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강, 요한복음1:35절을 보겠습니다. (신 143쪽)
“또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중 두 사람과 함께 섰다가”
우리는 인생입니다
제가 우리 인생이 진토라는 것을 늘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인생은 정말 성경말씀과 같이 구더기 같은 인생이고 벌레 같은 인생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영의 일을 아는데 있어서 생명에 있어서 그렇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지식이 있습니까? 지혜가 있습니까? 이성이 있습니까? 감성이 있습니까? 그리고 인격이 있습니까? 그런 것을 가지고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 인생은 육체가 죽으면 구더기가 죽은 것과 벌레가 죽은 것과 같습니다.
아니 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그들과 무엇이 다르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까? 그 벌레가 살기 위해서 꿈틀거리는 것과 우리가 이성과 지적인 능력이 있다고 하면서 살고자 발버둥거리는 것과 무엇이 다릅니까? 영의 생명에 대해서 모르고 그저 흙에서 왔다가 흙으로 돌아가는 것은 같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그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나를 알고 나면 그 다음에 하나님을 찾게 되어 있습니다. 아니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 인생들이 성경을 보고 자기들의 이성적 지식으로 하나님을 알고 있다고 하고 있고 믿고 있다고 하고 있지만 실상은 구더기보다 더 못한 그러니까 최소한 구더기는 악을 행하지 않지만 인생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모든 행위가 다 악하기만 합니다.
생명을 얻을 수 없습니다.
우리 육체가 가지고 있는 생명이라는 것은 그렇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그 육체의 생명에 대해서 말씀을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믿음으로 해서 얻을 수 있는 새로운 생명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들을 지으시고 우리를 사랑하셔서 그 생명을 주시고자 하고 있지만 사람들이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영의 생명입니다
이 생명을 우리 인생은 얻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율법을 지켜서 의롭다 하심을 얻어서도 얻을 수 없습니다. 성경의 정의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죄를 짓지 않고 선을 행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고 정의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인생들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구속의 일을 다 이루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생명을 얻을 수 있는 법을 반포하시고 그 법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다 지키심으로 해서 의인이 되셨습니다. 그러나 율법주의자들에 의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의인으로서 죽으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영으로 살리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 영으로 살리심으로 해서 그의 안에 있는 생명을 우리에게 영으로 주시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를 믿음으로 해서 죄 사함을 받게 하시고 그 죄 사함의 결과로 우리에게 그의 생명을 주시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은 전능하신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영존하시는 아버지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가지고 계시는 생명을 그러니까 영의 생명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구속의 일을 이루시고 빛으로 비춰주시고 있지만 그 빛을 우리 인생의 지혜로는 도무지 깨달을 수 없습니다.
안 됩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도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아니 구더기 같은 인생으로 벌레 같은 인생으로 살다가 그들과 같이 그렇게 흙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런 우리 인생에게 주님께서 이루신 구속의 일을 그러니까 영의 일의 빛을 보게 하시고 있습니다. 그 빛을 보게 함으로 해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성령 세례입니다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주시고 있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빛을 보고 깨달을 수 있는 그러니까 진리로 인도함을 받을 수 있는 진리의 영을 우리에게 보내 주심으로 해서 성령으로 난 영이 그러니까 영의 생명이 우리 안에 거하시게 하고 있고 그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해서 우리가 죄 사함을 받을 수 있게 하나님께서는 영의 일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그저 흙으로 와서 흙으로 돌아가서 썩어 없어져야 하는 우리 인생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을 주시고 있습니다.
이 생명입니다
이 생명에 대해서 믿을 수 있게 우리에게 성경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영의 일이다 보니까 우리 인생의 이성으로는 아무리 성경을 보아도 깨달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구속의 일을 다 이루시고 하늘에 올라가시고 난 후에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주심으로 해서 이 생명을 믿을 수 있게 역사를 하고 있습니다.
믿음입니다.
그래서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내세에 대해서 그렇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에서 비록 내세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지만 믿음으로 역사를 하지 않고는 우리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역사를 합니까?
우리 인생의 이성으로는 안 되니까 하나님께서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주심으로 해서 우리가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영의 생명에 대해서 믿을 수 있게 역사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반드시 우리는 이 성령 세례를 받아야 하고 이 성령 세례를 받음으로 해서 우리 안에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이 거할 수 있고 주님이 오실 때 그 생명이 부활을 한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인생은 허무합니다.
그리고 그림자와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 우리 인생들에게 진짜 생명을 주시겠다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 육체가 보고 있는 그러니까 죽으면 썩어 흙으로 돌아가는 이 생명은 진짜가 아니라 그림자이고 썩지 않고 영원히 있는 진짜 생명을 주시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령이 오셔야 합니다.
우리는 진토이기 때문에 그리고 본성이 율법을 지키는 것이 옳기 때문에 성령이 오시지 않으면 우리는 믿음으로 든든히 설 수 없습니다. 영의 생명은 보이지도 않고 느끼지도 않고 우리 인생의 지혜로는 깨달을 수 없지만 성령이 오심으로 해서 미혹을 받지 않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오셨습니다.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나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들을 구원해 주시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고 있습니다. 이스라엘도 하나님을 믿지 않았고 이방의 교회 역시 하나님을 믿지 않고 있습니다.
물론 믿는다고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도 하나님을 믿는다고 했고 이방인들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아는 것에서부터 출발이 되고 있는데 성경에서 이 영의 일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아니 하나님에 대해서도 모르고 있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그런 그들이 영생을 얻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다음 날 요한이 다시 자기 제자 두 사람과 같이 서 있다가,”
세례 요한입니다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를 하기 위해서 요단강에서 물로 세례를 주고 있었습니다. 그가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과 같이 행하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다 선지자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세례를 받았습니다.
또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많이 있었던 것으로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실 400년 동안 이스라엘에 선지자가 나타나지 않다가 세례 요한이 와서 물로 세례를 주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구원하시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계기가 되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세례 요한입니다
그가 물론 주님의 말씀과 같이 여자가 난 자중에서 가장 큰 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례 요한에 대해서 알기 위해서 성경을 보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가 증거를 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위해서 성경을 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가 선지자입니까?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그를 보아서는 안 됩니다. 그들은 모두가 다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를 하기 위해서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자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가 무슨 일을 했는가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증거를 했는가를 우리는 바로 알아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요한복음1:36절을 보겠습니다. (신 143쪽)
“예수의 다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보고서, "보아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다" 하고 말하였다.”
세례 요한입니다.
그는 정말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입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를 했습니다. 요한복음1장29절에서 했던 말씀을 36절에서 똑같이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보았습니다.
어제 보았을 때도 그는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를 했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또 주님께서 나오심을 보시고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정말 세례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를 하면서 이스라엘에게 나타나게 했던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시대 목사입니까?
그들이 누군가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과 같으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만 증거를 해야 합니다. 세례 요한을 보더라도 그는 계속해서 주님을 볼 때 마다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입니다
주님께서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해서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내게 대해서 기록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모든 성경은 주님의 말씀과 같이 주님에 대해서 기록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라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만 증거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이 시대 모든 선지자가 한 말씀을 보고 예수에 대해서 증거를 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설교 본문을 잡아 놓고서 다른 이야기 실컷 하다가 그 설교 가운데 겨우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하는 말을 한 마디 하는 것으로 자기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를 하는 목사인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고 교인들도 그렇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사설을 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만 증거를 해야 합니다. 세례 요한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가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세례 요한에 대해서 알고 싶지도 않고 말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를 무시해서도 아니고 그를 폄하해서도 아닙니다.
영생을 위해서입니다.
그가 한 행위를 이야기를 하는 자체가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거치는 것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세례 요한이 누군가를 알고자 하면 그것은 이미 신학자들이 연구를 해서 써 놓은 글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제가 왜 세례 요한에 대해서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있는가 하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기 위해서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베드로전서1:19절을 보겠습니다. (신 378쪽)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구원입니다
성경은 우리 성도들의 구원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구원은 아무리 강조를 해도 지나치지가 않습니다. 이 영의 생명이 얼마나 귀하고 가슴 벅찬가를 우리는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인생으로는 이 생명에 대해서 알 수 없고 느낄 수 없어서 저 역시 이 정도 밖에는 말씀을 드릴 수밖에 없어서 안타깝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언어적 표현의 한계입니다.
그러나 저는 성경을 보면서 이 생명에 대해서 감동을 받는 것은 제가 표현하는 것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셔서 어린 양으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해서 그리고 부활하심으로 해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생명이라는 것은 상상이 안 되고 있습니다.
표현을 못 합니다.
그러나 저는 믿고 있습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고 있는 우리 성도님들은 이 생명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것인가를 어느 정도는 알고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것을 성경에서 요한계시록에서 사도 요한이 자기가 본 환상을 비유로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어린 양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 해서 죽으심으로 해서 그의 피로 우리가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육신의 모습을 입고 오셔서 우리를 위해서 피를 흘려주셨습니다. 그는 죄가 없으신 분이시고 죽을 수 없는 분인데도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피를 흘려주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가 생명을 얻었습니다.
세례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가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그의 보배로운 피를 흘려주심으로 해서 우리가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말씀은 다 우리 인생이 알아들을 수 있는 그 정도의 언어적 표현이라는 것을 알고 성경을 보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우리가 다 모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우리가 지금은 청동거울을 보는 것과 같이 희미하게 보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보는 것과 같이 본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아무리 깨달으려고 해도 희미할 수밖에 없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참 답답합니다.
이 정도로 밖에 설명할 수밖에 없는 저 역시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상상을 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피를 흘려주시고 우리가 생명을 얻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 세상에서 어느 왕이 내가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인데 대신 죽고 나를 살려 준다면 아마도 그것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별로 없다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입니다
우리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입니다 그분이 우리를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서 보배로운 피를 흘려주심으로 해서 우리가 구원을 받고 있습니다. 구원이라고 하니까 별로 실감이 나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기독교라는 종교인이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있으니까 이것이 별로 그렇게 감동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알아야 합니다.
이 생명을 얻는 자가 얼마나 적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이 그것을 계속해서 말씀을 해 주고 있습니다. 이 생명을 얻는 자가 적은가 많은가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떻게 생명을 얻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이 구원에 대해서 그저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문자를 보고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하는 것은 그렇게 다가오지가 않고 있습니다.
성령 세례입니다
왜 우리가 성령 세례를 받아야 하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성령이 오심으로 해서 그래도 조금이나마 더 이 영의 생명에 대해서 그리고 하나님의 어린 양의 보배로운 피에 대해서 우리가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저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문자를 아는 것으로 자기가 구원을 받은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우리는 영의 생명에 대해서 알아야 합니다. 그런 성도만이 이 말씀이 그래도 가슴에 와 닫을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생명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들은 아무리 성경을 보아도 그저 문자적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요한계시록 7:10절을 보겠습니다. (신 406쪽)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오직 예수입니다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오직 예수라고 말은 참 잘합니다. 그러나 왜 오직 예수인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직 예수가 무엇을 말씀을 하는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물론 그들 역시 구원은 오직 예수라고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그들은 어두움에 있어서 빛을 못 보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생명의 빛을 비취시고 있습니다.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빛을 비취시고 있지만 사람들은 그 빛에 대해서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어두움에 있기 때문입니다
구원을 받았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구원을 받았습니까? 그러나 알아야 합니다. 지금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빛이 어두움에 비추매 어두움이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 인생을 구원하시는 구속의 일을 다 이루셨습니다.
그것이 참 빛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고는 있지만 이 빛을 못 보고 있습니다. 빛을 못보고 소경이 되어 있으면서도 그저 성경의 문자를 보고 아는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빛을 보고 깨달아야 구원하심이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있는데 성령 세례를 받지 못해서 구원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어린 양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어린 양입니다 그런데 그가 하신 구속의 일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그저 성경에 문자적으로 기록이 되어 있는 것을 지식적으로만 알고 있고 그런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보라
성경에서 우리는 반드시 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서 어떤 일을 하심으로 해서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구약 성경을 보고 있는 이스라엘이 소경이 되어 있는 것과 같이 이 시대 이방인들 역시 구약 성경을 이스라엘과 똑같이 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시대입니다
점점 더 불교 화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알미니안주의의 교리는 불교의 교리와 거의 비슷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왜 그런 사상들이 점점 교회 안에서 뿌리를 내리고 있는가 하면 바로 이 영의 생명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구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안에 영의 생명이 탄생이 되는 거듭남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생명은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먼저 알고 있어야 합니다. 사실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육체의 생명도 내 의지와는 아무 상관이 없이 우리 부모에 의해서 사람의 뜻으로 탄생이 되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영의 생명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생명이라는 것이 그렇다는 것을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생명의 탄생은 내 의지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영의 생명도 역시 그렇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사람들은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입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태어난 자들이라는 말씀입니다 내가 내 부모에 의해서 태어난 사람이듯이 내 안에 있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영의 생명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그러니까 우리와 같이 죽어서 썩는 생명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 천사들도 부리는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의 어린 양이 이 세상에 오셨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내 육체의 생명입니다
우리는 혈과 육이 있기 때문에 이것을 느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영의 생명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하나님께로서 난 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영의 생명이다보니까 어느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성경에 주님에 대해서 기록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이루시는 구속의 일을 성경을 보고 깨닫게 하시고 있습니다. 그럼으로 해서 우리 안에 이 영의 생명이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있게 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우리 인생의 이성으로는 안 되니까 성령을 보내주심으로 해서 믿음으로 역사를 하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구원입니다
이렇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저 역시도 설명을 하는데 한계가 있습니다. 제가 아무리 잘 설명을 한다 해도 마치 희미하게 보이는 청동거울을 보는 것과 같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 세례를 받아야 하고 성령이 우리에게 오심으로 해서 믿음으로 역사를 하고 있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이 영의 생명에 대해서 가르쳐 주기 위해서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께로서 난 자라는 것을 알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직접 이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서 보배로운 피를 흘려주셨고 우리가 성경에서 그것을 보고 믿음으로 해서 이 생명에 대해서 믿고 있습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우리는 이 구원에 대해서 알아야 합니다. 이 구원에 대해서 알려면 반드시 하나님의 어린 양을 보아야 합니다. 어디서 하나님의 어린 양을 보아야 하는가 하면 성경에서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어린 양에 대해서 성경에서 말씀을 하고 있고 성령이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를 하심으로 해서 구원에 대한 확신을 주고 있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확신입니다
내 안에 영의 생명이 있다는 것을 확신해 주고 있습니다. 확신으로도 부족해서 성령이 보증까지 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령을 보내주심으로 해서 우리에게 보증을 해 주시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성경을 보면서도 하나님의 어린 양을 안 보고 있습니다.
보시기 바랍니다.
요한복음 1장에서 두 번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이 주님을 보고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두 번씩이나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성경은 우리에게 보라고 하고 있지만 사람들은 그저 문자를 아는 것으로 아니 요한복음1장을 본 것으로 자기들이 본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어린 양을 보아야 합니다. 모든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성경을 보면서도 하나님의 어린 양을 못 보고 있습니다. 아니 소경이 되어서 전혀 못 보고 있는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말을 하고 있고 이 시대 목사라고 하면서 자기들이 복음을 전하고 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상고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반드시 성령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성령 세례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있고 성령 세례를 어떻게 받아야 하는 줄로 모르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마음이 아픕니다.
이렇게 복음을 전해도 사람들은 이 복음을 보다가도 다시 세상으로 가고 있습니다. 차라리 안 보았으면 그래도 이런 마음이 들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성도들끼리 교제를 하다가 다시 세상으로 가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없기 때문에 더욱 마음이 아픕니다.
그리고 이 시대 기독교인입니다
특히 제 인척들을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아픕니다. 제가 이렇게 복음을 전하고 있는데도 그들은 모두가 다른 복음을 듣고 있고 진노를 받는 길로 가고 있습니다. 그들을 생각할 때마다 가슴에서 치밀어 오르는 아픔을 느끼지만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서 그저 마음으로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어린 양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어린 양입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 주여 주여 하는 그들이 구원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자기가 어떻게 구원을 받는 줄도 모르고 있으면서 그저 종교에 의해서 세뇌가 되어서 교회 안에 있는 것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1:37절을 보겠습니다. (신 143쪽)
“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예수를 좇거늘”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그 두 제자는 요한이 하는 말을 듣고, 예수를 따라갔다.”
세례 요한입니다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아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한 사람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제 계속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있습니다. 그의 제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보면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어린 양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어린 양으로서 그러니까 십자가를 지심으로 해서 우리가 죄 사함을 받을 수 있게 되고 그것이 영의 생명의 결과로 나타난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는 말씀에는 그런 의미가 담겨져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성경을 보아야 합니다.
왜 그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세례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를 해서 사람들이 자기로 인하여 믿게 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비록 자기에게 와서 제자로 있는 사람이라 해도 세례 요한은 주님을 보고 나서 그 제자들에게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해야 할 일입니다
누가 그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아니고는 어느 누구도 그렇게 말하지 못 합니다. 그 역시도 이미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선지자라는 것이 소문이 났고 많은 사람들이 심지어는 이방에 있는 유대인들까지 와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우리의 바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까? 저는 지금 요한복음에서 말씀을 하고 있는 생명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이 생명이 우리에게 없다면 우리는 사도 바울의 말씀과 같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자가 되고 만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인간의 욕심입니까?
우리는 늘 하나님의 일을 먼저 생각을 해야 합니다. 사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자기 욕심이 있어서는 절대로 안 된다고 믿고 있습니다. 내가 아무리 저 사람이 하는 것이 좋게 보이고 나도 하고 싶다고 해도 우리는 생명만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능력이라고 믿어야 합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나타나심과 복음을 가진 자가 나타나는 것은 조금은 다를 수 있습니다. 같이 복음을 가졌다면 같이 일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늘 제가 부족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는 사람입니다. 늘 말씀을 드리지만 저 보다 더 복음을 잘 전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저는 제가 하는 이 일에 아무 미련이 없습니다.
물론 저 역시 나름대로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제가 전하는 복음을 듣고 사람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면 그것 역시 하나님의 은혜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 보다 더 복음을 잘 전하는 사람이 있다면 저는 사람들을 제 곁에 붙잡아 두고 싶지 않습니다. 그에게 가서 더 복음적인 말씀을 잘 듣고 구원을 받을 수 있다면 저는 그것이 옳다고 믿고 있는 사람입니다
세례 요한입니다
그 역시 인간적인 생각을 다 버린 사람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을 볼 때마다 자기 제자들에게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말씀을 할 수 있습니다. 그 말씀은 저분이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인생은 누구라도 하나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고 싶어 합니다. 세례 요한이 그 말씀을 하면 구원을 받고자 하는 사람들은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세례 요한은 그렇게 말을 하고 있습니다.
구원입니다
우리는 다른 것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내가 이 세상에서 가르치는 사람이 그러니까 제자가 수만 명이 있으면 뭐 합니까? 그들이 구원을 받을 수 없다면 그보다 더 불행한 일은 없습니다. 단 한 명이라도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를 할 수 있고 그를 정확하게 말씀할 수 있다면 그리고 그가 구원을 받는다면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을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세례 요한은 이 일을 했습니다.
그가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 하나님께서 주님 앞에 보내셨습니다. 그럼으로 해서 이스라엘은 세례 요한을 보고 선지자가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았다고 하면서 그에게 와서 세례를 받고 그의 제자가 되기를 자청하면서 그에게서 배우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을 우리는 성경에서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자기에게 나오시는 것을 보고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저 분이 우리를 구원해 주실 분이라는 것에 대해서 계속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그 제자 둘이 예수 그리스도를 좇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제자 둘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는 말씀의 의미를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좇아서 갔습니다. 인간적으로는 사실 감정이 상할 수 있는 일이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가서 구원을 받는 것을 원했고 세례 요한도 그들이 가는 것을 말리지 않았습니다.
초대 교회입니다
그때는 주님께서 부활하시고 난 후에 성령을 받은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다보니까 그들이 다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로서 일을 한 것이지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가 될 수 없습니다.
그때입니다
그래서 서로 교회를 찾아다니면서 자기가 진리로 인도함을 받는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한 가지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리고 베드로가 그리고 바나바가 말씀을 전했어도 그들은 모두가 한 성령 안에서 복음을 전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전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자기를 나타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고린도교회에 있는 사람들이 복음을 전하는 사람을 보는 것을 보면서 바울이 무엇이며 아볼로가 무엇이며 게바가 무엇이냐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서로 다른 복음을 전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한 성령 안에서 서로 감동을 받은 대로 복음을 전했지만 듣는 사람들이 전하는 사람을 보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지금도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저는 반대를 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제가 만약에 성령을 받아 예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이 복음을 전하는데 그것을 방해를 하고 막고 있다면 저는 하나님께서 이루신 일을 방해를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한 성령입니다
그리고 반드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저는 함께 복음을 전해도 아무 상관이 없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저는 그런 사람을 만나지를 못 했습니다. 그들 스스로는 자기가 복음을 전한다고 믿고 있을지 몰라도 제가 보기에는 자기의 의로 그저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마음이 너무 강한 것으로 밖에는 보이지가 않고 있습니다.
요한복음1:38절을 보겠습니다. (신 143쪽)
“예수께서 돌이켜 그 좇는 것을 보시고 물어 가라사대 무엇을 구하느냐 가로되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하니 (랍비는 번역하면 선생이라)”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돌아서서, 그들이 따라오는 것을 보시고 물으셨다. "너희는 무엇을 찾고 있느냐?" 그들은 "랍비님,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하고 말하였다. ('랍비'는 '선생님'이라는 말이다.)”
두 제자입니다
그들은 세례 요한으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좇기 위해서 주님께 오고 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면 우리는 반드시 그에게 가야 합니다. 구원하심이 그에게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구원입니다
저는 성경에서 다른 것을 말씀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습니까? 그것은 영생입니다 만약에 이 영생이 없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 영생을 어떻게 받을 수 있는가 하면 그가 오셔서 하신 구속의 일을 믿음으로 해서 우리가 영생을 얻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구원을 받지 못한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이유가 없습니다. 아니 그를 믿음으로 해서 구원을 받지 못하고 내가 해야 하는 일이 있다면 우리는 불교에서 종교 생활을 하는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기독교인입니다
그들도 구원을 받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그들이 어떻게 하고 있는가를 우리는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도 예전에는 그들과 같이 종교의 포승에 묶여서 종교가 이끄는 그대로 행하면서 살았습니다.
얼마나 많은 일을 했습니까?
예배 시간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리고 헌금도 그들이 원하는 것을 다 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늘 생각을 하면서 혼자 있을 때도 성경을 보고 기도를 하고 심지어는 찬송가를 틀어 놓고 늘 듣고 살았습니다. 거의 모든 삶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행위에 빠져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습니다. 물론 기독교인들이 하는 일은 전혀 하지를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구원을 받기 위해서 유월절을 먹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아는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 까지 얼마나 많은 말씀을 듣고 보고 있습니까?
왜 이렇게 하고 있습니까?
다 구원을 받기 위해서입니다. 만약에 구원이 없다면 우리가 바라는 생명이 없다면 우리는 이렇게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만약에 구원을 바라지 않는 사람은 이렇게 하라고 해도 하지를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단 한 가지의 이유가 바로 구원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세례 요한에게 와서 세례를 받고 그를 따르던 제자들 역시도 구원을 받기 위해서 세례 요한이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말씀을 하니까 주님께로 가서 좇아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정말 우리는 이 영생을 바라면서 살아가고 있다고 해도 전혀 틀리지가 않습니다.
그들이 주님을 좇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그들에게 묻고 있습니다. 무엇을 구하느냐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을 잘 이해를 하고 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지금 조금 뜬금없는 말씀을 하고 있는 것 같지만 그들이 왜 주님께 오고 있는가를 아시고 말씀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요한일서5:13-15절을 보겠습니다. (신 393쪽)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
무엇을 구하느냐
지금도 역시 우리에게 같은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교회에 나와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좇고 있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주님께서는 똑같은 질문을 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기독교입니다
종교가 된지 오래 되었습니다. 그들은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고 있고 그들의 교회 안에는 온갖 우상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보면 분명히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과 같이 보이고 또 천국을 가기를 원하는 사람들과 같이 보입니다. 그리고 자신 만만하게 세상 사람들에게 자기들이 천국에 간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그들입니다
그들의 구하는 것을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이 기도를 하고 있는 것을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들이 교회 안에서 하고 있는 감사 헌금이라는 것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자기가 무엇을 구해야 하는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아니 하나님은 창조주 하나님이시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라서 자기들이 구하는 모든 것을 주시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두 제자입니다
왜 주님께 왔습니까? 그들은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고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자로부터 말씀을 듣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세례 요한이 주님이 지나가심을 보고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말씀을 하니까 주님을 좇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이 왜 그렇게 했는가 하면 영생을 얻기 위해서 주님을 좇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주님이 묻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와서 당신을 좇는 것을 보고 무엇을 구하느냐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예수 그리스도를 좇아가고 있습니까? 왜 예수 그리스도를 이 시대 믿고 있습니까? 세상 사람들과 같이 아무 종교도 갖지 말고 그저 양심에 따라 살면 되지 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습니까?
사도 요한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단 한 가지의 목적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에게 영생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고 있습니다.
영생입니다
이 시대 기독교인들이 알고 있는 영생과 우리 성도님들이 알고 있는 영생은 전혀 다릅니다. 그들은 기독교의 교리에 따라 배운 그대로 신체의 구원을 주장하고 있고 그 신체가 구원을 받으면 천국에서 서로 만날 수 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입니다
영의 구원을 믿고 있습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내 육체는 아담으로부터 난 자이고 내 안에 있는 영은 하나님께로서 난 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께로서 난 자가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믿고 있고 하나님께로서 난 자가 진짜 나라는 것을 우리의 실체라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입니다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우리 육체는 우리 부모로부터 사람의 뜻에 따라 난 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난 자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저도 모릅니다. 성경이 하나님께로서 난 자라고 하니까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그 생명입니다
저 역시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로서 난 자는 썩지 않고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생명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부활을 하면 천사들도 부림을 받고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다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적인 표현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저도 상상이 안 됩니다
그러나 그 영광이 어마어마하다고 믿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죽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썩지도 않습니다. 아프지도 않습니다. 쇠하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행복만 있습니다. 기쁨만 있습니다. 그리고 천사들도 우리가 부릴 수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저도 어떤 형상으로 부활을 하는지는 모르지만 어떻게 표현을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무엇을 원하느냐
그들이 무엇을 원해서 주님을 좇아가겠습니까? 사도 요한이 그것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이 생명을 얻기 위해서 주님을 믿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이 생명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아니 자기들의 신체가 영생을 한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영생입니다
그의 뜻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영생을 얻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이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을 좇는 두 제자는 주님께서 물으신 것과 같이 영생을 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의 뜻대로 구하시기 바랍니다.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그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그의 뜻대로 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이성에서 생각이 나는 대로 아니 자기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얻고 싶은 것을 정욕을 위해서 구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절대 안 주십니다.
그의 뜻대로 구하는 것만 주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의 뜻대로 구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전혀 모르고 교회에 나가면 계속해서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온갖 것을 구하기 위해서 새벽부터 나가서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마귀가 주면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셨다고 간증이라고 하면서 자랑까지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가라지입니다
교회 안에서 아무 것이나 자기의 뜻에 자기의 이성적 생각에 따라 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그의 뜻을 알고 있습니다. 그의 뜻은 우리가 영생을 얻는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뜻대로 구하고 있고 그것을 받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의 뜻입니다
우리가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의 뜻을 알고 구하면 무엇이든지 얻은 줄로 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는 영생을 얻은 줄로 알고 있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고 있는가 하면 성경을 보고 성령의 감동으로 진리로 인도하심을 따라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게 성경에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 시대 기독교입니다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뜻을 알고 있는 사람이 너무도 적습니다. 아니 성경에 문자적으로 그의 뜻이 기록이 되어 있으니까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말을 합니다. 자기들은 영생을 구한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뜻대로만 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은 정욕을 위하여 구하고 있기 때문에 그의 뜻대로 구하는 것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기도 중언부언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무 것이나 구하는 기도를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분명히 그의 뜻을 알고 기도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의 뜻도 모르면서 영생에 대해서도 모르면서 그가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모르면서 그저 사람의 이성에 따라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영생입니다
그것이 우선은 그의 뜻입니다 그리고 이 영생에 대해서 구하면 들어주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또 우리가 구하는 것을 무엇이든지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을 줄을 또한 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두 제자에게 묻고 있습니다.
그러자 두 제자가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까 라고 대답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선생님으로부터 구원을 받고 싶다고 말을 하고 있고 주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아시고 와 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와서 천국 복음에 대해서 들으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39절을 보겠습니다. (신 143쪽)
“예수께서 가라사대 와 보라 그러므로 저희가 가서 계신 데를 보고 그 날 함께 거하니 때가 제 십 시쯤 되었더라”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와서 보아라." 그들이 따라가서, 예수께서 묵고 계시는 곳을 보고, 그 날을 그와 함께 지냈다. 때는 오후 네 시 쯤이었다.”
세례 요한입니다
주님을 보고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제자 두 사람이 주님을 좇아갔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그들이 좇아오는 것을 보고 무엇을 구하느냐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는 의미를 알고 있었고 그 뜻을 알기 때문에 주님을 좇아 왔고 그들이 구하는 것은 영생이라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입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입니다 그들이 왜 주님께 왔는가를 이미 다 알고 계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분명히 우리 인생과 같이 육신의 모습을 입고 오셨지만 그분은 독생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두 제자가 구하는 것을 이미 아시기 때문에 와 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봅니다.
우리 사람의 이성으로는 이해가 안 되는 말씀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서로 동문서답을 하는 것과 같은 말씀들이 많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대화 자체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도 주님과 제자들의 대화가 그렇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알아야 합니다.
이미 성경은 답을 다 해주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이 그 제자들에게 주님을 보고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말씀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는 말씀은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하나님이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말씀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내 추측이 아니라 성경에서 그런 말씀을 미리 알아야 제자들과 주님의 대화를 조금이나마 이해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말씀을 모르면 제자들과 주님의 대화는 너무도 이상하기만 합니다.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지고 대화를 하는 것과 같이 들려지게 되어 있습니다.
성경입니다
이런 말씀까지 이미 성경에 다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성경에서 그런 인용의 말씀을 찾아야 합니다. 그렇게 인용의 말씀을 알 때 주님과 제자들의 대화가 이해가 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인용을 하는 것을 반대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문장에서만 답을 찾으려고 하니까 서로 동문서답을 하는 것과 같고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성경의 인용입니다
우리는 가능한 성경에서 인용이 되는 말씀을 많이 찾아서 말씀이 연결이 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초대 교회가 지나가면서 기독교가 탄생이 시작이 되면서 성경을 이렇게 인용해서 말씀을 하는 것을 반대하는 자들이 나타나기 시작을 했고 그들의 세력이 점점 커지면서 성경을 그 문장에서 보고 문자적으로 해석을 하기 시작을 했습니다.
신약 성경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잘 보시기 바랍니다. 사도들이 성경을 기록할 때 그냥 하나님의 감동으로만 기록했다고 생각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신약 성경은 구약 성경을 많이 인용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성경을 인용하는 것을 반대를 하고 있습니다.
그 문장입니다.
거기서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습니까? 저는 절대로 불가능하다고 믿고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40여명의 저자들에게 기록을 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한 결 같이 무엇에 대해서 증거를 했는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모든 성경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증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를 알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성경을 서로 인용을 하면서 보아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알 수 있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종교가 되면서 인용을 하는 것을 반대를 하게 되었고 그것은 결과적으로 그 문장의 문자만을 보고 해석을 함으로 해서 행위에 빠지게 만들고 말았습니다.
요한복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지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도대체 무슨 말씀을 서로 대화를 하는지 이 문장만 보고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미 세례 요한으로부터 주님에 대해서 증거를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말씀이 바로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는 말씀입니다. 그 말씀을 성경에서 인용을 하면 지금 주님과 제자들의 대화가 이해가 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그러니까 선생님이여 어디서 저희에게 구원의 말씀을 전해주실 수 있습니까? 라고 묻고 있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와 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선생님이여 우리가 구원에 대해서 말씀을 듣고 싶은데 어디서 말씀을 전하고 계십니까? 라고 묻자 주님께서는 와 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두 제자입니다
그들이 주님께 구원을 받기 위해서 왔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와 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주님께서 계신 곳을 가서 함께 있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두 제자는 처음부터 영생을 얻기 위해서 주님을 찾았고 주님께서는 와 보라고 말씀을 하시면서 그들과 함께 거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1:40절을 보겠습니다. (신 143쪽)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좇는 두 사람 중에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라”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라간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은, 시몬 베드로와 형제간인 안드레였다.”
마태복음4:18-20절을 보겠습니다. (신 5쪽)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저희는 어부라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저희가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마태입니다
그리고 사도 요한입니다 베드로와 안드레가 주님의 제자가 되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마태는 갈릴리 해안에서 두 형제 베드로와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을 던지는 것을 보시고 주님께서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리라고 하시니까 저희가 곧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입니다
베드로와 안드레를 어떻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세례 요한의 제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세례 요한이 주님을 보고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하는 말씀을 듣고 예수를 좇아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두 사도가 쓴 말씀이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와 안드레입니다
마태는 그물을 던지는 가운데서 주님께서 찾아 오셔서 그들을 제자를 삼으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안드레가 요한의 제자로 요단 강 가에 있었는데 세례 요한이 주님을 보고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하는 말씀을 듣고 주님을 좇아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두 사도입니다
그런데 베드로와 안드레가 주님의 제자가 되는 것을 서로 다르게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누가 맞습니까? 성경 보다가 이런 것을 가지고 따지고 성경에 대해서 의심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데 저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믿고 있습니다.
베드로와 안드레입니다
그들이 어떻게 주님의 제자가 되었는가가 중요합니까? 그들이 주님을 어떻게 만난 것이 그렇게 중요합니까? 마태는 아마도 그렇게 들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사도 요한은 또 그렇게 들었을 수도 있습니다. 저는 둘 다 틀리지가 않다고 믿고 있습니다.
마태가 본 베드로와 안드레입니다
그들이 주님의 제자가 되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사도 요한이 본 안드레가 주님의 제자가 되는 과정입니다 실제 둘 다 맞을 수 있다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실제 베드로와 안드레는 형제고 그들은 갈릴리 바다에서 어부로 살아가고 있었다는 것을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알고 있습니다.
두 사람입니다
그런 그들이 세례 요한의 소식을 들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신 선지자가 나타났다는 이야기를 듣고 와서 세례를 받고 제자가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다만 서로가 보는 시차의 차이라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런 말씀을 보면서 성경에 대해서 의심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제가 늘 말씀을 드리지만 우리가 성경을 보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베드로와 안드레가 제가가 어떻게 해서 되었는가를 알고 싶어서 성경을 보고 있습니까?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마태는 그렇게 보았기 때문에 그렇게 기록을 했고 사도 요한은 또 그렇게 보았기 때문에 기록했습니다.
아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을 가지고 문제를 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왜 보고 있는가를 모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은 성경이 잘못 기록이 되었다기보다는 마태는 그렇게 알고 있었고 사도 요한은 그렇게 알고 있어서 또 서로 시간의 차이가 있어서 그렇게 기록을 했을 뿐입니다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중요하지 않은 것입니다 제가 질문을 사람들로부터 많이 받고 있습니다. 진짜 중요한 것을 질문을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 아무 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질문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왜 그렇게 아무 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질문을 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세례 요한이 나타났습니다.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가 무슨 일을 했는가를 성경이 분명하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는 빛에 대해서 증거를 하고 모든 사람으로 자기로 인하여 믿게 하려고 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렇게 믿습니다.
두 사도가 쓴 성경은 틀리지 않다고 믿고 있습니다. 두 사건은 분명히 있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태는 자기가 들은 것을 쓴 것이고 사도 요한은 자기가 들은 것을 기록했다고 믿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받아들이려고 보는 사람들이지 성경을 의심을 하고 성경의 오류를 찾으려고 보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왜 성경을 봅니까?
성경에서 오류를 찾아서 자기 지식을 자랑하기 위해서 성경을 보고 있습니까? 차라리 예수 그리스도를 안 믿는 것이 그에게 더 유익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정말 가끔 가다보면 이런 말씀들을 가지고 한심한 논쟁을 하는 목사들을 보면 안타깝기만 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무엇을 명령을 하셨습니까? 우리 인생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생을 얻으라고 명령을 하셨습니다. 그러면 이 영생에 대해서만 생각을 하면 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사도들이 서로 다르게 본 장면을 가지고 오류라고 하면서 이야기를 하고 있다면 그는 너무도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성경을 의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마태는 갈릴리 바다에서 주님을 만난 것을 들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도 요한은 안드레가 세례 요한에게 와서 세례를 받고 제자가 되어 있는 상태에서 세례 요한의 말씀을 듣고 주님을 좇았다고 들었을 수 있습니다.
저는 그렇게 믿습니다.
우리가 보고 있는 성경을 의심을 하고 그것을 부정하고자 하는 사람은 근본적으로 그 안에 하나님이 없다고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자기가 왜 성경을 보는 줄도 모르고 있는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 되고 그의 믿음이라는 것은 거짓이라는 것을 스스로가 증거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을 봅니다.
저는 가능한 그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보려고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는 것을 보기 위해서 성경을 보고 있습니다. 정말 때로는 억지로라도 그렇게 성경을 풀어야 한다면 그렇게 풀어야 한다고 믿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 성도만이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시대 목사들은 성경을 보는 자세부터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을 성경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이성으로 보고 있고 그것이 스스로를 망하게 만들고 있지만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1:41절을 보겠습니다. (신 143쪽)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 (메시야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이 사람은 먼저 자기 형 시몬을 만나서 말하였다.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소." ('메시아'는 '그리스도'라는 말이다.)”
안드레와 베드로입니다
그들이 세례 요한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좇아가서 그 날을 함께 거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고 나서 안드레가 베드로에게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만났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입니다
우리 인생을 구원해 주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안드레는 하루 동안 주님과 함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형제 베드로에게 우리가 그리스도를 만났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않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빛이 어두움을 비취매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안드레입니다.
하루를 주님과 함께 있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 형제 베드로에게 우리가 그리스도를 만났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아서 잘 알고 있지만 이스라엘에 주님이 오셔서 수많은 기적을 보이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기들이 보고 있으면서도 그리스도를 알지 못 했습니다.
안드레입니다
하루 함께 주님과 있으면서 우리가 그리스도를 만났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빛을 비춰주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이 시대도 역시 복음을 전하고 있지만 사람들은 복음을 듣고도 그것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은혜입니다
그리고 생명을 얻는 기적입니다 안드레는 세례 요한이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하는 말씀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좇아갔습니다. 그리고 하루 함께 있으면서 자기가 만난 분이 세례 요한의 말씀과 같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것을 형제 베드로에게 말을 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을 합니다.
주님의 제자가 되는 일입니다 마태와 요한은 베드로와 안드레보다 제자가 늦게 된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 보니까 베드로와 안드레가 하는 말을 듣고 성경을 기록했습니다. 서로 들은 것은 차이가 있을지 몰라도 두 사람이 제자가 된 것은 확실하고 그런 과정은 중요하지 않다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입니다
정말 성경을 보고 그 안에서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있다는 것은 기적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어떻게 해도 안 된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시대도 우리와 같이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영접을 하게 하는 성도들을 두시고 있습니다.
요한복음1:42절을 보겠습니다. (신 143쪽)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가라사대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그런 다음에 시몬을 예수께로 데리고 왔다.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말씀하셨다. "너는 요한의 아들 시몬이로구나. 앞으로는 너를 게바라고 부르겠다." ('게바'는 '베드로' 곧 '바위'라는 말이다.)”
41-42절의 말씀입니다
그 앞에 있는 말씀과는 날짜가 다르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39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예수께서 와 보라 하셔서 저희가 가서 그 계신 데를 보고 그 날을 함께 거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다른 날이 되었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안드레입니다
그가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보았습니다. 그 날 함께 있었지만 안드레는 주님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알았고 베드로는 아직까지는 잘 모르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그런 베드로에게 안드레가 찾아와서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그 날 함께 있었던 그분이 메시야라는 것을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를 데리고 왔습니다.
주님께로 데리고 와서 주님을 만나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베드로가 주님을 만나로 오는 것을 보시고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네 이름을 베드로라고 부른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입니다
주님께서 그가 주님의 제자가 되어 앞으로 어떠한 일을 할 것을 아시고 그에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장차 너를 게바라 하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베드로라는 이름을 주님께서 지어 주시고 그를 제자로 삼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은 하나님이라는 것을 계속해서 사도 요한은 세례 요한의 말을 인용을 하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예수 그리스도를 그저 하나님의 아들로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9장6절에서 말씀을 하는 아들로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아버지와 아들을 생각하면서 아들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아들입니다
우리는 이사야 9장6절을 생각해야 합니다. 세례 요한은 주님을 보고 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증거를 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시 말씀을 드리면 하나님이라고 증거를 했다는 말씀입니다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나신 것으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시대는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믿는 사람이 없고 성경에서 말씀을 하고 있지도 않은 삼위일체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분은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나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고 유일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홀로 한 분이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ne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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