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니라(요6:63.)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약속이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

로마서 강해(오직 믿음)

26-2,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윤주만목사 2024. 7. 6. 16:07

로마서3:16절을 보겠습니다. (243)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우리나라 최고의 부자입니다

그가 가난하다고 하면 누가 믿겠습니까? 아니 누가 그것을 인정하겠습니까? 그러나 이건희 회장에게 물어 보시기 바랍니다. 그 역시도 자기 겸손함을 나타내기 위해서 자기가 부자라고 하지 않을 것이 분명합니다. 어느 재벌이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부자라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율법도 마찬가지입니다

십일조를 내면서 내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이 성립이 될 수 있습니까? 자기가 아무리 가난하다고 할지라도 그는 부자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십일조라는 재물이 있는데 어떻게 가난할 수 있습니까? 주일이라는 재물이 있는데 어떻게 가난할 수 있습니까? 재물이 있는 사람은 가난한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율법은 재물입니다

그 재물이 여러분에게 한 가지라도 있는 이상은 다 부자가 된다는 것이 성경의 정의입니다 내가 내 심령이 가난하다고 해서 가난한 것이 아니라 그런 재물이 없어야 가난한 자가 된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부자들이 가난한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가식입니다

그리고 겸손의 모양입니다 부자가 되어 있는 사람은 아무리 자기를 가난하다고 해도 가난한 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부자라는 것을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율법의 한 모양 종교적인 행위의 한 모양이라도 있다면 여러분은 세상에 대해서 아니 그런 것을 하지 않고 있는 성도들에 비해서 부자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 부자에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고생이 임하고 울며 통곡을 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으로 부자가 되어 있는 사람들에게 고생이 임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이 시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지키고 있는 그 율법의 행위를 믿음이라는 말로 미화를 시키고 있습니다.

너희에게 임할 고생입니다

교회 안에서 율법을 지켜서 부자가 되어 있는 사람들에게 임할 고생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성경은 너희에게 임할 고생이라고 부자들에게 경고를 하고 있지만 사람들은 교회 안에만 들어오면 부자가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들으시기 바랍니다.

고집을 부르지 마시고 들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에게 임할 고생이 통곡으로 변한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믿음이라는 말에 미혹을 당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에서는 분명히 율법을 지키는 사람을 다 부자로 비유로 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율법을 지키고 있으면서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한 부자입니다

그 한 부자가 어느 한 사람을 말씀하고 있습니까? 그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율법을 지키고 있는 사람을 대표하는 한 부자입니다 율법을 한 가지라도 지키고 있다면 다 한 부자라는 말씀입니다 그 부자가 음부의 고통 중에 들어가 있다는 것을 주님께서 비유로 말씀을 하고 있지만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은 다 부자가 되어 있습니다.

울며 통곡합니다.

어느 정도인가를 아시기 바랍니다. 이 부자가 음부의 고통 중에 나사로의 손끝에 물을 한 방울 찍어서 자기 혀를 서늘하게 해 달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또 주님께서 구더기도 죽지 않는 꺼지지 않는 불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사람들은 그저 남의 이야기를 보듯 하고 있습니다.

교회입니다

그 안에는 생명을 얻는 성도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 숫자가 지극히 적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수의 사람들이 다 율법의 종이 되어서 주님이 오실 때 고생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지만 성경에서 비유를 모르다 보니까 소경이 되어서 소경이 인도하는대로 따라다가가 고생하며 통곡을 하게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시편1:1절을 보겠습니다. (805)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어느 길에 있습니까?

율법주의자는 파멸과 고생의 길에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시편에서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죄인의 길이 누구의 길입니까? 교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죄인의 길입니다

성경은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생명을 얻는데 있어서 반드시 두 가지 길 중에 어느 한 가지 길을 가게 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죄인의 길에 서 있으면 파멸과 고생이 따라오게 되어 있다는 말씀입니다 자기가 어느 길에 서 있는 줄을 모르면 그는 결국에는 파멸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길이 어디에 있는가 하면 교회 안에 있다는 말씀입니다 교회 안에 파멸의 길로 가는 죄인의 길에 서 있는 사람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자기 복이 어디에 있는 줄을 모르고 그저 교회 안에서 성도라고 하면 다 그런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죄인의 길입니다

교회 안에서 믿지 않는 사람의 길이라는 말씀입니다 교회 안에서 주여 주여 하고 있지만 믿지 않고 있는 사람에게 파멸과 고생이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나는 믿는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믿음은 모든 사람이 것이 아니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라고 분명히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을 드립니다.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까?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가 아무리 진심이라고 이야기를 해도 성경이 믿지 않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고 그가 서 있는 길이 죄인의 길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다수를 따라가고 있습니다, 다수를 따라 간 이스라엘이 믿지 않았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지만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성경은 교회 안에 있는 다수가 이렇게 파멸과 고생의 길로 가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길을 가고 있으면서도 사람의 이성으로는 자기가 가고 있는 길이 어느 길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없어서 다수를 따라 가고 있습니다.

로마서3:17절을 보겠습니다. (243)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그들은 평화의 길을 알지 못한다."”

그들입니다

누구입니까? 교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 율법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에게 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들은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해서 율법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파멸과 고생의 길이 있습니다.

그리고 평강의 길이 있습니다. 교회 안에 들어와 있는 모든 사람 앞에는 이 두 길이 놓여 있습니다. 이 두 가지 길을 동시에 걸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어느 한 길을 가면 어느 한 길은 못 간다는 것을 성경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이렇게 비교를 해서 말씀을 할 때는 반드시 둘 중에 어느 한 길을 간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비교입니다

백과사전에서 이 비교에 대해서 어떻게 말을 하고 있는 가를 알아야 합니다. 두 가지 이상의 사물의 크기, 성질, 모습, 내용 등의 정도를 견주어서 어느 한 사물을 선명히 표현하는 기법이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두 가지를 비교를 해서 어느 한 가지를 명확하게 나타내는 것을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고 성경을 보아야 합니다.

성경에서 이렇게 두 가지를 가지고 비교를 하고 있으면 어느 한 가지를 나타내기 위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파멸과 고생의 길이냐 평강의 길이냐를 지금 비교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꼭 집어서 비교법이라고 해야 비교를 하는 것이 아니라 문장을 보고 그것을 이해를 하고 성경을 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두 가지 길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 길 중에 어느 길을 갈 것인가를 비교를 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느 한 길을 가면 다른 길은 가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파멸과 고생의 길은 평강의 길을 가지 못하고 또 평강의 길을 가고 있으면 파멸과 고생의 길을 가지 않는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비교를 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는 반드시 이렇게 두 길이 있는데 누구는 파멸과 고생의 길로 가고 누구는 평강의 길로 가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내가 어느 길을 가고 있는 가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성경에서 이런 문자를 아는 것으로 자기들은 평강의 길을 가고 자기들과 다른 사람은 파멸과 고생의 길로 간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누가 갑니까?

누가 평강의 길을 가고 누가 파멸과 고생의 길을 가는 가를 명확하게 알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제까지 사도 바울이 율법을 지키는 사람들이 파멸과 고생의 길로 간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그들이 파멸과 고생의 길로 가고 있는가 하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파멸과 고생의 길로 가고 있는 그 사람들이 자기들이 평강의 길로 가고 있다고 굳게 믿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정말 성경을 모르면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를 모르고 아주 평안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모르고 있다가 파멸과 고생이 갑작스럽게 찾아온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인생입니다

그들의 지혜로는 스스로 평강의 길을 갈 수 없습니다. 그가 아무리 지혜가 있다 해도 그 길은 성령이 오셔야지만 갈 수 있다는 것을 성경에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평강의 길을 알지도 못하는 그들이 구원을 받은 것과 같이 교회 안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사야59:8절을 보겠습니다. (1040)

그들은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며 그들의 행하는 곳에는 공의가 없으며 굽은 길을 스스로 만드나니 무릇 이 길을 밟는 자는 평강을 알지 못하느니라

누구입니까?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이스라엘에게 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은 평강의 길을 알지 못 했습니다. 늘 말씀을 드리지만 성경은 현재진행형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스라엘만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이 시대 교회 안에 있는 절대 다수 역시도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공의대로 소송하는 자가 없습니다.

진리대로 판결하는 자도 없습니다. 허망한 것을 의뢰하고 거짓을 말하며 잔해를 잉태하며 죄악을 생산하며 독사의 알을 품으며 거미줄을 짜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짠 것으로는 옷을 이룰 수가 없고 그 행위는 죄악의 행위고 그 발은 행악하기에 빠르고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기에 신속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사야의 말씀을 그대로 인용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며 그들의 행하는 곳에는 공의가 없으며 굽은 길을 스스로 만드나니 무릇 이 길을 밟는 자는 평강을 알지 못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누가 이렇게 하고 있는가 하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이스라엘이 이렇게 했다는 말씀입니다

왜 이렇게 합니까?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이스라엘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시대는 평강의 길을 알고 있습니까?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고 모두가 파멸과 고생의 길로 간 것과 같이 이 시대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들이 행하는 곳에 공의가 없습니다.

공의로는 의가 없습니다. 그들은 율법의 의만 알았지 공의를 모르고 살았습니다. 이스라엘이 공의를 모른다고 했습니까? 그들도 나름대로 공의를 알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율법의 의 때문에 공의를 모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율법에 가지고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자 주님께서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의 의로 판단을 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공의의 의를 모르는 이스라엘은 외모로 사람을 판단했습니다. 그렇게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는 그들에게는 평강의 길이 보이지가 않았습니다.

공의가 없습니다.

그리고 굽은 길을 가고 있습니다. 율법의 행위가 그렇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사람은 공의도 모르고 또 굽은 길을 가기 때문에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율법을 지키는 일이 어떠하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지만 사람들은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잠언3:17절을 보겠습니다. (913)

그 길은 즐거운 길이요 그 첩경은 다 평강이니라

그 길은 즐거운 길입니다

그 첩경은 다 평강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어느 길이 평강이 있는가를 잠언에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이 평강의 길을 가기보다는 굽은 길로 가다가 결국에는 파멸과 고생의 길로 들어갔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도입니다

우리는 평강의 길을 알고 있습니다. 그 길이 무엇이라는 것을 잠언에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 첫째가 내 아들아 여호와의 징계를 경히 여기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신약에서는 징계가 없으면 사생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꾸지람을 싫어하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지혜가 없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는 꾸짖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꾸지람을 듣지를 않고 있습니다. 지혜를 가지라고 꾸짖고 있지만 사람들은 자기들이 지혜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그 보는 사람들에게 꾸짖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성경을 보면 알겠지만 책망과 꾸지람이 늘 있습니다.

성경을 왜 봅니까?

내가 잘하는 것을 알기 위해서 봅니까? 내가 이것을 하고 있고 또 저것을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고 있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 보고 있습니까? 그것이 아니라 성경은 그 자체가 꾸지람입니다. 왜 꾸짖고 있는가 하면 우리 인생의 지혜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성경이 꾸짖으면서 우리에게 지혜를 얻으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이 시대는 성경을 보면서 자기들이 다 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이 하나님을 잘 믿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꾸짖고 있지만 이스라엘이 그랬던 것과 같이 이 시대 역시 자기들이 하나님을 잘 믿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혜를 얻는 자입니다

그리고 명철을 얻는 자입니다 지혜와 명철을 얻게 하기 위해서 성경은 우리를 꾸짖고 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지혜를 얻고 명철을 얻어야 하늘의 복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혜를 얻으라고 꾸짖고 있지만 지혜가 없는 그들이 지혜를 구하지도 않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너무 똑똑해서 자기들이 지혜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지혜입니다

그것을 신약에서는 진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진리를 알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구약에서는 지혜를 얻으라고 꾸짖고 있고 신약에서는 성령이 오셔서 책망하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꾸짖고 책망하시는가 하면 사람이 알고 있는 지혜가 잘못되었기 때문에 꾸짖고 책망하고 있지만 도무지 받아들이지를 않고 있습니다.

그 길은 평강입니다

어느 길이 평강이 있는가 하면 지혜를 얻는 길이 평강이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지혜도 없으면서도 자기들이 지혜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지혜가 없어서 평강의 길을 알지도 못하면서 스스로가 지혜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지혜입니다

은을 얻는 것보다 낫고 그 이익이 정금보다 낫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지혜는 진주보다 더 귀하니 너의 사모하는 모든 것으로 이에 비교할 수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우편 손에는 장수가 있고 그 좌편 손에는 부귀가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만 그렇습니까?

이 시대 역시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길이라고 하니까 우리가 걷는 길을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영의 일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영의 일을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왜 사람이 율법주의에 빠지고 있는가 하면 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혜입니다

이 지혜를 신약에 와서는 하나님의 지혜이신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성경이 내게 대해서 기록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경을 보면 복음이 보여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복음을 보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율법주의에 빠져 들어가고 있습니다.

성경입니다

그가 아무리 성경에서 많은 지적인 것을 알고 있다고 해도 하나님의 지혜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면 파멸과 고생의 길로 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성경에서 이 지혜를 깨닫기 보다는 율법의 행위에 빠져 들어가고 있습니다.

지혜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지혜가 있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이 얼마나 깊고 오묘한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안다고 해도 겨우 구원에 대한 정도밖에는 알 수 없습니다. 평생을 성경을 보면서 지혜를 구해도 구원을 받는 그 정도고 그래서 고린도전서에서 우리가 지금은 청동거울을 보는 것과 같이 희미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지혜가 있는 성도입니다

평강의 길을 알고 있는 성도입니다 그 성도도 성경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것이 희미하게 보이는 청동거울을 보는 것과 같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겨우 인간의 지식을 가지고 아는 것을 가지고 이 시대는 자기들이 지혜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 지식으로 파멸과 고생의 길로 가고 있습니다.

누가복음19:42절을 보겠습니다. (129)

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왜 알지 못 합니까?

이스라엘이 왜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고 파멸과 고생의 길을 갔습니까? 그것을 주님께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멸망을 당할 이스라엘을 보고 주님께서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이 누구입니까? 그들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선민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어려서부터 성경을 보았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기 위해서 자기들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고 또 흠 없는 율법의 의를 가질 정도로 자기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에 대해서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런 그들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평화에 관한 일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평강의 길을 알지 못했다는 말씀입니다 왜 알지 못 했는가 하면 그들의 눈에 숨기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고 있는 이스라엘에게 주님께서 네 눈에 평강의 길이 숨기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만 숨기운 것이 아니라 이방의 교회 역시도 숨기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입니다

그들 전체의 눈에 평강의 길이 숨기웠습니다. 물론 주님이 오셔서 죄인을 찾아서 회개를 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오시지 않았다면 이스라엘 전체는 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고 율법주의로 살다가 파멸과 고생의 길로 갔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누구의 눈에 이 평강의 길이 숨기웠는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시대 역시 이 길이 숨기워서 이스라엘과 같이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자기들이 지키고 있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평강의 길이 숨기워 있지만 그것을 깨달을 수 있는 지혜도 없고 또 스스로가 지혜가 있다고 하면서 구하지도 않고 있습니다.

지혜가 있습니까?

율법을 지키면서 지혜가 있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야고보서를 시작하면서 지혜를 구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구하는 자에게 꾸짖지 않고 후히 주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문자를 아는 지혜를 구하라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서 평강의 길을 갈 수 있는 지혜를 구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평강의 길을 알고 있습니까?

아니 누구나 성경을 보면 그것을 알 수 있습니까? 만약에 평강의 길을 알고 있다면 절대로 율법을 지키지 않고 있습니다. 늘 말씀을 드리지만 그가 아무리 지혜가 있다고 주장을 해도 단 한 가지라도 자기 행위로 의를 나타내고 있다면 그는 지혜가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어떻습니까?

이스라엘만 평강의 길을 몰랐습니까? 사도 바울이 이사야의 말씀을 인용을 했을 때는 이스라엘만 그런 것이 아니라 앞으로 이방의 교회 역시도 똑같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지혜를 구하지 않으면 사람의 지식으로는 아무리 알고 싶어도 깨달을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에게만 숨기운 것이 아닙니다.

이방의 교회 역시 숨기웠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지혜가 없고 이방의 교회 안에 있는 사람은 지혜가 있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지금 이방의 교회는 이스라엘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소경입니다

성경을 아무리 보아도 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솔직히 율법 단 한 가지만 보아도 이 시대는 완전히 숨기웠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누구에게 이 말씀을 하고 있는 줄을 모르고 자기들은 다르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로마서3:18절을 보겠습니다. (243)

저희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그들의 눈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빛이 없다."”

평강의 길을 알지 못 합니다

저희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두려움에 대해서 바로 알아야 합니다. 우리 성도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가 아닙니다. 앞으로 로마서에서 이 두려움에 대해서는 다시 말씀을 드릴 기회가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간단하게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입니다

그러니까 사랑이 넘치는 하나님이라는 말씀입니다 나를 사랑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 주셨습니다.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아는 것에 있어서는 우리는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내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있는 성도는 절대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를 않습니다. 그러니까 한번 구원을 하신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나를 다시 파멸에 빠지지 않게 하십니다.

구원하셨습니다.

다시 파멸에 빠지지 않게 하십니다. 그런 면에 있어서는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있는 성도는, 구원을 받은 성도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내가 설령 죄를 진다해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일을 하는데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성도로서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 성도들에게 주님께서 부탁하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복음을 위해서 살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평강의 길을 사람들에게 가르쳐 주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이 이제는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일을 합니다.

그 일을 하는데 있어서 우리 성도는 자유 하는 마음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나에게 주어진 분복과 은사를 가지고 이 일을 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설령 누가 더 많이 하고 누가 적게 한다고 해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나에게 주어진 것을 가지고 주님께서 부탁하신 대로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조금 잘합니까?

아니 누구는 조금 마음에 걸릴 정로도 못하고 있습니까? 그럴지라도 성도는 구원의 확신이 있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또 성도는 율법을 지키지 않을 지라도 전혀 두려워하지를 않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율법주의자는 어떻습니까?

자기가 십일조를 내고 있고 주일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서 여러 가지 율법의 행위가 있습니다. 그것을 잘 할 때는 두려워하지 않지만 조금이라도 못할 때는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영의 일을 하는 성도는 두려워하지 않지만 의문의 일을 하는 사람은 교회 안에서 그 의문의 일을 하는 정도에 따라서 두려워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악을 행하고 있습니다.

불의로 진리를 막고 있습니다. 그렇게 의문에 일을 하고 있는 율법을 지키고 있는 사람을 성경에서는 악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일이 악이라는 것을 꿈에도 모르고 있습니다. 이 시대 역시 마찬가지로 율법이 악이라는 것은 어느 누구도 모르고 있습니다.

늘 말씀을 드립니다.

성도는 율법을 지키지 않고 있습니다. 왜 지키지 않는가 하면 그것이 악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지혜가 있기 때문에 지키지를 않습니다. 그러나 율법주의자의 생각에는 그것이 악이 아니라 의롭고 선한 일입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오시지 않고는 이것을 깨달을 수 있는 지혜가 사람에게는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성도는 악을 행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가라지는 악을 전혀 두려워하지를 않고 있습니다. 왜 두려워하지 않는가 하면 그것이 악이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교회 안에서 악을 행하면서도 전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고 파멸과 고생의 길을 가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를 않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누가 그렇습니까?

교회 안에 있는 절대 다수의 사람이 그렇게 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고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를 흘리는데 빠르고 있습니다. 이러한 일을 하고 있으면서도 교회 안에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세상의 이치입니다

세상에서도 자기가 이러한 일을 하고 있다면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이러한 일들이 사람의 이성에는 다 옳게 여기기 때문에 전혀 두려워하지를 않고 있고 도리어 그 일에 열심을 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왜 두려워하지를 않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들이 하고 있는 일들이 사람의 이성에는 의롭기 때문입니다 또 이 시대는 그런 나쁜 의미로 기록이 되어 있는 말씀을 문자 그대로 보면서 자기들은 그러한 일을 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서 똑같은 일을 하고 있는 그들이 두려워하지를 않고 있습니다.

우리말에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성경적으로 말을 하면 지혜가 없으면 두려움이 없다고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지혜가 있으면 자기 영혼의 구원이 오직 하나님의 주권이고 은혜이기 때문에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지만 지혜가 없으면 악을 행하면서도 용감하게 그 일에 열심을 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을 모르면 어떻게 되는 가를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성경을 모른다고 했습니까?

그들은 자기들보다 성경을 더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려서부터 성경을 보았고 자기 조상대대로 하나님을 믿었던 백성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성경을 잘 안다고 자부를 했지만 그들은 지혜가 없어서 용감했습니다. 그 용감함이 결국에는 파멸과 고생의 길로 가고 말았다는 말씀입니다

지혜입니다

지혜를 얻는 성도만이 평강의 길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라는 교회도 그렇고 이방의 교회도 역시 지혜를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 영혼 구원에 대해서 전혀 두려워함이 없이 용감하게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용감합니까?

율법을 누가 지켜야 하는 줄을 모르고 자기들이 율법을 지키겠다고 객기를 부리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율법을 누가 지켜야 하는 줄을 모르니까 그 율법을 항상 다 지키지 못하면 저주를 받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용감하게 자기들이 지키겠다고 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면서도 전혀 두려워함이 없는 것이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시편36:1절을 보겠습니다.(827)

악인의 죄얼이 내 마음에 이르기를 그 목전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다 하니

악인입니다

이제까지 로마서를 통해서 누가 악인인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악인들은 자기들이 악을 행하면서도 전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를 않고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 교회를 보시기 바랍니다. 율법을 지키면서도 전혀 두려워하지를 않고 도리어 그것을 자랑으로 삼고 심지어는 자기들이 지킨 그 율법의 행위를 가지고 간증을 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 합니까?

자기가 행하는 것이 악이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십일조를 내고 주일을 지키고 또 예배를 드리고 찬송가를 부르고 불의의 삯을 위해서 기도를 하고 있고 예배를 드리면서 모든 의식이 종교에 의해서 율법화 되어 있는 행위를 하고 있으면서도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똑같습니다.

이스라엘이 재사에 빠져 있으면서도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이방의 교회 역시 제사에 빠져 있으면서도 그것을 전혀 두려워하지를 않고 있습니다. 왜 두려워하지를 않고 있는가 하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고 다 치우쳐 한 가지로 악을 행하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깨달을 수 있는 지혜가 그들에게는 없기 때문입니다

누가 두려워합니까?

이 시대 모두가 율법을 지키면서도 누가 두려워하고 있습니까?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자기들이 하나님의 성도라고 하면서 자랑을 하고 있습니다. 십일조를 내면서 자기가 이러한 믿음이 있다고 자랑하고 있고 주일이라는 날을 지키면서 수많은 율법을 지키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자기들의 믿음이라고 하면서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너무 용감합니다.

이스라엘이 지혜가 없어서 자기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면서도 용감했습니다. 그들이 어느 정도로 용감했는가 하면 그 죄 값을 자기들과 자기 자손들이 받겠다고 하면서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용감하게 말한 그대로 갚아 주셨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율법의 행위 아래 있는 사람은 저주를 받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저주를 받는다는 말씀을 성경에서 보고도 율법을 지키고 있다는 것을 용감하다는 말로 밖에는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들은 분명히 파멸과 고생의 길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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