전제로 해서 사도 바울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바로 알고 성령의 감동을 받는 성도는 누구나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까지 우리가 교제를 나누었지만 사도 바울이 우리 구원에 대해서 얼마나 자세하게 그리고 정확하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그런데 어떻습니까?

교회 안에서 이 말씀을 모두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로마서13장까지의 모든 말씀을 다 들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믿음이 있어야 하는데 그렇게 복음을 듣고도 믿음이 연약한 자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해가 안 되지만 사실이 그렇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그것이 사람의 이성이라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듣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믿을 수 있습니까? 그것이 아니라 같이 복음을 들었을지라도 믿음이 연약한 자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아직 성령의 감동을 받지 못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141절은 참으로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고 있는 말씀입니다

 

디도서3:10절을 보겠습니다. (350)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 하라

 

교회입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보내는 편지입니다 이 사람들은 교회 안에서 복음을 들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교회 안에 있는 이단과 복음을 들었지만 믿음이 연약한 사람을 분별을 해야 합니다. 이 시대는 이단이 누군지 그리고 연약한 자가 누군지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이단입니다

저는 사람의 생각을 가지고 이단을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이단이 누군가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생각을 가지고 저와 다르다고 이단이라고 한다면 저 역시도 그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성도는 모든 것을 판단을 할 때는 반드시 성경에서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해야 합니다.

 

누가 이단입니까?

그것을 디도서39절에서 그러나 어리석은 변론과 족보 이야기와 분쟁과 율법에 대한 다툼을 피하라 이것은 무익한 것이요 헛된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율법의 대한 다툼을 하고 있는 사람은 다 이단이라는 말씀입니다

 

율법의 다툼입니다.

어떻게 다투고 있습니까? 그것을 갈라디아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유대에 있는 거짓 형제가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에 와서 할례의 타당성을 이야기를 하면서 갈라디아에 있는 성도들에게 할례를 받게 했습니다. 이 문제를 가지고 사도 바울은 율법주의자들과 다투었지만 결론이 나지를 않아서 예루살렘에 가서 사도들과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결론이 무엇입니까?

우리 조상들도 능히 메지 못했던 무거운 멍에를 이방인들에게 지우지 말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러니까 이방인들에게 율법을 지키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는 이단에 속한 사람들이 끊임이 없이 들어오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스스로가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그대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단 한 가지라도 지키고 있다면 그는 이단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지어낸 말씀이 아니라 사도 바울이 디도서를 통해서 이단이 누군가를 분명하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단이 있습니다.

그를 어떻게 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한두 번 훈계를 한 후에 그가 훈계를 듣지 않으면 멀리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이단에서 나왔습니다. 그런데 모를 일입니다 이 중에서는 그럴 사람이 없겠지만 누군가 새로 들어오는 사람이 있으면 그가 혹시라도 율법을 지키고자 할 수 있다는 것을 늘 생각하고 있어야 합니다.

 

지금은 제가 있습니다.

그리고 성령을 받은 성도님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서 우리가 죽고 난 후에 이 교제를 하는 모임에 새로운 사람들이 들어오다 보면 누군가는 분명히 율법의 행위를 가지고 들어올 것이 분명합니다. 그가 모든 율법을 지키자고 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에는 정말 타당성이 있는 것 한 가지를 가지고 이야기를 하게 되고 그것을 분별을 하지 못하게 되면 그대로 율법주의에 빠지게 되어 있습니다.

 

다행히 분별이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사람은 정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실 매몰차게 끊어버린다는 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누군가 분명히 율법의 행위를 하고 있는데 그 사람을 냉정하게 끊어버린다는 것이 쉽지 않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혹시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가 물질이 많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그 물질에 약하게 되어 있고 좋은 것이 좋다고 하면서 그냥 묻어가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에 대해서 사도 바울이 단호하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한두 번 훈계를 한 후에 멀리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말씀을 합니까?

그를 멀리 하지 않으면 반드시 교회 안에는 그와 같은 행위를 하는 사람들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특히 교회 안에 믿음이 연약한 자들이 있으면 이단의 행위를 보고 따라하게 되어 있습니다. 늘 말씀을 드리지만 우리는 율법에 대해서 내 생명을 걸고 싸워야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생명의 문제입니다

영원한 생명이 죽고 사는 문제입니다 이 문제가 있기 때문에 이단에 속한 자는 한두 번 훈계를 한 후에 그가 듣지를 않으면 멀리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멀리 해야 하는가 하면 복음과 율법이 함께 섞여 있으면 반드시 율법주의로 가기 때문에 멀리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주의 멀리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성령을 받았다고 자신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에서 멀리하라고 하면 반드시 멀리해야 합니다. 우리가 받아들일 사람이 있고 멀리해야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율법주의를 변화를 시켜서 구원을 하겠다는 생각을 잘못 하다가는 그에게 미혹을 당할 수 있다는 것을 늘 경계를 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다시 말씀을 드립니다.

진리 +비 진리는 = 진리가 되는 것이 아니라 거의 비 진리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복음을 들은 성도들과 율법주의자와 함께 교회 안에 있으면 율법주의가 복음을 듣고 믿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들은 사람들이 율법주의로 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한두 번 훈계를 한 후에 멀리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14장에 믿음이 연약한 자입니다

이단과 믿음이 연약한 자는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단은 복음을 듣지 않고 율법의 행위를 하고 있는 사람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아니 복음을 들었어도 아주 조금 밖에는 듣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로마서14장에서 말씀을 하고 있는 믿음이 연약한 자는 지금까지 사도 바울이 말씀한 로마서13장까지의 모든 말씀을 들은 사람입니다

 

로마서입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과 율법에 대해서 계속해서 비유를 통해서 우리에게 명확하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문자 그대로의 율법의 지키는 것이 죄라는 것을 로마서7장을 통해서 분명하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은 당연히 율법을 지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복음을 들은 사람은 율법을 지키고 싶어도 지킬 수 없습니다. 지금 그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까지 모든 복음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아직 믿음에 든든하게 서지 못하고 의심을 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은 영의 일입니다

사람의 이성으로는 이 말씀을 설령 듣는다 해도 복음이 믿어진다는 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늘 말씀을 드리지만 제가 아무리 복음을 전해도 이 자리에서 듣고 있는 성도님들에게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성령을 보내 주시지 않으면 믿고 싶어도 믿을 수 없습니다.

 

믿을 수 있습니까?

절대 믿지를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제가 그리스도편지 사이트를 통해서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목사님들이 그 말씀들을 정리를 해서 각자의 블로그에 올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많은 사람들이 지나가듯이 보고 있습니다.

 

블로그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말씀을 보고는 있지만 그들이 이 자리에 오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복음의 말씀은 보고 있지만 정말 그런가 하면서 의심을 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만약에 그들이 의심을 하지 않는다면 자기 생명에 관한 일이기 때문에 반드시 찾아오게 되어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와 함께 교제하기를 원하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과 초대교회는 다릅니다.

지금은 다른 복음이 전해지고 있는 상태에서 복음을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초대 교회는 사도들이 복음을 먼저 전했습니다. 그리고 난 후에 교회 안에 다른 복음을 가진 자들이 들어왔습니다. 물론 그럴지라도 믿음이 있는 성도는 함께 모여 교제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복음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믿음이 연약한 자들이 있습니다. 전혀 복음을 듣지 않고 율법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에게 하고 있는 말씀이 아닙니다. 초대교회는 사도들이 복음을 전했습니다. 내세를 생각하는 사람들이 사도 들이 전하는 복음을 들었지만 모든 사람들이 그 복음의 말씀을 깨닫는 것이 아니라 그 중에는 약한 사람들이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복음을 듣습니다.

그러니까 로마서13장까지의 모든 말씀을 들었습니다. 성경의 문자를 들었다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감동으로 성경이 다 풀어져서 복음의 말씀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은 자가 되었다는 말씀이며 그는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함께 복음을 들었지만 연약한 자가 있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5:5절을 보겠습니다. (307)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좇아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믿음이 연약합니다.

그리고 믿음이 있습니다. 누구에게 하고 있는 말씀입니까?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이 시대 기독교인들에게 하고 있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들은 아예 복음을 듣지도 못한 사람이기 때문에 로마서141절의 말씀에는 해당이 안 되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성도입니다

우리는 믿음이 연약한 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단단한 식물을 먹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함께 복음을 들었지만 이 단단한 식물을 먹지 못하는 사람은 연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 연약한가 하면 성령이 그들에게 오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믿음입니다.

교회 안에 나와서 성경의 문자를 보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셨을 때 바리새인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반드시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성경에서 복음을 깨달았을 때 우리 안에서 역사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믿습니까?

내 안에 반드시 성령이 오셔야 합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그저 교회 안에만 나와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 마치 성령이 오신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듣지 못한 그들에게는 절대로 성령이 오시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령이 오시면 어떻게 합니까?

그가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를 하시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문자를 아는 것으로 진리 가운데로 인도함을 받고 있다고 말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정도는 절에 있는 스님이 성경을 보고 아는 정도밖에는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로마서13장까지 말씀을 들었습니다.

제가 잘 나서가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이 시대 우리를 긍휼히 여겨주심으로 해서 성령을 보내 주셔서 복음을 깨닫게 해 주시고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렇게 성령의 감동을 받아 로마서13장까지의 말씀을 푼 것과 이제까지의 모든 신학자들과 목사들이 성경을 푼 것은 전혀 다르다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제가 잘 나서입니까?

제가 남들보다 지혜가 있어서입니까? 그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들과 다르게 성경에서 복음을 볼 수 있게 성령을 보내주셔서 역사를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우리가 복음을 들을 때 믿음이 우리 안에서 역사를 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율법 한 가지만 말씀을 드립니다.

우리는 이 율법을 지키는 것이 죄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구원을 받지 못하는 죄라는 것을 알았고 이것이 우리 안에 있는 탐욕과 방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지키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 율법이 계명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속이고 죄를 짓게 해서 사망에 이르게 한다는 것을 알았고 그래서 우리 성도는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문자 그대로의 율법을 절대로 지키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이 시대 모든 기독교인들은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런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감동을 받고 있는 우리는 그들이 믿는 것이 아니라 계명으로 말미암아 속아서 사망에 이르는 죄를 짓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교회 안에서 그런 죄를 짓는 행위를 보면서 믿고 있다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누가 깨달을 수 있습니까?

성경에 문자 그대로 기록이 되어 있는 율법을 지키는 행위가 죄고 그 죄를 짓는 사람은 사망에 이른다는 것을 누가 알고 있습니까? 그것도 모르는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말을 하고 있고 자기들은 이스라엘 보다 더 믿음이 있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들은 죄를 짓고 있는 사람이지 믿음이 있는 성도가 아닙니다.

 

믿음입니다.

그냥 믿어지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반드시 성령이 우리 안에 오셔서 역사를 해야 성경에서 진리를 볼 수 있고 아니 복음을 듣고 믿을 수 있다고 성경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믿음이 있는 자는 믿음이 연약한 자를 받으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입니다

믿음이 있는 자입니다 우리는 이제 단단한 식물을 먹고 있습니다. 그래서 장성한 분량에까지 이르러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어떻게 된 것인가 하면 성령이 우리 안에 오셔서 역사를 하기 때문에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복음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성령이 오셨습니다. 그렇게 복음을 듣고 있는 성도 안에서 믿음으로 역사를 하는 것이 성령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령이 오시는 전제 조건이 무엇인가 하면 반드시 복음을 들어야 합니다. 복음을 듣지도 않은 사람에게는 성령이 오실 수 없습니다. 더구나 교회 안에서 율법을 지키고 있는 사람에게는 절대로 성령이 오실 수 없습니다.

 

우리는 믿음이 있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면 율법을 지키고 있는가 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복음을 들으면 그것이 믿어지는 역사가 내 안에서 있습니다. 그것은 다 성령이 우리 안에 오셔서 역사를 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너희입니다

사도 바울은 믿음이 있는 성도를 너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로마서13장까지의 모든 말씀을 듣고 성령의 감동으로 믿어지는 역사가 있는 성도들에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 로마서를 보고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믿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강해를 기록했습니다.

누군가 이 말씀을 다 본다고 해서 그 사람이 믿는다는 보장이 없다는 것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그에게 성령을 보내주시면 듣고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도 그렇게 말씀을 하기보다는 믿음이 연약한 자가 있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연약한 자입니다

그를 받으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앞에서 말씀을 드렸지만 이단에 속한 자는 한두 번 훈계를 한 후에 듣지를 않으면 멀리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전하는 복음을 다 들었습니다. 아니 그리스도편지를 통해서 보았거나 블로그를 통해서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성령의 감동을 받지 못하고 있다면 그래서 연약하다면 그를 받으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6:60절을 보겠습니다. (155)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 대

 

성경입니다

사람들은 성경을 너무 쉽게 보고 있습니다. 아니 자기들이 신학이라는 곳에 가서 배우면 성경을 알 수 있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주의 깊게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보내 주셔서 이스라엘을 책망하시지만 그들은 전혀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율법 한 가지만 해도 그렇습니다.

이스라엘이 율법을 어떻게 보았습니까? 그들은 문자 그대로 보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 최선을 다 했습니다. 그러나 율법은 신령한 것이고 또 그림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율법에 대해서 전혀 깨닫지를 못하고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 반포하신 율법이라고 하면서 그것을 지키는 일에 열심을 다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성경을 보고도 깨닫지를 못 했습니다

그럼 이 시대 기독교인들이 율법을 보고 깨달았습니까? 아니 이제까지 기독교라는 종교에 있는 사람들이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율법을 보고 그것이 신령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까? 어느 누구도 깨닫지를 못 했습니다 왜 깨닫지를 못했는가 하면 율법을 보면서 너무 쉽게 생각을 했기 때문입니다

 

실상은 어떻습니까?

정말 어렵습니다. 저 역시도 많은 율법을 풀고 있지만 아직까지도 전혀 모르는 율법들이 많이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그 말씀이 어렵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데 이 시대는 아니 이스라엘도 그렇고 기독교인들도 그렇고 너무 쉽게 보고 있습니다. 어느 정도로 쉽게 보고 있는가 하면 초등학생도 아는 정도로 성경을 보고 있습니다.

 

뭐가 다릅니까?

살인하지 말라는 십계명을 보았습니다. 그것을 초등학생이 보는 것과 이 시대 목사들이 보는 것과 무엇이 다릅니까? 실상은 똑같이 보고 있지만 자기들이 신학을 공부했다는 그것으로 그리고 기독교라는 종교에서 안수를 받았다는 그것으로 거기에 감성적인 말을 곁들여서 하면 다른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 어렵습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쉽게 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제가 거의 1년을 넘게 몸이 아파서 설교를 작성하지 못 했습니다 그동안 정말 마음고생도 많이 했습니다. 저 역시 사람인지라 많은 생각을 했고 때로는 무기력함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감사합니다.

이렇게 다시 건강을 회복해서 성경을 풀 수 있어서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여기까지 오기까지는 정말 윤 목사님께서 저 보다 더 마음 고생을 하시면서 당신 몸보다 제 몸을 더 생각했다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고 이 자리를 빌어서 감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인간적으로나 복음적으로나 저는 윤 목사님께서 늘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왜 이 말씀을 합니까?

제가 몸이 아프기 전에 로마서13장 거의 마지막을 쓰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중간 중간에 13장까지는 어떻게 마쳤습니다. 그리고 14장을 쓰는 것을 몇 번을 시도하다가 몸이 회복이 안 되어서 중간에 그만 두었습니다. 제가 이 14장을 몇 번 지웠는지를 모르겠습니다.

 

적어도 다섯 번 이상은 되는 것 같습니다.

다시 쓰려고 하면 전에 쓴 것이 이상하게 보입니다. 다시 쓰려고 할 때마다 지우고 썼습니다. 그리고 이제 건강이 많이 회복이 되어서 다시 쓰고 있는데 그렇게 몇 번을 쓰고 지우고 다시 쓴 그것을 보니까 또 이상해서 결국에는 새로 작성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입니다

그만큼 어렵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13장까지 마쳐 놓고서 14장부터는 무난하게 쓸 것이라고 생각을 했는데 다시 쓰려고 할 때마다 기존에 써 놓은 말씀들이 제게 확신을 주지 못해서 다시 쓰기를 반복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어려운 성경인데 이 시대 목사들은 심지어는 성경도 안 보고 설교를 인터넷에서 구해서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왜 어렵습니까?

성경은 영의 말씀이기 때문에 어렵습니다. 저 역시 성경을 풀고 있지만 늘 지혜를 구하는 마음으로 성경을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늘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성경을 보고 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주시지 않으면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확신합니다.

하나님께서 저에게 성령을 보내 주셨고 절대로 성령이 다시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말씀을 풀 때는 정말 그 모든 것을 내려놓고 지혜를 구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저 역시 사람인지라 언제 교만해질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 알게 하시지 않음으로 해서 더욱 겸손하게 지혜를 구할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영의 일입니다

성경은 늘 말씀을 드리지만 거의 모든 말씀이 비유와 은유 그리고 그림자로서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성경을 문자 그대로 보고 있습니다. 더구나 신약 성경을 볼 때는 더욱 그렇게 보고 문자에 모든 말씀의 뜻이 있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절대 아닙니다.

주님께서 영의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이 말씀을 듣고 제자들이 어렵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누가 이 말씀을 들을 수 있겠느냐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누가 이 말씀을 듣고 깨달아서 알 수 있느냐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입니다

주님께서 그들을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그들과 삼년 반 동안 함께 다니시면서 복음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아직 주님이 살아계실 때고 영의 말씀을 하니까 제자들이 도무지 주님의 말씀을 깨달을 수 없었습니다. 여기까지는 모두가 이해를 하고 인정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요한복음을 보고 있는 이 시대 기독교인들이 이 말씀을 깨닫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요한복음6:63절을 보겠습니다. (155)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다 알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아직 성령이 오시지 않아서 주님께서 영의 말씀을 하실 때 어렵다고 하면서 누가 이 말씀을 알아들을 수 있겠느냐고 했지만 나중에 주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시고 사십일 만에 승천하시고 난 후에 오순절이 이르러서 제자들에게 성령이 오심으로 해서 이 말씀을 깨달았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의 말씀입니다

아마도 거의 모든 목사들이 그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목사들이 이 말씀을 깨닫고 있느냐는 말씀입니다 제자들이 성령이 아직 오시지 않아서 어렵다고 한 이 말씀을 이 시대 목사들이 깨닫고 있느냐는 말씀입니다 마치 자기들이 다 아는 것과 같이 말을 하고 있지만 전혀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들이 압니까?

살리는 것이 영이라는 것을 압니까? 아니 이 영에 대해서 알고 있습니까? 어느 누구도 모르고 있습니다. 이 시대 기독교 목사들도 모르고 이제까지 있었던 그 유명한 신학자라고 하는 사람들도 모르고 기독교의 교리를 세운 루이스뻘콥이라는 사람도 이 영에 대해서 그가 쓴 기독교조직신학책에서 전혀 언급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어렵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시대 목사들은 아주 쉽게 성경을 보고 있습니다. 제자들보다 더 모르고 있는 상태에 있으면서도 마치 자기들이 아는 것과 같이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차라리 어렵다고 하고 누가 이 말씀을 들을 수 있겠느냐고 하면 좋은데 전혀 알지도 못하는 그들이 이 살리는 영에 대해서 두루뭉술하게 말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렵습니다.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복음을 들었지만 이 말씀이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지 아무리 생각을 해도 깨달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복음을 듣고 깨닫지를 못하는 사람을 사도 바울은 믿음이 연약한 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제자들은 주님께서 승천하시고 난 후에 성령이 오심으로 해서 이 말씀들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이 살리는 영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아니 듣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연약한 자가 아니라 이단에 속해 있는 자라는 것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라는 그 말씀을 보고도 이 영이 무엇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아예 처음부터 복음을 듣지도 못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살리는 것은 영입니다

그 영이 무엇입니까? 그것을 사도 바울이 로마서13장 마지막 절에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으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 목사들입니다 살리는 것이 영이라는 이 문자는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영이 무엇이라는 것을 전혀 모르면서 아니 바리새인보다 더 모르면서 마치 아는 것과 같이 말을 하고 있습니다.


영의 말씀입니다

사실 사람의 이성으로 이것을 깨닫는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가 아무리 지혜가 있고 또 성경만 보고 살았다 해도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주시지 않으면 이 영의 비밀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라는 그 말씀만 깨닫지를 못하는 것이 아니라 육은 무익하다는 그 말씀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육은 무익합니다.

주님께서는 육은 무익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무익하다는 말씀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백해무익 라는 말과 같습니다. 백가지의 예를 들어도 역시 무익하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살리는 것은 영인데 거기에서 우리 육은 이로울 것이 하나도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이 시대 교회를 보시기 바랍니다. 이 육이 전혀 백해무익하지가 않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자기들의 육으로 한 행위를 가지고 천국에 간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문자를 너무도 잘 알고 있는 그들이 백해무익한 그것을 하느라 모두가 행위에 빠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입니다

그들이 무엇을 알고 있습니까? 살리는 것이 영이라는 그 말씀을 알고 있습니까? 육은 무익하다는 그 말씀을 알고 있습니까? 아무 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아니 살리는 것은 영이라는 그 말씀도 듣지를 못했고 육은 무익하다는 그 말씀도 듣지를 못 했습니다

 

최소한입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라는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육은 무익하다는 말씀도 들어야 합니다. 그러고 나서 그 말씀이 깨달아지지가 않아서 아니 어려워서 이 말씀에 대해서 의심을 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을 우리 성도들에게 받으라고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이지 율법을 지키고 있는 사람을 받으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누가 압니까?

이 시대 기독교 목사들 중에 누가 알고 있습니까? 정통이라고 하는 교회에 목사도 모르고 있고 이단 역시 모르고 있습니다. 그들은 믿음이 연약한 자가 아닙니다. 영의 말씀을 듣고는 있지만 아직 성령이 오시지 않아서 어렵다고 하면서 이 말씀을 누가 들을 수 있겠느냐고 하는 제자들이 지금 연약하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불행합니다.

먼저 복음을 들어야 하는데 아예 복음을 듣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 그들이 교회 안에서 자기들의 행위를 보면서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자기들과 같은 행위를 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아직 믿음이 연약하다고 하면서 그들을 받으라고 하면서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이 시대입니다

믿음이 연약한 자가 있습니까? 혹시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편지에서 말씀을 보고 있지만 아직 믿어지지가 않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라는 교회 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이 말씀이 해당이 안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들에게는 믿음이 있는 성도도 없고 또 연약한 자도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전제 조건입니다

먼저 복음을 들어야 합니다. 이렇게 복음을 들은 사람 중에는 믿음이 있는 성도가 있습니다. 그리고 아직 연약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예 처음부터 복음을 듣지도 않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사실 로마서14장의 말씀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고린도전서8:9절을 보겠습니다. (272)

그런즉 너희 자유함이 약한 자들에게 거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초대교회입니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교회와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했습니다. 먼저 복음을 전한 곳이 어딘가 하면 유대인의 회당입니다 이방인들에게 당시 복음은 너무도 허황된 이야기와 같이 들릴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먼저 유대인들에게 전했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는 모를지라도 그래도 하나님을 믿는 백성이었습니다. 비록 나라의 사정으로 흩어져 있었지만 유대인들은 이방에 살면서도 회당을 지었고 그 회당 안에서 성경을 보았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런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했고 그런 회당 안에는 자연스럽게 이방인들도 함께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교회입니다

그 안에는 늘 약한 자가 있기 마련입니다 왜 약한 자가 있는가 하면 이제 막 교회에 들어와서 복음을 듣는 사람도 있고 또 복음을 들었지만 그것이 자기 안에서 믿음으로 역사를 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로마서14장에 연약한 자입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그들은 복음을 들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복음을 전혀 듣지를 못하고 율법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이 두 사람은 분명히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복음을 듣고 약한 사람이 있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복음을 전혀 듣지를 않고 율법을 지키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성경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상의 제물입니다

사도 바울이 당시 고린도지방에서 섬기는 우상을 비유로 해서 교회 안에서 지키고 있는 율법의 행위를 비유로 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우상의 제물에 대해서는 우리 성도님들은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그것이 교회 안에서 전해지고 있는 율법을 지키라는 말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성도입니다

그러니까 로마서13장까지의 복음의 말씀을 듣고 믿어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고 있는 사람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고린도교회에 성도들에게 우상에 제물에 대해서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 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상의 제물이 무엇이라는 것을 성도들은 알고 있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당시입니다

지금과 같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복음을 가지고 있는 사도들이 이방에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들이 유대인의 회당에 가서 그들과 교제를 하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제 막 복음이 전해지던 때다 보니까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유대인의 회당에서 그들이 하는 말을 듣고 복음을 전했던 것으로 성경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유대인의 회당입니다

그들은 비록 이방에 있어서 제사를 드리지는 않고 있지만 안식일을 지키면서 여러 가지 자기들이 지킬 수 있는 율법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이 우상의 제물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고 또 우상의 집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잘 이해를 하시기 바랍니다.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성경이 있습니다. 그리고 기독교라는 종교가 있습니다. 그리고 미디어가 있다 보니까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들이라고 해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는 정말 맨땅에 헤딩하듯이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유대인의 회당을 찾는 것은 지극히 당연할 수밖에 없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복음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이제 복음 안에서 자유함을 얻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자유함을 얻는 유대인이었던 성도들이 늘 해오던 습관대로 유대인의 회당에 가서 안식일에 사람들이 모이면 교제를 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사도 바울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복음을 듣고 이제 자유함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율법을 지키지 않고 있습니다. 아니 이제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 그들이 유대인의 회당에 가서 있는 것을 아직 믿음에 든든히 서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보면 어떻게 되겠느냐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자유함이 있습니다.

그런 그들이 유대인의 회당에 가 있습니다. 그 유대인의 회당은 우상의 제물을 먹이고 있는 곳이라는 말씀입니다 복음을 듣고 믿고 우상의 제물이 무엇이라는 것을 아는 지식이 있습니다. 그런 그들이 일상적인 생활을 하기 위해서 유대인의 회당에 가 있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는 약한 자들이 있습니다.

그럼 그 약한 자들이 어떻게 하겠느냐고 사도 바울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저 자유함을 얻은 성도들이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이 물론 율법을 지켰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복음이 처음 전해지고 있었던 당시 상황을 생각하면서 성경을 보아야 합니다.

 

쉽게 설명을 드립니다.

미국의 이민 사회를 어느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그들이 어디를 중심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하면 거의 교회라고 보면 맞습니다. 그들이 꼭 하나님을 믿어서라기보다는 미국이라는 낮선 곳에서 살려고 하다보니까 말이 서로 통하는 우리나라 사람들과 대화를 하고 미국사회에서 사는 정보를 얻으려고 교회에 나가는 사람들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유대인의 회당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이방에 흩어져 살면서 유대인들끼리 서로 의지가 되게 하기 위해서 회당을 지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그 회당을 중심으로 자연스럽게 그들의 삶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미국 이민자들에게 그들의 삶을 들어보면 제가 드리는 말씀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복음을 들었습니다.

그런 그들이 어떻게 하고 있는가 하면 육적인 삶을 살아가야 하니까 미국의 이민자의 교회를 나가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나라에 있는 사람들은 잘 이해가 안 되지만 이민 사회에서 교회를 나가던 사람이 안 나가면 어떻게 되는가를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들은 정말 세상에서 홀로 사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유대인의 회당은 그와 같은 곳이었습니다.

꼭 신앙이 아니더라도 자기들의 육신의 삶을 위해서 그들은 회당에 나가야 했습니다. 사실 그 회당을 안 나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복음을 들은 사람들이지만 그렇게 회당에 나가는 것을 보고 사도 바울이 지금 고린도전서8장에서 우상의 제물과 우상의 집을 비유로 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이방인들이 보았습니다.

유대인의 회당은 우상의 집이라는 것을 알고 있고 그곳에서는 우상을 제물을 먹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복음을 듣고 믿는 자유하는 유대인들이 그 우상의 집에 들어가서 나는 자유하기 때문에 설령 우상의 집에 있다 해도 내 믿음은 변함이 없다고 하고 있고 나는 그들의 말을 듣지 않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약한 자가 있습니다.

복음을 듣고 있는 이방인들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 그들이 복음을 듣고 믿어서 자유하다고 하는 유대인들 중에 어느 사람이 우상의 집에서 우상의 제물이 전해지고 있는 곳에 앉아 있는 것을 보면 어떻게 되겠느냐고 사도 바울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이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독교 교회가 있습니다. 그곳은 우상의 집이고 그곳에서 전해지고 있는 모든 말은 우상의 제물이라는 것을 우리 성도들이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중에 누가 복음을 듣고 자유함을 얻었다고 하면서 다른 일로 우상의 집에 앉아 있습니다.

 

그것을 누가 보았습니다.

믿음이 약한 사람이 보았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그것을 본 믿음이 약한 사람이 어떻게 되겠느냐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상의 제물이 무엇이라는 것을 다 알고 있는 지식이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는 우상의 제물을 먹지 않는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쉽게 말씀을 드려서 이 시대 나는 기독교 교회에 가도 아무 거리낌이 없다고 말을 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면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때로는 갈 수도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것 자체가 나쁘다는 것을 말씀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은 이미 복음을 듣고 믿어서 자유함이 있기 때문에 아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의 자유함을 아직 믿음이 약한 사람이 보았다고 하면 자기도 그렇게 해도 되는 줄을 알고 우상의 집에 가서 우상의 제물을 먹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지식이 있습니까?

그리고 자유함을 얻었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함부로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물론 우리 중에는 약한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모임이 많아지면 반드시 약한 사람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가 그 자유함을 얻은 사람이 자기는 자유하다고 하면서 우상의 집에 마음대로 다니고 있는 것을 보았다면 어떻게 되겠느냐는 말씀입니다

 

네 지식으로 약한 사람이 멸망이 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늘 약한 사람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고 살아가야 합니다. 성도는 지식이 있어서 모든 것에 있어서 자유함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 자유함으로 약한 사람이 담력을 얻어 우상의 제물을 먹는다면 그것은 우리 성도가 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교회입니다

그 안에는 늘 약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 약한 사람에 대해서 사도 바울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약한 사람은 복음을 듣고 있는 사람입니다 비록 모든 비밀을 알지는 못할지라도 그 역시도 복음을 듣고 있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약한 자입니다

그가 복음을 듣고 있습니다. 당연히 그는 의심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왜 의심을 하고 있는가 하면 아직 믿음에 든든히 서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의심을 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설령 우리 안에 그런 사람이 있다 해도 그가 의심을 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5:14절을 보겠습니다. (333)

또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규모 없는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안위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오래 참으라

 

복음을 전합니다.

우리가 전하는 복음을 모든 사람이 듣고 믿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성경은 영의 일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 주시지 않으면 믿고 싶어도 믿을 수 없습니다. 특히 내세에 일은 성령의 감동을 받아 복음을 전하고 있는 저 역시도 설명을 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믿음이 있습니까?

저는 기적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다른 것이 기적이 아니라 이 복음을 듣고 믿는다는 것이 기적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저 역시도 제가 이것을 믿을 수 있다는 것이 때로는 이해가 되지 않고 있습니다. 저 역시도 사람의 이성으로는 정말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주셔서 내 안에서 역사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복음을 들었습니다.

그런 우리도 때로 이 내세의 일에 대해서 의심을 하고 있습니다. 아니 사람의 이성으로는 의심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의심을 하고 있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주셔서 우리 안에서 역사를 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 진리를 따라 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정말 불가사의한 일입니다 우리 역시 그 안에 있을 때는 소경과 같이 그렇게 살았습니다. 복음을 듣지도 않고 믿는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얼마나 허황된 이야기를 듣고 있는지 그리고 믿는다고 하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부활입니다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있는 교회에 성도들에게 부활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이 부활에 대해서 전혀 알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약한 자들이 아니라 아예 처음부터 복음을 듣지를 못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그들이 복음을 듣고 있다고 하면서 자기들이 부활을 할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어려운 말씀입니다

정말 누군가 복음을 전한다 해도 이것을 받아들인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있는 교회에 있는 사람들에게 서신을 보내고 마치면서 또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규모 없는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안위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오래 참으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때와 시기입니다.

너희에게 쓸 것이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들은 성도들은 때와 시기에 대해서 다 알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사실 이 때와 시기를 알고 있는 사람도 거의 없습니다. 아니 데살로니가에 있는 말씀을 자기들이 편리에 따라 이야기를 하고 있고 심지어는 이 말씀을 가지고 이용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제까지 기독교사를 보시기 바랍니다.

세상적으로 환난과 전쟁이 있으면 거의 모든 시기에 종말을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제까지 수많은 종말론 자들이 있었고 지금도 종말론 자들은 복음을 듣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종말에 대해서 막연한 두려움을 주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천국입니다

그리고 지옥입니다 그리고 내세의 일을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바로 전하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이 영의 일을 바로 전해도 사실 사람이 믿는다는 것이 어려워서 사도 바울이 너희 중에 약한 자들이 있다고 하면서 안위를 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영의 일입니다

그 말씀을 바로 들었지만 약한 자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 처음 교회에 나와서 모든 행동이 서투른 사람을 말씀을 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들었지만 약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고 그들이 어떤 말씀에 대해서 의심을 할지라도 비판하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말씀을 합니까?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오래 참으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 이렇게 약한 사람들이 교회 안에 있었습니다. 교회 안에는 이렇게 늘 약한 사람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성도는 그들이 믿음에 든든히 설 수 있게 오래 참으면서 구원을 받을 수 있게 인도를 해야 한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24:38절을 보겠습니다. (141)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사람의 이성입니다

누군가 성령의 감동을 받아 모든 진리를 전한다 해도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아니 그냥 받아들인다는 그 자체가 더 이상한 일입니다 우리가 로마서 강해를 통해서 잘 알고 있듯이 영의 일을 받아들인다는 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복음을 듣고 의심을 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복음을 전합니다.

저 역시도 많은 사람과 대화를 했습니다. 특히 인터넷을 보고 전화로 복음에 대해서 듣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아무리 성경에서 진리를 전한다 해도 그들은 받아들이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왜 못 받아들이는가 하면 의심이 되기 때문입니다

 

의심을 합니다.

의심을 하는 것이 절대로 나쁜 것이 아닙니다. 제가 의심을 하는 그 사람들이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도 그들은 복음을 보려고 했고 다만 사람의 이성을 따르다보니까 의심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특히 영의 일을 말씀을 하면 더욱 의심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습니다.

의심을 하는 그것으로 마치고 있습니다. 그래도 말씀을 보았을 때는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의심을 의심으로 그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의심을 했으면 그것을 알기 위해서 더 깊이 파고 들어가고 또 그것이 이해가 안 되면 하나님께 자기가 의심하고 있는 말씀에 대해서 지혜를 구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를 않습니다.

 

거기까지입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을 보시기 바랍니다. 베뢰아 사람들이 어떻게 했습니까? 사도 바울이 복음에 대해서 말씀을 전하자 그들은 듣고 그것을 의심을 했고 그 말씀이 성경과 맞는가 하여 성경을 상고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이성으로는 사도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받아들일 수 없었지만 성경을 상고하면서 지혜를 구했습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베뢰아 사람들이 의심을 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합니다. 그 말씀이 맞는가 하여 성경을 상고했다는 말씀은 사도 바울이 전하는 말씀을 듣고 그냥 믿었다기보다는 의심을 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한 의심이 도리어 베뢰아 사람들을 신사적으로 만들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들으면 당연히 의심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영의 일입니다

육체를 가지고 있는 인생이 그것을 의심하지 않고 받아들인다는 것이 실상은 더 어려운 일입니다 주님을 삼년 반 동안 따라 다니면서 복음을 들었던 제자들 역시도 성령이 오시지 않으니까 주님께서 부활을 하신 것을 보고도 의심을 했습니다.

 

부활입니다

이 시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주님이 이 시대 직접 보이시지 않을 뿐이지 이 부활에 대해서 거의 모든 사람들이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아니 의심을 하면서도 거대한 종교에 의해서 막연하게 부활을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의 의심입니다

주님께서 부활을 하신 것을 보고 의심을 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분명히 자기들의 이성으로 알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이 무덤에서 장사를 지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주님께서 나타나시자 놀라고 의심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은 영으로 부활을 하셨습니다.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37절에서 저희가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한지라고 말씀을 하니까 주님이 이 세상에 오실 때 그 육체로 부활을 했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은 정말 이런 작은 말씀이 깨달아지지가 않으면 신체의 부활을 주장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니 제가 영으로 부활을 하셨다고 하면 이 말씀을 가지고 반박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 죽은 것은 이 세상에 오실 때 입고 오셨던 우리와 같은 육체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영으로 살리셨습니다. 영으로 살리셨다는 말씀을 잘 이해를 하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영이 아니라 신령한 몸으로 살리심을 받았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주님도 영이십니다. 비록 주님의 육체는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그 영이 있으시기 때문에 주님은 부활을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영이 아니라 성경에서 말씀하는 영입니다. 지금 누가복음24장에서 제자들이 영으로 생각한다는 그 말씀은 이 세상 사람들이 이성으로 알고 있는 영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의심합니다.

그 영으로 생각을 하면 당연히 의심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영으로 부활을 하셨지만 신령한 몸으로 부활을 하셨다는 것을 믿으면 누가복음의 말씀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말씀을 보면 의심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아니 이해가 안 됩니다

믿음이 연약한 자는 당연히 의심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가 아무리 영의 일에 대해서 복음의 말씀을 들었다 해도 하나님께서 그에게 성령을 보내주시지 않으면 백번 의심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성령이 오셔서 그 사람 안에서 역사를 해야 믿을 수 있는데 그것을 사람의 이성으로 이해를 하려고 하니까 의심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부활입니다

이 시대 역시 부활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주님의 부활을 형상을 보고 두려워하고 의심을 한 것과 같이 이 시대 역시 부활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아니 이 부활은 사실 사람의 이성으로는 이해가 안 되고 오직 성령이 오셔서 믿음으로 역사를 해야 합니다.

 

그의 의심하는 바입니다.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그렇게 의심을 할지라도 그를 비판하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비판을 하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는가 하면 우리 역시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 주시지 않으면 의심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의심하지 않고 있습니까?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목사들이 전하는 말에 전혀 의심을 하지 않습니다. 사실 그렇게 의심을 하지 않고 받아들인다는 것이 더 이상한 일이지만 믿음이 없다는 말을 듣기 싫어서 의심을 하지 않습니다. 복음을 들었으면 의심을 해야 하는데 안타깝게도 이 시대는 복음을 듣지를 않아서 의심하지 않고 있습니다. 누군가 복음을 전하면 당연히 그 말씀에 의심을 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의심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의심을 하지 말라고 하는 말씀이 아니라 당연히 의심을 한다는 뜻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방에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그 복음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인 사람들보다는 의심을 했던 사람이 더 많았습니다.

 

잘 이해를 하시기 바랍니다.

의심하는 것이 나쁘다는 뜻이 절대로 아닙니다. 아니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의심을 했습니다. 사실 이 영의 일을 듣고서 의심을 하지 않는 사람이 더 이상합니다. 저 역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면 돌아오는 답이 거짓말 하지 말라고 합니다.

 

웃으면서 하고 있습니다.

그런 것이 어디 있느냐고 말을 합니다. 그래도 그 정도면 다행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을 이야기를 하면서 믿지 못하겠다는 뜻에서 그런 거짓말이 어디 있느냐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말을 하는 것이 지극히 정상입니다

 

복음을 전합니다.

그러면 당연히 돌아오는 답이 이렇습니다. 심지어는 그리스도편지의 있는 말씀을 많이 본 사람도 그렇게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럴지라도 그를 비판하지 말고 받아들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사람의 이성에는 우리가 전하는 복음을 들으면 당연히 의심을 하게 되어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요한일서4:13절을 보겠습니다. (392)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비판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어느 누가 스스로의 지혜가 있어서 성경을 보고 믿음을 가졌습니까?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우리 인생은 그럴 능력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럴 능력이 없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복음을 전하면 그것을 듣고 의심을 하는 것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성입니다.

 

복음을 들었습니다.

아니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스스로 믿어집니까? 설령 사도 바울이 이 시대 다시 와서 복음을 전한다 해도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 주시지 않으면 듣고 믿을 수 없습니다. 그가 아무리 신학박사 학위를 가지고 있다 해도 이 영의 말씀을 믿을 수 없고 도리어 의심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었습니까?

그것을 여러분이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것을 어떻게 증거 할 수 있습니까? 사람으로는 안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 주심으로 해서 내 안에서 역사를 해서 이 복음을 들으면 그것이 믿어질 수 있게 역사를 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의 성령입니다

사도 요한이 하나님께서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성령을 주심으로 해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은 것을 알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을 내가 스스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하나님께서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심으로 해서 복음을 듣고 믿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의 의심하는 바입니다

왜 비판을 해서는 안 됩니까? 늘 말씀을 드리지만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놀라운 역사입니다 내 쪽에서 어떤 것을 해서 된 것이 아니라 나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는데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 주심으로 해서 우리가 그의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이 믿어지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전제 조건입니다

먼저 복음을 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같이 복음을 들었다 해도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주시지 않으면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는 것이 무슨 뜻인가를 알 수 없고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복음을 아예 듣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복음을 듣고 믿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들었지만 아직 성령이 오시지 않아서 믿지를 못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가 아직 성령이 오시지 않아서 우리가 전하는 복음을 듣고 의심을 한다 해서 그를 비판하지도 말고 또 그를 받아들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연약한 자는 의심을 합니다.

그가 누군가를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 세상 사람이 아닙니다. 또 이 시대 기독교인들과 같이 율법주의에 빠져 있는 사람도 아닙니다. 사도들이 전하는 복음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아직 오시지 않아서 의심을 하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가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습니다.

그것을 사도 요한은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영의 일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면 어떻게 믿을 수 있는가 하면 하나님께서 그의 성령을 보내 주셔서 우리 안에서 역사를 하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비판을 하면 안 됩니다

성령을 받아 복음을 듣고 믿은 우리 성도라 해도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 주시지 않았다면 믿음이 있을 수 없기 때문에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복음을 듣고 믿는 성도는 자기가 어떠한 은혜를 받았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누군가 의심하는 바가 있을지라도 절대로 비판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