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13:8절을 보겠습니다. (신 257쪽)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하나님의 일군입니다
그들이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이 시대는 하나님의 일군을 찾아보기가 쉽지가 않습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선이 무엇인가 악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하는데 이제까지 기독교인들을 보면 그들이 남겨 놓은 글들을 보면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사람의 이성입니다
그 이성을 가지고 신학을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 그들이 성경에서 말씀하는 선을 그리고 악을 알 수 있습니까? 만약에 위대한 신학자 중에 한 사람이라도 이것에 대해서 바로 알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면 교회는 지금과 같이 변하지 않았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이것에 대해서 분명하게 말씀을 전한 사람을 못 보았습니다.
진리입니다
얼마나 빠르게 타락의 길로 가는 가를 알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고 있는 그때에 이미 교회 안에는 다른 복음이 들어왔다는 것을 성경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을 보는 사람들이 그 말씀을 전혀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다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성경으로 보고 있지를 않습니다. 자기들이 신학교에서 배운 그 신학에 성경을 맞추고 있습니다. 교인들은 목사들이 전하는 그 말을 듣고 성경을 보고 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는 아무리 성경을 보아도 그 안에서 말씀하고 있는 진리를 깨달을 수 없습니다.
성경 그대로입니다
예수님께서 거짓 선지자를 삼가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성경을 보면서 거짓 선지자를 전혀 삼가지 않고 있습니다. 자기들의 이성으로 생각을 해서 세상에서 인정을 하는 신학을 공부를 하고 그가 지적인 능력이 있고 또 율법을 잘 지키는 그 모습을 보면서 모두가 속고 있지만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복음이 전해지고 있습니까?
그래서 양심을 인하여 그것에 굴복을 하고 있습니까? 정말 안타깝게도 우리나라에는 복음이 전해지지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 뿐 아니라 이미 초대 교회를 지나면서 복음은 사라졌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군이 보이지가 않고 있습니다.
누가 하나님의 일군입니까?
어거스틴이 하나님의 일군입니까? 루터가 하나님의 일군입니까? 사람들이 볼 때는 그들이 하나님의 일군과 같이 보일지라도 그들은 선도 모르고 악도 모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을 후세 사람들이 모두가 인정을 하고 존경을 한다 해도 선을 모르고 있고 악에 대해서 모르고 있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일군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제까지 기독교사에 나타난 인물들입니다
그들 중에 선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제가 왜 그들에 대해서 판단할 수 있습니까? 그들이 만약에 선에 대해서 그리고 악에 대해서 알고 있다면 저는 감히 판단할 수 없습니다. 두려워서라도 그들을 감히 판단치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그들이 남긴 글을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글을 보면 선에 대해서 그리고 악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그들은 두려워할 자가 아니기 때문에 두려워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이제까지 신학자들 중에 두려워할 자가 있다면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두려워할 자도 아니고 존경을 할 자도 아닙니다.
저를 비난해도 좋습니다.
감히 이름을 말하는 것조차 어려운 그 사람들을 제가 판단한다고 해서 저를 이상하게 생각을 해도 좋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들은 두려워할 자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존경을 할 자도 아닙니다. 왜 그런가 하면 그들이 남겨 놓은 글들을 보면 선도 모르고 있고 악에 대해서도 전혀 모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세상이 다 인정을 합니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존경을 받을 사람인가는 정말 성경적으로 따져 보아야 합니다. 장로교의 기초를 세운 칼뱅이 존경을 받을 자입니까? 감리교의 기초를 세운 웨슬레가 존경을 받을 자입니까? 장로교인 감리 교인이 다 저를 비난한다 해도 그들은 선에 대해서 그리고 악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이기 때문에 존경할 수 없습니다.
성경입니다
이제까지 신학자들이 어떤 글을 남겨 놓았다 해도 성경보다 우선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어떻습니까? 교회 안에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강해를 배우고 있습니다. 칼뱅이 써 놓은 글을 그냥 읽기만 하면 되지 무슨 강해를 하고 있습니까?
말이 됩니까?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서를 그냥 보기만 하면 됩니다. 그것을 보고 진리를 따라 분별을 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런데 마치 그것이 성경이나 되는 것과 같이 강해를 해서 배우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 배우고 있는가 하면 칼뱅이라는 사람을 너무 존경하기 때문입니다
안타깝습니다.
이 시대 장로 교인들이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것을 강해를 하면서 배우면서 자기들이 꽤나 성경적으로 지혜가 있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 모든 일들이 도리어 악을 행하는 일이 되고 있지만 그것을 깨달을 수 있는 지혜가 없습니다.
성경입니다
우리 성도는 이 성경만 보기에도 시간이 부족합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강해를 듣고 있는 사람들이 그것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성경을 알고 있습니까? 성경을 알고 그 안에서 선이 무엇인가 알고 악이 무엇인가를 알고 그렇게 하고 있다면 그나마 다행이겠지만 성경도 모르는 그들이 칼뱅이 쓴 글을 강해를 하고 있습니다.
칼뱅이 두렵습니까?
그가 존경을 받을 사람입니까? 장로 교인들에게는 대단히 죄송할지 몰라도 저는 전혀 그렇지가 않습니다. 저 역시 장로교에서 신학을 공부를 했지만 이제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저 역시도 한 때는 그를 존경했지만 이제 복음을 알고 나니까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존경을 할 자를 존경하시기 바랍니다. 그가 누군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마치 세상의 관원들은 선한 일에 대해서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에 대해서 되는 것과 같이 교회 안에서도 이 선한 일과 악한 일을 알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을 모르는 사람을 우리는 두려워할 필요도 그리고 존경할 필요도 없습니다.
영의 생명입니다
그냥 좋은 것이 좋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 육체의 생명이 걸려 있다면 그렇게 하겠습니까? 육체의 생명도 정말 소중한데 하물며 영의 생명이겠습니까? 그런데 이 시대는 이 영의 생명에 대해서 전혀 소중하게 생각하지도 않고 있습니다. 그저 교회에만 나오면 자기들에게 이 영의 생명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표면적으로는 다 믿는다고 하지만 실상은 믿지를 않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나를 위해서 선을 이루셨지만 그 일에 대해서 믿지를 않고 있습니다. 아니 선이 무엇인가 악이 무엇인가를 모르니까 믿고 싶어도 믿을 수 없습니다.
현대인의 성경을 보겠습니다.
"서로 사랑의 빚을 지는 것 외에는 아무에게도 빚을 지지 마십시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다 지킨 것입니다."
은사자입니다
하나님의 일군이 되어 바로 그 일에 항상 힘쓰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군이 너무 적습니다. 그들이 복음이 전해야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두려움을 느끼게 되고 또 그들로 하여금 복음이 바로 전해짐으로서 존경도 받을 수 있는데 이 시대는 하나님의 일군이 너무 적습니다.
피차
이쪽과 저쪽 양방을 다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은사자들과 각 사람을 다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는 하나님의 은혜대로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 있고 또 복음을 듣고 있는 각 사람이 있습니다.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 빚도 지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빚진 자입니다
누구에게 빚을 진 자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빚을 갚아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자기가 빚진 자라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저 막연하게는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실제적으로 얼마만큼의 빚을 지었는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입니다
그리고 복음을 듣는 각 사람입니다 이 양방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비록 교회 안에서 복음을 전하는 자로 그리고 복음을 듣는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다 해도 우리는 다 사랑의 빚을 지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요한일서4:9-10절을 보겠습니다. (신 392쪽)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피차 사랑의 빚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들을 사랑하셨습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우리 인생들을 사랑하시지 않았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에 오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심으로 해서 우리가 그의 은혜로 구원을 받고 있습니다.
이것이 사랑의 빚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가 구원을 받는 그것이 사랑의 빚입니다 이 빚을 진자입니다 은사자들도 이 빚을 졌고 또 복음을 듣는 각 사람도 이 빚을 졌습니다. 구원을 받은 우리는 모두가 이 빚을 지었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빚진 자입니다
어떻게 빚을 지었습니까?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 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도 살 수 없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생명입니다
이 생명에 대해서 우리는 빚진 자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나 복음을 듣는 사람이나 피차 이 빚을 지고 있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느 누구도 자기를 내세워서는 안 됩니다 왜 그런가 하면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가 아무리 은사자라 해도 마찬가지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생명에 대해서는 같습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는 복음을 전하는 자로 살 수도 있고 복음을 듣는 자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복음을 전하든 복음을 듣던 피차 하나님의 사랑에 빚을 진 자라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 빚도 지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랑입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은 모두가 이 빚을 진 자입니다 이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입니다
우리는 이 사랑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사랑에 대해서는 이미 로마서 5장에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화목제물입니다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화목 제물로 드려짐으로 해서 우리가 살아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사랑의 빚을 진 성도입니다 그가 누구든지 이 사랑의 빚을 지지 않고는 어느 누구도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성경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빚진 자입니다
얼마를 빚진 자입니까? 계속해서 말씀을 하고 있지만 생명은 값으로 정할 수가 없습니다. 주님께서 일만 달란트 빚진 자를 비유로 말씀을 하고 있지만 우리가 영원히 사는 그 생명은 일만 달란트가 아니라 그 이상을 준다 해도 살 수 없는 생명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자기가 어떤 빚을 지었는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영생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받았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받았습니다. 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셨습니다. 주님은 부자입니다 그 부자가 우리 가난한 자들에게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게 꾸어 주고 있다고 신명기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꾸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꾸지 않고는 어느 누구도 부자가 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꾸어 주지 않으면 우리는 율법을 지킬 수 없습니다. 그 부요함을 우리에게 꾸어 주심으로 해서 우리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의를 얻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자기들이 어떠한 빚을 지었는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아니 꾸지를 않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랑의 빚을 지어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신명기에서 꾸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율법을 완전케 하셨습니다. 그 완전케 하신 부요함이 우리에게 없다면 우리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내어 주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은 이렇게 사랑의 빚을 진 사람들입니다 피차 이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잘 이해를 하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계속해서 우리 영의 일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1:14절을 보겠습니다. (신 263쪽)
"그리스보와 가이오 외에는 너희 중 아무에게도 내가 세례를 주지 아니한 것을 감사하노니"
아무에게든지
아무, 어떤 사람을 특별히 정하지 않고 가르키는 말입니다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교회 안에 있는 사람에게 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서 있는 일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한글개역성경입니다
늘 말씀을 드리지만 우리가 보고 있는 한글개역성경만큼 잘 번역이 되어 있는 성경은 없습니다. 이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거의 모든 성경이 서로 사랑의 빚 외에는 이라고 번역이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서로라는 단어 보다는 피차가 맞습니다. 서로는 우리 인생들 간에 있는 일을 말하는 것이고 피차는 조금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단어입니다
어떤 단어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그 뜻이 상당히 변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말씀에는 피차라는 단어가 제일 적당합니다. 그런데 마치 이 말씀을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로 받아들이게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자나 복음을 듣는 자나 피차 하나님의 사랑의 빚을 받은 것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는 말씀이 제일 바르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도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고 하니까 이 세상에서 독불장군처럼 살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남에게 신세를 지는 것을 못 참는 사람이 있습니다.
지금 그 말씀이 아닙니다.
아무 빚도 지지 말라고 하니까 남에게 어떤 신세도 지지 말라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자기의 행위를 보면서 성경대로 살려고 노력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금 그 말씀을 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을 받는 것에 있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빚입니다
우리가 율법을 지키지 못한 것을 빚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경에서 간음하지 말라는 말씀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에게 간음을 하게 했다면 그것은 아무가 빚을 지게 된 것입니다 그가 빚을 진 것은 나로 말미암았으면 그것은 내가 빚을 지게 한 것과 같고 내 빚과 같습니다.
빚지게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간음을 하지 말라는 법을 보았습니다. 그러면 빚을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않으려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 율법을 지키게 함으로 해서 율법을 이루지 못하게 하는 것이 빚을 지게 하는 것이라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이 세례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주님과 함께 하는 제자들을 통해서 세례를 주었습니다. 이 말씀을 성경에서 보았습니다. 이 시대 거의 모든 목사들이 자기 교회에 사람이 들어오면 학습을 받고 나면 세례를 주고 있습니다. 너무도 당연하게 세례를 주는 것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제가 세례에 대해서 반대를 하면 아마도 저를 이단이라고 공격할 것이 분명합니다.
왜 세례를 주고 있습니까?
그런 행위를 통해서 자기들이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당연히 세례를 받아야 하고 그 세례를 받음으로 해서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세례를 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남을 사랑하는 자는 이미 율법을 다 이루었다는 것을 믿고 있기 때문에 그런 행위를 하지 않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에는 그도 세례를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보와 가이오 외에는 너희 중 아무에게도 내가 세례를 주지 아니한 것을 감사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세례를 주지 않은 것을 감사하는가 하면 이 세례도 아무 빚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세례를 주지 않은 것을 감사하고 있습니다.
행위를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율법을 다 이룬 성도는 절대로 그런 행위를 하지 않고 있습니다. 왜 이 시대 세례를 주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도 빚이 된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아니 그것이 행위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성경에 문자적으로 기록이 되어 있는 세례를 주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세례를 줍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을 지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율법을 지키고 있는 사람은 성경의 문자를 보고 그대로 행위로 하고 있는 사람은 제가 드리는 말씀을 도무지 이해를 못하겠지만 진리로 인도함을 받고 있는 성도는 그것이 빚을 지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고 있습니다.
서도 바울입니다
그리스보와 가이오에게 세례를 주었습니다. 그러면 그리스보와 가이오는 어떻게 됩니까? 자기가 세례를 받았으니까 구원을 받은 것으로 생각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물론 나중에 사도 바울이 그들에게 바로 말씀을 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그것을 끝까지 모르게 된다면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을 지게 되는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구원을 못 받게 합니다.
사도 바울이 몰랐을 때는 그리스보와 가이오에게 세례를 주었습니다. 그러나 알고 나니까 이제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주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케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하고 있는 행위가 이렇게 된다는 것을 명심하고 있어야 합니다.
아무 빚도 지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빚을 지면 어떻게 됩니까? 특히 은사자들이 빚을 지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그 영혼이 구원을 못 받게 됩니다. 제가 그리스보와 가이오가 구원을 못 받았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후에 사도 바울로부터 다시 세례에 대해서 바로 들었을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빚입니다
그가 구원을 받지 못하게 되는 모든 행위는 빚입니다 우리 성도는 특히 은사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져서는 안 됩니다 왜 빚을 집니까? 굳이 그런 행위를 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남을 사랑하는 자입니다
사도 바울도 남을 사랑하는 자입니다 그러나 몰랐을 때는 그 역시도 그리스보와 가이오에게 세례를 주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세례가 아니라도 아니 율법을 지키지 않을지라도 간음하지 말라는 율법을 지키지 않을지라도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습니다.
율법을 지키게 하고 있습니까?
그 사람은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을 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남을 사랑하지도 않고 율법을 다 이루었다는 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남을 사랑하는 자가 될 수 있습니까? 그가 구원을 받을 수 있어야 남을 사랑하는 자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잠언11:25절을 보겠습니다. (구 922쪽)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하여지리라”
남을 사랑하는 자입니다
나 이외는 모두가 남입니다. 성경은 어찌 보면 조금 냉정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잘 생각하면 냉정한 것이 아니라 당연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왜 나 외에 모두가 남인가 하면 우리는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의 생명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가족이 있습니다.
아니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 있습니다. 아들이라고 해도 그 생명만큼은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 외에는 모두가 남입니다. 구원은 나와 하나님과의 일대일의 관계지 우리 가족과의 관계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구원을 받았다 해서 내 아들이 구원을 받는다고 누가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까?
모두가 남입니다.
냉정한 것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생명에 대해서 너무 감성적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구원을 받으면 아니 내가 신앙생활을 하면 내 아들도 신앙생활을 하게 되고 나로 인하여 내 아들과 심지어는 내 부모까지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천주교의 주장과 일맥상통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정말 잘 보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그것을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내 개인의 구원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먼저 구원을 받았으면 이제 남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 남에는 내 가족도 들어가 있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남을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을 말씀하기 위해서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는 이 말씀에는 내 가족도 들어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바로 사도 바울은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있습니다.
나 외에는 모두가 남입니다. 지금 육의 일을 말씀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영의 일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족은 남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형제와 부모를 남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씀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부모라도 또 자식이라도 구원을 대신 어떻게 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랑해야 합니다.
어떻게 사랑해야 합니까? 이제 9절에서도 말씀을 하고 있지만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을 해야 합니다. 남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가 하면 내 몸과 같이 사랑을 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육적인 것을 말씀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일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오해를 합니다.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다고 말씀을 하니까 이것을 육적인 사랑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우리 성도들에게 육적인 사랑을 하라고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그렇게 육적인 사랑을 하는 사람에게 율법을 다 이루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그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영의 일을 말씀을 하고 있지 그런 육의 일을 말씀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제가 육적으로 남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잘못 되었다는 것도 아니고 그들을 폄하하고 싶은 생각도 없습니다. 그들은 분명히 육적으로는 대단한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저도 감히 하지 못하는 일을 하고 있고 육적으로는 존경을 받을 사람들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그런 육적인 사랑을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내가 그런 육적인 사랑을 평생을 하면 뭐 합니까?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테레사 수녀라든지 장기려 박사 같은 사람은 정말 육적으로 자기 몸을 불사르듯이 남을 사랑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렇게 하면 뭐 합니까?
분명히 육적으로 유익이 있고 존경을 받습니다. 그러나 영의 일에 있어서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들이 진리를 알았습니까? 그래서 그들의 사랑으로 구원을 받은 사람이 있습니까? 천주교에 있는 사람들은 제 말씀에 반박을 할 수 있겠지만 그러나 제가 볼 때는 영의 일로는 사랑하지 못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육체의 욥이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욥이 육체적으로 한 일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우리는 할 수 있다면 욥과 같이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도리어 어떻게 되었는가 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가려버리는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욥은 그래도 회개를 할 수 있었지만 이 시대 그렇게 사는 사람들은 그것이 영의 일인 것으로 생각하지도 않고 있고 회개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에게 밥 한 그릇을 주는 일 아무 것도 아닙니다. 물론 당장 배가 고픈 사람에는 그것이 전부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우리에게 밥을 주라고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것이 남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누구도 구원을 받을 수 없지만 그가 복음을 듣고 구원을 받게 한다면 그것이 남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사랑입니다
그것을 잠언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하여 진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남을 여유 있게 하는 사람은 자기도 여유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무엇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의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영생의 일입니다
그것이 조금 냉정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생명을 바라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난하게 살면 어떻고 또 빨리 죽으면 어떻습니까? 세상 사람들이 생각할 때는 냉정하게 보일 수 있지만 우리는 육체의 사람이 아니라 영의 사람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남을 사랑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 영혼이 구원을 받지 못한다면 그는 사랑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를 아무리 육적으로 윤택하게 했다 해도 그것을 가지고 사랑했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자식에게 재산을 물려 줄 수는 있지만 그것을 가지고 자식을 사랑했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영의 일을 전혀 모르고 있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생명입니다
그 자식에게 생명을 얻게 하지 않았다면 아니 그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사랑하지 않은 것이 되고 맙니다. 물론 그것이 사람의 이성으로 의지로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회가 되었을 때는 우리가 어떻게 해야 사랑하는 것이 되는가를 잠언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윤택하게 하시기 바랍니다.
육적인 일을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의 일에 있어서 윤택하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어떻게 윤택하게 합니까? 그리스도께서 우리 가난한 자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해서 우리 가난한 인생들에게 부요함을 주었다는 것을 성경에서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주님으로 말미암아 영의 일에 있어서 우리가 윤택하여 졌습니다.
사랑입니다
성경을 보면서도 이 사랑을 모르고 있습니까? 앞에서도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우리가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랑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영의 일에 대해서 사랑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남을 사랑하는 자가 누구입니까? 가난한 사람에게 밥을 주는 그 사람이 남을 사랑하는 사람입니까? 세상의 이성으로는 맞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것을 말씀하고 있지 않고 남을 윤택하게 하는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윤택하게 합니까?
구원을 받으려면 내 의로는 안 됩니다 그러니까 우리 인생의 의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해서 그에게 꾸어 의롭다 하심을 받을 수 있게 해 주어야 합니다. 바로 이렇게 해서 그가 이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생명을 얻었다면 남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생명을 얻게 하는 일입니다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어디 있습니까? 성경은 이렇게 생명을 얻게 하는 일을 하는 사람에게 사랑을 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가 무슨 일을 한다 해도 영생의 문제가 해결이 안 되면 그는 사랑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자기들의 교회 안에만 들어와서 종교적인 활동을 하면 구원을 받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남을 사랑하는 자입니다
교회 안에 남을 사랑하는 자가 있습니까? 그런 사람이 없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로마서13장은 12장의 말씀을 연결을 해서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은혜대로 은사를 주셨습니다. 그들이 각 사람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그 복음을 들은 사람이 위에 있는 권세에 굴복을 하고 있습니다.
남을 사랑하는 자입니다
그가 누군가 하면 이 시대 복음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저만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편지에서도 여러 가지 방법으로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그런 수고를 함으로 해서 복음이 전해지고 그것을 통해서 구원을 받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남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고 있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그가 복음을 전하는 사람입니까?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자기들에게 복음이 있는 것으로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선이 무엇인가 악이 무엇인가도 모르고 있는 사람은 복음이 없습니다. 그가 아무리 성경에 있는 말씀을 전하면 뭐 합니까? 교회 안에서 악을 행하게 하고 있다면 도리어 저주를 받게 하는 일입니다
그가 남을 사랑합니까?
남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남을 저주를 받게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교회 안에서 남을 저주받게 하고 있지만 사람들의 이성으로는 성경에서 말씀하는 선이 무엇인가 악이 무엇인가를 모르기 때문에 그들이 전하는 말은 남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저주를 받게 하는 것이 되고 있습니다.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먼저 피차 사랑의 빚을 지어야 합니다. 내가 먼저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내가 사랑의 빚을 지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남에게 그 사랑을 전할 수 있습니까? 먼저 사랑의 빚을 져서 구원을 받은 그 사람만이 남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사랑의 빚도 안 진 사람들이 남을 사랑하겠다고 하면서 진노를 받게 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열심이 아닙니다.
그것은 도리어 저주를 받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정말 냉정할 정도로 성경에서 어떻게 말씀을 하고 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사랑의 빚을 진 성도만이 남을 사랑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사랑의 빚을 진 사람이 없습니다. 자기 영혼의 구원을 위해서 주님께 가서 꾸어 달라고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요한복음7:19절을 보겠습니다. (신 156쪽)
“모세가 너희에게 율법을 주지 아니하였느냐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죽이려 하느냐”
로마서8:4절을 보겠습니다. (신 249쪽)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남을 사랑하는 자가 거의 없습니다. 자기 육체로는 남을 사랑하는 것을 나타내고 있지만 성경에서 말씀하는 영의 일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모르는 사람은 절대로 남을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입니다
그들은 흠 없는 율법의 의를 가지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런 이스라엘을 보고 예수님께서는 악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잡으려 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모세가 너희에게 율법을 주지 아니하였느냐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안 지켰습니까?
이스라엘은 정말 율법을 철저하게 지켰습니다. 어느 정도로 율법을 잘 지켰는가 하면 이레에 이틀을 금식하고 소득의 십일조를 낼 정도로 율법을 잘 지켰습니다. 그러나 그런 그들을 보고 주님께서는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이 시대 역시 주일을 지키고 자기들의 소득의 십일조를 내고 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다고 하면 아마도 그 말씀이 무슨 말씀인가를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제가 이 시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고 하면 그들은 분명히 반박을 하면서 내가 주일을 지키고 소득의 십일조를 내고 십계명을 지키고 있다고 말할 것이 분명합니다.
율법을 모르고 있습니다.
아니 이스라엘과 같이 성경의 문자를 보고 그 문자 그대로를 보면서 율법을 알고 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하신 이 말씀의 의미를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사실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이스라엘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율법을 다 이루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어떻게 다 이룰 수 있는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아니 자기들이 아주 조금 지키고 있는 그 율법의 행위를 보면서 율법을 지키고 있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세상 사람보다는 자기들이 율법을 잘 지키고 하나님의 성도로서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시기 바랍니다.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어느 정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다 이루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주일을 지키고 십일조를 내고 하는 것으로 율법을 다 이루었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지금 사도 바울의 말씀은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모든 율법을 다 이룬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입니다
이 시대 기독교인들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율법을 지켰습니다. 그런데도 주님께서는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신명기의 말씀대로 주님께 꾸어서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인생입니다
어느 누구도 율법을 지킬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꾸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문자를 보고 그대로 지키는 것입니까? 그것이 아니라 신명기의 말씀과 같이 부자이신 주님께 꾸어서 율법을 다 이루라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문자적으로 지킵니까?
그들은 율법을 지키는 자가 아닙니다. 성경에 아니 구약에 신명기에서 우리가 어떻게 율법을 지킬 수 있는가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율법을 지킬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시고 우리에게 꾸어 주시고 있습니다. 그렇게 꾸어 달라고 해서 율법을 다 이루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모릅니다.
어떻게 율법을 이루는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모르니까 이스라엘과 같이 문자 그대로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모든 율법을 지키려고 했고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신학자들이 정해 놓은 율법을 지키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나 기독교인이나 율법을 지키는 것은 같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문자 그대로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까?
그는 율법을 지키는 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는 율법에 베옷과 양털을 섞어 짠 옷을 입지 말라는 그 율법부터 지키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복음을 보고 들은 성도는 그런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지키신 율법의 의를 믿음으로 해서 율법의 요구를 이루고 있습니다.
성도입니다
우리는 율법을 다 이루었습니다. 어떻게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었습니까? 그것은 오직 믿음으로 다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 있는 가라지는 율법의 요구를 어떻게 이루는지를 몰라서 이스라엘과 같이 문자 그대로의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누가 율법을 지키는 자입니까?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문자 그대로의 율법을 지키는 자가 율법을 지키는 자입니까? 아니면 주님께서 완전케 하신 율법을 믿음으로 해서 그 의를 가져오는 자가 율법을 지키는 자입니까? 우리는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듣고 믿은 성도입니다. 그러나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율법을 문자 그대로 지키면서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믿지를 않고 있습니다.
누가 율법을 다 이루었습니까?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가지고 있는 성도가 율법을 다 이루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문자 그대로의 율법을 지키는 자는 주님의 말씀과 같이 율법을 지키는 자가 아닙니다. 그렇게 문자 그대로는 어느 누구도 율법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이 성경에서 정의를 내려 주고 있지만 이 시대는 율법에 대해서 전혀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남을 사랑하는 자입니다
우리 성도는 남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사랑하고 있는가 하면 영으로 사랑하고 있습니다. 남에게 생명을 주는 복음을 전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습니다. 어떻게 다 이루었는가 하면 야고보서의 말씀과 같은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믿음으로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었습니다.
율법을 다 이루어야 합니다.
겨우 십일조를 내는 것으로 그리고 주일을 지키는 것으로 율법을 다 이루었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율법을 다 이루지 못한 사람은 남을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남을 사랑하려면 먼저 전제 조건이 율법을 다 이루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몇 가지 율법을 지킵니까?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몇 가지를 가지고 율법을 다 이루었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는 율법을 지키는 자가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정말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문자 그대로의 율법을 다 지켰는데도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고도 도무지 무슨 말씀인가를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시기 바랍니다.
먼저 양털과 베옷을 섞어 짠 옷을 입어서는 안 됩니다 율법이 율법을 지키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을 함께 하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율법을 지키고 있다면 아니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문자 그대로 중에서 어느 한 가지라도 지키고 있다면 그는 율법을 지키는 자가 아닙니다.
다 이루시기 바랍니다.
율법을 다 이룬 성도만이 남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율법을 어떻게 다 이루는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들이 남을 사랑하고 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입에 바른 말이 아니라 성경에서 어떻게 말씀하고 있는가를 깨닫고 그대로 행하는 자만이 율법을 다 이룬 성도라는 것을 알아야 하고 그가 남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13:9절을 보겠습니다. (신 257쪽)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 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찌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간음하지 말아라. 살인하지 말아라. 도둑질하지 말아라. 탐내지 말아라" 하는 계명과, 그 밖에 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모든 계명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하는 말씀에 요약되어 있습니다.”
십계명입니다
구약을 보면 누구나 다 알 수 있습니다 더구나 성경에 친절하게 각주를 달아 놓아서 그것을 찾아보면 누구나 알 수 있는 말씀입니다 이 시대는 십계명을 외우기까지 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예전에는 그렇게까지 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이제는 교회가 대 놓고 십계명을 지키겠다고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십계명입니다
누가 지키라고 했습니까? 성경 어디에 십계명을 지키라고 하고 있습니까? 성경의 문자를 보고 율법을 지키고 있다면 그는 스스로 멸망의 길로 가고 있는 사람입니다 구약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 보면 어느 누구라도 율법을 지킬 수밖에 없습니다.
초등학생입니다
그에게 성경을 보라고 해 보시기 바랍니다. 물론 성경이 어려워서 본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십계명 정도는 초등학교 고학년이라면 충분히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을 그 아이들이 보면 뭐라고 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친히 써서 주시고 우리에게 지키라고 했다고 말할 것이 분명합니다.
목사입니다
목사가 보는 성경과 초등학생이 보는 성경이 같다면 그는 더 이상 목사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초등학생도 십계명을 보고 하나님이 친히 써서 주시고 우리에게 지키라고 했다고 하고 목사도 그렇게 말을 하고 있다면 뭐가 다르겠습니까?
그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 초등학문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안 믿는 이 세상 사람이 성경을 보고 목사와 같은 말을 하고 있다면 그것은 이 세상 초등학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 초등학문에 빠져 있으면서 자기들이 목사라고 하면서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을 모두가 율법의 저주에 빠뜨리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입니다
그가 성경에서 십계명을 보면 어떻게 말을 합니까? 너희 하나님은 친히 십계명을 써 주셔서 그 백성들에게 십계명을 지키라고 했다고 말을 합니다. 그러면서 너희 하나님은 참으로 융통성이 없다고 말할 것입니다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그 말씀을 보면서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되느냐고 말하게 되어 있습니다.
목사입니다
이 시대 목사라는 사람들의 영적인 수준이 그 정도입니다 영적이라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그들은 육체의 이스라엘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이 십계명을 지켰던 것과 같이 이 시대 목사들 역시도 십계명을 지키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십계명만 지킵니까?
제사법과 시민법이 폐하여졌다고 하는 그들이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제사법에 속해 있는 절기를 지키고 있습니다. 그것도 자기들에게 필요한 절기를 골라서 지키고 있습니다. 그들은 피차 사랑의 빚을 어떻게 지어야 하는가를 전혀 모르고 있는 사람입니다
제가 목사를 판단합니까?
그것이 아니라 기독교라는 종교를 판단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인생들이 종교가 되는 것을 싫어하십니다. 그런데 이 시대 역시 유대교인들과 같이 기독교라는 종교를 만들어서 그 안에서 유대교인들과 같이 율법을 지키게 하고 있습니다. 종교가 되는 순간 율법은 필연적으로 따라온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십계명입니다
그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제 제가 굳이 말씀을 안 드려도 성경을 보면 누구나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성도는 율법을 다 이루었습니다. 율법을 다 이룬 성도는 굳이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문자 그대로의 율법을 지킬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먼저 사랑의 빚을 지어서 구원을 받은 성도는 그 사랑의 빚이 얼마나 귀한 가를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남에게도 그 사랑을 빚을 지라고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구속의 일을 하신 것입니다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 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이 모든 계명을 우리는 다 이루었습니다. 어떻게 이루었는가 하면 내가 이룬 것이 아니라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이 율법을 다 이루셨고 그 부요함을 우리가 꾸어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방법이 아니고는 우리 인생은 어느 누구도 율법을 다 이룰 수 없습니다.
율법 지키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율법을 지키라고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볼 수 있는 눈이 모두가 소경이 되어서 유대교인들과 마찬가지로 모두가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지금 사도 바울이 율법을 지키라는 말씀입니까? 율법을 지키지 말라는 말씀입니까?
문법입니다
국어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이 시대는 국어도 모르는 사람들이 성경을 보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사를 부정하는 사람들입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은사를 주셔서 우리가 보고 있는 한글개역성경을 번역하게 하셨습니다.
만약에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뜻을 알려면 우리는 모두가 히브리어를 그리고 헬라어를 배워야 합니다. 아니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모르면서 성경을 본다는 그 자체가 모순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방언의 은사를 각 사람에게 주셔서 서로 언어가 다를지라도 그 나라 사람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게 성경을 번역하게 하시고 있습니다.
충분합니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한글개역성경만 바로 보아도 우리가 구원을 받는데 있어 조금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뜻이 무엇인가를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이 성경을 안 보려 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방언의 은사를 부정하면서 성경에 오역이 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십계명뿐입니까?
그것이 아니라 사도 바울은 다른 계명이 있을찌라도 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613가지 계명이 있을찌라도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그 말씀을 행하는 사람은 앞에 있는 말씀과 같이 율법을 다 이루었다는 말씀입니다
계명이 있습니까?
성경 전체에 수많은 계명이 있습니까? 그런 계명을 우리가 지키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계명이 있을찌라도 앞에서 말씀한 것과 같이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다는 말씀입니다 율법을 다 이루었다면 그것이 믿어진다면 절대로 이스라엘과 같이 율법을 지키지 않습니다.
성경을 잘 보시기 바랍니다.
다른 계명이 있다 해도 성경에 613가지 계명이 있다 해도 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다는 말씀입니다 다 들어 있다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을 하면 된다는 말씀이고 그 사람이 율법을 지켰다는 말씀입니다
갈라디아서5:14절을 보겠습니다. (신 308쪽)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
온 율법입니다
이제는 율법을 다 알고 있습니다. 인터넷이 발달을 하다보니까 온 율법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인터넷을 검색해 보면 율법 613가지가 다 나와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굳이 내가 성경을 일일이 안 찾아도 온 율법에 무엇이 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온 율법이 있습니다.
그 율법을 우리 인생은 지킬 수 없다는 것이 성경의 정의입니다 그리고 율법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온 율법도 율법입니다 또한 어느 율법의 한 가지도 율법입니다 쉽게 말씀을 드립니다. 신학자들이 정리해 놓은 613가지 율법도 율법입니다 그리고 간음하지 말라는 그 율법 한 가지도 율법이라는 말씀입니다
성도는 율법을 이룬 자입니다
율법을 이루지 않은 사람은 절대로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몇 가지 지키는 율법을 보면서 내가 율법을 지킨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분명히 온 율법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온 율법을 이루지 못한 사람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는 그 말씀을 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을 잘 보시기 바랍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말씀을 이루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누가 자신 있게 육적으로 이것을 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성경을 감성적으로 보지마시기 바랍니다. 성경에서 이루라고 하면 반드시 이루어야 합니다.
노력합니까?
그 말이 얼마나 추상적인 말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노력한다고 해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말씀을 다 이룰 수 있습니까? 테레사 수녀가 그렇게 했습니까? 사람이 보기에는 그렇게 보일 수 있지만 우리는 육적으로 어느 누구도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어떻게 가능합니까?
네 이웃입니다 그것은 네 몸이 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사랑을 한다 해도 그것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어느 정도 한 것을 가지고 추상적으로 이야기를 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은 영의 일을 명확하게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이지 그런 추상적인 이야기를 말씀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내 이웃입니다
그를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육적으로 말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를 아무리 육적으로 그렇게 사랑했다 해도 어느 누구도 내 몸과 같이 사랑하지 못 합니다 아니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할 수 있는 영의 일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구원입니다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율법을 다 이루어야지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어떻게 율법을 다 이룰 수 있는가 하면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먼저 사랑의 빚을 지면 남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사랑의 빚을 지지를 않고 율법의 행위를 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하겠습니까?
온 율법을 지키겠습니까?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을 따르겠습니까?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을 행하는 사람은 온 율법을 다 이루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 역시 성경을 모르고 율법을 지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율법 안 됩니다
온 율법을 우리는 어떻게 해도 지킬 수 없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지킬 수 있다면 주님은 절대로 이 세상에 오시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성경에서 가르쳐 주고 있지만 이 시대는 성경을 감성적으로 보면서 자기들이 지키고 있는 몇 가지 율법을 보면서 노력하고 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
노력을 해서 지킬 수 있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그렇게 지키려 하지 마시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의 의미를 알면 그 안에 다 들어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다 이루었다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면 율법을 다 이룬 성도만이 남을 사랑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태복음22장에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바리새인들은 그 말씀의 의미를 모르고 자기들이 지키는 율법의 행위를 보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일입니다
분명히 이웃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온 계명이 있을찌라도 그것으로는 구원에 대해서 가르쳐 줄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은 영의 생명을 말씀하고 있지 우리가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는가를 말씀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오해를 해서 거의 모두가 문자 그대로 살아가려고 하고 있습니다.
로마서13:10절을 보겠습니다. (신 257쪽)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사랑은 이웃에게 해를 입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사랑입니다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합니다. 그런 사랑을 하는 사람이 어떻게 이웃에게 악을 행할 수 있습니까? 만약에 악을 행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이 악이 무엇인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사랑입니다
우리 성도는 사랑에 빚진 자입니다 그래서 8절에서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고 있는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그 사랑이 있는 성도는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입니다
악에 대해서 얼마나 경계를 하고 있습니까? 그런데 성경을 보는 사람들의 눈이 소경이 되어서 이 악이 무엇인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그런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교회 안에서 이웃에게 악을 행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웃입니다
어떻게 생각합니까? 이웃이라고 하니까 교회 안에 있는 사람을 생각하지 않고 이 세상에 이웃 정도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성경은 교회 안에 있는 일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사도 바울이 세상에 사는 이웃을 말씀하고 있습니까? 그것이 아니라 내가 아니면 다 이웃이라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도입니다
물론 이 세상 사람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 육적인 그런 사랑을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계속해서 구원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구원을 받은 사랑이 있는 성도는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한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구원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성도가 이웃에게 악을 행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 세상에서 생각하는 그런 악이 아니라 성경에서 말씀을 하고 있는 악을 행하면 이 이웃이 사망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는 이웃에게 악을 행해서도 안 되고 그 이웃이 우리를 보고 그 악을 따라 하게 해서도 안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우리 성도는 그 사랑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 사랑을 아는 성도입니다 그런 성도가 어떻게 이웃에게 악을 행할 수 있습니까? 이 사랑을 모르는 사람은 이웃에게 악을 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는 절대로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않고 있습니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합니다.
왜 사도 바울이 이 말씀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까? 이방에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감동을 해 주셔서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사랑을 한다고 하면서 많은 악을 행할 것을 미리 아시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를 보시기 바랍니다.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사랑을 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하는 모든 행위가 무엇인가 하면 악이라는 말씀입니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는데 이방의 교회가 사랑을 한다고 하면서 악을 행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그 일을 하면서 악을 행하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고 있는 사랑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거의 다 악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지만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악을 행하면서도 그것이 악이라는 것을 전혀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요한일서3:10절을 보겠습니다. (신 390쪽)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사랑이 있습니다.
우리 성도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입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는 분명히 두 사람이 있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는데 교회 안에는 사랑을 한다고 하는 그들이 악을 행하고 있다는 것을 또한 알고 있어야 합니다.
교회 안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있습니다. 그리고 분명히 마귀의 자녀도 있습니다. 누가 더 많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자녀보다는 마귀의 자녀가 더 많이 있다는 것을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향해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다수를 보고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합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는 하나님의 자녀보다는 마귀의 자녀가 더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사랑을 모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기 때문에 그들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고 있었습니다. 율법의 행위를 하면서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했지만 실상은 그 모든 행위가 악을 행하는 것임을 깨닫지를 못 했습니다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합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이웃에게 악을 행하는 것입니까?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가 악을 행하는 사람입니다 의를 행치 아니한다고 말씀을 하니까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아니 성경을 보고 자기들이 의를 행하려고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의인은 하나도 없다고 분명히 말씀을 하고 있지만 성경의 기초를 모르다보니까 자기들의 육체로 의를 행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의를 행하시기 바랍니다.
율법 외에 나타난 하나님의 한 의를 믿으라는 말씀입니다 이 의를 행하고 있는 성도는 율법을 지키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의를 모르는 사람은 자기들이 의를 행하려고 하면서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렇게 율법을 지키는 그 행위가 이웃에게 악을 행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성도입니다
악을 행치 아니합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 있는 마귀의 자식들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웃에게 악을 행하고 있는가 하면 이스라엘의 바리새인들과 같이 자기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율법을 지키면서 악을 행하고 있습니다.
그 형제를 사랑치 않고 있습니다.
형제를 사랑하면 절대로 율법을 지키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랑을 모르는 사람은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자기들이 형제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율법을 지키라고 강요를 하고 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는 어떻습니까?
율법을 지키는 일을 누구를 위해서라고 합니까? 율법을 잘 지키면 너희가 복을 받을 수 있다고 하면서 그것이 형제를 사랑하는 일이라고 하면서 율법을 지키게 하고 있습니다. 십일조를 이야기를 하면서도 너희가 복을 받게 하기 위해서라는 아주 달콤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 합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왜 우리를 사랑하시는 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영혼의 구원을 위해서 사랑을 하시고 있지만 그들은 자기들의 육체까지도 하나님께서 사랑을 하시는 것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마귀의 자녀입니다
그는 교회 안에서 의를 행치 아니하고 있습니다. 어떤 의를 행치 아니하는가 하면 율법 외에 나타난 하나님의 한 의를 믿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어떻게 합니까?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없는 율법을 지키게 함으로 해서 교회 안에 들어온 소자들을 저주를 받게 하는 악을 행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스바냐3:13절을 보겠습니다. (구 1309쪽)
“이스라엘의 남은 자는 악을 행치 아니하며 거짓을 말하지 아니하며 입에 궤휼한 혀가 없으며 먹으며 누우나 놀라게 할 자가 없으리라”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합니다.
누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고 있습니까? 교회 안에 있는 다수는 사랑을 모르기 때문에 아니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 악만 행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도 역시 교회 안에 있는 다수는 악만 행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왜 악을 행합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실제 이 시대 대다수의 기독교인들을 보면 하나님의 사랑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어떻게 말을 하고 있는가 하면 하나님의 사랑만 이야기를 하지 말고 공의도 이야기를 하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공의가 무엇인가도 모르는 그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폄하를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남은 자입니다
이 남은 자는 로마서11장에서 이미 말씀을 드렸습니다. 남은 자가 누군가는 우리가 이제 알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남은 자라고 말씀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남은 자라고 말씀은 하고 있고 그들이 악을 행치 아니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남은 자입니다
우리 성도는 이 시대 교회 안에서 남은 자입니다 이 남은 자가 악을 행치 아니하며 거짓을 말하지 아니하며 입에 궤휼한 혀가 없으며 먹으며 누우나 놀라게 할 자가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 역시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라고 사도 바울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아니 성경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야 합니다. 로마서5장에서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사랑을 알면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시대는 사랑을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사랑을 모르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교회 안에서 평생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하면서 악을 행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지만 성경을 오해를 해서 사람들은 교회 안에서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한다고 하면서 도리어 더 많은 악을 행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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