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니라(요6:63.)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약속이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

은혜와 진리의 말씀

168강,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윤주만목사 2019. 8. 26. 06:27


168,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마태복음 10:34-39절을 보면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세상의 생각과 성경은 다릅니다.

이성적으로 볼 때 그것이 분명히 맞는다고 생각하는 그것이 성경적으로 볼 때는 오히려 진리에 반하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 것을 분별하지 못하면 바른 믿음을 가질 수 없게 되고 또 아주 작은 문제로 인하여 구원의 큰 물줄기가 다른 곳으로 흘러 갈 수도 있습니다.

 

의가 무엇이냐 하는 그 부분만 봐도 그렇습니다.

세상 사람들 모두가 의롭다 해도 성경적으로 볼 때는 그것이 의가 아니라 오히려 악한 것으로 말씀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법을 지키고 죄를 안 짓는 것이 세상 모든 사람들의 기준으로 볼 때는 의롭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의는 그것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아니 의에 대해서 대적을 하고 있습니다.

법을 잘 지키고 죄를 안 짓는 그 의와 성경에서 말씀을 하고 있는 의는 서로 싸우고 있습니다. 싸우는 정도가 아니라 그것은 구원을 받느냐 못 받느냐 하는 심각한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이 두 가지 의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아니 친하게 지네고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정말 치열할 정도로 싸우고 있는데 교회 안에 있는 신앙인들은 아주 잘 타협을 하고 있고 조화를 절묘하게 이루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의롭게 사는 것이 나쁘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성도가 의롭게 살기를 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두 의가 싸웁니다.

이 문제는 구원에 대한 문제입니다

그러나 구원 외적인 문제에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세상 사람들보다 더 의롭게 살아가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의롭게 살아가려고 노력을 하는 그 순간에 싸워야 할 두 의가 서로 타협을 이룬다는 사실입니다 타협을 이루는 순간 사실 구원은 멀어졌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럼 이렇게 말 합니다

타협을 하지 않으려면 그럼 의롭게 살지 말라는 것이냐는 질문을 던지고 이성적인 생각에 자리하고 있던 그것에서 심각하게 혼란을 겪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이 의롭게 사는 것이 결코 나쁜 일이 아닌데 그것이 구원을 방해하는 가장 절대적이 문제라면 도무지 이해를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참 어렵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문제에서 돌파구를 찾지 못하는 순간 그의 믿음은 거짓이 되고 그는 결코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 세상 사람보다 더 의롭게 살아야 하는데 그 의가 성경에서 말씀하는 의와 싸우고 있다는 것을 모르면 그는 이 세상 종교를 믿는 사람과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가 말하는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 대상만 바뀌었을 뿐이지 사실 부처를 믿는 것과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같은 사상에서 같은 의를 추구하고 있다면 그것은 단지 이름만 바뀌었을 뿐이지 참 진리를 찾아가고 있는 것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이런 숙제를 풀어야 합니다.

만약 그 숙제가 안 풀리고 아직도 의문으로 남아 있고 여기는 이 말씀 저기는 저 말씀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가 되면 그는 진리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이 세상의 사상을 전하고 있을 뿐이며 그것을 따라가고 있을 뿐입니다

 

세상에서 좋은 것이 성경에서는 나쁜 것이 될 수 있습니다.

또 세상에서 좋은 것이 성경에서도 좋은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세상에서 요구하는 것이 성경에서 요구할 수도 있고 세상에서 요구하는 그것이 성경에서는 대적하는 것이 되기도 합니다.

 

이런 문제를 분별할 수 있는 기준은 바로 구원문제입니다

여러분에게 구원론에 정확하게 자리하고 있다면 내가 왜 의롭게 살아가야 하는 가를 알 수 있고 또 그렇게 의롭게 살아가고 있는 그 의가 하나님의 의를 대적하고 있다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경계를 정확하게 분별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타협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혼란을 겪게 됩니다.

이 말씀도 맞는 것 같고 저 말씀도 맞는 것 같고 나중에는 너무 어려워 그냥 포기를 하고 맙니다. 더 이상 알아가 봐야 머리만 아프고 당장 현실적인 문제도 아니니까 회피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싸움을 하지 않고 지혜를 구하지 않고 하는 사람은 결단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영의 문제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아주 쉽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고와와 과부 그리고 나그네 그들이 구원을 받으려면 정말 쉽게 가르쳐 주지 않으면 불가능하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그렇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고도 우리가 구원에서 멀어질 것을 생각하시고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 주셔서 감동을 받게 해 주셨습니다.

 

하지만 진리에 대해서 인도함을 받기를 원치 않고 있습니다.

그냥 다른 사람들이 전하는 그 말씀을 무조건 신뢰를 하는 것은 한 마디로 내 영혼을 그 사람에게 맡기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성경을 보려하지도 않고 다른 사람이 전하는 말씀에 대해서 의문을 가지려 하지도 않습니다. 마치 그것이 불신하는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사실은 포기하는 것이 불신입니다

내가 진리에 대한 열정을 갖지 않는 자체가 불신입니다

 

34,“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주님이 화평을 주시러 오시지 않았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평강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또 우리와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시려고 스스로 화목 제물이 되셨습니다. 그런 예수님께서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오셨습니다.

지금 우리가 화평을 누리고 있는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단번 속죄 제물이 되셔서 이 세상 죄를 지고 가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스스로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화평, 화목하고 평안한 것을 화평이라고 합니다.

이 세상은 누구에게 속해 있습니까? 지금 이 말씀은 이스라엘에게 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모두 사단에게 속해 있었습니다. 율법주의에 빠져 있는 이스라엘은 모두가 사단에게 미혹이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스라엘에 오셨을 때 어떠했습니까?

그들은 모두 세상에 빠져 있었습니다. 율법이 성행 했고 그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았지만 하나님과는 거리가 멀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런 이스라엘에 예수님이 오시니까 당연히 대적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화평을 주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뿐 아니라 이 세상 모두는 다 사단에게 미혹이 되어 있기 때문에 사단에게서 그들을 구원하시려면 싸움을 하셔야 했습니다. 바로 그 싸움을 하기 위해서 검을 주시러 왔습니다.

 

에베소서6:17절을 보면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전쟁입니다.

사단과의 싸움에서 이기려면 반드시 전쟁을 해야 하고 그 전쟁에서 이기는 방법은 오직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다른 것으로 우리가 사단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우리는 무조건 집니다.

아담이 졌고 또 이스라엘이 졌다는 것을 성경을 통해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길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아직도 무지한 자들은 아담이 진 것 이스라엘이 진 것을 이기겠다고 아등바등하면서 육체를 벗어 버리려고 불자들처럼 해탈의 경지에 오르려고 합니다.

 

왜 성경을 보아야 하는 가

또 왜 우리에게 보혜사 성령이 임재 하셔야 하는가를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만약 보혜사가 임하시지 않고 또 성경을 보지 않는다면 그는 구원의 싸움에서 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미 져 있는 세상과 싸우려면 당연히 성령이 임재 하셔서 싸워야 합니다.

 

처음에 의에 대해서 말씀을 했습니다.

이 세상의 의는 법을 잘 지키고 죄를 짓지 않는 것을 의라고 말 합니다

그러나 성령이 오시면 이 의에 대해서 책망을 하신다고 요한복음16장에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책망을 하신다는 말씀은 아주 순화적인 말씀이고 사실은 싸운다는 말씀입니다

 

싸워서 이기게 하기 위해서 검을 주시러 오셨습니다.

그 검이 우리에게 있으면 법을 잘 지키고 죄를 안 짓는 그 의에 대해서 싸움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진짜 의 예수님께서 하나님께로 올라가신 그 의를 믿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세상 적인 의로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만 우리에게 성령의 검이 주어지면 싸우게 되어 있습니다.

 

세상과 화평을 하면 싸움을 할 수 없습니다.

제가 지금 세상과 무조건 싸우라는 것이 아니라 진리에 대해서 싸워서 구원을 얻으라는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간적으로는 세상과 어떻게 하든지 화평을 해서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슬기롭게 해서 그들을 구원해야 합니다.

 

그러나 진리에 대해서는 세상과 싸워야 합니다.

이 세상의 율법주의에 대항을 해서 싸우려면 반드시 성령의 검 하나님의 말씀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니까 성경 전체에 있는 아무 말씀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인생들이 구원을 받는 그것입니다

 

35,“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들이 하나님을 믿는데 있어서 가족과 불화를 하면서 믿는 것을 원치 아니하십니다. 만약 그 자녀가 아비와 그리고 그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를 하는 것을 원하신다면 하나님의 마음을 종잡을 수 없을 것입니다

 

골로새서3:20절을 보면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

 

에베소서6:1절을 보면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부모에게 순종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왜 부모에게 순종을 해야 하는가 하면 부모를 통해서 하나님을 더듬어 알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부모에게 순종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옳습니다.

또한 주 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라고 분명히 성경은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만약 믿는 성도가 부모와 불화를 하고 믿음이 있다고 하는 것은 솔직히 말씀을 드려서 그 믿음은 바른 것이 아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물론 그런 행위가 믿음의 척도가 될 수는 없지만 성령을 받은 성도라면 당연히 자기 부모에게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불화해서는 안 되는 사람들입니다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그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를 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싫어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부모와 자녀 그리고 며느리와 시어미가 화목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가족의 화목을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원하십니다.

 

그런데 성령의 검이 주어졌습니다.

분명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그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화목하기를 원하시는데 이스라엘은 또 그렇게 사는 것이 율법이라고 배워서 아주 철저하게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알고 또 룻기를 너무도 많이 배워서 자기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가를 아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율법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 이들이 불화를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우리가 깨달아야 합니다. 그들은 너무도 철저 했습니다 사람이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를 하는 것은 그들의 문화에서는 도저히 용납이 안 되는 일입니다

 

그런데 진리가 오셨습니다.

그 어떤 것으로도 불화를 하면 안 되는데 진리가 오니까 이제 불화가 시작이 된 것입니다. 무슨 말씀이냐면 사람이 진리를 받든지 아비가 진리를 받든지 하면 둘은 서로 불화를 할 수밖에 없다는 말씀입니다 사상에 대립을 하게 되어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는 율법에 속해 있고 하나는 진리를 받아들이고 하면 이 둘은 불화를 하게 되어 있습니다.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이단들에게서 나타나는 것 같이 그 부모와 사상이 다르다 해서 부모를 정죄하고 또 아들을 정죄하고 심지어는 집을 나가고 하는 것을 용납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또 이단에 빠진 아이들을 구출하기 위해서 집에 감금을 하고 하는 것을 용납하시고자 이 말씀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이 불화는 그런 육적인 불화가 아닙니다.

누군가 이단에 빠져 있다고 해서 서로 공격을 하고 불화를 겪는 그런 일들은 영적인 불화가 아니라 육적인 불화라는 것을 깨닫기 바랍니다. 영적인 불화는 그런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진리에 대해서 싸우고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가 옳은가 다투라고 이 말씀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 이단이냐 정통이냐 진리를 따르느냐 안 따르느냐 하는 것으로 육적으로 싸우는 것은 그것은 육적이 불화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이 불화는 보이지 않는 영적인 불화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그 아비에게 딸은 어미에게 그리고 며느리는 시어미에게 순종을 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순종을 하면서 살아야 하는데 어느 한쪽에서 진리를 알게 되면 이제 불화가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한 편에서는 진리를 쫓아가기를 원하고 또 한 쪽에서는 율법에 속해 있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불화가 시작이 됩니다. 내 아들이 내 아비가 내 딸이 내 어미가 며느리가 그리고 시 어미가 구원을 받아야 하는데 율법을 따르고 있다면 얼마나 안타깝겠습니까?

 

실제 싸우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설령 하나는 율법에 있고 하나는 진리에 있다 해도 다투어서는 안 됩니다 그 영혼을 구원하시는 것도 하나님의 능력임을 우리는 분명히 믿어야 합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불화를 겪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36,“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가장 화목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자기 집안 식구가 하나는 율법에 하나는 진리에 있다 하면 그것은 원수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적으로 원수가 되라고 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율법에 속한 자는 자꾸 율법의 행위를 강조하게 되면 진리에 속해 있는 자를 사망으로 이끌어 가기 때문에 식구가 원수라는 말씀입니다

 

이 둘은 서로 대적을 합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든지 율법에 속해 있는 자는 율법대로 살아가기를 강요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실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율법이 폐해 졌습니다. 그런데 그 아비가 맥추절을 지키겠다고 하면서 그 아들에게 강요를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남 같으면 당신이나 지키세요. 하고 말 것을 자기 부모이기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남은 상관이 없습니다.

그가 율법에 빠져 있더라도 굳이 상관할 일이 아니기 때문에 너나 지키세요. 하고 말면 됩니다. 그런데 한 집에 살면서 누구는 지키고 누구는 안 지키고 하게 되면 그것부터가 불화가 되고 아들로 인하여 아비로 인하여 그 율법을 어쩔 수 없이 지켜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거절하는 행위를 했다면 그래서 그 영혼이 사망으로 떨어졌다면 그것은 원수입니다

 

영혼의 원수라는 말씀입니다

율법주의자들은 복음주의자들에게 아주 강요를 합니다. 자기들이 지키고 있는 율법을 안 지키면 천국에 못 가는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자기만 사망에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식구라도 억지로 지키게 해서 자기 딴에는 천국으로 인도한다고 하는 것이 사망으로 이끌게 되고 그렇게 되면 원수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아비가 그 아들이 원수가 아닙니다.

그들은 분명히 서로 사랑해야 하고 화목해야 하는 대상이지만 율법주의에 미혹이 되어서 아비를 아들을 사망으로 이끌어 가는 사단의 미혹이 원수라는 말씀입니다 남이 강요를 하면 안 해도 그만이지만 사실 아비가 아들이 그렇게 강요를 하면 참으로 난감하게 됩니다. 바로 이런 이유로 예수님께서는 집안 식구가 원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37,“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비나 어미를 우리는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가족들이 서로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어느 정도 사랑하기를 원하시는 가를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마가복음7:10-11절을 보면

모세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고 또 아비나 어미를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가로되 사람이 아비에게나 어미에게나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만이라 하고

 

누구에게 더 잘하라고 가르쳐 주십니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 잘 하는 것 보다 자기 부모에게 잘하라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잘 하는 것 보다 부모에게 잘하는 것이 더 낫다고 분명히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지금도 하나님께 더 잘하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반대의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서로가 대치되는 말씀이 아니라 하나는 육적인 말씀이고 하나는 영적인 말씀입니다 육적으로는 하나님보다 더 부모를 섬기는 것이 분명히 맞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는 설령 내 아비가 율법주의에 빠져 있다 해도 그를 따라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혈육의 정보다 더 무서운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더구나 이스라엘과 같이 율법주의에 깊이 빠져 있는 사람들에게 가족 안에서는 서로가 반드시 지켜야 하는 법이 있습니다. 그 법에 매여 그 아비를 어쩔 수 없이 따르고 또 아들을 너무 사랑해 그 아들이 하는 율법대로 따라하는 것을 합당치 않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철저하게 가족 중심적인 사회였습니다.

그래서 족보를 논하고 또 그 족보를 아주 귀하게 여기고 있었던 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관습입니다. 그런 사회에서 어느 한 쪽이 율법주의에 빠져 있는데 그것을 버린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남 같으면 그냥 외면하면 됩니다. 그러나 가족은 그럴 수 없기 때문에 지금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38,“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내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물론 여러 가지로 해석을 하고 있지만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분명한 목적은 율법을 폐하시기 위해서 지셨습니다. 바로 내 십자가도 역시 율법을 폐하는 십자가가 되어야 합니다. 나도 예수님과 같이 율법을 폐하는 십자가를 지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대상이 가족입니다

사실 쉽지 않은 일입니다 아비가 율법을 따르고 있는데 내가 율법을 폐하는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른다는 일이 쉽지는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내 스스로가 율법의 십자가를 지고 또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지 아니하면 절대로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아비가 또 그 아들이 율법주의에 빠져 있으면 그것보다 더 큰 십자가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 영혼의 구원을 방해하는 자는 교회 밖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함께 교회에 나와 있는 내 식구 중에 율법주의에 빠져 있는 그 사람입니다 그는 나에게 자꾸 율법의 행위를 강조하게 되고 그것을 거절하는 것은 마치 예수님의 십자가 같이 힘이 든다는 말씀입니다

 

남이 원수가 아닙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이 율법주의에 빠져 있으면 그가 사단에 미혹이 되어 있으면 나에게 치명적일 수 있습니다. 사실 한 집에 살면서 그것을 거절하고 나는 예수 그리스도만을 믿겠다고 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아니 서로가 원수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럴 것 아닙니까?

율법주의자는 그렇게 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는데 안 하는 아들을 보니 안타깝기만 하고 그래서 더 강요를 하고 또 아들은 율법주의에 빠져 있는 아비를 보면서 얼마나 안타깝겠습니까? 그래서 서로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하면 불화가 있기 마련입니다 제가 분명히 말씀을 드리지만 그렇다고 해서 논쟁을 하면서 진짜 인간적으로 싸우라고 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렇게 하라고 이 말씀을 하시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셨지만 믿지 않는 사람들과 오히려 대적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아무리 내가 복음이 있다 해도 내가 그것을 전하면 그가 구원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직 구원은 하나님의 능력이고 또 그분의 선택임을 인정하시기 바랍니다. 그런 복음이 있는 성도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갈 수 있습니다.

 

39,“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이스라엘은 자기 목숨을 얻기 위해서 율법을 지켰습니다.

그 기초가 되는 것이 바로 식구입니다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그 어미와 며느리가 그 시어미와 어떻게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 그 율법이 이스라엘의 율법의 가장 기초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렇게 해야 자기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율법은 생명입니다

그래서 부자 청년은 어려서부터 율법을 다 지켰다고 예수님 앞에 나와서 자신 있게 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율법을 버리는 것은 마치 목숨을 잃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그 율법을 지켜 목숨을 얻고자 하는 자는 목숨을 잃을 것이요 율법을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는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율법을 버리는 일은 이스라엘에게 있어 목숨을 잃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그러나 성령이 내 안에 임재하시면 그것을 버릴 수 있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갈 수 있는 믿음을 갖게 됩니다. 바로 이런 사람만이 예수님께 합당한 자라는 말씀입니다

 

원수는 멀리 있지 않습니다.

바로 내 가족이며 또 교회라는 공동체 가족이 원수가 될 수 있습니다. 나에게 율법을 강요하는 그는 원수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을 인간적으로 원수로 대하라는 말씀이 절대로 아닙니다. 바로 분별을 하셔서 내 영혼을 지키는 성도가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