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니라(요6:63.)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약속이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

로마서 강해(오직 믿음)

47-1,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윤주만목사 2024. 9. 7. 07:25

로마서5:18절을 보겠습니다. (246)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생명입니다

우리 성도는 이 생명에 대해서 아무리 강조를 해도 지나치지 않다고 믿고 있습니다. 우리가 얻는 생명에 대해서 성경은 계속해서 말씀을 하고 있고 이 생명을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생명에 대해서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치 자기가 생명을 얻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종교에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이 종교에 속는 사람입니다. 종교는 대충 이야기를 하면서 마치 그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생명을 얻은 것과 같이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또 생명에 대해서도 명확하게 이야기를 하지 않고 두루뭉술하게 넘어 가고 있습니다.

기독교입니다

이스라엘이 유대교가 된 것과 같이 이방의 교회는 기독교가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배우고 있는 교리로 인하여 마치 포승으로 묶여 있는 것과 같이 모두가 꼼짝을 못하고 있습니다. 교리는 이미 포승이 되어 있지만 사람들은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 교리 안에서는 생명을 알 수 없습니다.

지금 이 시대 기독교 안에서 배우고 있는 아니 그들의 신학에서 배우고 있는 교리로는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생명에 대해서 절대 알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2000년 가까이 정립을 하기 시작한 그 교리는 이제 어느 누구도 끊어버릴 수 없는 포승이 되어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바로 깨닫고 있어야 합니다.

영생입니다

교리를 배워서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영생이 무엇이라는 것을 성경에서 알고 있다면 그런 교리에서 빠져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 역시도 한 때는 장로교의 교리가 그래도 성경적이라고 생각을 했었습니다. 물론 다른 알미니안주의보다는 그래도 조금 더 성경적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으로는 안 됩니다

생명에 대한 문제입니다, 조금 더 가까이 갔다 해서 그것으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조금 더 좋은 것이 아니라 반드시 진리의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성경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알아야 합니다. 그런 성도만이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늘 명심하고 있어야 합니다.

생명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생명이 영의 생명이다 보니까 사람들이 느낄 수도 없습니다. 육체의 생명과 같이 숨을 쉬고 심장이 뛰고 또 감촉이 있고 따뜻함이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 생명이라면 내가 생명을 얻었는지 못 얻었는지를 정확하게 사람의 이성으로 알 수 있습니다.

영의 생명입니다

말씀 그대로 영입니다. 그 생명이 우리 안에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들을 사랑하셔서 그 생명을 주셔서 구원을 하시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생명이 오직 믿음으로만 역사를 하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그것을 내 보일 수도 없고 사람의 이성으로는 증명할 수도 없습니다.

사람은 감성적입니다

우리가 꽤 이성적인 것 같아도 실상은 감성적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과학이라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자기들이 정립한 이론이 실제적으로 맞아 떨어질 때 그것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우리의 심장이 뛰는 것을 느끼는 것과 같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 감성에서 벗어나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지혜를 말씀을 하고 있고 지식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지식과 지혜가 사람의 이성과는 충돌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이성으로 그것이 깨달아 질 수 있었다면 아마도 지금의 교회는 많이 달라졌을 것입니다. 아니 지금과 같이 거대한 종교의 모습을 갖추지도 않았을 것이 분명합니다.

종교는 감성입니다

그들이 하고 있는 모든 것이 다 자기들이 하나님을 믿고 있다는 것을 행위로 나타내서 그것을 보고 느끼고 이성적으로 알면서 자기가 하나님을 믿고 있다고 생각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런 일상적인 모든 행위가 사실은 다 감성에서 나오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데 이 시대는 체험의 종교라고 하면서 그런 감성을 자극하는 쪽으로 가고 있습니다.

성경은 지식입니다

그 안에서 영의 일에 대한 지식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 성도만이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호세아서에서도 여호와를 알자 힘써 알자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육체인 우리 인생이 영이신 하나님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사실은 불가능합니다.

육체를 가지고 있는 인생이 영이신 하나님을 안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를 하셔서 성령의 감동으로 우리가 구원을 받을 정도로 알 수 있습니다.

생명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성도는 평생을 이 생명을 얻기 위해서 힘써야 합니다. 물론 구원은 단회적인 사건이지만 그러나 구원을 얻은 성도는 성경에서 생명을 얻기 위해서 늘 성경을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생명을 얻는데 있어서 방해가 되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아가고 있고 또 은혜가 더욱 넘치게 성경을 깨달아 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지금 이 시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믿음으로 역사를 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으로 해서 생명이 주어지고 있고 그 생명 안에서 왕 노릇하도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은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 노릇하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아담은 죽었습니다.

범죄로 인하여 사망이 왕 노릇 해서 모두가 다 죽었습니다. 아담 한 사람만 범죄를 한 것이 아니라 이 세상 모든 사람이 범죄를 했기 때문에 사망이 왕 노릇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 성도는 사망이 왕 노릇하는 아담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입니다

우리는 죽은 아담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 분만이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 안에 탄생이 되어 있다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입니다

우리 육체의 생명이 아닙니다. 주님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 거하는 생명입니다 그 생명을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영의 생명이 있는 성도는 생명 안에서 왕 노릇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누리면서 살아간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그러니 한 사람의 범죄 행위 때문에 모든 사람이 유죄판결을 받았는데, 이제는 한 사람의 의로운 행위 때문에 모든 사람이 의롭다는 인정을 받아서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한 사람의 범죄입니다

그 한 사람의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르렀습니다. 아담 한 사람이 범죄를 함으로 해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르렀습니다. 많은 사람이라고 하니까 전체에서 다수를 말하는 것으로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담으로 말미암은 모든 사람이 정죄에 이르렀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을 잘 보아야 합니다.

많은 사람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쉽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전체가 있는데 그 중에서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많은 사람이 아닙니다. 성경이 어떻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죄를 짓지 않은 의인은 세상에 아주 없다고 분명히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전체에서 많은 사람이 아니라 전체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 범죄입니다

이 세상에서 범죄하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그것을 통틀어서 한 범죄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아담의 범죄도 물론 한 범죄가 될 수 있겠지만 성경은 대표성을 가지고 말씀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담이 한 범죄를 했다고 해서 다른 사람이 범죄를 하지 않았는가 하면 다른 사람도 역시 범죄를 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대표성입니다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어떻게 생명을 얻는가를 말씀하기 위해서 한 범죄와 의의 한 행동을 비교를 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한 범죄를 했다고 하니까 마치 아담 한 사람으로 우리가 죄를 짓게 된 것으로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개인적으로는 다 아담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의의 한 행동입니다

그것을 말씀하기 위해서 한 범죄를 말씀을 하고 있고 그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르렀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분명히 아담은 우리 인류의 조상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아담이라서 범죄를 한 것이 아니라 우리 인생은 처음부터 지음을 받을 때 진토였다는 것을 성경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정죄란,

죄가 있다고 단정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죄가 있다고 단정을 받았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죄가 없었다면 정죄도 없습니다. 그러나 죄가 있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르렀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요한일서3:8절을 보겠습니다. (390)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

한 범죄입니다

그것을 도덕적인 죄로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담이 범죄를 한 것은 앞에서 말씀을 드렸지만 도덕적인 죄가 아니라 영적인 죄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은 것을 도덕적인 죄를 지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죄를 짓는 자마다 마귀에게 속해 있습니다.

사도 요한이 지금 무슨 죄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성경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마귀가 무슨 죄를 짓게 하고 있습니까? 도덕적인 죄를 짓게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도덕적인 죄로는 처음부터 우리 인생을 죽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도덕적인 죄로 정죄에 이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이 오셨습니다.

아니 주님은 만세 전부터 예정을 하셨습니다. 창세전부터 아담을 짓기 전부터 주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세상 죄를 지고 가시기로 예정이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아담의 범죄를 이 시대는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도덕적인 죄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자가 주님 앞에 끌려 왔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만약에 아담이 지은 죄가 도덕적인 죄라면 주님이 잘못하고 있든지 아니면 지금 사도 바울이 말씀을 잘 못하고 있습니다. 정말 이 문제를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사람이 왜 죽습니까?

우리가 도덕적인 죄를 지어서 죽습니까? 그것이 아니라 범죄를 해서 정죄에 이르렀기 때문에 사망이 왕 노릇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간음하다 잡혀온 여자를 정죄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르렀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정죄에 이른 한 범죄는 도덕적인 죄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선악과입니다

율법을 먹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담은 율법을 지키겠다고 한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선악과를 따 먹은 것은 율법에 가입을 한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마귀에게 속한 자는 죄를 짓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 한 자입니다. 그가 무슨 범죄를 했는가 하면 도덕적인 죄가 아니라 자기의 의를 드러내는 죄를 지었습니다.

바리새인입니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마귀의 자식들이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들이 도덕적인 죄를 지어서 마귀의 자식이라고 말씀을 하셨습니까? 그것이 아니라 범죄를 했기 때문에 주님이 마귀의 자식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범죄가 무엇인가 하면 그들이 지켰던 율법의 의를 보고 마귀의 자식이라고 말씀을 했습니다.

그들은 범죄를 했습니다.

아담과 같은 범죄를 했습니다. 아담의 한 범죄로 모든 사람이 정죄에 이르렀습니다. 그것을 요한일서에서는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 함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마귀가 무슨 죄를 짓게 하는 줄을 이 시대는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한 범죄입니다

그것은 도덕적인 죄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누구에게 마귀의 자식들이라고 말씀을 하셨는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럼 아담의 한 범죄가 무엇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단순하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 먹은 것이 아니라 율법을 지킴으로 해서 범죄를 했고 그것이 정죄에 이르렀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3:19절을 보겠습니다. (146)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르렀습니다.

사도 바울이 지금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 가를 알아야 합니다.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르렀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정죄가 무엇인가 하면 요한복음에서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한 범죄입니다

그 범죄가 무엇입니까? 이 시대 거의 모든 사람이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은 것을 도덕적인 죄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범죄는 도덕적인 범죄가 아니라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선악과는 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범죄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르렀습니다.

아담만 율법을 지켰습니까? 그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이 율법을 지켰습니다. 우리 역시 복음이 오기 전까지는 정죄를 이르는 범죄를 하면서 살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은 것은 단순히 도덕적으로 죄를 진 것이 아니라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 되어서 정죄에 이른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정죄입니다

예수님께서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혀온 여자를 정죄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에게는 마귀의 자식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왜 마귀이 자식인가 하면 율법을 지켰기 때문에 마귀의 자식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정죄에 이릅니다.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하면 정죄에 이릅니다. 정말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율법을 지키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더 사랑한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면 어두움에 있지 않고 율법을 지키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없다는 뜻으로 말씀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합니다.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누구를 더 사랑하고 누구는 덜 사랑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빛에 있으면 어두움을 미워하고 어두움에 있으면 빛을 미워한다는 말씀입니다.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르렀습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음으로 해서 많은 사람이 율법을 지키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을 바로 알지 못하면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 줄도 모르다가 사망을 당한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한 범죄입니다

그것으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르렀습니다. 이 정죄는 빛이 세상이 왔으되 사람들이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누가 어두움을 더 사랑했는가 하면 마귀의 자식들인 이스라엘이 율법을 지키면서 어두움을 더 사랑했다는 말씀입니다.

정죄를 당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누구를 정죄를 하셨는가는 성경을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바리새인들이 정죄를 당했습니다. 그런데도 이 시대 역시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문제는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이 지키는 것이 율법이라는 것을 알았는데 이 시대는 율법을 지키면서도 그것을 율법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한 범죄입니다

그것과 의의 한 행동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르렀습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은 것은 사망에 이르는 죄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모든 불의가 죄로되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가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정죄에 이르는 범죄를 많은 사람이 지었지만 의의 한 행동으로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다고 말씀합니다.

 

요한일서3:5절을 보겠습니다. (390)

그가 우리 죄를 없이 하려고 나타내신 바 된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한 범죄입니다

그리고 의의 한 행동입니다. 한 범죄는 육체의 사람을 대표하는 아담의 범죄입니다. 그리고 의의 한 행동은 영으로 살리심을 받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이루신 의입니다.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한 범죄입니다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르렀습니다. 그 정죄로 사망에 이르렀습니다. 이와 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한 범죄와 의의 한 행동을 비교를 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생명입니다

세상의 이성이 아닙니다. 세상은 내가 죄를 지었으면 내가 죄 값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의로운 행동을 했으면 내가 의롭다 함을 받습니다. 내가 의로운 행동을 했는데 다른 사람이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대표성을 가지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아담은 진토인 사람의 대표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의 생명의 대표입니다. 이 두 사람을 비교를 하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아담은 육체입니다

그리스도는 영입니다. 그리스도도 육체라면 이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영으로 살리심을 받았기 때문에 의의 한 행동으로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육체의 사람인 아담을 대표해서 말씀을 하고 있고 영으로 살리심을 받은 예수 그리스도를 대표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한 범죄입니다

아담의 사람은 모두가 이 한 범죄에 속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의의 행동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은 이 의의 한 행동에 속하게 되어 있습니다. 같은 사람이 아담의 사람도 되고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 육체입니다

아담의 사람입니다. 그래서 한 범죄의 영향을 그대로 받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의의 한 행동을 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습니다. 많은 사람이라고 하니까 아담의 사람이 의의 사람이 된 것으로 오해를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있는 사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죄가 없습니다.

죄가 없다는 말씀은 의롭다는 말씀입니다.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과 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습니다. 이 생명은 육체의 생명이 아니라 영의 생명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로마서5:19절을 보겠습니다. (246)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죄인으로 판정을 받았는데, 이제는 한 사람이 순종함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인으로 판정을 받을 것입니다.”

한 범죄입니다

그리고 의의 한 행동입니다. 이것을 이제 한 사람이 순종치 않음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죄인이 된 것과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아담과 예수 그리스도를 계속해서 비교를 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담의 사람입니다

육체의 우리는 아담의 사람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사도 바울은 아담과 예수 그리스도를 비교를 하면서 우리 아담의 사람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어서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을 얻는가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아담은 흙으로 지음을 받았고 예수 그리스도께는 하늘로서 오셨습니다.

전혀 다릅니다.

왜 사도 바울이 두 사람을 비교를 하면서 말씀을 하고 있는가 하면 우리에게 영의 사람인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이 어떻게 해서 되어질 수 있는가를 가르쳐 주기 위해서입니다. 아담의 사람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을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아담의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는 것으로 잘못 알고 있습니다.

우리 육체입니다

그것은 어떻게 해도 아담의 사람입니다. 그것이 변화가 되어서 의인이 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영의 생명을 의인화를 시켜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영의 생명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기록이 의인화로 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지 마치 우리 사람과 같이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의인입니다

이 세상에서 말하는 그런 의인이 아닙니다. 세상에서는 의로운 일을 한 사람을 의인이라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의인은 우리 사람을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람으로서 우리 안에 탄생이 되어 있는 영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이 순종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죄인이 되었습니다. 그것과 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의인이 되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과 같이 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늘 말씀을 드리지만 성경을 볼 때는 국어를 공부하시기 바랍니다. 아니 습관적으로라도 사전을 찾아보시기를 바랍니다. 같이 라는 단어를 잘 이해를 하시기 바랍니다.

같다는 것이 아닙니다.

앞에 있는 것과 같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한 사람이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이 되었습니다. 그것을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이제까지 배웠습니다. 그것과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죄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과 의인이 되는 것은 전혀 다른 본질의 것입니다. 하지만 의인이 되는 것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 죄인이 되는 것을 말씀을 하고 그것과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성경말씀의 의미를 알려고 하기보다는 그 단어를 아는 것으로 미사여구를 쓰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디모데전서2:4절을 보겠습니다. (338)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순종,

순순히 따르는 것을 사전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순종에 대해서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순종이라고 하면 자기들이 교회 안에서 어떤 행위를 잘하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순종이라는 단어가 나오면 다 그와 같이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사전적인 뜻에서 우리가 알겠지만 순순히 따르는 것이 순종입니다.

무엇에 순순히 따릅니까?

아무 것에나 순순히 따르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아들이 있습니다. 그 아들이 순종한다고 하면서 아버지의 말을 듣지를 않고 옆집 아저씨의 말을 잘 듣는다면 순종한다고 할 수 없습니다. 옆집 아저씨의 말은 잘 안 듣더라도 아버지의 말을 잘 들으면 그 아들은 아들로서 순종한다고 말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어떻습니까?

아버지의 말은 안 듣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무 상관이 없는 옆집 아저씨의 말은 아주 잘 듣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들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보는 눈이 다 소경이 되어 있다 보니까 자기가 누구에게 순종을 해야 하는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뜻이 무엇입니까?

물론 성경에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으라는 말씀입니다. 왜 믿으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믿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고 순종하는 일입니다.

무엇에 대해서 순종해야 합니까?

성경을 보면서도 자기가 무엇에 대해서 순종해야 하는 줄을 모르고 있다면 그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이 해야 하는 순종입니다.

아담입니다

그가 왜 에덴에서 쫓겨났습니까? 순종치 아니함으로 죄인이 되어서 쫓겨났습니다. 무엇에 대해서 순종치 아니했는가 하면 구원에 대해서 순종치 아니하였습니다. 선악과를 따 먹지 말라 정녕 죽으리라고 말씀을 하셨지만 아담은 순종치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죽는 것을 원하신 것이 아니라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선악과입니다

그것을 따 먹은 것은 생명에 대해서 순종치 않았습니다. 그냥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어느 말씀을 순종치 아니한 것이 아니라 구원에 대해서 순종치 아니했다는 말씀입니다. 아니 아담은 죄가 없는 상태로 지음을 받았으니까 선악과를 따 먹지 않으면 영생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담은 영생에 대해서 순종을 하지 않아서 정녕 죽고 말았습니다.

구원입니다

행위를 하는 것을 가지고 순종한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늘 말씀을 드리지만 그것은 이 세상 사람도 아는 초보입니다. 그런 초보적인 행위를 하면서 순종한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기를 원하시고 있습니다.

구원입니다

어떻게 받습니까? 이것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을 하려면 믿어야 합니다. 다른 어떤 행위를 잘했다 해도 그것은 사람의 이성에 따르는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면 여러분은 순종하지 않은 사람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아담은 선악과를 따 먹는 순간에 정녕 죽으리라는 그 말씀대로 사망이 왕 노릇 했습니다. 아담에게 순종은 선악과를 따 먹지 않고 에덴에서 생명나무의 과실을 먹으면서 영생을 하는 그것입니다. 그러나 아담은 순종치 아니함으로 말미암아 영생을 얻지 못 했습니다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어떤 행위를 해도 하나님께 순종할 수 없습니다. 순종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받는 그것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 시대는 순종의 의미도 모르고 그저 행위를 잘하는 것이 순종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도리어 그 행위가 구원을 받는데 있어 순종하지 못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왜 순종하지 못하게 하는가 하면 그것으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기 때문입니다.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아니 순종에 대해서 먼저 아시기 바랍니다.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이 순종을 하는 것인가를 성경에서 먼저 알고 나서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그것도 모르면서 행위에 열심을 내면서 순종한다고 하는 것은 도리어 그 행위로 순종치 않게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담은 순종치 않았습니다.

아담은 구원을 받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는 이미 에덴에 있었습니다. 그가 순종하는 것은 선악과를 따 먹지 않는 일입니다. 선악과만 따 먹지 않으면 그는 에덴에서 영원히 살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구원을 받는 것임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사실 아담은 이미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정녕 죽지만 않으면 됐습니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구원을 받지 못 했습니다. 아니 구원을 잃어 버렸습니다. 에덴은 천국을 예표 하는 곳입니다. 그런데 아담은 순종치 않아서 그 에덴에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무엇에 대해서 순종해야 하는가 하면 구원에 있어서 순종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무엇에 대해서 순종해야 하는 줄을 모르고 순종이라는 단어를 보면 행위를 떠올리고 있습니다.

시편51:14절을 보겠습니다. (839)

하나님이여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여 피 흘린 죄에서 나를 건지소서 내 혀가 주의 의를 높이 노래하리이다

요한복음14:10절을 보겠습니다. (172)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구원의 하나님이십니다.

시편을 보면 구원에 대해서 많은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입니다.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사단에게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왜 하나님을 믿는가 하면 구원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믿고 있습니다.

구원입니다

만약에 이 구원이 없다면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성경을 왜 기록하셨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구원해 주시는 가를 가르쳐 주기 위해서 성경을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아무리 강조를 해도 지나치지 않는 것이 우리 안에 탄생이 되는 생명이고 그 생명의 부활입니다. 그것을 구원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왜 오셨습니까?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해 주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주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입니다. 만약에 우리의 구원이 없다면 주님은 괜스레 이 세상에 오신 것이 되고 또 십자가도 괜히 혼자서 지신 것밖에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구원입니다

그것이 아버지의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하신 모든 일이 다 아버지의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그 일이 무엇인가 하면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고 그 일을 위해서 순종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아담은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순종하지 않아서 우리가 죄인이 되어서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사람이 되고 말았고 사망이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아버지의 일을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 육체가 아니라 영으로서 구원을 받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아버지의 일을 순종하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순종하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일에 있어서 순종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었습니다. 육체가 의인이 된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거하심으로 말미암아 의인이 되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 한 사람의 순종으로 우리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었습니다.

아담 한 사람입니다

그가 순종을 하지 않음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아담의 자손은 모두가 죄인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성경에서 규정을 하고 있습니다. 아담 한 사람은 순종치 아니함으로 죄인이 되어서 의인이 하나도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순종하셨습니다. 그럼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이라고 하니까 마치 아담의 자손이 다시 의인이 된 것으로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 죄인은 어떻게 해도 다시 의인이 될 수 없습니다.

죄인입니다

세상 말에 걸레는 빨아도 걸레라는 비속어가 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죄인은 어떻게 해도 죄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죄인을 구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죄인이 구원을 받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한 사람이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 라고 말씀을 하고 있지 그와 같은 것이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와 같이 입니다.

아담이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이 되었습니다. 그와 같이 그와 비슷하게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었습니다. 성경의 비유와 예표를 잘 깨달아야 합니다. 아담이 순종치 아니함으로 아담의 자손은 모두가 죄인이 되었습니다.

그와 같이 라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 순종하심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이 많이 의인이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쉽게 말씀을 드리면 이렇습니다. 아담의 자손은 죄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자손은 의인입니다. 아담의 자손은 육체를 말씀하고 있고 그리스도의 자손은 영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비교입니다

똑같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와 같은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사람은 육의 사람이 있고 영의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 성도는 육의 사람도 되고 영의 사람도 됩니다. 그러나 이 영의 사람은 지금 내 육체가 느끼지도 그렇다고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믿음으로 내 마음으로 믿어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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