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니라(요6:63.)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약속이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

로마서 강해 -

로마서 강해 144강, 우리 성도입니다

윤주만목사 2018. 11. 26. 05:38


로마서14:9절을 보겠습니다. (258)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니라

 

우리 성도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를 세상에 두셨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성도들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이루신 구속의 일이 역사를 하게하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가 있음으로 해서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구속의 일이 세상에 전해지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구원입니다

우리에게 이 구원이 없다면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구원이 성도 안에서 역사를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역사를 하고 있는 성도들은 그것을 세상에 증거를 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를 하고 있고 그것을 세상에 증거하고 있는 성도는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왜 삽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받기 위해서입니다. 그렇게 구원을 받기 위해서 살아가고 있는 그것을 사도 바울은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다시 말하면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이루신 구속의 일을 이루기 위하여 살고 있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구원을 받기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이 구원을 너무 쉽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아니 교회 안에 있으면 그 안에서 무엇을 해도 구원을 받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거대한 종교는 구원을 그렇게 받는 것과 같이 사람들을 미혹하고 있고 거의 모든 사람이 거기에 다 넘어가고 있습니다.

 

자기들의 교회 안에 있습니다.

그 자체가 주를 위하여 살고 있다고 생각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하나님을 믿지 않고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과 비교를 하면 분명히 그들의 주장이 맞습니다. 로마서 14장을 보면서 자기들이 주를 위하여 살고 주를 위하여 죽는다는 것을 의심할 필요가 없고 이 말씀을 다시 생각해 볼 필요도 없습니다.

 

교회 안입니까?

그것은 늘 말씀을 드리지만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와서 광야에서 생활을 하고 있는 상태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통해서 예표를 보여 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의 다수가 애굽에서 나왔지만 그 다수를 기뻐하시지 않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교회 안에 있는 거의 모든 사람이 광야에서 죽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그들이 광야에서 죽었습니까?

저희가 믿지 않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 시대는 교회 안에만 있으면 자기들이 믿고 있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행위에 열심을 내면서 죄를 짓고 있는 그들이 아니 죄의 법을 섬기고 있는 그들이 사람의 이성을 따라 생각하면서 믿고 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주를 위하여 삽니까?

교회에 나와서 주일을 지키고 십일조를 내고 하는 행위를 하는 것이 주를 위하여 사는 것입니까? 그것은 주를 위하여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행위로는 성령을 받을 수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고 성령을 받지 않으면 그의 안에 성전이 지어지지가 않고 있기 때문에 주를 위하여 살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의 안에 성전이 지어져야 합니다. 성령이 오심으로 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이루신 구속의 일을 알아 믿어야 그의 안에 성전이 지어진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감동을 받아 진리로 인도함을 받은 성도만이 성전이 지어지고 있고 그런 성도만이 주를 위하여 산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주를 위하여 죽습니다.

왜 주를 위하여 죽습니까?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이루신 구속의 일이 이루어지게 내가 죽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성도는 죽었습니다. 더 이상 산자와 같이 살아가지 않고 있고 교회 안에서 율법의 행위를 하지 않고 있습니다.

 

성도는 죽습니다.

그냥 막연하게 죽는다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이루신 구속의 일이 내 안에서 역사를 하게 하기 위해서 죽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내가 죽어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속의 은혜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죽지를 않고 있습니다.

아니 말로는 다 죽었다고 큰 소리를 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죽는 것이 무엇인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자기들이 이 세상에 살던 때와 같이 그렇게 살지 않고 이제 교회에 나와서 율법을 잘 지키고 사는 것을 보면서 죽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말씀의 의미를 전혀 모르고 사람의 이성을 가지고 죽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모릅니다.

어떻게 죽어야 하는 줄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그런 그들이 교회 안에서 신앙생활을 잘하는 모습을 보고 죽었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 그들이 율법을 아주 잘 지키고 있습니다. 그렇게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 인하여 도리어 산다는 것을 모르고 교회는 점점 더 율법주의로 빠져 들어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주를 위하여 죽으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이루신 구속의 은혜를 내 안에서 이루기 위해서 죽으라는 말씀입니다 제가 이렇게 말씀을 드려도 성령의 감동을 받지 못하고 있는 사람은 절대로 깨달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 그들이 주를 위하여 죽는다는 그 말씀을 보고 죽기 위해서 율법을 더 잘 지키고 있는 우를 범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습니다. 왜 이렇게 살고 있는가 하면 우리는 주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육체가 주님의 것이라는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님에게 주신 자가 주님의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육이 있습니다.

그리고 영이 있습니다. 우리 육이 주님의 것이 아니라 영이 주님의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영이 우리 안에 거하게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육이 죽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사나 죽으나 주님의 것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살아도 주를 위해서 살아야 하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주님의 것입니다

우리 육체가 주님의 것이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 육체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음으로 해서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거하시고 그 영이 주님의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영이 주님의 것이 되게 하기 위하여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구속을 이루시고 부활을 하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다가 살아나신 것은, 죽은 사람에게도 산 사람에게도, 다 주님이 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영생입니다

성경은 이것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영생을 얻기 위해서 성경을 상고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기 위해서 성경을 보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왜 이 세상에 오셨는가를 모르면서 그저 감성에 빠져 종교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영생만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다른 것을 생각하는 사람은 반드시 사망의 길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성도는 이제까지 영생을 사모하면서 복음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해서 살았고 또 죽어도 주를 위해서 죽었습니다. 왜 이렇게 했는가 하면 우리 안에 주님의 것인 그리스도의 영이 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의 것입니다

무엇이 주의 것입니까? 우리가 그렇게 살고 죽음으로 해서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거하시고 있습니다. 이 영이 주님의 것이고 이것을 위해서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을 위해서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죽었다가 살아나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리고 삼일 만에 부활을 하셨습니다. 왜 이렇게 하셨는가 하면 우리가 주님의 것이 되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신령한 부활의 형상으로 변하는 영의 비밀이 이루어지게 하기 위해서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죽었다가 살아나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10:20절을 보겠습니다. (263)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이를 위하여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것이 되게 하기 위하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주님께서 이루신 일을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그저 감성에 빠져 교회에 나와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것으로 자기들이 구원을 받은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다른 것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왜 이 세상에 오셨습니까? 그리고 주님께서 왜 이 세상에 오셔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습니까? 그것을 모르고 성경을 본다는 것은 너무도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물론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다 이것을 안다고 하지만 그들이 안다고 하는 것은 그저 사람의 이성을 따라 누구나 알 수 있는 그런 정도의 지식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주의 것입니다

우리 육체를 말씀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우리 육체로는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습니다. 왜 그렇게 하고 있는가 하면 우리가 주의 것이 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 육체가 주의 것이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거하심으로 말미암아 그 영이 주의 것이 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시기 바랍니다.

영의 비밀을 알아야 한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안타깝게도 이 영의 비밀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이것에 대해서 알라고 하면 심지어는 목사라는 사람들까지 알아야 구원을 받을 수 있느냐고 하면서 따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뭐라 합니까?

교회에 나와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데 왜 이런 어려운 말을 하면서 그것을 알아야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과 같이 이야기를 하느냐고 따지고 있습니다. 그 목사라는 사람이 얼마나 영의 비밀에 대해서 무지한 가를 스스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모르면서 믿는다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을 합니까?

 

성경을 모릅니다.

솔직히 말씀을 드려서 무지에 가깝다고 해야 합니다. 그런 그들이 제가 영의 일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면 그것을 깨달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어렵다고 하면서 이 말씀을 모르면 구원을 받을 수 없느냐고 하면서 따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영의 일도 모르고 어떻게 믿을 수 있고 그가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이를 위하여 입니다.

그러면 이가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전혀 모르면서 뒤에 있는 말씀의 문자만 보고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사셨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먼저 앞에 있는 말씀을 알아야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았다는 그 말씀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성경을 너무 편하게만 보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의 것입니다

우리가 먼저 주의 것이 되어야 합니다. 막연하게 주의 것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이루신 구속의 일이 우리 안에서 이루어 져야 주의 것이라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구원을 받은 성도만이 주의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를 위하여 살지도 않고 주를 위하여 죽지도 않은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것이 되기 위하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위하여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하셨는가 하는 것을 히브리서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휘장 사이로 난 새롭고 산 길을 열어 주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주를 위하여 살고 있습니다.

또 죽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도 이것을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었다가 다시 사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히브리서에서는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휘장에 대해서는 이미 성막론에서 말씀을 했습니다.

 

저의 육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 이 휘장이 찢어 졌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갈 수 없지만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새롭고 산 길을 열어 주심으로 해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갈 수 있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구원을 사모 합니까?

영생을 얻기를 바라고 있습니까? 그것은 우리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역시 살아도 주를 위해서 살아야 하고 또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어야 합니다. 이렇게 함으로 해서 우리가 주의 것이 되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영생을 받게 하기 위하여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믿는다고 하는 것이 막연함이 되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그러나 목사라는 사람들까지도 너무 막연하게 믿고 있습니다. 그저 자기들이 교회에 나가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그들이 성경에서 말씀을 하고 있는 영에 일은 조금도 깨닫지를 못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살으셨습니다.

교회 안에서 이것을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까? 다 안다고 하고 있습니다. 실상은 이 시대는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살으셨는가도 모르면서 성경의 문자만 보고 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육체로 살았는지도 영으로 살았는지도 모르면서 성경을 보고 죽었다가 살았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모릅니다.

그런 그들이 이를 위하여라는 말씀을 알 수 있습니까?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는다는 말씀도 모르는 그들이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것을 모르니까 우리가 주의 것이라는 말씀도 깨달을 수 있는 지혜가 없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인들입니다

너무 막연합니다. 그 뜻의 의미를 모르니까 성경의 문자를 보고 초등학생이 아는 지적인 능력을 가지고 자기들이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는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왜 그런 말을 할 수 있는가 하면 세상과 비교를 해보면 자기들은 교회 안에서 너무도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 있게 말을 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을 드립니다.

우리도 영생을 얻기를 위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하고 있는가 하면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있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고 있습니다. 그것이 내 육체의 행위를 통해서 나타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율법의 행위를 버리고 있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구원을 받기 위해서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거하심으로 주의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구원을 받기 위해서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주님께서 죽었다가 다시 사심으로 해서 우리가 휘장 안으로 들어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새롭고 산 길입니다

그 길로 우리는 반드시 들어가야 합니다. 그 길을 어떻게 들어갈 수 있는가 하면 이 휘장이 저의 육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휘장이 주님의 육체인데 언제 이 길이 열려졌는가 하면 주님께서 죽으실 때 이 길을 열어 놓으시고 부활을 하심으로 해서 그에게 붙은 자가 되어서 우리가 그 길로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2:21절을 보겠습니다. (379)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이를 위하여

우리가 주의 것이 되는 것을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사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주의 것이 되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저 막연하게 자기들이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주의 것이 된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영생입니다

이 영생은 영의 일입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이 영생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어느 정도 모르는가 하면 그리스도편지에 있는 말씀을 목사들이 보고도 도무지 무슨 말씀을 하고 있는지를 모르고 어렵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왜 어렵습니까?

주를 위하여 사는 것을 모릅니다. 그리고 주를 위하여 죽는 것도 모릅니다. 또한 어떻게 주의 것이 되는지도 모르고 있습니다. 아니 이 모든 것을 안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실상은 아무 것도 모르면서도 성경의 문자를 아는 것으로 자기들이 알고 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탄식이 나오고 있습니다.

제가 이 시대 기독교인들과 대화를 할 수 없습니다. 그들과 일일이 대화를 하기에는 너무 시간이 없습니다. 그리고 제가 하는 일에 있어서 시간을 빼앗기는 것이 아깝기만 합니다. 그것을 모른 척 하고 있자니 가슴이 답답하기만 하고 또 그것을 일일이 대꾸를 하자니 제게 주어진 시간이 너무 부족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 시대는 성경의 문자를 보고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어느 정도인가 하면 이스라엘은 예수 그리스도를 몰라서 버림을 받았고 자기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서 아주 잘 믿고 있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 정도의 생각을 하고 있는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있습니까?

그가 왜 이 세상에 오셨는가를 아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왜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죽었다가 살으셨는가를 아시기 바랍니다. 초등학생들이 이야기를 하는 것과 같이 말하지 마시고 그가 왜 죽었다가 살으셨는가를 정확하게 아시기 바랍니다.

 

영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 그 자체입니다 주님이 아니고는 어느 누구도 생명을 얻을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고 또 다시 살아나셔서 이 생명을 은혜로 주시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을 위하여 죽으시고 또 살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선을 믿을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 선을 믿음으로 해서 우리에게 선하신 이의 생명이 거할 수 있게 역사를 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위하여 우리가 부르심을 받았고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우리에게 본을 보이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모릅니다.

주님이 왜 죽었다가 다시 사셨는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의 것이 되게 하기 위해서 주님이 그렇게 하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의 것이라는 이 말씀의 의미도 모르고 자기들의 육체를 보면서 주의 것이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어떻게 합니까?

주의 것이라는 것을 보이기 위해서 율법을 열심히 지키고 있습니다. 주의 것이 되려면 선을 행해야 하는데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악을 행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니 자기들이 교회 안에서 하고 있는 행위가 선인가 악인가도 모르면서 종교라는 거대한 힘에 의해서 이성을 상실한 체 끌려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고린도후서13:4절을 보겠습니다. (300)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으셨으니 우리도 저의 안에서 약하나 너희를 향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저와 함께 살리라

 

우리가 주의 것입니다

성경은 계속해서 영생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는 이 영생을 소망하고 있습니다. 늘 말씀을 드리지만 이 영생이 없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이 영생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늘 생각하고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쉽게 생각합니다.

그것은 우리 성도가 받을 영생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말씀을 하고 있는 영생을 알고 있는 성도는 우리가 받는 영생이 얼마나 귀한 것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 영생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해서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서 죽고 있습니다.

 

영생을 위하여 입니다.

우리 성도가 영생을 받게 하기 위하여 주님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가 아버지께로서 주신 자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주님이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것이 되기 위하여 주님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사람들은 성경을 보고도 이 영생을 쉽게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입니다 이 두 사건이 있음으로 해서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만약에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죽지 않고 또 부활을 하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도 영생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어도 그저 문자를 아는 것으로 그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 세상에 오셔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습니다. 만약에 이 사건이 없다면 우리에게 영생은 없습니다. 그것을 고린도후서에서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으셨으니 우리도 저의 안에서 약하나 너희를 향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저와 함께 살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으셨습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해당이 됩니까? 성경은 분명히 하나님의 능력으로 저와 함께 살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살으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살으신 것과 같이 우리도 역시 살리시기 위해서 주님께서 죽었다가 살으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살으셨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어떻게 살으셨는가를 아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이 말씀도 그저 문자를 아는 것으로 사람들이 앵무새와 같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떻게 살으셨는가를 모르니까 우리 역시 어떻게 사는 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이 시대 기독교인입니다

영의 일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성경의 문자를 보고 주님께서 죽었다가 살으셨다고 하니까 그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영으로 살으셨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막연하게 이야기를 하고 있고 그러다보니까 자기들이 어떻게 주님과 함께 살아야 하는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다시 살으셨습니다.

어떻게 다시 살으셨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이 문제는 너무도 중요하지만 사람들은 그저 막연하게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 목사들에게 이야기를 해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막연하게 육체로 다시 살았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고 그렇게 알고 있는 것으로 자기들도 육체로 다시 산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영입니다

주님께서는 영으로 살으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영으로 살으셨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성경에 살으셨다고 하니까 막연하게 살았다는 것으로만 알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으로 살으셨으면 우리 역시 영으로 산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데 이 영의 일에 대해서 듣지를 않아서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들어야 합니다.

영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살으셨다고 하니까 그냥 산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저와 함께 살리라고 말씀을 하니까 성경을 막연하게 보고 살리라고만 생각을 하고 있고 어떻게 사는가를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다시 사는 일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으로는 영으로 사는 것을 이해할 수도 없고 깨달을 수도 없습니다. 이 영의 일은 오직 성령이 오셔서 내 안에서 역사를 해야 그것이 믿음으로 역사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이 다시 사는 것에 대해서 전혀 듣지도 않고 있습니다.

 

바라는 것의 실상입니다

내가 어떻게 다시 사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알아야 믿을 수 있고 그것이 실상이 된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으로는 이해할 수 없지만 성령이 내 안에 오셔서 이 영의 일이 믿어질 수 있게 역사를 하고 있고 그것이 믿음이 되어서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 되어서 내가 주님과 함께 다시 살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를 위하여 입니다.

이 일을 위하여 주님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들이 어떻게 주의 것이 되었는가를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그런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말을 하고 있고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서 주의 것이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영의 일도 모르는 그들이 주의 것이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어느 것이 주의 것입니까?

주와 함께 사는 것이 주의 것임을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주와 함께 무엇이 사는가 하면 육체가 아니라 성령으로 난 영이 산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이 영을 전혀 모르고 있으면서도 자기들이 주와 함께 산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전지전능하신 분입니다 그것을 부정하고자 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능력이 어떻게 우리에게 임하는가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주와 함께 사는 것입니다 주님이 다시 살으신 것과 같이 우리도 그렇게 산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모르면 내가 바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물론 모든 사람이 성경을 보고 영의 일을 다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구원을 하시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영의 일을 알고 있는 사람을 보내어서 복음을 듣게 역사를 하고 있습니다.

 

디모데전서3:16절을 보겠습니다. (339)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 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리우셨음이니라

 

이를 위하여 주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으셨습니다.

우리가 주의 것이 되기 위하여 그러니까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음으로 해서 구원을 받는 것을 위하여 주님이 죽으셨다가 살으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떻게 살으셨는가를 이 시대는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성경입니다

우리는 신학을 배우는 자들이 아닙니다. 늘 말씀을 드리지만 모든 영의 일은 성경에서 찾아서 알아야 합니다. 지금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주님이 살으셨다는 말씀을 너무 쉽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아니 생각도 하지 않고 성경에 문자로 살으셨다고 하니까 그 정도를 아는 것으로 자기들이 복음을 알고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성경이 답을 해 주고 있습니다.

모든 성경은 그 안에서 답을 해주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성경을 그렇게 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보고 있는 그 말씀에서만 답을 찾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절대로 답을 낼 수 없는 것을 가지고 답을 내려고 하다가 성경을 억지로 풀고 있고 그것이 사망의 길로 가게하고 있지만 깨달을 수 있는 지혜가 없습니다.

 

아니 성령이 오시지 않았습니다.

인생의 이성으로는 그것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성경을 거의 문자적으로 보고 있고 성경에서 답을 찾지를 못하니까 이제 감성적으로 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로마서149절의 말씀도 문자를 아는 것으로 막연하게 지나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이 살으셨습니다.

어떻게 살으셨습니까?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어떻게 살으셨는가를 알아야 내가 바라는 것이 믿음이 될 수 있고 그것이 나중에 실상이 되어서 내가 믿는 그대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게 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을 보고도 자기들이 모르면 그냥 쉽게 스쳐 지나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육신으로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그 육신은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정말 이 문제를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면 반발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기들이 처음 들어본 말씀이기 때문에 도무지 받아들이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복음에 대해서 반대를 하고 있습니다.

 

육신은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육신이 다시 사셨습니까? 아마 이 시대 기독교인들 거의 모두가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어떻게 말씀을 하고 있는 가를 알아야 합니다. 디모데전서에서도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 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리우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영으로 살으셨습니다.

그것을 의롭다 하심을 입으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영으로 살으신 것이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게 전파가 되셔서 세상에서 믿은 바 되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성도들이 그 사실에 대해서 믿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살으신 것을 모르고 있다면 그는 부활을 믿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이 부활을 하신 것을 모든 사람들이 다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살으셨는가에 대해서는 모르면서 믿는다고 하고 있다면 그것이 믿는 것이 될 수 있느냐는 말씀입니다

 

세상에서 믿은 바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영으로 사신 바 된 것이 세상에서 믿은 바 되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영으로 사신 것을 믿지를 않고 있습니다.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라고 할 수 있습니까? 절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자기가 믿는 주가 어떻게 부활을 하셨는지도 모르는 그들이 주를 믿는다고 하는 것은 거짓에 불과합니다.

 

믿음입니다.

아는 것에서부터 출발이 됩니다. 모르고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허황된 생각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 영의 비밀을 모르고 있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고 있고 자기들의 진심을 이야기를 하고 있고 마음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내 진심과 마음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내 진심이 중요합니까?

그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살으셨는가 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내가 진심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어떻게 살으셨는가를 모르면 그 진심이라는 것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것을 가지고 진심이라고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너무도 어리석습니다.

 

사람의 진심입니까?

쓰레기와 같다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내가 아무리 진심을 가지고 있으면 뭐 합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믿으면 뭐 합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사신 것을 모르고 있다면 그 진심이 뭐가 되는가를 제가 굳이 말씀을 안 드려도 잘 알고 있습니다.

 

감성에 빠지지 마시기 바랍니다.

믿음이라는 말이 참으로 감성에 빠지기 쉽게 하고 있습니다. 믿음을 모르니까 막연함이 가득하고 그것이 감성에 빠지게 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반드시 아는 것에서부터 출발이 되고 있습니다. 내가 알고 있으면 진심이라고 말할 필요도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알고 있는데 무슨 진심이 필요합니까?

 

내가 압니다.

그 사람이 진심을 이야기를 합니까? 그냥 자기 아는 것을 말하면 됩니다. 아니 내가 아는 그것을 믿으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모르는 사람은 자꾸 진심을 이야기를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진심을 나타내려고 행위로 표현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은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습니다.

죽은 것은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들과 같은 육신으로 오셔서 그 육신이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다시 살으셨습니다. 어떻게 다시 살으셨는가 하면 영으로 다시 살으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세상에서 믿은 바 되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영으로 사신 것을 우리가 믿고 있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우리가 주의 것이 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우리 육신이 주의 것이라는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께 로서 난 자가 주의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는 성령이 오심으로 우리 안에 거하시는 영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주님에게 주신 자가 주님과 함께 다시 산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민수기15:41절을 보겠습니다. (222)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 하여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니라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니라”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습니다.

이렇게 함으로 해서 우리가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의 것입니다 우리 육신이 아니라 우리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의 영이 주의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주의 것이 되게 하기 위하여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산자와 죽은 자입니다

이미 앞에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 해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주가 되려 하심입니다.

우리는 정말 성경을 잘 보아야 합니다. 산 자와 죽은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고 말씀을 하니까 이 문자를 아는 것으로 죽는 자와 산 자의 주가 되셨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로마서에서 말씀을 하고 있는 죽은 자와 산 자가 누구입니까?

 

구원을 받은 사람입니다

어떻게 구원을 받았습니까?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 해서 우리가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 되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또 이렇게 구원을 받은 것으로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죽는 자입니다

그리고 산 자입니다 이 두 사람은 다 구원을 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미리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렇게 구원을 받은 성도들의 주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서 오셔서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일을 누가 이루었습니까?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이루셨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고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이 모든 구속의 일을 다 이루셨습니다. 주님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심으로 말미암아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었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주가 되려 하심이니라

우리는 정말 성경의 의미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어떻게 주가 되셨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고 이 일에 대해서 주가 되려 하심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구원을 하시는 주입니다

그것을 민수기에서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 하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보고도 거의 모든 사람들이 성경을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반포를 하시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 하심이라고 말씀을 하니까 그 율법을 문자 그대로 지켜야 하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이스라엘에게 모든 계명을 기억하고 준행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 앞에 거룩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계명을 기억하고 준행을 해서 하나님 앞에 거룩한 백성이 될 수 있게 하셨다는 것을 율법을 통해서 보여 주시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곧 죽는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니라

이 말씀을 민수기에서는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 하였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나는 너희의 주이며 하나님인데 내가 너희를 구원하는 구속의 일을 다 이루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구원을 하셨기 때문에 자신이 있게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강한 군대가 있는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여 냈습니다. 그 하나님께서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구원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냥 주가 되었다는 말씀이 아니라 그냥 너희의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하는 말씀이 아니라 구원을 하셨기 때문에 주가 되려 하심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주가 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되셨습니다. 누구의 주가 되고 누구의 하나님이 될 수 있습니까? 성경은 영생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고 영생을 얻은 성도들에게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에 나와 있지만 영생을 얻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주가 되실 수도 없고 하나님도 되실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어떻게 되어야 주가 되실 수 있습니까?

우리 성도는 죽은 자와 산 자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어떻게 되시고 있습니까?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심으로 말미암아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일을 믿지를 않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구속의 일을 다 이루었다는 것을 믿지를 않고 있습니다.

 

여호와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니라

참으로 우리에게 확신을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누가 우리에게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라고 말씀을 할 수 있습니까? 설령 누군가가 그렇게 주장을 했을지라도 그가 우리를 구원하지 않았다면 그가 하는 말은 거짓이 되고 만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말씀은 내가 너희를 구원하시겠다는 뜻이 담겨져 있는 말씀입니다

 

주가 되려 하심이니라

어떻게 주가 되시고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심으로 해서 주가 되었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모든 말씀이 우리의 영생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지만 사람들은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시니라는 말씀이 얼마나 우리에게 능력을 주고 있는 말씀입니까? 어느 누가 이런 말씀을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는 모든 구속의 일을 다 이루셨기 때문에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라고 말씀을 할 수 있습니다.


유일하신 하나님입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입니다 평강의 왕이신 하나님입니다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입니다. 우리가 어떤 말을 한다 해도 하나님을 한 단어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런 하나님이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구원의 확신을 주는 말씀이지만 사람들은 하나님을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주가 되려 하심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모든 일을 이루셨습니다. 어떻게 이루셨는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 살리심을 받음으로 해서 우리도 그와 함께 살리심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성경은 구원에 대해서 확신을 주고 있지만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있습니다.

 

전쟁이 나면 어떻게 됩니까?

가장 강한 나라에 가려고 합니다. 지금은 평화가 있는 시대니까 그것을 잘 모르고 있지만 전쟁이 나면 전쟁의 영향을 받지 않는 강한 나라에 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시대 시리아라는 나라를 보아도 그들이 어떻게 하고 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전쟁이 나니까 국민 대부분은 생명을 걸고 안전한 나라로 피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받아줍니까?

물론 받아주는 나라도 있지만 안 받아주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미국 같은 나라에서 그들을 받아준다고 하면 아마도 그들에게는 미국은 은인의 나라와 같이 생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 조건도 없이 미국이 너희의 보호자가 되겠다고 하면 그들이 얼마나 안심을 할 수 있겠습니까?

 

영적인 전쟁입니다

우리는 모두가 사단에게 사로잡혀 있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모르고 살아가고 있지만 실상은 그렇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율법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질 수 있게 율법을 지키셨습니다. 그리고 주가 되려 하심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가슴이 벅찰 수 있는 말씀이지만 사람들은 쉽게 지나치고 있습니다.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자기가 할 수 있는 사람에게는 이것이 은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가 되신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가를 알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가 살아도 주를 위해서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서 죽음으로 해서 이 은혜를 받고 있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로마서14:10절을 보겠습니다. (258)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뇨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그대는 형제나 자매를 비판합니까? 어찌하여 그대는 형제나 자매를 업신여깁니까? 우리는 모두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주가 되려 하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모든 구속의 일을 이루셨다는 뜻에서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누가 우리를 위해서 주가 되어 줄 수 있습니까? 세상의 이성적 상식으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죄인입니다 그리고 악인입니다 우리를 위해서 누가 죽을 수 있고 누가 우리를 위해서 다시 살으심으로 해서 구원을 받을 수 있게 하고 있습니까?

 

은혜입니다

다른 말로는 표현이 안 되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는 자기 자신을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이제까지 로마서를 통해서 우리가 누군가를 말씀을 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가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아니 종교 안에 있을 때는 그것을 몰랐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주심으로 해서 이제는 확실하게 깨닫고 있습니다.


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어떤 은혜로 구원을 받았는가 하면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시고 또 다시 살으심으로 해서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알기 전에는 이것을 잘 몰랐지만 이제는 확실하게 알고 있고 이것은 우리 성도에게 감당할 수 없는 은혜가 되고 있습니다.

 

주가 되려 하심입니다.

누가 우리의 주가 될 수 있습니까? 내가 주님이라고 부른다고 해서 주가 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우리의 주가 되시는 것은 반드시 구원을 받아야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시대는 구원에 대해서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입니다

정말 성경을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도 구원을 받을 수 없는 인생입니다 우리는 체질이 진토입니다 죄를 지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 해서 의를 행할 수 있는가 하면 절대로 그렇지 못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악만 행하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죽어야 합니다.

아니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세상 죄인으로 살아도 구원을 받을 수 없고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을 믿으려고 하니까 아니 하나님을 믿어서 선을 행함으로 해서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 했는데 우리에게는 선한 것이 없어서 악만 행하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를 위해서 살 수 있게 하시고 또 주를 위해서 죽을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시고 주의 것이 되게 하시고 이것을 위하여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구원을 위해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우리 성도들에게 주가 되려 하심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께 영생이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우리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이스라엘을 통해서 보여주시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애굽의 강한 군대에게서 인도를 해 내시고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유일하신 하나님입니다

그 분이 우리의 하나님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우리가 그렇게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구속의 일을 다 이루시고 나는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너희를 끝까지 구원해 주시겠다는 뜻이 담겨져 있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그리고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 여호와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사도 바울이 우리 성도들에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구원을 받은 성도들에게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냐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로마서14장입니다

구원을 받은 성도들의 삶이라고 말씀을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성도입니다 너희가 은혜를 받았는데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냐 어찌하여 내 형제를 업신여기느냐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받은 은혜를 아는 성도는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영의 일을 아는 성도는 절대로 이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창세기9:24-25절을 보겠습니다. (12)

노아가 술이 깨어 그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 이에 가로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노아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잘 알고 있는 그들이 이 말씀에서 의미하고 있는 뜻은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볼 때 늘 그 안에 감추어져 있는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그 의미를 모르고 문자를 아는 것으로 자기가 성경을 알고 있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사람의 생각입니다 성경은 구원에 대해서 의미적으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누구나 알고 있는 말씀입니다

노아의 홍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노아가 포도 농사를 짓고 그것으로 술을 만들어서 먹고 취해서 잠을 자고 있습니다.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아예 술을 마시지도 않고 있고 술을 마시는 것을 마치 큰 죄를 짓는 것으로 생각을 하는데 노아에 대한 말씀만 알아도 그것이 얼마나 잘못되었는가를 쉽게 깨달을 수 있습니다.

 

술을 마십니까?

이것은 죄가 아닙니다. 그리고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과일을 주셨고 그 과일이 숙성을 하면 술이 된다는 것은 자연적으로 알 수 있게 하셨습니다. 고대 사회지만 노아는 포도주를 만들어서 술을 마셨습니다. 이 술을 마신 것을 가지고 논하는 자체가 어리석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씀을 드립니다.

술을 마시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그리고 잘못도 아닙니다. 설령 그가 술에 좀 취한다 해도 그것을 잘못이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본인 스스로가 절제를 해야 하는 일이지 술을 마셨다는 것으로 잘못을 논해서는 안 됩니다 물론 그가 술에 취해서 남에게 불편을 주었다면 그것은 분명히 잘못이라고 할 수 있지만 노아는 술을 먹고 취해서 잠을 잤습니다.

 

노아가 하체를 벗고 잠을 잤습니다.

그것을 함이 보고 그 형제들에게 이야기를 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체를 보이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체를 보이지 않게 가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는데 함은 노아의 하체를 보고 가리지를 않고 형제들에게 이야기를 해서 샘과 야벳에 와서 노아의 하체를 가렸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노아의 방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 안에 있는 사람은 홍수에서 살아났습니다. 그것은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홍수가 나서 방주에 들어간 사람은 모두가 구원을 받은 사람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의미를 잘 알고 성경을 보아야 합니다. 노아의 방주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노아입니다

그리고 샘과 야벳과 함입니다. 이들은 모두가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노아가 술에 취해서 하체를 벗고 잠을 잤습니다. 그것을 함이 보고 샘과 야벳에게 이야기를 했고 두 사람이 노아의 하체를 덮어 주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일을 노아가 알았습니다.

그런데 함을 저주를 하지 않고 함의 아들 가나안을 저주를 하고 있습니다. 가나안은 아무 잘못도 없는데 자기 아버지 함이 노아의 하체를 본 것으로 저주를 받고 있습니다. 왜 노아가 함을 저주하지 않고 가나안을 저주를 했는가 알아야 합니다.

 

방주입니다

구원을 받은 성도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을 하신 사람을 사람이 저주를 할 수 있습니까? 아니 사람이 판단을 할 수 있습니까? 그것이 안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만약에 여기서 노아가 함을 저주를 하면 어떻게 됩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축복을 한 함을 저주를 하는 일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안 됩니다

아무리 그가 노아라 해도 함을 저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가나안은 저주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정말 함과 가나안을 잘 생각을 해야 합니다. 함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가나안은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은 사람이 아닙니다.

 

함은 하나님이 구원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가나안은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아무리 노아라 해도 하나님이 구원을 하신 함을 저주를 할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구원을 받지 못한 가나안은 저주를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저주를 하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서 비유를 통해서 우리에게 하나님이 구원을 한 함을 저주할 수 없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로마서14장입니다

구원을 받은 성도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해서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서 죽습니다. 그렇게 함으로 해서 우리가 구원을 받아 주의 것이 되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자가 되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구원을 받은 성도를 판단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은 그 성도를 판단을 하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냐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형제라는 말씀은 내가 구원을 받았으면 그 역시도 구원을 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형제입니다

누구를 형제라고 합니까?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났다고 말씀을 하면서 형제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거룩하게 함을 입었습니다. 나도 거룩하게 함을 입었고 내 형제도 거룩하게 함을 입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그렇게 거룩하게 함을 입은 성도는 형제이며 그 형제를 판단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구원을 받은 성도입니다

그가 악한 일을 하지 않고 있다면 그 어떤 것으로도 판단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먼저 악한 일에 대해서 알아야 이 말씀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악한 일을 하지도 않는데 형제를 판단하고 있다면 그는 스스로 죄를 짓고 있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아니 사도 바울은 형제를 판단하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거룩하게 함을 입습니다.

그것은 오직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심으로 해서 우리가 입고 있습니다. 그렇게 거룩하게 함을 입은 성도가 다른 형제를 판단할 수 있느냐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나도 주를 위해서 살고 있고 그 역시 주를 위해서 살고 있다면 우리가 그를 보고 판단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4:14절을 보겠습니다. (306)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디모데전서4:12절을 보겠습니다. (340)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대하여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

 

형제입니다

로마서에서 분명히 형제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은 사람은 형제입니다 구원을 받은 형제가 모여 있는 곳이 교회입니다 그 교회도 역시 사람이 사는 곳임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형제가 모여 있지만 역시 사람이 사는 곳입니다

 

형제를 판단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형제를 업신여기고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았지만 사람의 본성은 버리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는 분명히 이런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통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교회라 해도 역시 사람이 살고 있기 때문에 형제를 판단하고 있고 업신여기고 있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사람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은 육신의 일이 아니라 영의 일입니다 이것이 영의 일이다보니까 사람의 눈으로 보이는 것과 다를 수 있습니다. 사람은 자연스럽게 눈으로 보고 있고 또 자기 이성을 따라 판단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정말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형제들이 모여 있습니다. 물론 지금은 이렇게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도 모르게 형제를 판단할 수 있고 때로는 우리가 눈으로 보는 것으로 생각을 해서 업신여길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입니다

그가 육체적으로 약했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 약함에 대해서 정확하게는 알 수 없으나 그러나 그가 안질이 심했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그가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 이 안질이 걸림이 될 정도로 심해서 그것이 갈라디아에 있는 성도들을 시험하게 했지만 너희가 업신여기지 않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입니다

처음 이방에 복음을 전하던 때입니다 그때는 실제 육체적으로 많은 능력이 나타났다고 믿고 있습니다. 사도들이 복음을 전할 때 가장 능력이 있게 나타나는 것은 병자의 치유입니다 그런데 병자를 치유하는 그때에 사도 바울은 안질이 아주 심했습니다.

 

그것을 보고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을 할 수 있습니까? 저가 남의 병은 고치면서 왜 자기 병은 고치지 못하는가 하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아니 성경에서 기록이 안 되어 있지만 실제 그런 일이 충분히 있을 수 있습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에 있는 성도들에게 말씀을 하고 있고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가 있었지만 업신여기지 않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이 시대도 역시 제가 복음을 전하면 이런 것으로 많이 업신여김을 받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복음을 들으면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이성을 따라 저를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의 기준에 맞지 않으면 네가 무엇인데 그런 일을 하느냐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름도 모르는 목사입니다

그리고 알려지지도 않은 사람입니다 누군가 저를 이야기를 하면서 성경을 바로 해석을 하고 있다고 전하면 사람들은 실제로 이렇게 대답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아무나 해석을 하면 안 된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그들이 제가 해석한 말씀을 보기라도 했으면 제 마음이 안타깝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업신여기고 있습니다.

저를 보고 자기들이 알고 있다고 하면서 사람의 이성을 가지고 판단을 하면서 네가 누군데 감히 성경을 해석하느냐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듣고 있는 성도들은 절대로 업신여기지 않는데 복음을 듣지도 않는 그들이 사람의 이성을 따라 판단을 하면서 업신여기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이 봤습니까?

그들이 복음을 한편이라도 들었습니까? 단지 자기들의 교회 안에서 들은 이야기를 가지고 또 세상의 이성을 따라 나를 보는 눈으로 판단을 하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솔직히 제가 전하는 복음이 바르다는 것을 믿고 소개를 하는 것은 고맙지만 이제는 그것조차도 부담이 되고 있습니다.

 

사람이 눈으로 봅니다.

그리고 자기들이 이성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 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이방에 복음을 전하러 갈 때 얼마나 고단했는가를 성경을 통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의 형편을 보면 사람들은 요즘 하는 말로 너나 잘하세요. 라고 말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들은 갈라디아에 있는 성도들은 업신여기지 않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복음을 듣고 성령의 감동을 받는 성도는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는다고 믿고 있습니다. 물론 사람이기 때문에 자기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나올 수 있고 그것을 경계하기 위해서 사도 바울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 형제들끼리는 업신여기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육체의 약함을 인하여 업신여김을 받았기 때문에 갈라디아에서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디모데는 연소함으로 인하여 업신여김을 받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디모데는 사도 바울로부터 복음을 듣고 안수를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나이가 적습니다.

어느 사회든 마찬가지입니다 나이가 적은 사람이 가르치다보면 업신여김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더구나 이 복음이라는 것은 성령의 감동이 아니면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전하는 사람도 성령의 감동을 받아야 하지만 듣는 사람 역시도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들어야 합니다. 복음을 받아들이기 전에 사람은 이성을 따라 먼저 판단을 하고 있습니다.


업신여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그런 육체의 것을 보고 판단을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영생을 얻는 그것입니다 혹시라도 이런 것으로 내 형제가 실족을 하게 된다면 그것은 복음을 방해하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었습니다.

우리는 모두가 거룩함을 입은 형제라는 것을 늘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육체를 보는 것이 아니라 이 영을 보고 있습니다. 이렇게 영의 생명을 사모하고 살아가고 있는 성도는 형제를 보고 판단하지도 않고 또 업신여기지도 않고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경계하시기 바랍니다.

성경에 왜 이 말씀을 기록하셨습니까? 분명히 구원을 받은 성도들이지만 이런 사람이 있기 때문에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구원을 받았다고 하지만 역시 육체를 입고 세상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여러 가지 일로 형제를 판단하고 업신여길 수 있기 때문에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3:18절을 보겠습니다. (146)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섭니다.

심판이라고 하니까 어떤 형벌을 받는 것으로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심판은 어떤 일이나 상황, 문제 따위를 자세히 조사하여 잘잘못을 밝히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잘잘못을 밝혀서 잘못을 했으면 형벌을 받게 되지만 여기서 말씀하는 심판은 그런 심판이 아니라 잘잘못에 대해서 밝히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잘 이해를 하시기 바랍니다.

실제 심판을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미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형제를 판단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형제를 업신여기고 있습니다. 구원이 취소가 된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만약에 구원을 받은 우리가 형제를 판단하는 것으로 그리고 업신여기는 것으로 구원이 취소가 된다면 이제까지 전한 복음은 거짓으로 변하고 맙니다. 늘 말씀을 드리지만 성경은 일관성이 있어야 합니다.

 

가정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됩니까? 그런 일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마치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되는 것과 같이 우리는 이러한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심판에 대해서는 이미 결정이 나 있지만 경계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되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심판대입니다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이미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마치 사도 바울은 구원을 받은 그 사람이 형제를 판단하고 업신여기는 일을 하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는 것으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실제 죽은 후에 심판대 앞에 선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은 사람은 이미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우리 성도는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왜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이제 뒤에서 형제를 네 식물로 망케 하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형제를 판단해서 그리고 형제를 업신여김으로 해서 그 형제가 망케 된다면 그 형제는 하나님께 심판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을 받기를 원하시는데 내가 그렇게 함으로 해서 심판을 받는 형제가 있다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는 것과 같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심판대 앞에 서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심판대 앞에 서는 것과 같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요한복음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심판을 받지 않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나를 위해서 이 말씀을 하는 것이 아니라 형제를 위해서 하고 있는 말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