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니라(요6:63.)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너희는 귀를 기울리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

로마서 강해 - 구원론

로마서 강해 153강,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윤주만목사 2019. 1. 27. 22:31


로마서15:10절을 보겠습니다. (259)

또 가로되 열방들아 주의 백성과 함께 즐거워하라 하였으며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성경을 알면 알수록 우리는 주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아니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할례의 수종자가 되신 일에 대해서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교회 안에서 행하고 있는 행위를 보고 감사한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감사를 모르고 있습니다.

아니 무엇을 가지고 감사해야 하는 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15장을 통해서 우리 성도들이 무엇에 대해서 주님께 감사해야 하는가를 말씀을 하고 있지만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성경을 깨닫지를 못해서 자기들의 행위를 보고 감사하고 있습니다.

 

자기를 보고 감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가 어떤 일을 하고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행위는 자기를 감사하는 것 밖에는 되지 않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자기들이 전도를 하는 것으로 감사를 하고 있고 자기들이 예배를 드리는 것으로 감사하고 있고 또 많은 헌금을 하는 것으로 감사하고 있고 어떤 일을 하는 것으로 감사하고 있습니다.

 

주님께 감사하고 있습니까?

내가 한 일을 가지고 주님께 감사한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주님을 멸시하는 행위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무엇에 대해서 감사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위하여 할례의 수종자가 되신 것을 감사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럼으로 해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열방이 구원을 받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열방이 주님께 감사를 하고 있습니다. 사실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할례의 수종자가 되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도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이 일에 대해서 바로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주님께서 하신 일을 알고 감사할 것이 분명합니다.

성도와 가라지의 차이입니다

성도는 주님이 하신 일을 알고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가라지는 자기들이 한 행위를 가지고 감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시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이 감사라는 말을 얼마나 입에 달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무엇을 가지고 감사해야 하는 줄을 모르고 그저 겸손의 모양을 내기 위해서 감사하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내가 한 행위를 가지고 감사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자입니다 우리 성도는 내가 아무리 큰일을 했어도 그것으로 감사하지 않고 있습니다. 왜 감사할 수 없는가 하면 그것으로는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을 위하여 할례의 수종자가 되심으로 해서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고 그것을 아는 성도는 그 일을 가지고 감사하고 있습니다.

 

너무도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 중요한 말씀을 이 시대는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믿지도 않고 있습니다. 믿지를 않으니까 감사할 수도 없습니다. 그것이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교인들의 상태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 그들이 교회 안에서 구원을 받았다고 말을 하고 있고 세상 사람들에 대해서 큰 소리를 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자기의 구원입니다

그것에 대해서 감사하지도 않는 그가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아니 감사하다는 말은 입에 달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이 감사한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그저 사람들이 감사하다고 하니까 아무 것도 모르고 감사하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까?

주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표하고 있습니까? 그런데 주님이 하신 일이 아닌 것을 가지고 감사를 한다고 하면 어떻게 됩니까? 아니 생각을 해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어떤 사람을 도와주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내가 도와 준 일을 전혀 모르면서 그저 내 앞에 와서 도와 주셔서 감사하다고 하면 여러분의 마음은 어떻겠습니까?

그가 감사하는 자입니까?

그는 감사하는 자가 아니라 자기가 받은 은혜를 거절하는 자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왜 성경을 바로 알아야 하는가 하면 바로 이런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을 위하여 할례의 수종자가 되셔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는데 이 일에 대해서는 전혀 감사하지 않고 있다면 그가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봉창 두드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냥 무조건 감사하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을 보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오셔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셨지만 그들이 어떻게 했습니까?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도무지 깨닫지를 못해서 하시는 말씀마다 동문서답을 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이 시대 교인들이 똑같이 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을 위하여 할례의 수종자가 되셔서 우리를 구원하신 일로 감사를 받고 싶은데 이 시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전도를 했다고 하면서 감사하고 있고 자기들이 드리는 예배를 하고 나서 감사하다고 하고 있고 헌금을 많이 하고 감사하고 있다면 주님께서 어떠하시겠습니까?

 

그것은 감사가 아니라 멸시입니다

우리가 조금만 깊이 생각을 하면 알 수 있는 일입니다. 그리고 찬송도 어떻습니까? 주님은 분명히 이 일을 가지고 찬송을 받으시기를 원하시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어떻습니까? 자기들이 부르는 노래를 가지고 찬송을 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 찬송가입니까?

그것 중에 복음 적인 찬송가가 과연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설령 복음 적인 내용의 찬송가가 있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으로는 주님을 찬송해서는 안 됩니다 분명히 사도 바울은 주님께서 할례의 수종자가 되셔서 우리가 구원을 받은 그 일로 주님께 찬송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찬송입니다

모르고 찬송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로마서의 말씀도 모르면서 주님께 찬송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우리를 구원해 주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위하여 할례의 수종자가 되셨는데 그 일에 대해서는 찬송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찬송입니다.

노래를 하는 것이 찬송이 아닙니다. 내가 구원을 받은 사실에 대해서 감사를 하는 것이 찬송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위하여 할례의 수종자가 되셨다는 그 일을 알고 감사하는 것이 찬송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찬송하시기 바랍니다. 먼저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하신 일을 알아야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 감사가 주님을 찬송하는 일이라는 것을 우리가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성경에서 복음을 바로 알고 있는 성도만이 주님께 감사할 수 있고 그런 감사가 찬송이 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이방 사람들아, 주님의 백성과 함께 즐거워하여라" 하였으며,”

 

구원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 성도들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는가를 로마서15장에서 다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이 말씀을 하고 있는가 하면 우리 강한 자들이 이 세상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하다보면 자기가 어떻게 구원을 받았는가를 망각할 수 있기 때문에 다시 우리를 깨우기 위해서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구원을 받았습니까?

우리가 강한 자로서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기쁘게 하지 않고 이웃을 기쁘게 하는 일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복음을 전하는 이 일이 얼마나 어렵다는 것을 사도 바울도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구원에 대해서 다시 상기 시키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받았는가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은 것을 말씀을 하면서 그 긍휼하심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구원을 받은 성도들이 열방 중에서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을 찬송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너무 적습니다.

구원을 받는 사람이 너무도 적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구원을 받은 성도를 그 긍휼하심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열방 중에서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을 찬송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또 말씀합니다.

가로되 열방들아 주의 백성과 함께 즐거워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먼저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오시고 난 후에 우리 이방에 복음이 전파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구원을 받은 우리 이방인들에게 주의 백성과 함께 즐거워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구원입니다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영의 일을 알고 있는 성도만이 자기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거하시고 있는 성도만이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정확하게 구원을 아는 성도만이 즐거워할 수 있지 무언가 모르게 자기 구원에 대해서 찜찜하면 즐거워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성도입니다

그리고 성경에서 말씀하는 영의 일을 알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하나님을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셔서 할례의 수종자가 되셔서 율법을 완전케 하셨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럼으로 해서 이스라엘의 조상들에게 하신 약속들이 성취가 되었고 우리가 지금 이 시대 구원을 받고 있습니다.

 

막연함이 아닙니다.

우리는 확실하게 구원에 대해서 알고 있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이 복음을 전하고 나서 사도 바울이 신명기의 말씀을 인용을 해서 즐거워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정말 이 구원에 대해서 바로 알고 있는 성도들은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신명기32:43절을 보겠습니다. (315)

너희 열방은 주의 백성과 즐거워하라 주께서 그 종들의 피를 갚으사 그 대적에게 보수하시고 자기 땅과 백성을 위하여 속죄하시리로다

 

모세입니다

이제 그가 느보산에 올라가 죽기 직전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어떻게 구원하셔서 가나안으로 들어가게 하시는가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신명기32장은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이 어떠했는가를 말씀을 하고 있고 그런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입니다

너희 열방은 주의 백성과 즐거워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서 이미 우리 이방인들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계획을 하고 계셨습니다. 성경을 보는 사람들이 오해를 하고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 이방인들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생각을 성경을 통해서 잘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신명기32장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역사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모두 이스라엘에게 가르쳐 주고 난 후에 그 마지막에 우리 이방인들에게 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가로되 열방들아 주의 백성과 함께 즐거워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입니다

그분은 이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로 오셨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이 사실에 대해서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 시대는 유일하신 하나님을 믿지 않고 있기 때문에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통해서 역사하시는 모든 경륜은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이루실 영의 일을 가르쳐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은 이방의 빛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반석이신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 이방인들을 구원해 주실 것을 모세는 알고 그 마지막에 열방들아 주의 백성과 함께 즐거워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무엇에 대해서 즐거워하라고 하는가 하면 구원에 대해서 우리 이방인들이 주의 백성과 즐거워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구원입니다

다른 것으로 즐거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 인생은 늘 말씀을 드리지만 잠시 보이다가 사라지는 안개와 같습니다. 그런 인생으로 즐거워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우리 인생들이 즐거워해야 하는 이유는 단 한 가지 구원이라는 것을 늘 생각하고 있어야 합니다.

 

대적을 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을 누가 막을 수 있습니까? 어느 신이 막을 수 있습니까? 그것을 신명기에서 그들의 신이 어디 있으며 그들의 반석이 어디 있느냐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대적의 장관의 머리를 치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실제 대적입니다

그 대적이 신약에 와서 율법이 되었습니다. 구약에서는 실제 대적으로 말씀을 하고 있지만 신약에 와서는 우리 영의 일에 있어서 대적인 율법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을 위하여 할례의 수종자가 되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즐거워해야 하는 일입니다

주님께서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위하여 할례의 수종자가 되신 것을 우리는 즐거워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일로 즐거워하고 있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그것보다 더 즐거워해야 하는 일이 없지만 이 시대는 자기들이 지키고 있는 율법의 의를 보면서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입니다

주님이 율법을 지키지 않으셨으면 우리는 어떻게 해도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이 사실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사람들이 모르고 있습니다. 아니 주님이 율법을 지키셨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하는 그들이 주님이 지키신 율법을 보고 즐거워하지를 않고 있습니다. 왜 즐거워하지 못하고 있는가 하면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영광이 무엇인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즐거워하시기 바랍니다.

사실 이것보다 더 즐거운 일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는 죽었다 살아나도 율법을 지킬 수 없습니다. 우리 인생은 어느 누구도 할례의 수종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하나님을 진실하심을 위하여 할례의 수종자가 되심으로 해서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약속이 견고케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사실 우리에게 얼마나 즐거운 일입니까? 우리가 성경에서 이 말씀을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위하여 할례의 수종자가 되셨다는 의미를 모르고 있는 사람은 열방들아 주의 백성과 함께 즐거워하라는 말씀을 보고도 즐거워할 수 없습니다.

 

누가 즐거워할 수 있습니까?

율법을 지키는 사람은 절대로 즐거워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율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은 주님께서 하나님을 위하여 할례의 수종자가 되셔서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하는 약속을 견고케 하셨다는 이 말씀을 알고 즐거워하게 되어 있습니다.

 

성경 말씀입니까?

즐거워하라고 한다고 해서 우리가 즐거울 수 있습니까? 로마서에 우리 이방인들에게 주의 백성들과 즐거워하라고 말씀을 했다고 해서 우리가 즐거울 수 있습니까? 절대로 안 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위하여 할례의 수종자가 되셨다는 것의 의미를 알면 우리는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아니 즐겁습니다.

이보다 더 즐거운 일이 어디 있습니까? 주님께서 할례의 수종자가 되심으로 해서 우리가 구원을 받는데 이보다 더 즐거운 일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사람들은 이 즐거움을 모르고 자기들이 율법을 지키고 사람의 이성으로 하나님을 잘 믿어서 즐거워하려 하고 있습니다.

 

안 됩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도 이 즐거움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아니 즐거워할 수도 없다는 것으로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성경에 약속하신 대로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셔서 천국으로 인도하신다는 것을 알면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순전히 주님께서 할례의 수종자가 되셔서 그렇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즐거워하시기 바랍니다.

성경을 알아야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으니까 즐거워한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아니 억지로 즐거운 척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마음에서는 하나도 즐겁지 않은데 억지로 즐거운 척을 하고 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할례의 수종자가 되신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로마서15:11절을 보겠습니다. (259)

또 모든 열방들아 주를 찬양하며 모든 백성들아 저를 찬송하라 하였으며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모든 이방 사람들은 주님을 찬양하여라. 모든 백성들아, 주님을 찬양하여라" 하였습니다.”

 

8절 말씀입니다

계속해서 사도 바울이 그 말씀에 대해서 연결을 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늘 이 구원에 대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이 구원을 우리가 어떻게 받을 수 있는가를 먼저 아는 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시는 구속의 일을 알아야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도 있고 즐거워할 수도 있고 주님께 감사하고 찬양을 할 수 있습니다.

 

구원의 감격입니다

알아야 이 감격이 우리에게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아무 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특히 로마서의 말씀을 보면서 너무도 막연하게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8절 말씀은 전혀 깨닫지도 못하고 있는 그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하고 있고 감사한다고 하고 있고 찬송한다고 하고 있고 즐거워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가능합니까?

그런데도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이것이 가능하고 있습니다. 그저 자기들의 감성을 자극하고 있고 특히 종교적인 행위와 언변으로 9절부터 하는 말씀들을 가능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로마서158절부터 13절까지의 말씀은 8절을 알아야 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주를 찬양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열방들에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또 모든 백성들에게도 같은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주를 찬양하라, 저를 찬송하라고 하니까 자기들이 부르는 노래로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거의 문자적으로 보면서 저를 찬송하라고 했으니까 찬송가를 부르면 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입니다. 그 약속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견고케 하신 것에 대해서 우리 이방인들이 그리고 모든 백성들이 주를 찬양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이 약속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그저 찬양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시편117:1-2절을 보겠습니다. (889)

너희 모든 나라들아 여호와를 찬양하며 너희 모든 백성들아 저를 칭송할찌어다 우리에게 향하신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크고 진실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할렐루야

 

노래입니까?

우리에게 노래를 부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구원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들은 이런 말씀을 보고 노래를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받았는가를 아는 성도는 노래를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향하신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진실하심을 알고 찬송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영의 일입니다

우리가 노래를 한다고 해서 그것이 찬양이 되고 찬송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그 의미를 모르고 하는 노래는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설령 그 의미를 안다고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위하여 할례의 수종자가 되셔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조상들에게 하신 약속이 견고케 되신 것을 알면 그 사실을 믿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입니다

굳이 입술로 찬양을 하지 않아도 그것은 찬양이 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굳이 입술로 찬송가를 부르지 않아도 됩니다. 아니 그런 것이 도리어 자기의 의를 쌓는 일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모든 일을 하셨는데 우리가 왜 또 그것에 대해서 행위를 해야 합니까?

 

찬양, 찬송

성경에서 많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찬송가를 부르라고 하는 말씀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들이 하는 찬송을 받으십니까? 우리가 찬양을 하면 기뻐하십니까? 만약에 하나님이 그런 것으로 기뻐하시고 받으신다면 우리는 반드시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구원입니다

그것에 대해서 앞에서 말씀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받았는가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구원을 받은 우리 성도들이 주를 찬양을 하고 있고 주를 찬송을 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냥 찬양하라고 하는 것이 아니며 반드시 주를 찬양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알아야 합니다.

주님이 하신 일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하신 일을 모르고 주님을 어떻게 찬양할 수 있습니까? 그런데 이 시대는 아무 것도 모르면서 찬양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을 찬양하라고 했지 우리에게 그냥 찬양하라고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저를 찬송하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저를 찬송하는 것입니까?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할례의 수종자가 되심으로 해서 하나님의 약속이 견고케 되어서 내가 구원을 받았다면 그 일에 대해서 주님께서 하신 일을 감사하는 것이 저를 찬송하는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주를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저를 찬송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반드시 8절에서 말씀하는 그 말씀의 의미를 알았을 때 가능한 일입니다 그것을 모르고 주님을 찬양하고 저를 찬송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주님이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위하여 할례의 수종자가 되셨다는 것을 전혀 모르면서도 주님을 찬양한다고 하고 있고 저를 찬송한다고 하면서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을 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구원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그들이 교회 안에서 자기들의 목소리로 찬양을 한다고 하고 있고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율법을 단 한 가지라도 지키고 있는 사람은 주님께서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위하여 할례의 수종자가 되셨다는 것을 믿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가능합니까?

율법을 지키는 사람이 주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까? 율법을 지키는 사람이 저를 찬송할 수 있습니까? 절대로 안 됩니다. 반드시 주님께서 하나님을 위하여 할례의 수종자가 되셨다는 것을 아는 성도만이 주님을 찬양할 수 있고 저를 찬송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구원이 먼저입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교회에 나오면 찬송가를 먼저 배우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찬송가를 부르는 것으로 주님을 찬송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 찬송가를 부르는 것은 주님을 찬송하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을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의 구원에 대해서 정말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받았는가를 아는 성도는 이 시대 종교에서 행하고 있는 그런 찬양과 찬송가를 부르는 일을 하지 않습니다. 그것 역시 내가 하는 행위고 그것이 내 의가 된다는 것을 아는데 어떻게 그러한 일을 할 수 있습니까?

 

노래하고 싶습니까?

저도 성경을 보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이 찬양과 찬송에 대해서 말씀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 지혜가 있는 성도라면 그것이 우리가 이 시대 부르고 있는 찬송가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종교에 세뇌가 되어 있는 사람은 성경의 문자를 보면서 찬송이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주장을 한다면 저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습니다.

 

우리 복음이 있는 성도입니다

성경을 문자적으로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에게는 당할 수 없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성경에 그렇게 많은 말씀으로 찬양과 찬송과 그리고 노래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는데 그런 말씀을 가지고 대적을 하면 할 말이 없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비록 성경에 그런 말씀은 없을지라도 이것이 우리의 의가 되기 때문에 저는 찬송가를 부르는 것을 반대를 하고 있습니다.

 

디도서3:5절을 보겠습니다. (349)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찬양, 찬송

행위입니까? 아닙니까? 행위가 아니라고 하면 저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습니다. 내가 입으로 찬양을 하는 것이 행위입니까? 아닙니까? 그것 역시 행위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제가 늘 말씀을 드리지만 행위에 대해서 우리는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내가 하는 모든 행위입니다

그것은 다 행위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찬양을 합니까? 내가 기도를 합니까? 내가 찬송가를 부르고 있습니까? 내가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까? 이런 것을 다시 설명해야 할 필요성이 없다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도 구원에 대해서 다시 말씀을 하니까 저 역시도 강조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행위를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이루신 구속의 일을 성경에서 아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구원입니다 사도 바울이 분명하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씀을 드립니다.

그런데도 내 입으로 찬양을 하는 것이 행위가 아니고 주님을 찬송하는 노래가 행위가 아니라고 하면 더 이상 할 말이 없습니다. 거기에 제가 더 이상 언급을 해야 할 일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행위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과는 더 이상의 대화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구원입니다

우리의 행위로 말미암지 않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위하여 할례의 수종자가 되심으로 해서 하나님의 약속이 견고케 되어서 우리가 구원을 받았는데 우리가 입술로 찬양을 하고 있고 주를 찬송하는 노래를 부르고 있다면 그것은 서로 충돌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직 믿음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믿음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의 구원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았다고 분명하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문제를 가지고 제가 이야기를 한다는 자체가 세상 초등학문을 이야기를 하는 것과 같아서 솔직히 마음이 내키지가 않고 있습니다.

 

구원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 구원 자체가 주님을 찬양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구원을 받는 일이 저를 찬송하는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로마서의 말씀을 다 듣고 이제 와서 이것에 대해서 다시 언급을 한다면 정말 사도 바울의 말씀과 같이 해산하는 수고를 다시 해야 합니다.

 

주님을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저를 찬송하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계속해서 우리의 구원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이방인들을 처음부터 구원을 해 주시기로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위하여 이루셨습니다.

 

로마서15:12절을 보겠습니다. (260)

또 이사야가 가로되 이새의 뿌리 곧 열방을 다스리기 위하여 일어나시는 이가 있으리니 열방이 그에게 소망을 두리라 하였느니라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그리고 이사야가 말하기를 "이새의 뿌리에서 싹이 나서 이방 사람을 다스릴 이가 일어날 것이니, 이방 사람은 그에게 소망을 둘 것이다"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모든 일을 이루셨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위하여 할례의 수종자가 되셨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영광을 돌립니까?

왜 그에게 감사하고 있습니까? 왜 그를 찬양을 하고 있습니까? 왜 우리가 즐거워하며 찬송을 하고 있습니까? 그것은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위하여 할례의 수종자가 되셔서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들을 견고케 하셔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성경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성경을 수백 번 읽은 신학자들도 모두가 사람의 이성에 빠져 성경을 자기들이 알고 있는 지식을 따라 보고 있습니다. 그런 그들이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입니다

그가 얼마나 복음에 대해서 바로 전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로마서를 통해서도 복음으로 시작을 해서 복음으로 마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쓴 다른 성경도 다 복음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기적과도 같이 그 복음을 안 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복음을 보아야 합니다.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해야 합니다. 그런 성도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찬양할 수 있고 하나님께 찬송을 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위하여 할례의 수종자가 되셨다는 말씀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까?

 

사도 바울이 그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8절의 말씀을 깨달은 성도만이 지금 이 모든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8절의 말씀을 하고 있지만 이 시대는 8절의 말씀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아니 그 말씀이 얼마나 우리에게 중요한 말씀인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그런 그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가능합니까?

8절을 모르는 사람이 9절부터의 일을 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8절의 말씀의 의미도 모르는 그들이 9절부터의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의미를 모르다보니까 종교적인 행위로 입에 바른 감성적인 말을 하고 있고 그것이 다 율법의 행위로 그대로 나타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영광을 받으시겠습니까?

구원을 받지도 못한 사람들의 영광을 받으시겠습니까? 아니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위하여 할례의 수종자가 되셨다는 의미도 모르는 그들의 찬송을 받으시겠습니까? 그들이 입으로 하는 감사를 받으시겠습니까?

 

절대로 안 받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멸시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도 모르고 자기들의 이성을 따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고 하나님께 찬양을 하고 있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위하여 할례의 수종자가 되셨다는 것도 모르고 하는 그들의 행위가 어떠하다는 것을 우리는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씀을 드립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셔서 할례의 수종자가 되셨습니다. 우리는 이 일을 믿음으로 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일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자기들의 종교적인 행위를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다면 하나님께서 어떠하시겠습니까?

 

사람의 이성입니다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내 곁에 정말 불쌍한 사람이 있어서 그를 도와주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내가 도와 준 것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하지 않고 자기가 한 일에 대해서만 이야기를 하면서 감사하다고 한다면 여러분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그를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그가 어려움에 빠지면 다시 도와 줄 수 있습니까? 아니 그것은 고사하고 그를 원수와 같이 생각할 것이 분명합니다. 내가 도와 준 것이 아닌데 자기가 한 행위를 가지고 와서 나에게 감사하다고 한다면 그를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 기독교인들이 그런 행위를 하나님 앞에서 하면서도 자기들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를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선지자들이 기록한 말씀을 인용을 하면서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사야서를 보면 쉽게 찾을 수 있는 말씀을 인용을 해서 우리에게 다시 깨우치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야 합니다.

구약 성경을 우리가 왜 보고 있습니까? 거기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찾기 위해서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어떻습니까? 정말 안타까운 일은 성경을 그렇게 보고 있지 않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성경을 편찬하는 사람들이 그것을 막아 놓았습니다.

 

인용입니다

성경을 보는 사람들이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성경에 각주로 달려 있는 말씀만 인용을 하는 것으로 알고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왜 로마서15장에서 계속해서 인용하는 말씀을 찾아서 말씀을 하고 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그렇게 보아야 합니다.

성경은 성경이 답을 해 주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우리는 인용을 찾아야 합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이 말씀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냥 주님께서 하나님을 진실하심을 위하여 할례의 수종자가 되셨다는 것으로 끝을 내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을 구약의 성도들도 알고 있었고 그들이 어떻게 했는가를 인용을 찾아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각주입니다

성경학자들이 각주를 달아 놓았습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그 말씀이 성경을 인용하고 있습니까? 절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이 시대 목사들은 마치 그 말씀만 인용을 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인용을 하고 있습니다.

거의 모든 성경을 인용을 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들이 어떻게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까? 성경을 알레고리하게 풀고 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성경을 알레고리하게 풀고 있습니까? 그런 말에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15장을 기록했습니다.

그가 각주를 달아 놓았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후에 신학자들이 성경을 편찬하면서 각주를 달아놓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중에서 각주를 찾지 못하는 것은 아예 달아 놓지도 않았습니다. 그런 그들이 인용을 하면 알레고리하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인용을 합니다.

그것은 괜찮고 남이 인용을 하면 알레고리 합니까? 물론 우리는 인용의 말씀을 정확하게 찾아야 합니다. 속된 말로 쌩뚱 맞게 인용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성경은 성경이 답을 해주고 있다는 것을 알고 성경을 보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기 위해서 사도 바울도 지금 계속해서 구약에 있는 말씀을 인용을 하면서 말씀을 하고 있다는 것을 바로 보고 있어야 합니다.

찾으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기 위해서는 우리는 성경에서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인용의 말씀을 근거로 해서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기 위해서 또 이사야 말씀을 찾아서 인용을 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인용을 했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더 밝히 볼 수 있습니다.

 

이사야11:10절을 보겠습니다. (981)

그 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기호로 설 것이요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리니 그 거한 곳이 영화로우리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가 이 세상에 어떻게 오시는가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 그대로 주님은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신 것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가 오셔서 열방을 다스리신다고 말씀을 하고 있고 주님은 이 세상에 오심으로 해서 열방에 복음이 전파가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마태복음의 시작을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로마서에서는 사도 바울이 이사야 말씀을 인용을 해서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이새의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새가 누구입니까?

우리가 성경을 보아서 잘 알고 있듯이 다윗의 아버지를 이새라 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주님은 다윗의 자손으로 오십니다. 그런데 이사야의 말씀도 그렇고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이사야서를 인용을 해서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잘 알아야 합니다.

그냥 무심히 지나가서는 안 됩니다 물론 같을 수 있습니다. 어차피 다윗의 아버지가 이새이기 때문에 다윗의 자손이라고 하는 것과 이새에 뿌리에서 한 싹이 난다는 것이 같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서로 다른 일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자손입니다

주님은 분명히 다윗의 자손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 다윗의 자손은 누구인가 하면 이스라엘이 기다리던 왕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복음서를 보면 주님을 보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윗의 자손이라고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의 자손입니다

그것은 다윗과 같은 왕이 오셔서 자기들의 백성을 구원해 준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생각에는 분명히 다윗과 같은 왕이 오셔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고 이스라엘이 세계 모든 민족 위에서 뛰어나게 될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사야는 다윗의 자손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냥 다윗의 자손이라고 하면 되는데 굳이 이새의 뿌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자손입니다

그것은 왕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니까 마태는 그런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기록했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다윗의 자손이라고 하는 말씀을 많이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오시면 그들은 다윗이 자손이 왕으로 오셔서 구원을 해 주신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이사야 선지자는 다윗의 자손이라고 하지 않고 이새의 뿌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이새의 뿌리라고 말씀을 하는가를 11절에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왕으로 오시면 다윗의 자손이 맞습니다. 그러나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는 의미에서는 전혀 다른 싹이 나와야 한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다윗의 자손이 분명히 맞습니다. 그리고 그 다윗의 자손이 오셔서 이 세상 임금에게서 구원해 주신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영의 일을 말씀을 하면서 그런 왕이 아니라 전혀 다른 싹이 나서 우리 열방을 구원하시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구원입니다

유대인들은 이스라엘만 구원을 받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니 오시는 메시아는 이스라엘을 구원해 주시기 위해서 오신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영의 일로서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입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기를 원하시고 있습니다.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결실을 한다고 말씀을 하는 것은 영의 새로운 싹이 남으로 해서 우리 열방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영의 구원에 대해서 전혀 새로운 싹에서 결실을 한다는 의미에서 이새의 뿌리에서 한 새로운 싹이 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사야66:18절을 보겠습니다. (1049)

내가 그들의 소위와 사상을 아노라 때가 이르면 열방과 열족을 모으리니 그들이 와서 나의 영광을 볼 것이며

 

사도 바울입니다

그는 이방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가 이제 로마에 있는 교회에 있는 성도들에게 서신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제 그 마지막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 이방인들이 왜 구원을 받아야 하는가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뜬금없습니까?

이방에 복음이 전파가 되는 것이 갑자기 되어지는 일입니까? 그것이 아니라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이미 하나님께서는 예언을 하셨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로마에 있는 성도들이 구원을 받는 것이 너무도 당연하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고 그것에 대해서 이사야서의 말씀을 인용을 해서 너희가 구원을 받는 것이 성경적이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자손입니까?

주님은 물론 왕의 의미로는 다윗의 자손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나 이사야 선지자는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났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싹이 만민의 기호로 설 것이며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로마에 있는 이방의 성도들이 구원을 받는 것에 대해서 타당성을 성경적으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입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이렇게 우리 이방인들을 구원하신다는 하나님의 뜻을 선지자들을 통해서 미리 예언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예언 그대로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이 기호로 섰으며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와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왕으로 오시는 메시야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이방인들의 구원에 대해서 이미 영의 일로 말씀을 하고 있고 이사야의 말씀대로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심으로 해서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옴으로 해서 구원을 받고 있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친절하십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이방인들이 왜 믿어야 하는가를 이미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으로 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습니다. 그가 어떻게 구원을 해주시는가를 이사야111-9절까지의 말씀에서 잘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방인입니다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자기들이 마치 이스라엘이나 되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절대로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도 이방인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늘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비록 이방인이지만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성경에 이렇게 미리 예언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입니다

그들은 지금도 다윗의 자손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씀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왕으로는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것은 분명히 맞습니다. 그러나 우리 이방인에게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라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셨습니다. 그 싹은 이스라엘 뿐 아니라 우리 이방인들에게도 구원을 주신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분명히 말씀을 드리지만 이스라엘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의 일을 말씀을 하기 위해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 이방인들을 구원해 주시기 위해서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결실을 한다는 것은 영의 일을 비유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싹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다윗과 다른 싹이 나오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조상이지만 이새의 뿌리에서 난 싹은 이스라엘의 조상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그 싹은 전혀 다른 싹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전혀 다른 싹으로 오실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분명히 족보상으로는 왕으로서 다윗의 자손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전혀 다른 싹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실제 주님은 마리아의 몸을 빌려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왕으로 오신 의미에서는 마태복음의 말씀이 맞지만 열방을 위한 영의 구원은 전혀 새로운 싹이라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에 대해서 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럼으로 해서 우리 이방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습니다. 왜 사도 바울이 로마서의 말미에 이 말씀을 하고 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성경적으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구원을 받는다는 것에 있어서 정통성을 말씀해 주기 위해서입니다.

 

열방 중에서

열방들아, 열방들아 계속해서 우리 이방인들의 구원의 정통성을 말씀하기 위해서 성경에 있는 말씀들을 인용을 하고 있습니다. 비록 우리 이방인지만 우리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고 하나님을 찬양을 하고 있고 찬송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성경적 근거를 가지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은 우리 이방인들을 위해서 오셨습니다. 물론 이스라엘을 위해서도 오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 열방을 모으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이사야의 말씀 그대로 우리가 이방인이지만 주님께로 와서 구원을 받았고 이제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에게 소망을 두고 있습니다.

우리는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계속해서 말씀을 드리지만 우리 이방인들은 소망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으로 나심으로 해서 우리가 소망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가 이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위하여 할례의 수종자가 되심을 우리가 믿음으로 해서 소망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방인입니다

정말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이스라엘로 착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은 다윗의 자손을 기다리면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무 소망이 없이 살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구원에 대해서 사도 바울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우리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을 나게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과는 상관이 없는 싹이 나게 하셨습니다. 그 싹이 누군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싹이 나셔서 하실 일을 이사야11장에서 말씀을 하고 있고 우리 열방이 그 싹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소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지 않았다면 우리는 아무 소망이 없습니다. 아니 이스라엘의 메시아로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셨다면 우리 이방인들은 소망이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새의 뿌리에서 나심으로 해서 우리가 소망을 가질 수 있게 되었고 이 시대 우리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구원을 받기를 원하십니까?

그에게 소망을 두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이방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감사하게도 우리가 소망을 가질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그것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위하여 할례의 수종자가 되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율법을 지키심으로 해서 우리 이방인들이 소망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로마서15:13절을 보겠습니다. (260)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소망을 주시는 하나님께서, 믿음에서 오는 모든 기쁨과 평화를 여러분에게 충만하게 주셔서,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여러분에게 차고 넘치기를 바랍니다.”

 

그에게 소망을 두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 이방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해서 천국의 소망을 가지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이방인들이 소망을 가질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사도 바울은 구약의 말씀들을 계속해서 인용을 하면서 열방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열방입니다

우리 이방인들에게 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우리 이방인들이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었는가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먼저 주님께서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위하여 할례의 수종자가 되심으로 해서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었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할례의 수종자입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주님께서 왜 할례의 수종자가 되셨는가를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할례의 수종자라는 의미를 전혀 모르면서 그저 주님께서 어려서 할례를 받았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아니라 주님은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위하여 할례의 수종자가 되셨습니다. 하나님의 진실하심이 무엇인가 하면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하는 구속의 일입니다

하나님은 진실하심입니다.

무엇에 대해서 그렇다는 말씀입니까? 우리 인생들을 구원하시는 일에 대해서 진실하시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왜 하나님이 진실하신가를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그저 성경에 하나님은 진실하시다고 하니까 그런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구원입니다

그 일을 위해서 주님은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할례의 수종자가 되셔서 율법을 온전히 지키셨습니다. 구약에 기록이 되어 있는 모든 율법을 온전히 지키셨습니다. 그렇게 주님께서 율법을 온전히 지키심으로 해서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렸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구원을 받았습니까?

그러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는 성도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는 성도는 주님께 감사하고 주님의 이름을 찬송하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 열방들에게 주를 찬양하며 주를 찬송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주의 백성과 함께 즐거워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방인입니까?

우리는 마땅히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그것에 대한 근거의 말씀을 이사야서를 인용을 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이미 우리 이방인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다윗의 자손이라고 하지 않고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났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새의 뿌리입니다

이새의 자손은 다윗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고 하지 않고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났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이방인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오셨는가를 말씀을 하고 있는 근거가 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방인입니다

우리는 다윗의 자손을 기다려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은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가 아니라 이새의 뿌리에서 난 싹을 믿어서입니다. 그가 오셔서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위하여 할례의 수종자가 되심으로 해서 우리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말씀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분명하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러고 나서 이제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께 소망을 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 말씀을 모두 깨달은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소망을 둘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소망입니다

구원을 받는 소망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소망에 대해서 그 근거를 사도 바울은 성경을 인용을 해 가면서 정확하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자세하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지만 이 시대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를 않고 있습니다.

 

왜 안 믿습니까?

왜 그에게 소망을 두지 않고 있습니까? 그것은 주님께서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위하여 할례의 수종자가 되셨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 이방인들을 위하여 주님은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위하여 할례의 수종자가 되셨지만 이방인들이 성경을 보고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소망을 그에게 두시기 바랍니다.

우리 이방인들은 율법을 지켜야 하는 의무가 전혀 없습니다. 아니 율법을 지키는 것이 더 이상한 일입니다 우리 이방인은 유월절을 먹을 수는 있어도 율법을 지켜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전부가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왜 율법을 지킵니까?

그에게 소망을 두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위하여 할례의 수종자가 되셨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 절대로 율법을 지키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율법을 완전케 하셨다는 것은 성경의 문자를 보아서 알고 있지만 그것이 자기와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 되기 때문에 그에게 소망을 두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디도서1:1-2절을 보겠습니다. (348)

하나님의 종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바울 곧 나의 사도 된 것은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의 믿음과 경건함에 속한 진리의 지식과 영생의 소망을 인함이라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한 때 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

 

소망의 하나님입니다

우리는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소망이 무엇인가 하면 사도 바울이 영생의 소망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는 이 영생의 소망이 있기 때문에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는 분명한 이유는 바로 이 영생의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소망을 두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그에게 소망을 둘 수 있는 근거를 사도 바울은 로마서158절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말씀의 의미를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그런 그들이 로마서의 말씀을 보고 그에게 소망을 두라고 하니까 무조건 소망을 둔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알아야 합니다.

복음을 모르고 문자를 아는 것으로 소망을 둔다고 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아무 것도 모르면서 어떻게 그에게 소망을 둘 수 있습니까? 아니 그가 무엇을 주는 줄을 모르면서 아니 그가 할례의 수종자가 되셨다는 말씀의 의미도 모르면서 소망을 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영생의 소망입니다

그냥 막연한 소망을 그에게 두라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반드시 우리 이방인의 영생에 대한 소망을 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사도 바울은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소망이 있습니까?

그럼 기쁨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천국에 소망을 가지고 있는 성도는 기쁨이 있기 마련입니다 천국의 소망이 없는 사람은 그 기쁨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 이방인들을 위해서 할례의 수종자가 되셔서 우리가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기뻐할 수 있습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소망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실 우리가 소망을 가지고 있다고 하지만 이것 역시 영의 일입니다. 우리가 이성적으로 느끼거나 감성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영의 일이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육의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마치 육의 일과 같이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이 영의 일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 이제까지 여러 가지로 비유로 해서 말씀을 하고 있지만 사람들은 이 영생에 대한 소망이 무슨 일인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가 이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위하여 할례의 수종자가 되시지 않았다면 우리에게는 소망이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 일을 이루셨습니다. 이 일이 무엇인가 하면 우리 영의 일에 있어 소망을 주는 일이라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영생에 대한 소망입니다

이것이 없다면 아니 이것이 의심이 된다면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자가 되고 맙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이 영의 일은 정말 사람의 이성으로 생각을 하면 아무 의미가 없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령의 감동으로 이 일이 믿어지는 역사가 있습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영생의 소망이 믿어지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누가 이 영의 일을 깨달을 수 있습니까? 아니 누가 이 영의 일에 있어서 영생의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까? 이 복음의 말씀을 듣고도 사람들은 이성으로 이해를 하려고 하다가 다시 돌아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믿으라고 말씀을 해도 믿음을 모르다보니까 이성으로 깨달으려고 하다가 다시 율법주의로 가고 있습니다.

 

저도 알고 있습니다.

제가 전하고 있는 이 소망이 인생의 인성으로는 얼마나 허황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령의 감동을 받고 있습니다. 아니 이 일이 믿어지는 역사가 있어서 우리가 소망을 가질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 주심으로 해서 일어나는 역사라고 해야 맞습니다.

 

더 대단합니다.

저보다 이 자리에서 이 말씀을 듣고 있는 그리고 믿고 있는 성도님들이 더 대단하다고 저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저야 그렇다고 하지만 사람의 이성으로는 도무지 소망을 가질 수 없는 이 일을 믿을 수 있다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고는 안 되는 일입니다

 

우리의 소망입니다

신체의 구원이 아닙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우리가 믿고 있는 내세의 일은 모두가 영의 일입니다 이 영의 일을 믿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을 성경에 기록하게 하시고 그것을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우리가 볼 수 있게 역사를 하고 있습니다.

 

아무도 모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시대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들을 긍휼히 여겨주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영의 일을 믿어지게 함으로 해서 우리가 모든 기쁨을 누리고 있고 우리 안에는 말할 수 없는 평강이 넘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일이 믿음 안에서 역사를 해서 우리에게 충만하게 하시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내세의 일입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우리의 이성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것에 대해서 확실하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성도들에게 그 영의 일이 믿어지게 역사를 하고 있습니다. 저도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가 사모를 함으로 해서 하나님께서 인도를 하셨습니다.

소망의 하나님입니다

그분이 아니고는 우리는 내세에 대해서 소망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주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믿고 싶어도 믿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위하여 할례의 수종자가 되셨습니다.

 

그 일을 깨닫고 있습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오셔서 이 진리를 깨닫게 하고 있습니다. 그런 우리 성도들이 구원을 받아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구원을 아는 성도는 주님께 감사를 하고 있고 주의 이름으로 찬송을 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열방입니다

우리 이방인입니다 이제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받았는가를 확실하게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이 믿어지는 역사가 있습니다. 그럼으로 해서 우리가 주를 찬양을 하고 있습니다. 구원을 받은 모든 백성들이 주님을 찬송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께 소망을 두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1:21절을 보겠습니다. (378)

너희는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

 

소망입니다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위하여 할례의 수종자가 되셨습니다. 그렇게 율법을 완전케 하심으로 주님은 의인으로서 죽지 않아도 되지만 우리 연약한 인생들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영으로 죽은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습니다.

 

이 일을 믿고 있습니다.

그냥 믿는 것으로 끝이 나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 영으로 살아나셨으면 우리도 함께 살아난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할례의 수종자가 되셨으면 우리 역시 주님으로 말미암아 할례의 수종자가 되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육체로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그렇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영의 일입니다

주님께서 영으로 살아나셨습니다. 우리 역시 주님과 함께 영으로 살아났다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이 일을 믿음으로 해서 우리가 소망이 있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이 일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어서 믿고 싶어도 믿을 수 없습니다.

 

안타깝습니다.

자기들에게 있는 소망이 무엇인가도 모르고 있습니다. 그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받는다는 그 말에 어떻게 구원을 받는지도 모르고 자기들이 하늘에 소망을 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육체가 구원을 받는지 영으로 구원을 받는지도 모르고 아니 영의 일을 전혀 모르고 소망이 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소망이 하나님께 있습니다.

왜 우리의 소망이 하나님께 있습니까? 그것은 주님이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위하여 할례의 수종자가 되시고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셔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심으로 우리가 그 일을 믿음으로 우리 역시 영의 생명이 탄생이 되고 이제 그 영이 주님이 오시는 날에 부활을 해서 천국에 들어가기 때문에 주님께 소망이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입니다

이 영의 일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왜 모르는가 하면 성령을 받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성령이 오셔서 이 일에 대해서 인도를 해 주어야 하는데 성령이 오시지 않아서 이 영의 일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이 영의 일을 모르니까 자기들이 어떻게 구원을 받는지도 모르고 소망이 넘치지도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습니까?

이 영의 일을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알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영의 일을 정확하게 알고 믿고 있습니다. 이렇게 믿을 수 있는 것은 성령이 우리에게 오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고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가 소망이 넘치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