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13:10절을 보겠습니다. (신 257쪽)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우리 성도는 남은 자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아 그 사랑을 은사로 받은 성도는 사랑을 알기 때문에 악을 행치 아니합니다. 우리 성도는 악이 무엇이라는 것을 이제 성경을 통해서 알고 있기 때문에 그리고 악한 자가 어떻게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악을 행치 아니합니다.
율법입니다
내가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까? 그것이 다 악이 된다는 것을 사도 바울은 계속해서 우리에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루었는가 하면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을 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율법이 다 이루어진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내 이웃을 내 자신과 같이 사랑합니까?
복음을 알고 있는 성도는 그를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 줄을 알고 있습니다. 내가 구원을 받았으면 내 이웃도 구원을 받아야 내 이웃을 내 자신과 같이 사랑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육체적으로는 그것을 끔찍이도 사랑한다고 하지만 영으로는 전혀 그렇게 하지 않고 도리어 악을 행하고 있습니다.
누가 악을 행했습니까?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이스라엘을 악하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들이 왜 악한가 하면 율법을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악하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이방의 교회 역시 이스라엘과 같이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서도 자기들이 지키는 율법이 왜 악한가를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이웃에게 악을 행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제사장 바리새인들이 이웃에게 어떻게 악을 행했습니까? 자기들이 먼저 율법주의에 빠져서 그 이웃들에게 율법을 지키는 일을 강요를 했고 자기들과 같이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대적을 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일로 이스라엘 모두가 버림을 받고 말았습니다.
율법입니다
그것으로는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습니다.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면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구원을 받지 못하게 하고 있다면 그는 이웃에게 악을 행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라고 하면서 그가 구원을 받지 못하고 저주를 받게 하고 있다면 그는 악한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런데 나를 보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그가 구원을 받지 못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거짓을 말하고 있다면 그는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사랑은 악을 행치 아니하지만 사랑이 없으면 이렇게 악을 행하게 된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정말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내 말 한 마디가 악이 될 수 있습니다. 내가 하고 있는 거짓말 하나가 이웃에게 악을 행하는 일이 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그것을 전혀 분별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알았다면 절대로 거짓을 말하지 않고 악을 행치 아니할 수 있습니다
이웃의 구원입니다
나는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내가 복음을 전했는데 그가 듣고 안 듣고는 그의 책임입니다 그러나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고 율법의 행위를 하고 있다면 그 자체가 악이 되어서 이웃이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시대는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영생입니다
사랑이 있는 성도는 이웃에게 이 영생에 대해서 바로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을 모르게 되면 그는 악을 행하게 되어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그렇게 악을 행하는 사람이 많이 있지만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이성으로 자기들이 하고 있는 모든 신앙생활의 의를 선하다고 생각하면서 점점 더 이웃에게 악을 행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영생을 얻는 일입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 이 명령을 따르지 않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 명령을 지키지 못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악을 행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이 시대 교회를 보면 거의 모든 사람이 율법을 지키고 있고 그 율법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지 못해서 저주를 받고 있습니다.
악입니다
영생을 얻지 못하면 다 악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을 얻으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시대 이방의 교회는 이웃에게 악을 행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복음을 전함으로 해서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이웃이 저주를 받게 하고 있습니다.
악을 행치 마시기 바랍니다.
이상하게도 사람들은 교회에만 나오면 열심을 주체를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주를 받으려면 자기 혼자만 받지 왜 이웃까지 저주를 받게 하는지를 모르겠습니다. 다 종교적인 열심에서 나오고 있지만 사람들은 그러한 행위를 보고 도리어 믿음이 있다고 칭찬을 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합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13장은 장절이 잘못 되었습니다. 사실 그러므로 라는 부사가 나오면 장절을 다시 표기를 해야 맞습니다. 물론 헬라어 원어를 누군가 그렇게 구분을 해 놓았기 때문에 우리 언어로 번역이 되어 있는 성경도 그렇게 된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5:17절을 보겠습니다. (신 6쪽)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누구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누가 사랑했다는 말씀입니까?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율법을 완성했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율법을 완성케 하셨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완성
어떤 일을 다 이루어 완전한 것으로 만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셔서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셨습니다. 그러니까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모든 율법을 다 지키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런 것을 따지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에서 그렇다고 하면 그런 것으로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이 시대는 성경을 안 보고 있습니다.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율법을 완전케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율법을 다 지키셨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을 요한일서에서는 그에게는 죄가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것에 의문을 달기 보다는 왜 그가 죄가 없으신 분인가를 성경에서 알기 위해서 지혜를 구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도리어 그런 말씀들에 의문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랑입니다
주님은 우리 인생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어떻게 사랑을 하셨는가 하면 이 세상에 오셔서 율법을 완성하셨습니다. 그것을 마태복음에서는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주님이 율법을 완성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율법을 다 지키신 이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의 영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아야 하는데 주님이 율법을 완성치 않았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도 의롭다 하심을 받을 수 없습니다.
율법입니다
그리고 율법 외에 나타난 하나님의 한 의입니다 율법은 내가 율법을 지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고 율법 외에 나타난 하나님의 한 의는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율법을 지킨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의가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율법을 완성케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우리 인생들을 사랑하셔서 이 세상에 오셔서 율법을 완성하셨습니다. 율법을 다 지키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성경을 보면서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완성하셨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아니 그 의미를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주님이 율법을 완성하셨습니다. 그럼으로 해서 주님은 흠도 없고 점도 없는 분이 되셨습니다. 그렇게 하신 이유는 우리 인생들이 율법의 저주를 받아 모두가 죽게 되었는데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입니다. 우리 인생의 육체를 살리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해서 점도 없고 흠도 없는 그의 영이 우리 안에 탄생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이 사랑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율법을 완성케 하신 것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이 있음으로 해서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아 우리 안에 주님과 같은 영의 생명이 탄생이 되고 있습니다.
율법의 완성입니다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이루셨습니다. 그럼으로 해서 우리 안에 율법이 완성이 되어서 의롭다 하심을 얻은 영의 생명이 거하고 있습니다. 이 놀라운 하나님의 영의 비밀을 가르쳐 주고 있지만 이 시대는 성경을 이상하게 보고 있습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말씀을 합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자기들이 율법을 완성시키려고 이 세상에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아니 자기들이 이웃을 아주 조금 사랑하는 것을 가지고 마치 율법을 완성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내 이웃을 내 자신과 같이 사랑한다고 해도 육체적으로는 율법을 완성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어떻게 가능합니까?
어느 누구도 그것을 이룰 수 없습니다. 욥과 같은 사람도 안 된다는 것을 성경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욥의 발꿈치도 못 따라가는 사람들이 자기들이 하고 있는 행위를 보면서 마치 율법을 완성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오해를 하면 그런 어리석음에 빠져 도리어 악을 행하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누가 율법을 완성했습니까?
그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는 그것으로 율법을 완성했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그 사랑에 대해서 전하는 선을 행할 수 있지 우리가 율법을 완성해서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율법을 완전케 하셨습니다. 그리고 완전케 하신 그 율법을 우리에게 의로 주셨습니다. 그것이 로마서에서 말씀을 하고 있는 율법 외에 나타난 하나님의 한 의입니다 이 사랑을 전하는 것이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는 것임을 사도 바울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킵니까?
그는 악을 행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완전케 하셨다는 것을 믿고 있습니까? 그럼으로 해서 완성케 하신 그 율법의 의를 얻었습니까? 그리고 그 의를 전하고 있다면 그는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는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율법을 완성하셨습니다. 그러면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는 더 이상 율법을 지킬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주님과 내가 하나라면 주님이 율법을 완성하셨다면 그것은 내가 율법을 완성한 것과 같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이 시대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들이 육체로 율법을 완성하려고 하면서 조금 하고 있는 이웃사랑에 대해서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그것으로는 어느 누구도 율법을 완성할 수 없다는 것을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율법이 완성 되었습니다.
그렇게 믿는 성도는 율법을 지키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직 율법이 완성이 되지 않은 사람은 율법을 지키게 되어 있습니다. 성경을 보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이루신 일을 믿어야 하는데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전혀 믿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아니 주님께서 완성을 하셨어도 그것이 자기들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입니다
율법으로는 저주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한번 죽는 것이 정해졌습니다. 그리고 우리 육체는 반드시 썩어 없어집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율법을 완성하셨습니다. 그렇게 완성하신 율법의 의를 우리에게 거저 주심으로 해서 그 구속의 일을 믿음으로 해서 우리 안에 율법을 완성하신 그리스도의 영이 탄생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이 사랑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인가 아닌가를 알 수 있는 가장 기초가 무엇인가 하면 그가 율법을 지키는가를 보면 됩니다. 그가 율법을 지키고 있다면 그에게는 아직 사랑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로마서 13:11절을 보겠습니다. (신 257쪽)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니라”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여러분은 지금이 어느 때인지 압니다. 잠에서 깨어나야 할 때가 벌써 되었습니다. 지금은 우리의 구원이 우리가 처음 믿을 때보다 더 가까워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우리 성도는 그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분명히 우리는 율법의 저주를 받아서 죽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만세 전부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예정하셨습니다. 율법을 완성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 구원을 받게 하시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랑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사랑이 있는 성도는 율법을 완성했습니다. 우리가 완성했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이 세상에서 오셔서 완전케 하신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의롭다 하심을 받아 우리 안에 완전케 하신 이의 영이 거하시고 있습니다.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성경을 보는 신학자들의 눈이 참으로 답답하기만 합니다. 시기를 말씀을 하니까 마치 주님이 오실 때를 말씀하는 것으로 제목을 붙여 놓았습니다. 지금 이 말씀이 주님이 오시는 시기를 말씀하고 있습니까? 주님이 오시는 시기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말씀을 가지고 그렇게 제목을 붙여 놓았습니다.
시기
사전에서 일정한 때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또한 어떤 일을 하는데 적당한 때나 기회를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 사도 바울이 어느 시기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복음을 믿을 시기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오실 날을 말씀하는 것이 아닌데도 신학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제목을 이상하게 붙여 놓았습니다.
성경입니다
성도는 정말 성경을 주의 깊게 보아야 합니다. 특히 첨삭이 되어 있는 것을 그대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첨삭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교회 안에 있는 목사들까지도 이것이 첨삭이라는 것조차 모르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제목만 보고 설교를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전혀 다릅니다.
솔직히 이런 것 까지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그러나 일일이 말씀을 안 드리면 제목을 습관적으로 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습니다. 성경의 첨삭은 성경 말씀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데 그것을 제목으로 보고 있고 그냥 대충 성경을 보고 있습니다. 특히 목사들이 그렇게 봄으로 해서 복음이 아닌 다른 복음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다른 번역입니다
지금이라고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솔직히 다른 번역만 보아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아니 지금이라고 번역이 되어 있는 다른 번역의 성경을 보아도 똑같이 제목을 붙여 놓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번역을 그렇게 하지 말든지 아니면 제목을 그렇게 붙이지 말아야 하는데 누가 제목을 처음에 붙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성경을 세상 초등학문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너희가 이 시기를 알고 있습니다.
로마에 있는 교회에 있는 성도들에게 이 편지를 보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도들로부터 초대 교회에서 복음을 듣고 있는 사람들에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누구입니까? 이제까지 로마서에서 말씀하는 복음을 듣고 믿는 성도들에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학개 1:2절을 보겠습니다. (구 1310쪽)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여 이르노라 이 백성이 말하기를 여호와의 전을 건축할 시기가 이르지 아니하였다 하느니라”
너희가 이 시기를 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어느 시기입니까? 그러니까 구원을 받을 시기를 알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구원을 받을 적당한 때와 기회를 알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누구에게 하고 있는 말씀입니까? 이제까지 사도 바울이 말씀을 하고 있는 복음을 들은 사람들에게 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복음입니다
이 시대는 불행하게도 이 복음에 대해서 듣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까 이 시기에 대해서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니 그들도 때와 기회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그들에게는 기회가 오지 않았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먼저 복음을 들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위에 있는 권세를 알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이루신 구속의 일을 알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을 알아야 이 시기를 안다고 말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율법을 완성하셨습니다. 그것을 알고 있는 성도는 내 시기를 알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복음을 들었습니다.
그런데도 시기를 모른다면 그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시기를 주시고 있습니다. 어떤 일을 하는데 있어서 시기인가 하면 내가 구원을 받는데 있어서 적당한 때나 기회가 지금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늘 말씀을 드립니다.
청년의 때를 허비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 인생은 정말 시간이 부족합니다. 내가 평생을 성경을 보면서 살아간다 해도 사실 성경에서 하나님의 명령을 깨닫고 영생을 얻는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초대 교회에는 사도들이 있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때보다 그런 기회보다 더 좋은 시기는 없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영생을 얻는데 있어서 지금보다 더 중요한 시기는 없습니다. 이 시기를 허송세월하고 보낸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니 내가 복음을 조금 안다고 해서 마치 다 이룬 것으로 생각을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제 그것에 대해서 사도 바울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입니다
세상 말로 문밖이 저승이라고 합니다. 정말 내일 일을 우리는 모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그렇게 말을 하고 있습니다. 누구보다도 우리 성도는 그것을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그것을 알고 있다면 우리에게 시기가 언제입니까?
지금입니다
그것을 학개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여 이르노라 이 백성이 말하기를 여호와의 전을 건축할 시기가 이르지 아니하였다 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은 지금이 그 시기인데 사람들은 다르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전입니다
성전을 지어져 간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 고린도전서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포로에서 돌아오고 난 후에 그들이 성전을 짓지 않았습니다.
물론 보이는 성전입니다
그러나 학개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을 알고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게 하라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령을 구해서 진리로 인도함을 받아 영생을 얻으라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기입니다
복음을 들었으면 우리 안에 성령이 거하시게 해야 합니다. 진리로 인도함을 받았으면 우리 안에 성령으로 말미암아 난 영이 거하시고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 시기를 알려면 반드시 복음을 들어야 하는데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아예 처음부터 복음을 듣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아니 다른 복음을 들으면서 그것을 복음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성경이 안 보입니다
어느 정도 안 보이는 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도 이 성경을 편찬할 정도의 사람이라면 위대한 신학자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그가 성경에 첨삭을 해서 성경과 전혀 다르게 제목을 붙여 놓고 있습니다. 그런 그들이 로마서를 어떻게 깨달을 수 있습니까?
그런 그들이 어떻게 시기를 알 수 있습니까?
먼저 복음을 들어야 시기를 알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사실 복음을 들어도 이 시기에 대해서 모르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 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로마서를 통해서 복음을 다 말씀을 하고 난 후에 너희가 시기를 알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이 시대는 그 기회조차도 없어 청년의 때를 그냥 보내고 있습니다.
나중입니까?
우리 인생에 나중이 어디 있습니까? 지금 내가 구원을 받지 못하면 우리에게는 다시 기회가 없을 수 있습니다. 아니 지금 믿음에 든든히 서 있지 못하면 언제 어떻게 넘어질지 모르는 것이 우리 인생이라는 것을 늘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시기입니다.
사실 지금이 얼마나 좋은 시기입니까? 저는 정말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들을 통해서 복음이 전파가 되었습니다. 그런 이후로 우리보다 더 좋은 시기에 복음을 깨달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불과 100여 년 전만 해도 이단으로 정죄가 아주 심했습니다. 그리고 이단으로 정죄가 되면 심지어는 물리적으로 핍박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지금은 너무도 편안한 시기입니다. 우리가 진리를 따라 행한다 해도 어느 누구도 시비를 걸지 않고 있습니다. 정말 우리나라는 종교의 자유가 있어서 우리가 나타나지만 않으면 어느 누구도 우리에게 핍박을 줄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너무 좋다보니까 도리어 사람들이 이 복음을 들으면서도 허송세월을 보내고 있지 않은가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복음이 전해진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우리는 정말 좋은 시기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의 성전이 지어진다고 해도 누가 시비를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너무 편하다보니까 도리어 이것이 얼마나 귀한 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영생입니다
모든 것은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 기회조차도 주어지지 않고 있는 사람들이 거의 다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복음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복음을 듣고 진리로 인도함을 받고 있는 성도는 이 시기를 잘 알고 있습니다.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청년의 때를 그냥 보내지 마시기 바랍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믿음은 아는 것에서부터 출발이 되고 있습니다. 그것을 하루아침에 알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도깨비 방망이가 아닙니다.
성경에 왜 지식이라는 말씀이 있는가를 아시기 바랍니다. 그 지식이라는 것이 하루아침에 주어지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그리스도편지를 보면서 사람들이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어느 정도 말씀을 보면 자기가 이제는 다 아는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워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왜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처음 복음을 듣습니다. 사람들이 복음을 처음 들으면 마치 자기가 구원을 받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에베소교회만 해도 사도 바울이 내가 삼년 동안 너희를 눈물로 훈계 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내가 가면 흉악한 이리가 와서 너희를 아끼지 않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정말 우리는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아니 평생을 내 영혼의 구원을 바라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은 가능한 성경에서 복음을 많이 알아감으로 해서 이룰 수 있는 일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성전을 지으시기 바랍니다.
지금이 얼마나 좋은 시기입니까? 우리에게 이보다 더 좋은 시기는 없습니다. 나는 젊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젊음을 생각하다가 시기를 놓치게 되어 있습니다. 나에게 주어진 시기를 놓치게 되면 그 다음에 기회가 오지 않을 수 있습니다.
너희가 시기를 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 복음을 듣고 있는 우리에게 사도 바울을 통해서 똑같은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기를 알고 있는 성도는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 보다 가까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시기를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니 불행하게도 이 시대는 기회조차 주어지지가 않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8:7절을 보겠습니다. (구 1064쪽)
“공중의 학은 그 정한 시기를 알고 반구와 제비와 두루미는 그 올 때를 지키거늘 내 백성은 여호와의 규례를 알지 못하도다 하셨다 하라”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하늘을 나는 학도 제 철을 알고, 비둘기와 제비와 두루미도 저마다 돌아올 때를 지키는데, 내 백성은 주의 법규를 알지 못한다.”
공중의 새입니다
학을 철새라고 합니다. 물론 종류에 따라 약간은 다르지만 학 종류를 철새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학이 그 정한 시기를 알고 찾아오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와 중동의 날씨는 달라서 어떨지 모르겠지만 성경에 그렇게 기록이 되어 있으니까 맞는 것 같습니다.
시기를 알고 있습니다.
새도 자기가 와야 할 시기를 알고 있습니다. 예레미야서를 통해서 여러 가지 철새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비둘기가 철새인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지금 기르는 집비둘기를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산비둘기를 말씀하는 것으로 생각이 되고 있습니다.
시기가 있습니다.
새들이 올 때가 있고 그리고 갈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시기를 몰라서 되겠느냐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내 백성은 여호와의 규례를 알지 못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성경을 너무 단순하게 보고 있고 규례라고 하면 율법으로 연관을 지어서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규례입니다
우리 안에 새사람이 지으심을 받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새들도 시기를 알고 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규례를 알지 못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호와의 성전을 지어야 하는데 이스라엘은 영의 일을 몰라서 성전을 짓지 않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도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제까지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말씀하고 있는 복음을 바로 알고 있는 성도는 알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솔직히 말씀을 드려서 이제까지 기독교라는 종교에서 전하고 있는 그 복음은 다른 복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들에게는 아예 이 기회조차도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데 소경이 되어서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복음을 듣고도 이 시기를 알지 못한다는 것은 너무도 불행한 일입니다 복음을 듣지도 못했다면 그래도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편지에서 복음을 듣고도 이 시기를 모르고 총기가 있는 청년의 때를 그냥 보내고 있다면 너무도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새입니다
사실 우리 인생이 이성이 있고 지식이 있다고 하지만 복음을 모르면 이 새보다도 못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새들은 그래도 자기들의 시기를 알고 찾아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되어서 아니 교회 안에 들어와서 복음을 듣는다고 하는 그들이 시기를 모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평생입니다
교회 안에서 율법만 지키다가 죽습니다.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늘 말씀을 전하고 있지만 가장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것도 내 가족이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것이 더 안타깝기만 합니다. 그것을 사람으로는 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가 더 안타깝기만 합니다. 정말 이 일을 위해서 우리는 늘 기도를 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내 백성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내 백성이 규례를 알지 못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비단 이스라엘에게만 하고 있는 말씀입니까? 이 시대 역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그렇다는 것을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을 하고 있지만 이 말씀을 이스라엘의 일로만 치부를 해 버리고 있습니다.
너희가 시기를 알거니와
이 시대 로마서를 보고 있는 사람들이 이 시기를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로마서의 말씀을 1장부터 해서 바르게 풀어져야 하는데 이 시대는 성경을 거의 거꾸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이제까지 신학자들 역시도 거의 성경을 거꾸로 해석했습니다.
그들의 주석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강해가 있습니다. 과연 그 유명하다고 하는 신학자들이 이 로마서를 바로 해석하고 있습니까? 어느 한 사람도 바로 해석해서 그 문서가 내려오고 있지 않습니다. 모두가 다른 복음을 전하고 있지만 그것을 깨달을 수 있는 지혜가 사람들에게는 없습니다.
칼뱅의 주석입니까?
루터의 강해가 있습니까? 로이드존슨의 로마서 강해가 있습니까? 그들이 이 로마서를 바로 해석을 했습니까? 그래서 이 시대 기독교인들이 로마서를 보면서 시기를 알고 있습니까? 그들이 시기를 안다고 하면 절대로 그렇게 율법을 지키지 않을 수 있습니다.
지금이 어떤 때입니까?
우리는 늘 처음 믿을 때보다 구원에 더 가까워왔음을 알아야 합니다. 아니 구원을 붙잡으려고 좇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구원을 못 받아서 구원의 확신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구원을 받았고 우리 안에 생명이 있다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오셔서 확신을 해 주고 있지만 우리는 그것을 붙잡으려 좇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이 시대는 교회 안에만 들어오면 아니 예배 몇 번 참석을 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 구원을 받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이제 처음 나온 사람들에게 마음에 확신을 이야기를 하게하고 있고 그것으로 그가 구원을 받았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절대 아닙니다.
그런 일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 1장부터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 13장 말미에 와서 너희가 시기를 안다고 하면서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워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로마서 1장부터 복음을 확실히 알아야 가까워왔다는 말씀입니다
13장 까지입니다
로마서를 교리서라고 합니다. 그리고 구원을 받으려면 로마서를 알아야 한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성도는 모든 성경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는 로마서 13장까지만 알아도 구원을 받는데 있어서 문제가 없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의 구원이 가까워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로마서조차도 몰라서 구원에서 점점 더 멀어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유명하다고 하는 신학자들이 쓴 로마서를 보면 정말 안타까운 마음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를 통해서 우리에게 믿음을 가르쳐 주고 있지만 그 기초자체가 정립이 안 되고 있습니다.
잠언 19:15절을 보겠습니다. (구 932쪽)
“게으름이 사람으로 깊이 잠들게 하나니 해태한 사람은 주릴 것이니라”
너희가 이 시기를 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어느 시기입니까? 복음을 들을 시기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 들어와 있는 사람들이 모두가 잠을 자고 있습니다. 자기들이 자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깨달을 수 있는 지혜가 없습니다. 성경에서 누가 자고 있는가를 말씀을 하고 있지만 성경을 보면서도 자기가 자고 있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게으름이 사람으로 깊이 잠들게 하고 있습니다.
잠언은 누구나 다 한 번씩은 읽어 보고 있습니다. 말씀 그대로 지혜서라고 하니까 지혜를 얻기 위해서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다른 성경은 못 보더라도 잠언은 보고 있습니다. 그렇게 보는 그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잠언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지혜입니까? 그것이 아니라 잠언 역시 우리 영의 일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영의 일을 잠언에서 말씀을 하고 있지만 구약에서 대표적으로 문자로 보고 있는 말씀 중에 하나가 잠언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세상의 지혜가 아닙니다.
우리 영혼의 문제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잠언을 보면서 세상의 지혜를 얻으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어리석은 자입니다 우리 영의 일을 말씀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영의 일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게으름이 사람으로 깊이 잠들게 합니다.
누가 게으른 자입니까? 우리나라 기독교인들 처럼 부지런한 사람들은 거의 없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서양의 기독교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많은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특히 이런 말씀을 생각하면서 새벽 예배에 열심을 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육체의 게으름입니까?
그것이 아닙니다. 영의 일에 있어서 게으름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누가 게으른 사람입니까? 그것을 주님께서 달란트의 비유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생명의 달란트를 남기지 못한 사람에게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 생명을 얻지 못하는 사람이 교회 안에 있는 게으른 사람입니다
새벽 예배를 드립니까?
그런 육체의 모습을 보고 부지런하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다 육체의 모양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그런 육체의 일을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영의 일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영의 생명을 얻지 못하는 사람을 주님께서 게으르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까?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교회 안에만 있으면 마치 자기들이 구원을 받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율법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에게 주님께서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주님께서 말씀을 하신 달란트의 비유를 모르고 교회 안에서 부지런하기 위해서 더 많은 육체의 일을 하고 있습니다.
육체의 일입니까?
그것을 아무리 많이 해도 아니 평생을 그렇게 산다고 해서 그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악하고 게으른 종이 누군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는 교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고 있지만 생명을 얻지 못하고 율법을 지키고 있는 사람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게으름입니다.
사람으로 깊이 잠들에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것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게으른 자는 자고 있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게으른 자가 누군가 하면 교회 안에서 율법을 지키고 있는 사람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까?
그는 교회 안에서 자고 있는 사람입니다 게으름이 사람으로 깊이 잠들에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게으름을 육체의 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율법에 빠져 있는 사람을 비유로 해서 게으른 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성경을 보면서도 도무지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교회입니다
이 시대 교회는 거의 자고 있다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그들은 깨어 있는 자가 아니라 모두가 자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율법을 지킴으로 해서 저주를 받아 생명을 얻지 못하고 있는 모든 사람을 비유로 해서 자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 율법을 지키고 있는 그들은 자기들이 깨어 있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악하고 게으른 종입니다
그는 생명의 달란트를 남기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교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는 하지만 그의 안에는 영원한 생명이 없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직 율법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에게 사도 바울이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되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누가 압니까?
이 시대 교인들이 알고 있습니까? 그들은 복음을 듣지도 못해서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깊은 잠에 빠져 있으면서도 자기들이 자고 있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율법을 지키면서 그 율법으로 진노를 받지만 그것을 깨닫지를 못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잠언 20:13절을 보겠습니다. (구 933쪽)
“너는 잠자기를 좋아하지 말라 네가 빈궁하게 될까 두려우니라 네 눈을 뜨라 그리하면 양식에 족하리라”
게으름이 사람으로 깊이 잠들에 합니다.
누가 게으른 자인가 하면 교회 안에서 율법을 지키고 있는 사람이 게으른 사람입니다 왜 그가 게으른 사람인가 하면 생명에 대해서 전혀 깨닫지를 못하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잠자기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빈궁하게 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부요해야 합니다.
율법의 의로 부자가 되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부요한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성경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 있는 다수는 육체의 부지런함으로 인하여 영의 일에 있어서 게으름을 피우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영원한 생명을 어떻게 얻는가를 알아야 하는데 육체의 일을 하느라 그것에 게으르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자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모두가 잠자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럼으로 해서 그들은 율법의 의를 가졌고 그 율법의 의로 빈궁하게 되어서 구원을 받을 수 없게 되었지만 깨닫지를 못 했습니다 잠언의 말씀을 외울 정도로 알고 있었지만 그들은 게으름이 무엇인가 그리고 잠자는 것이 무엇인가를 모르고 성경을 문자로만 보았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을 거의 모든 사람이 문자로 보고 있습니다. 너는 잠자기를 좋아하지 말라 네가 빈궁하게 될까 두려우니라는 이 말씀을 거의 문자로 보고 있고 이 세상에서 잠을 좋아하는 사람은 빈궁하게 된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어떻게 말을 합니까? 세상의 일을 비유로 해서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는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입니다
우리 육체의 일이 아닙니다. 늘 말씀을 드리지만 성경은 영의 일이지 육체의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잠언을 보면서 특히 구약을 보면서 사람들은 거의 다 육체의 일로 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의 일을 말씀을 하고 있는데 이 말씀을 육체의 일로 보니까 어떻게 됩니까?
부자가 되고 싶어 합니다.
그러면서 아주 일찍 일어나려고 하고 있습니다. 게으름이 사람으로 깊이 잠들게 합니다. 또 잠자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빈궁하게 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우리 육체의 일을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으로 생각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다보니까 교회 안에서 부자가 되고 싶어 하는 사람은 일찍 일어나서 부지런을 떨고 있습니다.
우리는 부요해야 합니다.
어떻게 부요해 져야 합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요한신 자로서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를 부요하게 하기 위해서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보고 그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부요하게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부지런한 사람이고 생명을 얻는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자기 무엇이 부요하게 되어야 하는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율법의 의로 부자가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을 모르고 부자가 되기 위해서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그런 열심이 도리어 더욱 빈궁하게 만들고 있지만 성경을 보면서도 그것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알지 못 합니다
자기들이 얼마나 가난한 가를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이스라엘 못지않게 부자가 되어 있지만 자기들이 왜 부자인가를 모르고 자기 육체를 보면서 더욱 부자가 되고 싶어 합니다. 잠언은 잠자기를 좋아하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이 시대는 이스라엘과 같이 율법의 행위에 깊이 빠져 있습니다.
자고 있습니다.
그러나 잠자는 자는 자기가 자고 있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잠자기를 좋아해서 빈궁하게 되었지만 그것을 전혀 깨닫지를 못했습니다. 이 시대 역시 잠자기를 좋아하고 있지만 자기들이 왜 빈궁한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입니다
이 시대 기독교는 라오디게아 교회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다 어떻게 말을 하고 있습니까? 자기들이 구원을 받았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자기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을 받아서 이제 천국에 넉넉히 들어간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문자를 아는 것으로 그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자기들의 곤고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교회의 모습을 이 시대 기독교에서 그대로 보여주고 있지만 성경을 보면서도 그것이 자기들의 일이 아니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자고 있습니다.
율법의 행위에 빠져 자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생명을 얻으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생명을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를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모르고 있습니다. 왜 모르고 있는가 하면 율법의 행위에 빠져 생명에 대해서 게을러서 자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잠자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이 말씀을 하고 있는가 하면 성경을 보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자고 있다는 말씀을 경계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로마서를 보고 있는 사람들이 자기들이 왜 자고 있는가를 전혀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이 시기를 압니다.
누구입니까? 위에 있는 권세에 굴복을 하는 사람들이 이 시기를 안다는 말씀입니다 복음에 굴복을 하는 사람들만이 이 시기를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복음을 듣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듣지도 못하고 있는 사람은 이 시기를 알지 못하고 있고 그런 사람은 자기가 자고 있는지 깨어 있는지를 모르게 되어 있습니다.
시편 13:3절을 보겠습니다. (구 811쪽)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
게으름이 사람으로 깊이 잠들게 합니다.
생명에 대해서 게으르면 사람으로 깊이 잠들게 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들어와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고 있지만 이 생명에 대해서 게으른 자는 깊이 잠들게 하고 있습니다. 악하고 게으른 종은 생명에 대해서 깊이 잠들게 해서 생명의 달란트를 남기지 못하고 있습니다.
생명의 달란트입니다
그것을 남기지 못하면 어떻게 됩니까? 그것을 시편에서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게을러서 생명의 달란트를 남기지 못한 사람은 사망의 잠을 잔다는 말씀입니다
누가 그렇습니까?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이스라엘이 이렇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사망을 당하게 되니까 잠언에서 네 눈으로 잠들게 하지 말며 눈꺼풀로 감기게 하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영원한 생명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지만 사람들은 성경을 거의 육체의 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눈꺼풀이 감기게 됩니다.
정말 잠이 쏟아진다고 말을 합니다. 저는 이제 잠을 거의 못자고 있지만 예전에는 그런 경험이 있었습니다. 잠이 쏟아지면 정말 눈꺼풀이 저절로 감기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이 가장 못 참는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잠이기도 합니다. 눈꺼풀이 이렇게 쏟아지면 잠시라도 눈을 붙여야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얼마나 현실적인 말씀입니까?
우리는 생명에 대해서 그 정도로 싸워야 합니다. 마치 잠이 쏟아지는 것과 같이 눈꺼풀이 감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눈꺼풀을 이기지 못하면 사망이 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육체의 생명이라면 어떻게 하든지 이기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영의 생명입니다
사망의 잠을 자면서도 사람들은 이것이 영의 일이다보니까 감각이 없습니다. 아니 자기 육체를 보면서 자기들이 깨어 있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잠언의 말씀 그리고 시편의 말씀이 다 하나님을 믿는 이스라엘에게 하고 있지만 신약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그들이 성경을 보면서도 자기 육체가 게으르지 않으려고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잠을 자고 있습니까?
악하고 게으른 종입니까? 반드시 사망의 잠을 자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로마에 있는 교회는 이 시기를 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기를 알기 때문에 그들은 자다가 깰 때가 되었다는 것을 그들이 알고 있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이 시대는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지만 점점 더 깊은 잠에 빠져 들어가고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에 게을러서 잠을 자고 있으면서도 자기들의 육체를 보면서 깨어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고 있고 자기들은 깨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입니다
잠언이 누구에게 하고 있습니까? 시편이 누구에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세상 사람들이 자고 있는 것을 보고 지금 성경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 다수가 사망의 깊은 잠을 자고 있기 때문에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눈이 잠들지 마시기 바랍니다.
눈꺼풀이 감기게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영의 일에 있어서 그렇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성경을 전혀 안 보고 있습니다. 이제는 목사들까지도 성경을 안 보아도 설교를 할 수 있는 그런 시대가 되었습니다. 굳이 성경을 가지고 고민을 하지 않아도 세상의 이성을 따라 선과 악을 이야기를 하면 됩니다.
모두가 자고 있습니다.
사망의 깊은 잠을 자고 있으면서도 자기들이 자고 있다는 것을 전혀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아무리 보아도 하나님께서 말씀하는 그 말씀의 의미를 전혀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아니 누구에게 하고 있는 말씀인가를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자기들의 이성입니다
나쁜 의미의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면 그것은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 하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사망의 잠을 자고 있다는 말씀을 보고도 세상 사람들이 그런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성경도 안 보는데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경계의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세상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이 성경은 참으로 이상하기만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성경을 보지도 않고 하나님을 믿지도 않은 그 사람들에게 경계의 말씀을 하면서 사망의 잠을 자지 말라고 한다면 우리는 굳이 하나님을 믿을 이유가 없습니다. 누가 성경을 보는가도 모르는 그런 하나님을 어떻게 믿을 수 있습니까?
교회 안에 있는 일입니다
그 안에서 사망의 잠을 자는 자가 있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누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그런데 어떻습니까?
문자를 아는 것으로 끝입니다. 사망의 잠을 어떻게 누가 자는 가를 알아야 하는데 그저 자기가 이 문자를 알고 다윗과 같이 이 문자 그대로 기도를 하면 자기가 사망의 잠을 자지 않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 그들이 악하고 게으른 종이 되어서 율법을 지킴으로 해서 생명의 달란트를 남기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자다가 깰 때가 되었습니다.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고 있던 그때에 이미 교회 안에는 율법주의자들이 들어왔습니다. 그렇게 율법을 지키는 사람들을 시편에서는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면 반드시 사망이 찾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이제 그 잠에서 깨어 구원을 이루는 성도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5:14절을 보겠습니다. (신 315쪽)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취시리라 하셨느니라”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습니다.
이 말씀을 누구에게 하고 있습니까? 교회 안에 있으면서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예하는 사람들에게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에베소 교회의 문제만이라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시대 교회는 에베소 교회보다 더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예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사도들이 있었습니다.
초대 교회는 아직까지 사도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예를 하면 바로 그것이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이라는 것을 성도들에게 말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 초대 교회가 거의 2000년이 지났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사사기를 보았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한 세대가 지나가면 이스라엘은 바로 타락을 했습니다. 사사가 죽으면 바로 타락하는 이스라엘을 우리가 사사기를 통해서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초대 교회가 지나가고 200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면 어떻게 되겠는가를 생각해 보면 답은 쉽습니다. 사도들이 죽자마자 교회는 타락의 길로 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입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만 타락을 해서 지금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교회가 바로 타락을 할 것을 아시기 때문에 사도 바울을 통해서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서도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이 무엇인가를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입니다
그가 얼마나 율법에 대해서 철저하게 반대를 했는가를 성경을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이 시대 바울 신학이라는 책들이 많이 나와 있습니다. 바울의 신학이라고 하는 책들을 배우고 있지만 그 책에서 율법에 대해서 정확하게 전하지를 않고 있습니다.
율법입니다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빛이 어두움을 비추매 사람들이 어두움을 더 사랑해서 깨닫지 못하더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누가 어두움을 더 사랑했습니까?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이스라엘이 어두움을 더 사랑했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어두움을 더 사랑했는가 하면 흠 없는 율법을 갖기 위해서 율법을 지켰습니다.
이스라엘만 율법을 지켰습니까?
그것이 아니라 이방에 교회 역시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예를 하였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성경에서 분명하게 말씀을 하고 있지만 기독교라는 종교는 어두움이 무엇인지 빛이 무엇인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왜 모르고 있는가 하면 그들 역시 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어두움을 더 사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까?
거짓말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율법을 한 가지라도 지키고 있다면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 아니라 어두움을 더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이스라엘은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온 율법을 지키는 어두움에 참예를 했고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자기들이 교리로 정해 놓은 율법을 지키는 어두움의 일에 참예를 하고 있습니다.
잠을 언제 잡니까?
물론 이 시대는 직업이 다양하다보니까 꼭 밤에만 자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보편적으로 사람이 어두워졌을 때 잠을 자고 있습니다. 그러면 성경에서 잠을 자고 있다는 말씀은 그가 아직 어두움을 더 사랑하고 있고 그가 율법을 지키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자기들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자기들 역시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믿는다고 했습니다. 이 시대 초대 교회의 성도들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상을 보면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안 믿었고 이 시대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있습니다.
왜 안 믿습니까?
모두가 어두움의 일에 참예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들은 성도는 시기를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듣지 않고 있는 사람은 자기가 자고 있는지 깨어 있는지 조차 모르고 있습니다. 아니 어두움의 일에 깊이 빠져 있으면서도 교회 안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보면서 깨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어두움의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은 죽은 자입니다 주님의 제자 중에 한 사람이 자기 아비를 장사하고 나서 주님을 따르겠다고 하니까 주님께서 죽은 자로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고 있는 이스라엘 전체를 주님께서 죽은 자로 말씀을 하고 있지만 성경을 보면서도 전혀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누가 죽었습니까?
이 세상 사람이 죽었습니까? 물론 그들 역시 죽은 자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초대교회 안에 이미 율법주의가 들어왔고 사도 바울은 그들에게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죽은 자입니다
율법을 지키는 사람은 교회 안에 있지만 죽은 자입니다 그가 아무리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해도 또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그 어떤 말을 한다고 해도 아니 모든 사람이 성도라고 칭한다 해도 율법을 지키고 있다면 그는 죽은 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자다가 깰 때가 되었습니다.
죽어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가 이제 복음을 듣고 시기를 알아서 깨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초대 교회 안에는 유대인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실제 사도 바울도 이방에 가서 가장 먼저 한 것이 유대인의 회당에 찾아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당시는 많은 사람이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들이 누구였는가 하면 거의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 유대인들은 아직 율법의 문제가 정립이 안 되어서 율법을 지켰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의 영향으로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있지만 율법을 지키고 있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율법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에게 잠자는 자여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누가 자고 있습니까?
누가 어두움의 일을 하고 있습니까? 바로 이 시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비추시지 않아서 자기들이 어두움의 일을 하는지 깨어 있는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어두움입니다.
빛이 세상에 오셔서 비춰주셨습니다.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어두움에 있는 우리에게 비춰주셨습니다. 그러나 초대 교회를 지나고 이제까지 교회사를 보면 거의 다 어두움의 일에 참예를 하고 있습니다. 죽는 자로 살아가면서 자기들이 깨어 있다는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5:34절을 보겠습니다. (신 283쪽)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
자고 있습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은 자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비춰주시지 않으면 모두가 자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복음으로 비추심을 입지 못하면 다 자고 있는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처음부터 깨어 있는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자고 있습니다. 그 자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제 깰 때가 벌써 되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아담의 자손입니다
이 사람은 모두가 자고 있습니다. 아담의 자손이 깨어 있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담의 자손은 모두가 자고 있습니다. 그 자손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비추셔서 복음이 계시가 되면 그가 진리의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그리스도의 영이 거하시면 깨게 된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인생은 스스로 깰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 인생 자체가 깨는 것도 역시 아닙니다. 우리는 죽은 자입니다 우리 인생은 어두움에 일에 참예를 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모두가 자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복음이 계시가 되고 그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해서 성령이 우리에게 오셔서 진리로 인도함을 받고 있습니다.
깨어 의를 행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율법을 지키면서 의롭게 살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의를 말씀하면 거의 모든 사람의 생각이 거기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깨어 의를 행하라고 하면 성경의 문자를 보고 자기들이 어떤 의로운 일을 하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생각에 사로잡히니까 거의 모든 사람이 율법을 지키고 있고 어두움의 일에 참예를 하고 있습니다.
의를 행할 수 있습니까?
우리 인생은 어느 누구도 의를 행할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성경의 기초가 안 되어 있다 보니까 의인이 없다는 말씀을 잠시 잊어버리고 있습니다. 선을 행하고 죄를 짓지 아니하는 의인은 아주 없다는 말씀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습니다.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선을 행하고 죄를 짓지 아니하는 의인은 아주 없습니다. 이 세상에 한 사람도 없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성경에서 이런 말씀을 보면 자기들이 의를 행할 수 있는 것으로 착각에 빠져 의를 행하려고 하다가 도리어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예를 하고 있고 그것이 저주가 되고 있습니다.
깨시기 바랍니다.
그 사람만이 의를 행할 수 있습니다. 의를 행한다고 해서 사람이 어떤 행위를 잘하는 것으로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의를 어떻게 행합니까? 율법 외에 나타난 하나님의 한 의를 믿음으로 해서 의롭다 하심을 받는 그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의를 행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율법 외에 나타난 하나님의 한 의를 믿음으로 해서 의롭다 하심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믿음으로 의를 행할 수 있게 해 주시고 있지만 사람들은 성경을 오해를 해서 도리어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 더욱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그 어두움의 일로 자기들이 저주를 받는다는 것을 모르고 깊은 잠에 빠져 들어가고 있습니다.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마시기 바랍니다.
어떤 죄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죄를 짓지 말라고 하니까 이 세상에서 말하는 그런 죄를 짓지 않으려고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는데 죄를 짓지 않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죄를 짓지 않으려고 하는 그 행위가 도리어 죄를 짓게 하고 있지만 자기들이 어떤 죄를 짓는지도 모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죄 입니다
세상의 죄가 아닙니다. 영생을 얻지 못하게 하는 죄를 짓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죄가 무엇입니까? 어두움의 일에 참예를 하고 있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과 같이 율법을 지키는 어두움의 일에 참예를 하는 죄를 짓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6:9절을 보겠습니다. (신 358쪽)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같이 말하나 너희에게는 이보다 나은 것과 구원에 가까운 것을 확신하노라”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습니다.
우리 인생은 모두가 자고 있습니다. 어디에 자고 있는가 하면 우리는 태어나면서 율법을 지키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율법을 지키는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심으로 해서 빛으로 비춰주심으로 해서 우리가 어두움의 일에서 자다가 깰 수 있었습니다.
자다가 깼습니다.
그러니까 율법을 지키다가 이제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어두움의 일을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사도 바울이 이제 우리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이 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구원입니다
다시 말씀을 드립니다.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어디서 알아야 하는가 하면 성경에서 알아야 합니다. 이 아는 것을 쉽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이 어려서부터 성경을 달달 외울 정도로 보고 있지만 그들은 하나님을 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알아야 합니다.
이 아는 것이 하루아침에 된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정말 우리 성도는 영생을 위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영생을 바라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떻게 바라고 살아가고 있는가 하면 정말 늘 성경을 보면서 그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알고 믿음으로 해서 영생을 얻고자 하고 있습니다.
영생 단번에 주어지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아시기 바랍니다. 왜 사도 바울이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성경에서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알려면 시간이 걸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정말 이 일을 위해서 살아가야 합니다. 성도는 평생을 영생에 가까이 가기 위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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