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계1:3.)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119:105)

누구든지 귀가 있거든 들을찌어다(계20:9.)

로마서 강해 -

로마서 강해 146강,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윤주만목사 2018. 12. 11. 07:16


로마서 강해 146

로마서 14:14절을 보겠습니다. (258)

내가 주 예수 안에서 알고 확신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으되 다만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속되니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해서 죽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위해서 다시 살으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이 구속의 일을 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어느 누구도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성경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의 것입니다

우리 육체가 아니라 우리가 주를 위해서 삶으로 해서 그리고 주를 위해서 죽음으로 해서 주의 것이 되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구원을 받은 우리 안에 탄생이 되어 있는 영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구원에 대해서 늘 생각을 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한시도 이 일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입니다

우리가 왜 성경을 보고 있습니까? 그리고 왜 이렇게 어렵게 성경에서 복음을 깨닫고 있습니까? 다 구원을 받기 위해서입니다. 성경은 이 구원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이것을 가르쳐 주고 있기 때문에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알고 성경을 상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이 시대는 성경을 너무 쉽게 보고 있습니다. 아니 성경에서 이 영생을 얻기 위해서 상고를 하지 않고 있다고 하는 것이 더 맞습니다. 영생을 얻기 위해서 이 성경을 상고를 해야 하는데 겨우 몇 번을 보고 성경에서 영생을 얻은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아니 자기들을 가르치는 목사가 수백 번 읽어서 가르쳐 주면 성경을 아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그 목사가 무엇을 가르치고 있습니까? 아니 그 목사가 교인들에게 무엇을 먹이고 있습니까?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을 하고 있지만 목사들은 율법의 행위를 가르치고 있고 실컷 다른 말을 하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한 마디를 하면 사람들은 자기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먼저 복음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제가 이 말씀을 하면 모두가 복음을 듣고 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한 가지라도 하고 있다면 그는 복음을 듣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아니 아직 주의 것이 되어 있지 않은 사람입니다

 

성경을 보면 뭐합니까?

자기가 주의 것인지 주의 것이 아닌지도 모르고 있다면 그는 정말로 불쌍한 사람입니다 아니 로마서13장까지의 말씀을 모르고 14장을 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사람들은 성경의 문자를 보면서 그것을 아는 것으로 자기들이 복음을 전하고 있고 듣고 있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영생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정말 우리 성도들이 구원을 받기를 원하시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 뿐 아니라 이 세상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믿어 구원을 받기를 원하시고 있습니다. 정말 한 사람이라도 버림을 받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냐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셔서 그 형제를 위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는데 네가 어찌하여 그 형제를 판단하느냐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판단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판단을 하는 것이 형제 앞에 부딪힐 것이나 거칠 것으로 형제 앞에 두는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그 형제를 위해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는데 우리가 형제를 판단한다면 그것은 주님께서 이루신 구속의 일을 방해하는 일이 되고 만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부딪힐 것이나 거칠 것을 형제 앞에 두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부딪힐 것이나 거칠 것이 무엇이라는 것은 이미 다 알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하고 있는 정욕에 빠져 있는 행위를 부딪힐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고 율법의 행위를 거칠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아주 사소한 것에서부터 출발이 되고 있습니다. 형제를 판단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형제를 업신여기고 있습니다. 구원을 받은 성도끼리지만 자기 생각과 다르다고 해서 그를 판단하고 업신여기게 되면 그것이 결국에는 어떤 행위로 발전을 하게 되고 또 그것이 율법으로 발전이 되어서 형제 앞에 부딪힐 것이나 거칠 것을 놓게 된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잘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도의 모임이지만 충분히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다시 문상에 대해서 말씀을 하겠습니다. 나는 가볍게 목례를 했습니다. 그런데 누군가는 상주와 절을 했습니다. 그러면 어느 한쪽이 강해지다가 보면 예를 들어서 상주와 절을 하는 것이 성도들의 문상의 예절이 될 수 있고 그것이 결국에는 행위로 발전을 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주의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 판단을 하고 업신여기는 그 일이 나중에는 교회 안에서 당연하게 하는 행위가 되고 그것이 결국에는 법과 같이 그리고 외식과 같이 되어서 부딪힐 것이 되고 거치는 것이 되지 않게끔 주의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런 세심한 것까지도 말씀을 해 주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성도들 앞에는 어떤 행위도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다시 깨우쳐주고 있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형제 앞에 두지 않게 하라고 주의를 하라고 하면 우리는 그렇게 해야 합니다. 성경에서 주의하라고 하면 우리는 반드시 주의를 해야 합니다.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내가 주 예수 안에서 알고 또 확신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무엇이든지 그 자체로 부정한 것은 없고, 다만 부정하다고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부정한 것입니다.”

 

복음입니다

우리가 상상도 할 수 없는 은혜를 주시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들이 구원을 받기를 원하시고 있습니다. 더구나 복음을 듣고 진리 안에서 교제를 하고 있는 성도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가를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이런 말씀까지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주 예수 안입니다

우리는 육체의 인생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실 이 주 예수 안이라고 하는 이 말씀을 잘 이해가 되지 않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육체를 가지고 살아가다보니까 주 예수 안이라는 이 말씀이 현실적으로 다가오지 않는 것이 사실이기도 합니다.

 

구원을 받은 성도입니다

제가 로마서14장의 말씀은 구원을 받은 성도들에게 하고 있는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13장까지는 구원에 대해서 말씀을 했다면 이제 14장은 구원을 받은 성도들에게만 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주 예수 안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는 주 예수 안에서 이 생명에 대해서 알고 있고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많은 것을 알았습니다.

그 중에서 특히 영의 일에 대해서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받는가를 알고 있습니다. 사실 이렇게 안다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고 밖에는 말씀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는 우리는 이 성경을 보아도 소경과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제 다 알고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에 대해서도 알고 또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해서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서 죽는 것을 알고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라는 것 까지도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알기 때문에 우리는 형제를 서로 판단하지도 않고 업신여기지도 않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구원에 대해서 다 알고 있고 확신하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알아야 합니다.

성경에서 복음을 알아야 합니다. 늘 말씀을 드리고 있지만 믿음은 아는 것에서부터 출발이 되고 있습니다. 알지도 못하면서 믿는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사람의 생각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주 예수 안에서 알고 확신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는 이제 다 알고 있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3:28절을 보겠습니다. (306)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구원을 받은 성도입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로마서14장은 이제 복음의 말씀을 다 듣고 믿음으로 해서 구원을 받은 성도들의 삶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 성도들이 교회 안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를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성도의 구원입니다

이것은 오직 예수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만 예수 안에 있지 않다면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주 예수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은 성도들을 말씀을 하고 있고 그런 성도들에게 그리스도인의 삶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안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은 예수 안에서입니다. 그 안에서 우리가 알고 확신하는 모든 것은 무엇이든지 다 자유하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예수 안이라는 이 말씀을 너무 쉽게 생각을 하고 있고 더구나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교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것으로 예수 안에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구원입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이 로마서13장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안에 있다는 말씀은 예수 안에서 알고 확신한다는 말씀은 구원을 받은 성도라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사람이 예수 안에 있는 자가 아니라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은 성도만이 예수 안에 있는 성도가 되고 있습니다.

 

예수 안에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 안에서 알고 있어야 합니다. 어느 것에 대해서 알고 있는가 하면 구원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이 내가 예수 안에서 알고 확신하는 무엇이든지 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예수 안에서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너무 쉽게 보고 있습니다.

이 시대 기독교인들 모두는 다 자기들이 예수 안에 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예수 안에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그것을 예수 안에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이 시대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혀 듣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유대인입니까?

핼라인입니까? 종입니까? 자주자입니까? 남자입니까? 여자입니까? 그런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여러 가지 모양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지만 예수 안에서 하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은 서로 다르지만 예수 안에서 구원을 받은 우리가 다 하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로마서에서는 이렇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예수 안에서 알고 확신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유대인에게 있어서 이방인은 속됩니다. 그러나 예수 안에서는 그가 아무리 유대인이라고 해도 이방인을 보고 속되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입니다

우리는 다 하나입니다 예수 안에서 다 하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 하나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거하시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하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은 것이나 내 형제가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은 것이나 같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안에서 이렇게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하나가 된 성도는 예수 안에서 알고 확신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서로 하나가 되어야지 예수 안에서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 없는데 하나가 되지 못하면 속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먼저 예수 안에 있으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으라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하나가 되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그러나 율법을 지키게 되면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왜 하나가 될 수 없는가 하면 그들의 모양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느끼기 때문에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구원

예수 안에서 받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 안에서를 모르고 있습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이 로마서13장까지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로마서13장까지의 말씀을 듣고 믿은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고 그렇게 옷 입은 성도를 예수 안에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사도 바울은 로마서를 통해서 아주 자세하게 우리가 어떻게 예수 안에 있는가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 안에서 알고 확신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구원을 받은 우리 성도에게는 속된 것이 없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먹는 자입니까?

먹지 못하는 자입니까?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있습니까? 아니면 모든 날을 같게 여기고 있습니까?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습니다. 이 모든 것을 우리가 예수 안에서 알고 있고 확신하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예수 안에서 알고 확신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는데 있어서 문제가 될 것이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었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비록 이방인일지라도 또 종으로 살아가고 있을지라도 예수 안에서 구원을 받은 우리 성도들에게는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 없다는 것을 우리가 알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우리 성도가 그렇게 알고 있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까지 복음을 들었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우리 앞에 부딪힐 것도 없고 거칠 것도 없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우리는 이미 예수 안에서 이 모든 것을 다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디모데후서3:14-17절을 보겠습니다. (346)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네가 뉘게서 배운 것을 알며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빌립보서3:8절을 보겠습니다. (321)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아시기 바랍니다.

그 중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아시기 바랍니다. 예수 안에서 알고 확신을 하면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예수 안에서 알고 있는 것이 거의 없습니다. 아니 성경을 아무리 보아도 하나님의 뜻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알아야 확신할 수 있습니다.

특히 복음을 듣고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시대는 복음을 듣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듣지를 못하니까 알고 싶어도 알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너는 배우고 확신하는 일에 거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이 시대는 전혀 배우고 있지를 않습니다. 그들 나름대로는 배운다고 하지만 아무 쓸모가 없는 아니 백해무익한 것을 배우면서 예수 안에서 알고 있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무엇을 배웁니까?

이 시대는 자기들의 종교생활을 위해서 배우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습니다. 그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사도 바울이 로마서13장까지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자세하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정말 로마서만 바로 알아도 구원을 받을 수 있게 가르쳐 주고 있고 그렇게 알고 확신하는 성도들에게는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배웠습니까?

처음에는 복음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율법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그리고 영의 일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로마서를 통해서 이 모든 것을 아주 자세하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시대는 같은 로마서를 보고 있지만 이 세상 초등학문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구원에 아르는 지혜입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로마서를 통해서 이 모든 것을 알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아는 것을 확신하게 하고 그런 성도에게는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 없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도입니다

이 아는 것에 끊임이 없이 수고를 하고 있습니다. 다 알았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이 육체가 죽을 때까지 아는 것에 힘쓰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청년의 때 동안에 이 아는 것에 힘쓴 성도만이 확신할 수 있고 그런 성도에게는 속된 것이 없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속된 것이 없어야 합니다.

예수 안에서 알고 있는 성도는 속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를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 안에 있다고 하는 그들에게 얼마나 많은 것이 속되어 있습니까? 우리 성도는 하나도 속된 것이 없지만 이 시대 기독교인들에게는 속된 것이 많이 있습니다.

 

왜 속됩니까?

그것은 성경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알아야 하는데 그것을 전혀 모르기 때문에 무엇이든지 다 속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배우고 확신하는 일에 거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바르게 배운 성도는 구원에 대해서 확신할 수 있지만 배우지 못해서 알지 못하는 사람은 확신할 수 없습니다.

 

문자를 아는 것을 자랑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문자를 아는 것을 가지고 안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 머리가 좋은 사람이면 누구나 성경을 보고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아는 것을 가지고 안다고 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 시대를 보면 공부를 잘하는 사람이 목사가 되려하고 있습니다.

 

머리로 성경을 보지마시기 바랍니다.

이 시대 목사들은 머리로 성경을 보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왜 성경에서 성령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는가를 알아야 하는데 자기 머리가 좋은 것을 너무 믿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성령이 오시면 그가 아무리 머리가 나쁘더라도 인도하심에 따라 성경에서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성경을 알아야 합니다.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방법은 없습니다. 우리는 끊임이 없이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또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을 받았다고 해서 우리가 다 알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가 아는 것과 성령을 받은 것은 다를 수 있습니다.

 

성령을 받았습니까?

물론 진리로 인도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은사에 대해서도 말씀을 들었지만 모든 사람이 진리로 인도함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느 사람은 진리로 인도함을 받은 사람이 지혜를 깨달으면 그것을 듣고 진리로 인도함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진리로 인도함을 받은 은사자 역시 늘 깨어 지혜를 구해야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다시 말씀을 드립니다.

성도는 복음을 아는데 힘써야 합니다. 그 아는 것이 확신할 수 있게 역사를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성경에서 알면 속된 것이 없지만 모르게 되면 속되게 여기게 되어 있습니다.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속되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 성경에서 복음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이든지 속되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신명기29:6절을 보겠습니다. (308)

너희로 떡도 먹지 못하며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못하게 하셨음은 주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이신 줄을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잠언20:1절을 보겠습니다. (932)

포도주는 거만케 하는 것이요 독주는 떠들게 하는 것이라 무릇 이에 미혹되는 자에게는 지혜가 없느니라

 

속되다

품위가 낮고 천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속되다는 것은 그것을 성도가 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거룩한 성도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속되다고 하는 것을 할 수 있습니까? 이 시대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바로 술이 아닌가 싶습니다.

 

성경입니다

신명기의 말씀과 잠언의 말씀이 우리가 먹는 술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절대로 그렇지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마시는 술에 대해서 말씀을 한 것이 아닌데도 사람들은 성경을 이 세상 초등학문으로 만들어 버리고 있습니다. 초등학생이 성경을 보는 것과 같이 목사들이 성경을 보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기독교입니다

그래도 자기가 믿음이 있다고 하고 있고 또 천국에 가는 성도라는 것을 보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거의 술을 마시지 않고 있습니다. 왜 마시지 않고 있는가 하면 신명기에서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마시지 말라고 했고 잠언에서는 포도주와 독주에 미혹이 되어 있는 자는 지혜가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술입니다

성경에는 술에 대한 말씀들이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로마서에서도 술취하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고 에베소서에서는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고 말씀을 하니까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술 취하는 것을 아주 속된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어느 정도로 생각을 하는가 하면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술을 먹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술을 먹는 자기를 보면서 어떻게 생각을 하는가 하면 술 취하지만 않으면 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한두 잔 마시는 것은 괜찮은데 술을 취할 정도로 마시는 것은 안 되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고 술을 먹고 싶은 것을 아니 어쩔 수 없이 먹을 때 스스로 위안을 삼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술의 문제입니다

사실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들어올 때의 배경을 조금 알고 있어야 합니다. 기독교는 남한에 먼저 들어온 것이 아니라 북한을 통해서 먼저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일제 강점기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낙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래서 술을 많이 마셨습니다.

그런 우리나라 사람들을 보고 미국이나 캐나다를 통해서 들어온 선교사들이 계몽을 한다고 하면서 그들을 기독교 안에 들어오게 하고 성경을 문자적으로 말하면서 술취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이 술을 마시면 안 되는 것으로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것이 우리나라 기독교의 규례와 같이 되었습니다.

 

100년이 넘게 흘렀습니다.

그런데도 역시 술을 마시면 마치 큰 죄를 짓는 것과 같이 말을 하고 있습니다. 아니 속되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구약의 말씀들을 생각을 하고 있고 또 잠언의 말씀을 보면서 포도주는 거만케 하는 것이요 독주는 떠들게 하는 것이라 무릇 이에 미혹되는 자에게는 지혜가 없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지혜가 있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을 가르쳐 주는 말씀이 아닙니다. 성경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지혜가 있는 말씀으로 보는 사람과 이 세상에서 성도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것으로 보는 사람은 전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신명기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잠언의 말씀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먹는 술로 보는 사람은 어떻게 생각을 합니까? 술을 마시는 것을 속되게 생각을 하게 되어 있고 그 사람에게는 술을 마시는 것이 속됩니다. 그래서 그들은 술을 마시는 사람들을 보면서 속된 행위를 하기 때문에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술을 마시지 않습니다.

왜 마시지 않는가 하면 포도주는 거만케 하는 것이요 독주는 떠들게 하는 것이라 무릇 이에 미혹되는 자에게는 지혜가 없기 때문에 술을 절대로 마시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주 예수 안에서 알고 확신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이 사람은 술 마시는 것이 속되기 때문에 절대로 마실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우리 성도는 신명기의 말씀이나 잠언에 있는 말씀의 포도주나 독주를 사람이 마시는 술로 보지 않고 있습니다. 어떻게 알고 있는가에 따라 술 마시는 것이 누구에게는 속된 것이 되어서 술을 마시지 말라고 하고 있고 누구에게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어서 자유롭게 술을 마시라고 하고 있습니다.

 

술 마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 예수 안에 있는 성도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포도주와 독주의 의미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술이 우리가 구원을 받는데 있어서 아무 영향을 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 초등학문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은 술 마시는 것은 지혜가 없는 자가 하는 일이기 때문에 마실 수 없습니다.


속됩니다.

성경을 모르면 술 마시는 일이 속됩니다. 그러나 그 말씀의 의미를 알고 있는 우리 성도에게는 전혀 속되지가 않고 있습니다. 비단 술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제사 음식도 먹지를 않고 있습니다. 제사 음식을 먹으면 마치 자기들이 우상을 숭배한 것과 같이 생각을 하고 있어서 먹지를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우리에게는 전혀 속되지가 않고 있습니다. 성경을 모르게 되면 무엇이든지 다 속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알면 무엇이든지 속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같은 성경을 보고 있지만 어떻게 성경을 보느냐에 따라 무엇이든지 속되다고 할 수 있고 무엇이든지 속되지 않다고 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에베소서5:18절을 보겠습니다. (315)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대표적인 말씀입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는 이 말씀 때문에 더욱 더 사람들은 술 마시는 것을 마치 큰 죄를 짓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성경을 얼마나 무식하게 보고 있는가를 알 수 있는 대표적인 말씀이기도 합니다.

 

술 마시는 것만 방탕합니까?

사전에서 방탕하다는 뜻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주색잡기에 빠져 행실이 좋지 못한 것을 가지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방탕한 것이 무엇인가 하면 술을 마시는 것과 색을 탐하는 것과 도박을 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술 취하는 것 한 가지를 가지고 말씀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에베소서5장을 보시기 바랍니다.

무엇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마시는 술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도리어 음행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쉽게 말씀을 드리면 사도 바울은 음행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다가 술 취하지 말라고 하면서 삼천포로 빠지는 말을 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뜬금없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마시는 술에 대해서 앞에서 어떤 언급도 없다가 갑자가 뜬금없이 술 취하지 마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고 말씀을 하고 있는데 이 성경을 보고 사람들은 마치 마시는 술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무지입니다

지독한 무지함에 빠져서 사람들이 마시는 술로 이야기를 하고 있고 목사들이 술이라고 하니까 교인들은 다 그렇게 받아들이고 있고 세상에 술집이 있으면 마치 마귀의 소굴과 같이 생각을 하고 있고 속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속됩니다.

그 사람에게는 반드시 속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 사람은 평생에 술을 입에 대기라도 했으면 반드시 그 속된 것으로 인하여 구원을 받을 수 없게 됩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속된 것은 천국에 들어올 수 없다고 말씀을 하기 때문에 절대로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어쩔 수 없이 마셨습니까?

그런 말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서 어쩔 수 없었다는 말이 통할 것 같습니까? 특히 남자들은 군대에 가면 자기가 마시기 싫어도 마실 수밖에 없는 상황이 오게 됩니다. 그렇게 마셨더라도 핑계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술 취하는 것이 방탕한 일입니까?

방탕한 자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을 제가 굳이 말씀을 안 드려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성경을 이렇게 문자적으로 보면서 스스로 속되다고 하고 있고 방탕하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자기들이 속되다고 하는 그것으로 속되게 된다는 것을 꿈에도 모르고 있습니다.

 

안타깝습니다.

성경을 모르게 되면 이렇게 되는데도 전혀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술 마시는 것을 속되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 기독교인들이 성경을 얼마나 무식하게 보고 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알고 있는 그것으로 자기들이 속되게 되어서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술을 마십니다.

우리에게는 이 세상 사람들이 먹는 술이 전혀 속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속되지 않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성경을 어떻게 보는가에 따라 이렇게 큰 차이가 있는데도 사람들은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의미를 전혀 생각하지도 않고 있습니다.

 

사도행전10:28절을 보겠습니다. (205)

이르되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교제하는 것과 가까이 하는 것이 위법인 줄은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께서 내게 지시하사 아무도 속되다 하거나 깨끗지 않다 하지 말라 하시기로

 

유대인입니다

그들은 율법이 있었고 또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그들만의 규례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 율법이 변형되어서 그것이 고착화 되어 새로운 율법이 된 것이 있었습니다. 종교가 되고 그 종교가 율법을 지키다보면 늘 새로운 율법이 생겨나게 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율법입니다

예수님이 오셨을 때 바리새인들의 기도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소득의 십일조를 드린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율법에서 파생이 되어서 종교가 되어 있는 유대교에 새로운 율법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소득의 십일조입니다

구약을 보시기 바랍니다. 소득의 십일조라는 율법이 없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유대교인들은 소득의 십일조를 드린 것으로 바리새인들의 기도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구약의 율법에서는 소득의 십일조가 없습니다. 그러나 당시 바리새인들은 아주 자연스럽게 말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뿐입니까?

이 시대 역시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고 있습니다. 성경에도 없는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면서 자기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서 십일조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 이 시대 기독교인들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근거를 어디에 두고 있는가 하면 누가복음에서 바리새인들이 하고 있는 기도에 두고 있습니다.

 

소득의 십일조를 하고 있습니다.

왜 하고 있는가 하면 바리새인의 기도를 성경에서 보고하고 있습니다. 사실 말도 안 되는 행위인데도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아무 생각이 없이 행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마귀의 자식들이라고 하는 그 바리새인들이 한 소득의 십일조를 그대로 따라하고 있고 그것은 자기들이 누구라는 것을 밝히는 것과 같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도 베드로입니다

이제 성령이 사도들에게 임하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복음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아직까지는 이방에 복음을 전하지를 않았고 예루살렘을 비롯하여 유대인들이 살고 있는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는 것을 사도행전을 통해서 알고 있습니다. 왜 그들이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했는가 하면 이 말씀 그대로 이방인과 교제를 하는 것이 위법이라고 생각을 했기 때문입니다

 

이방인과의 교제입니다

그들과 식사를 하는 것을 부정하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쉽게 말을 해서 속되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것이 어디에서 또 나오고 있는가 하면 갈라디아에서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령이 오셨지만 아직까지 사도들은 그런 외식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방인과 교제를 하지 않았습니다.

왜 교제를 하지 않았는가 하면 율법에서 파생을 하여 속되다고 생각을 하기 때문에 하지 않았고 그것을 갈라디아에서 외식에 빠져 있다고 사도 바울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에서 사도 베드로가 이방인과 교제를 하는 것을 속되게 생각한 것은 아주 당연한 일입니다 물론 성령이 오셨지만 아직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함을 받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잘 이해를 하시기 바랍니다.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성령을 무슨 도깨비 방망이 같이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성령이 오시면 그가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를 하신다고 하니까 성령이 오시면 성경 전체가 다 보이는 것과 같이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절대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령이 오셔도 우리는 지혜를 구해야 하고 계속해서 성경에서 복음을 알아가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방인과 교제를 하는 것이 속됩니다.

왜 이렇게 생각을 하고 있는가 하면 비록 사도 베드로가 성령을 받았지만 이 문제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진리로 인도함을 받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령에 대해서 잘 모르는 사람은 이 말씀이 잘 이해가 가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을 알고 있는 성도는 충분히 이해하고 깨달을 수 있는 말씀입니다.

 

아직까지 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방인과 교제를 하는 것을 속되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천사를 보내셔서 하나님이 깨끗하게 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이제 복음을 알고 있어서 이 말씀을 쉽게 생각할 수 있지만 당시 베드로에게는 정말로 심각한 문제였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구원입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성령을 받은 사도 베드로도 아직까지는 유대인의 외식에 사로잡혀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천사가 나타나서 베드로를 청하고 있지만 베드로에게 남아 있는 유대인의 규례를 생각하면서 이방인과 교제를 하는 것이 속되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규례와 율법입니다

속되지 않은 것을 속되다 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방인이라고 해서 왜 속됩니까? 그러나 당시 유대인은 할례를 받지 않은 이방인과 교제를 하는 자체를 속되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자 환상을 통해서 사도 베드로에게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끝까지입니다

만약에 사도 베드로가 끝까지 할례를 받지 않은 이방인과 교제를 하는 것을 속되다고 했으면 고넬료의 청에 응하지 않았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환상을 보여 주시면서 내가 깨끗케 한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구원을 생각해야 합니다.

한 영혼을 구원하는데 있어서 속된 것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비록 성령을 받았지만 아직까지 이 구원에 대해서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여 지고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환상을 보여 주셔서 베드로가 고넬료의 청해 응해서 그 집에 가서 복음을 전해서 고넬료의 집이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었습니다.

 

복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방에 복음을 전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조상 대대로 지켜오는 규례로 이방인과 교제를 하는 것을 속되게 생각을 했습니다. 할례를 받지 않은 이방인과 교제를 하는 것을 속되다고 생각을 했기 때문에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할 수 없었습니다.

 

고넬료의 사건은 바로 이것을 가르쳐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이제 주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셔서 천국으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성령이 오셨습니다. 그런데도 아직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생각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주님은 이방에 빛을 비추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지만 사도들은 성령을 받고 있지만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있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있지 않습니다.

 

왜 안 전합니까?

이방인과 교제를 하는 것을 속되게 생각을 하기 때문에 못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 고넬료에게 천사를 보내주셔서 베드로를 청하게 하시고 또 베드로에게 환상을 보여주심으로 해서 내가 깨끗케 한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말라고 말씀하면서 고넬료의 청함에 응해서 그 집에 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속된 것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 어느 것도 속된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 만물을 지으시고 보시기에 좋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구약의 율법을 보고 사람들은 스스로 속되게 만들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속된 것이 없다고 하고 있지만 이 시대 역시 스스로 속되게 만들고 있는 것이 많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술 문제입니다

주님께서도 포도주를 즐겨하셨는데 주님을 믿는다고 하는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술이 속된 것으로 알고 있고 심지어는 술집을 쳐다보는 것조차 자기들이 속되게 되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속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죄인입니다

사도 바울은 성경에서 율법을 알고 난 후에 내가 죄인 중에 괴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죄인 중에 괴수라면 이 세상에서 나보다 속된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 시대 기독교인들에게는 속된 것이 아주 많이 있습니다. 그렇게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속되어서 그것이 걸림이 될 수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속된 것이 없습니다.

우리 성도에게는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속된 것이 너무도 많이 있습니다. 술을 마시면 안 되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고 성경에서 없는 소득의 십일조를 하면서 그것을 하지 않으면 마치 자기들이 구원을 받을 수 없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아니 하나님의 백성이면 십일조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럼 십일조를 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과연 어느 누가 소득의 십일조를 평생에 한 번도 어기지 않고 한 사람이 있습니까? 아니 자기들이 속되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을 어기지 않고 한 사람이 있습니까? 그것이 십일조와 술만의 문제가 아니라 십계명의 문제가 되면 심각해진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십계명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아니 십계명을 지키지 않으면 속되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누가 십계명을 다 지킬 수 있습니까? 계속해서 말씀을 드리지만 우리 인생은 십계명의 어느 한 계명도 지키지 못 했습니다. 속되다고 하는 그것으로 속되게 되어서 사망에 이른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성도입니다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십일조를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속되지 않기 때문에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또 십계명을 지키지 않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이 세상에서 오셔서 우리를 위해서 지켜 주셨고 그것이 내가 지킨 것이 되기 때문에 우리 성도는 십계명을 보아도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속됩니다.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속되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 속되게 여기는 그것이 그 사람에게는 속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무서운 말씀이지만 사람들은 아무 생각이 없이 성경을 보고 있습니다. 결국에는 사망의 길로 가고 있지만 깨달을 수 있는 지혜가 없습니다.

 

로마서14:15절을 보겠습니다. (258)

만일 식물을 인하여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치 아니함이라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식물로 망케 하지 말라”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그대가 음식 문제로 형제자매의 마음을 상하게 하면, 그것은 이미 사랑을 따라 살지 않는 것입니다. 음식 문제로 그 사람을 망하게 하지 마십시오. 그리스도께서 그 사람을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속되니라

속되다 품위가 낮고 천하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는 말씀입니다 물론 사람들이 술을 구원과 직접적으로 연결을 시키지 않고 있다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어떻게 말씀을 하고 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속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입니다

만약에 속된 것이 있다면 우리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구약의 율법을 보고 그리고 성경을 보면서 사람들은 구원을 받는데 있어서 속된 것을 많이 만들고 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성경을 문자 그대로 보고 있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성경말씀에 따라 속되게 보일 수 있습니다.

 

영생입니다

어느 것도 우리 앞에 걸리는 것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어느 것도 우리를 속되게 하는 것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이 일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죽으셨다가 살으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있습니다.

 

왜 속되게 여기고 있습니까?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보고 그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알면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스스로 속된 것이 많이 있기 마련입니다

 

속되다는 뜻을 알아야 합니다.

하찮케 여긴다는 뜻입니다 쉽게 말씀을 드립니다. 술을 마시는 것이 죄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술을 마시는 사람을 보면 그가 하찮케 보인다는 말씀입니다 그가 하찮케 되면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자기들이 거룩한 성도라고 생각을 하는데 하찮케 되면 당연히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성도로서의 삶입니다.

당연히 소득의 십일조를 해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것이 구원과 직접적으로 상관이 있느냐 없느냐를 떠나 자기들이 거룩한 성도라고 생각을 하고 있고 성도가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을 하면 그렇습니다. 그런데 십일조를 하지 않는 사람을 보면 그가 거룩해 보이는 것이 아니라 하찮케 보인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그럼 그가 속되게 생각을 하는 모든 것을 거룩하게 할 수 있느냐는 문제가 발생이 됩니다. 절대로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럼 그 역시도 거룩해 보이지가 않고 속되게 보임으로 해서 그가 구원을 받을 수 없는 사람이 되고 그것이 정죄가 되어서 속되게 된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만일

있을지도 모르는 뜻밖의 경우를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을 해서 현실 세계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을 이야기를 할 때 만일이라는 부사를 쓰고 있습니다. 로마서 14장은 구원을 받은 성도들의 삶이라고 말씀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구원을 받은 성도들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을 말씀할 때 이 부사가 쓰이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만일 식물로 인하여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구원을 받은 성도들의 교제입니다 그런 교제에서는 이런 일이 없지만 혹시 모를 일을 가정을 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도들의 모임에서는 식물로 인하여 네 형제를 근심하지 않게 하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해서 이 말씀을 보아야 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4:9절을 보겠습니다. (332)

형제 사랑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너희가 친히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아 서로 사랑함이라

 

만일

그런 일이 없다는 것을 가정을 해서 보아야 합니다. 늘 말씀을 드리지만 한글개역성경은 정말 잘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국어를 공부를 하지 않고 성경을 본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을 하는가 하면 자기들이 국어를 아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실상은 국어를 너무 모르고 있는 그들이 단지 한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국어를 잘 알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솔직한 이야기입니다

성경은 국어만 알아도 반은 풀린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는 성령의 감동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신학을 공부했다고 하는 사람들이 어줍지 않게 헬라어를 조금 아는 것으로 성경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은사자들을 통해서 번역한 한글개역성경을 폄하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형제 사랑입니다

그것을 데살로니가전서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구원을 받은 성도는 형제를 사랑한다는 말씀입니까?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까? 형제 사랑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너희가 친히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아 서로 사랑함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랑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영적인 일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는 영적인 일에 있어서는 형제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누가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육적으로는 비록 세상 사람보다 못할 수 있을 수 있지만 그러나 영적으로는 우리는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아 서로 사랑하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분명한 사실입니다

우리는 형제를 서로 사랑하고 있습니다. 구원을 받는 그 일에 있어서 우리는 형제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면 우리는 형제를 사랑하는 말만 하고 있습니다. 그가 구원을 받는데 있어서 방해가 되는 말은 절대로 하지 않고 있습니다.

 

친히 가르치심을 받고 있습니다.

어떻게 가르치심을 받고 있는가 하면 성경에서 복음을 보고 있고 그 복음 안에서 교제를 하고 있습니다. 복음 안에서 교제를 하는 그 자체가 형제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우리 중에 누가 형제가 구원을 받지 못하는 거치는 것이나 부딪힐 것을 놓고 있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의 삶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가르치심을 받아 형제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 바울도 만일이라는 부사를 쓰고 식물로 인하여 네 형제가 근심을 하게 되면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치 아니하는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한다는 것입니까?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까? 우리는 식물로 형제를 근심하게 하지 않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만일이라는 부사를 써 가면서 절대로 그런 일이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식물로 형제를 근심하게 하지 않고 있습니다.

 

성경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성경이 성경을 통해서 답을 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는 목사들은 눈이 감겨져 있습니다. 로마서를 보면서도 이 말씀이 무슨 말씀인가를 도무지 모르고 있습니다. 그런 일이 형제 사이에서는 없다는 것을 가정을 해서 말씀을 하고 있지만 사람들은 그런 일이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고 실제 그런 일을 만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아 형제를 사랑하기 때문에 식물로 인하여 형제가 근심하는 일이 없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안타깝게도 식물로 인하여 형제를 근심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 근심이 속되게 만들고 있지만 그것을 깨달을 수 있는 지혜가 그들에게는 없습니다.

 

우리는 형제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있을 수 없는 일이 이 시대 기독교 안에서 만연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만일이라는 부사를 써가면서 그런 일이 있을 수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성경말씀을 무색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외식 적으로 그것을 나타내기를 좋아하고 있습니다.

 

형제가 근심합니까?

우리 중에 누가 식물로 인하여 근심을 하고 있습니까? 우리 중에는 어느 누구도 근심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아 우리가 서로 형제를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가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 기독교인들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이 얼마나 식물로 인하여 근심을 하고 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근심을 하면서도 어떻게 합니까?

그런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목사들의 말을 듣고서 자기가 근심을 하고 있지만 스스로 정죄를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목사들이 근심하게 하는 말을 해도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면 자기가 잘못했다고 생각을 하고 있고 더 잘 믿어야 하겠다고 하면서 더욱 근심하는 일에 빠져 들어가고 있습니다.

 

형제가 근심을 합니까?

그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정말 술 한 잔 안 하고 살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된다고 생각을 합니까? 물론 목사들은 가능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반 사람들은 더구나 남자들은 술을 안 할 수 없습니다. 물론 입에 대지 않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술을 먹는 사람도 근심을 하고 있고 술을 먹지 않는 사람도 혹시라도 자기가 술을 전혀 먹지 않는 것으로 세상에서 불이익을 당할까 해서 근심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근심을 하게 하는 말을 하고 있다면 그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근심하게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니 내 마음에서 근심이 되고 있다면 그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는 하나님으로부터 가르치심을 받아 형제를 사랑하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말씀은 형제가 근심할 수 있는 말을 하지 않고 있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형제입니다

우리는 기독교인과는 형제가 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종교인이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전하면 그들은 근심을 하게 되어 있고 그들이 말씀을 전하면 우리가 근심하게 되어 있습니다. 서로가 근심을 하고 있다면 형제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만일입니다.

우리는 형제를 절대로 근심하게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것 한 가지만 보아도 우리는 형제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목사들의 말을 듣고 수많은 사람들이 근심을 하고 있습니다. 형제를 사랑하지 않고 있지만 전하는 사람도 모르고 있고 듣는 사람도 모르고 정죄에 빠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잠언23:29-30절을 보겠습니다. (937)

재앙이 뉘게 있느뇨 근심이 뉘게 있느뇨 분쟁이 뉘게 있느뇨 원망이 뉘게 있느뇨 까닭 없는 창상이 뉘게 있느뇨 붉은 눈이 뉘게 있느뇨 술에 잠긴 자에게 있고 혼합한 술을 구하러 다니는 자에게 있느니라

 

식물입니다

굳이 설명을 안 드려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듣고 있는 말씀을 식물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실제 먹는 음식을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듣고 있는 말씀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로마서14장은 구원을 받은 성도들의 교제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성도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다 들었습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었다가 살으셨다는 것을 성경을 통해서 알고 있고 믿고 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하지 않고 있는 성도들에게 하고 있는 말씀이라는 것을 기억하고 말씀을 보아야 합니다.

 

예배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성도는 늘 교제를 하고 있습니다. 꼭 예배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교제를 늘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교제 중에서 네 형제가 근심을 하게 되면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치 아니한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사랑치 아니한 것이 되는가 하면 그 근심으로 인하여 형제가 사망을 당하기 때문입니다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특히 형제의 교제는 더욱 조심을 해야 합니다. 내가 실수로 말한 한 마디가 식물을 인하여 형제가 근심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형제가 근심을 하게 되면 네가 사랑치 아니한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배워서 형제를 사랑하고 있는데 형제가 근심을 하고 있다면 그것은 사랑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말씀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식물로 망케 하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잠언에서는 근심이 뉘게 있느냐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근심을 주는 자는 솔에 잠긴 자이고 혼합한 술을 찾는 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술은 말씀을 안 드려도 율법이라는 것을 이제는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형제의 교제입니다

로마서14장은 구원을 받은 우리 성도들의 교제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안에 술에 잠긴 자가 있고 혼합한 술을 찾아다니는 자가 있어서 그로 인하여 형제가 근심을 하게 된다면 그 사람은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네 식물로 망케하지 말라

우리가 하는 말로 인하여 형제를 망하게 하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정말 성도의 교제는 주의해야 합니다. 내가 실수로 한말 한마디가 그리고 무심코 한말 한마디가 형제를 망하게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나는 아무 거리낌이 없이 이야기를 했는데 그것이 형제 앞에 부딪히는 것과 거치는 것이 된다면 망하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저는 그렇습니다.

제가 이 한편의 설교를 어떻게 하고 있는가를 여러분이 알아야 합니다. 혹시라도 제가 실수를 하는 것이 있을까봐서 확인하고 또 하고 있습니다. 이 설교를 하기 까지 제가 최소한 4번 이상은 설교를 보고 또 본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어떻게 합니까?

만약에 제가 감동을 받지 못하고 있는 말씀이 있다면 설교를 다시 쓰고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일일이 이야기를 하지 않아서 그렇지 제가 로마서 강해를 하면서도 그 주에 설교를 다시 써서 한 것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처음 설교를 점검할 때 다시 쓰면 그나마 다행인데 3-4번 볼 때 그것이 이상하면 하루 이틀 만에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거의 2년 전에 쓴 설교입니다

그것을 설교를 하기 전에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설교가 이상하면 다시 쓰고 있습니다. 제가 예전에 써 놓았던 설교가 완전히 잘못 된 것이 아니지만 그래도 조금이라도 이상하면 전체를 다시 쓰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 하고 있는가 하면 혹시라도 제가 여러분에게 하고 있는 이 설교로 망하는 자가 있을까를 늘 주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형제입니다

어느 형제입니까?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입니다 그 형제가 망하게 된다면 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사역을 부정하는 자가 되기 때문에 더욱 조심을 하고 있습니다. 한편의 설교를 한다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생각하고 있어야 합니다.

 

교제 쉽게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특히 형제간의 교제는 더욱 그렇습니다. 내 식물로 인하여 형제가 망하게 된다면 그보다 더 불행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 형제를 대신하여 죽으셨는데 내가 한말로 인하여 그 형제가 망하게 된다면 나는 악한 자가 되고 만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형제의 교제는 더욱 더 조심을 해야 합니다.

 

제가 왜 원고를 준비합니까?

바로 이런 문제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솔직히 말씀을 드리면 지금 목사들이 하는 그런 설교는 저 역시도 원고 없이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바로 전하려고 하니까 원고가 필요합니다. 무엇보다 제 설교로 인하여 형제가 근심을 하게 되고 그 형제가 망하게 되는 일이 있을까봐 더욱 조심을 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이 형제를 근심하게 하고 있습니까?

술에 취한 말이 그렇습니다. 그리고 혼합한 술이 그렇게 만들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계속해서 이렇게 율법을 경계를 하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이 말로 인하여 형제가 망하게 되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식물로 형제를 근심하지 않게 늘 주의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로마서14:16절을 보겠습니다. (258)

그러므로 너희의 선한 것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라”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좋다고 여기는 일이 도리어 비방거리가 되지 않도록 하십시오.”

 

로마서14장입니다

교회 안에서 있을 수 있는 일을 사도 바울이 아주 자세하게 말씀을 해 주고 있습니다. 이제 구원을 받은 성도들 사이에서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경계로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입니다

우리 인생들 모두가 구원을 받기를 원하시고 있습니다. 어느 정도인가하면 사도 바울을 통해서 로마서13장까지 모든 복음을 말씀을 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해서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 모든 복음의 말씀을 듣고 믿음으로 해서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성도들입니다

로마서14장은 계속해서 말씀을 드리고 있지만 구원을 받은 성도들에게 있는 일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듣지도 않고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은 사실 로마서14장을 보아야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아니 그들에게는 해당이 안 되는 말씀이라는 것을 알고 성경을 보아야 합니다.

 

성도들입니다

혹시라도 있을 수 있는 일을 경계로 말씀을 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정말 우리가 혹시라도 망하는 길로 갈까봐서 이렇게 자세하게 말씀을 해 주고 있습니다. 형제간에 잘못된 교제로 인하여 형제가 망하는 길로 가는 것을 염려하셔서 우리에게 주의를 시켜주고 있는 말씀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형제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 형제를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셨다는 것을 늘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내 식물로 그 형제를 망하게 한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 죽으신 것이 헛된 일이 되고 만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늘 구원에 대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내 구원만입니까?

아닙니다. 내 형제의 구원도 늘 생각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만약에 구원을 받지 못한다면 세상에서 더욱 불쌍한 자가 되고 만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실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성도는 세상에서 죽은 자 같이 살았는데 구원을 받지 못한다면 얼마나 불행한 일이 되겠습니까?

 

우리의 선한 것입니다

새번역에서는 그러므로 여러분이 좋다고 여기는 일이 도리어 비방거리가 되지 않도록 하라고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을 잘 이해를 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성도가 교회 안에서 어떻게 교제를 하고 있는가를 말씀을 하고 있고 그것이 다 너희에게 있는 선한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먹는 자입니까?

먹지 못하는 자입니까?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있습니까? 모든 날을 같게 여기고 있습니까? 이 모든 일을 어떻게 하고 있는가 하면 주를 위해서 하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가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다 우리에게 있는 선한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악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형제 앞에 부딪힐 것이나 거칠 것을 두지 않고 있습니다. 또 우리 식물로 형제를 근심하게 하지도 않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일들이 우리에게 있는 선한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형제가 망하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우리가 비방을 받게 된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는 우리에게 있는 선한 일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는데 그것으로 인하여 혹시라도 형제가 망하게 된다면 우리는 비방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누구에게 비방을 받게 되는가 하면 마귀에게 비방을 받게 된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구원을 받는 성도입니다

우리는 선한 일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니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것이 우리에게 있는 선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무심히 하고 있는 그 일 가운데서 형제가 근심을 하게 되어서 망하게 하는 일이 있다면 비방을 받게 된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로마서14장입니다

성도의 교제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우리에게 있는 선한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선한 것인가 하면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해서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서 죽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주의 것이 되는 모든 일이 우리에게 있는 선한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선한 것입니다

복음을 다 듣고 믿음으로 해서 그리스도로 옷 입은 성도에게는 선한 것이 있습니다. 그 선한 것이 무엇인가 하면 우리가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구원을 받는 그 모든 것이 우리에게 있는 선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선한 것이 비방을 받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 선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형제가 구원을 받은 것 역시 선한 것입니다 우리가 교제를 하고 있는 이 모든 것이 다 선한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형제를 근심하게 하면 형제가 망하게 될 수 있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형제가 망하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마귀는 우리를 비방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비방을 하고 있는가 하면 우리 마음에서 비방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또 형제들끼리 서로 비방을 할 수 있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 형제를 근심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비방을 받습니다.

그런 일은 없겠지만 우리가 교제를 하는 중에 형제가 망하게 된다면 우리는 비방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마귀가 비방을 하게 되면 우리가 하고 있는 교제 자체가 헛것이 될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을 통해서 우리에게 있는 선한 것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