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강, 종과 아들(4)
(갈4장 강해)
갈라디아서 4:13-14절을 보겠습니다. (신 306쪽)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을 인하여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사도 바울은 안질이 심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성경에도 나중에는 거의 앞이 안 보일 정도가 되어서 대필을 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에 복음을 전했을 때 안질이 상당히 심할 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의 사람들에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교회의 목사들이 거의 탤런트 수준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아마 사도 바울과 같이 안질이 심한 상태에서 복음을 전했다면 그의 겉모습을 보고 누구도 들으려 하지 않았을 것이 분명합니다. 지금 이 시대는 병도 고침을 받아야 능력이 있는 목사가 되어 또 그가 진리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이 어떤 사람입니까?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사도행전에서 유두고라는 청년이 삼층 누에서 떨어져 죽었는데 그를 살려 주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병자들을 고쳐 주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자기 안질에 대해서는 못 고치고 있습니다. 모르겠습니다. 갈라디아교회에서도 병자들을 고쳤는지를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사도 바울은 안질이 너무 심했습니다.
그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육체의 약한 상태에서 갈라디아 교회에 복음을 전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병을 앓았던 것이 기회가 되어서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 교회에서는 오히려 사도 바울이 병을 앓은 것이 계기가 되어서 복음을 전할 수 있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짐이 되었습니다.
지금 그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병이 들어서 안질이 심했을 때 너희에게 복음을 전했다고 말씀을 하면서 내 육체가 그런 것을 보고도 너희가 나를 업신여기지도 않았고 버리지도 않았고 오히려 하나님의 천사와 또는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영접을 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병이 있습니다.
이 시대 교회는 거의 병원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그렇게 병이 걸려서 복음을 전한다고 하면 아마도 이 시대는 너나 잘하세요. 라고 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병을 고쳐 주어야 하는 자가 병이 들어 있다면 업신여기거나 버렸을 것이 분명합니다.
저 역시도 병이 있습니다.
그 병으로 너무도 고통스럽게 지내고 있습니다. 정말 하루하루가 다르다고 보면 맞습니다. 어제는 분명히 좋게 보였는데 그 다음 날에는 꼼짝을 못할 정도로 때로는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제가 이런 것을 잘 안 보이려 무던히도 제 컨디션을 살피고 있습니다. 지금이야 그것이 가능하지만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러 갔을 때는 아마도 함께 누군가의 집에서 기거를 해서 병에 대해서 속속들이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약합니다.
지금은 그런 약한 모습이 있다면 아마도 목회도 못할 것이고 또 복음을 들으려 하지도 않을 것이 분명합니다. 이 시대 교인들의 생각은 믿음이 있으면 병도 다 고칠 수 있다고 생각을 하고 있는데 사도 바울과 같이 심한 안질이 있었다면 전혀 그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갈라디아 교회의 성도들은 그런 약한 모습이 있었지만 사도 바울을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영접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업신여기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이 시대 사도바울과 같이 심한 안질이 있었다면 아마도 분명히 업신여김을 당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가 아무리 진리로 인도함을 받고 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선 외모로 보고 판단을 하는 시대이다 보니까 병이 있는 사람은 복음을 전하는 것 자체가 무리가 되고 있는 그런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왜 지금 이런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율법주의자들은 강합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자기가 가장 약할 때 갈라디아 교회의 성도들이 자기를 영접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종들은 강해야 일을 할 수 있지만 아들은 약해도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실제 종은 자기가 약해지면 쫓겨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늘 강한 모습을 보이려고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종과 아들의 차이입니다.
회사에서도 종은 약해지면 일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들은 약하더라도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종에 속해 있는 사람은 강한 것을 보려고 하고 있고 강한 모습을 내 보이려고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아들로서 약했지만 갈라디아교회의 성도들은 사도 바울을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영접을 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4:15절을 보겠습니다. (신 306쪽)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내가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를 주었으리라”
사도바울이 약할 때 복음을 전했습니다.
심한 안질에 걸려 있었지만 갈라디아 사람들은 사도 바울을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영접을 해서 복음을 듣고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는 양자의 영을 받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늘의 유업을 이을 자로서 기쁨을 누렸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의 그 감격이 지금은 어디에 있습니까? 나는 여러분에게 증언합니다. 여러분은 할 수만 있었다면, 여러분의 눈이라도 빼어서 내게 주었을 것입니다”
복음을 들었습니다.
비록 사도바울이 연약한 가운데서 복음을 전했지만 그들은 그 복음을 듣고 너무도 감격해 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없는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해 주셨고 하늘의 유업을 얻었다는 그 복음을 듣고 너무도 감격을 했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이 처음에 영생에 대해서 구원에 대해서 들으면 너무도 감격해 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교회에 처음 나온 사람들이 구원에 대해서 말씀을 들으면 그것이 너무 감격해서 자기가 무엇이라도 하겠다고 다짐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아들이 누구인가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은 율법에 의해서 종으로 살아가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보내셔서 여자에게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셔서 우리를 율법에서 속량을 하심으로 우리가 이제는 종이 아니라 아들의 영을 받아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며 하늘의 유업을 받을 수 있는 양자의 영을 받았다고 말씀을 했습니다.
감격했습니다.
얼마나 감격을 했는가를 잘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자기의 연약한 눈을 가지고 복음을 전하는 것을 듣고 너무도 감격을 해서 갈라디아 사람들은 자기들의 눈이라고 빼주어서 사도 바울이 복음의 일을 하는데 있어 불편함이 없게 해 주었으면 하는 마음을 가졌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들이 된 감격입니다
죄 있는 인생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서 하늘의 유업을 얻는 다는 것이 얼마나 큰 감격입니까? 천국에 대해서 바로 알고 있는 성도라면 그것이 얼마나 큰 은혜 인가를 알고 있습니다. 이방인으로 그저 짐승과 같이 살다가 죽어야 하는데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셔서 율법을 완전케 하심으로 우리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의를 얻게 하셨습니다.
너무도 당연합니다.
갈라디아교회의 사람들은 자기들의 눈이라도 빼주고 싶은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실제로 그런 마음을 가졌다는 것을 사도바울이 알고 그렇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실제 하늘의 복을 아는 성도라면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아까워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그가 바른 복음을 전하고 있고 그로 인하여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고 또 하늘의 기업을 유업으로 받았다면 그보다 더한 것이라도 할 것입니다 .
눈 빼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갈라디아 교회의 성도들이 얼마나 복음에 감격했는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던 사람들이 영생에 대해서 확신을 갖게 되면 진심으로 자기의 모든 것을 다 내어 주고 싶은 마음을 가집니다. 사도 바울이 그런 갈라디아 교회의 성도들의 마음을 알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에게 눈이라도 빼어 주어서 사도 바울로부터 더 많은 복음을 듣고 싶었다는 말씀입니다
갈라디아서 4:16절을 보겠습니다. (신 306족)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
그런데 갈라디아 교회의 교인들이 다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원수입니다 진리와 율법은 원수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삼가 지키고 있는 초등학문은 복음과 원수가 된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원수가 되는가 하면 내가 전한 복음을 헛되게 하는 것이 바로 삼가 지키고 있는 초등학문이라는 말씀입니다
참된 말씀을 전했습니다.
초등학문은 원수가 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 삼가 지키고 있는 것이 있다면 복음과 원수가 된다는 것을 분명히 기억을 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원수가 무엇인가를 너무도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의 원수가 무엇인가를 모르고 오히려 원수에게 더 친밀히 대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6:55절을 보겠습니다. (신 154쪽)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사도 바울이 내가 참된 말을 했다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다는 말씀입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는데 오히려 원수가 되겠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이 시대도 역시 참된 말을 전하면 원수가 되는 그런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2:15절을 보겠습니다. (신 312쪽)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는 참 됩니다.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은 원수입니다 지금 사도 바울이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는데 오히려 원수가 되겠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갈라디아교회에 이미 율법주의가 들어와서 삼가 지키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원수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원수가 무엇인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니까 오히려 원수가 되겠느냐고 하는 이 말씀은 너희가 예수 그리스도를 안 믿고 율법을 지키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다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 삼가 지키고 있는 것이 있다면 원수가 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삼가 지키는 것이 있습니까?
그것은 이 세상의 초등학문입니다 교회 안에서 그런 행위들을 하고 있다면 그는 예수 그리스도와 원수가 된다는 것을 사도 바울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사도 바울이 참된 말을 하는데 원수가 되었는가 하면 그들이 삼가 지키고 있는 것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교회 안에 삼가 지키고 있는 것이 얼마나 많이 있는가를 냉정하게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교회 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삼가 지키고 있는 그런 것들로 말미암아 사도 바울이 참된 말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데 원수가 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지금 이 시대 아마도 삼가 지키고 있는 것을 지키지 말라고 하면 이단이라고 공격을 할 것이 너무도 분명합니다.
모릅니다.
하나님을 믿는 일이라면 삼가 지키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아니 오히려 삼가 잘 지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으로 참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원수가 된다는 것을 모르고 있고 그저 종교적인 의식에 빠져 삼가 지키고 있는 것에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지금 누구에게 하고 있는 말씀인가를 바로 깨닫기 바랍니다.
성경은 경계입니다
갈라디아교회의 교인들이 그랬으면 지금 이 시대도 역시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것을 늘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갈라디아교회만의 문제가 아니라 이 시대도 역시 똑같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사도 바울이 가르쳐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나는 아니라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가 다니고 있는 교회는 안 그렇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배만 보아도 그런데 사람들은 지각이 없어 도무지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 교회의 교인들이 삼가 지키는 것은 그들이 잘못을 하고 있는 것이고 자기들과는 아무 상관이 없어 자기들은 오직 하나님을 위해서 일한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똑같습니다.
그들이 초등학문으로 돌아갔으면 이 시대 역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더구나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한 그 교회도 그렇게 되었는데 이 시대는 말 할 필요도 없다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정말로 많은 것을 삼가 지키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삼가 지키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 있는 자체가 더 이상하지만 도무지 깨닫지를 못 합니다
갈라디아서 4:17절을 보겠습니다. (신 306쪽)
“저희가 너희를 대하여 열심 내는 것이 좋은 뜻이 아니요 오직 너희를 이간 붙여 너희로 저희를 대하여 열심 내게 하려 함이라”
저희가 누구입니까?
다른 복음에 미혹이 되어서 전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갈라디아서의 전체 주제는 종이냐 아들이냐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누가 종이고 누가 아들인가를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통해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있지만 종으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 있고 아들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가 열심을 내고 있습니까?
지금도 교회 안에 있는 율법주의자들이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사실 세상의 눈으로 볼 때는 복음을 가진 자와 율법주의자를 보면 율법주의자가 더 열심을 내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들은 겉으로 나타내는 열심을 내고 있는 것이지 복음이 있는 성도들이 더욱 열심을 내고 있다는 것을 저는 믿어 의심치 않고 있습니다.
이 시대도 보시기 바랍니다.
율법주의자들이 얼마나 열심을 내고 있습니까? 그들이 열심을 내는 것이 무엇입니까? 율법을 지키게 하기 위해서 열심을 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열심을 내는 것은 좋은 뜻이 아니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쉽게 율법주의자들에게 미혹이 되고 있습니다.
초등학문 보기에는 참 좋습니다.
아니 이 세상의 이성적 지식으로는 초등학문이 바르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초등학문에서 벗어나 복음 안으로 들어온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다는 것을 여러분이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초등학문에 있는 사람은 절대로 복음이 이해가 안 되게 되어 있습니다.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율법을 잘 지키는 것이 좋습니까? 나쁩니까? 초등학문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것은 결코 나쁜 것이 아니라 좋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제가 십일조나 주일에 대해서 반대를 하면 사람들은 그것을 이해를 못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상식으로는 십일조를 내는 것 그리고 주일을 지키는 것이 너무도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십일조만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지금 교회에서 십일조를 이야기 하면서 뭐라고 합니까?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너희가 복을 받게 하기 위해서라고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십일조를 왜 내야 하느냐면 그것은 순전히 십일조를 내는 사람이 이 세상에서도 복을 받고 하늘에서도 복을 받게 하기 위해서 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자기는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싫지만 여러분을 위해서 십일조를 내라고 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어떻습니까?
십일조를 내면 누가 이익입니까? 그것을 하나님께서 받으십니까? 하나님께서 어떤 방법으로 그 십일조를 받습니까? 착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십일조를 누가 쓰고 있는 가를 냉정하게 생각을 하면 됩니다. 그들은 사도바울의 말씀과 같이 이간을 시켜서 자기들에게 열심을 내게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율법 지키는 것 누구를 위해서 입니까?
그것이 하나님을 위해서 하는 일이라고 한다면 그는 정말로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주님께서 율법을 완전케 하시고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영을 보내 주셔서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어 주셨는데 또 우리가 율법을 지켜야 할 의무가 없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사람들이 이해하기 쉬운 초등학문으로 가르치면서 자기들에게 열심을 내게 만들고 있습니다.
복음
우리가 할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율법을 지키는 자들은 그것을 철저하게 지켜야 합니다. 삼가 지키고 있습니다. 이것이 누구를 위해서 하는 가를 바로 깨닫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율법을 다 지키셨는데 그리고 우리에게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완전한 의를 주셨는데 그것을 지키라고 하는 것은 자기들을 위해서 열심을 내게 하는 것임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이 초등학문 아래 있는 사람은 종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초등학문을 통해서 삼가 지키고 있는 것이 있다면 그는 그것이 아무리 하나님을 위하는 일이라 할지라도 종이 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시키고 있는 사람은 누구를 위해서 그렇게 합니까? 다 자기들을 위해 열심을 내게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사도 바울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4:18절을 보겠습니다. (신 307쪽)
“좋은 일에 대하여 열심으로 사모함을 받음은 내가 너희를 대하였을 때뿐 아니라 언제든지 좋으니라”
공동번역을 읽어드리겠습니다.
“그들이 좋은 동기로 여러분에게 열성을 보인다면야 얼마나 좋겠습니까? 내가 여러분과 함께 있을 때뿐만 아니라 언제나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안타까운 마음입니다
삼가 지키고 있는 그런 것들이 좋은 동기로 열심을 낸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정말 그들이 그렇게 열심을 내는 것이 좋은 뜻으로 했으면 좋겠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그들이 그렇게 삼가 지키고 하는 것으로 다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는 것은 좋은 일에 사모함으로 열심을 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말로는 참 잘 합니다.
누구를 위해서라고 합니까? 또 정말 때로는 그런 삼가 지키는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정말 좋은 일이라면 사도 바울도 좋겠다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열심을 내는 것은 좋은 일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들을 위해서라고 그들의 종을 삼기 위해서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있을 때는 조심을 합니다.
이 말씀을 잘 이해를 하시기 바랍니다. 제가 목요 아카데미를 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것도 엄밀하게 말씀을 드리면 삼가 지키면서 여러분이 매 주 목요일에 모여서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있을 때는 이렇게 좋은 일을 위해서 모였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없으니까 그것이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는 것이 되어서 복음이 헛되게 되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저 역시도 너무 조심스럽습니다.
혹시라도 목요 아카데미가 주일과 같이 삼가 지키는 것이 되지 않게 하려고 조심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 강의를 듣고 있는 성도님들은 자유 하는 가운데서 강의를 듣고 있는 줄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교회 안에서 하고 있는 삼가 지키는 것들은 아무리 좋은 일이라 해도 그것이 이미 초등학문이 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얼마나 단호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갈라디아 교회에 있는 교인들이 다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는 것을 너무도 안타까워했고 또 그들에게 단호하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정말로 좋은 일에 열심을 내기를 바랐지만 사람들은 그것이 삼가 지키는 것이 되어서 초등학문으로 돌아갔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교회 안에서 조심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처음 시작은 늘 좋은 마음으로 열심에 의해서 시작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언제까지 그 좋은 것으로 연결이 되면 좋은데 거의 모든 사람들은 그렇지 못하고 삼가 지키는 초등학문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를 보면서 안타까움에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생각하면 됩니다.
사실 새벽기도회가 있는 나라는 우리나라 밖에 없습니다. 그것을 처음 시작을 할 때 나쁜 마음으로 했겠습니까? 정말로 순수한 열심으로 하나님께 새벽에 나와서 기도를 한다는 생각에서 시작을 했습니다. 누가 새벽 예배를 시작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그렇게 믿고 싶습니다. 그러나 지금 그것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삼가 지키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좋은 일에 열심을 내기 위해서 새벽 기도를 했는데 어느 때가 되니까 그것이 삼가 지키는 것으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지금 한국 교회의 예배를 보시기 바랍니다. 아마 새벽 예배를 안 한다고 하면 이단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새벽 기도를 안 한다고 하면 그 교회에 나가지도 않으려고 할 것입니다
정말 조심해야 합니다.
아니 가능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그것에 한번 맛을 들이면 절대로 빠져 나올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자기가 복음을 전한 갈라디아 교회가 다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는 것을 보고 너무도 안타까워서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4:19절을 보겠습니다. (신 307쪽)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공동번역입니다.
“나의 자녀인 여러분, 여러분 속에 그리스도가 형성될 때까지 나는 또다시 해산의 고통을 겪어야겠습니다”
얼마나 안타깝습니까?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 사람들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 있는 사람들에게 나의 자녀인 여러분, 여러분의 속에 그리스도가 형성이 될 때까지 나는 또 다시 해산하는 고통을 격어야 하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초등학문으로 돌아가 있어 종이 되어 있는 사람들이 구원을 받지 못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서 나는 또 다시 해산하는 수고를 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씀이냐면 처음부터 다시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서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고 하늘의 소망을 갖게 해 주었는데 다시 초등학문으로 돌아갔다는 말씀입니다
구원을 못 받았습니다.
다시 종이 되어서 구원을 못 받았다는 말씀입니다 물론 이 사람들이 구원을 받았다고 떨어 졌다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해산하는 수고를 해서 복음을 전했는데 다른 복음에 미혹이 되어서 다시 세상 초등학문으로 돌아가 있는 사람들에게 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복음을 믿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다시 보니까 종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해서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는 사람들이 그래서 하늘에 소망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던 사람들이 삼가 지키고 있는 초등학문으로 돌아가 있는 것을 보면서 내가 또 다시 해산의 고통을 격어야 하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생명입니다
그것은 탄생의 비밀입니다 사실 육체의 생명이 탄생이 되는 것보다 영혼의 생명이 탄생이 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지금 교회가 많고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이 구원을 받은 것으로 착각을 하다 보니까 이 해산의 고통이 별것 아닌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사실은 한 영혼을 구원하는 일이 얼마나 수고를 해야 하는 일인가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삼가 지키고 있는 것이 있다면 그리스도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가 아무리 교회 안에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을지라도 삼가 지키고 있는 것이 있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형상이 없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절대입니다
종으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영이 없습니다. 그가 교회 안에서 정말 하나님의 성도와 같이 보인다 할지라도 삼가 지키고 있는 것이 있다면 그는 이 세상 초등학문의 종이고 그런 사람은 구원을 못 받는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자기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 줄을 모르고 너무도 많은 것을 삼가 지키고 있습니다.
왜 삼가 지키고 있습니까?
그 이유는 단 한 가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서 내가 삼가 지키고 있는 것이 하나라도 있다면 아직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런 갈라디아 교회를 보면서 내가 또 다시 해산하는 고통을 격어야 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편지입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교회에 보내는 편지입니다 분명히 사도 바울이 있을 때는 그들이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종이 아니라 아들로 하늘의 유업을 받을 자 같이 보였는데 아니 그렇게 믿고 있었는데 사도 바울이 다른 곳으로 가고 나니까 어느 새 초등학문으로 다시 돌아가서 종이 되어 있는 것을 보고 안타까워서 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이 심정을 알아야 합니다.
정말 복음이 있는 사람만이 알 수 있습니다. 저 역시도 그리스도편지를 통해서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가끔씩 사람들이 전화가 오고 있습니다. 마치 구원을 받은 것 같이 기뻐하면서 복음에 은혜를 받았다고 하면서 정말 모든 것을 다 얻은 것 같이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보면 그가 사라지고 없는 것을 보게 됩니다. 정말 그때마다 너무 안타깝습니다. 차라리 복음을 안 접했다면 몰라도 복음을 보고도 그렇게 다시 돌아가는 사람들을 보면 너무도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갈라디아서4:20절을 보겠습니다. (신 307쪽)
“내가 이제라도 너희와 함께 있어 내 음성을 변하려 함은 너희를 대하여 의심이 있음이라”
공동번역을 보겠습니다.
“지금이라도 내가 여러분과 만나서 어조를 바꾸어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나는 여러분의 일이 걱정스러워 안절부절못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입니다
정말 사도 바울은 해산하는 수고를 하면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는데 그들이 다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는 것을 보면서 그 안타까운 마음을 이렇게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이라도 내가 여러분과 만나서 다시 복음을 전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평생을 전도를 했습니다.
어디 한 곳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 아니라 교회가 세워지고 나면 다시 새로운 곳으로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세워진 교회가 복음에 든든히 서 가고 있는 가를 늘 인편을 통해서 들었습니다. 그런데 갈라디아 교회에 있는 사람들이 다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 종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말을 듣고 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다시 전했으면 좋겠다는 말씀입니다
해산하는 수고를 할지라도 다시 갈라디아교회로 가서 복음을 전해서 그들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이런 일이 있는 가를 알아야 합니다. 아주 작은 것에서 시작을 하고 있습니다. 자기들이 하나님을 위해서 열심을 낸다고 하는 그 한 가지 일에서 시작을 해서 결국에는 초등학문으로 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처음부터 율법주의가 아닙니다.
사실 이방인들은 율법을 안 지켰습니다. 아니 모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성경을 보고 복음을 듣다 보니까 자기들이 하나님을 위해서 일을 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가장 쉽게 보이는 것이 율법이고 그 율법을 좋은 뜻에서 하나씩 지키기 시작을 하다 보니까 그것이 나중에는 율법에 의해서 종이 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적은 누룩이 온 덩이를 퍼지게 만든다고 말씀합니다.
율법주의가 되는 것이 처음부터 모든 율법을 지키는데서 부터 시작을 하는 것이 아니라 아주 적은 것 하나로 시작을 해서 점점 율법주의가 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그것을 보고 너무도 안타까워서 안절부절못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너무도 걱정스럽습니다.
사도 바울이 어떻게 이들에게 복음을 전했는데 금세 율법주의자들이 들어와서 미혹을 해서 다 넘어가는 것을 듣고서 안타까워하고 있습니다. 지금과 같이 정착을 하는 목회를 했다면 아마도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의 사람들이 이렇게 초등학문으로 돌아가는 것을 그냥 보고 있지 않았을 것이 분명합니다.
복음을 가진 자의 심정입니다
더구나 내가 복음을 전해서 그들이 하나님을 믿고 있었는데 율법주의에 빠지는 것을 보면 너무도 안타깝기만 합니다. 저 역시도 복음을 전하고 있지만 다시 율법주의로 가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너무도 안타깝기만 하고 그저 하나님께 기도를 하고 있을 뿐입니다.
다 되었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복음 한두 시간 듣는 것으로 다 된 것으로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저 역시도 성경을 보고 있지만 아직까지도 잘 이해가 안 되는 말씀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육체를 가지고 있다 보니까 늘 초등학문의 유혹에서 벗어나기가 힘이 듭니다. 내가 능력이 있어서 자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성령을 보내 주셔서 자유 할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종이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다른 것이 종이 아닙니다. 삼가 지키고 있는 단 한 가지의 하나님을 위해서 하는 그 일이 나를 종으로 만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갈라디아 교회의 교인들이 왜 종이 되었다고 생각을 합니까? 사도 바울이 복음을 잘못전해서입니까?
그것이 아닙니다.
우리 인생은 언제든지 종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초등학문 아래 있기 때문에 주님의 능력이 아니고는 종으로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 갈라디아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사도 바울이 정말로 안타까운 마음으로 이 편지를 보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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