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니라(요6:63.)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약속이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

요한복음 강해

11강, 요 1:30.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시기 바랍니다

윤주만목사 2019. 6. 18. 11:42

 

11, 요한복음 1:30절을 보겠습니다. (143)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는 사람이 있는데 나보다 앞선 것은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막연함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각 사람에게 비취시는 빛을 보고 믿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빛에 대해서도 전혀 깨닫지를 못하고 있으면서 그저 교회 안에 있다고 하는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답답합니다.

이 시대 기독교인들을 보면 너무도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자기들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그저 사람의 이성을 가지고 있고 지적인 능력이 있다고 하는 것으로 마치 성경을 다 알고 있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지만 성경에서 말씀을 하고 있는 의미를 전혀 모르면서 거대한 종교에 의해서 막연하게 끌려가고 있습니다.

 

죄를 알고 있습니까?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까? 이 시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누가 죄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까? 주님께서는 분명히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을 해 주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이 시대는 자기 죄를 모르고 있습니다. 그저 이 세상 사람들이 말을 하고 있는 도덕적인 죄를 아는 것으로 자기 죄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 정도는 굳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아도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다 알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죄인입니까?

주님이 이스라엘에 오셨을 때와 같이 이 시대는 죄인은 없고 의인만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자기들이 교회 안에서 하는 행위를 보고 그 의로 부자가 되어서 자기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는지 바알을 믿고 있는지도 모르고 그저 교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죄를 아시기 바랍니다.

그런 성도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살면서 짓는 도덕적인 죄는 이 세상 사람도 다 알고 있습니다. 그것도 몰론 죄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도 바울과 같이 내가 무슨 죄를 지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관원이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는 주님께서 십계명을 말씀을 하시는데도 자기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실상은 하나도 지키지 못했으면서도 문자적으로 지킨 율법을 보고서 그것으로 부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주님께서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하면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 보다 더 어렵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모릅니다.

주님께서 왜 이 세상에 오셨는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아니 성경의 문자는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어떤 죄를 지었는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아니 교회 안에서 어떤 죄를 짓고 살아가고 있는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할 수 없습니다. 주님은 분명히 세상 죄를 지고 가시는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오셨습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에서 다시 말씀하기를 우리 죄를 위할 뿐 아니라 온 세상의 죄를 지고 가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알아야 할 것 아닙니까?

내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를 알아야 할 것 아닙니까? 그래야 내가 이런 죄를 지었는데 구원을 해 달라고 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십계명을 하나도 지키지 못하고 죄를 짓고 살아가고 있는 그들이 교회 안에서 십계명을 외우면서 자기들이 십계명을 지키고 있다고 누가복음에 나오는 관원과 같이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영생입니다

성경도 모르는 그들이 어떻게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주님께서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런데 왜 내가 무슨 죄를 지어서 죽으셨는가를 모르고 있다면 그가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할 수 있습니까?

 

율법입니다

우리 인생에게 그것을 문자적으로 보고 지키라고 주셨습니까? 성경 어디에서 그런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사도 바울은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보고 죄를 깨달은 성도만이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습니다.

 

율법을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문자로 보고 있는 율법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사도 바울의 말씀과 같이 이 세상 초등학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 초등학생도 그 율법을 보고 알고 있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 기독교인들이 지혜가 있다고 하면서 고상한 척을 하면서 율법을 알고 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의미입니다

율법은 다 의미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많은 율법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하시는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이 오셔서 지키시는 율법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 성도만이 율법을 보고 죄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은 독생하신 하나님입니다 그분이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위해서 세상 죄를 지고 가셨습니다. 내가 지은 세상 죄를 지고 가셨습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려면 내가 세상에서 어떤 죄를 지었는가를 알아야 믿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알고 믿어야 합니다.

그런 성도만이 죄 사함을 받을 수 있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도 모르는 사람은 죄 사함을 받을 수 없고 의롭다 하심을 받을 수 없어서 생명을 얻을 수 없습니다. 영의 생명이 우리 안에 거하려면 반드시 이 모든 것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합니다.

 

온 세상 죄입니다.

우리를 위할 뿐 아니라 온 세상 죄를 지고 가셨다는 것을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창조주 하나님으로서 이 세상에 오셔서 당신이 지으신 피조물들이 지은 죄를 책임을 지시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다는 것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알아야 합니다. 그럼으로 해서 우리 인생들이 사망을 당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죽음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죄인들에게 주신 사랑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만약에 우리 인생들이 죽지 않는다면 이 세상은 벌써 지옥으로 변하고 말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 인생들이 죽음을 맞이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한 분이 오실 터인데, 그분은 나보다 먼저 계시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입니다' 한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분을 두고 한 말입니다.”

 

세례 요한입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를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앞서 보내신 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 뿐 아니라 모든 선지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종교인들은 다르다는 것을 또한 알고 있어야 합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입니다

이 시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례 요한의 말씀과 같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로 알고 믿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모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 인생들을 사랑하시는 결과의 확증이라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그 십자가를 통해서 죽음이라는 것을 맞이할 수 있게 하셨고 우리 성도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삼일 만에 영으로 부활하심으로 해서 주님의 생명이 거할 수 있는 역사가 되고 있습니다.

 

인생입니다

우리 성도는 오직 이 빛을 보고 믿음으로 해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다른 그 어떤 방법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사람들은 믿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왜 믿지를 못하고 있는가 하면 자기가 하는 행위가 어두움에 있기 때문에 믿을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가 이 세상에 오셔서 무슨 일을 하셨는가를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비유와 예표를 통해서 가르쳐 주고 있고 하나님께서는 구원을 받는 우리 성도들에게 성령을 보내주심으로 해서 진리로 인도함을 받을 수 있게 역사를 하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이 주님을 보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는 사람이 있는데 나보다 앞선 것은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보낸 사람들에게 세례 요한은 나보다 앞선 사람이 있는데 나는 그의 신들메 풀기도 감당치 못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1:20절을 보겠습니다. (378)

그는 창세 전부터 미리 알리신바 된 자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바 되었으니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이 성령으로 잉태를 해서 마리아를 통해서 이 세상에 나셨다는 것은 우리가 다 알고 있습니다. 아니 성경이 그렇게 말씀을 하기 때문에 육신으로 그렇게 오셨다는 것을 우리가 믿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그대로 믿어야 합니다.

 

그분은 독생하신 하나님입니다

사도 요한도 그렇고 사도 베드로도 나타나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비록 육신의 몸을 입고 마리아를 통해서 나셨지만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나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나타나셨다고 하는 표현을 쓰고 있는가 하면 바로 세례 요한의 말씀과 같이 내 뒤에 오시는 사람이 있는데 그가 나보다 앞선 것은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인생의 나이입니다

물론 세례 요한이 몇 살 많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인간적으로는 분명히 그렇게 말씀할 수 없지만 세례 요한은 그가 나보다 앞서 계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사도 베드로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아니 거의 모든 선지자들이나 사도들이 그렇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홀로 한 분이신 하나님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홀로 한 분이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가 앞섰다고 말씀을 하고 있고 나타나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창세 전에 계셨습니다.

태초에 계셨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말세에 나타나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이 말세에 나타나셨는가 하면 우리를 위해서 우리를 구원해 주시기 위해서 그러니까 우리에게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나타나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입니다

그분이 왜 생명인가 하면 그분은 영이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으셨기 때문에 생명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생명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나타나셨습니다. 그분이 누군가 하면 바로 독생하신 하나님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입니까?

우리는 어느 누구로도 안 됩니다. 반드시 영이신 하나님이 육체를 입고 오셔서 율법을 완전케 하시고 우리를 위해서 죽으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으심으로 해서 그 영의 생명이 우리에게 거하시게 하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분은 앞서 계신 분입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만세 전부터 예정을 하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분 안에 있는 생명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 우리를 진토로 지으시고 우리에게 빛을 비취심으로 해서 우리가 믿음으로 성령 안에서 영의 생명이 우리 안에 거하시게 하고 있습니다.

 

이 일입니다

그분은 만세 전부터 예정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이제 말세에 우리를 위해서 나타나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세례 요한도 역시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는 사람이 있는데 나보다 앞선 것은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입니다

반드시 태어나는 순서가 있습니다. 그러고 나이가 있습니다. 나이가 적은 사람이 나이가 많은 사람보다 앞설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을 하면서 내 뒤에 오는 사람이 있는데 나보다 앞선 것은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언제부터 계셨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이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성자 하나님이 아니라 그는 만세 전부터 태초에 계셨던 하나님이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세례 요한은 그런 의미에게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이 세례 요한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가 무엇을 했는가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를 하고 있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이 말씀을 하고 있는가 하면 세례 요한이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과 같이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말씀을 한 것과 같이 그가 증거를 하는 주님은 독생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말씀하기 위해서입니다.

 

요한복음1:31절을 보겠습니다. (143)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주는 것은 그를 이스라엘에게 나타내려 함이라 하니라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나도 이분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주는 것은, 이분을 이스라엘에게 알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입니다

그는 요단 강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 주의 길을 곧게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주님께서 나타나셔서 자기 앞에 오시는 것을 보고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말씀합니다.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사람이 있는데 나보다 앞선 것은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은 이 사람을 가르킴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곧 그가 독생하신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그가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나도 그를 알지 못한다.

세례 요한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과 같이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 주의 길을 곧게 하고 있습니다. 그가 왜 그 일을 하고 있었는가 하면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는 것을 사람들에게 증거를 하기 위해서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나도 그를 알지 못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비록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서 내가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 그를 증거를 하고 있었지만 나도 그가 누군지를 알지 못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 아주 조용히 오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입니다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우리 인류에게는 이보다 더 큰 사건이 없습니다. 사실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인류를 그리고 온 우주를 창조하신 분이 나타나시는데 그것이 얼마나 대단한 사건입니까?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이렇게 조용히 아무도 알지 못하게 오신다는 것이 더 이상한 일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 인생은 체질적으로 자기가 조금이라도 세상에 나타낼 일이 있으면 그것을 알리고자 하고 있고 자기를 나타내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인생들을 지으시고 이 온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분께서 이 세상에 오시는데 나도 그를 알지 못했다고 하는 말은 사실 상식적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입니다

그들이 왜 주님을 영접하지 않았겠습니까? 물론 그들이 어두움에 있어서 빛을 깨달지를 못했습니다. 그것이 가장 큰 이유가 되겠습니다. 그러나 창조주 하나님이 이 세상에 우리 인생들과 같이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스라엘이 기다리던 것과 같이 다윗과 같은 왕으로 오시는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마태복음11:8절을 보겠습니다. (17)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자들은 왕궁에 있느니라

 

성경을 보면 이해가 안 되는 말씀들이 있습니다.

지금 요한복음에서는 세례 요한이 주님에 대해서 증거를 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자기 앞에 나오심을 보고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그가 이제 헤롯 왕에 의해서 감옥에 갇혀서 죽을 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주님을 보고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신 자라고 말씀을 했습니다. 그런 그가 감옥에 갇혀서 죽을 날을 기다리고 있자 자기 제자들을 보내어서 주님께 묻고 있습니다. 당신이 그리스도입니까? 아니면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려야 합니까? 라고 묻고 있습니다.

 

분명히 그가 처음 예수 그리스도를 보았습니다.

그때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보고 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이 주님을 보니까 하나님으로 보이지가 않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자기가 죽을 때가 되었는데도 만약에 하나님이라면 자기를 어떻게 해서라도 꺼내주실 수 있는 분으로 알고 있는데 제자들을 보낼 때까지 아무런 말씀이 없으셨습니다.

 

세례 요한입니다

분명히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자입니다 그러나 그 역시도 하나님께서 하시는 영의 일을 아직까지는 잘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에 대해서 증거를 하고 있었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이 알고 있는 주님은 왕으로 오시고 더구나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이 세상에 오셔서 대단한 일을 하실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을 보냈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딱히 대답을 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가고 난 후에 주님의 제자들에게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에게 왔느냐고 말씀을 하시면서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들은 왕궁에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이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전혀 다르게 이 세상에 오셨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더욱 주님을 영접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입니다

사실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분이 이 세상에 오신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우리 인생들에게는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이겠습니까? 이스라엘은 주님이 그렇게 오실 것으로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가 이제 뒤에서 나다나엘에 대해서 말씀을 하겠지만 그 역시도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겠느냐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상식입니다

이 세상에 왕이 어디에 온다 해도 그 지역은 난리가 날 정도가 됩니다. 그런데 이 온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오시는데 어느 누구도 알 수 없게 그렇게 조용히 오셨습니다. 비록 세례 요한이 감옥에 있을 때는 제자들을 보냈을지라도 주님을 처음 보았을 때는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말입니다.

무슨 뜻이 담겨져 있습니까? 나도 하나님이 이렇게 오실 줄은 알지 못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이성이라는 것은 모두가 같습니다. 비록 세례 요한이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아 주님을 증거를 하고 있지만 하나님께서 이렇게 나타나실 줄을 전혀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말씀합니다.

나도 그를 알지 못한다고 말씀을 합니다. 그러면서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주는 것은 그를 이스라엘에게 나타내려 함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세례 요한이 요단강에서 물로 세례를 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려고 그렇게 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3:27절을 보겠습니다. (306)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세례 요한입니다

그가 왜 세례를 주고 있습니까? 나도 그를 알지 못함이라고 말씀을 하면서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주는 것은 그를 이스라엘에게 나타내려 함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이 그냥 자기 스스로 한 일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를 하기 위해서 세례를 주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세례입니다

물론 요한의 세례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가 사도행전에서 보면 알겠지만 성령 세례가 있습니다. 요한이 물로 세례를 주는 것은 앞으로 주님이 오시고 난 후에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해서 성령을 보내주심으로 우리가 성령 세례를 받는 것을 예표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면 이 성령 세례가 있다는 것을 예표로 물세례를 주고 있습니다.

 

물세례입니다

이 시대는 물세례를 받고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인가 하면 세례 요한이 그를 이스라엘에게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물세례는 예수 그리스도를 이스라엘에게 나타나게 하려고 세례 요한이 요단강에서 주고 있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물세례입니다

그것은 세례 요한이 요단강에서 이스라엘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기 위해서 베푼 세례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어떻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까? 마치 그 물세례를 받는 것으로 자기가 예수 그리스도를 옷 입은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구원을 받은 성도가 되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물세례입니다

그리고 성령 세례가 있습니다. 이 두 가지의 세례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세례 요한이 요단강에서 이스라엘에게 준 물세례는 단지 예수그리스도를 이스라엘에게 나타내게 하기 위해서 주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나는 이렇게 물로 세례를 주지만 이제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이가 오셔서 그 세례를 받음으로 해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세례를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이 시대는 교회 안에서 모두가 물세례를 받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세례 요한이 준 세례를 받고 있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물세례는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에서 말씀을 하고 있는 세례가 아닙니다. 이 세례는 성령 세례이고 그 세례를 받으면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구원을 받았다는 말씀입니다

갈라디아에서 말씀을 하고 있는 세례는 물세례를 말씀을 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이 시대 교회 안에서 물세례를 받고 침례를 받고 하는 것으로 마치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에서 말씀을 하고 있는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것으로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무슨 세례입니까?

요한의 세례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세례는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이스라엘에게 나타내려고 주었던 세례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시대 교회 안에서 의식적으로 행하고 있는 세례는 구원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세례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물세례입니다

이 세례를 받은 것으로 마치 갈라디아서에서 사도 바울이 말씀을 하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로 옷 입은 것으로 생각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 내가 그리스보와 가이오 외에는 아무에게도 세례를 주지 않은 것을 감사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감사합니까?

세례를 주어서 그가 구원을 받았으면 당연히 감사를 해야 하는데 사도 바울은 그리스보와 가이오 외에 세례를 주지 않는 것을 감사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은 그리스보와 가이오에게만 물로 세례를 주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물 세례는 구원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이 시대는 모든 교회가 세례를 주고 있습니다. 모두가 물로 세례를 주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그리스보와 가이오 외에는 아무에게도 세례를 주지 않은 것을 감사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는데 이 시대는 교회에 사람 하나만 들어오면 그를 어떻게 해서든지 물로 세례를 주려고 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세례라는 단어만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갈라디아서에 있는 말씀을 인용을 해서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 말의 뜻은 세례를 받았으면 이제 구원을 받았다고 말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다릅니다.

세례 요한의 물세례입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에서 말씀을 하고 있는 세례입니다. 세례 요한이 이스라엘에게 준 세례는 물세례입니다 그 물세례는 단지 이스라엘에게 그리스도를 나타내려고 한 세례입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이 말씀을 하고 있는 세례입니다. 그 세례는 성령이 오심으로 해서 성령으로 난 영이 그의 안에 거하시는 역사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입니다

물세례를 받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이제 성령이 우리에게 오셔서 진리로 인도함을 받고 있고 성령으로 난 영이 있는 성도고 그리스도로 옷 입은 성도입니다 그런 성도가 굳이 그리스도를 나타내려고 하는 물세레를 받을 필요가 있습니까?

 

그것도 의식적으로 받고 있습니다.

율법이 되어서 의식화 되어 있는 상태로 받고 있습니다. 그런 세례를 받는 것은 율법의 행위를 하는 것과 같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세례 요한의 물세례는 이미 지나간 그림자입니다 그러니까 주의 앞에서 주님을 나타내기 위해서 이스라엘에게 행했던 세례입니다 이제 주님은 오셨고 우리에게 성령이 오시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물세례입니다

그것을 받았다고 해서 성령을 받았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제 뒤에서 다시 말씀을 드리겠지만 물세례와 성령 세례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물세례는 세례 요한이 말씀을 한 그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이스라엘에게 나타내려고 한 세례입니다

 

그 이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제 그 세례는 더 이상 주어서는 안 됩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에 오셨다가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부활하심으로 해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구속의 일을 모두 이루셨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알게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 주시고 있습니다. 이렇게 성령이 오심으로 해서 우리 안에 영이 탄생이 되고 그 영이 생명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림자입니다

그 그림자를 아직까지 하고 있다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실체는 무엇입니까? 주님이 오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주시고 있습니다. 그렇게 성령이 우리에게 오시는 것이 바로 성령 세례라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성령 세례를 받은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물세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이스라엘에게 나타내려 함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나타내야 합니까? 성경에 이미 주님께서 이루신 구속의 일이 다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아직까지 주님을 나타내는 물세례를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받아야 합니까?

 

상식입니다

우리는 정말 성경을 잘 보아야 합니다. 그저 세례라는 단어만 집착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세례가 무엇이라는 것을 먼저 알고 또 요한의 세례와 주님이 오셔서 주시는 성령 세례와의 차이가 무엇이라는 것을 바로 알고 세례를 받든지 안 받든지 해야 합니다.

 

분명히 말씀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세례 요한이 왜 자기가 요단강에서 세례를 주었다가를 말씀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성경만 조금 주의 깊게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제까지 기독교인들은 성경을 주의 깊게 보지를 않고 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이 세례도 자기들의 종교에 교리에 있기 때문입니다

 

교리입니다

먼저 교회에 들어오면 사람들을 학습을 합니다. 그리고 그 학습이 끝이 나고 이제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산다고 목사가 인정을 하면 세례를 주고 있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교리에 있고 교회 법에 있기 때문에 목사들은 성경도 안 보고 그저 그 교리에 따라 교회 법에 따라 물세례를 주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세례 요한입니다

그가 물세례를 준 이유입니다. 그를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이스라엘에게 나타내게 하려고 주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 다 나타나지 않았습니까? 이미 성경이 다 기록이 되어 있고 더 이상 나타낼 것도 없는데도 이 시대는 세례 요한이 주었던 물세례를 주고 침례를 주면서 세례가 맞느니 침례가 맞느니 하면서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종교는 법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 법을 지키는 자는 반드시 사망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왜 세례 요한이 물로 세례를 주었는지도 이 시대는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그저 세례 요한이 물로 세례를 주었다는 말씀이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으니까 물로 세례를 주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그런 세례를 받고 나서 사도 바울이 말씀을 하고 있는 갈라디아서의 말씀을 생각을 하면서 자기들이 구원을 받았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절대로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왜 구원을 받을 수 없는 가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사도행전:19:3-5절을 보겠습니다. (220)

바울이 가로되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대답하되 요한의 세례로라 바울이 가로되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하거늘 저희가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사도 바울입니다

그가 에베소 지방에 와서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때 복음을 듣고 있는 사람들에게 묻고 있습니다.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요한의 세례를 받았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물세례를 받았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이 말씀을 합니다.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하거늘 저희가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정말 바로 알아야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요한의 세례입니다

그것은 물로 주는 세례라고 이미 요한복음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에 있는 사람들이 그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다시 또 세례를 받을 필요가 있습니까? 요한의 세례를 받은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을 수 있다면 굳이 다른 세례를 받을 필요가 있느냐는 말씀입니다

 

안 됩니다

요한의 물세례는 그림자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무엇을 가르쳐 주기 위한 그림자입니까? 그 세례는 이스라엘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려고 했던 세례입니다 그 세례를 받은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이 말씀을 합니다.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곧 예수라 하거늘 저희가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세례를 받음으로 해서 그들에게 안수를 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령 세례입니다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안수를 해서 받은 것으로 생각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이 먼저 무엇을 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나서 안수를 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령이 임하시는 역사입니다

사도 바울이 꼭 안수를 해서 성령이 임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당시 상황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에 에베소 교회에 성도들에게 20장에서 보면 내가 삼년을 밤낮으로 복음을 전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해서 성령을 받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형식이 아닙니다.

어떤 세례를 주는 형식을 했다는 뜻으로 받아들이지 마시기 바랍니다. 20장에서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에 성도들과 작별을 하면서 내가 삼년이나 밤낮으로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를 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 해서 그들이 성령 세례를 받을 수 있었고 그리스도로 옷 입음으로 해서 구원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물세례입니다

그것은 요한의 회개의 세례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를 이스라엘에게 나타내게 하기 위해서 베푼 세례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세례를 받은 것으로 자기들에게 성령이 임하시고 구원을 받은 것으로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종교 의식이 되었습니다.

어느 종파는 침례를 받게 하고 있고 어느 종파는 세례를 받게 하고 있습니다. 저 역시 침례교를 다닐 때 받아서 침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복음을 알고 나니까 그것은 아무 의미가 없는 세례였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세례 받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이 말씀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내가 그리스보와 가이오 외에는 아무에게도 세례를 주지 않은 것을 감사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도 복음을 깨닫고 이방에 복음을 전하러 가서 이 물세례를 주어야 하는 것으로 알고 그리스보와 가이오에게 세례를 주었지만 이제는 안 준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이 시대 기독교는 세례를 주지 않으면 큰일이 나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아니 자기들이 주고 있는 물세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는 것과 같이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제 성도가 되는 예식이라고 하면서 아주 거룩하게 행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구원입니다

행위로는 받을 수 없습니다. 그것이 어떤 행위라도 그것으로는 우리는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도리어 그런 행위가 우리에게 죄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세례를 받습니까? 성찬식을 하고 있습니까? 세족식을 하고 있습니까?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까? 그 어떤 행위로도 우리는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구원을 받은 성도들의 표가 될 수도 없습니다.

 

죄 입니다

도리어 죄가 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시대는 종교가 되어서 자기들이 교리로 그것을 만들어서 행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법을 만들어 놓고서 교회 법에 따라 새로 들어오는 사람들에게 학습을 하고 세례를 주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요한의 세례입니다

성경에서 어떻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세례 요한은 자기가 왜 세례를 주고 있는가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주는 것은 이스라엘에게 그를 나타내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성경이 다 기록이 되어 있기 때문에 이 세례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 믿을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32절을 보겠습니다. (143)

요한이 또 증거하여 가로되 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같이 하늘로서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요한이 또 증언하여 말하였다. "나는 성령이 비둘기같이 하늘에서 내려와서 이분 위에 머무는 것을 보았습니다.”

 

세례 요한입니다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자입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를 했습니다. 그가 왜 요단강에서 물세례를 주었는가를 우리에게 분명하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의 세례입니다

그 세례는 그림자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앞으로 주님이 오심으로 해서 우리가 성령 세례를 받는 것으로 가르쳐 주기 위한 세례입니다 그 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도리어 그런 의식화 되어 있는 종교에서 만든 세례가 사람들에게 죄를 짓게 만들고 있지만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입니다

초대 교회에 복음이 전파가 되고 200년 까지는 그래도 복음이 전파가 되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물론 150년이 지난 후부터는 복음이 점점 사라지고 있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리고 313년이 되어서 기독교라는 종교가 탄생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1700년 가까이 그 기독교가 만든 교리에 의해서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고 있습니다.

 

세례도 대표적인 폐해입니다.

물론 성경에 세례를 주었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 내가 그리스보와 가이오 외에 세례를 주지 아니한 것을 감사한다는 그 말씀이 있은 후부터는 이 물세례에 대해서 성경에 언급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령이 오셨습니다.

늘 말씀을 드리지만 마치 하나님으로부터 도깨비 방망이 하나를 받는 것과 같이 생각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령을 받은 성도라도 복음을 다 깨닫기 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을 받았다고 해서 누구나 다 복음을 깨닫는 것은 아니고 복음을 전하는 은사자를 통해서 듣고 믿는 사람이 더 많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빌립도 세례를 주었습니다.

그 역시도 복음을 전하면서 에디오피아에 간다게의 내시를 만나서 복음을 전하고 난 후에 물이 있는 곳에서 세례를 주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고린도전서를 지나고 나서부터는 어느 사도도 물로 세례를 주었다는 말씀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종교의 의식입니다

종교에서 만든 새로운 법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문자를 보고 만든 법도 역시 율법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율법을 지키는 것은 죄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육적인 죄가 아니라 영적인 죄가 되어서 그는 반드시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이미 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저 역시도 복음을 깨닫기 전에는 물로 침례를 받았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구원을 받을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이제 복음을 깨닫고 물세례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고 이제는 더 이상 그런 의식을 행하지 않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요한이 또 증거를 합니다.

가로되 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같이 하늘로서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분명히 성령이 비둘기 같이 하늘로서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더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정말 잘 보아야 합니다.

 

비둘기입니까?

비둘기 같이 입니까? 성경에서 좋은 새의 의미로 비둘기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노아가 홍수 후에 지면에 물이 빠졌는가를 알기 위해서 비둘기를 내 보냈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고 구약의 제사에서 재물의 힘이 부족할 때 비둘기를 사용하라고 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비둘기입니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로 비유를 해서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을 우리가 성경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비둘기는 좋은 의미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딱 어느 한 가지로 말씀을 하기에는 여러 가지를 비유로 해서 말씀을 하고 있다는 것을 또한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 시대 교회입니다

성령을 비둘기로 상징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의 형상에는 이 비둘기의 형상이 많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특히 강대상이나 목사들이 앉는 의자를 만들 때는 이 비둘기의 형상을 넣어서 만들고 있는 것을 누구나 보았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일입니다

정말 늘 말씀을 드리지만 무색무취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복음을 보고 듣고 믿음으로 해서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다. 영의 생명에 대해서 그리고 내세의 일에 대해서 그리고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에 대해서 믿고 있습니다.

 

오직 말씀입니다

성경에서 그것을 보고 듣고 믿음으로 해서 우리가 영생을 얻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때로 영의 일은 참으로 우리가 받아들이기가 어렵다는 것을 늘 느끼고 있습니다. 무엇인가 감정적으로 느끼고 또 만지고 보고 하면 참 좋은데 그렇지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종교는 어떻습니까?

성경에 분명히 비둘기 같이 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령이 비둘기 같이 하늘로서 내려와 그의 위에 머물렀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령이 비둘기의 형상을 하고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무른 것이 아니라 비둘기 같이 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같이

국어로 말을 하면 부사입니다. 우리는 이 부사에 대해서 바로 알고 성경을 보아야 합니다. 이 부사를 어떻게 사용을 하고 있는가를 제가 하나의 예를 들어서 말씀을 하겠습니다. 고향은 어머니 품과 같이 너무도 편안한 곳이다 라고 할 때 같이 라는 부사를 쓰고 있습니다.

 

고향입니다

그리고 어머니 품입니다 이것이 같을 수 있습니까? 고향과 어머니 품은 전혀 다릅니다. 그러나 이 부사를 씀으로 해서 우리는 고향에 대해서 마치 어머니 품과 같은 느낌을 가질 수 있습니다. 바로 이렇게 쓰여 지고 있는 부사라는 것을 알고 성경을 보아야 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이 비둘기 같이 그의 위에 머물렀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성령과 비둘기는 같습니까? 그렇지가 않습니다. 앞에서 예를 들어서 말씀을 한 것과 같이 고향과 어머니 품과 같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어머니 품을 가지고 고향이라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어머니 품이 있습니다.

그것을 보고 고향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말은 이런 부사를 씀으로 해서 고향을 더욱 극적으로 그려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성령은 좋은 것입니다 그리고 비둘기 역시 좋은 의미로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다고 말씀을 했습니다. 성령을 우리 언어로 달리 표현할 수 없으니까 성경에서 좋은 의미의 비둘기를 이용해서 같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이 시대 교회를 보시기 바랍니다. 아니 교회의 용품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 비둘기의 형상이 얼마나 많이 사용이 되고 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이 비둘기를 보면서 어떻게 상상을 하고 있는가 하면 성령이 자기들 가운데 있는 것과 같이 만들어 버리고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인식을 주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성경을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한복음의 말씀을 알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의 말씀을 보고 성령이 비둘기 같이 하늘로서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다는 말씀을 보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교회 안에 비둘기 형상을 많이 새겨 놓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사람들은 당연히 성령이 임하고 있는 교회로 인식을 하게 만들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전혀 다릅니다.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부사를 써서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성령이 임하시는 것을 우리의 언어로 표현을 할 수 없으니까 성령이 비둘기 같이 하늘로서 내려와 그의 위에 머물고 있다고 말씀을 하니까 마치 성령이 비둘기의 형상으로 내려오는 것으로 인식을 하게 만들어 놓고 있고 교회는 그것을 자기들의 교회 안에 기구에 새겨 놓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인간적인 표현입니다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적인 표현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마치 성령은 비둘기의 형상을 하고 하늘로서 내려오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고 그것을 교회 안에 새겨 놓음으로 해서 마치 그 교회는 성령의 감동을 받고 있는 교회가 되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목사의 가운입니다

거기에도 비둘기를 그려 놓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왜 목사의 가운에 비둘기를 그려 놓고 있습니까? 그 목사가 성령의 감동을 받았다는 인식을 사람들에게 심어주기 위해서 목사의 가운에 비둘기 형상을 그려 놓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종교는 이렇게 사람들을 보이는 것으로 미혹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령입니다

비둘기와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고향과 어머니 품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어머니 품은 어머니 품이고 고향은 고향입니다. 다만 부사를 써서 우리가 그것을 더 실감나게 느끼게 하는 언어적인 표현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 있는 거의 모든 사람이 이 비둘기의 형상을 보고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입니다

이 시대 교회에 아마도 비둘기 그림이 없는 곳은 거의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강대상에도 그려놓고 있고 목사들이 앉아 있는 의자에도 그려 놓고 있고 목사들이 입는 가운에도 그려놓고 성가대가 입고 있는 가운에도 그려 놓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비둘기 그림입니다.

그것이 있다고 해서 성령이 그들 위에 있는 것이 맞습니까? 그저 세상의 비둘기 그림을 그려 넣은 것 밖에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 비둘기 그림하고는 성령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는데도 사람들은 자기들이 성령을 받았다는 것을 그리고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목사가 설교를 한다는 것을 나타내고자 그런 그림을 그려 놓고 있습니다.

 

타락의 증거입니다

교회를 건물로 짓고 그 안에 여러 가지 물건들을 넣어 놓고서 교회라고 하는 것도 사실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그 교회 안에 비둘기 그림을 그려 놓고 있습니다. 왜 그려 놓고 있는가 하면 성령을 받았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서입니다.

 

그들이 성령을 받았습니까?

늘 말씀을 드리지만 내 집에 금송아지가 있는 사람은 굳이 자랑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것을 나타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아무 것도 없는 사람은 그런 보이는 것으로 자기를 과시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종교도 역시 교회를 만들어 놓고서 그런 그림을 그려 놓음으로 해서 자기를 과시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신명기 4:17-18절을 보겠습니다. (267)

땅 위에 있는 아무 짐승의 형상이라든지, 하늘에 나는 아무 새의 형상이라든지, 땅 위에 기는 아무 곤충의 형상이라든지, 땅 아래 물속에 있는 아무 어족의 형상이라든지 만들까 하노라

 

형상입니다

땅 위에 있는 아무 짐승의 형상이라든지, 하늘에 나는 아무 새의 형상이라든지, 땅 위에 기는 아무 곤충의 형상이라든지, 땅 아래 물속에 있는 아무 어족의 형상이라든지 만들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율법에 이렇게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형상

물건의 생김새나 모양이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비둘기를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 비둘기의 생김새나 모양을 같이 만드는 것을 형상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아무 형상을 만들지 말라고 말씀을 하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 형상을 봅니다.

사람들은 그 형상에 빠져 착각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 시대 교회를 보시기 바랍니다. 전부 비둘기 형상을 그려 놓고 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그 형상을 보고 사람들은 자기들의 교회는 성령이 임하신 교회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만들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에서 만들지 말라고 하면 만들지 마시기 바랍니다. 교회의 건물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저도 굳이 반대를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우리 성도들이 모여서 교제를 하는 공간이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반대를 하고 싶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교회입니까?

그것은 그저 하나의 건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 건물에 각종 형상을 그려 놓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왜 그렇게 각종 형상을 그리고 있는가 하면 그 그림을 통해서 마치 성령을 받은 것과 같이 사람들에게 인식을 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교회마다 걸려 있는 십자가 형상도 마찬가지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비둘기 형상입니다

그리고 십자가 역시 형상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십자가가 없다고 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없습니까? 그 비둘기 그림이 없다고 해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까? 초대 교회는 그런 건물도 없었지만 그런 형상을 만든다는 것은 상상도 못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종교가 되었습니다.

언제부터 종교가 되고 교회라는 건물을 지어 놓기 시작을 했습니다. 심지어는 그 교회를 보기 위해서 성지순례라고 하면서 이스라엘과 터키 그리고 그리스를 다녀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교회가 다 우상이고 형상이라는 것을 모르고 성지 순례를 한다고 하면서 평생의 소원이라고 말을 하면서 다녀오고 있습니다.

 

성경 안 봅니까?

이 시대 목사들은 성경을 아예 안 봅니까? 아니면 성경을 성경으로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까? 신명기에서 너희는 스스로 삼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와 세우신 언약을 잊어버려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금하신 아무 형상의 우상이든지 조각하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형상을 만들면 어떻게 됩니까?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그것이 성령을 비유로 하는 것이라고 해도 우리는 형상을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그림도 역시 형상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복음만 전하고 듣고 믿으면 되지 왜 교회라는 건물을 지어 놓고 그런 것을 하고 있습니까?

 

스스로를 부정하기 때문입니다

스스로가 믿지를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없기 때문에 그런 형상을 그려 놓아야 사람들이 마치 그런 것과 같이 생각을 하게 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게 교회를 만들고 있고 사람들을 그 안으로 끌어 들여서 사망으로 이끌고 있습니다.

 

성령입니다

하늘로부터 비둘기 같이 내려서 그의 위에 머물렀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한글을 모릅니까? 비둘기 같이 내려 왔다고 말씀을 하고 있지 그것이 비둘기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그런 형상을 그려 놓고서도 그 안에서 예배를 드리면서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을 하는 그 자체가 너무도 어리석은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성경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성경에서 어떻게 말씀을 하고 있는가를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그런 형상이 다 무엇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을 하기 때문에 다 우상이 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교회라는 건물을 짓기만 하면 그 안에 비둘기 형상을 만들어 놓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교회 건물입니다

그것 역시 우상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 어디에 교회 건물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성도들이 모여서 교제를 하는 것을 교회라고 하고 있습니다. 초대 교회는 카타콤이라는 곳에서 그리고 다락방에서 그리고 어느 사람의 집에서 성도들이 모여서 교제를 했습니다.

 

그들은 주의 만찬을 먹었습니다.

그리고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과 같은 그런 건물도 없었고 화려하게 교회라는 건물을 가꾸지 않았어도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는 역사가 있었고 그들은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교회라는 건물부터가 우상이 되어 있고 그 안에는 수많은 형상들이 만들어져 있습니다.

 

우상입니다

나에게서 우상이 하나라도 있으면 그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교회라는 건물을 지어 놓고서 형상을 만들어서 우상을 섬기고 있고 또 율법을 지킴으로 해서 사람을 우상으로 만들어서 섬기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언어적인 표현입니다

성령이 오심을 우리 인생의 언어로 표현을 하려고 하다 보니까 성령이 비둘기 같이 하늘로서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비둘기 그림만 있어도 마치 자기들이 성령을 받은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고 온갖 곳에다가 비둘기 그림을 그려 놓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령입니다

우리가 볼 수 있습니까? 우리가 느낄 수 있습니까? 절대 그렇지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성령이 오시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해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오신 성도는 어떻게 한다는 것을 통해서 우리에게 성령이 오셨다는 것을 믿을 수 있게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대로 믿으면 됩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에 있는 성도들에게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서냐고 묻고 있습니다. 성령이 오신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다는 말씀입니까?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에 있는 성도들이 율법을 지키지 않고 복음을 듣고 믿는 그것으로 성령이 오신 것을 믿을 수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영입니다

말씀 그대로 진리의 영입니다. 이상한 이야기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샤머니즘에 빠지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 인생은 영을 느끼거나 만질 수도 없고 볼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성령과 인격적인 교제를 한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절대 그런 일 없습니다.

성령은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그대로 우리에게 오시면 우리가 진리를 알 수 있게 인도를 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은사자는 성령이 오시면 예언의 은사를 받았으면 성경을 바로 풀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은사자가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성경을 바로 풀어서 복음을 전하면 성령을 받은 성도는 복음을 듣고 믿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런데도 이 시대는 마치 성령이 우리 인간의 육체와 교감을 하고 또 서로 인격으로 나누고 하는 것으로 말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육체는 영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다만 성령이 오시면 우리를 진리로 인도를 하심으로 해서 우리 육체의 이성으로는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을 믿을 수 있게 역사를 해 주고 있습니다.

 

비둘기 그림입니다.

절대로 사용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비둘기가 아니더라도 어떤 형상이라도 우리는 사용을 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을 보고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성경에서 말씀을 하고 있는데 왜 성경에서 하지 말라고 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까?

 

십자가도 형상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형상도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특히 여자들이 목걸이나 귀걸이로 십자가의 형상을 만들어서 사용하고 있는데 그런 것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목걸이나 귀걸이를 하는 것을 제가 반대를 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적인 의미를 담아서 하는 것은 결코 좋지 않고 형상을 만드는 것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요한복음1:33절을 보겠습니다. (143)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나도 이분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게 하신 분이 나에게 말씀하시기를, '성령이 어떤 사람 위에 내려와서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바로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임을 알아라'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은 독생하신 하나님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믿는 창조주 하나님이라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세례 요한도 사람이기 때문에 이성을 가지고 있었고 그래서 나도 그를 알지 못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입니다

얼마든지 영광 가운데서 오실 수 있는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우리 인생의 가장 미약한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욱 더 그를 몰랐고 영접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오심으로 해서 또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삼일 만에 영으로 살아나심으로 해서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이미 하늘에서도 충분히 영광을 받으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아서 알고 있지만 만만의 천사가 그리고 천천의 천사가 영광을 돌리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분은 이미 하늘에서 충분히 영광을 받으시고 있는 분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인생입니까?

사실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짓나 안 짓나 별로 상관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들을 지으시고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시고 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우주적인 사건이지만 우리 인생의 이성으로는 설명이 안 되는 일입니다

 

저도 잘은 모릅니다.

그러나 저는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피조물을 창조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진토인 인생들을 지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인생들을 사랑하셔서 그 진토가 아닌 하나님의 생명을 우리에게 주시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물론 우리가 이성이 있어서 이해가 안 되고 그리고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면서 그 이상을 생각한다는 것이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는 상상이 안 되는 일이라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피조물입니다

그에게 창조주의 생명을 주는 일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이것이 가능하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까? 그것도 우리가 무엇을 잘 해서 창조주의 생명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생을 긍휼히 여기심으로 해서 우리 가난한 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역사를 하심으로 해서 창조주의 생명을 주시고 있습니다.

 

상상이 안 됩니다

지금 우리 인생이 가지고 있는 이 생명과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은 비교자체가 되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은 피조물입니다. 그리고 죽을 수밖에 없는 생명입니다 그런데 창조주와 같이 영원히 죽지 않고 썩지 않는 생명을 주신다는 것이 있을 수 있는 일입니까?

 

그래서 아들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구원을 받은 성도들을 아들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피조물들은 반드시 죽으면 썩어 없어집니다. 그런 우리에게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빛을 비취심으로 해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해서 창조주의 생명을 얻을 수 있게 하시고 있습니다. 그 생명은 썩지 않고 영원히 죽지 않는 생명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전에 영화를 보았습니다.

정말 인간과 똑같은 로봇을 만들어서 인간과 같은 감성을 느끼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 로봇이 정말 인간이 되고자 하는 것을 영화로 보았습니다. 그런 로봇이 인간이 되고자 하는 것 이상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생명이라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이 말씀을 합니다.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렇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가 이 세상에 오셔서 이루시는 구속의 은혜가 얼마나 큰가를 알지 못했다고 하는 말이 이 안에는 포함이 되어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 알지 못하는 것도 있습니다.

 

우리 인생입니다

사실 이 영의 일을 안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주심으로 해서 우리가 진리로 인도함을 받아서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보고 그를 믿음으로 해서 생명을 얻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 모든 일을 하지 않으시면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로마서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원 돌 감람나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찍어서 본성을 거스리는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이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육과 영의 차이를 우리가 이해할 수 있게 말씀을 하고 있지 않나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영의 일을 알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찍어 우리를 영의 일을 알 수 있게 하심으로 해서 우리가 영의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세례 요한에게 물로 세례를 주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왜 물로 세례를 주라고 하셨는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이스라엘에게 나타내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물로 세례를 받은 그들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못했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말씀을 합니다.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인 줄 알라 하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세례 요한이 보고 성령이 그의 위에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인 줄로 알라고 말씀을 하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을 드립니다.

성령을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세례 요한이 보는 것과 같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령을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능력으로 세례 요한은 주님을 알아보게 역사를 하고 있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영의 일입니다

그리고 성령의 역사입니다 지금 이 시대 우리가 그것을 눈으로 보고 느끼고 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시대 샤머니즘에 빠져 있는 많은 사람들이 성령의 역사라고 하면서 성령 집회라고 하면서 이상한 일을 하고 있는데 절대로 그런 일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예표로서 이제 끝이 났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령 세례입니다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인 줄 알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성령 세례에 대해서는 다른 시간에 말씀을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