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니라(요6:63.)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로마서 강해 -

로마서 강해 150강, 성도의 삶입니다

윤주만목사 2019. 1. 7. 07:02


로마서15:1절을 보겠습니다. (259)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성도의 삶입니다.

로마서13장까지 사도 바울은 복음에 대해서 말씀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제14장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들었던 성도들이 교회 안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14장부터는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은 성도만이 볼 수 있는 말씀이며 사도 바울이 그들에게 하고 있는 말씀이라는 것을 알고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불행하게도 초대교회를 지나오면서 교회 안에서 복음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사도들이 살아 있던 초대 교회를 잠깐 제외하고는 기독교라는 종교가 태동을 하고 난 이후에는 교회 안에서 복음은 사실 사라지고 말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로마서 강해입니다

이제까지 수많은 신학자들이 그리고 목사들이 강해를 기록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글로써 남겨진 것을 보면 복음을 전하는 자가 없었다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 교회 안에서 가장 많이 읽히고 있는 로마서 강해는 14권으로 되어 있는 로이드존슨의 강해입니다

 

저는 안 읽었습니다.

그러나 읽은 사람들과 대화를 많이 해 보았습니다. 그들과 대화를 해 보면 로이드존슨의 로마서 강해가 어떻게 쓰여 져 있는가를 대강은 알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생각할 때 로이드 존슨은 분명히 성화주의자로 보여지고 있습니다. 이 로마서 강해를 본 사람들의 말에서 그런 성향이 강하게 나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시대 로마서 강해의 지침서입니다

그런데 그 강해서가 성화주의자에 의해서 기록이 되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물론 그는 성화만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도 지켰던 것으로 보여지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고 있는 상태에서는 그리고 성화주의자의 사상을 가지고 있는 상태에서는 그것은 이미 종교의 서적으로 밖에는 안 보이고 있습니다.

 

고기도 먹지 아니합니다.

그리고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합니다. 그런데 로이드존슨은 고기도 먹었고 포도주도 마셨습니다. 그것은 로마서 강해라기보다는 하나의 종교서적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도 수많은 사람들이 로마서를 강해하기 전에 그리고 로마서를 알기 위해서 그 책을 읽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고기를 먹습니까?

포도주를 마시고 있습니까? 교회 안에서 행위를 하고 있습니까? 교회 안에서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까? 그는 로마서1장에서 말씀을 하고 있는 복음을 전혀 모르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이 이 세상 지식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억지로 풀다가 수많은 사람들을 사망의 길로 끌고 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도입니다

고기를 먹지 않고 있습니다. 또한 포도주도 마시지 않고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우리 형제로 하여금 거리끼게 하는 일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왜 하지 않고 있는가 하면 그 거리끼게 하는 것으로 인하여 내 형제가 사망의 길로 간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믿음이 있습니다.

그것을 무엇으로 증거 할 수 있습니까? 앞에서 말씀을 드린 대로 고기를 먹지 아니하고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행위를 하고 있고 율법을 지키고 있는 사람은 사실 그것 한 가지만 보아도 그는 믿음이 없는 자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성도는 믿음이 있습니다.

그것을 하나님 앞에서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 시대 기독교 안에 있는 사람들은 자기들에게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면서 그저 교회 안에서 자기들의 의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 믿음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만이 옳습니다.

믿음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은 자기가 옳은지 거짓을 따라가고 있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복음을 듣게 하시고 또 믿음을 주심으로 해서 우리가 고기도 먹지 않고 포도주도 마시지 않는 그것이 옳은 일이라는 것을 알게 하시고 있습니다.

 

참 놀라운 일입니다

아니 기적과도 같은 일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이 시대 누가 복음을 가르쳐 준 것도 아닌데 우리가 복음 안에서 교제할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우리가 고기를 먹지 아니하고 포도주를 마시지 아니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라고 믿고 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렇습니다.

이 시대 모든 사람이 고기를 먹고 있습니다. 그리고 포도주를 마시고 있습니다. 우리 역시 예전에는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께서 인터넷이라는 매체를 통해서 우리 성도들이 교제를 할 수 있게 하시고 복음 안에서 교제할 수 있게 이렇게 인도를 하시고 있습니다.

 

이제 복음을 들었습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기적과 같이 우리가 복음을 듣고 교제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계속해서 성도의 교제를 이어갈 것이고 복음을 들을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렇게 복음이 전해지고 있을 때 사도 바울은 우리 성도들에게 의심하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도들에게 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교회 안에서 율법주의에 빠져 있는 사람들에게 하고 있는 말씀이 아니라 복음을 듣고 있는 우리 성도들에게 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가 되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렇게까지 복음을 듣고도 의심을 한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아직 믿음이 없다는 증거밖에는 안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정죄가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는 믿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의심하지 않는다고 믿고 있습니다. 만약에 이해가 되지 않는 말씀이 있다면 반드시 저에게 물어서라도 그것을 해결하고 가야 한다고 말씀을 드립니다. 우리는 종교인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 복음의 말씀을 확실하게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아는 성도는 절대로 의심하지 않는다고 믿고 있습니다.

 

의심이 됩니까?

그럼 질문을 하시기 바랍니다. 아주 작은 것 한 가지라도 의심이 되는 말씀이 있으면 질문을 해서 그것을 해결하시기 바랍니다. 내 생명에 관한 문제입니다 그것에는 체면 따위는 필요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생명을 얻기 위해서 이제까지 왔는데 인간적인 체면 때문에 그것을 잃어버린다면 불행한 일입니다

 

작은 것 한 가지입니다

그것이 나를 무너뜨릴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물론 제가 성경의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그러나 최소한 구원에 대한 말씀은 어느 정도 알고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의심이 되는 말씀이 있다면 반드시 질문을 해서 그것을 해결하는 사람이 지혜롭다고 믿고 있습니다.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믿음이 강한 우리는 믿음이 약한 사람들의 약점을 돌보아 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자기에게 좋을 대로만 해서는 안 됩니다.”

 

교회입니다

그 안에서 우리는 복음을 듣습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은 우리가 식물을 먹는 것으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는 이제까지 계속해서 복음을 들었습니다. 복음을 들음으로 해서 우리가 이제는 고기도 먹지 아니하고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먹습니다.

그것을 다른 말로 지식으로 자라간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복음을 들음으로 해서 우리가 믿을 수 있습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우리 성도의 믿음은 아는 것에서부터 출발이 되고 있습니다. 복음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믿고 싶어도 믿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제까지 복음을 들은 사람은 믿음에 든든하게 서 있습니다.

우리 강한 자입니다

사람들은 이 말씀을 보아도 누가 강한 자인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은 우리 성도를 강한 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의심하지 않고 먹고 있고 믿음으로 좇아 하는 우리가 강한 자라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강한 자입니다.

육체의 싸움에서 이겨서 강한 자가 아니라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거하시기 때문에 강한 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믿음이 강한 사람이 교회 안에서 약한 사람을 돌봐 주어야 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제까지 복음을 들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거하시는 성도가 있고 이제 교회에 나와서 복음을 듣기 시작한 사람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15:43-44절을 보겠습니다. (283)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우리 강한 자입니다

누가 강한 자입니까? 내가 강하다고 해서 강한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강한 것이 무엇인가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강한 것이 있는 성도만이 강한 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은 성도만이 강한 자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육체입니다

그것을 보고 강하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영의 일을 말씀을 하는 것이지 우리 육체를 보고 말씀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무엇이 강한 줄도 모르고 육체의 모습을 보고 스스로가 강하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킵니다.

처음 교회에 나온 사람은 율법이 무엇인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아니 찬송가를 부르고 싶어도 부를 수 없습니다. 찬송가를 알아야 부를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교회에 나갔는데 찬송가를 아주 잘 부르는 사람이 있고 잘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누가 강하게 보입니까?

아니 그런 것을 보면서 강하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잘 지키고 특히 종교적인 행위를 잘하는 사람을 보고 강하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로마서15장 말씀을 보고 거의 모든 사람들이 강한 자가 누군가 하면 그런 사람을 강하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뭐 합니까?

무슨 말씀을 하고 있는지 전혀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 그들이 사람의 이성을 따라 강한 것을 말하고 있고 실제 그런 사람이 강한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연조가 깊고 모든 행위를 잘하는 사람을 강하다고 하면서 그들이 이제 교회에 처음 나온 약한 사람을 돌본다고 하면서 일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강한 자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은 성도만이 강하다는 것을 고린도전서에서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산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육체는 약합니다. 반드시 죽어서 썩어 없어지는 것은 약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의 의입니다

티끌과 같이 사라지고 맙니다. 그렇게 사라지는 것은 강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육체의 생명을 가지고 있는 인생에게는 그것이 보이기 때문에 그것을 보고 강하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하고 있는 모든 행위와 그리고 율법을 지키는 일은 강한 것이 아니라 약하다는 것을 성경을 통해서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 육체입니다

그것은 약한 것임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가 아무리 율법을 잘 지키고 교회 안에서 선지자와 같이 보인다 해도 고기를 먹고 포도주를 마시는 사람은 강한 자가 아니라 약한 자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서도 무엇이 약한지 그리고 무엇이 강한지를 전혀 모르면서도 자기들의 생각으로 강하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다시 살아야 합니다.

그것을 거듭남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거듭남에 대해서도 많은 사람들이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육체가 죽고 이제 영으로 사는 것을 거듭남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사람들은 다시 육체가 두 번 사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절대 아닙니다.

우리 육체는 다시 살 수 없습니다. 아담으로부터 난 우리 육체는 죽으면 그것으로 썩어 없어집니다. 그것이 다시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영으로 부활하신 것과 같이 우리도 주님의 영으로 다시 사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강한 자입니다

그냥 내가 강하다고 해서 강한 것이 아니라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야 강한 자라는 것을 성경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강한 것으로 다시 사는 것이 무엇인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거듭남에 대해서도 막연하게 육체로 사는 것을 주장하고 있고 그것에 대해서 명확하게 말을 하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으시기 바랍니다.

그런 성도가 강한 자입니다 그렇게 거듭난 성도만이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할 수 있는 것이지 스스로가 강하다고 해서 아니 육체의 모습을 보고 강하다고 해서 그가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할 수 있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실상은 육체의 모습을 통해서 나타내고 있는 사람이 연약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고기를 먹습니까?

그리고 포도주를 마시고 있습니까? 그는 강한 자가 아닙니다. 그러한 사람의 이성에 따르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강한 자가 아니라 약한 자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의 이성에 따르는 것을 하지 않아도 담대할 수 있는 사람이 강한 자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강한 자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육체를 보지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을 보는 순간 우리는 성경을 아무리 보아도 소경과 같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육체를 보고 있습니다. 아니 사람의 이성은 그것을 보고 강한 자인가 약한 자인가를 판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는 누가 강한 자인가를 알고 있고 그래서 교회 안에 연약한 자가 있으면 그의 약함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잠언24:5절을 보겠습니다. (928)

지혜 있는 자는 강하고 지식 있는 자는 힘을 더하나니

 

우리 강한 자입니다

이 시대는 누가 강한 자인가를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그저 자기들의 육체를 보고 강하게 느끼면 강하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영의 일을 모르고 자기 육체를 보는 사람들은 다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강하지도 않은 자가 강한 척을 하다가 모두가 사망의 길로 가고 있지만 그것을 깨달을 수 있는 지혜가 없습니다.

 

지혜 있는 자가 강합니다.

지혜가 있다고 하니까 교회 안에 있는 자기들이 지혜가 있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이렇게 좋은 의미의 말씀이 나오면 교회 안에 있는 자기들은 무조건 지혜가 있다고 생각을 하고 있고 세상 사람은 지혜가 없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늘 말씀합니다.

성경은 세상과 교회를 비교로 해서 말씀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성경을 그렇게 단순하게 보고 있기 때문에 자기들이 지혜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고 목사가 이런 성경 말씀을 인용을 해서 교회 안에 있는 자기들이 지혜가 있다고 하면 지혜가 있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잠언입니다

누가 보았습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이 보았습니다. 이방의 사람들은 성경을 보라고 해도 안 보았습니다. 그러면 단순히 생각을 해도 이스라엘 안에 지혜가 있는 사람이 있고 지혜가 없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데 그렇게 성경을 보고 있지 않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자기들은 모두가 지혜가 있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누가 지혜가 있습니까?

그것을 고린도전서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지혜가 있다는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있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있습니까?

이 시대 기독교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있습니까?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무지한 자들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율법을 보고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지 못하고 있는 그들이 어떻게 지혜가 있는 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지혜가 있어야 강합니다.

그 지혜가 무엇인가 하면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으로 가득차 있는 사람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있는 성도가 그것을 아는 것으로 믿고 있고 그 믿음이 역사를 해서 그의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거하시고 있습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영이 거하시는 성도가 지혜가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먼저 강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을 13장에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않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시대는 누가 강한 자인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로마서13장의 말씀도 문자 그대로 보면서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고 있는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좋은 의미는 자기들입니다

그리고 나쁜 의미는 자기들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은 것은 자기들에게 해당이 되는 말씀이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는 것은 자기들에게 상관이 없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합니까?

그들에게는 지혜가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지혜가 있었다면 누가 그리스도로 옷 입은 사람인가를 알 수 있고 또 자기들이 교회 안에서 하고 있는 행위와 율법을 지키는 일이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는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그들은 성경을 보고 있지만 지혜가 없습니다. 이스라엘도 잠언의 말씀을 보면서 어떻게 생각을 했는가 하면 자기들이 성경을 문자적으로 알고 있는 그것을 보면서 지혜가 있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스라엘이 지혜가 없는 것을 경계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강한 자입니다

반드시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성경을 보고 문자를 아는 것으로 지혜가 있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정도는 세상 사람도 알고 있는 지혜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 정도가 아니라 성경에서 복음을 발견하고 그것을 믿어 그의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거하고 있는 성도가 지혜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지혜 있는 자가 강합니다.

그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은 성도가 강한 자라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으려면 반드시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않는 것이 전제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자기 육신으로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있어야 한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막연합니다.

그리고 너무 맹목적입니다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처럼 자기 이성을 잃어버리고 있는 사람들이 없습니다. 그들은 종교라는 마약에 취해서 그들이 이끄는 대로 그대로 끌려가고 있습니다. 지혜가 있다고 하면 지혜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고 자기들이 강한 자라고 하면 강한 것으로 알고 그대로 따라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을 보시기 바랍니다.

성경이 강한 자가 누군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에서 강한 자라고 하니까 자기들이 강하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성경을 전혀 안 보고 있습니다. 아니 이스라엘이 보았던 것과 같이 그대로 성경을 보고 있고 잠언의 말씀을 보면서 자기들이 지혜가 있다고 하면서 강한 자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요한일서2:14절을 보겠습니다. (389)

아이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아버지를 알았음이요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시고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우리 강한 자입니다

성경은 강한 자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강한 자라고 해서 강한 것이 아니라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강한 자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반드시 강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아니 믿음이 있는 우리 성도를 강한 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강한 자를 사도 요한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성경에 강한 자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지만 성경에서 강한 자를 찾는 것이 아니라 문자를 보고 막연하게 자기들이 강한 자라고 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이성으로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 성도는 성경에서 말씀하는 강한 자를 알고 있습니다.

 

너희가 강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구원을 받은 우리 성도가 강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무엇 때문에 우리를 강하다고 하는가 하면 우리가 아버지를 알았음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여호와를 힘써 알자고 호세아 선지자가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입니다

성경을 달달 외울 정도로 문자적으로는 아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여호와를 몰랐습니다. 자기들은 하나님을 알고 있다고 자부를 하면서 살았지만 실상은 여호와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몰랐기 때문에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문자를 보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으로 자기들이 하나님을 알고 있다고 했지만 그들은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어리석은 백성이었습니다.

여호와를 알고 있습니까?

이 시대 기독교인들이 여호와를 힘써 알고 있습니까? 그들은 성경의 문자를 보고 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시는가를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성경의 문자를 보고 세상 사람들보다 아는 것으로 자기들이 여호와를 알고 있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안 봅니다. 누가 성경을 봅니까? 그런 사람들과 비교를 하면서 자기들이 여호와를 알고 있다고 하는 것은 너무도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는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구원하신가를 알고 있습니다. 그 아는 것이 우리의 강함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아

아비들아, 청년들아, 사도 요한이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믿음이 있는 우리 성도들에게 너희가 하나님을 알았음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알고 있는 우리 성도들에게 너희가 강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속에 거합니다.

성경을 보고 그 문자를 아는 것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한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거할 것 같으면 이스라엘은 절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지 않았습니다. 이 시대 기독교인들도 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그들이 알고 있는 그대로 알면서 그것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 속에 거한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흉악한 자를 이기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강한 자는 흉악한 자를 이기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강한 자는 흉악한 자를 이기었다는 말씀입니다 교회 안과 교회 밖을 비교를 하면서 말씀을 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 있는 일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흉악한 자입니다

누가 흉악한 자입니까? 그것을 사도 바울이 사도행전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너희를 삼년 동안 밤낮으로 훈계하였다고 말씀을 하면서 그러나 내가 가면 흉악한 이리가 와서 너희를 아끼지 않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가고 나면 교회 안에 흉악한 이리가 와서 이제까지 복음을 들은 사람들을 죽이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누가 흉악한 자입니까?

악인의 행위가 흉악하다고 잠언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교회 안에 있는 악인이 흉악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악인에 대해서는 계속해서 말씀을 드리고 있지만 교회 안에 있는 율법주의자는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누가 악인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거절하는 자가 악인입니다 세상 사람이 악인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 그의 은혜를 거절하고 자기들이 행위로 의를 쌓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악인입니다 성도는 교회 안에서 이 흉악한 자를 이기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도입니다

우리는 흉악한 자를 이기었습니다. 그러니까 율법의 행위를 하고 있는 자들을 이기었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도는 율법의 행위를 하지 않음으로 해서 이기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행위를 하지 않는 성도가 강한 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강한 자가 누군가를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 강한 자입니다

우리 성도는 강한 자입니다 성경에서 강한 자가 누구라는 것을 알고 있는 강한 자입니다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강한 자로 살아가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성경에서 말씀하는 강한 자가 아니라 자기들의 이성을 따라 강한 자로 보이면 강한 자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강한 자입니다

마땅히 교회 안에서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로마서14장부터는 우리 성도가 교회 안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가르쳐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복음을 알고 있는 우리 성도들의 교회 안에서의 삶이라고 해도 틀린 말씀이 아닙니다.

 

마태복음8:17절을 보겠습니다. (12)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비유입니다

성경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은 거의 비유의 말씀이라는 것을 알고 보아야 합니다. 이 시대는 거의 무당과 같은 짓을 교회 안에서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을 문자 그대로 보면서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셨다고 하니까 자기들도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샤머니즘입니다

세상 종교와 무엇이 다릅니까? 아니 솔직히 말을 해서 무당과 무엇이 다릅니까? 무당도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고 있습니다. 다만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안 믿고 있을 뿐이지 귀신을 쫓아내고 또 병자들을 고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일들이 샤머니즘이라는 것을 이 시대 기독교인들이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비유입니다

주님이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들을 고쳐 주신 것은 다 비유라는 것을 알고 성경을 보아야 합니다. 주님이 만약에 진짜 병자를 고쳐 주시는 일을 했다면 주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정말 쓸 때 없는 일을 하신 것 밖에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잠시 후면 죽어서 썩어 없어지는 그 육체의 병을 고치셨다면 아니 그것을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셔서 일을 하셨다면 주님은 우리에게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도 이 시대는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샤머니즘에 빠져 병자를 고치겠다고 하고 있고 병이 든 사람도 무당에게 찾아가듯이 하면서 기적을 바라고 있습니다.

 

우리는 병자입니다

우리 인생은 모두가 병이 들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복음을 알기 전에는 우리는 병자와 같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거하시고 있고 그럼으로 해서 우리가 강한 자가 되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강한 자입니다

이렇게 복음을 듣고 믿기 전까지는 우리는 다 병자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연약한 자라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없는 모든 사람은 다 연약한 자입니다 연약한 자이기 때문에 사망에 이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거하시면 우리는 강한 자라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육체입니다

그것이 아무리 강하다 해도 그것은 연약합니다.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그가 정말로 강한 자와 같이 보인다 해도 죽으면 그것으로 끝이 나는 육체는 연약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연약한 우리 인생들의 연약함을 주님께서 담당하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기들이 얼마나 연약하다는 것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인생은 연약합니다.

그가 아무리 강한 척을 해도 역시 연약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연약하기 때문에 죄를 짓고 있고 또 사망이 찾아오고 있습니다. 자기들의 육체가 죽는다는 것을 빤히 알면서도 연약하다는 것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죽어 없어지는 연약한 것을 가지고 이 시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강한 척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은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 연약한 것을 담당하셨습니다. 우리 인생은 죽어 없어져야 합니다. 그것을 담당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어떻게 담당하셨는가 하면 우리는 반드시 죽어서 썩어 없어져야 하는데 그런 우리 육체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해서 영원히 사는 생명을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육체입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연약합니다. 그것을 보고 강하다고 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자입니다 반드시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있어야 하고 그런 성도를 강한 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강한 자는 교회 안에서 그렇게 아직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당당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강한 자입니다

왜 강한 자인가 하면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거하시기 때문에 강한 자입니다. 그 생명은 영원히 죽지 않는 생명이기 때문에 강하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생명이 없는 자는 아직 연약하다는 것을 사도 바울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왜 연약한가 하면 아직 병이 들어있기 때문에 연약합니다.

 

그 연약함입니다.

그 연약한 자의 약점을 우리가 담당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아직 복음 안으로 완전하게 들어오지를 못해서 강한 그리스도의 생명이 거하시지 않고 있다면 그들의 약점을 담당하면서 살아가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까?

복음을 모르기 때문에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들이 아직 병이 들어 있기 때문에 연약합니다. 육체적으로 병이 들어 있다는 말씀이 아니라 영적으로 병이 들어 있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영적으로 강한 성도는 절대로 율법을 지키지 않습니다. 그러나 연약한 자는 율법을 지킬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돌봐 주어야 합니다.

아직 연약해서 병이 들어 있습니까? 우리 성도는 그들을 돌봐주어야 합니다. 사실 사람의 이성으로는 율법을 안 지킬 수 없습니다. 또한 종교적으로 하는 행위가 너무도 좋게 보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이유는 그들이 아직 영적으로 연약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강한 자는 율법을 지키라 해도 종교적인 행위를 하라고 해도 하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누가 우리에게 찬양을 하라고 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강하기 때문에 절대로 그런 것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연약한 자는 모든 사람들이 하고 있는 찬양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럴 때 그런 연약한 자의 약점을 우리가 돌보아 주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기독교에 있던 사람입니다

그가 복음을 들었다 해서 한꺼번에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아직 의심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가 왜 그런가 하면 아직 그리스도의 생명이 거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 그들을 우리 강한 자가 돌봐 줌으로 해서 그가 자기의 약점을 이겨나갈 수 있습니다.

 

성도입니다

강한 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거하시고 있는 성도는 모든 것에서 자유 할 수 있습니다. 자유한다고 해서 그 자유를 무조건 누리려고만 해서는 안 됩니다 왜 안 되는가 하면 교회 안에는 아직 약점을 가지고 있는 연약한 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씀을 드립니다.

기독교에 있는 사람이 왔습니다. 그가 술 취하지 말라는 말씀을 보고 세상의 술로 생각하면서 술을 마시지 않습니다. 사실 그렇게 술을 마시지 않는 것도 역시 그 사람이 연약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것이 율법이 되어서 그 사람에게는 약점이 되고 있습니다.

 

강한 자입니다

이제 복음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었습니다. 그 술이 세상에서 말하는 그런 술이 아니라 율법이 술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술에 대해서 자유하고 있습니다. 아직 약점이 있는 사람이 교회 안에 들어왔는데 자기만 좋다고 해서 그의 앞에서 술을 마시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가 술이 세상에서 마시는 술이 아니라는 것을 아직 모르고 있는데 자기만 좋다고 해서 술을 마시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의 예입니다

실제 그런 일이 우리에게 있을 수 있습니다. 아직 연약한 자에게 있어서 술 마시는 일은 약점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나는 아무 거리낌이 없다고 하면서 나는 자유하다고 하면서 술을 아무렇지도 않게 마시고 있다면 그가 깨닫기도 전에 술을 마시고 있다면 그것은 자기를 기쁘게 하는 것이라고 말씀을 하면서 그렇게 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한일서2:20절을 보겠습니다. (389)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

 

우리 성도입니다

우리가 왜 강한 자입니까? 모든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강한 자라는 말씀입니다 안다는 것은 약점이 없다는 것이고 모른다는 것은 약점이 있다는 것이 됩니다.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감동입니다

우리 성도는 성령의 감동을 받음으로 해서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함을 받고 있어서 복음에 대해서 모든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구원을 받을 정도로 모든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약점이 있는 사람은 모르기 때문에 아직 연약하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모든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연약한 자는 약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모른다는 말씀과 같습니다. 아는 사람이 있고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세상은 안다고 해서 모르는 사람의 약점을 당당해 주지 않습니다. 도리어 자기만 아는 것으로 가지고 있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아는 것을 나 혼자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정말 복음이라는 것은 신비하게도 내가 알고 있으면 그것을 모르는 사람에게 가르쳐 주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실제적으로 우리 복음을 가지고 있는 성도는 아직 연약해서 약점이 있는 사람들에게 그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않습니다.

나만 안다고 해서 혼자 기뻐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아니 나 혼자 아는 것으로 기뻐하지 않고 있습니다. 반드시 우리 형제가 연약하고 약점이 있으면 그것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자기 좋을 대로만 하지 않고 형제도 좋게 하고 있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압니까?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었습니까? 그런데 어느 사람이 혼자만 그렇게 되기를 바라고 있느냐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그런 사람은 없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모를 일입니다. 아니 누군가는 매너리즘에 빠져서 자기가 하는 일을 귀찮아 할 수도 있습니다.

 

나 혼자만 구원을 받습니다.

실제 이럴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왜 그런가 하면 세상일에 치여서 그럴 수 있습니다. 우리 성도가 왜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가를 모르고 또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부탁하신 것을 잊고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나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자기를 기쁘게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자기만 기쁘고 형제의 연약함을 담당하지 않고 있다면 그는 문제가 있습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면 반대를 할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가 왜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고 또 주님이 우리에게 부탁하신 것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면 조금 더 깊이 생각을 해야 합니다.

 

복음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강한 자가 되었습니다. 물론 모든 사람이 이렇게 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마다 다르게 은사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당당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나 혼자만 구원을 받은 것으로 자기 혼자만 기뻐하고 있다면 그것은 분명히 문제가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입니다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됩니다 내가 은혜를 받았으면 그것에 대해서 일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물론 구원과 상관이 없을지라도 주님이 우리에게 부탁을 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복음을 알고 있는 성도는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해야 합니다.

 

그가 아직 복음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담당하지 않으려고 한다면 자기만 기쁘게 하는 사람이라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강한 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강한 자가 되었습니다. 그럼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인가 하면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해 주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마땅히

그렇게 하는 것이 이치로 보아 당연하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강한 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이제 연약한 자의 약점을 마땅히 담당해 주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해 주지 않으면 그는 자기를 기쁘게 하는 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우리 성도가 마땅히 해야 하는 일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세상의 이치로도 당연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기를 기쁘게 하는 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성도들에게 은혜를 주시고 그 은혜를 받은 것을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해 주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연약한 자가 누구입니까?

교회 안에서 아직 복음의 깊은 것을 통달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성령의 감동을 받지 못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을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담당해 주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교회 안에는 강한 자가 지극히 적기 때문입니다

 

적습니다.

어느 정도로 적은가 하면 바다 모래 같은데서 남은 자만이 강한 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적은 숫자가 강한 자인데 그가 자기를 기쁘게 하고 있다면 그는 주님의 은혜를 저버리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은혜를 입은 자입니다

그러면 은혜를 주신 자의 부탁을 들어야 합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알고 있다면 마땅히 교회 안에서 아직 모르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 아는 것을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이제 구원을 받은 우리 성도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가를 사도 바울이 가르쳐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성도입니다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해서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거하시고 있습니다. 그런 성도를 사도 바울이 강한 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강한 자는 자기 혼자 기뻐하지 않습니다.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전도의 미련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고 우리를 통해서 이 복음이 전파가 되게 하셨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은 우리가 복음을 전함으로 해서 연약한 자의 약점이 담당이 되어서 그가 구원을 받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하실 수도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귀한 일을 부탁하셨습니다.

 

나를 기쁘게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나 혼자만이 구원을 받은 것으로 끝을 내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 일로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할 수 있습니다. 정말 이 일이 우리에게서 이루어질 수 있도록 우리는 최선을 다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를 기쁘게 하는 자라고 사도 바울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로마서15:2절을 보겠습니다. (259)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찌니라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우리는 저마다 자기 이웃의 마음에 들게 행동하면서, 유익을 주고 덕을 세워야 합니다.”

 

성도입니다

구원을 받은 우리에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로마서15장은 구원을 받은 우리 성도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가르쳐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 옷 입은 것을 강한 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강한 자가 되었으면 연약한 자의 약점을 마땅히 담당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나를 기쁘게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니 나 혼자만이 복음의 기쁨을 누리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우리 성도는 이 세상에서 선지자입니다 정말 복음을 알고 있는 선지자가 얼마나 적은 가를 알고 있다면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제가 이제까지는 아무 것도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일을 하지 말라고 했고 종교 안에서 하고 있는 행위를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 강한 자가 아무 것도 안 하고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면 그것은 자기 혼자만을 기쁘게 하는 일이라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압니다.

복음을 모두가 전할 수 있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그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이제 로마서16장을 또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할 수 있는 성도들에게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라고 분명하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물론 모든 사람이 그렇게 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 강한 자는 어떤 모양으로든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는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직접 복음을 전할 수도 있고 때로는 복음을 전하는 자를 여러 가지 모양으로 도울 수도 있습니다.

 

아무 것도 안 합니까?

그 사람은 자기를 기쁘게 하는 사람입니다 우리 강한 성도는 자기만을 기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이런 일까지 정말 자세하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로마서15장은 우리 구원을 받은 성도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해서 가르쳐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우리 각 사람입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구원을 받은 우리 강한 자는 아주 적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구원을 받은 성도들이 많이 있다면 사도 바울은 굳이 로마서를 통해서 이 말씀을 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너무도 적은 숫자이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우리 강한 자들이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도입니다

이 시대를 보더라도 얼마나 적은 숫자입니까? 우리가 교회를 보고 있지만 사실 이 시대 강한 자라고 할 수 있는 성도들이 있는 교회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가 주변을 살펴보고 있고 또 여러 가지로 정보를 얻고 있지만 강한 자들이 있는 교회가 거의 없습니다.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은 성도들이 얼마나 적은가를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고기도 먹지 않고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는 사람들이 과연 이 시대 얼마나 될 것 같습니까? 그리스도편지에서 교제를 하고 있는 성도님들 제외하고는 거의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물론 그런 성도들이 있다면 얼마나 감사한 일이겠습니까?

 

그러나 없습니다.

없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을 통해서 우리 강한 자에게 부탁을 하고 있습니다. 아니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이라고 하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구원을 받은 성도 한명이 얼마나 소중하다는 것을 우리가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 한명으로 인하여 천하보다 더 귀한 성도가 또 탄생이 되고 있습니다.

 

저는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 말씀을 하기 전에 우리는 은혜를 입은 자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육체적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지만 그보다 더 소중한 일이 바로 이 일이라는 것을 늘 명심하고 있습니다.

 

나만 기뻐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물론 우리 성도들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이 복음을 전해서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싶지만 그들이 듣지 않고 있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럴지라도 우리는 이 일을 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 성도를 보고 사도 바울이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않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입니다

구원을 받은 성도입니다 우리 각 사람은 이웃을 기쁘게 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구원을 받은 성도가 얼마나 적으면 우리 각 사람은 이웃을 기쁘게 하라고 말씀을 하겠습니까? 하지만 이 시대는 이런 말씀을 보고 어떻게 하는 것이 기쁘게 하는 것인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10:33절을 보겠습니다. (275)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

 

우리 각 사람입니다

구원을 받은 우리 성도들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우리 성도들에게 이웃을 기쁘게 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정말 우리는 자기를 기쁘게 하기보다는 이웃을 기쁘게 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이웃을 기쁘게 하시기 바랍니다.

이런 말씀을 보고 사람들은 그저 막연하게 이웃을 기쁘게 하려하고 있습니다. 특히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자기가 기쁘지도 않은데 이웃을 기쁘게 하려고 외식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 말씀이 아니라 우리는 이미 기쁨이 넘치고 있는 자입니다

 

이웃을 기쁘게 합니다.

나는 기쁘지 않은데 이웃을 기쁘게 할 수 있습니까? 절대 안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성경에 이런 말씀들이 기록이 되어 있는 것을 보고 자기 이웃을 기쁘게 하려하고 있습니다. 그런 외식으로 자기는 여러 가지 상처를 받으면서도 그렇게 하고 있고 도리어 그런 것을 자랑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앞 절에서 자기를 기쁘게 하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영원 구원을 받아서 기쁨을 누리고 있는 성도입니다 그런 기쁨이 있는 성도이기 때문에 우리가 이웃을 기쁘게 할 수 있는 것이지 자기는 전혀 기쁘지도 않은데 이웃을 기쁘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구원입니다

반드시 구원을 받은 자만이 그 구원의 기쁨을 전할 수 있습니다. 구원을 받지 않은 사람은 아무리 자기가 인간적으로 기쁘다 해도 구원을 받은 기쁨을 이웃에게 전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 성도들에게 각 사람은 이웃을 기쁘게 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기쁨입니다.

그것은 잠시 누리는 기쁨입니다. 그런 것으로 기쁨을 누리려고 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아니 그런 기쁨은 잠시 누리다가 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어느 것으로 우리가 영원한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까? 이 세상에 있는 어느 것으로도 우리는 영원한 기쁨을 누릴 수 없고 그렇게 기쁨을 누릴 수 없다면 그것은 기쁨이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잠시 누리는 기쁨입니다.

그런 기쁨은 우리가 죽으면 그것으로 끝이 납니다. 아니 살아 있다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가장 기뻐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혼인을 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 혼인도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고 나면 기쁨이 사라진다는 것을 누구나 다 알고 있습니다.

 

예쁜 아내를 얻었습니까?

그리고 만족할 만한 신랑과 결혼을 했습니까? 어느 누구도 그것으로 기쁨을 영원히 누릴 수 없습니다. 잠시 누리는 기쁨에 불과합니다. 이 세상에서 어떤 일이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런 것을 기쁨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웃이 기뻐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능력이 있어서 그가 죽을 병에 들었는데 그것을 치유했다고 해서 그 사람이 기뻐하겠습니까? 물론 어느 정도까지는 기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시 또 다른 병이 들고 그 사람이 늙어 죽는다면 그 기쁨이라는 것은 사라지고 만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웃을 기쁘게 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말 그대로 기쁜 소식입니다 그 소식을 들으면 사람은 기뻐지게 되어 있습니다. 죽어야 하는 그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복음을 듣고 기뻐하게 되어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사람들은 복음을 듣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가 구원을 받을 수 없는 것을 담당하면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파를 하면 그들은 그 복음을 듣고 우리와 같이 구원을 받음으로 해서 기뻐할 수 있습니다.

 

이웃을 기쁘게 하는 일입니다

생명보다 더 기쁜 일이 어디 있습니까? 반드시 죽어야 하는 사람에게 생명을 준다면 그보다 더 기쁜 일이 어디 있습니까? 병이 들어서 자기가 어떻게 생명을 얻어야 하는 줄을 모르고 있는 이웃에게 복음을 전함으로 해서 그들이 듣고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면 그보다 더 기쁘게 하는 일은 없다고 믿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일을 해야 합니다.

내 이웃을 기쁘게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그들은 이 세상에 자기 육체로 기쁨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병이 들어서 자기가 죽어야 한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생명에 대해서도 도무지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서 구원을 받게 하는 일이 이웃을 기쁘게 하는 일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보다 더 기쁜 일이 어디 있습니까?

아직 이 복음을 모르는 사람은 이 기쁨을 누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강한 자가 복음을 전함으로 해서 그들이 복음을 듣고 병을 고침을 받아서 구원을 받는다면 그들은 기뻐서 뛰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는 이 일을 해야 한다고 사도 바울이 가르쳐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미 이 기쁨을 누리고 있는 성도입니다 이제 그런 성도는 자기를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웃의 약한 것을 담당함으로 해서 그 이웃이 구원을 받아 기뻐할 수 있게 해 주어야 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웃을 어떻게 기쁘게 해야 하는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아니 자기도 모르고 있습니다.

이 시대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 안에 있지만 이 복음의 기쁜 소식을 듣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복음이라고 기뻐한다고 하고 있지만 실상은 사도 바울이 하지 말라고 하는 고기를 먹고 있고 포도주를 마시면서 그것으로 기뻐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안타깝습니다.

고기를 먹고 있습니다. 그리고 포도주를 마시고 있습니다. 그것으로 자기들의 육체의 기쁨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런 것으로 기뻐하고 있는 그들이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서 육체적으로 기뻐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이 아무리 기뻐한다고 해도 실상은 이 세상에서 종교적으로 누리는 기쁨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의 기쁨입니다.

그리고 종교적인 기쁨입니다. 그런 것으로 기쁘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런 것 역시 지나고 나면 공허하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런 것을 말씀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은 우리 성도들에 기뻐하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웃에게 그 기쁨을 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으로 이웃에게 기쁨을 줄 수 있습니까? 우리가 찬양을 해서 그들을 기쁘게 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예배를 잘 드림으로 해서 이웃을 기쁘게 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물질이 많아서 이웃을 기쁘게 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그런 것을 하지 않기 때문에 기쁨을 주고 싶어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시대는 노래에 미쳐 있습니다.

노래가 얼마나 복음을 방해하고 있다는 것을 어느 누구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아니 노래 잘하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주류를 이루면서 그들의 노래로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려고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이 세상에서 노래를 잘하는 사람들을 초청을 해서 교회 안에서 노래를 부르게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성도입니다

육체적으로는 아무 것으로도 이웃을 기쁘게 할 수 없습니다. 사실 우리 예배에 그들이 참석을 해 보시기 바랍니다.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겹다는 느낌을 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 예배를 통해서 이웃을 기쁘게 하고 있지만 사람들이 이 영의 일을 모르기 때문에 기뻐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빌레몬서1:6절을 보겠습니다. (351)

이로써 네 믿음의 교제가 우리 가운데 있는 선을 알게 하고 그리스도께 미치도록 역사하느니라

 

선을 이루고

우리 인생입니다 시편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다 치우쳤으며 다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하나도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선에 대해서는 이 말씀이 기초가 되고 있습니다. 또한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내게는 선한 것이 하나도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기초입니다

그런 기초가 무너지면 모든 것이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복음 안에서 든든히 서 있을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런 기초가 든든히 서 있기 때문이라고 해도 틀린 말씀이 아닙니다. 늘 말씀을 드리지만 우리는 이런 기초 위에서 말씀을 알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말씀을 보고 마치 우리가 선을 행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더구나 로마서에서는 선을 이루라고 말씀을 하는데 선을 이룰 수 있는 것으로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이루다

사람이 바라던 것이나 어떤 결과를 성취하거나 힘들여 얻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사람이 무엇을 바라고 있습니까? 교회 안에 있는 우리가 무엇을 바라고 있습니다. 다른 것을 바라는 사람은 다 거짓에 속고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 성도는 오직 영생에 대해서 바라고 있다는 것을 성경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영생입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우리는 그 외에 다른 것을 바라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 있는 가라지들은 바라는 것들이 너무 많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바라는 것을 얻기 위해서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밤을 새워가면서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라는 것을 이루는 것을 믿음의 척도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바라는 것을 기도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어느 사람은 이루었습니다. 그러면 마치 그 사람이 믿음이 있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실상은 이 세상 샤머니즘에 빠져 있어서 무당과 같은 행위를 하고 있으면서도 자기들의 육체로 얻는 그것을 보면서 이루었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것으로 이루었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성도들에게 영생만 주시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외의 것을 가지고 이루려고 하고 있다면 그는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다르게 하나님을 믿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니 실상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선을 이루시기 바랍니다.

그것을 새번역에서는 유익을 주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선을 이루라고 하니까 자기가 선한 것을 이룰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선을 이루라는 것은 영생을 이루라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선하신 일을 다 이루셨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영생입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다 이루어 주셨습니다. 우리도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해서 이 선한 일이 우리에게 이루어져야 합니다. 아니 이제 우리 성도는 그것을 다 이루었습니다. 이제는 우리 이웃들에게서 선이 이루어 질 수 있게 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유익을 준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믿음의 교제입니다

이 교제를 통해서 우리 가운데 있는 선을 알게 하고 그리스도께 미치도록 역사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선을 알게 함으로 해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영으로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이웃이 선을 이룰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우리 이웃이 구원을 받을 수 있게 해야 한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도의 삶입니다.

우리는 정말 이렇게 살아가야 합니다. 나 혼자 구원을 받는 것으로 끝을 내서는 안 됩니다 반드시 내 이웃을 기쁘게 해서 그 역시도 우리가 받은 유익을 얻을 수 있게 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선을 이루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선을 알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에게 미치도록 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해서 그가 구원을 받을 수 있게 해야 한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군가 하면 바로 우리 성도라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는 이미 선하신 분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분이 하신 선하신 일을 믿음으로 우리가 구원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렇습니다.

그러면 우리 이웃에게도 이 유익을 주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내 이웃이 선을 이룰 수 있도록 그러니까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가 선하신 이를 믿어서 구원을 받기를 바라고 있다면 아니 이 세상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기를 원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내 이웃에게 그것이 이루어지게 해 주어야 한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선을 이룹니다.

선하신 이를 믿어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미치도록 합니다. 그것을 영생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 성도가 이웃에게 함으로 해서 그가 구원을 받고 기쁨을 누리게 하라고 우리에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정말 이 일을 위해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선하신 이를 믿는 사람이 없습니다.

 

유익을 얻는 사람이 없습니다.

아니 유익을 구하지도 않고 있습니다. 말로는 그렇다고 하는 그들이 실상을 보면 전혀 그렇지 않게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먼저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아야 하는데 이 시대는 모두가 고기를 먹고 있고 포도주도 마시고 있습니다.

 

영생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영생에 대해서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구원을 받은 성도가 이 세상을 살아갈 때에도 이 영생만을 생각하면서 살아가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을 얻었으면 이제 우리 이웃들에게 그것을 전파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한 시도 이 일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 세상은 자기를 기쁘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입은 자라는 것을 성경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은혜를 입은 자는 자기를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웃을 기쁘게 하면서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세상입니다

좋은 것이 있으면 자기 혼자서 기뻐합니다. 물론 곁에 있는 사람들과 기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기뻐하는 것도 자기와 잘 알고 있는 사람들과 기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복음을 가지고 있는 성도는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들에게도 기쁘게 하려하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4:29절을 보겠습니다. (314)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은혜를 입은 자입니다

이제 이웃을 위해서 살아가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 일에 대해서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정말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우리 은혜를 입은 성도는 이 세상에서 이 일을 위해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 이웃입니다

내 친척도 이웃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내 가족도 이웃이 될 수 있습니다. 또 생판 모르는 사람도 내 이웃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기뻐할 수 있게 해야 하고 또 그들이 바라는 대로 선을 이룰 수 있게 해야 하며 덕을 세우도록 해야 합니다.

 

어떻게 덕을 세웁니까?

그것을 에베소서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온갖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시대는 이 더러운 말이 교회 안에 가득합니다. 온갖 더러운 말을 하면서도 그들은 그 말이 도리어 고상하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더럽습니다.

무엇이 더럽습니까? 우리의 행위는 더럽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하고 있는 모든 행위가 다 더럽습니다. 그러면 그런 행위를 하라고 하는 모든 말이 더럽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기들이 하고 있는 말이 얼마나 더럽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들은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온갖 더러운 말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입니다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힘쓰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는 이것을 어떻게 해야 하는 줄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가라지들은 아무리 성경을 보아도 도무지 무슨 말씀인가를 모르고 성경과 거꾸로 살아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내 이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정말 아무 상관도 없는 우리를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셔서 구속의 일을 이루셨습니다. 그 일을 믿음으로 우리가 구원을 받았으면 이제 우리는 그 일을 내 이웃에게 전해야 하는 사명이 있다는 말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