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14:11절을 보겠습니다. (신 258쪽)
“기록되었으되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니라”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성경은 영의 일입니다 사람의 이성을 가지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영의 일을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기록을 한 것이지 그것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면 심각한 문제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특히 이런 말씀들을 사람들이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오해를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네가 형제를 판단했습니다.
그리고 형제를 업신여겼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누가 그렇게 했습니까? 이것은 우리 육체가 살아 있는 상태에서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살아가면서 그렇게 했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을 경계를 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복음 안에서 교제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형제가 형제를 판단하고 업신여기는 일이 있다면 아직 육체를 입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분명히 거치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얼마든지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생각입니다.
죄를 지면 재판정에 가서 판결을 받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선다고 하니까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잘 생각을 해야 합니다. 로마서14장은 이미 말씀을 드렸지만 구원을 받은 우리 성도들에게 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어떻게 해서 구원을 받았는가 하면 살아도 주를 위해서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서 죽음으로 해서 우리가 주의 것이 되어서 구원을 받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구원을 받은 성도가 형제를 판단하고 형제를 업신여김으로 해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수 있는가를 냉정하게 생각을 해 보시기 바랍니다.
안 됩니다
우리가 이미 구원을 받았는데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서 다시 심판을 받는다면 우리가 이제까지 말씀을 드렸던 거듭남에 대한 모든 말씀이 뒤집어 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 로마서14장에서의 말씀은 그런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섭니까?
절대로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믿지 않는 사람은 벌써 심판을 받았다고 요한복음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구원을 받은 우리가 다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선다는 것은 사실 성경적으로 맞지 않는 말씀입니다 그런데도 사도 바울은 마치 우리가 다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는 것과 같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알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 세상의 상식을 가지고 먼저 말씀을 드립니다. 누군가 죄를 지었습니다. 감옥에 들어갈 죄를 지었습니다. 그럼 그가 아직 재판을 받지 않았어도 자기 죄가 드러나면 반드시 재판을 받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재판정에 서서 자기 죄가 인정이 되면 그 죄에 따르는 판결을 받는다는 것을 다 알고 있습니다.
그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형제를 판단하면 그렇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또 형제를 업신여겨도 그렇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실제로 심판대에 선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형제를 판단하고 업신여기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선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잘 이해를 하시기 바랍니다.
실제 심판대 앞에 선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 육체를 가지고 있는 인생이 잘못한 것을 가지고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알고 있는 것을 말씀을 하면서 형제를 판단하지 말라고 그리고 업신여기지 말라고 사도 바울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내가 잘못을 하면 심판대 앞에 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알고 있는 것을 가지고 사도 바울이 말씀을 하면서 너희가 형제를 판단하고 업신여기면 너희가 알고 있는 그대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절대로 형제를 판단하고 업신여기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형제를 판단했습니다.
내가 형제를 업신여겼습니다. 물론 복음이 있는 성도는 절대로 그러한 일을 하지 않는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이 있을까를 염려를 해서 심판대 앞에 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이 말씀을 하고 있는가 하면 판단하고 업신여기는 것으로 거치는 것이 되어서 그가 구원을 받지 못한다면 마치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는 것과 같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심판대 앞에 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사실 심판대 앞에 선다는 말씀은 성경적으로 맞지 않는 말씀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적으로 맞지 않는 말씀을 왜 사도 바울이 하고 있는가 하면 마치 심판대에 서는 것과 같은 일이 있으니까 형제를 판단하고 업신여기는 일을 하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육체가 죽습니다.
그러면 그것은 끝이 납니다. 그 육체가 다시 살아나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선다는 생각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만약에 그렇다면 이제까지 우리가 영에 대해서 말씀한 모든 것이 뒤집어지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절대로 그러한 일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죽으면 끝입니다.
그리고 우리 육신은 흙으로 돌아갑니다. 먼지가 되어 흩어져 버린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수 있습니까? 그 먼지가 다시 부활을 한다는 이상한 이야기를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생각을 하는 순간 우리는 복음에 대해서 이제 다시 혼미한 상태로 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의 정의입니다
육체는 죽으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죽은 후에는 우리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영이 부활을 합니다. 언제 부활을 하는가 하면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에 우리가 그 영에다가 신령한 몸을 입고 부활을 한다는 것이 성경에서 말씀을 하고 있는 육체와 영입니다
영이 심판대 앞에 섭니까?
이 영은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입니다 그런데 그 영이 심판대 앞에 선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로마서14장10절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면 우리가 죽은 후에 다시 살아나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선다는 것이 되는 것인데 그러면 그 산 것은 어떻게 되고 또 신령한 몸을 입고 부활을 하는 것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성경은 일관성이 있어야 합니다.
문자를 보고 그대로 받아들이면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니 우리는 더 이상 이 영의 일을 믿고 싶어도 믿을 수 없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늘 지혜를 구해야 하고 성경을 일관성 있게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실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선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사람이 이성적으로 알고 있는 그것을 말씀을 하면서 교회 안에서 형제를 판단하지 말라 그리고 형제를 업신여기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하지 말라고 하는가 하면 그 역시도 살아도 주를 위해서 살았고 죽어도 주를 위해서 죽어서 주의 것이 되었기 때문에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성경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을 하신다. 내가 살아 있으니, 모든 무릎이 내 앞에 꿇을 것이요, 모든 입이 나 하나님을 찬양할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대입니다
왜 사도 바울이 있지도 않은 하나님의 심판대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그것은 교회 안에서 우리가 형제를 판단하고 형제를 업신여기는 일을 함으로 해서 그에게 부딪칠 것이나 거치는 것을 놓음으로 해서 형제가 근심을 하게 되면 마치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서 심판을 받는 것과 같기 때문에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어떻게 복음을 들었습니까? 사실 이 로마서14장까지의 복음을 들을 정도면 오랜 시간 동안에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았습니다. 아니 살아도 주를 위해서 살았고 죽어도 주를 위해서 죽음으로 해서 주의 것이 되었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형제가 근심을 하게 된다면 그보다 더 불행한 일이 없습니다. 다른복음을 전해서 그가 실족을 했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교회 안에서 복음으로 교제를 했습니다. 그런데 형제가 형제를 판단하고 업신여기는 그 일로 형제가 근심을 하게 되면 그보다 더 안타까운 일은 없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영생을 위해서 사시기 바랍니다.
물론 첫 번째는 내가 구원을 받는 일입니다 그 다음에는 내 형제가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내가 형제를 판단하고 형제를 업신여김으로 해서 그가 근심을 하고 망하게 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는 것과 같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사야45:23절을 보겠습니다. (구 1024쪽)
“내가 나를 두고 맹세하기를 나의 입에서 의로운 말이 나갔은즉 돌아오지 아니하나니 내게 모든 무릎이 꿇겠고 모든 혀가 맹약하리라 하였노라”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그것에 대해서 사도 바울이 더 명확하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영의 일에 대해서 확실하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일관성이 없으면 성경은 더 이상 성경이 될 수 없고 우리는 성경을 볼 필요도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살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왜 사도 바울이 이사야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내가 살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앞에서 말씀하고 있는 심판대 앞에 서리라는 말씀을 설명을 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 있는 상태에서 심판대 앞에 선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벌써 심판을 받았습니다.
심판을 언제 받는가 하면 우리가 살아 있을 때 받는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샤머니즘에 빠지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의 생각에는 죽은 후에 심판을 받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 사람들이 흔히 하는 말로 염라대왕 앞에 간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왜 염라대왕 앞에 가는가 하면 자기가 살아서 한 일에 대해서 심판을 받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생각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의 생각을 앞에서 말씀을 하고 나서 이제 뒤에 다시 명확하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정말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우리는 성경에서 늘 일관성이 있게 영의 일에 대해서 알아야 합니다. 이 일관성이 무너지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싶어도 믿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마태복음은25장 양과 염소의 비유입니다
이런 비유의 말씀을 보면서 사람들은 실제 그런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양과 염소의 비유를 보면 주님이 이 세상에 다시 오시고 난 후에 구원을 받은 사람과 교회 안에 있지만 버림을 받는 사람이 다 함께 서서 심판을 받는 것과 같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세상 사람들이 알고 있는 상식을 비유로 해서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비유입니다
실제로 받아들이지 마시기 바랍니다. 양과 염소가 한 자리에서 심판을 받는다는 말씀이 없습니다. 아니 영의 비밀을 알고 있는 성도는 이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불가능하지만 주님께서는 이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을 가지고 비유로 해서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일은 없습니다.
그런데 왜 없는 일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사람들이 그렇게 알고 있기 때문에 비유를 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앞에서 말씀을 드린 대로 죽은 후에 염라대왕 앞에 가서 심판을 받는 것으로 생각하고 그 후에 천국이든 지옥이든 간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알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비유로 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심판대입니다
그것은 하나의 비유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육체는 죽으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그것이 다시 사는 일은 절대로 없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볼 때 기초가 든든히 서 있어야 합니다. 기초가 든든히 서 있지 않으면 이런 말씀을 보면 억지로 해석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입니다
억지로 풀지 마시기 바랍니다. 물론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은 제가 억지로 푼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들이 어떤 말을 한다 해도 성령을 받는 성도들은 이 말씀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의 감동으로 이미 진리로 인도함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십니다.
언제 하나님께서 죽으셨던 적이 있습니까? 죽지도 않았는데 왜 사도 바울이 이사야의 말씀을 인용을 하면서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살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살아 있을 때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다는 것을 말씀을 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죽습니다.
그럼 하나님이 살아 계셔도 심판을 받을 수 없습니다. 반드시 살아 있는 사람이 살아 계시는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습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시는데 내가 죽었다면 더 이상 심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 법정에서 죽은 사람을 더 이상 처벌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기소중지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누가 누구를 심판을 합니다. 그런데 죽은 사람을 가지고 심판을 할 수 있습니까? 안 됩니다 반드시 살아 있는 사람을 앞에 두고 심판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을 볼 때는 이런 세상의 상식을 미리 알고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성경말씀을 문자 그대로 보면서 억지로 풀고 있습니다.
우리가 언제 심판을 받습니까?
반드시 살아 있는 상태에서 심판을 받습니다. 우리가 죽은 후에는 절대로 심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는 말씀을 하고 나서 바로 주께서 살았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잘 보시기 바랍니다.
누가 죽은 후에 염라대왕에게 심판을 받는 것과 같이 받습니까? 성경에는 그런 말씀이 없습니다. 심판은 언제 받는가 하면 우리가 살아 있는 상태에서 받습니다. 우리가 살아 있는 상태에서 받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이사야의 말씀을 인용을 하면서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살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우리 역시 지금 살아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도 살아 계시고 우리도 살아 있어야 심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로마서의 말씀을 보고 두루뭉술하게 넘어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0절부터의 말씀을 명확하게 풀지 못하고 대충 넘어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입에서 의로운 말씀이 나갔습니다.
그러니까 의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의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말씀을 했습니다. 그러면 그 말씀을 듣고 어떻게 합니까? 모든 무릎이 꿇겠고 모든 혀가 맹약하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누가 그렇게 한다는 말씀입니까?
의로운 말씀이 나갔습니다.
그 의로운 말씀을 모르는 사람이 무릎을 꿇을 수 있습니까? 의로운 말씀을 모르는 사람이 자백할 수 있습니까?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로마서14장은 구원을 받은 성도들의 삶이라고 말씀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하신 의로운 말씀을 알고 있는 성도들이 무릎을 꿇는다는 말씀이며 의로운 말씀을 알고 있는 성도가 자백한다는 말씀입니다
형제를 판단합니다.
그리고 형제를 업신여기고 있습니다. 구원을 받은 형제를 판단하고 업신여기는 일은 잘못이라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것을 아는 성도는 자기가 그런 일을 했으면 어떻게 합니까? 무릎을 꿇고 회개를 할 것이고 자기 입술로 자기가 잘못 했다는 것을 고백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 있다고 해서 모두가 이렇게 한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복음을 듣고 구원을 받은 성도가 혹시 실수를 해서 의로운 말씀을 몰라서 형제를 판단하고 형제를 업신여기는 일을 했다면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혀로 고백을 한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입니다
앞에 있는 말씀이 풀리지가 않으면 뒤에 있는 말씀은 절대로 풀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로마서14장은 누구에게 하고 있는 말씀이라는 것을 명확하게 알아야 이 말씀이 풀릴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로마서 강해를 쓴 사람들은 이 말씀이 누구에게 하는 말씀인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렇게 모르는 상태에서는 이 말씀을 풀 수 없습니다.
모든 무릎입니다
그리고 모든 혀입니다 모든 이라고 말씀을 하니까 이 세상 모든 사람으로 생각을 하기도 하고 또 교회 안에 있는 사람이라고 하기도 하는데 로마서14장은 구원을 받은 성도들에게 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구원을 받는 모든 성도들이 살아계시는 하나님의 의로운 말씀을 듣고 무릎을 꿇고 또 입으로 자백을 한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12:27절을 보겠습니다. (신 76쪽)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너희가 크게 오해하였도다 하시니라”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살아계시는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다. 아니 살아 있는 사람만이 하나님을 믿을 수 있다는 것을 성경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산 자가 누군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산 자입니다
누가 산 자입니까? 아브라함입니다 이삭입니다 그리고 야곱입니다 이들이 누군가 하면 믿음의 조상들입니다 하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믿음의 조상입니다 이들의 육체는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구원을 받은 성도라는 것을 주님께서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죽었습니다.
아담의 자손인 아브라함은 죽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은 살아 있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약속을 받은 이삭은 살아 있습니다. 그리고 구속의 은혜를 받은 야곱도 역시 살아 있습니다. 아담의 자손이 살아 있다는 말씀이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을 믿음으로 해서 그의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거하시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우리 성도들 역시 산 자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시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비록 아담의 자손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죽었지만 그들은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은 성도라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은 자만이 산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산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죽은 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교회 안에 있다고 해서 산 자가 아닙니다. 교회에 나와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해서 다 산 자가 아닙니다. 성경은 산 자가 누군가 죽은 자가 누군가를 말씀을 해 주고 있습니다. 주의 것이 된 성도만이 산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산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 성도만이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자백할 수 있습니다. 죽은 자는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사도 바울이 말씀을 해 주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사람이 이렇게 한다는 말씀이 아니라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서 죽어서 주의 것이 된 성도만이 이렇게 할 수 있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그런데 살아 있는 자라고 하는 그들이 부활에 대해서도 모르고 있습니다. 이 시대 기독교인들이 말하는 부활과 지금 사두개인들이 말하고 있는 부활과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사두개인들은 부활이 없다고 하지만 이 시대 기독교인들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 부활에 대해서 정확하게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형이 죽어서 천국에 갑니다.
그리고 동생이 죽어서 천국에 갑니다. 또 그 형수가 죽어서 천국에 가고 있습니다. 부활이 없다고 하는 사두개인들이 생각하는 부활입니다 사실 이 시대 기독교인들이 이야기를 하는 부활과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같은 부활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 말을 하고 있는 사두개인들에 주님께서 너희가 크게 오해를 하였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만나보자
천국에서 만나보자고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사두개인들이 이야기를 하는 형과 만나고 형수와 만나자고 노래를 부르고 있고 이렇게 부활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함께 신앙생활을 했던 교인들을 만나고 부모를 만나고 형제를 만다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주님께서 너희가 크게 오해를 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산 자입니다
형이 산 자입니까? 동생이 산 자입니까? 그리고 형수가 산 자가입니까? 그들은 산 자가 아니라 죽은 자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산 자는 누가 산 자인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자가 있는 사람이 산 자라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영을 산 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천사들과 같습니다.
우리가 부활을 할 때는 천사들과 같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천사들을 부린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들들입니다 그리고 천사는 부리는 일군입니다 지금 육신을 입고 있는 사람은 천사들에 비하면 아주 미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해서 영이 탄생이 되어 부활을 하면 천사를 다스린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산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육신이 살아 있는 것을 보면서 산 자라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또 교회 안에 나와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신앙생활을 하는 것으로 산 자라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하나님을 믿고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부활에 대해서 모르고 있는 그들에게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부활을 알고 있습니까?
이 시대 누가 부활에 대해서 알고 있습니까? 부활도 모르는 그들이 내세를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아니 이영의 부활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면 가장 먼저 반대를 하는 사람들이 누군가 하면 이 시대 목사라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성경에서 말씀을 하고 있는 부활에 대해서 반대를 하고 있습니다.
왜 반대를 합니까?
사두개인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니 사두개인들이 말하는 것과 같이 형이 부활을 하고 동생이 부활을 하고 형수가 부활을 한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자기가 어떻게 부활을 하는 줄도 모르는 사람은 산 자가 아니라 죽은 자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살아 있어야 합니다.
그런 성도만이 형제를 판단하지 않습니다. 그런 성도만이 형제를 업신여기지 않습니다. 우리가 육신을 입고 있어서 때로는 그런 실수를 하면서 살아갈지라도 그것이 죄라는 것을 바로 깨닫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바로 자백하는 회개를 할 수 있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죽는 자는 어떻게 합니까?
형제를 판단하면서도 모릅니다. 형제를 업신여기면서도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들은 산 자가 아니기 때문에 자기가 하고 있는 행위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자기 죄를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을 수 있습니까?
안 됩니다
죄를 알아야 무릎을 꿇을 수 있습니다. 죄를 알아야 고백을 할 수 있습니다. 이 시대를 보시기 바랍니다. 우상 숭배하지 말라는 율법을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상 숭배가 무엇이라는 것을 모르는 그들이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바리새인들과 같이 나는 저 세상에 사는 사람들과 같이 우상 숭배를 하지 않고 있습니다. 하면서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라고 기도를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요한일서1:9절을 보겠습니다. (신 388쪽)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성경도 모르면서 자기들이 알고 있다고 크게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차라리 모른다고 하면서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면 하나님께서 꾸짖지 아니하시고 후히 주실 수 있지만 사두개인들과 같이 잘못 알고 있으면서도 자기들이 안다고 하는 그것으로 크게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누가 무릎을 꿇을 수 있습니까?
모르는 사람은 절대로 무릎을 꿇을 수 없습니다. 또 잘못 알고 있고 오해를 하고 있는 사람도 역시 무릎을 꿇을 수 없습니다. 반드시 알고 있는 사람만이 무릎을 꿇게 되어 있습니다. 또 상대가 너무 강하면 억지로라도 무릎을 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들에게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은 하나님은 살아 계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말씀은 우리 역시 살아 있는 자가 되어야 무릎을 꿇을 수 있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살아 있어 성경에서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는 사람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시대는 교회 안에 산 자가 거의 없습니다. 산 자가 없으면서도 모르니까 성경에 살아 있다고 하니까 자기들이 산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산 자가 누구입니까?
죄를 알아야 합니다. 자기가 무슨 죄를 짓고 있는 가를 알아야 합니다. 산 자는 죄를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죽은 자는 죄를 짓고 있으면서도 죄를 모르고 있습니다. 죄를 모르니까 하나님 앞에 무릎도 꿇지 않고 있고 자기 죄에 대해서 고백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누가 알고 있습니까?
이 시대 기독교인들 중에 누가 죄를 알고 있습니까? 로마서7장에서 말씀을 하고 있는 죄를 알고 있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요한복음에서 주님께서 말씀을 하신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라는 그 말씀을 아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육신이 율법을 지키는 것이 죄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성령이 오시지 않고는 어느 누구도 깨달을 수 없습니다. 제가 육신이 율법을 지키는 것이 죄라고 하면 아마도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저를 이단이라고 공격할 것이 너무도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저를 이단이라고 할지라도 저는 성경에서 말씀하는 그대로 말씀을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누가 무릎을 꿇을 수 있습니까?
살아 있는 성도만이 무릎을 꿇게 되어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이 죄라는 것을 알고 있는 성도는 저절로 무릎을 꿇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육신으로는 죄를 법을 섬긴다는 그 말씀을 알고 있는 성도만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있습니다.
무릎을 꿇고 어떻게 합니까?
우리 죄를 자백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죄를 모르는 사람은 무릎을 꿇고 싶어도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정말 우리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을 수 있다는 그것이 은혜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어느 누구도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지 않고 있습니다. 아니 죄도 아닌 것을 가지고 무릎을 꿇고 있고 죄에 대해서는 무릎을 꿇지 않고 있습니다.
성경입니다
정말 잘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 누가 무릎을 꿇고 있습니까? 꿇고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이미 성경에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일서에 사도 요한은 만일 이라는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우리가 죄를 자백한다는 말씀입니까? 죄를 자백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까? 죄를 자백하지 않기 때문에 만일입니다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자백하는 사람이 거의 없기 때문에 만일이라는 단어를 쓰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정말 이런 말씀을 볼 때마다 우리가 보고 있는 한글개역성경이 얼마나 잘 번역이 되어 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죄를 자백하지 않습니다.
왜 죄를 자백하지 않고 있습니까? 죄를 지면서도 자기가 무슨 죄를 지었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죄를 자백하지 않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죄를 지면서도 아니 우상을 숭배하는 죄를 지면서도 교회 안에 수많은 우상이 있으면서도 죄를 자백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누가 죄를 자백합니까?
교회 안에 있는 교인들이 죄를 자백하고 있습니까? 무슨 죄를 자백을 하고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지고 가신 죄를 자백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지고 가신 이 세상 죄를 자백을 하면서 그 죄에 대해서 용서를 받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미 주님께서는 우리가 용서하기도 전에 죄를 지고 가셨지만 믿지를 못해서 그 죄를 자백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어떻게 합니까?
진짜 자백해야 하는 죄는 자백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자백을 하지 않으니까 어떻게 됩니까? 죄가 사함을 받지도 못하고 있고 모든 불의로 더럽게 되고 있습니다. 자기가 얼마나 더럽다는 것도 모르고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죄를 짓고 있습니다.
죄를 사함 받아야 합니다.
이 세상 죄를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죄는 우리가 죄를 짓기도 전에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지고 가셨습니다. 그 죄는 이미 끝이 났습니다. 더 이상 죄를 가지고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아직 초등학문에 사로 잡혀 있다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우리는 그 죄를 사함을 받는 것이 아니라 육신으로 죄의 법을 섬기는 죄를 사함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아무도 이 죄에 대해서 자백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왜 자백을 하지 않고 있는가 하면 이것을 죄라고 생각을 하지 않고 도리어 하나님을 믿는 성도가 마땅히 해야 하는 일로 알고 교회 안에서 그 죄를 짓는 일에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죄를 아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알고 있는 죄를 말씀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죄는 이 세상 사람도 자백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자백으로 죄가 사함을 받는다면 우리는 굳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이유가 없습니다. 그렇게 사함을 받으면 굳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아도 논리적으로 구원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모든 무릎이 하나님 앞에 꿇고 있습니다.
모든 혀가 하나님 앞에 자백을 하고 있습니다. 누가 그렇게 하고 있습니까? 지금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들은 죄를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싶어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죄도 모르는 그들이 어떻게 무릎을 꿇고 자백을 할 수 있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압니다.
우리는 그것을 죄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이 죄를 고백하는 것을 모든 무릎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의미도 모르고 아니 이 말씀을 깨닫지를 못하니까 교회에 나와서 맹목적으로 무릎을 꿇고 죄도 아닌 것을 가지고 무릎을 꿇고 자백을 하고 있습니다. 그 자백이 도리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거절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형제를 판단합니까?
형제를 업신여깁니까?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고 있습니다. 어떻게 서고 있는가 하면 살아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 주셔서 이 복음을 깨닫게 하시고 우리 죄를 알게 하심으로 해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그 입으로 고백을 하게하고 있습니다.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성경의 문자를 아는 것으로 내가 성경대로 산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살아 있는 자가 아닙니다. 또 그들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지 않고 있습니다. 자기 죄를 모르니까 자백을 하고 싶어도 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은혜입니다
성경을 안다는 것은 너무도 큰 은혜입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이 안다는 것을 너무도 소홀히 하고 있습니다. 아니 교회 안에 나와서 사람의 이성을 가지고 성경을 문자적으로 알고 있는 것으로 자기들이 알고 있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늘 신비롭기만 합니다.
제가 그들보다 지혜가 있어서 이 말씀을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이 시대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려고 성령을 보내 주셨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성경이 풀릴 때마다 제가 받는 그 은혜는 너무도 크다는 것을 늘 깨닫고 있습니다. 누가 이 말씀을 깨닫고 우리와 같이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을 수 있으며 누가 자백을 할 수 있습니까?
우리 구원을 받는 모든 사람입니다
우리 모두는 무릎을 꿇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 죄에 대해서 자백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역시 한 때는 종교에 빠져서 나오지를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 시대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고 성경에서 이 복음을 볼 수 있게 하시고 또 듣게 하심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게 역사를 하고 있습니다.
성도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죽은 자로 살아가고 있을지라도 우리는 산 자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지혜가 있어서도 아니고 하나님께서 이 시대 우리를 긍휼히 여겨주셔서 성령을 보내주심으로 복음을 보고 들을 수 있게 역사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14:12절을 보겠습니다. (신 258쪽)
“이러므로 우리 각인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각각 자기 일을 하나님께 사실대로 아뢰어야 할 것입니다.”
복음입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저는 이 일을 하면서 정말 때로는 넘치는 은혜에 감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아무도 모르는 이 복음을 이 시대 우리에게 주시고 있고 이 복음 안에서 교제를 할 수 있다는 것은 제가 세상에서 누리는 가장 큰 기쁨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성경은 신비입니다
생명에 대한 신비로운 말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신비로운 일을 아무에게나 가르쳐 주지 않고 있습니다. 아니 이 시대 주류라고 할 수 있는 기독교인들에게는 감추어 두셨습니다. 그리고 세상이 볼 때는 이단과 같은 우리에게 이 복음의 비밀을 열어 주시고 그 안에서 교제를 할 수 있게 인도를 하시고 있습니다.
구원을 받은 성도입니다
우리는 정말 특별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비록 세상이 볼 때는 아무 볼품이 없는 사람과 같이 보일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받는 성도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천국에 가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시대도 그 다수를 기뻐하시지 않고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고 있습니다.
우리 각인입니다
구원을 받은 성도 각자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각인이 얼마나 귀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저는 정말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비록 육체로 볼 때는 미약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이 복음을 깨닫게 하시는 그 역사를 생각을 하면 세상의 어느 누구도 부럽지가 않고 있습니다.
저도 사람입니다
육신을 입고 있습니다. 때로는 마음이 약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복음을 생각하면 더욱 힘이 나고 있습니다. 제가 하고 있는 일이 얼마나 어렵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성경이 풀어질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있고 이 시대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도입니다
한 사람이 얼마나 소중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초대교회는 지금과는 너무도 다른 세상이었습니다. 아니 삶의 정도가 차이가 있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더욱 천국을 사모를 했고 또 주님께서 다시 오시기를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로마서14장입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구원을 받는 우리 성도들에게 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아직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은 사실 로마서의 말씀도 깨닫지를 못하기 때문에 도무지 무슨 말씀을 하고 있는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로마서14장의 말씀을 보면서 어떻게 생각을 하고 있는가 하면 마치 종말의 때에 자기들이 이렇게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거의 그렇게 생각합니다.
제가 로마서 강해를 쓴 목사들의 글을 거의 안 보았습니다. 그래서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도 이 말씀을 보면서 거의 모든 사람들이 종말의 때라고 생각을 하고 말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10절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선다고 하니까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서 이렇게 하는 것은 종말의 때로 알고 있습니다.
아닙니다.
죽은 후는 없습니다. 죽은 이후에 하나님께 우리 각인이 하나님께 직고를 한들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우리는 살아 있을 때 자백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살아 있을 때에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어서 죄를 사함을 받아야 합니다. 죽은 후에는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전도서9:4-5절을 보겠습니다. (구 957쪽)
"모든 산 자 중에 참여한 자가 소망이 있음은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나음이니라 무릇 산 자는 죽을 줄을 알되 죽은 자는 아무것도 모르며 다시는 상도 받지 못하는 것은 그 이름이 잊어버린 바 됨이라“
산 자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산 자가 되어야 합니다. 죽는 후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죽은 후에 마치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서 자기에 대해서 잘 변호를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습니까?
다 사람의 감성에서 나오고 있는 생각입니다 얼마나 그럴듯합니까? 그리고 얼마나 위안이 되고 있습니까? 내가 설령 잘못 살았어도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가서 자기를 잘 변호를 하면 하나님께서 용서를 해 주시고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은 사람들에게 참으로 위안을 주고 있는 생각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저 역시도 그랬습니다.
이 복음을 몰랐을 때는 막연하게 내가 비록 잘못하고 있을지라도 하나님 앞에 가서 은혜를 구하면 하나님께서는 자비로우시고 사랑이 많으신 분이기 때문에 대강 넘어갈 것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 생각이 복음에 대해서 무지하게 만들고 있지만 사람들은 그 생각에 빠져 스스로 위안을 삼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섭니다.
그리고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를 합니다. 그러면 내가 설령 잘못한 일이 있더라도 세상에서 살 때 세상 사람들과는 다르게 하나님을 믿었고 더구나 하나님은 자비가 많으신 분입니다. 그러면 내가 직고를 하면 하나님께서 구원을 해 주실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잘못 보게 되면 이런 생각에 빠지게 되어 있습니다.
로마서14장을 보는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사실 얼마나 막연합니까? 자기 생명에 대해서 이 시대 기독교인들이 이렇게 막연하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런 막연함을 주는 것이 아니라 명확하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성경이 풀리지가 않아서 이런 막연함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기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잘 믿고 있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산 자만 소망이 있습니다.
죽는 자는 소망이 없습니다. 아니 그는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간 그가 무슨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까? 그런 막연함이 자기 영혼을 망하게 하고 있지만 사람들은 도리어 믿음이 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산 개입니다.
죽은 사자보다 낫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비유입니다. 개를 낫다고 말씀을 한 경우는 이 전도서의 말씀이 유일합니다. 개는 율법주의를 상징하고 있고 또 나쁜 의미로 다 기록이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전도서에서는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어떻게 생각을 합니까?
죽은 후에 자기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가서 무릎을 꿇고 자백을 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로마서14장을 보고 사람들은 더욱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런 뜻으로 말씀을 한 것이 아닌데도 사람들이 성경을 오해를 해서 스스로 망하는 길로 가고 있습니다.
성도입니까?
교회 안에서 평생을 성도로 살았습니까? 그리고 죽었습니까? 그는 죽는 그 순간 끝이 납니다. 그가 살아 있을 때에 자기 죄를 알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자백을 하지 않았다면 그가 한 모든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죽은 사자입니다
교회 안에서 성도로 살았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죽는 순간 그는 모든 것이 끝이 납니다. 그가 죄를 모르고 하나님 앞에서 무릎을 꿇지 않고 자백을 하지 않았다면 그는 아무 상도 받을 수 없습니다. 천국에 갈 수 없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율법주의입니까?
한 부자와 나사로의 말씀에서 나오는 개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럴지라도 그가 아직 살아 있다면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복음을 깨닫고 죄를 알고 난 후에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자기 죄를 자백을 하면 하나님께서 용서를 해 주시고 그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케 하신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산 자가 없고 죽은 자만 교회 안에 가득차 있습니다.
베드로전서4:5절을 보겠습니다. (신 381쪽)
“저희가 산 자와 죽은 자 심판하기를 예비하신 자에게 직고하리라”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그들은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을 심판하실 분에게 사실을 죄다 아뢰어야 합니다.”
우리 각인입니다
죽은 후를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죽은 사자는 아무 것도 알지 못 합니다 다시는 상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 있는 다수의 사람들은 죽은 후에 하나님 앞에 가서 자기들이 한 일을 가지고 이야기를 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인가를 모르고 막연함에 빠져 있습니다.
교회 안입니다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연락과 무법한 우상숭배를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이 극한 방탕으로 달음질을 하고 있습니다. 극한 방탕에 빠져 있으면서도 자기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 줄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성경을 보고 있지만 죽을 때까지 자기가 보고 있는 성경에서 말씀하는 복음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도 비슷하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시기를 예비하신 자에게 직고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로마서의 말씀도 그렇고 베드로전서의 말씀도 사람들은 심판이라는 단어만 보고 마치 죽은 후에 하나님 앞에서 자기 일을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 말씀입니까?
성경을 조금만 주의 깊게 보면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너무 머리가 좋습니다. 성경을 보기도 전에 자기들의 이성으로 이미 성경을 다 알고 있어서 생각할 필요성도 느끼지 않고 있습니다.
아니 알고 있는 그대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성경을 본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로마서와 거의 같은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는 율법을 지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면 저희가 이상하게 여겨 비방을 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 대로입니다
이 시대 역시 복음을 전해 보시기 바랍니다. 열심이 넘치는 사람들은 반드시 비방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왜 비방을 합니까? 우리 성도가 극한 방탕으로 달음질 하지 않는 것을 보면서 비방을 하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율법을 지키지 않는 것을 보면서 저희가 이상히 여기면서 비방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을, 심판하실 분에게 자기들이 행한 일을 낱낱이 고해 바쳐야 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낱낱이 고해 바쳐야 하지만 하지를 않고 있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하지 않고 있는가 하면 그들은 죽은 자들이기 때문에 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 각인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를 해야 합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하나님께 직고를 하고 싶어도 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로마서에서는 성도들은 우리 각인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를 하고 있습니다. 성도는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를 하고 있고 가라지는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기 때문에 직고를 하지 않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각인입니다.
우리는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를 해야 합니다. 언제 직고를 하고 있는가 하면 우리가 살아 있을 때 아니 복음을 듣고 믿을 때 하나님께 직고를 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죽은 후에는 아무 것도 모르기 때문에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전서에서는 극한 방탕에 달음질을 하고 있는 사람은 직고를 하지 않고 있습니다.
왜 안 하고 있습니까?
복음을 들어야 할 수 있는데 전혀 듣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들어야 내가 형제를 판단한 것이 있는 줄을 알고 내가 형제를 업신여긴 것을 알고 하나님께 우리 각자의 일을 직고 할 수 있는데 복음을 듣지를 않으니까 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입니다
우리는 각자의 일을 직고를 해야 합니다. 언제 직고를 해야 하는가 하면 지금 복음을 듣고 있을 때 그것을 해야 합니다. 복음을 듣지를 않으면 직고를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습니다. 자기 죄를 알아야 자백을 할 수 있는데 죄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께 직고를 할 수 있습니까?
죽은 후에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런 막연함으로 신앙생활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살아 있을 때 이 생명에 대해서 확증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영의 일을 모르니까 자기들이 죽은 후에 하나님께 직고를 할 수 있는 것으로 알고 있고 그런 막연함에 빠져 신앙생활에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왜 열심을 내고 있는가 하면 죽은 후에 하나님 앞에서 직고를 해서 은혜를 받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안 됩니다
죽은 후에는 기회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하나님께서 살아계신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지만 사람들은 죽은 후에 하나님 앞에 나가서 무릎을 꿇고 직고를 하려고 합니다. 그때는 기회가 다 지나갔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로마서14:13절을 보겠습니다. (신 258쪽)
“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판단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힐 것이나 거칠 것으로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할 것을 주의하라”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서로 남을 심판하지 마십시다. 형제자매 앞에 장애물이나 걸림돌을 놓지 않겠다고 결심하십시오.”
우리입니다
교회 안에 있는 성도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성도에게 사도 바울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소한 문제로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없는 상황이 오는 것을 싫어하시기 때문에 사도 바울에게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로마서14장은 복음을 듣고 믿는 성도들에게 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복음을 듣고 믿는 성도는 이러한 일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혹시 있을 수 있는 일을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하시고 있습니다. 그만큼 우리 성도가 구원을 받는 것을 기뻐하시고 있고 이러한 일이 교회 안에 있는 것을 경계를 하기 위해서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서로 판단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물론 성도가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하고 있다면 그것에 대해서 분명히 말을 해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런 일 외에 사람이 살다보면 여러 가지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형제를 판단해서도 안 되고 또 업신여겨서도 안 된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영생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구원을 받기를 원하시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 구원을 너무도 쉽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14장까지 계속해서 율법의 문제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왜 구원을 받지 못하는가 대해서 말씀을 해 주고 있습니다.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왜 받지 못했는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구원 쉽습니다.
제가 구원을 받는 것이 어렵다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같이 그렇게 쉬었다면 예레미야 시대에 진리를 따라 행하는 사람이 하나가 없어서 그 성이 멸망을 당하는 일이 없었을 것입니다
쉽습니다.
그러나 전제 조건이 있습니다. 사도들과 같이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있을 때 쉽습니다. 내가 복음을 듣고 있는 상태에서는 구원을 받는 일은 너무도 쉽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교회 안에 이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이고 그래서 성경은 계속해서 거짓 선지자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받기가 쉽습니까?
물론 쉽습니다. 그러나 믿는다는 것은 안다는 것에서 출발이 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아는 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물론 아는 사람이 있어서 듣고 믿을 수 있다면 아주 쉽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을 늘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굳이 말씀을 안 드려도 복음을 안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우리 성도님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 주셔야 합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이라도 성경을 보면 다 보이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저 역시도 로마서 강해를 쓰고 있지만 앞에서 말씀을 드렸듯이 때로는 도무지 무슨 말씀인가를 모를 때가 있습니다. 성경이 그렇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데 이 시대 목사들은 성경을 너무 쉽게 보고 있습니다.
구원을 받는 것은 쉽습니다.
어느 정도 쉬운가 하면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재능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아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알기만 하면 믿어서 구원을 받는 것은 너무도 쉬운 일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까?
사람들이 이 말에 거의 넘어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저 교회에 나와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 자기가 믿음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고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믿는 것에는 아는 것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아는 것에서 모두가 걸려 넘어지고 있지만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 형제들에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판단하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판단을 해서는 안 되는가 하면 우리가 판단하는 것이 부딪힐 것이나 거칠 것이 되어서 형제 앞에 두어서 내가 판단하는 형제가 그것으로 부딪히고 거치는 일이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서5:1절을 보겠습니다. (신 307쪽)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다시는
이전 상태로 돌아가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어떤 일을 하고 있었는데 그 일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면 이제 다시는 그 일을 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의 단어라는 것을 알고 성경을 보아야 합니다.
다시는 판단하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럼 판단을 한다는 말씀입니까? 판단을 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까? 만약에 우리가 형제를 판단을 하면 우리는 그것이 잘못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자백을 해야 합니다. 그런 자백을 하고 또 다시 그 일을 하겠습니까? 더구나 그 일로 형제가 부딪치고 거치게 된다면 우리는 절대로 할 수 없습니다.
갈라디아서에서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율법에 대해서 말씀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절대로 율법을 지키지 말라는 뜻으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듣고 다른 복음이 무엇이라는 것을 아는 성도는 사도 바울의 말씀과 같이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않는다고 믿고 있습니다.
성도입니다
그들이 다시 종의 멍에를 메겠습니까? 절대로 메지 않습니다. 왜 메지 않는가 하면 종이 되면 이 세상에서 종으로 살아다 버림을 받기 때문에 누군가 메라고 해도 멜 수 없습니다. 만약에 종의 멍에를 메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아직 이 복음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자유를 모르고 종의 멍에를 멘다고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겠다는 것과 같습니다. 만약에 다시 종의 멍에를 메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는데 이 시대는 모두가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믿음이 있는 성도는 종의 멍에를 메지 않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성경을 모르니까 자기들이 무엇을 하는 줄도 모르고 율법의 행위에 깊이 빠져 있습니다.
다시는 해서 안 됩니다
왜 안 되는가 하면 우리가 구원을 받게 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죽었다가 살으심으로 구원을 받았는데 그 형제를 판단하고 있다면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의 은혜를 거절하는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구원입니다
주님께서 형제를 구원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형제를 내가 판단을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주님께서 그 형제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는데 그 형제를 내가 판단을 하고 있다면 내가 주님의 구속의 은혜를 거절하는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다시는 서로 판단하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다시는 하지 말라
해서는 안 됩니다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하면 종의 멍에를 메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그런데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모두가 율법의 행위를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율법의 행위를 하는 것으로 그가 어떻게 된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더구나 다시는 하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다시는 하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는가 하면 다시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너무 담대해서 율법을 지키는 일에 열심을 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구원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하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담대하게도 이 일을 하고 있습니다.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율법을 지키면서도 자기들이 종의 멍에를 메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다시는 하지 말라는 것을 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2:8절을 보겠습니다. (신 378쪽)
“또한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었다 하니라 저희가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저희를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
다시는
서로 형제를 판단하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다시는 형제를 서로 판단하지 말라고 말씀을 하는가 하면 판단하는 그것으로 도리어 부딪힐 것과 거치는 것을 놓을 수 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구원을 받은 우리 성도들에게 당부의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내가 형제를 판단합니다. 쉽게 말씀을 합니다. 이 시대 교회 안에 있는 교인들이 술을 마시는 것을 마치 죄를 짓는 것과 같이 생각을 하고 있고 이 술을 먹는 것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고 누구는 술을 먹어도 된다고 하고 있고 누구는 술을 취하지만 않아도 된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는 술을 먹어도 된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누군가 술에 취했습니다. 그리고 조금 실수를 했습니다. 그런데 형제가 그것을 판단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술을 마시면 저렇게 취하게 되고 취하게 되면 하나님 앞에 덕이 안 된다고 하면서 그를 판단했다고 생각을 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럼 어떻게 됩니까?
우리나라 교회가 왜 술을 안 마시게 되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바로 이 문제입니다 일제 감정기에 선교사들이 들어오니까 사람들이 술만 먹고 일을 하지 않습니다. 아니 그때는 일을 하고 싶어도 할 일이 없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특히 남자들이 낮술에 취해 있었습니다.
그때 판단을 했습니다.
그것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이 시대는 그것이 술을 마시면 죄를 짓는 것과 같이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처음 선교사들이 들어올 때 그러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 일로 인하여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술을 마시지 못하게 했고 성경의 문자를 보이면서 술취하지 말라고 말을 하면서 술을 마시는 것을 죄로 생각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그것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이제는 교회 안에서 법과 같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술을 마시면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그것을 정죄를 하고 있고 스스로도 정죄를 받고 있습니다. 술을 마시는 것이 아무 문제가 되지 않고 죄가 되지도 않는데 그것이 이 시대는 부딪힐 것과 거치는 것이 되어서 형제 앞에 두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런 일이 교회 안에 있을 것을 사도 바울이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술을 마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죄입니까? 그것은 죄가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교인들에게는 그것이 죄가 되었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는가 하면 처음 우리나라에 선교사들이 들어오면서 우리나라 남자들이 일어 없어서 그저 낮에 술을 마시는 것을 보고 죄도 아닌 것을 가지고 형제를 판단을 했습니다. 그것이 이 시대 결국에는 부딪히는 것이나 거치는 것이 되어서 복음과 아무 상관이 없는데도 마치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과 같이 되었습니다.
정말 주의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런 일이 교회 안에서 있게 해서는 안 됩니다 내가 그것이 싫다고 해서 내가 이성으로 생각을 할 때 이것이 좋다고 해서 형제를 판단함으로 해서 그것이 형제를 스스로 정죄를 하게 만들어서 부딪힐 것이나 거치는 것이 되어서 구원을 받지 못하게 만들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술을 안 미시는 것이 교회 안에 율법 화 되어서 그렇게 됨으로 해서 그것이 진짜 복음에 거치는 것이 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을 사도 베드로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말씀에 순종치 아니하게 만들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구원을 받는 그것입니다 그런데 복음과 아무 상관이 없는 술에 대해서 이야기를 함으로 해서 그것이 교회 안에서 부딪힐 것이나 거치는 것이 되어서 복음에 순종을 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순종을 하지 못하게 함으로 해서 구원을 받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인생의 생각으로 형제를 판단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 성도는 분명히 성경을 보고 그 성경에서 말씀을 하는 것 외에는 형제를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이와 비슷한 것들이 많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형제를 판단합니다.
그것이 나중에는 율법과 같이 되고 그것이 사람의 이성을 따라 나쁘다고 생각이 되면 교회 안에 있는 다수의 사람들이 그것을 하지 않게 되고 그것을 하게 되는 사람에게는 정죄가 되어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정죄가 됨으로 해서 어떻게 되는가 하면 복음에 부딪히는 것이나 거치는 것이 되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말씀의 의미를 바로 알고 그 뜻을 바로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영생을 얻는 그것이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씀을 모르면 어떻게 되는가 하면 그것을 자의적으로 생각을 해서 형제를 판단하게 되고 그것으로 형제 앞에 부딪히는 것이나 거치는 것이 되어서 말씀에 순종을 하지 못하게 만들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형제 앞에 두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가 형제를 판단하는 그것이 복음에 부딪히는 것이나 거치는 것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고 있어야 합니다. 나는 사람의 이성을 따라 형제가 조금 더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형제를 판단을 했는데 그것이 실상은 어떻게 변하고 있는가 하면 복음에 부딪히는 것이나 거치는 것이 되어서 형제가 근심을 하게 된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일일이 말씀을 드리지 않습니다.
교회 안에서는 실제 그러한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기가 구원을 받은 성도라고 하면서 사람의 이성에 따른 판단으로 형제를 판단함으로 해서 그러한 일이 있게 되고 그것이 복음에 있어서 부딪히는 것이나 거치는 것이 되고 있으니까 사도 바울이 우리 성도들에게 주의하라고 당부를 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8:9절을 보겠습니다. (신 272쪽)
“그런즉 너희 자유함이 약한 자들에게 거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거칠 것입니다
우리 형제들이 교회 안에서 함께 복음 안에서 교제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당연히 사람이기 때문에 그 사람을 보게 되어 있습니다. 복음만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아니라 형제가 하는 행위를 다 보게 되어 있고 그것이 믿음이 약한 자에게는 당연히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유합니다.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하지 않고 종교적인 율법이나 외식을 하지 않으면 우리는 모든 것에 있어서 자유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자유함이 약한 형제에게 거치는 것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자유합니다. 그런 자유함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는데 그 자유함을 잊어버리고 형제가 형제를 판단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하면 사도 바울의 말씀과 같이 도리어 부딪힐 것이나 거칠 것을 형제 앞에 놓게 된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주의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주의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는가 하면 이제 뒤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네가 형제를 판단하는 그것이 그러니까 네가 교회 안에서 하고 있는 그 말로 형제가 근심을 하게 되면 그것으로 인하여 형제를 망하게 할 수 있기 때문에 성도는 교회 안에서 정말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는 일이 아니라면 형제를 판단하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고 그것이 부딪히는 것이나 거치는 것이 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조금 안다고 하는 그것이 그리고 내가 사람의 이성을 따라 생각하는 그것을 가지고 형제를 판단하는 일을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영생을 얻는 성도입니다 그 일 외에는 형제를 판단하지 말라고 말씀을 하면서 주의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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