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니라(요6:63.)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약속이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

은혜와 진리의 말씀

10강, 내 영혼이 잘 됨같이

윤주만목사 2019. 4. 24. 07:11


10, 내 영혼이 잘 됨같이

 

요한삼서 1:2-4절을 보면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형제들이 와서 네게 있는 진리를 증거 하되 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하니 내가 심히 기뻐하노라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즐거움이 없도다

 

요한삼서는 AD90년경에 기록되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 시기는 어떤 시기냐면 기독교인들이 많은 박해를 받고 예수를 믿는다는 자체만으로 사자 밥이 되고 화형을 당하고 십자가형을 당하던 그런 암울한 시대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카타콤이라는 곳으로 피해 숨어서 예배를 하고 복음을 전해 듣고 하던 시대입니다 카타콤이라는 곳은 지금도 유적으로 남아 있고 그것에서 생활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불편한 삶이라는 것은 제가 말씀을 드리지 않아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 터키 지역에 가면 바위가 석회암으로 되어 있어 그것을 파기가 쉽습니다. 그것을 파면 그 다음에는 딱딱하게 굳어 사람들이 생활할 수 있는 그런 지형입니다 저도 사진을 통해서 보았지만 그런 바위산에 지금으로 치면 아파트 약 13층 높이의 굴을 파서 그 속에서 기독교인들이 살아가고 있었으며 공동체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곳은 사막과 같은 지형입니다

당시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로마의 박해를 피해 그런 카타콤을 짓고 그 안에서 신앙생활을 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쉽게 말씀 드리면 바위 동굴 속에서 살았다는 말씀입니다 그런 삶을 살고 있는 기독교인들에게 사도 요한이 편지를 보낸 것이 바로 요한삼서입니다.

 

먼저 시대적인 배경을 알고 이 말씀을 보아야 우리가 바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런 시대적 배경을 모르고 그냥 말씀을 해석하다 보면 기복주의 신앙으로 빠질 수밖에 없는 말씀 중에 하나입니다

 

지금 이 시대는 기복주의가 만연하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이 정말 이생의 복, 범사가 잘 되라는 뜻으로 이 편지를 보냈는지 우리는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저는 이 말씀이 신앙생활의 하는 집에 많이 붙어 있는 것을 보면서 씁쓸한 마음을 감출 수 없습니다. 마치 복에 굶주린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이생에서의 복을 위해 자기 마음에 내키는 대로 사용하는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사도 요한은 이 편지를 누구에게 보냈는가 분명하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네 영혼이 잘 됨 같이, 지금 영혼이 잘 되고 있는 믿음이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편지를 보냈습니다.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우리 영혼이 어떻게 잘 되고 있는 가를 먼저 깨달아야 합니다.

 

시편23:3절을 보면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누가 내 영혼을 잘 되게 하고 있습니까?

내가 무엇을 해서 내 영혼이 잘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내 영혼을 소생 시키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죽어 있는 영혼을 다시 살리신다는 말씀입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은 영혼을 잃어버렸습니다.

죽어 있는 영혼을 다시 살릴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선택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심으로 죽었던 영혼이 다시 소생한다는 말씀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죽었던 자를 다시 살리는 능력은 오직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렇게 살아난 영혼은 영원히 잘 된다는 말씀입니다 잘 된다는 말씀은 영원히 죽지 않고 산다는 말씀입니다 이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 이 시대는 다시 소생한 영혼이 다시 사망할 수 있다는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다시 살아난 영혼이 사람의 실수로 다시 죽을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의 말장난에 불과하다는 것을 여러분이 깨달아야 합니다. 어떻게 하나님께서 살리신 영혼을 다시 죽일 수 있다는 말씀입니까?

 

요한복음11:25-26절을 보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예수님께서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고 확실하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죽었던 사람의 영혼이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다시 살아나 영원히 죽지 않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믿지 않는 사람은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기독교의 가장 기본적인 핵심 교리입니다

 

우리 영혼은 잘 될 수밖에 없습니다.

만유 보다 크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들고 계시는데 우리 영혼이 잘 못될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도 이 시대 믿음이 없는 자들은 사람의 행위를 보면서 그 영혼이 잘못될 수 있다고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어리석은 주장이라는 것을 여러분이 바로 분별해야 합니다.

 

나를 낳은 이 세상 부모도 나를 안 버립니다.

그런데 이 시대 율법주의에 미혹이 되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람보다 못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내 영혼은 잘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사단 보다 더 강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보다 사단이 더 강하면 내 영혼은 늘 불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아무리 사단이 나를 해치려 해도 그 손에서 우리를 구원해 주십니다.

 

이렇게 내 영혼이 잘 된다는 것을 우리는 먼저 믿어야 합니다.

그런 믿음이 있는 성도의 범사가 잘 된다는 말씀입니다 범사는 모든 일이 잘 된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이 먼저 이해를 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잘 된다고 하니까 마치 내 생각대로 되는 것을 잘 되는 것으로 오해할 수 있습니다.

 

내가 세상에서 성공을 하고 재물을 얻고 좋은 직장을 들어가고 하는 사업이 잘되고 하는 것으로만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물론 그것을 전혀 아니다 라고 말씀을 드리는 것 또한 조심스럽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적 상황을 볼 때 기독교인들은 박해를 받고 순교를 당하던 시대였습니다.

 

그런 기독교인들이 실망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자 밥이 되고 화형을 당하고 하는 그런 것을 보면서 초대 기독교인들은 정말 하나님이 살아 계신 가 우리가 믿는 예수가 진리가 맞는가 하는 의심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구약에서 보면 하나님께서는 믿는 성도들을 그런 박해에서 건져 주셨기 때문입니다.

 

다니엘을 사자 굴에서 건져 주셨습니다

그리고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를 풀무 불 가운데서 구원을 해 주셨습니다. 분명히 구약의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구원을 해 주셨는데 자기들은 지금 그런 똑 같은 처지에 있지만 하나님께서 전혀 구원의 손길을 펼쳐 보이고 있지 않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저버릴 수 있는 그런 상태에 있는 성도들에게 사도 요한은 편지를 보내서 격려하는 말씀입니다

 

사도 요한이 그렇게 되기를 기도한다는 말씀입니다

네 영혼이 잘 되는 것은 확실하다 그것을 믿어라 그 사실을 믿는 성도들에게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간구한다는 말씀입니다 간구한다는 말씀이지 영혼이 잘되면 범사가 꼭 잘된다는 것을 보장하는 말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금 초대 교회 성도들은 환난을 당하고 있습니다.

심한 박해 속에서 언제 자기 생명을 잃을지 모르는 처지에서 카타콤에 굴을 파고 그곳에서 예배를 드리며 생활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런 성도들이 믿음을 저버리고 낙심 할 것을 염려하는 마음에서 사도 요한이 믿음을 독려하는 편지라는 것을 여러분이 깨달아야 합니다.

 

그 시대 기독교인들이 잘 되면 얼마나 잘 되었겠습니까?

정말 자기 생명을 보존하는 것만도 다행으로 생각하고 로마 군대를 피해 숨어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으라는 격려의 기도입니다 비록 그런 박해 속에 있지만 너희 영혼은 확실하게 잘되고 있으니까 그것을 바라보며 네 범사도 또한 그렇게 잘 되기를 원한다는 격려의 간구입니다

 

성도는 누구를 위해 삽니까?

내가 살아도 주를 위해 죽어도 주를 위한다고 사도 바울은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주를 위해 사는 성도의 모든 삶이 범사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위해 사는 사람들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복음이 다른 사람에게 전해지는 것이 가장 잘 되는 일입니다

 

그보다 잘되는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내가 성공을 하고 재물을 많이 모으고 하는 것은 사실 범사에서 지극히 일 부 분이라는 것을 여러분이 깨달아야 합니다. 그런 세상적인 것으로 아무리 잘 되도 영혼이 잘못되는 사람은 범사가 잘못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나를 통해 다른 영혼이 잘된다면 범사가 잘되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어떤 삶을 살았습니까?

고린도후서 11:23-27절을 보면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이것이 사도 바울의 삶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방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어려움과 핍박과 박해를 당했는가를 볼 수 있습니다. 이뿐 아니라 사도 바울은 나중에 순교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과연 이런 사도 바울을 보고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사도 바울의 영혼은 틀림없이 잘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범사를 보면 잘된다고 하기 보다는 오히려 저주를 받은 사람과 같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사도 바울은 복음을 위해 사는 그의 범사가 잘되었다는 말씀입니다 비록 우리가 감당하기 힘든 삶을 살았지만 복음의 사도로서 사도 바울은 범사가 잘 되었습니다

 

범사가 잘되었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사도 바울과 같은 복음을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사도 바울의 범사가 잘못 되었다면 우리에게 복음이 전파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세상적인 눈으로 바라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도는 영적인 눈으로 이 세상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비록 육체는 저주를 받아 극한 환란과 핍박 속에 있을지라도 내가 전하는 복음을 통해 다른 영혼이 소생되고 있다면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고 있다면 내 범사는 잘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수만 명이 다니는 교회의 목사면 뭐합니까? 그곳에서 구원을 받을 영혼이 없다면 그가 하는 일은 범사가 잘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망하는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이 시대는 육적인 신앙생활 속에 깊이 빠져 있습니다.

영적인 것은 보려하지 않고 그저 자기 육신의 범사가 잘되기를 바라며 이 말씀을 자기들 마음대로 해석을 하고 있고 이 말씀으로 인하여 사람들을 기복주의 신앙에 빠지게 만들고 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 중에 수많은 사람들이 순교를 당했습니다.

그럼 그들은 범사에 잘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저주를 받은 것이 되고 맙니다.

 

잘되는 것이 무엇인가 라는 시각부터 바꾸시기 바랍니다.

그저 자기 육신의 평안함을 보고 잘되는 것이라고 한다면 사도 요한의 간구는 여러분과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네 영혼이 잘 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이 말씀은 네 영혼이 잘 되는 것을 믿어라 비록 네가 환란 중에 있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너를 인도하시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 시대 하나님을 마치 도깨비 방망이처럼 생각하는 그런 기복주의 신앙을 가지라는 말씀이 아니라 내 영혼이 잘 되는 것을 믿는 사람은 범사가 잘 되고 있다는 것을 믿으라는 말씀입니다

 

지금 환란 중입니까?

정말 죽지 못해 살아가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얼마나 극한 상황에 처해 있는지 몰라도 초대 교회에 자기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카타콤에 피해 생활하는 성도들보다 더 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은 먹을 것이 없어 정말 하루 한 끼를 먹으면서도 자기 신앙을 저버리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습니다.

 

사막과 같은 바위 동굴에서 사는 그들이 잘 되면 얼마나 잘 되겠습니까?

초대기독교인들은 잘된 것이 아니라 환란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 환란은 생명을 잃을 수 있는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런 기독교인들에게 지금 사도 요한의 위로의 간구를 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들에게는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이 세상의 복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기복주의 또한 율법주의입니다

그런 사상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면 육신의 복을 간구하다가 영혼에 있는 더 좋은 것을 잃어버리는 결과를 가져올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이 시대는 성경을 거의 육신의 복과 연결 지어서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또한 교회 나오는 교인들은 그저 그런 설교를 들으면서 어떻게 하면 육신이 잘 될까를 고민하고 있습니다.

 

영혼이 잘되는 것은 그들에게 아무 문제가 되지 않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영혼을 어떻게 하시고 있는가 하는 문제는 그들에게 있어 그리 중요한 문제도 아니며 지금 이생에서 살아가면서 어떻게 하면 출세를 하고 명예를 얻고 재물을 많이 모을까 하는 생각뿐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열심을 다 하는 자기 모습에 취해 자기 영혼이 어떻게 되는 가를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영혼이 잘되지 않으면 여러분은 망한 사람입니다

우선 그것이 잘되고 나면 영혼에 대한 확신이 서고 나면 내 환경과 처지는 모두 받아들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혼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에 그것이 얼마나 잘되고 있는 가를 모르기 때문에 그저 육신에 대한 것을 추구하면서 그것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이 세상은 지나가는 것입니다

얼마나 빨리 지나가느냐면 화살과 같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 인생을 살면서 그것에 매달리고 그것이 잘 되기를 바란다는 자체가 복음을 거절하는 행위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아무리 잘되면 무엇 합니까? 화살과 같이 빨리 지나가고 나면 그저 허망한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이 무엇을 추구하면서 살았는가를 사도 요한은 분명하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3,“형제들이 와서 네게 있는 진리를 증거 하되 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하니 내가 심히 기뻐하노라

 

사도 요한은 오직 예수만을 증거 했습니다.

어떤 이생의 복을 전한 것이 아니라 길이요 생명이요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전했다는 말씀입니다 이 시대처럼 예화를 전하고, 유머를 전하고, 정치를 전하고, 이 세상의 복을 전한 것이 아니라 진리를 증거 했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성도들이 사도 요한을 찾아 와서 그 진리를 나누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무엇을 구했는가를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이생의 복을 구한 것이 아니라 진리 안에서 행하기를 힘썼다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믿는 것에 대해 열심을 가졌다는 말씀입니다

 

사도 요한은 그런 성도들을 보며 기뻐했습니다.

이생에서 어떤 축복을 받는 그런 것을 보고 기뻐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을 보고 기뻐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예수 안에서 기뻐하기 보다는 자기들이 받은 이생의 축복을 보며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진리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습니다.

그저 자기 형편이 조금 어려워지면 어떻게 하면 그것을 극복할까 밤을 새워서 기도는 하고 있지만 진리를 아는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아니 진리 안에서 행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진리 안에서 행한다는 말씀은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말씀입니다 믿음에는 관심이 없고 그저 자기들에게 주어지는 복에 관심이 있고 그것을 가지고 교회 안에서 어떤 일을 하는 것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것이 육신의 정욕이라는 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육신의 소욕에 빠져 그저 이생의 복을 구하느라 모든 정신이 그곳에 팔려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교회 안에서 복음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것이 나쁘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런 행위가 진리 안에서 행하는 것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여러분이 먼저 이해를 해야 합니다

행한다고 하니까 내 육체로 행하는 것만을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마음으로도 행합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마음으로 행하는 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그저 자기 육신으로 행하는 그것만을 보며 기뻐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예배를 잘 드리고 기도도 하고 신앙생활에 열심을 다하는 자기 모습을 보며 마치 그런 행위들이 진리 안에서 행하는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진리 안에서입니다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이 무엇을 어떻게 행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이 행하는 모든 것은 예수 밖에서 행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그것을 보며 예수 안에서 행한다고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예수 안이 될 수 없다는 것은 어린아이도 이성적으로 알 수 있는 일입니다

믿음 밖에는 없습니다.

예수 안에서 행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믿음 밖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을 먼저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예수 안에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는 어떤 방법으로도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것은 성령께서 내게 임재 하셔서 내가 믿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습니다.

자기들이 당하고 있는 극한 환란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자기 영혼이 잘되는 것을 보며 비록 육신은 너무도 고통이 많이 따라오고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며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의와 평강과 희락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세대는 그것을 전해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자기 몸으로 무엇을 행하고 그것이 잘되어야 마치 믿음이 좋은 것으로 오해를 하고 어떻게 하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복을 받은 자기의 모습을 보이려 하며 그것을 기뻐하고 있습니다.

 

4,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즐거움이 없도다

 

여러분의 즐거움이 무엇입니까?

이생에서 어떤 복을 받아서 그것을 가지고 교회 안에서 하나님을 위해 일하는 것입니까? 그런 모습을 보며 진리 안에서 행하고 있다고 혹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물론 하나님께서 나를 축복해 주셨다면 당연히 해야 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진리 안에서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 행위입니다. 진리 안에서 행하는 것은 믿음이고 나를 통해 나타나는 모든 모습은 행위입니다 이것을 여러분들이 깨닫지 못하면 여러분은 스스로 율법주의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 요한이 이생의 복을 생각하면서 이 말씀을 기록했습니까?

이생의 복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말씀입니다 오히려 극한 환란을 당하고 있는 성도들에게 위로와 격려를 하기 위해 간구하고 있으며 영혼이 잘되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라는 말씀입니다

 

그 영혼이 잘 되는 것은 진리 안에서 행하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진리 안에서 행하고 있는가 아니면 진리 밖에 행하고 있는가를 스스로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진리 안에서 행하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으로 믿는 것이요 진리 밖에서 행하는 것은 이생의 복을 가지고 내가 교회 안에서 행하는 모든 행위입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이생의 복을 가지고 교회 안에서 행하는 것이 나쁘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각자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그 분복을 가지고 복음을 위해 헌신해야 하는 소명이 있습니다. 그것이 나쁜 것이 아니라 내 영혼이 잘되는 것은 생각하지 않고 오직 육신의 복을 위해 교회 안에서 행하는 것이 나쁘다는 말씀입니다

 

교회 안에는 알곡과 가리지가 함께 있습니다.

알곡은 자기 영혼이 잘되는 것을 보며 기뻐하고 가라지는 자기가 행하는 육신의 어떤 모습을 보며 기뻐하고 있습니다. 나는 어디에 속해 있는가를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기복 신앙은 여러분의 영혼을 빼앗아갑니다

욕심을 부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영혼이 잘되고 있는 성도는 이생에서 자기 앞에 주어지는 모든 환경과 처지를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영혼이 잘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 영혼이 잘되고 있는데 무슨 걱정이 있습니까?

영혼이 잘되고 있는 것을 믿는 성도는 자기 앞에 어떤 환란이 찾아와도 그것을 극복하면서 자기 안에 있는 믿음을 보며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는 성도가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