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강, 종과 아들(5)
(갈4장 강해)
갈라디아서 4:21절을 보겠습니다. (신 307쪽)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사도 바울이 묻고 있습니다.
율법 아래 있는 사람들에게 율법 아래 있는 것이 어떤 것이라는 것을 듣지 못했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이 시대도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율법 아래 있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율법이 말하는 것을 듣지 못했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율법
바른 정의를 하고 있어야 합니다. 이 율법에 대한 바른 정의를 가지고 있으면 복음의 80% 이상은 안다고 보아도 됩니다. 사실 율법에 대해서 바르게 알고 있어야 그 다음의 문제들이 해결이 될 수 있는데 사람들은 율법에 대해서 거의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니 율법에 대해서 너무 다르게 해석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차라리 모르면 루터가 되시기 바랍니다.
루터는 로마서에 있는 말씀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이 말씀을 가지고 종교개혁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성경의 거의 모든 부분을 알고 있었지만 야고보서를 강해를 하지 못 했습니다. 그래도 그는 율법에 대해서 어느 정도 정의를 내리고 있었기 때문에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복음이라고 하면서 강해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솔직히 야고보서를 바르게 강해를 하고 있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 보면 맞습니다. 아니 반대로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 아래 있고자 해서 율법이 말하는 바를 모르기 때문에 야고보서를 전혀 다르게 해석을 해서 가르치고 있고 또 다른 율법주의를 양산하고 있는 것이 이 시대 교인들의 모습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율법대로 살기를 원 합니다
내가 교회 안에서 한 가지라도 율법을 지키고 있다면 그는 율법 아래서 율법대로 살기를 원하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명심하고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그렇게 율법 아래 있는 사람들에게 묻고 있습니다. 율법이 말하는 것을 듣지 못했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모릅니다.
이 시대도 율법이 말하는 것을 듣지 못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듣지 못했느냐는 말씀은 율법의 기능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고 있느냐는 뜻으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 아래 있고자 하는 사람은 율법을 모르기 때문에 율법 아래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율법에 대해서 바른 정의를 내리고 있는 성도는 절대로 율법 아래 있을 수 없습니다.
종과 아들입니다
율법 아래 있는 사람들을 종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종으로 살고자 하는 사람들아 율법이 무엇인가를 듣지 못했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교회에 나와서 이 율법의 문제를 바로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은 절대로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시대는 이 율법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다고 해야 맞을 것 같습니다.
로마서3:19절을 보겠습니다. (신 243쪽)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 아래 있는 사람에게 분명히 경계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자기가 율법 아래 있으면서도 율법 아래 있다는 것을 전혀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이는 모든 입을 막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 아래 있는 자는 변명을 할 여지가 없다는 것을 분명히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왜 변명하지 못하고 입을 막게 되는 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지금 이 시대 율법 아래 있으면서 종으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자기가 율법을 지키는 것을 보면서 그래도 세상 사람들 보다 깨끗하게 살고 있다고 자부를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허황된 생각인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모든 입을 막고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는 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한 가지라도 지키고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입을 막게 되는 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것을 혼인 잔치의 비유에서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예복을 안 입은 한 사람에게 왜 예복을 안 입었느냐고 물으니까 유구무언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나름대로는 율법을 지켰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 보니까 자기가 지켰다고 하는 율법이 오히려 악을 행하는 일이었다는 것을 알고 나니까 유구무언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율법 아래 있는 사람들은 변명을 해 보아야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셔서 우리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의에 옷을 입혀 주셨지만 율법을 보다가 결국에는 그 의를 안 입습니다.
그리고 심판대에 섭니다.
그런데 율법을 지켰다고 하는 것을 보니까 그것이 악으로 변해 있는 것을 보고 입을 막아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왜 입을 막게 되는 가를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이 깨닫지를 못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성경이 가르쳐 주고 있지만 그들의 눈에는 보이지가 않습니다.
갈라디아서 3:10절을 보겠습니다. (신 305쪽)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잘 이해하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교회 안에서 십일조를 내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 십일조만 내는 것으로 끝이 나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모든 율법을 항상 행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나는 십일조만 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일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나라도 율법을 지키고 있으면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성경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613가지 율법을 항상 행하지 않으면 그는 저주를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내가 지키고 있는 단 한가지의 율법이 율법 책에 기록된 모든 율법을 살리기 때문에 나는 모든 율법을 다 지켜야 하는 의무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율법이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분명히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율법이 말하는 것을 듣지 못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삼가 지키고 있는 것을 율법이라고 생각하지도 않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지금 갈라디아 교회 안에서 삼가 지키고 있는 것을 보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삼가 지키는 것으로 종이 되고 삼가 지키는 그것 하나를 하면 율법 책에 기록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 아래 있지 마시기 바랍니다.
전체 율법을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교회 안에서 삼가 지키고 있는 단 한가지의 율법이 저주 아래 있게 한다는 것을 사도 바울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 시대는 겁도 없이 율법을 너무 잘 지키려고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자기 스스로 저주 아래 있기를 자초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물론 성경에 율법을 지키라는 말씀이 많이 나옵니다.
사도 바울이 그것을 몰라서 로마서나 갈라디아에서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은 저주를 받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에 이렇게 반대가 되는 말씀들이 있다 보니까 사람들은 어느 말씀이 맞는지를 모르고 그저 종이 되어서 시키는 대로 하고 있습니다.
늘 기준이 있습니다.
성경에 율법을 지키라는 말씀이 있고 또 율법 아래 있는 자는 저주를 받는 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면 어떤 말씀이 더 위에 있는 가를 알고 또 어느 말씀이 기초가 되는 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성경을 보면 율법이 말하는 바를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성경을 보면서도 어느 말씀이 기초가 되는 줄을 모르고 있고 자기가 모르면 지혜를 구해야 하는데 그저 시키는 대로 하면서 자기 생명을 소홀하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이 말하는 바입니다
그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율법을 한 가지라도 지키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 안에서 삼가 지키고 있어서 종으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율법이 말하는 바를 듣지 못했느냐 하면서 율법 아래 있는 사람 율법을 지키는 사람은 저주를 받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기초가 율법을 지키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성경에 율법을 지키라는 말씀은 어떻게 보아야 합니까? 그런 말씀을 보고 율법을 지켜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해석을 하는 사람은 성경을 잘 모르고 있습니다. 기초가 율법 아래 있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고 했으면 성경에 설령 그렇게 기록이 되어 있다 해도 기초를 흔들어서는 안 됩니다 기초가 흔들리는 해석을 했다면 그것은 내가 성령의 감동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율법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아담이 왜 단 한 가지 율법에 졌는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것은 나 역시도 아담과 같이 그렇다는 것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내가 살인을 안 하고 간음을 안 하고 도적질을 안 하고 있고 또 다른 신을 섬기지 않고 있으니까 마치 십계명을 잘 지키고 있는 것 같지만 우리는 영적으로 다 그런 죄를 지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율법 아래 있으면 저주를 받습니다.
우리가 613가지 중에 몇 개를 어겨서 저주를 받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단 한 가지의 율법으로 저주를 받는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 율법 아래 있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지키고 있는 율법을 보면서 세상 사람들과 비교를 하고 있고 그런 생각에 사로잡히게 되면 율법이 말하는 바를 도무지 깨달을 수 없습니다.
저주입니다
그것이 율법이 말하는 것입니다 율법은 다 지켜라 다 지키지 못하면 저주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율법 책에 기록된 율법을 항상 다 지켜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저주를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오셔서 율법을 완전케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 새로운 영이 탄생이 되어서 율법의 요구를 이루었다고 로마서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4:22절을 보겠습니다. (신 307쪽)
“기록된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종과 아들입니다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느니 하나는 계집종에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이스마엘과 이삭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두 아들이 있는데 하나는 계집종에게서 났고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종의 아들은 종입니다
지금과 같은 시대에서는 이해하기가 힘이 드는 말씀이라 해도 성경이 그렇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종에게서 나면 종이 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비유입니다 바로 뒤에 이것은 비유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누구에게서 났는가에 따라서 종이 되기도 하고 아들이 된다는 것을 비유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스마엘과 이삭은 예표입니다
누구에게서 났는가에 따라서 그 아들 역시 종이 되기도 하고 자유하는 아들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똑같이 아브라함에서 났지만 누구에게서 났는가에 따라 종이 되고 아들이 되고 합니다. 이스라엘과 이삭이 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했지만 종으로 살았던 사람이 있고 아들로 살았던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 시대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합니다. 교회 안에 있는 교인들을 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 있지만 계집종에서 난 아들이 있고 또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난 아들이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종은 법아래 있고 자유하는 여자는 법에서 자유하고 있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4:23절을 보겠습니다. (신 307쪽)
“계집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두 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계집종에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아 났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종과 아들이 누구인가를 비유로 해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있지만 육체를 따라 가는 자는 종이고 약속으로 말미암은 자는 아들이라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잘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종은 육체를 따라 났습니다. 그리고 아들은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약속으로 말미암아 났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육체를 따라 행하는 종들이 있고 약속을 믿고 있는 아들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 둘을 비유로 해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종도 되고 아들도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종이냐 아들이냐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율법도 잘 지키고 약속도 믿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비유로 해서 종이냐 아들이냐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육체를 따라 났으면 종이 되고 그 종은 아들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아들이 되려면 반드시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약속으로 말미암아 낳아야 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종과 아들을 분별을 못하고 있습니다. 종으로 살면서도 자기가 아들인 척 하고 있습니다. 한번 종이 된 사람은 절대로 아들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종은 종으로 사는 것이고 아들은 아들로 산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두 사람입니다
하나는 육체를 따라 행하고 있고 하나는 약속을 믿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믿음도 있고 행위도 잘하고 하는 그런 말은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이 종이 누구며 아들이 누구인가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두 가지를 함께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종이 아들도 될 수 있고 아들이 종도 될 수 있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비유는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을 예를 들어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반드시입니다
육체를 따라 난 자는 약속으로 말미암지 않았습니다. 또 약속으로 말미암은 자는 육체를 따라 행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이 두 가지를 다 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내가 육체를 따라 난 자인가 아니면 약속을 따라 난 자인가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이스마엘이 이삭이 될 수 있습니까?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스마엘은 절대로 이삭으로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지금도 육체를 따라 행하는 자는 절대로 약속을 믿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 삼가 지키고 있는 것이 있으면서 약속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믿음은 거짓이라는 것을 지금 사도 바울이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이 아닙니다.
자기는 믿는다고 하지만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 신념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약속을 따라 난 자는 육체를 따라 날 수 없습니다. 이삭이 어떻게 육체를 따라 날 수 있습니까? 이스마엘과 이삭은 별개입니다 이 둘이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갈라디아서 4:24절을 보겠습니다. (신 307쪽)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가라”
이것은 비유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가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마엘을 시내 산에서 났습니까? 이스마엘은 가나안에서 났습니다. 물론 이삭도 가나안에서 났습니다. 그런데 왜 성경에는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가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종과 아들의 비유입니다
실제 이스마엘을 시내 산에서 났다는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에 가나안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아들을 주신다고 했는데 십년이 넘어도 안 주시니까 사라가 하갈을 아브라함에게 주어서 아들을 낳게 했는데 그것이 이스마엘입니다. 이스마엘도 이삭도 둘 다 가나안에서 낳았다는 것을 성경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시내 산에서 났다고 말씀합니다.
그것은 종과 아들을 비유해서 가르쳐 주기 위해서입니다. 실제 시내 산에서 났다는 것이 아니라 시내 산이 상징을 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사도 바울이 비유를 통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시내 산이 무엇을 상징을 하고 있는 가를 보겠습니다.
출애굽기31:18절을 보겠습니다. (구 131쪽)
“여호와께서 시내 산 위에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마치신 때에 증거판 둘을 모세에게 주시니 이는 돌판이요 하나님이 친히 쓰신 것이더라”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친히 써 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십계명입니다 시내 산은 이렇게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친히 쓴 십계명을 받아 가지고 내려온 산입니다 율법을 상징하면서 시내 산에서 났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마엘을 실제 시내 산에서 났다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육체로 지키려고 하는 사람은 종이라는 것을 비유로 가르쳐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이스마엘은 시내 산에서 났습니다.
무슨 말씀이냐면 이 시대 십계명을 자기 육체로 지키고 있는 사람은 이스마엘과 같이 종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시대 거의 모든 교회가 다 이 십계명이 살아 있다고 주장을 하고 있고 자기 육체로 십계명을 지키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육체로 십계명을 지키고자 하는 사람이 누구인가를 사도 바울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종입니다
하갈은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았습니다. 이 말씀은 모세가 시내 산에서 하나님께서 친히 쓰신 십계명을 받아 가지고 내려왔는데 그것을 육체로 지키고 있는 사람은 종이라는 말씀입니다 교회 안에 있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스스로 종이 되려 하고 있습니다.
십계명입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말 합니다. 거의 모든 교회가 그렇게 주장을 하고 있다고 보면 맞습니다. 율법 613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제사법이 있고 시민법이 있고 도덕법이 있다고 합니다. 이 십계명은 도덕법에 해당이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제사법과 시민법은 폐하여졌는데 이 도덕법은 살아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제가 아는 거의 모든 교회의 주장입니다
그런데 갈라디아에서 사도 바울은 시내 산에서 낳은 이스마엘을 종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십계명이 살아 있다고 주장을 하고 그것을 육체로 지키려고 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다 종이라는 것을 사도 바울이 분명히 가르쳐 주고 있지만 사람들은 성경을 바로 보는 눈이 열리지 않아서 종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주일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십계명에 있는 안식일을 말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기도를 할 때 안식일을 지키는 것과 같이 거룩한 주일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주일이라고 하면서 그 날을 거룩하다고 하면서 날을 삼가 지키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종이라고 사도 바울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비유입니다
성경에서 말씀을 하고 있는 비유를 바로 이해를 해야 합니다. 종이 누구인가를 비유를 통해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모세가 십계명을 시내 산에서 받아 왔는데 사도 바울은 하갈이 시내 산에서 이스마엘을 낳았다고 하면서 종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 중에 어느 한 가지라도 그 아래 있는 사람은 종이라는 것을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사람들이 이 말씀에 다 넘어갑니다.
돌판을 하나님께서 친히 쓰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십계명을 두 돌판에 쓰셨는데 하나님께서 친히 쓰셨다고 하니까 감히 그것을 안 지킨다는 것을 상상도 하지 못 합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친히 쓰신 것을 폐한다는 것을 생각도 할 수 없습니다. 누구라도 이 말씀을 보게 되면 하나님께서 친히 쓰신 십계명을 폐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십계명을 친히 쓰셨습니다. 그러나 십계명에는 영적인 의미가 다 담겨져 있습니다. 십계명 뿐 아니라 율법은 그림자로서 실체를 보아야 합니다. 영적인 의미를 보아야 하는데 문제는 이 십계명을 자기들 육체로 지키려고 하는 것에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계집종에서 육체를 따라 났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육체를 따라 났습니다.
이 말씀은 십계명을 육체로 지키려고 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율법을 육체로 지키려고 하는 자는 다 종이라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십계명에 대해서 설교로 올려 드렸습니다. 그 십계명을 보면 다 영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 성도는 십계명을 육체로 지키는 것에 있어서는 분명히 다 폐하여졌다는 것을 믿고 있기에 지키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종은 어떻습니까?
지금도 교회 안에서 육체로 지키고 있습니다. 율법에서 그림자를 걷어 내고 그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육체로 지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계집종에게서 육체를 따라 났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육체를 따라 난 이스마엘을 시내 산에서 났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모세가 십계명을 시내 산에서 받았습니다.
시낸 산에서 난 이스마엘은 육체를 따라 났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십계명을 육체로 지키고 있는 사람은 하갈이 낳은 이스마엘과 같이 종이라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 주일이라고 하면서 그 날을 거룩하다고 말하고 삼가 지키고 있는 모든 사람은 다 시내 산에서 낳은 이스마엘과 같은 종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레위기 27:34절을 보겠습니다. (구 192쪽)
“이상은 여호와께서 시내 산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모세에게 명하신 계명이니라”
율법
시내 산에서 반포를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마엘을 시내 산에서 낳았다고 하고 말씀을 하고 있고 또 육체를 따라 났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이렇게 육체를 따라 행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무조건 종이라고 보면 맞습니다.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누가 종에게 유업을 주겠습니까? 혹시 아들이 없다면 줄 수 있을지 몰라도 아들이 있는 상태에서는 절대로 종에게 유업을 주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이 시대 교인들은 스스로 종이 되려고 하고 있습니다. 시내 산에서 율법을 반포하셨는데 그것을 육체를 따라 난 자와 같이 지키면서 종이 되려고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두 언약입니다
시내 산에서 첫 언약을 반포하셨습니다. 육체에 따라 난 자들은 이 첫 언약을 따라 육체로 율법을 지키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시내 산에서 하나님께서 반포하시는 율법을 듣고 스스로 종이 되겠다고 언약을 했습니다. 그것을 첫 언약이라고 합니다. 인생이 육체로 삼가 지키는 모든 행위의 언약이 첫 언약입니다
종으로 살지 마시기 바랍니다.
얼마나 더 명확하게 보여 주어야 종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됩니다. 아니 교회 안에 있는 다수는 자기가 종이라는 것조차 모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육체를 따라 났다고 하면서 사도 바울이 종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버지입니다.
이스마엘도 아버지라고 불렀고 이삭도 아버지라고 불렀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는 종이면서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고 하나는 아들로서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누가 그렇게 불렀습니까?
이스라엘은 아브라함을 아버지라고 불렀습니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서 보면 부자가 음부의 고통 중에서 아브라함을 보고 아버지 아브라함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을 당시 이스라엘의 거의 모든 사람은 종으로 살아가고 있었지만 자기가 종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은 뭐라고 합니까?
예수님과의 대화에서 자기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남의 종이 된 적이 없다고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육적으로는 분명히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자손이었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는 그들은 시내 산에서 낳은 이스마엘과 같이 종이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육적으로만 보았습니다.
음부에서 고통을 받는 부자도 자기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것을 의심치 않았고 이스라엘 역시 자기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죄의 종이 된 자는 모두가 종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율법의 종으로 살아가고 있으면서도 자기들이 종이라는 것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들을 영적인 이스라엘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실제 그들의 행위를 보면 시내 산에서 낳은 이스마엘과 같이 육체를 따라 행하면서 종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삼가 지키고 있는 것들을 열심을 다해 자기 육체로 행하고 있으면서도 자기들이 종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고 그저 남들이 아버지라고 부르니까 자기들도 따라서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하나는 종입니다
교회 안에서 아버지라고 부른다고 다 아들이 아닙니다. 시내 산에서 낳은 자는 아들이 아니라 종입니다 육체를 따라 행하고 있는 자는 종이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고 있던 이스라엘은 모두가 종이었다는 것을 예수님께서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종이 어떻게 행위를 하고 있는 가를 알아야 우리가 종이 되지 않고 양자의 영을 받아서 천국을 유업으로 받을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4:25절을 보겠습니다. (신 307쪽)
“이 하가는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데니 저가 그 자녀들로 더불어 종 노릇 하고”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하갈'이라 하는 것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을 뜻하는데, 지금의 예루살렘에 해당합니다. 지금의 예루살렘은 그 주민과 함께 종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하갈을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예루살렘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전에는 하갈에게서 낳은 이스마엘이 종이었는데 지금은 그 시내 산이 예루살렘을 뜻하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비유를 들어 시내 산에서 낳은 이스마엘이 종이라고 말씀을 했는데 지금의 예루살렘은 그 주민과 함께 종노릇하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비유를 통해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시내 산에서 육체를 따라 낳은 하갈의 아들 이스마엘이 종이라고 말씀을 했습니다. 율법을 문자 그대로 육체로 지키고 있는 사람들이 종이라고 말씀을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예루살렘도 다 종이 되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종노릇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오셔서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말씀을 하셨지만 예루살렘은 스스로 종노릇하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아직까지도 이스라엘은 율법에 의해 종노릇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있습니다. 이스라엘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있는 거의 모든 교회가 종노릇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예루살렘이 종노릇하고 있습니다.
전부 율법주의가 되어 있다는 말씀입니다 시내 산에서 받은 그 율법을 문자 그대로 보면서 육체로 지키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에 오셔서 종노릇하고 있는 이스라엘을 자유하게 해 주시려고 했지만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지금의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종노릇하고 있습니다. 율법에 의해서 종노릇하고 있으면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한 가지라도 율법에 의해서 종노릇하고 있는 사람은 절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 문제가 해결이 안 되면 그는 어느 누구라도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유업을 이을 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8:32-36절을 보겠습니다. (신 159쪽)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저희가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케 되리라 하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예수님은 종이라고 말씀을 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자기들이 종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잘 이해를 하시기 바랍니다. 그들이 왜 종인가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당시 철저한 율법주의자들이었기 때문에 자기들 스스로는 죄를 짓지 않았다고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종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종이 아니라고 말 합니다. 왜 종이 아니라고 하는가 하면 자기들이 죄를 진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로마서에서 율법에 가입을 한 것은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라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이스라엘은 율법을 육체로 너무 잘 지켜서 죄를 안 짓고 있다고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죄를 안 지었습니까?
물론 그들은 육체로는 스스로 자부할 만큼 흠 없는 율법의 의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십계명의 모든 죄를 다 짓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율법 아래 있는 자는 절대로 이 십계명을 다 지킬 수 없다는 것을 깨닫지를 못하고 자기들이 육체로 이스마엘과 같이 지키고 있는 그것을 보면서 종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율법의 종입니다
예루살렘은 종이 되어 버렸습니다. 율법 아래 있으면 반드시 죄의 종이 된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사실 이스라엘이 육적으로는 십계명을 철저히 지키고 있었을지 몰라도 영적으로는 십계명 중에 어느 한 가지도 지키지 않고 있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너희가 죄를 져서 종이 되었다고 하니까 이스라엘은 자기들이 육체로 지키고 있는 율법을 보면서 죄의 종이 되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입니다.
종이 있어서는 안 되는 지명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율법에 종노릇하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시내 산에서 반포하신 율법을 문자 그대로 육체를 따라 행하고 있는 사람이 종이라는 것을 사도 바울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실제 주님께서 오셨을 때 이스라엘이 얼마나 종이 되었는가를 성경이 잘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이 시대 교회도 역시 종노릇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삼가 지키고 있는 율법에 의해서 종노릇하고 있으면서도 자기들이 종이라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율법을 지키는 것이 자유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율법을 폐하시고 자유를 주셨는데 이 시대 교인들은 율법을 지키는 것이 자유라고 말 합니다.
자유를 모릅니다.
어떻게 그렇게 말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됩니다. 율법을 지키고 있는 자기들이 자유하다고 할 수 있는지 이해가 안 됩니다. 자유라는 것을 모르고 있고 또 주님께서 이 세상에 왜 오셨는가를 모르기 때문에 사람들이 종으로 살면서도 자기가 종이라는 것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마치 그와 같습니다.
비유가 기분이 나쁘더라도 실제 그렇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북한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최고인 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이 얼마나 사상적으로 무장이 되었는가 하면 자기들이 군사적으로 매우 강하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세계 군사 비교를 보면 몇 번째 안에 들어가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미국이 있습니다.
사실 전쟁을 하면 게임이 안 됩니다. 물론 미국도 피해가 크겠지만 전쟁이 일어나면 북한이 무조건 지게 되어 있습니다. 물론 정치적인 면이 있어서 전쟁을 할 수 없어서 그렇지 전쟁을 하면 진다는 것을 이 세상의 국가들이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북한에 있는 주민들은 자기들이 이길 수 있다고 장담을 하고 있습니다.
종입니다
그런데도 종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렇게 교회 안에서 세뇌가 되어 있는 사람들은 율법의 종으로 살아가고 있으면서도 자기들이 지키고 있는 율법을 율법이라고 생각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아주 이상하게도 율법을 믿음이라고 말 합니다.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말을 하고 있지만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은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종이 그렇습니다.
더구나 이 일이 영의 일이다 보니까 사람들은 더욱 자기들이 누군가를 모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에서 사도바울이 교회 안에서 육체로 삼가 지키고 있는 것이 있다면 종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그것이 하나님을 위하는 일이라고 하면 절대로 삼가 지키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되어 버리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이 다 종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자기들이 하고 있는 모든 육체의 행위를 하나님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영의 일을 모르고 그저 문자에 갇혀서 성경을 보다가 결국에는 종노릇하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만 그런 것이 아니라 갈라디아서를 지금 누가 보고 있는 가를 알아야 합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경계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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