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
고린도전서 14:1-5절을 보면
“사랑을 따라 구하라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그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니라 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안위하는 것이요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만일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통역하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
은사
이스라엘은 율법 한 가지로 망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은사까지 더 해져 솔직히 이스라엘보다 더 타락의 길로 가고 있지만 어느 누구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은사에 대한 정의가 바로 서 있지를 못하니까 더욱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율법은 독입니다
그것을 한 가지라도 행하는 사람은 반드시 사망에 이르게 되어 있습니다, 성경에 있는 말씀을 자기 육체로 행하려고 하는 사람은 저주를 받는다는 것을 분명히 깨닫고 있어야 합니다. 교회에 나와서 그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것으로 자기 영혼이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까?
그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했던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했지만 어느 한 시대라도 하나님을 믿었던 때는 없었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믿게 하기 위해서 계속해서 선지자들을 보내셨지만 이스라엘은 자기들이 믿고 있다고 하면서 그 선지자들을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어느 때입니까?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았던 때가 있습니까? 애굽에서 나와서 가나안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오시기까지 약 170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 기간 동안에 누가 하나님을 믿었습니까? 성경을 보면 잘 알겠지만 그들은 선지자를 세울 때 잠시 믿는 듯 하다가 또 다시 타락의 길로 가고 말았습니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되었습니까?
그들이 지키고자 하는 율법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아니 겉으로는 정말 그들보다 더 신실하게 믿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선지자들이 와서 책망을 할 때도 자기들이 하나님을 아주 잘 믿고 있다고 주장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구약을 잘 보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은 지금 이 시대의 교회입니다, 그 교회에서 언제 다수가 하나님을 믿었는가를 보시기 바랍니다. 어느 한 때도 그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물론 선지자를 통해서 역사를 할 때 잠시 믿는 것 같았지만 실제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믿는 백성이 아니었다는 것을 성경이 계속해서 가르쳐 주고 있고 그것이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이 시대도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을 우리에게 경계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몰랐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천국복음을 전파하시니까 제자들을 향해서 율법을 모른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누가 율법을 몰랐는가 하면 흠 없는 율법의 의를 가졌던 이스라엘이 율법을 몰랐습니다, 가장 율법을 잘 지켰던 이스라엘이 율법에 대해서 몰랐습니다.
성경의 역설입니다
율법을 가장 잘 지키는 사람이 율법을 모르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놀랍게도 성경에 이 비밀들을 감추어 두셨습니다, 그리고 율법을 잘 지키는 자들로 하여금 소경이 되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이스라엘만 소경이라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시대도 역시 율법을 지키는 자는 성경을 보는 눈이 감겨져 있습니다,
소경입니다.
그러면서도 자기들이 하나님을 가장 잘 믿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율법 한 가지만으로 소경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방의 교회는 은사까지 더 해져 도무지 자기들이 무엇을 보고 있는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은사도 역시 독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의 말씀입니다
그것이 모두 가하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은 성경을 보면서 거의 혼미해져 있습니다, 성경에 어느 말씀이 있으면 모든 것이 다 가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니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것을 반드시 자기들이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율법으로 망 했습니다.
그럼 이방의 교회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율법으로 반드시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거기다가 은사가 하나 더 첨가가 되었습니다. 솔직히 말씀을 드려서 이 시대 율법과 은사가 성행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자기들의 영혼을 어떻게 만들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는 저주를 받는 자들이 있다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청함을 받는 자가 많습니다.
그러나 택함을 입은 자는 아주 적습니다, 왜 적은가 하면 율법으로 은사로 사망에 이르기 때문입니다. 치명적인 독이 있다는 것을 모르고 그저 은사라고 하면 다 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를 보시기 바랍니다, 심지어는 아주 주술적인 것이나 샤머니즘 적인 것을 교회 안에서 은사라고 행하고 있습니다,
방언을 합니까?
예언을 하고 있습니까? 그렇다고 여러분이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을 하는 것과 구원을 받는 것은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그런 은사가 나타나는 것을 보면서 자기가 구원을 받은 성도나 되는 것처럼 표적으로 삼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어느 교회입니다.
아니 이제는 거의 모든 교회가 그렇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방언을 하는 것을 보고 자기들이 성령을 받았다고 말 합니다. 그것도 수십만 명이 되는 교회의 목사가 아무 거리낌이 없이 이야기를 하고 있고 또 어떤 은사적인 체험을 하는 것으로 성령 세례를 받았다고 말 하는데 한 마디로 그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죽이는 말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은사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은사가 무엇이라는 것을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다고 해서 마치 그 은사가 대단한 것으로 생각하고 모든 사람이 이 은사가 있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스스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을 포기하는 것이 됩니다.
방언을 합니다,
그것이 성령을 받는 것입니까? 그 말은 방언을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같다는 말과 동일한 이야기입니다, 방언을 하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데도 마치 그것을 통해서 성령을 받은 것으로 착각을 하고 있고 그것을 자기 표적으로 삼으려고 하는 그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다는 증거가 되고 있습니다.
은사를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꼭 필요한 은사가 있고 그렇지 않은 은사가 있습니다. 꼭 필요한 은사는 분명히 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필요하지 않은 은사는 그것으로 사망에 이른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시대는 은사를 마치 성령을 받은 것으로 생각하는데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절대 아닙니다.
방언을 합니까? 그리고 예언을 합니까? 그가 성령을 받았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받았을 수도 있고 안 받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 시대 교회에서 하고 있는 방언이나 예언을 보면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들의 행위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12:11절을 보면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느니라”
성령의 은사입니다.
분명히 성경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이게 나눠 주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으로 인하여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은사가 자기에게서 나타나면 마치 성령을 받은 것으로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 목사들은 거의 다 그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방언을 합니다.
그리고 예언을 합니다. 한 성령이 그 뜻대로 나눠 주셨으니까 자기에게 성령이 임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성경을 문자적으로 보면 어느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말씀입니다. 아니 이 말씀을 가지고 은사자들은 확신을 가지고 있고 자기에게 은사가 있다는 것을 성령을 받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절대로 아닙니다,
성령이 나눠 주신 것과 성령이 임한 것은 전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말한다면 교회 안에서 주라고 말하는 모든 사람은 다 구원을 받는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러나 분명히 말씀을 드리지만 주여 주여 하는 자가 다 구원을 받는다고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은사는 재능입니다.
그러니까 각 사람에게 그러한 일을 하게끔 주시는 재능입니다, 그 재능이 있다고 해서 그가 구원을 받았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쉽게 말씀을 드리면 은사는 내가 하나님을 믿는데 있어서 필요한 재능이라고 보면 됩니다, 그 재능이 있다고 해서 그것이 구원과 연결이 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나눠 주셨습니다,
마치 무엇과 같습니까? 내가 태어날 때 어떤 민족으로 그리고 어떤 가정에서 태어나느냐는 것과 같습니다, 내가 백인으로 태어나느냐 아니면 황색인으로 태어나느냐 또 황색인 중에서도 부자로 태어나느냐 가난한 자로 태어나느냐 하는 것입니다,
나눠 주는 것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복음을 나눠 주셨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복음을 듣는 모든 사람이 다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주님의 살과 그리고 주님의 피를 마신다 해도 그것으로 모든 사람이 다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영생은 나눠주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선물로 그 택한 자에게만 주시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12장은 은사장입니다.
사도 바울이 은사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이 은사를 나눠 받은 그것이 구원을 받는 것이라면 성경은 잘못 기록이 되었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고 있어야 합니다, 12장 마지막 절에 어떤 말씀이 기록이 되어 있는가를 모르고 13장을 모르기 때문에 마치 성령을 받은 것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12:3절을 보면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은사에 대해서 말씀 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절에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은사를 받았으면 그것으로 족한 줄 알아야 하는데 사도 바울은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12장의 모든 은사를 받았습니다, 그렇다 할지라도 더욱 큰 은사를 받지 못하면 제일 좋은 일을 볼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제일 좋은 길이 무엇입니까? 주님께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길을 볼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더욱 큰 은사가 너희에게 없다면 이 모든 은사를 받았다 해도 좋은 길을 볼 수 없다는 말씀이며 볼 수 없다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더욱 큰 은사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고린도전서 12장의 모든 은사가 있다 해도 여러분에게 더욱 큰 은사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성령을 받았습니까?
절대로 아닙니다, 성경을 모르니까 그저 그 문장만 보고 마치 성령을 받은 것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방언을 합니까? 예언을 합니까? 병을 고칩니까? 사도가 되었습니까? 선지자가 되었습니까? 교사가 되어서 목사로서 일을 하고 있습니까?
성령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사랑하는가를 확증하지 못하고 있다면 그는 절대로 성령을 받은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성령이 그 뜻대로 나눠 주시는 모든 은사를 다 받았다 해도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말씀하고 있는 사랑의 은사가 여러분에게 없다면 그것은 다 쓰레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저는 쓰레기라고 말 합니다,
그것을 아무리 성령이 그 뜻대로 나눠 주셨다 해도 그것이 나에게서 모두 나타난다 해도 내가 좋은 길을 볼 수 없다면 그것은 한 마디로 쓰레기에 불과하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 그런 쓰레기를 가지고 논쟁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면 답답하기만 합니다. 방언을 하면 뭐 하고 안 하면 뭐 합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없다면 그것은 다 쓰레기입니다.
제가 은사를 폄하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그만큼 구원에 대해서 절실하기 때문에 말씀을 드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무엇이 더 소중한 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그가 구원을 받은 성도라면 그런 쓰레기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습니다. 방언을 하는 것도 그리고 방언을 하지 않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닌데 그것을 가지고 논쟁을 한다는 그 자체가 너무 안타깝기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까?
그렇다면 고린도전서 12장에서 말씀하고 있는 은사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 은사가 뭐가 그리 중요합니까? 그것을 가지고 다툼을 일으킬 만한 이유가 있습니까? 나에게 그런 은사가 하나도 없다 할지라도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면 나는 구원을 받습니다. 하지만 그런 은사가 다 있다 해도 주님이 나를 사랑하시지 않는다면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은사를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일부의 사람들은 특히 방언에 대해서 너무 집착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마치 성령을 받은 표적이나 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방언을 하는 모든 사람은 반드시 주님으로부터 저주를 받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저주입니다.
왜 저주를 받는가 하면 그 은사를 표적으로 삼고 있는 모든 사람은 더 좋은 은사를 사모하지도 않고 있고 더 좋은 은사가 무엇이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자기에게 나타나는 그 은사를 보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가리고 자기의 의를 드러내는 일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안 믿습니다.
율법은 지키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안 믿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시대 역시 율법을 지키는 사람도 하나님을 안 믿고 있고 은사에 대해서 집착하는 사람도 예수 그리스도를 안 믿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율법이 무엇인가 은사가 무엇인가를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사랑을 따라 구하라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사랑을 추구하십시오. 신령한 은사를 열심히 구하십시오. 특히 예언하기를 열망하십시오.”
사랑을 따라 구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주님의 사랑이 먼저 있고 난 후에 구하라는 말씀입니다, 이 시대는 고린도전서 13장을 아예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어서 14장까지 연결이 되어 있는 말씀을 도무지 모르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먼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은사입니다.
그 중에 더욱 큰 은사가 무엇인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은사라는 말씀입니다, 그 은사를 따라 구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사랑도 받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예언을 한다고 하고 있고 또 방언을 한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 예언과 방언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 하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사랑을 구하라는 말씀입니다,
먼저 내 안에 주님의 사랑이 있기를 구하라는 말씀입니다, 그저 교회에 나와서 이런 은사가 나타난다고 해서 자기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사랑받고 있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이 시대는 주님의 사랑을 구하지도 않고 있습니다,
어떻게 합니까?
고린도전서 13장을 보면서 사랑장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자기들이 이웃을 그리고 형제를 사랑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 소경의 눈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당연히 은사를 보고 자기에게 진리의 성령이 임한 것으로 생각하게 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나를 통해서 나타나는 은사는 신령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육적인 은사입니다,
성령이 나눠 주셨어도 나를 통해서 나타나고 있다면 그것은 신령한 은사가 아니라 육적인 은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육체에 빠져 있는 사람은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에서 육체로 썩어질 것을 거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로마서1:11절을 보면
“내가 너희 보기를 심히 원하는 것은 무슨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눠 주어 너희를 견고케 하려 함이니”
신령한 은사입니다
사도 바울이 신령한 것을 사모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로마서에서는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눠 주어 너희를 견고케 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신령한 은사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보고 듣고 하는 복음이라는 말씀입니다.
방언이 신령합니까?
예언이 신령한 것입니까? 물론 예언은 신령한 것을 전하는 것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그 예언 자체가 신령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신령한 것은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그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보고 있는 복음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자기를 통해서 나타나는 방언과 예언이 신령한 것인 줄 알고 있습니다.
성경을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지혜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성경을 잘못 알면 어떻게 됩니까?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사랑을 받을 생각은 하지 않고 자기가 사랑하려고 노력을 하고 있고 그런 사랑을 보면서 마치 자기가 믿음이 좋은 것으로 생각하게 되어 있습니다.
오직 예수입니다.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다고 다 가하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직 예수가 아닌 것은 독으로 돌아온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율법도 그렇고 은사도 그렇고 모든 것이 여러분에게 있어 치명적인 독이 될 수 있습니다, 물론 은사는 잘 사용해야 합니다, 제가 전적으로 이 은사를 부정하고자 드리는 말씀이 아닙니다.
내 의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은사를 통해서 자기가 믿음이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은사 자들은 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자기에게서 나타나는 은사를 보고 자기가 성도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은사 자들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가 거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니 성경을 제대로 아는 사람을 아직 못 보았습니다.
왜 성경을 모릅니까?
그 은사가 그 사람에게 있어 표적이 되다 보니까 더 이상 말씀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도 표적을 구하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주님께 표적을 요구했습니다. 이 시대도 은사가 표적이 되어서 성경 아는 것을 게으른 사람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특별히 예언을 하라고 말씀합니다,
먼저 주님의 사랑이 내 안에 있어 복음의 신령한 것을 가진 후에 예언을 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언이라고 하니까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시대도 샤머니즘에 빠져서 자기가 무슨 예언자나 되는 것처럼 예언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씀하는 예언은 성경 말씀을 아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입니다,
텍스트로 있는 성경에서 예언을 해야 합니다, 이 세상 무당이 하는 것과 같은 예언을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 모든 성경이 기록이 되어 있기 때문에 더 이상의 새로운 예언은 없습니다. 이상한 예언을 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은 성경을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영의 일입니다.
늘 강조를 하지만 성경은 육의 일이 아니라 영의 일이라는 것을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육에 대한 예언이 아니라 성경 말씀을 성령의 감동을 받아 진리를 가르치는 것이 예언입니다,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고 있는 성도라면 이제 예언을 하기를 사모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를 사모하라는 말씀입니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그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니라”
새번역입니다,
“방언으로 말하는 사람은 사람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말하는 것입니다. 아무도 그것을 알아듣지 못합니다. 그는 성령으로 비밀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시대 방언이 참 문제입니다.
어느 교회는 이 방언을 하는 것으로 마치 자기가 성령을 받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금 사도 바울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신령한 것을 사모라하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알기를 사모하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이제 이렇게 구원을 받은 사람은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예언을 하는 사람 중에서 방언을 하는 사람에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우선 순서가 되는 것을 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내 마음대로 그저 문자를 보고 그 단어를 보는 것이 아니라 성경 전체를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예언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제 그 사람이 방언을 말하고 있습니다, 방언이라고 하니까 이 시대 이상한 방언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가 어느 시대인가를 바로 아시기를 바랍니다, 로마 시대입니다, 그리고 언어는 헬라어를 쓰고 있는 시대입니다, 그런데 로마가 많은 나라들을 정복해서 모든 나라가 공용어를 헬라어를 쓰고 있고 본 나라의 방언이 있었습니다.
수많은 나라가 있습니다,
그 나라들에게 가서 예언을 전하려고 하면 방언을 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도 제가 알기로는 5개 국어 이상을 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공용어인 헬라어는 기본적으로 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이니까 히브리어를 했고 그 외에도 몇 개 국어를 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 방언입니다,
지금 교회에서 하고 있는 이상한 말이 아닙니다, 고린도교회를 통해서 이방에 복음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 고린도교회에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고 그 후에 예언을 하라고 하고 있고 그 다음에 방언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당시 사도 바울은 많은 사람을 세워서 이방에 복음을 전하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이상한 이야기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시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하고 있는 방언이 사람에게 하지 않고 하나님께 한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아닙니다, 당시 고린도교회에 방언을 하면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전도를 하려고 가는 나라에 방언을 말하면 알아듣는 사람이 없고 그 방언은 하나님께 한다는 말씀은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말씀입니다.
복음의 비밀입니다,
다른 나라의 언어로 예언의 비밀을 말하는 것이 방언입니다, 그런 말을 하면 보통의 사람들은 못 알아듣습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방언을 하면 사람이 못 알아듣지만 하나님께서 그것을 알아듣고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안위하는 것이요”
새번역입니다,
“그러나 예언하는 사람은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는 덕을 끼치고, 위로하고, 격려하는 말을 합니다.”
예언하는 사람입니다,
잘 이해를 하시기 바랍니다, 예언을 하는 사람도 예언을 하고 있는 것이고 방언을 하는 사람도 예언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이 두 가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씀인가를 아시기 바랍니다. 예언하는 사람은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예언을 어떻게 합니까?
고린도교회에서 알아듣는 말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경말씀을 성령의 감동으로 인도함을 받아서 자기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잘 이해가 안 될 수 있겠지만 당시 로마는 거대한 제국이었고 작은 나라들이 많았는데 그 국경이 다 사라지고 있었고 언어는 각각의 언어를 사용했습니다,
그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예언을 하는 사람은 자기 나라 말로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하는 말이라고 하니까 모든 사람들이 아니라 자기 나라의 언어를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에게 하고 있는 말이 예언입니다, 성경에서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자기 나라 말로 복음을 전하는 것이 예언이고 그 예언이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안위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복음을 전합니다,
그것을 예언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고 그 예언을 함으로 해서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안위를 주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자기 나라 말로 하면 이렇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고린도전서14장에서 말씀하는 방언과 예언을 바로 아시기를 바랍니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새번역입니다.
“방언으로 말하는 사람은 자기에게만 덕을 끼치고, 예언하는 사람은 교회에 덕을 끼칩니다.”
잘 이해를 하시기 바랍니다.
지금 유럽은 거의 국경이 사라졌습니다, 많은 나라들이 자유롭게 왕래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를 들어서 보스니아에 지금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들은 보스니아 어를 사용합니다. 그런데 누가 크로아티아 방언을 하고 있습니다, 크로아티아 어를 한다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이 지금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방언으로 말 합니다.
그러면 보스니아 사람들은 크로아티아 어를 모르니까 그것이 누구에게만 덕을 끼칩니까? 자기에게만 덕을 끼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크로아티아 어로 성령의 감동을 받아 진리를 알아가니까 보스니아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무슨 말인지를 모릅니다. 물론 간혹 가다가 크로아티아 어를 아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지금과 같은 시대가 아닙니다,
2000년 전이라는 것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 당시는 공부를 하는 사람도 적었고 문맹률도 높았던 때입니다, 외국어를 한다는 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그러나 방언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면 그는 자기에게만 덕을 끼치게 됩니다, 크로아티아 어를 모르는 사람에게는 덕을 끼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예언은 어떻습니까?
같은 나라 말로 하니까 교회에 덕을 끼칩니다, 성령의 감동을 받아 성경을 해석하는 사람은 교회에 덕을 끼칩니다, 예언의 말씀은 자기 나라 말로 하니까 당연히 교회에 덕을 끼칩니다, 그러나 방언을 하는 사람은 자기에게는 덕을 끼치지만 아무도 못 알아들으니까 덕이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만일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통역하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
사도 바울의 말씀입니다.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방언하기를 원합니까? 그것은 아직도 이방에 복음을 전해야 하는 나라가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려면 그 나라의 언어로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그런 사람이 많으면 복음을 쉽게 전할 수 있습니다.
방언을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지금 이 시대 알아들을 수도 없는 이야기를 하는 것을 가지고 방언이라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방언이 아닙니다, 이런 말씀을 드려서 대단히 죄송하지만 그것은 귀신의 역사입니다, 사도 바울이 왜 이 말씀을 하고 있는가를 아시기 바랍니다,
다 방언 말하기를 원 합니다
그것은 당시 수많은 언어를 사용하는 나라가 많았습니다. 그 나라에 복음을 전하려면 사도 바울 혼자로서는 안 됩니다, 미리 말씀을 드렸지만 사도 바울은 약5-6개국 언어를 했습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이 전할 수 있는 나라는 그 정도입니다, 그러니까 나는 너희가 다 방언을 말하기를 원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먼저 자기 나라의 언어로 예언을 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한 고린도지방에 많은 사람이 복음을 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고 나서 다른 지역으로 가서 또 복음을 전했습니다. 다른 지역으로 가려면 그 지역에서 복음을 들은 성도들이 예언을 해야 사도 바울이 갈 수 있었습니다.
그 말씀입니다.
하지만 고린도전서 14장에서 말씀하고 있는 방언이 무엇인지 예언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사도 바울은 방언을 말하는 자가 만일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통역하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못하는가 하면 아무도 못 알아듣는 이야기를 해 보아야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방언과 예언이 다른 것이 아닙니다,
고린도지방의 말로 복음을 말할 수 있으면 예언입니다, 그리고 다른 지방의 언어로 복음을 말할 수 있으면 방언입니다, 사도 바울은 더 많은 민족에게 복음이 전해지기를 원하면서 방언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방언을 하는 사람이 교회에 덕을 세우기 위해서 고린도지방의 말로 하지 못하면 그 방언은 예언만 못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아무도 못 알아듣고 있다면 예언만 못 합니다, 그러나 통역을 해서 알아들으면 괜찮다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아는 복음을 두 가지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 나라에서 복음을 전하는 일로 그리고 다른 나라에서 복음을 전하는 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언 아무 것도 아닙니다,
방언 이 또한 아무 것도 아닙니다, 일천 마디의 방언을 하고 또 모든 비밀을 아는 예언을 한다 해도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여러분에게 없다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는 성도가 되어서 예언도 하고 방언도 해서 복음을 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에 구원을 받아 천국에서 영원한 축복을 누리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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