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니라(요6:63.)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약속이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

은혜와 진리의 말씀

8강, 비우는 것이 아니라 덧입는 것입니다

윤주만목사 2019. 4. 22. 18:37


8, 비우는 것이 아니라 덧입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1-7절을 보면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 진 것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바 되게 하려 함이라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에 거할 때에는 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아노니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

 

기독교 안에 이상한 사상이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습니다.

성도는 말을 할 때 단어를 선택하는데 있어 이 단어가 정말 성경적인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냥 좋은 것이 좋다고 하는 말 중에는 오히려 복음을 가리고 복음을 거절할 수 있는 말들이 실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 중에서 많이 사용되어 지고 있습니다.

 

성도들이 모여 예배드리는 교회가 예배당입니까? 아니면 성전입니까?

이 시대는 영적인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구약의 육적인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구약의 성전은 육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배당을 성전이라고 아주 쉽게 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전이라고 하면 더 좋을 것 같지만 사실은 그 말 한마디가 얼마나 복음에 반하는 것인가를 깨닫는다면 예배당을 성전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좋은 것이 좋다고 성전 아닌 것을 성전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거절하는 말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깨달아야 합니다. 분명 이 시대 성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버젓이 성전이라 말하고 있으며 심지어는 성전이라고 간판을 내 거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한 말 한마디가 결국 복음에 반한다는 것을 아는 성도는 그렇게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지금 본문의 말씀에도 그런 것이 있어 여러분과 말씀을 나누기를 원합니다.

1,“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땅에 있는 장막 집이 무엇입니까?

바로 우리 성도의 육체입니다 성도의 육체는 반드시 어느 순간에는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서에 한번 죽는 것은 정하신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죄악 중에 출생한 인생은 반드시 한번은 죽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영원한 집이 하늘에 있는 줄 알기 때문입니다 마치 들에 풀과 같이 한 시대를 살다가 선한 자나 악한 자나 모두 다 한번 죽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들에게 정하신 것입니다 만약 죽지를 않으면 우리 인생에게는 더 큰 고통이 따라 옵니다

 

물론 건강하고 행복하게 영원히 살 수 있다면 죽는 것이 나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병이 나서 영원히 그 병으로 고통을 받으며 살아야 한다면 아마 거의 모든 사람이 죽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사정을 할 것입니다 노숙을 하면서 빌어먹고 한 끼 식사도 해결을 하지 못하며 몸은 병이 들어 거동이 불편하다면 누구나 죽기를 원하게 되어 있습니다.

 

한번 죽는 것은 저주가 아니라 오히려 축복입니다

지금 내가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고 있기 때문에 죽는 것이 마치 저주인 것처럼 생각하지만 사실은 나이가 들면 병이 찾아오게 되어 있고 자기 몸도 간수를 못할 때는 죽는 것이 축복이 됩니다. 한번 죽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저주하시는 것이 아니라 축복하시는 것임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성도들에게는 하늘에 영원한 집이 있습니다.

바로 신령한 몸으로 변화가 되어 슬픔과 고통과 아픔이 없이 영원한 행복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는 영원한 집이 있기 때문에 육신의 죽음을 담담하게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2,“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교회에 나와서 예수를 믿는 것은 천국을 가기 위함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우리 육체는 불완전하기 때문에 연약하여 넘어지기도 하고 때로는 원치 아니하는 아픔이 찾아오기도 하고 죽음이라는 영원한 이별이 찾아오기도 합니다. 그런 육체를 가지고 사는 인생이기에 더욱 더 하늘에 있는 신령한 것을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합니다.

 

세상 종교와 기독교는 다릅니다.

여러분의 상식이 역발상이 되지 않고는 복음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교회는 세상의 사상과 별로 다를 것이 없습니다. 다를 것이 없기 때문에 세상에서 아무 힘을 나타내지 못하고 그저 조롱거리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세상은 벗어 버리려 합니다.

바로 그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의 경지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렇게 벗어 버리는 종교가 아니라 덧입는 종교라는 것을 여러분이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덧입기를 원하기 보다는 벗어버리려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늘로부터 오는 처소를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하늘의 것을 덧입기를 사모하기 보다는 자기에게 있는 죄 성을 벗어 버리려 아주 몸부림을 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벗어지지가 않으니까 나중에는 타 종교를 찾아가거나 아니면 교회에 나와 있지만 타성에 젖어 그저 종교인으로 전락을 하고 맙니다.

 

하늘의 것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내가 무엇을 벗어 버리고 난 후에 덧입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것 그대로 덧입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땅에 있는 장막이 무너지면 우리는 하늘로부터 내려온 영혼에 다시 하늘로부터 신령한 것을 덧입음으로서 완전히 존재로 변화가 되는 것입니다

 

이 땅에 있는 모든 것은 무너집니다.

남아 있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다만 우리 속에 있는 성령이 우리와 영원히 함께 있어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그 날에 그 위에 하늘로부터 오는 신령한 것을 덧입어 완전한 자로 변화가 되는 것이 바로 기독교의 진리입니다

 

3,“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우리는 덧입어야 합니다.

왜 덧입어야 하느냐면 완전하게 벗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덧입지 않고는 완전하게 벗을 수 없기 때문에 하늘에 있는 것을 사모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해탈의 경지에 올라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 이상한 사상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자기를 완전하게 벗어야 한다고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천국에 가기 위해서는 자기 죄를 하나도 남기지 않고 회개를 해야 천국에 갈 수 있다는 황당무계한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과 대화를 해 보면 자기가 어떤 죄를 짓고 있는 가도 모릅니다. 그저 자기 상식으로 알고 있는 죄에 대해서 그것을 회개 하고 마치 벗은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죽기 전에 지은 모든 죄를 회개해야 한다고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사는 동안 지은 죄를 다 기억할 수 있고 그것을 모두 다 회개 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어리석은 생각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제가 육신적으로 짓는 죄를 회개하지 말라고 드리는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는 늘 회개 하고 있지만 사실 우리가 짓는 죄에 지극히 일부분만 깨닫고 그것을 회개하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완전하게 벗을 수 없습니다.

완전하게 벗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회개로는 벗은 자로 발견이 되고 만다는 말씀입니다 벗은 자로 발견이 되면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점도 흠도 없어야 하는데 완전히 벗지 못한 모습으로 나아가다가는 그 벗은 것이 발견되어 심판을 자초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완전하게 벗으려 합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성도는 자기가 벗을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그것을 알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 말미암아 깨끗하게 되려 합니다.

 

에베소서5:26절을 보면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내가 깨끗해 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깨끗하게 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도 교회 안에 있는 다수는 자기가 벗어서 깨끗하게 하려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고백하는 회개로는 완전하게 깨끗해 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고는 여러분 스스로 깨끗해 질 수 있다는 것은 불교인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불교인도 고백하는 회개를 합니다.

아니 세상 모든 종교가 고백하는 회개를 하고 종교를 갖지 않은 무실론 자들도 자기가 잘못을 하면 고백하는 회개를 한다는 것을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그런 것은 자기 스스로 벗으려는 행위입니다 그것은 완전하게 다 벗을 수 없기 때문에 흠이 있는 벗은 모습으로 나타나 심판을 받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지금 교회는 사상이 없습니다.

그저 자기들 생각에 좋은 것이라고 생각이 되면 그것이 불교의 주장인지 천주교의 주장인지를 생각하지도 않고 그냥 교회 안에서 자유롭게 사용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자기 스스로 벗고자 하는 자는 벗은 모습이 발견 되어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거절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4,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 진 것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바 되게 하려 함이라

 

우리의 장막은 율법의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선하게 살고 의롭게 살고자 하는데 그렇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그것이 어깨를 누르는 무거운 짐이 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내가 온전하지 못하게 때문에 그것을 보면서 늘 탄식을 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누구나 양심이 있습니다.

죄를 지면 마음이 편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이 나를 짓누르고 있습니다. 내가 죄를 지면 탄식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아무리 악한 사람이라도 자기 죄를 발견하는 순간 탄식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벗으려고만 합니다.

 

심지어는 영성 수련이다, 알파코스다 하면서 자기 마음에 있는 죄 성을 벗어 버리려 별별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죄를 벗어 버리고자 하는 것은 사실 기독교인이라 할 수 없습니다. 제가 죄를 마음 놓고 지면서 살아도 된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성경을 바로 알면 내가 얼마나 많은 죄를 지면서 살아가고 있는 가를 조금이나마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 많은 죄의 짐을 벗으려 하면 하루 종일 고백하는 회개만 하고 있어도 벗어 질 수 없다는 것을 여러분이 깨달아야 합니다. 정말 잠도 안자고 밥도 안 먹고 고백하는 회개를 한다고 해서 그것이 벗어질 수 있다면 참 좋은데 절대로 벗어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것을 깨달은 성도만이 하늘로부터 오는 처소를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할 수 있습니다

 

참으로 답답한 것은 자기에게서 나타나는 아주 작은 것이 벗어진 것을 보면서 마치 모든 것에서 벗어질 수 있는 것으로 착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서 그런 것을 자랑하면서 내가 이렇게 해서 벗었으니까 너도 이렇게 하면 벗을 수 있을 것이라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렇게 수십 년을 신앙생활을 한 여러분이 얼마나 벗어 졌습니까?

 

정말 하나님 앞에 흠도 점도 없을 만큼 벗어졌습니까?

만약 그렇게 벗어진 사람이 있다면 그렇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자기 양심에 비추어서 점도 흠도 없이 벗어 졌다면 그렇게 하는 것이 맞지만 수십 년을 신앙생활을 하고도 못 벗었다면 앞으로도 여러분은 벗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것을 벗을 수 있다고 아직까지도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조금 벗어지는 것으로 착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기독교인이 아니라도 모든 세상 사람들도 그만큼은 벗어지고 있습니다. 그것을 보며 마치 자기가 예수를 믿어서 벗어졌다고 착각 한다면 벗은 것이 나타나게 되어 심판을 받게 됩니다. 세상에는 기독교인들 보다 더 선하고 의롭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것을 여러분이 어떻게 설명할 것입니까?

여러분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변화되는 정도는 이 세상 사람들도 변화 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불교인도 천주교인도 무실론 자도 나이가 들면 다 그만큼은 변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자기가 벗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스스로 사망의 길로 들어가는 일입니다

 

성도는 벗고자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오직 하늘로부터 오는 것을 덧입고자 사모하는 것입니다 왜 하늘로부터 오는 것을 덧입어야 하느냐면 그것을 덧입어야 생명을 얻기 때문입니다 벗어서는 생명을 얻을 수 없지만 하늘로부터 오는 것을 덧입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은 덧입고자 사모하는 성도입니다

그러나 모든 세상 사람들은 자기 죄 성을 벗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것이 보이면 참회를 하고 다시는 그런 죄를 범하지 않겠다고 다짐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이 덧입을 생각을 하기 보다는 세상 사람들과 같이 벗고자 노력하는 것을 볼 때 안타깝기만 합니다.

 

저도 정말 벗고자 하는 것이 있습니다.

수십 년을 눈물로 호소하고 때로는 원망도 하고 때로는 내 스스로를 저주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역시 벗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깨닫고 난 이후에는 그것을 벗고자 노력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늘의 것을 덧입고자 사모하니까 그것이 그렇게 무거운 짐이 되지 않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덧입어야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생명에 삼킨바 된다는 말씀은 생명을 얻는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벗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덧입음으로서 가능한 일입니다 물론 고백하는 회개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생명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오직 하늘의 것을 덧입어야 생명에 삼킨바 될 수 있습니다

 

5,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구원의 옷을 입어야 합니다.

사람이 이해하기 쉽게 입는다는 표현을 쓴 것이지 사실은 입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내 안에 임재 하셔야 합니다. 왜 성령께서 우리에게 임재하시는 것이 덧입는 것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 장막의 육신은 무너집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면 흙으로 돌아간다는 말씀입니다 이 흙으로 돌아가면 남는 것은 우리 안에 임재 해 있는 성령입니다 이 영혼이 생명을 보존하고 있다가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신령한 몸으로 변화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입니다

여러분에게 성령이 임하지 않으면 생명을 얻을 수 없습니다. 반드시 성령께서 나와 함께 있어야지만 내 장막이 무너져도 성령으로 말미암아 내 생명이 보존되어 하늘로부터 오는 신령한 몸으로 덧입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표현이 덧입는다는 말씀으로 표현을 한 것이지 사실은 성령이 내 안에 임재 하셔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덧입는다고 하니까 마치 옷을 입는 것으로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덧입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어떤 깨끗한 옷을 입는 것이 아니라 깨끗한 성령이 내 안에 임재하심으로 내 육신의 장막이 무너질 때 내 영혼에 하늘로부터 오는 신령한 것을 덧입어서 완전한 자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령을 사모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보내 주시는 또 다른 보혜사를 사모하지 않고 내 스스로 죄의 짐을 벗고자 하면 그것을 온전하게 벗을 수 없기 때문에 벗은 것이 그대로 다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없어 보세요. 우리 육신의 장막이 무너졌을 때 뭐가 남겠습니까?

 

더러운 육신만 남게 되는 것입니다.

깨끗하게 벗으려고 노력을 했지만 깨끗하지 못한 벗은 것으로 나타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깨끗한 성령이 발견이 되어야 하는데 자기 육신의 더러운 것만 발견이 되기 때문에 그 사람은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성령을 사모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자기 스스로 벗으려고 매일 눈물을 흘리면서 회개를 하고 있습니다. 회개 하고 나면 조금 벗어지는 것 같다가 돌아서면 또 다시 마음에서 찜찜한 것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또 다시 가서 눈물로 회개하기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생명에 삼킨바 되려면 성령이 내 안에 임재 하셔야 합니다.

그래야 내 육신의 장막이 무너졌을 때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깨끗한 성령으로 말미암아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것이고 주님께서 오실 때 그 영혼에 다시 하늘로부터 오는 신령한 것으로 덧입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6, “이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에 거할 때에는 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아노니

 

참 이해하기 힘든 말씀입니다

주님과 나는 한 몸이라고 분명히 말씀을 하는데 여기 본문의 말씀은 주님과 따로 거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육체로 살 때에는 우리 자유의지에 의해서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죄에서 늘 죄악 가운데서 사는 나를 바라보면 주님과 따로 사는 것 같지만 우리가 항상 담대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사실 우리는 선을 행하면서 산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늘 죄악가운데서 죄의 짐을 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 우리 몸은 주님과 따로 떨어져 살아가고 있는 것같이 생각이 되어 진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예수를 믿는다 하면서도 매일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내 몸을 보면 주님과 따로 떨어져 사는 것같이 보입니다.

 

그럴지라도 우리는 항상 담대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왜 담대할 수 있느냐는 것을 다음 절에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7,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

 

우리의 모습을 보면 주님과 아무 상관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정말 매일 무거운 죄 짐을 지고 살아가고 있는 내 육신을 보면 주님과 따로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말씀입니다 아마 이런 마음은 신앙인이라면 누구나 가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죄를 짓는 자기 모습을 보면 늘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보혜사 성령께서 임재 하셔서 내 안에 내주하심으로 나와 예수가 함께 있다고 생각하다가도 내가 죄를 짓고 그 죄의 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내 몸을 보면 예수님과 따로 거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담대합니다.

눈으로 볼 때는 분명히 주님과는 상관없는 사람처럼 보이지만 성령께서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고 내가 주님과 한 몸이라는 것을 확신 시켜 주고 있기 때문이라는 말씀입니다

 

얼마나 감사한 말씀입니까?

정말 죄의 짐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나에게 그 모습을 보면서 주님과 따로 사는 것 같은 나에게 성령께서 임하셔서 믿음을 주시고 확신할 수 있게 하심으로 담대하게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믿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보이는 것을 바라보며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믿음은 마음에 있습니다

성령께서 내 안에 임재 하셔서 내 마음을 감동하여 주시고 있습니다. 죄의 짐에서 벗어나고 싶지만 벗어나지를 못하는 나에게 믿음을 주셔서 내가 생명을 얻은 자가 되었다는 것을 확신하게 해주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령께서 보증하심으로 생명에 삼킨바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믿음은 마음에 있습니다

믿음으로 행한다는 말씀은 마음으로 믿는다는 말씀입니다

내가 하늘의 것을 덧입은 것은 눈으로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보증을 해주심으로 그것을 믿고 담대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눈으로 보이는 것을 따라가는 자는 자기 스스로 벗으려는 자요 믿음으로 행하는 자는 성령께서 보증으로 내가 생명을 얻었다는 것을 마음으로 확신하며 담대할 수 있는 성도입니다

 

아직도 교회 안에는 눈에 보이는 것을 따라가는 사람이 다수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눈에 보이지 않는 그러나 하늘로부터 오는 처소를 덧입는 것을 사모하고 그 사모하는 마음에 성령께서 보증하여 주심으로 이 세상에서 비록 벗지는 못했을지라도 담대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행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