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니라(요6:63.)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약속이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

은혜와 진리의 말씀

165강, 평안히 묘실로 들어가게 하리니

윤주만목사 2019. 8. 23. 07:25


165, 평안히 묘실로 들어가게 하리니

 

역대하34:28절을 보면

그러므로 내가 너로 너의 열조에게 돌아가서 평안히 묘실로 들어가게 하리니 내가 이곳과 그 거민에게 내리는 모든 재앙을 네가 눈으로 보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 사자들이 왕에게 복명하니라

 

유다 왕 중에서 신앙이 좋았던 3명의 왕을 꼽으라 하면 다윗과 히스기야 그리고 바로 본문에 나오는 요시야 왕입니다 열왕기서나 역대서를 보면 이 세 왕이 어떻게 하나님을 섬겼는가를 알 수 있으며 신앙적으로 볼 때 흠이 없는 왕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점점 멸망의 길로 가고 있습니다.

더구나 요시야 왕 시대는 이미 북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포로로 잡혀 간 후고 또 거대한 바벨론과 애굽이 패권을 다툴 정도로 그 주변 정세를 볼 때 유다는 사실 위급한 상황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망하고 난 후에는 사실 유다는 변방에 불과 했습니다.

 

그들의 신앙은 점점 퇴보를 했습니다.

물론 히스기야 왕 때에 하나님을 향한 마음을 가지려고 노력을 했지만 므낫세가 극도로 타락을 하면서 하나님으로부터 진노를 사게 됩니다. 그리고 므낫세 왕의 아들인 요시야 왕이 왕위에 올라 다시 신앙을 회복하려고 노력을 했지만 이미 하나님의 마음은 기울어져 있었습니다.

 

요시야는 대단한 왕입니다

므낫세로 인하여 모든 신앙의 기초가 훼손 되었던 유대에 다시 하나님을 향한 신앙의 불을 지핀 왕입니다 열왕기하나 역대하를 보면 요시야 왕이 어떻게 하나님을 향해 바른 마음을 가졌는가를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물론 그런 마음을 주신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요시야에 대해서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가 어떠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는가를 우리는 성경을 통해 배워야 하고 요시야 왕과 같이 우리 신앙을 바로 세워 가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를 통해 어떠한 신앙을 가져야 하는 가를 배워야 합니다. 성경에서 그를 어떻게 말씀을 하고 있는 가를 보겠습니다.

 

역대하34:2절을 보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여 그 조상 다윗의 길로 행하여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고

 

요시야는 8세에 왕위에 올랐습니다.

8세에 무슨 선악을 분별을 하고 정직이 무엇인가를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성경은 그가 팔세에 왕위에 올랐는데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삼십일 년 동안 왕위에 있으면서 정직히 행하였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누구 보시기에 정직했습니까?

사람의 눈에 정직히 행했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시기에 정직히 횅하였다고 요시야 왕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 보기에도 정직히 행하기가 힘이 드는데 하나님이 보시기에 정직히 행했다면 얼마나 그의 신앙이 바로 서 있는 가를 알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사람 앞에 정직하려고 합니다.

물론 신앙인들이 그렇게 살아야 하고 또 내가 가진 복음을 전파하려고 하면 당연히 정직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그런 정직도 우리에게는 필요하겠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 정직하지 못하다면 그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늘 생각해야 합니다.

 

정직이 무엇입니까?

성경을 보면서 세상 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정직한 것과 하나님이 보시기에 정직한 것은 전혀 다른 것임에도 교회 안에서 이 세상 사람들의 정직을 이야기 하고 그것을 강조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에 살아가고 있지만 우리의 생각은 세상의 생각과 동일해서는 안 됩니다.

 

영적인 것을 늘 먼저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정직해도 그것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정직하다고 말할 수 없으며 오히려 그런 정직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악을 행하는 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너무 정직하고자 하는 그것이 악이 될 수 있음을 모른다면 그는 어린아이와 같은 교인에 불과 합니다.

 

정직의 반대는 거짓입니다

요시야 왕은 거짓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사람이 살면서 거짓을 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 세상에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거짓을 말하지 않고 사는 성도들이 분명히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나도 요시야 왕처럼 정직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것은 어려운 것이 아닌데도 사람들이 몰라서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하지를 못 합니다

 

요한일서5:10절을 보면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고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나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 관하여 증거 하신 증거를 믿지 아니하였음이라

 

성도는 하나님의 아들을 믿습니다.

그를 누구로 믿느냐면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그리스도로 믿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도들의 안에는 증거가 되고 있어 늘 예수 그리스도만을 나타내려고 합니다.

 

그런데 온전히 믿지를 못 합니다.

교회에 들어와 있으면서도 예수를 믿는다 하면서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이루신 구속의 은혜를 온전히 받아들이지를 못하고 아직도 옛 구습을 쫓아 행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아직도 구약의 행위를 따라하고 있는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거절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지를 못 합니다

믿지를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신 것을 믿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일입니다 예수 하나면 족한데도 아직도 무엇이 그리도 부족한지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아들을 보내 주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를 믿으려 하기 보다는 행위를 어떻게 하면 잘 할까 고민을 하고 있고 그것에 집착을 하고 있습니다. 내 스스로 잘 해서 구원을 받으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일입니다

 

오직 예수면 됩니다.

그런데 예수로는 부족하다고 주장을 하면서 어떻게 믿어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느냐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악한 일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아들에 대해서 증거 하신 그 증거를 믿지 못하는 것이 바로 거짓말하는 자이며 정직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해야 합니다.

그 정직은 내가 무엇을 행해서 정직하다고 인정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한 말씀을 믿는 그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정직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정직하다는 인정을 받기 보다는 사람들로부터 받는 정직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합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우리와 같이 육을 가진 인생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시고 내 영혼이 정직해야 정직하다는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만물 보다 더 부패한 우리 마음이 정직해 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우리 가운데 임재 하셔서 내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정직하다고 칭함을 받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요시야 왕은 이렇게 정직 했습니다.

그가 어떤 행위를 한 것도 물론 있겠지만 그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믿는 증거가 그 안에 없었다면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정직하다는 말씀을 들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가 어떤 행위를 했다 해도 공자와 같이 살았다 해도 그는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요시야 왕은 자기 안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증거가 있었기에 하나님으로부터 정직하다고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런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세상 사람들이 볼 때도 우리는 할 수 있다면 최선을 다 해서 정직하게 살아야 하겠지만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나를 정직하게 보시지 않는다면 그는 결국 멸망하는 짐승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그는 다윗의 길로 행하여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았습니다.

다윗이 어떤 길을 걸었습니까? 그의 행위의 길은 밧세바와 간음을 하고 그것도 모자라서 그녀의 남편이며 자기의 충성스러운 신하 우리아를 전쟁에서 죽게 만들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가 죽을 때 솔로몬에게 자기 정적들을 다 죽이라고 유언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윗도 사람입니다

그의 행위나 내 행위나 별로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하고 그런 그의 길을 따라가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물론 다윗이 잘한 일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도 인생이기에 잘한 것보다는 잘못한 행위들이 더 많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잠언4:26-27절을 보면

네 발의 행할 첩경을 평탄케 하며 네 모든 길을 든든히 하라 우편으로나 좌편으로나 치우치지 말고 네 발을 악에서 떠나게 하라

 

다윗의 길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습니다. 모든 산이 골짜기가 매워지는 오직 복음의 위에 서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첩경이 무엇이냐 하면 지름길을 첩경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 바로 갈 수 있는 지름길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를 믿어서 가는 길이 가장 빠르고 편한 길입니다

 

그런데 이 길을 외면합니다.

예수를 믿는다 하면서도 이 길을 가기를 싫어하고 있고 오히려 자기 행위를 통해 가려고 스스로 돌아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만 믿으면 되는데 그것을 믿지 못해서 아직도 돌고 돌아서 행위를 따라가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오직 믿음입니다,

다윗은 믿음을 가진 사람이며 그에 대해서 히브리서에서는 저희가 믿음으로 나라를 이기기도 하고 또 의를 행하기도 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믿음의 길을 간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그 믿음의 길을 가려고 하기 보다는 행위에 빠져 있어 믿음만 가지고는 안 된다고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말씀으로 든든히 서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든든히 서 있어서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았습니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아 악을 행하지 않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깨달아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마치 이것이 율법을 잘 지키는 것으로 오해를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율법은 지키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율법을 통해 죄를 깨닫게 해 주신 것이지 하나님께서 그 율법을 이스라엘에게 온전히 지키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는 것을 먼저 기초에 두고 늘 말씀을 보아야 합니다. 그런 기초가 없으면 마치 율법을 지키는 것이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는 것으로 오해를 하게 됩니다

 

율법을 지키면 뭐 합니까?

그것을 흠 없이 지킨 이스라엘을 통해 악이 나타났다는 것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됩니다. 또 이스라엘이 자기들이 원해서 지키겠다고 한 율법을 마치 이 시대 성도들이 지켜야 한다고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율법은 몽학 선생입니다 그 몽학 선생에게서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먼저 깨달아야 합니다.

 

오히려 그것은 악입니다

다윗은 율법을 통해 죄를 깨달은 사람이지 그 율법을 잘 지켜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온전히 다 지킨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런 말씀을 보면서 마치 다윗이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율법을 온전히 지켰다고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로마서4:7-8절을 보면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다윗은 우리와 똑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도 역시 우리와 같이 불법을 행하면서 살았고 또 평생 죄를 지면서 살았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다윗이 밧세바와의 죄 말고는 죄를 안 진 것으로 오해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사는 그 자체가 죄라는 것을 알아야 하며 다윗도 역시 그 죄에서 벗어날 수 없는 똑 같은 인생입니다

 

내가 일만 달란트의 빚을 졌습니까?

그럼 역시 다윗도 일만 달란트의 빚을 진 사람이며 이 세상 어느 누구도 그 빚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시편에서는 죄의 경중을 저울에 달아보니 입김보다 경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역시 다윗도 나와 같은 죄인이며 죽을 때 까지 죄를 지면서 살았습니다.

 

악에서 떠나려고 믿음을 지켰습니다.

사람이 악을 안 저지르고 살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만약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복음을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이며 우리 인생은 모두다 악을 행하면서 살아가고 있고 죄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같이 악에서도 떠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죄에서도 악에서도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런 인생이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함을 받지 않습니다. 왜 우리가 오직 예수를 믿어야 하느냐면 내가 선을 행하고 의를 행하고 하는 그것이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바 악으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예수가 아니고는 구원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행위로는 좌로나 우로나 치우칩니다.

그러나 다윗은 믿음을 가진 자로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어서 결코 자기가 행위로 지은 악이나 죄에서 정죄함을 받지 않고 그 불법의 사함을 받고 죄에서 가리우심을 받은 은혜를 입은 행복자라고 스스로를 고백하고 있습니다.

 

요시야 왕도 그런 사람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가 다윗과 같이 역시 행위로는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없는 인생이지만 믿음으로서 다윗의 길에서 치우치지 않았습니다. 그가 행위로 절기를 잘 지키고 우상을 폐하고 하는 그런 행위보다는 오직 예수를 믿음으로 자기가 은혜를 입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요시야 왕은 물론 많은 일을 했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던 산당들과 아세라 상들과 아로 새긴 목상들을 모두 다 제하여 버리고 늘 사람들이 그래왔듯이 태양을 섬기기 위해 세워놓은 것들을 다 찍어 버렸습니다.

 

또 그는 솔로몬 성전을 증축하는데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보이는 우상과 성전들이지만 이 모든 것은 지금 우리 안에 보이지 않은 우상과 성전으로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요시야 왕은 그런 보이는 것을 했지만 실제로는 이 시대 우리가 지켜야 하는 신앙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또 율법을 듣고 자기 죄를 깨달았습니다.

그는 자기 옷을 찢을 정도로 율법을 통해서 자기가 무엇을 잘못하고 있었는가를 깨닫고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그 길을 따라가기 위해 자기의 믿음을 지켰던 왕이기도 합니다. 열왕기서나 역대서를 보면 그가 한 모든 행위들이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물론 그가 육적으로 행했지만 그것은 우리가 영적으로 깨달아야 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오늘은 그것을 논하고자 말씀을 나누는 것이 아닙니다.

조금은 다른 차원에서 요시야 왕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기 때문에 그가 한 행위가 영적으로 무슨 의미가 있는가는 나중에 조금 더 자세하게 말씀을 나눌 기회가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어찌되었든 그가 한 행위들을 행위로 볼 것이 아니라는 것은 여러분이 깊이 생각하고 그 행위의 의미를 찾아 그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발견해야 합니다.

 

28,“그러므로 내가 너로 너의 열조에게 돌아가서 평안히 묘실로 들어가게 하리니 내가 이곳과 그 거민에게 내리는 모든 재앙을 네가 눈으로 보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 사자들이 왕에게 복명하니라

 

율법을 듣고 옷을 찢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패망을 할 것을 예언을 하시면서 그에게는 그 재앙들을 보지 않고 너의 열조에게 돌아가서 평안히 묘실에 들어가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아마 모든 사람이 이런 축복의 말씀을 듣기를 원하고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되기를 소망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내리는 재앙을 눈으로 보지 않고 평안히 열조에게로 돌아간다면 그것은 축복입니다 실제로 요시야 왕 때가 아니라 그 아들의 때에 바벨론에 의해서 예루살렘이 멸망을 당하게 되며 그 자손들이 모두 죽임을 당하거나 심지어는 눈이 뽑혀서 바벨론으로 끌려가게 됩니다.

 

평안히 죽기를 모두 소망합니다.

요즘 유머 중에 얼마까지 건강하게 살아다 며칠만 앓다가 죽는다는 유머가 있습니다. 그렇게 될 수만 있다면 모두가 할 것입니다 특히 기독교 안에는 종말론이 늘 있어 와서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재앙을 혹시라도 자기가 당하지 않을까 고민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성경을 모르면 고민을 합니다.

그리고 그런 재앙들 속에서 자기가 견디지 못할까를 고민하게 되고 심지어는 자기들만의 처소를 예비해서 그곳으로 피하면 재앙이 임할 때 피할 수 있다고 어리석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자체가 복음에 대해서 모르고 성경에 대해서 모르기 때문에 미리 겁을 먹고 근심을 하는 것입니다

 

어느 왕은 자기 명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어느 왕은 적에게 포로가 되기도 하고 또 자기 백성들로부터 반역을 당해서 죽임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요시야 왕에게는 하나님께서 네가 평안히 네 열조의 묘실로 들어가리라고 말씀을 합니다. 이 평안을 마치 육체의 평안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14:27절을 보면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이 평안은 세상이 주는 평안이 아닙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교회 안에 있으면서도 아직도 육적으로 평안을 누리려 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이 주는 평안을 누리기를 원하고 그렇게 누리고 있는 사람을 보고 마치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것이라 생각합니다. 예수를 믿는 성도는 이 세상이 주는 평안이 아니라 예수 안에서 누리는 하늘의 평안을 바라봅니다.

 

실제 요시야 왕이 평안히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갔는가를 보겠습니다.

 

역대하35:23-24절을 보면

활쏘는 자가 요시야 왕을 쏜지라 왕이 그 신복에게 이르되 내가 중상하였으니 나를 도와 나가게 하라 그 신복이 저를 병거에서 내리게 하고 저의 버금 병거에 태워 예루살렘에 이른 후에 저가 죽으니 그 열조의 묘실에 장사하니라 온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들이 요시야를 슬퍼하고

 

요시야 왕은 전쟁에서 적군의 화살을 맞고 죽었습니다.

평안히 늙어서 죽은 것이 아니라 치열한 전쟁에서 그것도 자기와 아무 상관이 없는 전쟁에서 괜히 나섰다가 결국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요시야 왕은 평안히 죽어서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 간 것이 아니라 전쟁에서 패함으로서 죽고 말았습니다.

 

화살을 맞고 피를 흘리며 죽는다는 것은 고통입니다

그는 육적으로 볼 때는 평안히 죽음을 맞이한 것이 아니라 전쟁에서 적의 화살을 맞아 피를 흘리는 고통 중에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요시야 왕이 어떻게 죽을 것을 모르시고 그를 보고 네 열조에게로 평안히 돌아가리라고 말씀을 하셨습니까?

 

주님이 주시는 평안은 이 세상의 평안이 아닙니다.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던 그 평안은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다가 노인이 되어서 평안히 죽음을 맞이하는 그런 평안이 아니었습니다. 사도들도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서는 환란을 당했지만 그 영혼은 평안히 주님의 품으로 돌아갔습니다.

 

영적인 평안입니다

요시야 왕은 다윗과 같은 믿음이 있었던 왕이므로 다윗과 같이 주님의 품에 평안히 돌아 갈 것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실제 요시야 왕은 바벨론으로부터 침략을 당하지도 않았고 또 비록 전쟁에서 죽음을 맞이하긴 했어도 그 영혼은 주님께서 평안을 주셨던 것입니다

 

요시야 왕은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런 왕이었기에 그가 죽고 난 후에 얼마나 백성들이 슬퍼했는가를 성경은 잘 말씀해 주고 있고 예레미야는 그의 죽음을 보고 애가를 지어 노래했을 정도로 그는 그 당시를 개혁한 믿음의 왕이었습니다. 그가 비록 전쟁에서 죽음을 맞이하긴 했어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정직함에 있었기 때문에 주님께서 그를 평안히 받아 주셨습니다.

 

사실 얼마나 고통이겠습니까?

죽고 난 후에 자기가 주님으로부터 영접을 받지 못한다면 그것처럼 고통스러운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그 영적인 평안을 받으려고 하기 보다는 육적인 평안을 누리려고 스스로 악을 행하고 있으며 그 평안이 자기 영혼을 파멸로 이끌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 합니다

 

예수를 믿으시기 바랍니다.

비록 세상에서는 평안을 누리지 못할지라도 우리의 생명이 다 하는 날 그 날에는 주님께서 주시는 그 평안을 마음껏 누리게 될 것입니다 세상의 평안 보다는 영적으로 누릴 수 있는 그 평안을 구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이 시대도 평안을 주시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평안을 육적으로 누리려 하다가 오히려 사단에게 미혹이 되어 기복주의에 빠져 자기 영혼이 어디로 가는지 조차 분별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비록 세상에서는 남들이 볼 때 평안을 누리지 못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그 평안을 누리는 믿음이 있는 성도가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