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니라(요6:63.)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약속이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

은혜와 진리의 말씀

105강, 저희가 바알을 위하여 쓴 은과 금도

윤주만목사 2019. 6. 16. 08:59


105, 저희가 바알을 위하여 쓴 은과 금도

 

호세아 2:8-13절을 보면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은 내가 저에게 준 것이요 저희가 바알을 위하여 쓴 은과 금도 내가 저에게 더하여 준 것이어늘 저가 알지 못 하도다 그러므로 그 시절에 내가 내 곡식을 도로 찾으며 그 시기에 내가 내 새 포도주를 도로 찾으며 또 저희 벌거벗은 몸을 가리울 내 양털과 내 삼을 빼앗으리라 이제 내가 그 수치를 그 연애하는 자의 눈 앞에 드러내리니 저를 내 손에서 건져낼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그 모든 희락과 절기와 월삭과 안식일과 모든 명절을 폐하겠고 저가 전에 이르기를 이것은 나를 연애하는 자들이 내게 준 값이라 하던 그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를 거칠게 하여 수풀이 되게 하며 들짐승들로 먹게 하리라 저가 귀고리와 패물로 장식하고 그 연애하는 자를 따라가서 나를 잊어버리고 향을 살라 바알들을 섬긴 시일을 따라 내가 저에게 벌을 주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기복주의가 만연합니다.

기도를 할 때도 복을 빌지 않으면 안 되는 그런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물론 성도가 하늘의 축복을 비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육체의 복을 비는 것은 스스로 모순에 빠지는 위험한 일임을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누가 복을 받았습니까?

아브라함 이삭 야곱 그리고 요셉이 복을 받고 또 다윗과 솔로몬과 이스라엘의 왕들이 복을 받고 살았지만 실제 그들의 육체의 복은 하늘의 복을 상징하는 것이지 육체의 복을 이 세상에 있는 성도들에게 반드시 주시겠다는 말씀은 아닙니다.

 

복을 받은 사람이 많습니까?

아니면 복을 받지 못하고 산 사람들이 많았습니까?

성경을 통해서도 보면 충분히 알 수 있고 우리는 초대 교회의 성도들이 얼마나 비참한 생활을 했는가를 교회사를 통해 익히 알고 있습니다. 만약 지금과 같이 복을 주장하고 그것이 마치 하나님의 축복으로 오해를 하게 된다면 초대 교회의 모든 성도는 저주를 받은 것입니다

 

카타콤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곳은 사막 한 가운데 있어 농사도 지을 수 없는 곳이며 사람들이 생활하기에는 너무도 험한 곳이었습니다. 거기서 살다가 순교를 한 거의 대부분의 성도들은 하루 한 끼 식사도 감사를 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리고 로마 군인들에게 잡히면 사자 밥이 되거나 또 화형을 당하거나 그들이 죽이고 싶은 모양대로 기독교인들을 죽였습니다.

 

기독교는 이생의 축복을 가르치는 종교가 아닙니다.

이 세상 모든 종교는 이생의 축복을 위해 더 많은 일을 하고 또 자기들의 신에게 가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한국 기독교는 샤머니즘이 복음과 혼합이 되면서 이생의 축복이 마치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은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립니다.

어떻게 하든 방법이 아무리 나빠도 이생의 축복을 받으면 교회 안에서는 대우를 받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축복이고 또 그것이 믿음으로 연결이 되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받고 믿음이 있는 자가 되려면 어떻게 하든지 세상에서 복을 받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또 그런 사람을 인정합니다.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면 아마 이렇게 생각하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자기가 축복을 못 받으니까 축복 받은 사람들을 질투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물론 사람인지라 전혀 아니라고 말씀을 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 속담에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똑 같습니다

목사인 저도 인간의 본질은 벗어 날 수 없습니다.

육체적으로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픈 것은 당연하지만 그래도 복음을 바로 아는 성도라면 제가 드리는 말씀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이생의 축복과 하늘의 축복을 혼돈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물론 이생에서도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제가 그것을 부정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하늘의 복을 말씀해 주시고 있지 이생의 복을 말씀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만약 이생의 복을 말씀하고 있다면 초대 교회의 모든 성도는 저주를 받은 자이지 우리가 그들의 정신과 신앙과 믿음을 칭찬할 필요가 없습니다.

 

일관성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진리라는 것은 이것도 되고 저것도 되면 그 순간 진리는 더 이상 진리가 될 수 없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모든 말씀을 일관성 있게 가르쳐 주고 있지 이것도 되고 저것도 된다고 절대 가르쳐 주고 있지 않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더 이상 성경을 볼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석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성경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성도는 핍박과 한난을 당했습니다.

그것은 초대 교회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시대도 진짜 성도는 핍박과 한난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물질적이냐 아니면 진리를 사수하기 위해서냐 하는 차이가 있겠지만 반드시 어느 방법으로든 핍박과 한난이 있어야 합니다.

 

왜 그런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아들은 징계를 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아들이라면 어느 방법으로든 세상 사람들이 볼 때는 징계를 당하는 것처럼 보여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란 교회 안에 믿음이 없는 자들을 포함하는 이 세상 모든 사람들입니다

 

모든 사람은 죄인입니다

당연히 죄를 졌으면 하나님으로부터 징계를 받아야 하는데 어느 형태로든 징계가 오고 있지 않다는 것은 자기의 믿음을 점검해야 합니다. 진리를 사수하기 위해서 싸우는 처절한 징계가 오든지 아니면 육체에 여러 가지 모양으로 징계가 반드시 와야 합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징계는 믿음이 없는 자가 받은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 생각에 사로 잡혀 있는 것은 바로 기복주의가 교회 안에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교회가 영적으로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해서 분별을 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구약에서 말씀을 하고 있는 음행이 무엇인가를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고 오히려 음행을 하는 그 모습을 보면서 믿음이 있다고 칭찬을 하고 있습니다.

 

호세아서는 음행하는 이스라엘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바알이라는 가나안 토착민들에게 있었던 그 신을 이스라엘이 풍요를 누리면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그들의 신앙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보내 그들을 책망하셨습니다.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은 내가 저에게 준 것이요 저희가 바알을 위하여 쓴 은과 금도 내가 저에게 더하여 준 것이어늘 저가 알지 못 하도다

 

모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기가 열심히 일을 해서 벌었다고 생각을 합니다.

물론 전혀 틀린 말이 아닙니다. 봄부터 땀을 흘리고 수고를 했기 때문에 가을이 되어서 더 많은 수확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깨달아야 하는 것은 내가 아무리 이성적으로 똑똑하고 모든 것을 가졌다 해도 재난이 오거나 자연재해가 오면 물거품이 되고 맙니다.

 

배가 바다에 나가 고기를 잡습니다.

물론 배는 그날의 기상 상태를 보고 나가지만 뜻 밖에 사고는 어느 누구도 안 당한다고 장담을 할 수 없습니다. 만선의 기쁨을 가지고 오다가 배가 어디서부터 떠 내려왔는지 모를 어떤 물체에 파선이 된다면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모든 것과 수확은 물거품이 되어 사라지고 맙니다.

 

없을 때는 하나님을 잘 인정을 합니다.

그러나 조금 있으면 없는 사람들은 판단을 하게 되고 왜 자기처럼 안 해서 수확을 못 거두는 가 판단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루 한 끼 식사를 하는 사람은 그것도 감사를 하는데 먹는 것을 골라서 먹는 사람은 한 끼 식사도 못하는 그들을 이해하지 못 합니다.

 

그렇게 풍요를 누리면 다 바알에게 빠집니다.

1억을 가진 사람은 10억을 갖기 위해 빌고 10억을 가진 사람은 100억을 갖기 위해서 빌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바알입니다 구약에 가나안에 있었던 그 바알은 실제 눈으로 보이는 바알 신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눈에 보이지 않는 바알 신이 교회 안에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 바알을 떨쳐 내지 못 하고 있습니다.

흔히 하는 말이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께 드리는 만큼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채워 준다는 말입니다 무심히 하는 말이고 자기 믿음을 나타내기 위해서 하는 그 말이 바로 바알을 섬기고 있다는 증거가 되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돈 놓고 돈 먹기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정말 복음을 위해 축복을 해 주셨는데 그들은 더 많은 복을 받기 위해 바알에게 바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갚아 주신다고 하면서 마치 그것을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것으로 착각을 하면서 교회 안에서 바알을 섬기고 있습니다.

 

바알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그 하나는 재물에 대한 풍요의 신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자기 의에 대한 풍요의 신입니다 이 두 가지를 지금 교회 안에서 서로 자랑하고 있습니다. 더 많은 재물의 축복을 누리기 위해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교회에 바치고 있고 또 더 많은 의를 자랑하기 위해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사를 자랑하느라 여념이 없습니다.

 

재물 은사 모두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교회는 더 많은 재물을 얻기 위해 돈 놓고 돈 먹기 내기를 하고 있고 또 더 많은 은사를 나타내기 위해서 매일 눈물을 흘리면서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정작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모르고 그저 이 세상의 토착 신인 바알을 섬기는데 여념이 없습니다.

 

착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가나안에서 이스라엘이 행했던 것은 바로 지금 교회 안에서 행하고 있는 일들을 미리 예표로 보여 주신 것입니다 바알이라는 신은 없지만 지금 교회는 풍요의 신을 똑 같이 섬기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누리고 있는 물질의 풍요 그리고 율법의 의를 더욱 더 얻고자 하는 것은 이스라엘이 바알을 섬겼던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음행입니다

음행의 모습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율법과 복음을 함께 섬기는 것이고 또한 이렇게 더 많은 풍요를 위해서 돈 놓고 돈 먹기를 하면서 하나님을 시험하는 그들이 바로 음행에 빠져 있는 이스라엘을 그대로 따라가고 있는 모습입니다.

 

초대교회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이 세상의 풍요를 위해서 하나님을 시험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하나님을 시험하고 있습니다. 특히 말라기에 나와 있는 말씀을 오해를 하고 그렇게 시험하는 것을 아주 당연히 생각을 하고 돈 놓고 돈 먹기 시험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바알이 조금 자기들을 위해 더 축복을 해 주면 그것이 하나님께서 축복을 해 주신 것으로 오해를 하고 간증을 하면서 바알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물질의 축복 자랑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또한 내가 행하고 있는 선한 일과 의로운 일 자랑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다 바알을 자랑하는 일임을 깨닫지 못하면 이스라엘과 같이 멸망의 길로 가게 됩니다. 성도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그대로 감사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성도는 나그네입니다

천국 본향을 찾아가고 있는 나그네입니다

그 나그네가 이 세상의 풍요의 신 바알에게 빠져 있다면 그는 성도라고 할 수 없습니다. 성도는 조금 주면 그것을 또 많이 주면 많이 받은 것을 감사하면서 자기 처지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른 믿음을 가진 성도의 모습입니다.

 

바알을 섬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축복을 해 주신 그것으로 주님을 위해 살아가야지 바알을 섬겨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자기가 바알을 섬기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아주 열심히 바알을 섬기면서 깊은 음행에 빠져 있는 것이 바로 현대 교회의 모습니다. 그것이 기복주의입니다

 

바알을 섬기면서도 알지 못 합니다

자기들이 바알을 섬기고 있다는 것을 꿈에도 생각을 못하고 있고 그것이 하나님에 대한 열심이라고 생각을 하기 때문에 더욱 열심을 내서 바알을 섬기는데 힘을 쓰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이생의 축복과 은사를 가지고 바알을 섬기고 있습니다.

무슨 말씀이냐면 물질을 더 탐하기 위해서 헌금을 하면 하나님께서 하는 그 만큼 갚아 준다고 하는 그것이 바알을 섬기는 일입니다 내가 더 많은 헌금을 한다고 그것을 갚아 준다는 말씀이 어디 있습니까? 그렇게 많은 헌금을 해서 헌금을 한 그대로 돌려받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은사 자랑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마치 자기가 받은 그 은사가 하나님의 축복으로 오해를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에게 은사를 나눠 주신 것은 그것을 자랑하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은사를 통해 복음이 전해지기를 원해서 각자의 분량대로 은사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은사를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시절에 내가 내 곡식을 도로 찾으며 그 시기에 내가 내 새 포도주를 도로 찾으며 또 저희 벌거벗은 몸을 가리울 내 양털과 내 삼을 빼앗으리라

 

곡식은 양식입니다

제가 굳이 말씀을 안 드려도 양식이 무엇인가를 아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내 살은 너희를 위하는 양식이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거두어 가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바알을 섬기고 있는 이스라엘에게서 복음을 거두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또 포도주를 다시 찾아 가시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신을 거두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성령의 책망을 받아 이스라엘이 바른 길로 가야 하는데 더 이상 성령을 통해 책망을 하지 않겠다는 말씀입니다 성령의 책망을 받지 못하는 이스라엘은 더욱 더 바알을 섬기게 될 것입니다.

 

구원의 옷을 빼앗겠다는 말씀입니다

음행을 하고 있는 이스라엘에게 더 이상을 구원을 베풀지 않겠다는 말씀입니다 바알을 섬기며 음행을 하고 있는 이스라엘에서 이 모든 것을 다 빼앗아 그들을 저주 받게 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깨닫지 못 했습니다.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 이스라엘에게 외쳤지만 이스라엘은 더욱 더 바알을 섬기는 음행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왜 그렇게 했느냐면 바알을 선기면서 더욱 더 풍요를 누렸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교회 안에서 풍요를 누리기 위해 보이지 않는 바알을 섬기면서 음행을 하고 있습니다.

 

신앙은 이생의 것을 더 얻기 위해서 갖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의 기본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분복을 인정하고 하늘의 복을 누리기 위해 본향을 보면서 이 세상에서 수고와 고난을 당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바알이 교회 안에 자리하고 있어서 신앙이 무엇인가 조차 모르고 있습니다.

 

이제 내가 그 수치를 그 연애하는 자의 눈앞에 드러내리니 저를 내 손에서 건져낼 사람이 없으리라

 

바알과 연애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연애가 무엇입니까 사랑하는 사람과 늘 함께 있고 늘 그를 보고 싶고 하는 것이 바로 연애입니다 연애를 하게 되면 눈에 콩깍지가 낀다는 말이 있습니다. 바알과 연애를 하면 예수가 절대로 보이지 않습니다.

 

지금 교회가 얼마나 바알과 연애를 하고 있습니까?

큰 교회를 짓기 위해 경쟁을 하고 있고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 주신 은사를 나타내기 위해서 별의 별짓을 다 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헌금을 얼마를 하는 것에 따라 그 믿음이 평가를 받고 있고 그들이 마치 하나님의 축복인 것으로 호도를 하고 있습니다. 이런 행위들이 다 바알과 연애를 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바알을 따라가면 그 바알이 주는 것으로 망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주신다고 착각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실제 교회 안에서 바알을 섬기고 있으면 그 다음 부터는 바알이 줍니다. 나는 하나님을 믿고 있다고 하지만 바알을 따라가는 사상에 사로 잡혀 있으면 바알이 적당히 주면서 그를 멸망의 길로 끌고 갑니다.

 

제가 이생의 축복을 다 비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만큼 성도들에게 채워 주시고 있습니다. 그러나 물질을 더 얻기 위해 또 은사를 나타내서 자랑하기 위해 하는 모든 행위들은 교회 안에서 행하는 바알을 섬기는 일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내가 그 모든 희락과 절기와 월삭과 안식일과 모든 명절을 폐하겠고

 

성도들에게 희락을 주셨습니다.

이 희락은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희락입니다

바알을 섬기는 이스라엘은 물질의 축복을 누리면서 육체적으로는 희락을 누렸을지 몰라도 그들의 마음에서는 희락이 제하여 졌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안에서 웃고 떠들고 마음껏 누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돌아서면 공허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절기의 의미 안식일의 의미를 모르고 그것을 행위로만 하다 보니까 행위를 보면서는 잠시 희락을 누리는데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참 희락을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구원을 알고자 방황을 합니다.

아니 어느 사람들을 보면 구원에 대해서는 아예 관심도 없고 그저 자기가 하는 신앙생활을 보면서 잠깐씩 누리는 기쁨을 얻기 위해서 교회에 나가고 있습니다. 절기와 안식일은 다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쳐 주는 예표입니다 그러나 이 시대 절기를 지키고 있고 주일이라고 자기들의 안식일을 지키고 있지만 마음에서는 희락을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가 없습니다.

예수가 있으면 카타콤과 같은 곳에서 하루 한 끼를 먹으면서도 희락을 누릴 수 있는데 바알을 통해 물질과 은사로 풍요를 누리고는 있어도 마음에서는 늘 무엇인가 찜찜한 것을 털어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알이 축복을 해 주는 그것을 누리면서 하나님을 잘 믿고 있다고 착각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안식을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 안에서 참 평강을 누리지 못하고 바알에게 늘 투정을 부리면서 다고다고 하면서 더 많은 풍요를 누리기 위해 애를 쓰고 있습니다.

 

저가 전에 이르기를 이것은 나를 연애하는 자들이 내게 준 값이라 하던 그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를 거칠게 하여 수풀이 되게 하며 들짐승들로 먹게 하리라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을 상징입니다

그 열매는 구원을 상징하는 것을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알고 있습니다.

무슨 말씀이냐면 바알에게서 받은 그것을 보면서 자기들이 마치 구원을 받은 것으로 착각을 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영생의 열매는 없습니다.

그러나 겉으로 보이는 행위의 열매는 풍성합니다.

이스라엘은 바알을 통해 겉으로 보이는 풍성한 열매를 보면서 자기들이 구원을 받은 선민이라고 착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교회 안에서 그런 행위들의 겉모습을 보면서 자기들이 구원을 받은 이스라엘과 같이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누가 줍니까?

이스라엘이 살던 가나안에서 바알이 주었습니다.

지금도 교회 안에서 겉으로 나타나는 포도나무 열매와 무화과나무 열매를 바알이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것을 보면서 마치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다고 오해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바알도 준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당연히 사망에 빠뜨리게 하려면 그들이 바알을 섬기고 있으면 바알이 줘야 사망의 골짜기로 빠질 것 아닙니까? 이스라엘을 멸망의 길로 가게 했던 그 바알에 지금도 교회 안에 그대로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바알은 지금도 풍요를 원하는 자들에게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의 열매를 주면서 마음껏 누리게 하고 있습니다.

 

저가 귀고리와 패물로 장식하고 그 연애하는 자를 따라가서 나를 잊어버리고 향을 살라 바알들을 섬긴 시일을 따라 내가 저에게 벌을 주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얼마나 많은 것을 누리고 있습니까?

요한계시록18:9절을 보면

그와 함께 음행하고 사치하던 땅의 왕들이 그 불붙는 연기를 보고 위하여 울고 가슴을 치며

 

사치를 누리고 있습니다.

바알이 주는 대로 받아서 마음껏 사치를 누리고 있습니다.

큰 건물을 짓고 교회 안은 너무도 화려하게 장식을 하고 자기들의 은사를 뽐내면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다고 하는 그들이 바알을 섬기면서 사치를 누리고 있습니다.

 

그 마직막이 어떻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바알을 섬기는 자는 반드시 망합니다. 지금 한국 교회는 바알에 의해서 지배당해 있고 바알로부터 받은 그것을 서로 자랑하면서 사치와 연락을 누리고 있습니다. 바알에게 빌어서 부자가 되어서 가난한 자는 감히 교회 문을 넘기도 힘이 든 세대입니다.

 

이스라엘은 보이는 바알을 섬겼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보이지 않는 바알을 섬기고 있습니다.

내가 깨어 있지 않고 말씀을 바로 깨닫지 못하면 바알을 섬기면서도 그것이 하나님에 대한 열심이라고 착각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깨어나세요.

그리고 바알과 연애를 하지 마시고 오직 한 남편인 예수 그리스도와 연애를 해서 그토록 바라는 천국에 들어가는 성도가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