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니라(요6:63.)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약속이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

은혜와 진리의 말씀

75강,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칠천 인을 남기리니

윤주만목사 2019. 5. 27. 08:43


75,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칠천 인을 남기리니

 

열왕기상 19:18절을 보면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칠천 인을 남기리니 다 무릎을 바알에게 꿇지 아니하고 다 그 입을 바알에게 맞추지 아니한 자니라

 

가나안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입니다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던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와 풍요로운 삶을 살았던 것은 이미 성경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풍요로움이 오히려 그들의 신앙을 방해를 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바알이 무엇인가 하면

다산과 풍요를 상징하는 가나안의 토착 신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가나안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었기 때문에 늘 풍요로웠고 또한 그런 풍요로운 삶을 사는 이스라엘은 당연히 다산을 하게 되었습니다

 

풍요로움을 싫어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목사인 저도 늘 제 삶에 대해서 때로는 지금 당하고 있는 고난이 너무도 커 매일 산책을 하면서 늘 그 생각에 사로 잡혀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세상 적으로 어떤 일을 생각하면서 그 일을 성공해서 어떻게 하면 내가 지금 하고 있는 복음의 사역을 조금 더 풍요롭게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면서 잠시 즐거움에 빠져 들어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솔직히 거기서 벗어나지를 못 합니다

그러다 보니까 내 자신이 세상일에 관여를 하게 되고 자꾸 세상으로 눈을 돌릴 수밖에 없고 아무튼 내 안에는 풍요의 신 바알이 나를 붙들고 있어 거기서 떨쳐 나오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늘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저는 사는 것에 걱정이 없으면 성경만 보면서 또 그 성경을 해석해서 강해서로 자료로 남기고 싶은 마음이 간절합니다. 사실 이 모든 것이 사람의 정욕에서 나온 것임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고 또 내 안에 바알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나 또한 바알에게 무릎을 꿇은 자가 아닌 가 늘 돌아봅니다.

지금은 없으니까 그마나 다행이지만 만약 기회가 주어져서 나에게도 풍요가 찾아온다면 과연 그 바알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솔직히 자신이 없습니다. 제가 왜 이런 말씀을 드리는가 하면 이미 그런 것을 보여주는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의 빈민 목회를 하던 분이 있었습니다.

제가 누구라고 말씀을 안 드려도 청계천으로부터 시작을 해서 정말 시대의 아픈 이들과 함께 때로는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젊은 시절에 모든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던 그 목사님도 어느 순간부터 이 바알에게 무릎을 꿇기 시작을 하더니 지금은 부의 상징이 되고 있습니다. 그 분의 사상은 완전히 바뀌고 말았습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 분은 처음부터 바알에게 무릎을 꿇은 사람이라고 봅니다.

다만 그 기회가 찾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그때까지는 자기를 철저하게 죽이면서 절제를 하고 있었지만 역시 기회가 오니까 바로 바알의 풍요에 무릎을 꿇고 이제는 기복주의에 빠져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제가 이 목사님을 비판하고 싶어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저 또한 지금은 그런 기회가 찾아오지 않았기 때문이지 만약 그런 기회가 주어진다면 과연 그 목사님과 내가 무엇을 다를 수 있을까를 늘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그 목사님보다 제가 더 먼저 무릎을 꿇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이 시대가 얼마나 풍요롭습니다.

물론 아직도 우리나라에는 끼니를 굶은 어린 학생들이 있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전제적으로 볼 때 가까이 있는 북한이나 중국이나 동남아시아를 볼 때 우리나라는 너무도 풍요롭기만 합니다. 교회는 더구나 그 풍요로움의 정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시내를 돌아다녀 보시기 바랍니다.

아파트 말고 그 다음으로 큰 건물이 있으면 거의 예배당입니다

교회가 큰 건물을 짓고 있는 것이 다 나쁘다고 말씀을 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필요에 따라서는 큰 건물을 짓고 예배당으로 사용하는 것은 시대에 따르는 일이기도 합니다. 부가 축척이 되어 있는데 그것을 자기들이 하나님께 예배하는 예배당을 짓겠다는데 무엇이 나쁘겠습니까?

 

그러나 곰곰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런 대형 교회도 역시 풍요의 신 바알의 한 모습이라는 것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이스라엘이 너무 풍요로워서 바알에게 모두 무릎을 꿇었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육적인 것이지만 지금 이 시대 영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스라엘은 보이는 바알에게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 시대는 보이지 않는 바알에게 무릎을 꿇고 있으면서도 자기가 어떤 행위를 하고 있는 가를 모릅니다. 기복주의가 판을 치고 있는 한국 교회는 이미 바알에게 무릎을 꿇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교회를 개척하면 그 다음에는 건축하려고 애를 씁니다.

교회 건축을 하고 나면 교육관을 짓고 또 주차장을 넓게 만들고 있고 또 아주 경치가 좋은 곳에다 기도원을 지어서 무엇 하나 불편함이 없이 너무도 풍요롭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바알에게 무릎을 꿇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아주 당연하게 받아들입니다.

만약 예배당을 건축한 교회에서 돈이 있는데 교육관을 짓는데 반대를 한다면 그 사람은 아마 이단으로 몰리거나 아니면 믿음이 없는 자로 취급이 되어서 오히려 그 교회에서 배척을 당해 더 이상 신앙생활을 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너무도 풍요롭기만 합니다.

지금 한국 교회의 대형 교회를 보시기 바랍니다.

부족한 것이 없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수천억 짜리 예배당도 지을 수 있고 또 마음만 먹으면 자기들의 신앙생활을 위해서 기도원을 짓기도 하고 심지어는 자기들이 죽어서 썩어 없어질 그 자리까지 미리 만들어 놓고 있습니다.

 

너무 풍요롭습니다.

부자로 사는 것이 나쁘다는 말씀을 드리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부자를 두시고 또 가난한 자를 두셔서 부자로 하여금 그 가난한 자를 채워 주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너무 부자가 되는 것에 대해서는 문제가 심각합니다.

 

탐욕이 끝이 없습니다.

세계의 십대 교회 중에 다수가 한국에 있습니다.

인구나 또 경제력을 볼 때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 지금 한국 교회에서 일어나고 있지만 그것을 너무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고 그런 자기들의 교회를 보면서 아주 자랑스럽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 교회에 출석을 하는 그 자체로만도 자기들의 신앙이 인정을 받고 또 마치 구원이 보장된 것으로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겉으로는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바알에게 입을 맞추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아무에게나 입을 맞추지는 않습니다. 아무리 서양 사람들이라 해도 부부가 아닌 이상은 입을 맞추지는 않습니다. 물론 가벼운 포옹을 하고 뺨을 맞댈 수는 있어도 입을 맞추는 일은 부부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부부만이 입을 맞춥니다.

다른 사람하고는 입을 맞추려고 해도 그것이 잘 안 됩니다.

부부가 아니고는 입을 맞출 수 있다는 것은 그것은 한 마디로 간음을 하는 행위와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지금 열왕기 상에서 엘리야에게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이스라엘은 남편을 바꾸고 간음을 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예레미야 31:32절을 보면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하였음이니라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남편 되십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너무 풍요로운 나머지 자기 남편을 버리고 바알이라는 풍요의 남편에게 푹 빠져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과 입을 맞추어야 하는데 바알이라는 풍요의 신에게 입을 맞추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풍요롭게 살기를 바랐습니다.

 

지금 이 시대는 이스라엘보다 더 합니다

바알에게 입을 맞추고 싶어서 하나님께 울며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하나님을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바알에게 입을 맞추고 싶어서 철야기도를 하고 새벽마다 통성으로 부르짖고 있습니다. 혹시라도 하나님께서 듣지 못하실까봐 더 큰 소리로 통곡을 하면서 바알에게 입을 맞추려 하고 있습니다.

 

제가 분명히 말씀을 드리지만 잘 사는 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풍요를 얻기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고 있다면 또 그것을 구하기 위해 온 정신이 다 팔려 있다면 그는 바알과 입을 맞추고 있는 사람입니다 다 뜻은 좋습니다. 모두가 한결같이 하는 말이 하나님을 위해 일하기 위해서 라고 말 합니다

 

솔직히 말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풍요의 신을 찾는다 하지 마시고 나를 위해 풍요의 신을 찾는다 하시기 바랍니다. 결국은 자기를 위해 풍요의 신과 입을 맞추고 싶은 것 아닙니까? 그러면서도 마치 그것이 하나님을 위하는 일인 양 아주 두꺼운 얼굴을 하고서 바알과 입을 맞추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내 영혼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분입니다

육적인 풍요를 위해 하나님께서 계시는 것이 아니라 내 영혼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나를 젖과 꿀이 흐르는 영적 가나안 천국으로 인도하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 주셔서 우리를 구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완전한 기복주의에 빠져 있습니다.

사람들이 얼마나 그 마음이 악한지 바알과 입을 맞추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하나님을 위하는 일인 것으로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자기들의 편리를 위해 예배당을 크게 짓고 또 교육관을 건축하고 주차장을 만들면서 그것이 하나님을 위한 일이라고 아주 뻔뻔하게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그럼 초대 교회는 저주를 받았습니까?

지금 한국 교회의 사상으로 보면 초대 교회는 저주를 받은 교회입니다 그들은 믿음이 없어 축복을 받지 못해서 그 생명까지도 사자 밥이 되고 또 화형을 당하고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한 것을 보면 그들은 분명 저주를 받은 것이 분명합니다.

 

바알에게 입을 맞추지 마시기 바랍니다.

풍요의 신에게 입을 맞추는 그 순간 내 영혼은 버림을 받게 됩니다.

교회에 나왔다고 다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에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칠천 일을 남겨 두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다 풍요의 신 바알에게 입을 맞추었습니다.

그러나 남은 자 칠천은 풍요의 신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또 입을 맞추지도 않았습니다. 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엘리야는 자기 혼자만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하나님께서는 엘리야 말고도 칠천 인을 남겨 두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엘리야가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능력이 그에게서 나타난 사람입니다

바알과 아세라 제사장 850인과 싸울 때는 자기 혼자 남아 있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내가 칠천 인을 남겨 두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남은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그랬던 것같이 교회는 계속해서 풍요의 신을 쫓아갔습니다. 유럽의 교회들이 얼마나 웅장하고 고풍스럽습니까? 그런 교회들이 이제는 사람이 없어 텅텅 비어 팔리고 있습니다. 풍요의 신 바알에게 입을 맞추고 그것을 따라 갔던 유럽 교회를 지금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것이 지금 한국 교회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교회가 개척이 되면 어떻게 하든지 풍요의 신과 입을 맞추고서라도 남들이 보기에 근사한 예배당을 건축하는 것이 성공의 척도입니다. 목사들의 세계에서는 그것이 권위의 상징이 되어 버린 지 오래 되었습니다. 아무리 복음이 있고 없고를 떠나서 일단 풍요의 신에 의해서 근사한 예배당을 지어 놓으면 마치 복음이 있는 목사로 인정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바알이 주는 것과 하나님이 주는 것을 분별을 하지 못하고 자기들이 바알에게 입을 맞추고 그것을 구해서 얻은 것을 가지고 마치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자랑을 하고 있습니다. 자기들의 손으로 건축한 예배당을 보면서 아주 자랑스럽게 여기고 그 안에 예배를 드리는 것이 마치 천국을 예약해 놓은 것으로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남은 자가 누구입니까?

그것은 겉으로 보여 지는 것이 아닙니다.

쉽게 생각을 하면 이렇습니다. 사과가 한 박스가 있는데 사람은 좋은 것부터 먹게 되어 있습니다. 필요에 따라서 다 먹고 남은 것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아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는 그것이 남은 것입니다

처음에는 사과 한 박스가 다 필요 합니다.

그러나 배부르게 먹고 나니까 이제 사과 박스를 쳐다 볼 필요가 없습니다. 아니 눈에 띄지도 않습니다. 이제 필요가 없으니까 그냥 버리는 것 같은 것이 바로 남은 것입니다 사과가 한 박스 있을 때는 그것이 필요하기 때문에 눈에 띱니다. 그러나 다 먹고 난 후에는 이제 더 이상 필요가 없기 때문에 그냥 버려둡니다. 이것이 남은 것입니다

 

이제 남은 자가 누구인가를 알겠습니까?

이스라엘의 남은 자는 사람들의 눈에 띄지를 않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바알로부터 풍요로움을 얻었다면 눈에 안 띌 수가 없습니다. 지금도 근사하게 지어 놓은 교회 건물을 보면 사람의 마음이 끌리게 됩니다. 당연히 그 교회는 전도도 활성화 되고 점점 교인의 수가 늘어납니다.

 

눈에 안 띌 수가 없습니다.

남은 자는 그런 교회가 아니라 있는지 없는지 조차 모르는 교회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있는지 세간의 관심도 끌지 못하고 어느 누구도 눈길을 주지 않고 그것이 필요하지도 않은 그 교회가 바로 남은 자가 있는 교회라는 말씀입니다

 

이 시대 이들이 눈에 띄었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아마 아합왕의 아내 이세벨에 의해 모두가 죽임을 당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열왕기상 18:13절을 보면

이세벨이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죽일 때에 내가 여호와의 선지자 중에 일백 인을 오십 인씩 굴에 숨기고 떡과 물로 먹인 일이 내 주께 들리지 아니하였나이까

 

이세벨이 실제 그렇게 했습니다.

이 말은 오바댜가 엘리야를 만나 자기가 행한 일을 말하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을 드러내 놓고 믿는 선지자가 있었다면 그는 이세벨에 의해 반드시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바로 남은 자는 이렇게 드러나 보이지 않고 숨겨져 있는 사람을 남은 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313년에 로마에서 기독교가 공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난 후에 교회는 급속하게 타락을 하면서 역시 바알을 쫓아가다가 나중에는 왕을 세우는 일까지 교회에서 관여를 하는 막강한 영향력을 가지게 된 것을 교회사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그때에도 그렇게 풍요의 신과 입을 맞추던 그들을 피해 모르게 신앙생활을 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신앙이 지금 우리에게 까지 내려오고 있습니다.

만약 그들이 드러났다면 교회에 의해 탄압을 받고 심지어는 종교 재판을 통해 화형을 당하고 교수형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 시대마다 남은 자를 남겨 두셨습니다. 사람들의 눈에 잘 띄지 않는 그런 남은 자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복음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남은 자들에 의해서 지켜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풍요의 신 바알이 있는 곳에서는 복음이 자리할 수 없다는 것을 바로 분별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가 소형교회가 좋고 대형교회가 나쁘다는 말씀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남은 자는 자기를 들어내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람들로부터 주목을 받지도 않습니다. 조용히 아주 조용히 자기들의 믿음을 지키면서 겉으로 나타내지 않고 있는지 없는지 조차 모르게 진리를 사수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작고 크고를 논하는 것이 아닙니다.

남은 자는 어떠냐면 자기 행위를 나타내게 되면 이세벨에게 죽임을 당하기 때문에 어떻게 하든지 자기를 감추려 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지금 한국교회는 교회가 작든 크든 어떻게 하든지 자기들을 드러내려고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자기 교회를 세상에 어떻게 하든지 드러내고자 하는 그 자체가 바로 바알에게 입을 맞추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세벨이 노리고 있다면 행동 하나하나 조심하게 됩니다.

어떻게 마음 놓고 자기를 들어낼 수 있겠습니까? 내가 하나님의 종인 것을 아는 순간 풍요의 신을 섬기는 이세벨이 가만히 두지를 않을 것입니다 풍요의 신은 지금도 똑 같이 하나님의 종을 주시하고 있으며 그들의 모습이 드러나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죽이고자 합니다.

 

지금 이 시대는 죽이지는 못 합니다.

그렇지만 죽이려 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런 교회가 들어나면 풍요의 신에 미혹이 되어 있는 교회들은 반드시 이단으로 정죄를 해서 죽이고자 합니다. 자기들이 누리고 있는 풍요로움이 방해를 받을 것이 너무도 뻔하기 때문에 어떻게 하든지 이단으로 공격을 해서 죽이려 할 것입니다

 

남은 자가 되어야 합니다.

남은 자는 어느 누구의 눈에도 안 띄는 그런 자입니다

사과 한 박스에서 배부르게 다 먹고 이제는 한 개 딱 남아 있는데 그것에 관심을 갖는 사람은 없습니다. 사과 한 개가 남아 있는지 없는지 조차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남은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 시대도 풍요의 신을 섬기는 여자 이세벨은 그 남은 자를 찾아 죽이려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거의 모든 교회가 이 풍요의 신에 미혹이 되어서 기복주의를 따라가고 있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풍요로움을 보고 그 믿음을 판단하는 아주 어리석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9:27절을 보면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뭇 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

 

한국 교회의 교인의 수가 바다 모래 같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남은 자만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남은 자인가 아니면 풍요의 신 바알에게 입을 맞추고 있는 자가 아닌가를 분명하게 분별을 해야 합니다. 이것은 자기 영혼이 죽고 사는 문제입니다.

 

남은 자는 하나님께서 남겨 두신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모르는 사람은 남은 자가 될 수 없습니다. 한국 교회의 수가 천만이 된다고 자랑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도 청함을 받은 자는 많으나 택함을 입은 자는 적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자기가 청함을 받은 자인가 택함을 받은 자인가를 성경을 통해 확증을 해야 합니다. 지금 이 시대 교회에 나온 다수는 청함을 받은 자라는 것을 명심하시고 내 눈에 보이는 풍요로움에 미혹이 되어서 자기 행위의 의를 보면서 그것에 미혹되지 마시고 말씀으로 내 자신이 택함을 받은 자인가를 늘 돌아보아야 하고 그것을 모르겠으면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지혜를 구하면 반드시 하나님께서 택함을 받은 자인가를 깨닫게 해주십니다.

 

로마서 11:5절을 보면

그런즉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누가 남은 자입니까?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행위는 은혜를 거절하게 만듭니다. 풍요로움에 빠지면 은혜가 절대로 은혜 되지 못 합니다 남은 자는 반드시 자기 안에서 은혜가 넘치게 임해야 합니다.

 

이세벨의 눈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감추어 두시면 이세벨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내려 주시면 이세벨이 나를 찾고 싶어도 못 찾게 만들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행위를 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 눈으로 보이는 그것을 보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은혜라는 것은 내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이미 2000년 전에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로 구속을 이루시고 지혜의 말씀으로 그것이 믿어지게 한 그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그런데 은혜를 눈으로 보려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풍요의 신에 입을 맞추어서 얻은 그것을 보면서 마치 하나님의 은혜인 것으로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믿는 자나 안 믿는 자나 고루 받는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인에게만 비를 내리시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 모든 사람에게 고루 비를 내려 주신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남은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남은 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아는 성도입니다

풍요의 신 바알은 지금 이 시대도 교회 안에 깊숙이 들어와서 성도들의 영혼을 빼앗아가려 하고 있습니다. 기복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하시고 풍요의 신에서 나를 지켜 은혜로 택하심을 입은 성도가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