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강, 두 짐승(1)
요한계시록 13:16-18절을 보겠습니다. (신 411쪽)
“저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빈궁한 자나 자유한 자나 종들로 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이 표는 곧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라 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명 있는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 보라 그 수는 사람의 수니 육백 육십 륙이니라”
사도 요한이 밧모라 하는 섬에서 환상을 보고 기록한 말씀입니다
환상을 기록하다 보니까 성경에서도 해석이 안 되는 말씀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볼 때 늘 주의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을 다 해석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성령의 감동을 주시면 모든 것이 다 해석이 될 수도 있지만 그러나 아무리 위대한 신학자라 해도 모든 성경을 다 해석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어느 시대고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요한계시록을 해석한다고 하면서 잘못된 신앙을 갖게 되고 또 종말론에 빠져서 이 세상을 등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대해서는 저 역시도 잘 이해를 못 합니다. 모든 것은 환상을 본 것으로 기록을 했기 때문에 어렵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그 환상을 본 것을 그대로 기록을 했으면 좋은데 거의 모든 환상이 비유로 기록이 되어 있기 때문에 잘못 해석을 하게 되면 성경 전체를 오해하게 되고 심각한 종말론에 빠지게 되어 있습니다. 저 역시도 요한계시록을 볼 때는 너무도 조심스럽고 또 잘못해석 하는 오류를 범할까봐서 주의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구원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문제만 정확하게 가지고 가면 사실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설령 요한계시록의 환상과 계시를 조금 모른다 해서 구원을 받는데 있어 문제가 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자기들이 잘 알지도 못하면서 억지로 해석을 하다 보니까 그것으로 심각한 문제를 발생 시키고 있습니다. 이 시대 이단이라고 하는 곳은 거의 이 요한계시록을 해석을 하면서 자기들만이 계시를 받은 것으로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바로 해석하면 좋습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 같은 경우를 보면 바른 해석이 있는 것이 아니라 거의 자의적으로 해석을 하고 있다고 보면 맞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휴거문제만 해도 요한계시록을 바로 해석을 하지 못해서 이 시대 교인들이 그 문제로 겁을 먹고 있습니다.
환난을 당한다고 합니다.
마지막 때에 환난을 당하는 것을 거의 모든 사람들이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마지막 때가 오는데 그때에 믿음이 있는 사람은 휴거를 하게 되고 믿음이 없는 사람은 이 세상에 남아 환난을 당한다고 말 합니다. 또 휴거가 있기 전에 이 세상에 환난이 있는데 그 한난에서 견디려면 믿음이 있어야 하고 또 자기들이 지정하는 장소에 있어야 한다고 하면서 교인들에게 겁을 주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왜 그런 주장을 합니까?
다 율법주의에서 비롯된 말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자기들의 말을 잘 들어야 자기들이 알고 있는 비밀을 가르쳐 주고 또 그렇게 하는 사람만이 이 세상에 있을 환난을 견디고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말 합니다 일반 교인들에게 이 요한계시록은 늘 두려움의 말씀이 되고 있고 자기들이 과연 그런 환난을 견딜 수 있는가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늘 말씀을 드립니다.
성경은 너무도 오묘해서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전혀 다른 해석이 되고 있습니다. 율법주의자들의 눈에는 율법의 행위만 보이고 복음을 가진 성도들에게는 복음으로만 보이는 것이 성경입니다 같은 성경을 이 시대 사람들이 보고 있지만 전혀 다른 말을 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고 그러다 보니까 어느 말이 바른 말인 줄을 깨닫기가 사실 힘이 듭니다.
신학을 공부해도 그렇습니다.
하물며 일반 교인들은 그저 소경이라고 보아야 맞습니다. 소경을 인도하는 자가 가는 대로 따라가게 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은 복음에 대해서 소경입니다 누가 인도를 하느냐에 따라 그가 복음의 밝은 빛을 보기도 하고 어두움에 거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사람들은 복음의 밝은 빛을 보기보다는 어두움에 거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1:5절을 보겠습니다. (신 147쪽)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이 세상은 모두가 어두움에 있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자기들이 교회 안에 있다는 것 자체로 마치 빛을 보고 있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의 말씀을 누구에게 하고 있는 가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 사람들에게 하고 있는 말씀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세상에 참 빛으로 오셨지만 이스라엘은 어두움에 거했기 때문에 전혀 깨닫지를 못 했습니다.
어두움입니다.
그러나 이 시대도 이스라엘과 같이 자기들이 어두움에 있는지 참 빛을 보고 있는지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어두움에 있기 때문에 아무리 참 빛을 밝히 드러내도 그것을 보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두움이 무엇이고 참 빛이 무엇인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빛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이루신 모든 구속의 일들이 다 참 빛입니다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는 것이 빛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아무리 성경을 보아도 이 빛을 못보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마음이 어두움에 있기 때문에 도무지 볼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빛은 안 보입니다.
요한복음에서 말씀을 하고 있는 이 빛은 우리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그래서 베드로후서 1장에서는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 까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좋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참 빛은 우리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에 떠오르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어두움은 무엇입니까?
내 눈으로 보는 것이 어두움입니다. 이 세상의 밤을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내 육체를 통해서 하나님을 위해서 하는 모든 행위들이 다 어두움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내가 교회 안에서 행하고 있는 모든 행위들이 사실은 다 어두움이라는 말씀입니다.
가장 기본입니다
그러나 자기들이 하고 있는 행위들이 어두움이라는 것조차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어두움에 있어 참 빛을 깨닫지 못한 것과 같이 이 시대도 역시 어두움에 있어 참 빛을 못 보고 있습니다. 내 눈으로 보이는 것을 보고 있는 사람은 그 마음에 샛별이 떠오르지 않는다는 것을 명심하고 있어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율법을 보았습니다.
그 어두움을 보다 보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셨지만 그들은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이 시대 역시 그렇게 어두움을 보고 있는 사람은 아무리 교회 안에서 주여 주여 하면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더라도 절대로 참 빛을 볼 수 없다는 것을 우리가 명심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시대가 악하다 보니까 더욱 더 어두움에 거하고 있습니다.
어두움에 있으면 절대로 참 빛을 볼 수 없습니다.
자기가 아무리 성경을 많이 알고 있고 또 하나님을 진심으로 믿고 있다 해도 참 빛을 볼 수 없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이 참 빛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지만 사람들은 성경을 보면서도 참 빛을 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두움을 보고 있습니다. 그저 교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것으로 마치 참 빛을 보고 있는 것으로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빛과 어두움입니다.
이것이 함께 공존을 할 수 없습니다. 빛이 사라지면 어두움에 있고 또 빛이 내 마음에 샛별과 같이 떠오르면 어두움이 물러가게 되어 있다는 것을 성경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이 빛과 어두움이 함께 공존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생각하면 됩니다. 빛은 참이고 어두움은 거짓이라는 것을 바로 알면 됩니다
참 빛 + 참 빛 = 참 빛입니다
어두움 + 어두움 = 어두움입니다. 참 빛 + 어두움은 = 어두움입니다. 참 빛 + 어두움 = 빛이 되는 것이 아니라 어두움이 된다는 것을 우리가 바로 알아야 합니다. 세상의 이치로 하면 그것이 참 빛이 될 수 있겠지만 성경은 우리에게 이 계산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참 빛과 어두움이 함께 있으면 빛이 사라진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어두움을 더 사랑합니다.
왜 더 사랑하는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참 빛은 보이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에 떠오르는 것이고 어두움은 자기 눈으로 볼 수 있기 때문에 더 사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이 참 빛과 어두움이 공존을 하면 무조건 어두움으로 간다는 것을 성경이 가르쳐 주고 있지만 사람들은 참 빛도 보고 어두움도 사랑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보는 마음입니다
참 빛이 내 마음에 떠오르면 어두움이 사라지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볼 수 있는데 어두움에 있으면 아무리 성경을 보아도 그 안에서 참 빛을 볼 수 없다는 것을 우리가 바로 알아야 합니다. 모든 성경에서 이렇게 참 빛을 보려고 하는 마음을 가지고 보아야 합니다. 그런 성도만이 성경을 바로 볼 수 있고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신다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성경 바로 보아야 합니다.
모든 목사들이 성경을 바로 본다고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날이 새어 샛별이 우리 마음에 떠오르기 까지는 정말 성경을 보는 것을 주의해야 합니다. 성경은 생명이 걸린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을 하면 불을 쥐어 주는 것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죽을 수도 있고 살 수도 있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13:1절을 보겠습니다. (신 411쪽)
“내가 보니 바다에서 한 짐승이 나오는데 뿔이 열이요 머리가 일곱이라 그 뿔에는 열 면류관이 있고 그 머리들에는 참람된 이름들이 있더라”
요한계시록 13장은 두 짐승이 나오고 있습니다.
1-10절까지는 한 짐승을 말씀을 하고 있고 11절 부터는 새로운 짐승이 나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런 말씀을 보면 일반 교인들은 탁 막혀 버립니다. 도저히 무슨 말씀을 하고 있는 줄을 전혀 깨달을 수 없습니다. 사도요한이 환상을 보았는데 그것이 또 우리가 지금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한 것이 아니라 비유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잘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어느 때인가를 우리가 먼저 이해를 하고 있어야 합니다. 종말의 때인가 아니면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때인가를 바로 분멸을 해야 이 말씀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는 여러 가지 주장들을 하고 있고 거의 다 종말의 때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거의 모든 정통의 교회나 이단이나 이때에 대해서는 별 이견이 없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왜 종말의 때라고 합니까?
요한계시록11:15절을 보겠습니다. (신 410쪽)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 큰 음성들이 나서 가로되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 하니”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에 마지막 나팔이 불 때 우리가 순식간에 홀연히 변화할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의 나팔을 불지 않기 때문에 이미 11장에서 일곱째 나팔이 불었기 때문에 마지막 때라는 것에 대해서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입니다.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 큰 음성들이 나서 가로되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 마지막 나팔이 불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서 구원을 받은 성도들에 그의 나라에 들어가 주님이 왕 노릇하는 천국에서 영원히 살 것으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이렇게 분명히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저는 요한계시록 강의를 거의 안 보았습니다.
제가 지금 해석을 하고 있지만 저는 지금 이 시대 아니 이전에 있던 목사들이 해석을 했던 요한계시록의 강의를 거의 보지를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어떤 주장을 하고 있는 줄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11장에서 마지막 나팔이 불었기 때문에 그 이후로는 이제 이 세상에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해당이 되는 말씀이라고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이런 말을 합니다.
이제 11장에서 휴거가 되었다고 말 합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 환난이 있는데 그 환난에서 믿음으로 견디는 사람들이 다시 휴거를 받는다고 하는 이중 휴거를 주장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기들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줄을 모르고 그저 성경을 차례대로 보다 보니까 그런 황당한 주장을 하면서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제가 늘 강조를 하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기초가 되는 말씀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 기초가 되는 말씀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하고 또 그 기초를 절대로 흔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우리가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분명히 성경에는 휴거가 있는 것 같은 말씀들이 많이 있습니다.
특히 마태복음 24장 말씀입니다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림을 당할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또 두 여자가 매를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한다는 이 말씀으로 인하여 사람들은 휴거가 있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누가복음 18장에 인자가 올 때에 믿음이 있는 자를 보겠느냐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기초는 누가복음 18장의 말씀입니다
인자가 올 때는 믿음이 있는 자가 없습니다.
믿음이 있는 자가 없기 때문에 데려감을 당할 사람이 없다는 것을 우리가 바로 알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24장의 말씀을 깨어 있으라는 말씀을 하기 위해서 비유로 말씀을 한 것이지 실제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가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이런 기초에서 흔들리게 되면 성경을 해석하는데 있어 심각한 문제가 발생이 되게 되어 있습니다
우선 요한계시록 13장의 말씀을 하나씩 해석을 해 보겠습니다.
저 역시도 모든 것을 다 해석할 수 없다는 것을 먼저 이해를 하시기 바랍니다. 제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더 이상 해석을 하지 않겠습니다. 억지로 해석을 하는 것 보다는 그것이 유익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억지로 해석을 하다가 오히려 자기 영혼이 사망의 길로 가는 것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내가 보니 바다에서 한 짐승이 나오는데 뿔이 열이요 머리가 일곱이라 그 뿔에는 열 면류관이 있고 그 머리들에는 참람된 이름들이 있더라”
내가 보니 바다에서 한 짐승이 나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이 짐승에 대해서 여러 가지를 비유로 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에서 말씀을 하고 있는 이 짐승은 아주 거대한 세력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첫 째 짐승은 제가 보기에는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짐승을 보니까 뿔이 열이요 머리가 일곱이라고 말씀을 합니다.
저 역시 이 뿔과 머리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드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이 뿔이 무엇이고 머리가 무엇인가를 알 수는 있습니다.
다니엘7:7절을 보겠습니다. (구 1245쪽)
“내가 밤 이상 가운데 그 다음에 본 넷째 짐승은 무섭고 놀라우며 또 극히 강하며 또 큰 철 이가 있어서 먹고 부숴뜨리고 그 나머지를 발로 밟았으며 이 짐승은 전의 모든 짐승과 다르고 또 열 뿔이 있으므로”
다니엘이 환상을 보았습니다.
사도 요한이 환상을 본 것과 다니엘이 환상을 본 것은 600년 이상의 차이가 있습니다. 성경에 열 뿔에 대해서는 다니엘과 요한계시록에서만 나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사람들이 다니엘의 환상과 사도요한의 환상을 동일한 것으로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거의 대부분의 목사들이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성경에 열 뿔이라는 말씀이 나오는 것으로 보았을 때 사실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해도 맞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다니엘과 요한계시록을 거의 같이 해석을 하고 있다고 보면 맞습니다. 여기서 짐승과 열 뿔을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다니엘이 환상을 본 것과 사도요한이 환상을 본 것은 600년 이상의 시대적인 차이가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여기서 넷째 짐승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미 성취가 된 예언이라는 것을 먼저 깨달아야 합니다. 다니엘에 나오는 넷째 짐승은 강철과 같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역사가들이 기록하기를 로마를 강철국가라고 하고 있습니다. 로마 시대에 강한 철을 사용하기 시작을 하면서부터 그런 말을 하게 되었습니다. 강철과 같은 무기가 있어서 로마가 세상을 지배할 수 있었습니다.
이 짐승은 전에 짐승과 다르고 열 뿔이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 신학자들이 오해를 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다니엘의 말씀과 요한계시록의 말씀을 동일한 환상으로 보고 있다는 것인데 사실은 다니엘이 보았던 환상은 로마와 헬라 그리고 말라기이후 로마시대까지 일어났던 나라들을 환상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 나라들을 짐승으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다니엘7:24절을 보겠습니다. (구 1246쪽)
“그 열 뿔은 이 나라에서 일어날 열 왕이요 그 후에 또 하나가 일어나리니 그는 먼저 있던 자들과 다르고 또 세 왕을 복종시킬 것이며”
그 열 뿔은 이 나라에서 일어날 열 왕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넷째 짐승이 있었는데 열 뿔이 있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로마라는 나라는 강철과 같은 나라로서 이 세상을 모두 지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로마가 망하게 됩니다. 그리고 로마가 망하면서 열 왕이 생긴다는 것을 다니엘을 통해서 환상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거듭 말씀을 드립니다.
나중에 다니엘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지만 이 짐승과 열 뿔은 이미 지나간 예언이라는 것을 우리가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 시대 신학자들은 요한계시록의 환상과 다니엘의 환상을 같이 보고 있습니다. 실제 로마가 망하고 나서 열 왕이 일어났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증명이 되고 있습니다. 이 열 왕에 대해서는 나중에 자세히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이 열 왕이 누구냐 하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는 성경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보아야 합니다.
짐승은 거대한 나라입니다
그리고 열 뿔은 그 나라에게 발생을 한 왕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도 마찬가지라는 것을 우리가 바로 이해를 해야 합니다. 사도요한이 환상을 보았는데 바다에서 한 짐승이 나오는데 뿔이 열이요 마리가 일곱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17:1절을 보겠습니다. (신 415쪽)
“또 일곱 대접을 가진 일곱 천사 중 하나가 와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이리 오라 많은 물 위에 앉은 큰 음녀의 받을 심판을 네게 보이리라”
다니엘의 짐승과 요한계시록의 짐승은 나오는 것이 다릅니다.
바다에서 나옵니다. 이 바다는 말씀을 상징합니다. 그 바다에서 나온 짐승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짐승은 이 세상의 짐승이 아니라 성경 말씀을 가지고 나오는 짐승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실제 이스라엘이라는 짐승이 말씀에 얼마나 정통 했는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짐승은 말씀을 가지고 나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도 그랬고 지금 이 시대 사단은 성경을 변개를 하면서 그것을 가지고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성경을 전한다고 해서 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실제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짐승의 말이 더 많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짐승이 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짐승이 되었다는 것을 사도요한에게 환상으로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에게 열 뿔이 있다는 말씀은 저도 정확하게 해석을 하기는 어렵습니다. 아마도 이스라엘 안에 왕과 같이 군림을 하던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이나 제사장들이나 그런 집단을 열 뿔과 일곱 머리로 말씀을 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분명한 것은 다니엘이 본 환상은 거대한 나라였습니다.
또 그 열 뿔은 그 나라로부터 나온 열 왕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다니엘의 짐승이 거대한 나라였고 또 열 뿔이 그 나라의 왕이었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을 구약의 그림자입니다 구약은 이스라엘과 이방을 비유로 해서 말씀을 했고 신약에 와서는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을 비유로 해서 말씀을 했다는 것을 알면 이 말씀도 그렇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사도요한은 실체를 보고 있습니다.
그것을 비유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구약의 짐승은 나라를 말씀을 하고 있다면 사도요한이 본 짐승은 거대한 교회로 보고 말씀을 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이 거대한 교회에서 열 왕과 같은 그리고 일곱 머리와 같은 독자의 세력들이 나오고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뿔에는 열 면류관이 있고 그 머리들에는 참람된 이름들이 있더라
면류관이라는 것은 구원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마치 구원을 받은 것 같은 열 면류관을 쓰고 있는 열 왕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 짐승은 실제 이스라엘을 말씀을 하고 있고 그 열 뿔과 일곱 머리는 이스라엘 안에 있는 여러 가지 정파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다니엘과 다른 것이 있습니다.
다니엘의 열 뿔에는 면류관이라는 말씀이 안 나오고 있는데 요한계시록의 열 뿔에는 면류관이라고 하는 말씀이 나오는 것으로 보았을 때 이것은 교회라고 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거대한 짐승이 있습니다. 그 짐승에서 열 뿔이 있고 일곱 머리가 있습니다.
저는 그렇게 봅니다.
그 열 뿔과 일곱 머리는 마치 이와 같다고 생각을 하면 됩니다. 실제 이스라엘에는 여러 가지 정파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바리새파 에세네파 사두개인 등 그런 정파를 말씀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모두가 자기들 안에 구원의 면류관이 있는 것으로 주장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의 짐승은 다니엘서에서 말씀을 하는 국가가 아니라 이스라엘이라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이사야 28:1절을 보겠습니다. (구 998쪽)
“취한 자 에브라임의 교만한 면류관이여 화 있을진저 술에 빠진 자의 성 곧 영화로운 관같이 기름진 골짜기 꼭대기에 세운 성이여 쇠잔해 가는 꽃 같으니 화 있을진저”
면류관을 썼습니다.
그런데 그 면류관이 무엇인가 하면 취한 자 교만한 면류관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이스라엘이 율법에 취해서 자기들이 구원을 받은 것 같이 하고 있다는 것을 사도요한이 환상을 보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요한계시록에 말씀을 하고 있는 짐승과 그리고 열 뿔과 일곱 머리는 이스라엘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구원을 확신했습니다.
그들은 어려서부터 율법을 철저하게 지켜서 면류관을 받았다고 생각을 하고 있었고 구원에 대해서 의심을 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나름대로 정파를 형성하고 있는 것을 사도요한이 열 뿔에 면류관이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은 자기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면류관을 쓰고 있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짐승에 열 뿔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열 뿔에는 면류관이 있습니다. 그것은 실제 구원을 받는 면류관이 아니라 화를 당할 면류관이라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술에 취해 있는 이스라엘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실제 이스라엘이 어떻게 했는가를 보면 충분이 이해가 되는 말씀이라는 것을 성령의 감동을 받은 성도는 깨달을 수 있습니다.
참람된 이름들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는 있지만 그 이름에는 참람된 이름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이름이 저도 무엇인가는 정확히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을 믿고 있지만 그들은 참람하게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를 않고 율법을 지키는데 열심을 냈습니다.
요한복음10:36절을 보겠습니다. (신 164쪽)
“하물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 아들이라 하는 것으로 너희가 어찌 참람하다 하느냐”
무엇이 참람합니까?
이스라엘은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를 않았습니다. 예수를 믿지를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하는 이름들로 가득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이외에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다면 그들은 다 참람된 이름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실제 이스라엘은 여러 가지 이름을 가지고 자기들을 구원할 자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언제 예수라는 이름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그들이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다고는 했지만 그 이름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마태복음에서 마리아에게서 성령으로 잉태가 될 때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저희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참람된 이름을 부르고 있었던 것으로 보여 지고 있습니다.
나름대로 성경을 해석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라는 이름을 모르면서 자기들이 이름을 가지고 부르고 있었던 것으로 보여 지고 있습니다. 이 짐승은 이렇게 이스라엘에게 여러 가지 참람된 이름을 주게 했고 그 이름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신약을 잘 보시기 바랍니다.
구약은 이스라엘과 이방을 비유로 해서 말씀을 했습니다. 그러나 신약은 이방을 비유로 해서 말씀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3장을 보아서 알겠지만 교회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요한계시록은 이 세상의 일이 아닙니다. 교회를 비유로 해서 말씀을 하고 있고 또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을 비유로 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열 뿔을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특히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열 뿔을 유럽 연합체로 말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만약에 이 요한계시록이 구약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지만 신약이라는 것을 생각하고 보아야 합니다. 신약은 이 세상을 비유로 해서 말씀을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보아야 합니다. 분명히 이 짐승은 이스라엘을 말씀을 하고 있고 또 열 왕과 일곱 머리 역시 그 연합된 이스라엘의 정파 중에서 하나를 말씀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다 면류관을 이야기 합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구원에 대해서 의심을 하지 않았습니다. 실제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이스라엘은 자기들이 지키고 있는 흠 없는 율법의 의를 나타내면서 자기들만이 구원의 면류관을 쓰고 있었다고 생각을 했고 그렇게 믿고 있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라는 나라 전체가 짐승이 되어 있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13:2절을 보겠습니다. (신 411쪽)
“내가 본 짐승은 표범과 비슷하고 그 발은 곰의 발 같고 그 입은 사자의 입 같은데 용이 자기의 능력과 보좌와 큰 권세를 그에게 주었더라”
사도 요한이 본 짐승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거듭 말씀을 드리지만 이 사건은 다 이스라엘의 모습을 환상으로 보고 말씀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짐승이 어떻게 생겼는가를 사도요한이 비유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말씀을 마치 세상의 어느 국가나 집단으로 생각을 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왜 이 짐승이 이스라엘 인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잠언 28:15절을 보겠습니다. (구 943쪽)
“가난한 백성을 압제하는 악한 관원은 부르짖는 사자와 주린 곰 같으니라”
가난한 백성을 압제하는 관원은 부르짖는 사자와 주린 곰과 같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안에 율법을 잘 못 지키는 가난한 백성을 압제하는 관원이 누구인가 하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을 때 바로 율법주의에 빠져 있던 바리새인과 서기관과 제사장들이었다는 것을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알고 있습니다.
표범, 사자, 곰
모두다 이스라엘의 관원입니다 지금으로 말씀을 하면 목사라고 해야 맞을 것입니다. 이 시대도 가난한 백성을 압제하는 자들이 교회 안에 무수히 많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율법을 지키는 사람은 율법을 잘 지키지 못하는 가난한 백성을 압제를 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의를 갖지 못한 가난한 자입니다
주린 곰과 부르짖는 사자 같습니다.
이스라엘이 종교화 되서 그 이스라엘이 이렇게 짐승이 되었다는 것을 사도요한이 환상으로 보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 요한계시록의 짐승은 이스라엘의 관원이었던 것과 같이 이 시대도 선지자 노릇을 하고 있는 사람들도 그렇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교회가 그렇게 변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5:6절을 보겠습니다. (구 1057쪽)
“그러므로 수풀에서 나오는 사자가 그들을 죽이며 사막의 이리가 그들을 멸하며 표범이 성읍들을 엿보온즉 그리로 나오는 자마다 찢기오리니 이는 그들의 허물이 많고 패역이 심함이니이다”
사자, 표범, 곰
이스라엘 안에 있는 가난한 자를 삼키는 자들이라는 말씀입니다 사도요한이 환상으로 본 짐승이 바로 그렇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 짐승은 거대한 이스라엘을 보고 있습니다. 그들은 유대교라는 이름으로 거대한 짐승이 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이 그렇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사도요한이 본 짐승을 통해 이스라엘이 어떻게 행했는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짐승이 되어 표범과 같이 그리고 사자와 같이 곰과 같이 이스라엘 사람들을 다 잡아 먹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것을 이스라엘이라 하지 않고 있고 지금 이 시대 나타나는 이 세상의 거대한 나라나 조직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런 해석들이 얼마나 잘못되고 있는 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세상이 성도들을 죽입니까?
절대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육의 일은 우리의 영의 일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그들이 육적으로 그렇게 한 것은 영혼을 죽이는 일을 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실제 짐승이 되어서 사자와 같이 표범과 같이 곰과 같이 성도들을 죽였습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종교적 짐승이 어떻게 했는가를 사도요한이 환상을 통해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정말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이 자기들이 거짓이라고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면서도 자기들이 하나님을 위해서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지금 이 시대 역시 교회가 그렇게 변하고 있지만 사람들은 교회를 너무 신뢰를 하고 있고 교회에서 하는 말을 맹목적으로 따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교회입니다
지금 이 시대 교회라고 생각을 하면 됩니다. 그들이 이 세상과의 싸움을 육적으로 했지만 이 시대는 교회 안에서 영의 일을 생각하느냐 아니면 육의 일을 생각하느냐에 따라 그 싸움을 하고 있다는 것을 성경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용이 자기의 능력과 보좌와 큰 권세를 그에게 주었더라
용은 사단입니다 사단이 누구에게 큰 권세를 주겠는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이라는 교회를 보고 그들에게 마귀의 자식이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단이 이스라엘의 관원들에게 큰 권세를 주니까 그들이 그 권세를 힘입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사단이 세상에만 권세를 준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에게 주었습니다.
바로 그것이 짐승이고 음녀라고 성경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라는 교회에 큰 권세를 주어서 그들이 얼마나 율법을 잘 지키게 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율법을 누가 지키게 하고 있습니까? 이 시대 그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마귀의 자식이기 때문에 율법을 가지고 있는 사단이 그들에게 권세를 주어서 율법을 지키게 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2)-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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