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강, 병이 났다고 하려무나
아가 5:6-8절을 보면
“내가 나의 사랑하는 자 위하여 문을 열었으나 그가 벌써 물러갔네 그가 말할 때에 내 혼이 나갔구나 내가 그를 찾아도 못 만났고 불러도 응답이 없었구나 성중에서 행순하는 자들이 나를 만나매 나를 쳐서 상하게 하였고 성벽을 파수하는 자들이 나의 웃옷을 벗겨 취하였구나 예루살렘 여자들아 너희에게 내가 부탁한다 너희가 나의 사랑하는 자를 만나거든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났다고 하려무나”
성경은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나 있습니다.
성경을 보고도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한다면 그는 아직 복음이 없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저 입술에 바른 말로 사랑 타령을 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사랑을 하는 사람은 그 마음에서 느낌을 받고 충분히 그 사랑에 흠뻑 취해 있습니다.
바로 그런 사랑을 알아야 합니다.
꼭 말하지 않아도 그가 있다는 자체만으로도 내가 사랑의 기쁨에 충만할 수 있는 그런 사랑이 내게 있어야 합니다. 지금이야 물질 만능의 시대를 살고 있고 돈에 따라 사랑도 변하는 시대지만 진정 사랑하는 사람은 그가 존재함으로 그가 나를 바라보는 그 눈길을 대하는 것만으로도 사랑을 느끼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입니다
그러나 그 사랑이라는 것을 너무도 모릅니다.
사랑은 물론 이성의 상대에게 끌려 좋아하는 그 마음을 말하기도 하지만 또 다른 뜻은 부모나 스승 또는 신이나 윗사람이 자식이나 제자, 또는 아랫사람을 아끼고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라고 합니다.
사랑은 위에서 아래로 흐릅니다.
아래 사람이 윗사람을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사랑이라는 단어의 뜻을 모르고 하는 말입니다 부모는 자녀를 사랑할 수 있어도 자녀는 부모를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것은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공경을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신이 인간을 사랑할 수는 있어도 인간이 신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인간이 신을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신에 대한 존재를 폄하하는 말이며 사실은 써서는 안 되는 말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도 네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네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라는 말씀이 맞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런 뜻으로 말씀을 하신 것이지 사랑이라는 바른 언어의 뜻으로 본다면 절대로 아래 사람이 윗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쉽게 말씀을 드리면 빛과 같습니다.
태양에 비춰지는 모든 사물은 빛을 받습니다. 태양이 있기 때문에 빛이 있는 것이지 태양이 없는 상태에서는 빛이라는 것은 존재하지도 않습니다. 마치 그와 같이 사랑이라는 것도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 사랑이 존재를 하는 것이지 하나님의 사랑이 없는 상태에서 우리 인생은 사랑이라는 것을 느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태양이 있어서 빛이 비춥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인생을 사랑하시니까 사랑이라는 것이 보여 진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사랑을 모르는 상태에서 사랑을 논한다는 것은 한 마디로 말씀을 드려서 태양을 한 번도 보지 못한 사람이 빛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 것과 똑 같습니다
소경도 지식으로 압니다.
그 빛을 본 사람이 어떻다는 것을 이야기 하면 자기도 빛을 보지는 못 했어도 그 빛을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아무리 잘 이야기 한다 해도 빛에 대해서 정확히 설명을 하지를 못 합니다 또한 그것이 가슴에서 느끼는 것이 아니라 그저 머리만 커져 있을 뿐입니다
사랑 아무리 떠들면 뭐 합니까?
빛을 보지도 못한 소경이 빛을 이야기 하는 것과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도 느끼지도 못한 사람이 사랑을 이야기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니까 자기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입에 바른 말을 하면서 자기 마음을 자랑하려고 합니다.
부모가 되어 본 사람만이 압니다.
자식이 내가 얼마나 사랑을 하고 있는 가를 깨달을 수 있습니까?
물론 어느 정도는 알기 때문에 사랑한다고 말할 수는 있어도 부모의 사랑은 부모가 되어 보지 않고는 깨달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사랑에 대해서 조금이나마 이해를 하게 하기 위해서 자녀를 낳게 하시고 그 사랑이 어떤 것인가를 조금이나마 깨닫게 하셨습니다.
부모가 아들을 사랑한다는 것은 감동이 됩니다.
그러나 아들이 부모를 사랑한다는 것은 별로 감동을 주지 못 합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이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사랑이 아래에서 위로 올라갈 수 있다면 자녀가 부모를 사랑하는 일도 충분히 감동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공경을 하는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저도 이 사랑을 말로 어떻게 표현을 해야 할지를 모르겠습니다.
물론 부모가 되어 자녀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 어느 정도는 이해를 하고 있지만 과연 하나님의 사랑을 내가 얼마나 표현을 할 수 있을까 하는데 있어서는 제 평생 그것을 깨달으려고 해도 다 알 수 없는 것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런데 너무 쉽게 사랑한다고 말 합니다
자기가 하나님을 무척 사랑하는 것으로 미사여구를 써 가면서 그것을 표현하려고 들 합니다. 정말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것을 마치 태양의 빛과 같이 받고 있는 사람이라면 감히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못할 것입니다
자녀가 부모를 사랑한다고 하는 말은 합당하지 않습니다.
성경에 그리고 예수님이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씀을 했어도 우리가 우리 입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그것은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나타내고자 하는 인간의 악한 심성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아가서는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너무도 잘 나타내 주신 말씀입니다
전체 아가서가 그렇지만 오늘은 본문 말씀을 가지고 우리가 얼마나 사랑을 받고 있는 가를 조금이나마 깨달을 수 있는 시간이 된다면 하나님을 아는데 있어서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내가 나의 사랑하는 자 위하여 문을 열었으나 그가 벌써 물러갔네 그가 말할 때에 내 혼이 나갔구나 내가 그를 찾아도 못 만났고 불러도 응답이 없었구나”
아가서는 말씀이 참 어렵습니다.
표준새번역입니다.
“사랑하는 이를 맞아들이려고 문을 열었지. 그러나 나의 임은 몸을 돌려 가 버리네. 임의 말에 넋을 잃고 그를 찾아 나섰으나. 가버린 그를 찾을 수 없네. 불러도 대답이 없네.”
공동번역입니다.
“임에게 문을 열어 드렸으나 임은 몸을 돌려 가버리더이다. 나는 그만 넋을 잃고 가는 임을 뒤쫓다가 놓쳤다네. 임은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었네.”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은 예수 그리스도와 성도를 예표하는 말씀입니다
지금 술람미 여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찾고 또 찾으며 그들에게 사랑을 베풀어 주셨지만 이스라엘은 언제나 그렇게 하나님을 떠나갔습니다.
구약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 가를 아주 잘 가르쳐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 구약을 보면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 항상 하나님을 떠나 있었던 것을 보게 됩니다. 그들이 안식일을 지키고 또 절기를 지키고 매일 제사를 양을 잡아서 제사를 드리고 했지만 실제는 모두가 율법주의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사람은 늘 율법주의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런 인생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사랑 안으로 끌어 들이려 했지만 그들은 언제나 다시 율법주의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잠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다가도 또 자기들이 평안해지기 시작을 하면 율법주의에 빠져서 자기들이 하는 행위를 보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고 착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항상 문을 열어 두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 문으로 들어오기를 싫어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문이 무엇인가를 보겠습니다.
요한복음 10:7절을 보면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예수님은 양의 문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에 성막을 통해서 이스라엘에게 자기를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 성막에서 양을 잡아서 제사를 드리면서도 양의 문으로 들어오기를 거절했습니다.
제사는 너무도 잘 드렸습니다.
어느 정도로 잘 드렸는가 하면 이사야서에서 보면 무수한 제물과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에 배가 불렀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고 있는 성막에서 하나님께서 배가 부를 정도로 제사에는 행위에는 열심을 냈지만 그 문 안으로 들어오는 것은 싫어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죄인입니다
그러나 그 죄를 전가하기 위해 양을 잡아서 제사를 드렸지만 그 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찾지는 못했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이 깨달아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지금도 자기들이 말하는 각종 예배를 아주 잘 드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의 입술로 회개 기도를 하면서 자기 죄의 용서를 구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용서를 구하는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단번 속죄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심지어는 자기들이 입술로 고백하고 기도하는 그 회개의 기도가 죄를 사해 주는 방법으로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이스라엘도 죄가 보이면 양을 잡아서 양에게 자기 죄를 전가해서 제사를 드리고 난 후에 제사장이 네 죄가 사해졌다는 선포를 하면 자기 죄가 없어진 것으로 믿고 갔습니다. 물론 그것이 절대적으로 틀린 것은 아니지만 그 안에 있는 의미는 바로 앞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양 대신 십자가를 지시고 이스라엘의 죄를 단번에 속죄하실 것을 예표해서 그 제사 제도를 만들어 가르쳐 주신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제사는 아주 잘 드렸지만 앞으로 오셔서 자기들의 죄를 대속하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는 못 했습니다. 문을 열어 놓았지만 이스라엘은 실제 아가서의 말씀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고 도리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일을 행하고 말았습니다.
문을 열어 놓았는데 나가 버렸습니다.
그렇게 이스라엘이 가 버리니까 넋을 잃고 그 이스라엘을 찾아 나섰다는 말씀입니다 얼마나 이스라엘을 사랑하시면 그 이스라엘이 자기를 싫어해서 떠나가는 데도 그들을 찾으려고 넋이 나갔다고 말씀을 하겠습니까?
혼이 나갔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한 영혼을 얼마나 귀히 여기시는 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한 영혼이 사망의 길로 빠져 들어가면 하나님께서는 정말 혼이 나갈 정도로 그 영혼을 찾아 나서시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인생들을 그만큼 사랑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누가 그렇게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혼이 나갈 정도로 누가 자기를 싫어해서 떠나간 사람을 찾아 나서겠습니까?
이것은 보통의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아니고는 그 어느 누구도 사랑할 수 없는 그런 사랑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렇게 뒤 쫓아서 이스라엘을 불렀지만 그들은 대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임을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을 보내셔서 이스라엘을 불렀지만 이스라엘은 대답이 없고 자기 갈 길로 가고 말았습니다. 양의 문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문을 활짝 열어 놓고 들어오라고 했지만 그들은 오히려 돌아서서 가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모습이 너무 안타까워 하나님께서 직접 찾아 나섰습니다.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이 그랬던 것처럼 지금 이 시대도 역시 자기 입술로는 회개를 하고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단번 속죄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양의 문인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오기를 거절하고 있습니다.
예수 안으로 안 들어옵니다.
이스라엘이 율법주의에 빠져 그곳으로 간 것과 같이 지금도 역시 교회 안에 팽배하게 자리하고 있는 율법주의에 빠져 좀처럼 양의 문으로 들어오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부르시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임이 떠나가서 넋이 나간 것처럼 지금도 성도들을 부르고 계신다는 것을 깨닫기 바랍니다. 부르고 있지만 돌아오지를 않고 대답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아무리 불러도 대답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교회에 나왔다고 하나님께서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고 착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이 성막에서 제사를 드리면서도 못 들은 것처럼 지금도 역시 교회 안에 들어와 있으면서도 못 듣기 때문에 더욱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이스라엘만 그랬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차라리 이스라엘은 한 남편이 율법을 따라 나갔지만 지금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아직도 율법을 버리지 못하고 있으면서 두 남편을 섬기는 지독한 음행에 빠져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한번 음행에 빠지면 아무리 불러도 대답을 할 수 없습니다.
너무 좋기 때문입니다
한 남편을 섬기는 것 보다 더 좋기 때문에 음행에 한번 빠지면 거기서 헤어 나오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때는 아무리 주변에서 바른 말을 해도 들으려 하지 않는 것이 사람입니다 마찬가지로 영적인 음행에 빠져도 복음을 아무리 바르게 가르치려고 해도 귀에 들어오지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인생을 넋이 나갈 정도로 찾아 나서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한 영혼이 천하보다 더 귀하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이 지구 같은 천하는 수조 개라도 말씀으로 만드실 수 있지만 잃어버린 한 영혼은 한번 율법주의나 영적 음행에 빠져 있는 인생을 다시 돌이킬 수 없기 때문에 그렇게 넋이 나갈 정도로 안타까워하며 찾아 나서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말을 듣겠습니까?
한번 마음이 돌아 서 버린 여인이 마음을 바꿀 수 있겠습니까?
절대로 안 바뀝니다. 물론 하나님의 능력으로는 못하는 것이 없지만 지금 아가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떠한 사랑을 베풀고 있는 가를 가르쳐 주시기 위해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그 영혼을 찾으려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누가복음 19:10절을 보면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기 때문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세상에 오셔서 잃어버린 자를 찾기 위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러나 지금 현대 교회 안에는 잃어버린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지식이 있어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고 착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가득 차 있습니다.
사랑도 모르면서 사랑타령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도 모르면서 자기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다고 입에 바른 말을 하고 있습니다. 아주 매끄러운 말로 자기를 자랑하기 위해서 사랑이라는 단어를 아무 거리낌이 없이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나타내기 위해서 행위에 열심을 다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믿으려하기 보다는 자기들의 행위에 더욱 관심을 갖고 그것을 따라가느라 정신이 팔려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들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보내주셔서 대신 십자가를 지시게 하셨는데도 그 십자가의 의미를 전혀 깨닫지 못하고 행위로 자기들의 하찮은 사랑을 보이려고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성중에서 행순하는 자들이 나를 만나매 나를 쳐서 상하게 하였고 성벽을 파수하는 자들이 나의 웃옷을 벗겨 취하였구나”
하나님의 사랑을 이스라엘은 도리어 멸시를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기는커녕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고 또 그 옷을 벗기고 수치를 주었습니다. 잃어버린 자들을 찾으려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스라엘이 죽였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가 구원을 가장 방해를 하고 있겠습니까?
세상 사람들은 구원을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실제 구원을 방해하는 사람은 자기들이 예수를 믿는다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의 의미를 모르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배나 지옥 자식이 되게 만들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바로 이스라엘에게 하셨던 말씀입니다
지금 이 시대도 세상 사람들이 배나 지옥 자식이 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고 있다고 하는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배나 지옥 자식이 되게 만들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냥 지옥 자식입니다
그러나 교회에 나온 사람을 지옥으로 빠뜨리는 사람은 배나 지옥 자식이 되는 것입니다 교회에 나와서 행위에 빠져 있는 사람들로 말미암아 바른 믿음을 갖지 못하게 만들어 소자가 구원을 받는데 있어 방해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 바로 배나 지옥 자식을 만들고 있는 사람입니다
메시야를 거절했던 것이 이스라엘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이 교회 안에 있는 다수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되며 나를 세속에 빠지지 않게 지켜 내 영혼을 구원해야 합니다. 지금 교회에서 행하고 있는 일들 중에 십자가를 거절하고 있는 행위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 가를 바로 분별하지 못하면 자기 영혼이 구원받을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예루살렘 여자들아 너희에게 내가 부탁한다 너희가 나의 사랑하는 자를 만나거든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났다고 하려무나”
병이 났습니다.
얼마나 사랑하면 병이 나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정말 우리 인생이 구원을 받는 것을 원하시는데 병이 나도록 원하고 계시는데 인생들은 배나 지옥 자식이 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것이 교회 밖에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런 사랑을 해 보셨습니까?
정말 병이 날 정도로 넋이 나갈 정도로 사랑을 해보셨습니까?
아마 그런 사랑을 경험해 본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한가를 조금이나마 깨달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병이 날 정도로 사랑하기 때문에 이 세상에 오셔서 자기가 십자가를 대신 지신 것입니다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십자가를 지시지 않으면 도저히 사랑하는 사람을 구원할 수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에 수치를 감당하시면서 십자가에서 자기의 사랑을 나타내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 사랑을 받아들이려 하지를 않고 있습니다. 병이 날 정도로 사랑을 하고 있는데도 사람들은 아무리 불러도 대답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병이 나도록 한번 사랑을 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렇다 해도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아주 조금 어느 정도로 깨닫고 있는 가를 사도 바울이 잘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바로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3:12절을 보면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어느 정도 압니까?
청동 거울을 보는 것 같이 희미하게 안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있지만 어느 정도로 알고 있느냐면 옛날 청동 거울을 보는 것 같이 희미하게 알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병이 날 정도로 우리 인생들을 사랑하고 있는데 우리는 아주 희미하게 알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희미하게라도 알면 다행입니다.
그런데 희미하게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사랑 타령을 하고 있으면서 자기가 무척이나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는 것으로 행위로 나타내려고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가식이고 자기가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기 때문에 아는 것처럼 나타내려고 하는 것임을 분별해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성도는 감히 자기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말을 할 수 없습니다. 희미하게 아는 그것을 어떻게 감히 입술로 말을 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그 사랑을 조금이라도 더 알기 위해서 성경을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는 입술로 고백하는 자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미를 알고자 노력하는 성도입니다 그런 성도가 되셔서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ne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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