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니라(요6:63.)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약속이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

은혜와 진리의 말씀

9강, 여자가 목사가 되는 것

윤주만목사 2019. 4. 23. 10:15


9, 여자가 목사가 되는 것

 

디모데전서 2:11-12절을 보면

여자는 일절 순종함으로 종용히 배우라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 오직 종용할지니라

 

아직도 일부 교단에서는 여자를 목사로 세우지 않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디모데전서에 나오는 말씀을 보면서 여자는 일절 순종함으로 종용히 배우라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한다는 이 말씀 때문에 보수라 자칭하는 일부 교단에서 여자 목사를 세우지 않고 있습니다.

 

성경은 영적인 말씀입니다

그것을 문자 그대로 육적으로 해석을 한다면 어리석음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분명 문자적으로 볼 때는 여자를 목사로 세우는 것과 가르치는 것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교회 안에서 행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자칭 보수 교단이라고 하는 여자를 목사로 세우지 않는 교단들을 보면 그들이 얼마나 이중적인 잣대로 성경을 해석하고 있는 가를 알 수 있습니다.

 

저는 먼저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려면 문자 그대로 교회 안에서 행하라고 권면을 해 드리고 싶습니다. 어느 것은 괜찮고 어느 것은 안 된다면 그것은 스스로 성경의 권위를 침해하는 행위가 되고 말 것입니다

 

여자는 가르쳐서도 안 되고 남자를 주관해서도 안 됩니다.

이것은 문자 그대로입니다 그 보수 교단에 가 보시기 바랍니다. 여자를 목사로 세우지 않는 교단이라 해도 전도사는 여자들을 세우고 있고 또 교회 학교 교사를 여자로 주로 세우고 있습니다. 문자 그대로 행하려 한다면 여자 전도사도 세우지 말아야 하고 교회 안에서 여자를 교사로 세워서는 안 됩니다 또한 여자가 강대상에 올라가서 간증을 하는 행위도 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거의 모든 교회 자칭 보수라 하는 교회에서 이러한 일들을 아무 거리낌 없이 행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성경의 권위를 무너뜨리고 있으며 자기들 편리에 따라 이중적인 잣대를 들이 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자기가 편하기 위해서는 심방 전도사를 교육 전도사를 세우고 자기가 편하기 위해서는 여자를 교사로 세우고 있습니다. 더구나 교회 부흥을 위해서는 여자 강사를 강단에 아무 거리낌 없이 세우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신학교에서부터 가르치지도 말아야 하는데도 여자를 그 교단들을 보면 신학교에서는 여자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안수는 주지 않고 있는 아주 이상한 논리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정말 하나님께서는 여자가 남자를 가르치는 것과 주관하는 것을 금하셨을까요? 여자는 남자 보다 열등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오한 복음의 깊이를 깨달을 수 없어 여자가 가르치고 주관하는 것을 금하셨는가를 우리는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저는 남자 목사입니다 먼저 이것을 밝히고 글을 써야 오해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하나님께서 여자는 분명 남자를 돕는 자로 지으셨습니다.

그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지금과 같은 대 도시에서는 얼마든지 남자가 가르칠 수 있고 또 교회를 찾아가기도 아주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도 100여 년 전만 해도 교통수단이 좋지 않았고 한 마을과 다른 마을과는 거의 교통이 없던 시절을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아주 작은 20여명이 사는 마을에 복음이 전해졌습니다.

선교사가 와서 복음을 전파하고 더 이상 그것에서 사역을 할 수 없어 누군가에게 그곳에 사역을 맡기고 떠나가야 하는 상황이 발생이 되었습니다. 그럴 때 누구를 그곳에 세워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라면 누구를 세우겠습니까?

 

그 기준이 무엇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지금 디모데전서 2:11-12절의 말씀을 기초로 해서 여자는 남자를 가르칠 수 없고 남자를 주관하지 못하게 때문에 20명 중에 7명이 남자인데 그 중에 한 명을 세우시겠습니까? 과연 그것이 옳다고 생각합니까? 남자이기 때문에 무조건 세워야 합니까?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 선교사가 그곳에 있는 남자들을 볼 때 아직 믿음이 뿌리를 내리지 못한 것입니다 만약 정말 남자를 그곳에 세워야 한다면 그 선교사가 떠난 이후에 그곳 사정은 불을 보듯 뻔 한 일이 되고 말 것입니다 남자냐 여자냐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가 복음을 깨달았느냐 하는 사실입니다

 

선교사가 헌신적으로 복음을 전파했지만 아직 남자들에게는 그런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그럴 때도 여러분 같으면 남자를 굳이 세우겠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가정을 생각하면서 제가 여러분에게 질문을 드리는 것입니다

 

목사를 세우는 일 집사를 세우는 일 중에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하는 일이 있습니다. 기독교는 구원의 종교입니다 남자냐 여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구원을 전할 수 없다면 그것은 아무 의미가 없는 일입니다 가장 기초가 되는 기준이 무엇인가를 모른다면 생리적으로 남자냐 여자냐를 따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말씀을 해석할 능력도 그에게는 없습니다.

 

디모데전서2-3장은 비유입니다

여러분이 이것을 문자적으로 해석을 하는 순간 오류에 빠질 수밖에 없으며 자기 편리에 따라 성경을 이용하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3장을 제가 일일이 열거하지 않겠습니다. 여러분이 성경을 보면 모두 알 수 있는 말씀이기 때문에 그냥 설명만 하도록 하겠습니다. 목사가 술에 인박힌 사람이 있습니까? 목사가 구타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물론 일부는 그런 사람도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목사는 그렇지 않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런데 왜 사도 바울은 감독을 직분 자를 세우는 일에 그것을 기준으로 삼았습니까? 집사의 기준도 거의 동일합니다. 술에 인박히지 않고 구타하지 않고 돈을 사랑하지 않고 나그네를 대접하기를 즐거워하고 자기 집을 잘 다스리는 것이 과연 목사의 자격이 될 수 있습니까? 그렇게만 하면 누구나 목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목사 되기가 아주 쉽습니다.

이런 육적은 모습이 목사의 기준이 된다면 여러분은 세상 종교를 믿는 사람과 다를 것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이렇게 육적으로 나타나는 기준 보다 더 중요한 것이 그 목사를 세우는데 있어 기본이 되어야 합니다.

 

디모데전서 3:2절을 보면

그러므로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절제하며 근신하며 아담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디모데전서 3:9절을 보면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라야 할지니

 

외적인 조건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적인 조건입니다 그것은 목사는 책망할 것이 없어야 하며 또한 집사도 마찬가지이며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라야 하는 것입니다 앞에 열거한 외적인 문자적인 조건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책망할 것이 없고 믿음의 비밀을 가져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책망할 것이 없는 사람이 있을까요?

과연 이렇게 완전한 사람이 있다고 생각합니까? 만약 이것이 보이는 육적인 조건이라면 이 세상에는 목사가 될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여러분이 다니는 교회의 목사가 정말 책망할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입니까? 아마 그런 사람이라고 주장한다면 모두가 이단에 속해 있습니다.

 

목사의 조건과 집사의 조건은 모두가 영적인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육적으로, 문자적으로 해석을 하고 있으며 스스로 오류에 빠져 들어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책망할 것이 있는 목사를 세워 놓고서도 하나님 앞에서 뻔뻔하게 목사의 직무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목사를 따르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육적인 말씀이 아닙니다.

책망할 것이 없는 목사는 당연히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이며 이것은 육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책망할 것이 없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요한복음16:8절을 보면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책망할 것이 없다는 말씀은 성령의 감동을 받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령의 감동을 받고 있기 때문에 믿음의 비밀을 알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가장 기초가 되는 이 기준을 모르고 그저 문자적으로 남자이니까 술에 인박히지 않았으니까 구타하지 않으니까 나그네를 대접하기를 즐겨하니까 목사로 세운다면 그는 하나님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목사입니다

 

여기서는 여자를 목사로 세워도 되는가 하는 문제로 말씀을 드리기 때문에 술에 인박히지 아니하고 구타하지 아니하고 나그네를 대접하기를 즐거워하고 가정을 잘 다스리고 하는 그런 영적인 문제는 다루지 않겠습니다.

 

본질을 잊어버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가중 중요한 것은 우리의 어떤 외적인 조건이 아니라 내적인 상태라는 것을 잊어버린다면 그것은 세상 종교와 다를 것이 없는 신앙생활입니다 목사를 세우는 일의 가장 중요한 본질은 그가 바른 믿음을 가지고 있는가 그래서 성령의 감동을 받아 성도들을 잘 가르쳐서 구원을 받게 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만약 이것에서 미달이 된다면 그는 남자라도 가르쳐서는 안 됩니다

믿음의 비밀도 모르고 보혜사 성령의 감동하심도 받지 못하는 사람이 단지 남자라는 조건만으로 교회에서 가르치고 주관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악한 일이 될 수 있습니다 구원을 방해하는 자는 악한 자입니다

 

진리의 성령이 감동을 해주셔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가르쳐 주셔야 하고 또 그를 통해 믿음의 비밀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도 못한 남자가 교회 안에서 단지 남자라는 조건으로 겉으로 드러나는 육체적인 조건만을 가지고 목사가 된다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사역을 방해하는 아주 악한 일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이런 조건을 갖추고 남자라면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목사를 세우는 일은 남자냐 여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아야 하고 그가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셔서 복음의 비밀 믿음의 비밀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 사람만이 목사가 되어 영혼을 구원으로 인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다시 앞으로 가겠습니다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일을 허락지 아니한다는 사도 바울의 말씀을 우리가 상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성경은 비유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남자도 마찬가지고 여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먼저 남자는 생리적인 남자가 있습니다. 그리고 구원을 받은 성도를 아들이라고 표현을 합니다. 여자가 구원을 받아도 아들이라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아들이라고 하느냐면 천국은 시집도 장가도 가지 않는 곳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여자는 먼저 생리적인 여자가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신부로서 구원을 받은 성도를 여자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교회를 여자라 말씀하고 있으며 맨 나중에 교회 안에 들어 왔지만 아직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을 여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성경의 비유를 모르고 성경을 해석하다가는 하나님의 뜻을 저버릴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1:4절을 보면

무릇 남자로서 머리에 무엇을 쓰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요

 

고린도전서의 말씀은 지금 구원 받은 성도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남자는 생리적인 남자라기보다는 구원을 받은 성도를 남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으며 머리에 무엇을 쓴다는 것은 고린도후서 3장에서 모세의 글을 읽을 때 수건이 오히려 그 마음을 덮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구원을 받은 성도가 아직도 그 머리에 율법을 쓰고 있다면 그것은 구원을 욕되게 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구원 받은 자가 아직도 율법 아래 있다면 그것은 구원을 욕되게 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만약 이것을 문자 그대로 해석을 한다면 남자는 모자를 써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런 말씀들을 문자적으로 해석을 하다 보니까 더 이상 성령의 감동을 받을 수 없게 됩니다. 이 남자는 구원을 받은 성도요 구원을 받은 성도가 율법 아래 있다면 구원이 욕된다는 말씀입니다

 

고린도전서 11:7절을 보면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니 그 머리에 마땅히 쓰지 않거니와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니라

 

구원 받은 성도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구원을 받은 성도는 더 이상 율법 아래 있지 않는 것이 마땅하다는 말씀입니다 고린도전서 11장의 남자와 여자가 왜 영적인 의미인가를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이 남자는 생리적인 남자와 여자를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당연히 구원 받은 성도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라는 것에는 더 이상 이의를 제기 하지 않을 것입니다 문제는 그 다음 말씀입니다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니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씀이냐면 교회 안에서 구원 받은 성도를 통해서 구원 받지 못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되고 그 복음을 받아들여 구원을 얻게 되면 그 사람에게 영광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남자와 여자는 교회 안에 있는 구원받은 자와 구원 받지 못한 자를 사도 바울은 남자와 여자로 말씀을 하고 당연히 구원을 받은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구원 받은 자를(남자) 통해 교회 안에 아직 구원을 받지 못한 자(여자)가 구원을 받게 되면 구원을 먼저 받은 자에게 영광이라는 말씀입니다

 

누가 누구를 가르쳐야 하겠습니까?

구원을 받은 자는 다른 사람에게 구원을 전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구원을 받지 못한 자는 다른 사람에게 구원을 전달할 수 없다는 것을 여러분이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왜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 되는 가를 이제 여러분이 이해를 조금 하실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아직 영생을 얻지 못한 자가 남자를(구원을 받은 자) 통해서 영생을 얻었다면 그것 보다 더 큰 영광이 어디 있겠습니까? 생명은 생명이 있는 자만이 전달할 수 있습니다 생명이 없는 것은 아무리 귀한 것이라 해도 자기와 똑 같은 생명을 탄생 시킬 수 없습니다. 다이아몬드가 아무리 귀하다 해도 똑 같은 다이아몬드를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찮은 들꽃이라도 생명의 씨가 있으면 내년에는 자기 보다 더 많은 숫자의 생명을 탄생 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남자는 생명을 가진 자이기 때문에 그를 통해 여자(아직 구원 받지 못한 자)가 구원을 받게 되면 남자에게 영광이 돌아간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도 이 말씀을 생리적인 남자와 여자로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디모데전서의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생이 없는 자가 아무리 가르쳐 보아야 다른 사람에게 영생을 가르쳐 줄 수 없습니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그 말씀을 여자와 남자로 비유를 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구원 받지 못한 자가 구원받은 자를 가르친다는 것을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런 일을 금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마음에 있습니다. 더구나 성령을 받지 못한 사람은 그 사람이 믿음이 있는지 없는 지를 분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만약 교회 안에서 믿음이 없는 자가 가르친다면 그 교회는 모두 멸망의 길로 접어들고 말 것입니다

 

성경은 심오합니다.

그것은 사람의 지혜로는 깨달을 수 없습니다. 오직 성령이 오셔야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믿을 수 있으며 그가 바른 믿음 위에 섰는가를 분별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단지 남자라는 이유만으로 보이는 겉모습의 조건으로 목사가 된다면 그것은 세상 종교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2:13절을 보면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사람의 생각으로 성경을 해석하려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아무리 노력을 한다 해도 하나님의 일을 도저히 깨달을 수 없습니다. 사람의 생각이 아닌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을 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남자라고 한다고 무조건 생리적인 남자로 생각한다면 그것을 사람의 지혜로 가르치는 것입니다

 

신령한 것은 세상 것과 다릅니다.

이 세상 모든 종교를 보시기 바랍니다.

천주교도 그렇고 불교도 그렇고 이슬람도 그렇고 모두 생리적인 남자와 여자를 차별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의 지혜입니다. 그들에게는 구원이 없기 때문에 구원 보다는 세상 적으로 우월한 남자가 권위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모든 세상 종교입니다 우리나라 유교도 다를 것이 없습니다.

 

기독교는 세상 종교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세상의 지혜로는 도저히 깨달을 수 없게 기록해 놓았습니다. 오직 성령이 임한 성도만이 그것을 깨달을 수 있으며 신령한 것을 분별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구원이 없는 종교는 외적인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구원의 종교는 외적인 것보다는 내적인 것이 더욱 더 중요하다는 것을 여러분이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신령한 것이 없는 사람이 어떻게 신령한 것을 가르칠 수 있습니까? 생리적이 남자냐 여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구원을 줄 수 있는 신령한 것이 있느냐 없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신령한 것이 없는 남자가 여자를 가르치는 일은 더욱 더 나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과연 그것을 기뻐하시겠습니까?

 

어느 것을 기뻐하시겠습니까?

겉모습의 조건의 갖춘 남자가 구원과는 상관도 없이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을 기뻐하시겠습니까? 남자냐 여자냐 그것을 상관하지 않고 구원을 받은 성도가 구원을 전달할 수 있는 것을 기뻐하시겠습니까? 남자냐 여자냐를 논하는 것은 한 마디로 하늘의 신령한 것은 전혀 깨닫지 못하고 그저 보이는 모습을 보고 판단을 하는 율법주의 적 사고에서 나온 발상입니다

 

구역 예배도 드리지 말아야 합니다.

여자는 일절 순종함으로 배우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여자는 여자를 가르쳐서도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도 구역장을 두고 여자가 가르치게 하고 있습니다. 과연 그들이 성경 말씀에 순종을 하는 자들입니까? 하지 말아야 하면 모두 다 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느 것은 해도 되고 어느 것은 해서는 안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순전히 자기들의 편리에 따라 판단하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구약 시대가 아닙니다.

그리고 보이는 그런 제사장 시대가 아닙니다. 구약에 제사장이 남자라서 목사가 남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을 하는 것은 자기가 마치 이스라엘 사람으로 착각을 하고 있는 것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이스라엘이 아니라 이방인입니다

 

지금은 성령의 시대입니다

육적으로 보이는 그런 시대가 아니라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시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구약은 그림자입니다 그 그림자를 보고 마치 실체처럼 생각을 한다면 그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이스라엘은 반드시 레위 지파의 아들이 제사장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레위 지파도 아니고 이스라엘도 아닙니다. 그런 논리라면 이방인은 남자건 여자건 아무라도 가르쳐서는 안 됩니다.

 

내 신분이 누구인가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베드로전서 2:9절을 보면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남자만 택했습니까?

그럼 이 세상 모든 여자는 버림을 받았습니까? 성도는 남자냐 여자냐를 따지기 이전에 모두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 성도는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남자만 성도입니까? 아니면 여자도 성도입니까? 여자가 가르쳐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남자만 성도라고 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구원 받은 자는 여자건 남자건 모두다 성도요 왕 같은 제사장 들입니다

그 왕 같은 제사장들이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이냐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해야 하는 책무가 주어졌다는 것을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이것은 남자만 하는 일이 아닙니다. 성도라면 누구라도 이 일을 해야 왕 같은 제사장이라 부를 수 있습니다.

 

왕 같은 제사장은 누구라도 그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해야 합니다.

그것이 여자라서 제한을 둔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사역을 방해하는 일이 되고 말 것입니다 여자라서 교회 안에서 가르치지 못한다면 여자는 성도가 될 수 없고 또한 그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해서도 안 됩니다

 

전도도 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해서도 안 됩니다

그런데 교회에서는 여자들에게 전도를 독려하고 있습니다. 아니 전도를 못 하면 마치 죄를 진 사람처럼 오히려 핀잔을 주고 공격을 하고 있습니다. 만약 가르치지 말아야 한다면 여자는 전도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도는 가르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모두가 제자가 되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해야 합니다. 그것이 여자라서 제한을 받는다면 여자의 구원을 부정하는 이단적인 사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자를 차별하시지 않았습니다.

 

이미 구약에서 드보라 사사가 있었습니다.

사사기4:4절을 보면

그 때에 랍비돗의 아내 여선지 드보라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었는데

 

사사가 어떤 존재인가를 제가 말씀을 드리지 않아도 잘 아실 것입니다 사무엘도 사사입니다 드보라는 사무엘과 같은 존재였다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전체를 가르치던 사사였습니다. 만약 생리적인 여자가 남자를 가르치는 것을 금한다면 드보라는 사사가 될 수 없습니다.

 

사사는 하나님께서 세우십니다.

하나님께서 생리적인 여자인 드보라를 사사로 세워서 이스라엘을 이끌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시대에 여자가 목사가 될 수 없다는 어리석은 주장을 하면서 남성 우월 주위에 빠져 있는 한심한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또한 율법주의에서 나온 것임을 여러분이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를 가르치면 둘을 알아야 합니다.

지혜로운 성도는 하나를 가르치면 둘을 압니다. 그러나 미련한 자는 하나를 가르치면 그 하나에 집착을 합니다. 집사나 목사나 다를 것이 없습니다. 마치 목사가 특별한 존재인 것으로 오해를 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디모데전서 3장에 먼저 목사에 대해서 남자의 예로 말씀을 하고 난 이후에 집사는 남자와 여자를 다 설명을 한 것입니다

 

목사도 마찬가지라는 말씀입니다

목사냐 집사냐 하는 것은 하나의 직분입니다 우리는 이미 왕 같은 제사장이 되어 있는 상태에서 그런 영적인 존재이면서 이 세상에서 교회를 든든히 세우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의 터 위에 세우기 위해 집사를 세우고 목사를 세운 것이지 목사가 뭐 특별한 존재나 되는 것처럼 오해를 해서는 안 됩니다

 

모두 다 왕 같은 제사장 들입니다

하나님의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로서 당연히 남자가 되었든 여자가 되었든 가르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면 가르쳐야 합니다. 그것이 여자라서 가르치는 것을 막는 다면 오히려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자가 되고 말 것입니다 드보라 사사를 하나님께서 세웠는데 사람이 여자라서 안 된다고 할 수 있습니까?

 

세상의 예법, 사람의 법을 따르지 마시기 바랍니다.

먼저 우리는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인가를 바로 깨닫는 자가되어야 합니다. 그 교회에 여자가 정말 성령의 감동을 받아 하나님의 신령한 것을 모두 깨달았는데 단지 생리적인 여자라서 가르치지 못하게 한다며 그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한 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무엇이 중요한 가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모든 세상 사람들이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그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는 일을 남자만 해야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사역을 방해하는 악한 일이 될 수 있습니다 그 일은 남자건 여자건 성도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아니 해야 마땅합니다.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은 교회 안에서 가르쳐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목사라도 안 됩니다 신학을 공부하고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해도 구원을 받지 못한 자가 교회 안에서 가르치는 일을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사역을 방해하는 악한 일입니다 누가 더 악한 자인가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디모데전서 2:13-14절을 보면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이와가 그 후며 아담이 꾀임을 보지 아니하고 여자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음이니라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아담의 갈비뼈를 취해 하와를 지으셨습니다. 참 이런 성경 말씀을 보면서 마치 남자가 여자 보다 우월하다는 어리석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결코 남자가 여자 보다 더 우월하고 여자는 열등하다는 것을 말씀하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로마서 5:14절을 보면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 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창세전에 미리 예정한 자들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아담을 짓고 하와를 지은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우리 사람을 창세전에 예정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아담이 잘 나서 꾀임을 안 받은 것이 아니라 오실 자의 표상이기 때문에 하와가 먼저 죄를 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여러분이 깨달아야 합니다. 여자가 열등해서 죄를 진 것이 아니라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기 때문에 먼저 죄를 질 수 없었습니다. 쉽게 말씀을 드리면 아담은 선악과를 따 먹으면 반드시 죽는 다는 것을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들었습니다.

 

오실 자의 표상이라는 것은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아담에게 주니까 아담은 그것을 안 먹을 수도 있었지만 내 뼈 중에 뼈요 내 살 중에 살 같은 하와를 너무도 사랑해서 그것을 받아먹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죄인인 우리를 위해 굳이 죄 없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실 필요가 없음에도 십자가를 지셨다는 말씀입니다

 

아담이 하와를 자기 생명처럼 사랑한 것같이 예수 그리스도도 우리를 자기 생명처럼 사랑하셔서 십자가에서 스스로 죽으셨습니다. 아담이 하와의 선악과를 받아먹고 스스로 죽은 것 같이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우리 죄인들을 위해 스스로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시고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지 아담이 하와 보다 더 월등해서 죄를 안 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여러분이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 인생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여자입니다 아담에게 하와라는 말씀입니다 내가 생리적인 남자라 해서 마치 자기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아담이라고 주장한다면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거절하는 사람입니다 우리 인생 모두는 남자나 여자나 모두 다 하와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으면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이면서 복음에 있어서는 세상 사람에게 있어서는 아직 복음을 깨닫지 못한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남자라는 말씀입니다 그 남자는 여자를 위해 하와를 위해 자기 목숨까지도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기가 복음을 위해 자기 생명 까지도 하찮게 여긴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남자의 의무입니다

정말 아직 믿음의 비밀을 깨닫지 못한 교회 안에 들어온 자들을 위해 아담과 같이 죽어줄 심정을 가지고 있는 것이 바로 성도입니다 그것은 남자라서 가능한 것이 아니요 여자라서 불가능한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을 받는 성도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교회 안에는 아직 믿음의 비밀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저 예수 믿는다고 고백한다고 예수 믿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에 대해서 구약부터 신약까지 아주 잘 알아야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아야 가능한 일입니다 그런 남자가 교회 안에서 가르쳐야지 단지 겉모습의 판단에 의해 생리적인 남자라야 교회에서 가르칠 수 있다면 하나님의 사역을 방해하는 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안에 구원 받은 성도는 오실 자의 표상입니다 그런 성도는 아직 복음의 비밀을 모르는 교회 안에 있는 여자(아직 믿음의 비밀을 몰라 구원을 못 받은 사람)를 자기 생명처럼 사랑해야 하는 책임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을 위해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하셨습니다.

남자만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하신 것이 아니라 여자도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하셨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만약 그것을 부정한다면 그는 이단적인 사상을 가진 자입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여자라 해도 믿음의 비밀을 가지고 있으면 교회에서 가르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디모데전서 2:15절을 보면

그러나 여자들이 만일 정절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

 

여자가 해산을 해야 구원을 얻습니까?

이 말씀은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거듭난다는 말씀입니다 구원을 받은 성도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문자적으로 해석을 하면 해산하지 못하고 죽은 여자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 됩니다. 그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보다도 여자는 해산하는 것이 더 중요하게 됩니다.

 

성경을 해석하는데 있어 저도 먼저 문자적으로 살펴봅니다.

그러나 그 문자적인 것이 이성적으로 도저히 앞뒤가 맞아 떨어지지 않으면 그때는 영적인 것으로 해석을 해야 합니다. 문자적인 것이 꼭 옳은 것도 아니요 영적인 해석이 꼭 옳은 것도 아니요 바른 해석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거절하는 해석이 나와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문자적이냐 영적이냐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같은 말씀이라도 문자적으로도 그리고 영적으로도 해석을 해야 하며 어느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더 풍성히 전할 수 있는 가를 우리는 늘 고민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디모데전서는 그런 면에서 볼 때 영적인 해석이 바르다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남자와 여자는 생리적인 남자와 여자가 아니라 구원 받은 자와 아직 교회는 나왔지만 구원의 비밀인 믿음의 비밀을 깨닫지 못한 자입니다

 

사도 바울은 먼저 그 기준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난 이후에 목사를 세우는 것을 3장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3장에 감독을 세우는 일에 남자의 예만 들었다 해서 꼭 남자만 되어야 한다고 한다면 그것을 2장의 말씀을 또 뒤집는 이상한 논리가 전개되어 성경을 성경으로 믿을 수 없게 만든다는 것을 여러분이 깨달아야 합니다.

 

모든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이 되어 있습니다.

예수가 중요한 것이지 우리 눈에 나타나는 모습을 보며 이것이 맞다 이것은 틀리다 하는 것은 아직 영적인 사람이라 말할 수 없다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지금은 성령의 시대입니다 성령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믿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 시대를 살면서 아직도 율법적인 눈에 보이는 것으로 판단을 해서 여자는 목사를 세워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하는 것은 아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지 못한 증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기를 원하십니다.

그렇다면 여자가 되었든 남자가 되었든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는 교회 안에서 가르쳐야 하는 책임이 있습니다. 그것이 성도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직분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여자라서 그 일을 못하게 한다면 그는 하나님의 사역을 방해하는 악한 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성령께서 여러분들을 감동하여 주실 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