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니라(요6:63.)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너희는 귀를 기울리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

성막에 대하여

제5강, 제사장의 옷

윤주만목사 2017. 1. 18. 06:32

출애굽기28:1-3절을 보겠습니다. (구 124쪽)

“너는 이스라엘 자손 중 네 형 아론과 그 아들들 곧 나답과 아비후와 엘르아살과 이다말을 그와 함께 네게로 나아오게 하여 나를 섬기는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하되 네 형 아론을 위하여 거룩한 옷을 지어서 영화롭고 아름답게 할찌니 너는 무릇 마음에 지혜 있는 자 곧 내가 지혜로운 영으로 채운 자들에게 말하여 아론의 옷을 지어 그를 거룩하게 하여 내게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하라”

 

대제사장의 옷

성막 안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 대제사장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기 때문에 성막론을 배우면서 우리는 대제사장의 옷에 대해서 알아야 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성막의 모든 기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지만 유일하게 사람 중에서 대제사장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습니다.

 

레위 자손입니다

그 중에서 모세의 형 아론을 하나님께서 대제사장으로 세우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대제사장은 당대에 한 명이고 그 사람이 죽으면 그 자손 중에서 대제사장을 세웠습니다. 성경에서도 아론의 자손으로 대대로 대제사장을 세우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제사장이 있고 대제사장이 있습니다.

아론의 자손들을 다 제사장으로 성막에서 제사를 하는 일 그리고 회막안에서 섬기는 일들을 했습니다. 대제사장이 하는 일과 일반 제사장들이 하는 일은 달랐습니다. 번제단에서 제사를 드리는 일은 일반 제사장들도 하는 일이었습니다. 제사장들은 번제단에서 제사를 드리는 일을 했고 또 회막안에서 섬기는 일을 했습니다.

 

대제사장은 다릅니다.

아론은 일반 제사를 하는 것이 아니고 회막 안에서 분향단을 섬기는 일을 했고 대제사장으로 일 년 일 차례 지성소에 들어가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사함을 받기 위해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것을 7월 10일 대 속죄일에 행했습니다.

 

이스라엘의 대제사장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보여주시고자 하는 예표입니다. 그가 행했던 것은 하늘의 모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막을 짓게 하시고 대제사장을 세워 제사제도를 율법으로 세우시고 또 대제사장으로 하여금 백성들의 죄를 사함을 받기 위해서 일 년 일 차례 지성소에 들어가 제사를 드리게 한 것은 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하실 일들을 예표로 보여 주신 것입니다

 

하늘의 생각을 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보았던 대제사장은 하늘의 있는 모형과 그림자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늘의 것을 보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그저 율법에 기록이 된 대로 대제사장을 세우고 그가 대 속죄일에 제사를 드림으로 해서 이스라엘 백성 모두가 사함을 받는 것으로 믿었습니다.

 

그림자입니다

그것을 보고 실체를 바라볼 수 있는 지혜를 구해야 하는데 이스라엘은 전혀 그렇게 하지를 않았습니다. 일 년 일 차례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가 제사를 드리는 것만을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일 년에 한 번씩 제사를 드리게 한 것은 그들이 잊지 말라고 한 것이고 그리고 이 지구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인생들에게 있어 시간 개념이 그렇기 때문에 대제사장을 세워서 제사를 드리게 하신 것입니다

 

늘 말씀을 드립니다.

하나님의 시간과 우리의 시간은 다릅니다. 우리는 매년 같은 날이 오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사람들은 그 시간에 너무 익숙해 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시간을 모르고 그저 이 세상의 시간을 생각하면서 살았던 이스라엘에게는 하늘의 일을 감히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아론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죽자 그 아들 엘르아살이 대제사장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엘르아살이 죽자 또 그 아들이 대제사장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이 세상에는 대제사장이 죽으면 그 아들이 대제사장의 직분을 행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와서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에 이미 아론이 죽고 그 아들 엘르아살이 대제사장이 되어 가나안에 들어갔습니다.

 

늘 대제사장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죽으면 새로운 대제사장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으로 정해 놓으셨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거기에 너무도 익숙해 있습니다. 이 세상에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지 못하고 그저 자기들의 눈으로 보고 있는 대제사장만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가 제사를 드림으로 해서 이스라엘이 거룩한 백성이 되었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대제사장에 대해서는 다 말씀을 드릴 수 없습니다.

성막론의 한 시간을 통해서 대제사장에 대해서 말씀을 드린다는 것은 시간이 짧습니다. 오늘은 대제사장이 하는 일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대제사장의 옷을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의미가 무엇인가를 깨닫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스라엘에게는 율법에 따라 대제사장이 있었습니다.

 

히브리서4:14절을 보겠습니다. (신 356쪽)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이스라엘에게 대제사장이 있었습니다.

대제사장이 반드시 대속죄일에 이스라엘 전체 백성을 위해서 속죄하는 제사를 드림으로 해서 하나님께서 그 제사를 받으시면 이스라엘 백성 모두가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갔습니다. 그것은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예표로 가르쳐 주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유다지파입니다

율법의 예로는 대제사장이 될 수 없습니다. 성경에서도 그것을 우리에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율법은 하늘의 모형과 그림자입니다. 이스라엘의 레위 자손 중에서 대제사장이 있었던 것은 하늘의 모형이라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큰 대제사장이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3가지 직임을 가지고 오셨습니다.

선지자, 왕, 대제사장입니다. 물론 이 세 가지는 다 중요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 있다면 바로 이 대제사장의 직임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만약에 주님께서 대제사장이 되지 않으신다면 우리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대제사장이 하는 일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전체 백성의 죄를 깨끗하게 하는 제사를 드림으로 해서 그 제사를 하나님께서 받으시면 이스라엘은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갔습니다. 백성들의 죄를 일 년 일 차례 대제사장이 제사를 드림으로 해서 거룩한 백성이 되었습니다. 대제사장이 하는 일이 바로 이것입니다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가려면 반드시 대제사장이 제사를 드려야 했습니다.

 

율법에 따르는 대제사장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이렇게 대제사장이 있어서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표였습니다. 이스라엘에 대제사장을 세우신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셔서 단번에 우리를 위해서 휘장 안으로 들어가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대제사장입니다

그들은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휘장 안으로 들어갑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 있던 대제사장들은 반드시 다시 나왔습니다. 휘장 안으로 들어가서 증거궤 앞에다 가지고 들어간 피를 쏟고 하나님께서 구했습니다. 그리고 제사를 마치면 반드시 다시 나왔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영원히 들어가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늘에 올라 가셨습니다.

이 땅에 대제사장들은 이 세상에서 제사를 드리다 죽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육체를 단번에 드리시고 부활 승천하셔서 휘장 안으로 영원히 들어가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대제사장과 예수 그리스도의 차이입니다 이스라엘의 대제사장들이 휘장 안으로 들어가서 제사를 드렸던 것은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단번 속죄 제물이 되시고 부활 승천 하셔서 하늘에 있는 보좌로 영원히 들어가시는 것을 예표로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믿는 도리입니다.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대제사장이 무엇을 하는 줄을 잘 모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휘장 안으로 영원히 들어가셨다는 의미를 잘 모르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신 것이며 우리도 주님이 가신 길을 따라 영원히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대제사장입니다

이스라엘에는 율법에 따르는 대제사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율법에 따르는 대제사장은 일 년 일 차례 지성소를 들어갔다 나왔습니다. 그것으로는 우리가 거룩한 백성이 될 수 없다는 것을 히브리서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오직 주님께서 우리의 대제사장이 되셔서 휘장 안으로 들어가심으로 우리가 담력을 얻어 우리도 역시 그 산 길을 따라 들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십니다.

그것은 율법에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에 따라서는 절대로 대제사장이 되실 수 없지만 우리를 위해서 대제사장으로 로서 우리가 휘장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율법을 따르면 그 휘장 안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오직 대제사장만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그 길을 열어 주셔서 우리가 하나님의 보자 앞으로 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왜 못 들어갑니까?

휘장 안으로 들어가면 법궤가 있기 때문입니다 죄가 있는 사람은 휘장 안으로 들어가면 다 죽습니다. 법에 의해서 모두가 죽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단번 속죄로 이 세상 죄를 지고 휘장 안으로 들어가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한 백성이 되어서 하나님 보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담력을 얻었습니다.

 

제사장의 옷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있어 의에 옷을 상징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누구신가를 가르쳐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이 옷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어떤 옷을 입으셨는가를 아론의 옷을 통해서 깨달아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습니다. 구약의 그림자를 알지 못하면 절대로 믿을 수 없습니다.

 

구약을 너무 쉽게 보고 있습니다.

사실 성경을 해석하는데 있어 구약이 더 어렵습니다. 그래도 신약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깨달을 수 있지만 구약은 정말 성령의 감동을 받지 않고는 율법의 문자에서 그림자를 걷어내고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믿지를 못 했습니다.

 

출애굽기28:3절을 보겠습니다. (구 124쪽)

“너는 무릇 마음에 지혜 있는 자 곧 내가 지혜로운 영으로 채운 자들에게 말하여 아론의 옷을 지어 그를 거룩하게 하여 내게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하라”

 

대제사장의 옷입니다

그것을 누가 지었는가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너는 무릇 마음에 지혜 있는 가 곧 내가 지혜로운 영으로 채운 자들에게 아론의 옷을 지어 그를 거룩하게 하여 내게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대제사장의 옷을 누가 지었습니까?

 

솜씨가 있는 자가 아닙니다.

보통 우리가 옷을 지을 때 누가 짓습니까? 그 옷을 지을 수 있는 기능이 있는 자가 짓고 있습니다. 요즘은 유능한 디자이너들이 디자인을 해서 기계로 거의 옷을 짓고 있습니다. 물론 사람의 손이 들어가고 있지만 거의 디자인에 의해서 옷을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마음에 지혜가 있는 자에게 아론을 위해서 옷을 지으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지혜를 누가 주셨습니까?

하나님께서 지혜로운 영으로 채워 주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기능이 있다고 해서 지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아론의 옷은 하나님께서 지혜로운 영을 채워 준 자가 지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지혜로운 영을 채운 자가 지었는가 하면 이 옷은 그냥 옷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옷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지으라고 다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지혜가 없어도 기능만 있다면 그대로 지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내가 지혜로운 영으로 채운 자들에게 이 옷을 지으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의 대제사장으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지으라는 말씀입니다 모르고 옷을 지어 보아야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늘 말씀을 드립니다.

겉으로 보이는 행위가 아닙니다. 그리고 겉으로 보이는 것을 보아서는 안 됩니다. 이스라엘은 아론의 옷을 보았지 예수 그리스도를 못 보았습니다. 지금 이 시대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겉으로 보이는 것을 보고 지혜 있다고 해서는 절대로 아닙니다.

 

흉내는 낼 수 있습니다.

아니 율법에 기록된 대로 똑같이는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옷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없다면 그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아론이 율법에 기록이 되어 있는 대로 옷을 입는다 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반드시 하나님께서 지혜로운 영으로 채워준 사람이 지어서 그 옷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고린도전서1:24절을 보겠습니다. (신 264쪽)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아론의 옷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이고 지혜입니다. 그저 율법에 따라 지은 옷이 아니라 그 안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있고 하나님의 지혜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아론이 입은 그 옷은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지혜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은 그저 율법에 따라 자기들의 눈에 보이는 것을 보고 지혜가 있다고 착각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가 없는 사람은 아무리 성경을 많이 본다 해도 그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지혜라는 것을 한 시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대제사장인 아론이 입은 옷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서 하실 일들이 그대로 담겨져 있습니다.

 

눈으로 보려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을 사람의 지혜로 보려고 하다가는 다 망하고 맙니다. 반드시 하나님께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물론 이 시대 목사들이 다 지혜를 구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설교를 들어보면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지가 않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에 지혜를 채워 주시지 않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전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지혜로운 영으로 채운 자들이 옷을 지었습니다.

이 말씀은 이 시대 아론의 옷을 보고 하나님의 지혜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깨달을 수 있는 사람만이 하나님께서 지혜로운 영으로 채워 주신 성도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지혜를 채워 주시지 않으면 성경에서 아론의 옷을 보고도 도무지 예수 그리스도를 볼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안 보입니다

그저 문자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더구나 대제사장의 옷은 지금 이 시대는 없어졌습니다. 이스라엘도 성전이 없어지다 보니까 대제장의 옷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습니다. 성막 안에서 하나님의 직분을 행하기 위해서 대제사장에게 이 옷을 지어서 입혔는데 제사 제도가 다 없어지다 보니까 굳이 대제사장의 옷에 대해서 생각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옷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그런데도 이 시대는 이 옷에 대해서 전혀 말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혜로운 영을 채운 자들이 지은 이 옷은 이 시대도 하나님께서 지혜로운 영으로 채워준 성도들만이 이 옷을 보고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에서 다른 것 찾으려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우리가 지혜가 있다 하면 성경을 보고 그 문자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도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신 성도들을 통해서 성경의 문자를 보고 예수 그리스도를 알 수 있게 역사를 해 주시고 있습니다. 그런 성도가 되어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고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무조건 듣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들어야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말씀을 많이 듣는다 해서 믿어지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들어야 합니다. 솔직히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들어도 구원을 못 받는 사람들이 있는데 듣지를 못하면 절대로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출애굽기28:4절을 보겠습니다. (구 124쪽)

“그들의 지을 옷은 이러하니 곧 흉패와 에봇과 겉옷과 반포 속옷과 관과 띠라 그들이 네 형 아론과 그 아들들을 위하여 거룩한 옷을 지어 아론으로 내게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할찌며”

 

그들이 지을 옷입니다.

흉패를 지으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제사장의 가슴에 붙이는 것입니다 아론의 가슴에 에봇을 짜는 방법으로 만들어서 열두 보석에 이스라엘의 이름을 새겼습니다. 이 흉패는 네모반듯하게 만들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28:15-16절을 보겠습니다. (구 125쪽)

“너는 판결 흉패를 에봇 짜는 법으로 금실과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늘게 꼰 베실로 공교히 짜서 만들되 장광이 한 뼘씩 두 겹으로 네모반듯하게 하고”

 

에봇을 짜는 법으로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장광이 한 뼘씩 두 겹으로 해서 네모반듯하게 만들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색에 대해서는 성막 문을 말씀드릴 때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왕으로, 종으로, 사람으로, 하나님으로 오셨다는 것을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금실이 더 있습니다.

네 가지 색에 대해서는 이미 말씀을 드렸기 때문에 굳이 여기서 또 말씀을 드릴 필요성이 없습니다. 성막 문에는 4가지 색으로 만들라고 하셨는데 여기에는 금실이 더 들어가 있습니다. 문과 대제사장의 옷과는 다르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문은 들어가는 곳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왕으로, 종으로, 사람으로, 하나님으로 오셨다는 것을 믿고 들어가면 됩니다. 그 문으로는 누구나 들어갈 수 있습니다. 내가 죄를 짓고 번제단에서 제사를 드림으로 해서 죄사함을 받기 위해서는 죄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백성은 제물을 가지고 들어갔습니다. 그것은 문의 기능입니다

 

이제는 옷입니다.

그냥 옷이 아니라 대제사장의 옷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옷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 옷에 흉패를 짜서 붙이고 있습니다. 그 흉패 위에 이스라엘의 열두 아들을 상징하는 이름들을 새겼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열두 아들을 구원해 주시겠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의 아들들의 이름을 가슴에 흉패로 달고 지성소에 들어감으로 해서 하나님께서 그 열두 지파에 속한 사람들을 구원해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금실입니다

금은 무엇을 상징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을 4가지 색으로 비유로 해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 네 가지 색에 금실을 더하고 있습니다. 이 금실은 생명을 상징하는 색입니다 주님께서 이 네 가지 색으로 오셔서 우리를 위해서 일하셨습니다.

 

왕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종으로 오셨습니다. 사람으로 오셨습니다. 또 하나님으로 오셨습니다. 그렇게 오신 이유는 우리를 구원해 주시기 위해서 왕으로, 종으로, 사람으로, 하나님으로 오셨다는 말씀입니다 이 네 가지 색으로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지만 그 결과는 무엇인가 하면 바로 구원입니다 이 네 가지 색을 보고도 구원을 받지 못한다면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입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금이 생명이라는 것을 달란트의 비유에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대제사장의 옷에는 그래서 생명을 상징하는 금 실로 흉패와 에봇을 짜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대제사장이십니다. 그가 우리의 대제사장이 되신 것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것을 보여 주시고 있습니다.

대제사장이 이 생명을 상징하는 금실로 짠 흉패를 가슴에 붙이고 휘장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것은 생명이 없이는 하나님이 계신 곳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생명의 달란트를 나눠 주셨습니다.

 

이 달란트는 누구 것입니까?

예수님의 것입니다 마태복음에서 예수님께서 그것을 모든 사람들에게 나눠 주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생명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판결 흉패를 에봇의 형태로 짜는데 네모반듯하게 지으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대제사장에게 이 생명이 있다는 것을 흉패를 통해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흉패에 열두 아들의 이름을 보석으로 매고 있습니다.

그것 역시 금으로 해서 흉패에 붙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모두가 생명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제사장의 옷은 그냥 옷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가 있는 옷으로 우리에게 생명을 보여 주시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율법에 따르는 대로 이 옷을 지어 입고 겉으로 보이는 거룩함을 보았을 뿐입니다.

 

이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안에 언제부터 가운이 등장을 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이 가운이 왜 필요합니까? 저 역시도 목사 안수를 받고 또 안수를 할 때 이 가운을 입고 있지만 어쩔 수 없이 행하고 있습니다. 다만 세상이 요구하는 라이선스가 필요해서 하고 있을 뿐이지 이 가운을 입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씀을 드립니다.

 

왜 가운이 필요합니까?

자기들이 무슨 대제사장이나 되는 것 같이 모양을 나타나려 하고 있습니다. 그런 것으로 얼마나 진리가 가려지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그저 모양으로 나타내고 싶어 하고 그런 모양을 보면서 사람들은 인정을 하고 있는 것이 이 시대의 모습니다. 천주교가 가운을 입으니까 교회도 언제부터 가운이 등장을 했습니다.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가운이 필요 없습니다. 신약 성경에서 어느 사도들이 가운을 입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이런 행위들이 기독교가 종교가 되었다는 것을 스스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가운을 입는 것을 좋아하고 있고 너무도 당연시하고 있습니다. 종교인들은 그렇게 자기들의 외모로 나타나는 거룩함을 어떻게 하든지 보이려 하고 있습니다.

 

박사 학위까지 받습니다.

신학에 무슨 박사가 있습니까? 참으로 한심한 사람들입니다 박사라고 하는 그들에게 진리가 있으면 절대로 그런 세속을 교회 안에 들어오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박사 학위를 받은 목사는 그 가운에다가 박사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세 줄을 새겨서 입고 있습니다.

 

그런 옷이 왜 필요합니까?

자기가 목사라는 것을 그리고 목사이면서 박사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거룩함을 보여주기 위해서 가운을 입고 있습니다. 대제사장의 옷과 그런 가운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가운을 안 입어도 내 안에 생명이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생명도 없는 자들이 그렇게 가운을 입고 자기가 마치 제사장인 것처럼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

 

아론의 옷에 금실로 흉패를 에봇을 짜는 법으로 지었습니다.

그리고 에봇도 역시 금실이 들어갔습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대제사장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네 가지 색으로 사역을 하시고 그 일로 하여금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다는 뜻입니다. 이 생명에 대해서는 모르고 그저 사람들은 겉으로 들어나는 것을 보이기 위해서 가운을 입고 있습니다.

 

에베소서6:14절을 보겠습니다. (신 316쪽)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아론의 옷에 흉패를 붙였습니다.

그것은 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의를 주시고 있습니다. 신약에 와서는 성도들에게 의의 흉배를 붙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의의 흉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가슴에 붙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의가 우리 가슴에 있어야 사단이 어떤 공격을 해도 우리가 믿음으로 이길 수 있습니다.

 

의로워야 구원을 받습니다.

대제사장의 흉패를 가슴에 붙였는데 그곳에는 이스라엘 열두 아들의 이름이 새겨진 보석이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의가 어디서 오는가 하면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옵니다.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의를 상징하는 흉패를 가슴에 붙이게 하셨습니다.

 

로마서3:21절을 보겠습니다. (신 243쪽)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이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의입니다

그것은 율법을 잘 지켜야 의롭다고 합니다. 사실 이 의 문제가 해결이 안 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지금 이 시대도 역시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이 의를 알고 나면 율법을 지키지 않을 수 있는데도 교회 안에 있으면서도 율법 외에 나타난 하나님의 한 의를 모르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흉패입니다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율법 외에 나타난 하나님의 한 의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 대제사장의 옷을 보면서도 이 흉패가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도 이 의를 모르다 보니까 교회가 점점 더 율법주의로 빠지고 있으면서도 전혀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습니다.

그것은 이미 구약의 대제사장의 옷을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대제사장의 가슴에 붙어 있는 흉패가 열두 아들들에게 의를 주고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지만 이스라엘은 제사에만 열심을 냈고 하나님의 지혜를 너무도 몰랐습니다.

 

하나님께서 지혜로운 영으로 채운 자들이 이 옷을 지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가 있는 성도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난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율법 외에 나타난 한 의입니다 이 세상의 이성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의입니다.

 

세상의 의가 무엇입니까?

율법을 잘 지키는 것을 의라고 말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율법 외에 한 의가 나타나 우리에게 생명을 주실 것을 아론의 옷을 통해서 보여 주시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의를 믿지를 않고 자기들이 의로워지려고 아직까지도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사실 이 율법 외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시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의가 무엇입니까?

율법으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의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의가 된다는 것을 대제사장의 흉패를 통해서 가르쳐 주고 있지만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의입니다.

우리가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의입니다. 이 의가 여러분에게 없다면 절대로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의에 대해서 너무도 모르고 있습니다. 아니 지식으로는 알고 있지만 율법을 함께 지키고 있습니다. 율법 외에 한 의가 나타났으면 우리는 이제 율법을 버리고 오직 이 의를 얻기에 힘써야 합니다.

 

사도바울이 무엇이라고 합니까?

내가 그리스도의 의를 얻기 위해서 흠 없는 율법의 의를 배설물과 같이 버렸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의 의를 배설물과 같이 버리는 성도만이 이 의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니 이 의에 대해서 믿을 수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다 지키면 뭐합니까?

그 율법으로는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의를 얻을 수 없다고 성경이 정의를 내려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율법을 하나도 지키지 못했을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믿으면 그 사람은 천국에 갑니다. 그럼에도 이 시대는 자기에게 어떤 의가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지금 교회는 이스라엘 못지않게 율법주의에 빠져 있으면서도 그것을 믿음으로 포장을 해서 교인들을 미혹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 배설물과 같이 버리시기 바랍니다.

그런 성도만이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믿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아무리 지식적으로 알고 있다 해도 율법을 버리지 않는 사람에게는 이 의가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성도는 율법 외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믿어야 합니다. 그것을 대제사장이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 그 의로 우리가 구원을 얻습니다.

 

율법과 율법 외에 나타난 하나님의 한 의는 전혀 다릅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의 의는 하나가 나타나면 하나는 반드시 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아니 사단이 아주 교묘하게 미혹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도 잘 믿고 율법도 잘 지키는 것이 좋은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이성으로는 분명히 그것이 좋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이 세상의 이성에 빠져 결국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사라지게 만들고 있습니다.

 

반드시입니다

한 가지는 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이 둘을 함께 취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서 흠 없는 율법의 의를 배설물과 같이 버렸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오히려 진노에 빠지게 만들고 있는 율법의 의를 따라가고 있습니다.

 

출애굽기28:6절을 보겠습니다. (구 124쪽)

“그들이 금실과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늘게 꼰 베실로 공교히 짜서 에봇을 짓되”

 

에봇을 지으라고 말씀을 합니다.

이 에봇은 금실과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늘게 꼰 베실로 공교히 짜서 지으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흉패를 붙이던 것과 마찬가지라고 보면 맞습니다. 대제사장의 옷은 다 이렇게 구원을 상징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조끼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조끼가 아니라 어깨부터 끈으로 해서 달아 내려서 판결 흉패를 거기에 붙이고 그것이 가슴아래 치마와 같이 내려서 엉덩이 아래를 가리는 것입니다. 조끼인데 우리가 생각하는 조끼가 아니라 팔이 없는 조끼로서 그 팔이 있는 부분은 끈으로만 어깨로부터 내리고 판결 흉패 아래에서 엉덩이 아래까지를 가리는 옷입니다


출애굽기28:12절을 보겠습니다. (구 125쪽)

“그 두 보석을 에봇 두 견대에 붙여 이스라엘 아들들의 기념 보석을 삼되 아론이 여호와 앞에서 그들의 이름을 그 두 어깨에 메어서 기념이 되게 할지며”

 

에봇에는 붙어 있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두 견대를 붙여 이스라엘 아들들의 기념 보석으로 삼으로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호마노 두 개를 취해서 양 어깨에 두 견대를 붙이는데 두 호마노에 이스라엘 열두 아들들의 이름을 새기게 하셨습니다. 아론이 여호와 앞에서 그들의 이름을 그 두 어깨에 메어서 기념이 되게 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을 새긴 기념 보석을 어깨에 메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그의 어깨로 사단의 모든 정사와 권세를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 하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승리 하시는 것을 예표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어깨에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을 두 견대에 메게 하신 것은 십자가에서 승리하시는 것을 보여 주시고 있습니다.

 

승리를 상징합니다.

에봇 두 견대에 붙여 이스라엘 아들들의 기념 보석을 삼으신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정사와 권세에서 승리하심으로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는 것을 보여주시고 있습니다. 대제사장의 옷은 모두가 우리의 구원을 상징하는 것을 보여 주시고 있습니다.

 

기념이 무엇입니까?

승리에 대한 기념입니다 전쟁에서 진 자는 기념할 수 없습니다. 반드시 승리한 자만이 기념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를 어깨에 지시고 사단의 정사와 권세에서 승리 하셨다는 것을 예표로 보여 주시고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도 전쟁에서 승리를 한 사람들은 가슴에 훈장을 달든지 어깨에 이렇게 견대를 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오셔서 승리 하셨습니다.

사단과의 싸움에서 이기시고 이스라엘의 열두 아들들을 구원해 주셨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은 이 시대 우리를 거스리고 대적을 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십자가에 못 박고 정사와 권세에서 승리하시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어깨에 메셨습니다. 승리의 기념으로 우리를 어깨에 메셨다는 것을 보여 주시고 있습니다.

 

승리의 기념입니다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승리의 기념입니다 지금 이 시대 우리 영적인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승리의 기념이라는 것을 에봇을 통해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승리를 하심으로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구원을 얻는 다는 것을 기념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기는 자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이기는 자에게 내가 흰 돌을 주시겠다고 하면서 그 돌에 이름을 기록이 되어 있는데 그것을 받는 자밖에는 알 수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호마노는 물론 줄무늬가 되어 있는 보석이지만 호마노라고 할 때는 흰색 바탕에 줄무늬가 되어 있는 돌이라고 합니다. 홍색바탕에 줄이 있으면 홍마노라고 합니다.

 

에봇은 가슴의 흉패와 같습니다.

청색, 홍색, 자색, 고운 베실에다가 금실로 짜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미 흉패에서 이것에 대한 의미는 다 말씀을 드렸기 때문에 에봇의 견대에 호마노 둘에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을 새겨 어께에 메어 기념 되게 하라는 그 의미를 알아보았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정사와 권세에서 승리하셨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고 주님께서 율법의 모든 짐을 어깨에 지심으로 우리가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시고 있습니다.

 

겉옷입니다.

이사야61:10절을 보겠습니다. (구 1043쪽)

“내가 여호와로 인하여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즐거워하리니 이는 그가 구원의 옷으로 내게 입히시며 의의 겉옷으로 내게 더하심이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물로 단장함 같게 하셨음이라”

 

구원의 옷입니다.

의의 겉옷으로 내게 더하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구원의 옷을 입혀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아론의 겉옷은 구원의 옷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우리 영혼이 구원을 얻는 것을 옷을 입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구원을 얻을 우리에게 입혀 주시고 있습니다.

 

이 시대 이 옷을 안 입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반드시 주님이 입혀 주시는 의에 겉옷을 입어야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 들어와 있으면서도 이 구원의 겉옷을 입지를 않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대제사장을 통해서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구원의 겉옷을 입혀 주신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지만 이 시대는 안 입고 있습니다.

 

혼인 잔치의 비유입니다

이스라엘을 청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혼인 잔체에 참여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사거리로 나가서 혼인 잔치의 자리를 채우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이방인들이 혼인 잔치에 참여를 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예복이 없는 우리 이방인들을 위해서 예복을 미리 준비를 하셨습니다.

 

하지만 어떻습니까?

예복을 입지 않았습니다. 지금 이 시대도 예복을 입지를 않는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한 사람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그 한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겉옷을 입지 않은 모든 사람의 대표라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청함을 받은 자는 많으나 택함을 입은 자는 적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왜 적습니까?

안 입기 때문입니다 그 옷을 입는 것이 어려워서가 아닙니다. 혼인 잔치에 참여를 한 모든 사람에게 거저 주고 있지만 사람들은 교회 안에 들어와서 그 거저 주는 옷을 입기를 거절을 하고 있고 자기들의 율법의 의에 옷을 입고 있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옷입니다

그것은 내가 일해서 입을 수 있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천국을 내가 일해서 갈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이 세상의 이성적인 생각입니다. 그것은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천국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천국은 우리가 일을 해서는 절대로 못 갑니다 그래서 겉옷을 거저 주고 있지만 사람들은 그 겉옷을 입기를 거절하고 있습니다.

 

적습니다.

어느 정도 적은 가를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적다고 했으니까 적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어느 정도로 적은 가를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가 다니고 있는 교회가 정통이라는 것을 생각하고 그 정통 안에 있으면 구원을 받을 것이라 착각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안 입습니다.

지금 이 시대도 이 구원의 겉옷을 입혀 주시려고 하지만 사람들이 스스로 입지를 않고 있습니다. 이 겉옷은 우리가 거저 입지를 않으면 그 어떤 방법으로도 입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거저 주시는 방법으로 우리에게 구원의 겉옷을 입혀 주시려고 하고 있지만 사람들이 안 입고 있습니다.

 

그가 구원의 옷으로 내게 입히시며

하나님께서 내게 구원의 옷을 입혀 주시고 있습니다. 나는 가만히 있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에게 옷을 입혀 줄 때 어린 아이는 가만히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자기가 입겠다고 하면 부모가 옷을 입힐 수가 없습니다. 다 아이를 키워 보셔서 알겠지만 아주 어릴 때는 가만히 있는 것이 도와주는 것인데도 자기가 입겠다고 하면서 옷을 오히려 못 입고 있습니다.

 

구원은 주시는 것입니다

내가 얻으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 우리가 복음에 참여를 하고 있는 것도 주님이 우리 마음을 감동해 주셨기 때문이지 우리가 얻는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절대로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입혀 주시면 나는 가만히 있으면 됩니다.

 

그래서 은혜입니다

그런데 이 은혜를, 은혜로 받아들이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내가 은혜를 받은 자로서 살아가는 것은 그 다음의 일입니다 먼저 내가 은혜를 받고 나서 그 다음의 일이지 은혜도 받지 못한 사람이 은혜를 받은 자로 살아가겠다고 하다가 결국에는 이 구원의 겉옷을 입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은혜 받은 자로 살겠다고 하면서 율법을 지키는 그들이 바로 겉옷을 안 입겠다고 거절을 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겉옷을 먼저 입으시기 바랍니다.

그 다음에 은혜 받은 자로 살아가도 늦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겉옷도 입기 전에 은혜 받은 자로 살겠다고 하면서 마치 부모가 옷을 입혀 주려고 하면 어린 아이가 뿌리치는 것과 같이 행동을 하면서 그것을 잘 하는 일이라고 칭찬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막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아야 합니다.

대제사장의 옷은 주님께서 누구신가를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아론의 옷을 보고도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면 그는 하나님께서 채워 주시는 영이 없고 지혜가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지만 성경을 보고도 도무지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로마서13:12절을 보겠습니다. (신 257쪽)

“밤이 깊고 낮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주님은 빛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어두움이 무엇입니까? 율법의 일을 벗어 버리고 이제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의에 옷을 입자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밝히 드러내셨지만 역시 사람들은 율법의 일을 벗어버리지를 못하고 어두움에 거하고 있습니다.

 

지난번에도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 세상의 상식으로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에서는 빛과 어두움이 더해지면 빛이 되지만 성경은 그것이 아니라 어두움이 된다는 것을 말씀을 드렸습니다. 율법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을 함께 하고 있으면 그것이 빛이 되는 것이 아니라 어두움이 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 문제 때문에 구원의 겉옷을 입지를 못하고 있는데도 자기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며 주여 주여 하는 것으로 마치 구원의 옷을 입은 것으로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오직 예수입니다

구원의 옷은 그 옷밖에는 없습니다. 제가 늘 말씀을 드리지만 율법도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아직까지 온전히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받은 사람이 없고 주님이 오실 때까지도 없다는 것을 성경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자기가 무슨 옷을 입어야 하는 줄을 모르고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구원의 옷을 입으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우리의 대제사장이 되신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대제사장이 입은 옷을 통해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어떻게 구원의 옷을 입는가를 보여주셨습니다. 그 옷을 보고도 안 믿고 있습니다. 제가 아무리 강조를 해도 설교를 그렇게 많이 보고도 도무지 믿지를 못하고 교회 안에서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7:13절을 보겠습니다. (신 406쪽)

“장로 중에 하나가 응답하여 내게 이르되 이 흰 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뇨”

 

하늘의 일입니다

정말로 오해를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문자로 구원의 옷이라고 하니까 정말 흰 옷을 입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늘의 일은 제가 늘 말씀을 드리지만 우리 인생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비유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입니다.

그것을 진짜로 흰 옷을 입은 것으로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론이 입은 대제사장의 옷도 하늘의 모형과 그림자를 보고 짓도록 하셨습니다. 하늘의 모형과 그림자라는 것을 한시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은 그 말씀을 잊어버리고 성경을 보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참으로 이상한 일들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교회 안에서 그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구원을 받은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흰 옷을 입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특히 재림을 기다린다고 하는 사람들이 진짜로 흰 옷을 입고 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하늘의 일을 왜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는지 이해가 안 됩니다.

 

진짜 흰 옷을 입은 자들입니까?

구원을 받은 성도들이 천국에 들어갈 때 진짜 요한계시록의 말씀과 같이 흰 옷을 입고 들어갑니까? 그것은 부활에 대해서 너무도 무지한 사람들의 생각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부활에 대해서 설교를 드렸지만 하늘의 일은 우리가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게 말씀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옷이 아닙니다.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게 옷입니다. 그것을 이스라엘에게 대제사장의 옷을 통해서 보여주시고 있습니다. 하늘의 모형과 그림자로 이스라엘에게 보여 진 것이 대제사장의 옷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의 영으로 채워서 지혜를 주신 자들이 지었습니다.

 

부활에 대해서 바로 이해를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 인생의 생각을 가지고 마음대로 상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구원의 겉옷이라고 하니까 진짜 어떤 옷을 입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쉽게 알 수 있는 것이 바로 에덴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기 전에는 아무 것도 입지를 않았습니다. 그러나 전혀 부끄러워하지를 않았습니다.

 

구원의 겉옷입니다

이 옷을 흰 옷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마치 이스라엘이 대제사장의 옷을 보고 거룩하다고 생각했던 것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 옷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해야 하는데 그저 대제사장의 거룩한 옷이라고 생각을 하는 이스라엘과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갈라디아서3:27절을 보겠습니다. (신 306쪽)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입었느니라”

 

사람의 표현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을 사람의 이성으로 이해를 시키려다 보니까 구원의 옷으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진짜 옷을 입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마치 우리가 흰 옷을 입는 것과 같이 부활의 성도는 깨끗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씀입니다

 

구원을 상징하는 언어입니다

다른 말로는 우리가 이해를 할 수 없다 보니까 옷으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옷으로 표현을 하다 보니까 입는 것으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육의 일이 아니라 영의 일이라는 것을 늘 기억하고 있어야 하고 성도는 영의 일에 대해서 생각을 해야 합니다. 성경을 문자 그대로 보는 것은 스스로 사망의 길로 간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고린도후서5:2-4절을 보겠습니다. (신 290쪽)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 진 것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

 

하늘로부터 오는 처소를 덧입고자 함이라고 말씀합니다.

잘 이해를 하시기 바랍니다. 하늘로부터 오는 처소를 덧입기를 사모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고 말씀을 하면서 이 장막에 우리가 짐 진 것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덧입는 것이 무엇입니까?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바 되게 함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생명에게 삼킨바 되게 하려 함이라는 이 말씀은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탄생이 되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도에게 구원의 옷을 입혀 주시는 것은 바로 이 생명을 넣어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을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난 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옷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 있는 생명입니다 그것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 겉옷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겉옷은 바로 이 생명에게 우리가 삼킨바 되는 것을 가르쳐 주는 말씀입니다. 이 겉옷을 우리에게 더하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능력이며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하늘로부터 오는 처소를 덧입습니다.

그것은 우리 안에 생명이 탄생이 되었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내가 생명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구원의 겉옷이 생명이라는 말씀입니다 부활의 생명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다는 것을 거듭 말씀을 드립니다.

 

저도 모릅니다.

부활의 형상으로 변했을 때는 썩지 않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썩지 않는 생명을 우리가 지금 어떻게 설명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을 도무지 설명할 방법이 없기 때문에 우리에게 구원의 옷으로 입혀 주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대제사장의 옷은 구원의 옷이고 이 옷은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는 것이라고 사도바울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로 옷 입으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내가 입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입혀 주시는 것을 믿음으로 입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믿는 성도들에게 거저 입혀 주시고 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시대 역시 구원의 겉옷을 입기를 거절을 하고 있습니다. 생명에게 삼킨바 되어야 하는데 자기 안에 생명이 있는지 조차 모르고 있습니다. 그저 남들이 영생을 얻었다고 하니까 성경도 전혀 모르면서 자기 안에 생명이 있는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생명입니다

아담이 범죄를 함으로서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빼앗겼습니다. 그것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에게 다시 찾아 주셨습니다. 이 생명에 대해서 믿게 하기 위해서 성경의 모든 말씀들을 기록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 생명에 대해서 나타나게 하셨습니다. 성도는 오직 이 생명의 옷을 입기를 사모하고 있습니다.

 

누구로부터입니까?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이 생명에 삼킨바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아무리 이 생명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어도 사람들이 다른 생명의 방법 율법을 지킴으로 해서 생명의 비밀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구원의 옷을 입혀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힘써 거절을 하고 있습니다.

 

반포 속옷입니다

 

출애굽기28:39-40절을 보겠습니다. (구 126쪽)

“너는 가는 베실로 반포 속옷을 짜고 가는 베실로 관을 만들고 띠를 수놓아 만들지니라 너는 아론의 아들들을 위하여 속옷을 만들며 그들을 위하여 띠를 만들며 그들을 위하여 관을 만들어서 영화롭고 아름답게 하되”

 

반포 속옷은 줄무늬 속옷이라고 합니다.

저도 어떻게 줄이 되어 있는 줄을 잘 모르겠습니다. 성경에 줄무늬 속옷이라고 하니까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왜 속옷에 줄무늬를 했는가는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반포 속옷이라는 말씀이 대제사장의 옷에 대해서 말씀을 할 때만 기록이 되어 있어서 왜 줄무늬를 하게 하셨는가는 잘 이해가 안 됩니다.

 

모르는 것을 억지로 알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을 해석할 때 가장 주의를 해야 하는 것이 모르는 것입니다 내가 감동을 받지 못한 부분이 있으면 억지로 해석하지 말고 기다리는 것이 좋습니다. 또한 주변에서 누군가 해석을 한다면 그것을 받아들이는 편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가는 베실로 속옷을 짜라고 말씀을 합니다.

가는 베실이 무엇을 상징하는 가를 계속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깨끗함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반포 속옷을 입게 하신 이유는 에덴에서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고 나서 가장 먼저 가린 부분입니다 무화과나무 잎으로 벌거벗은 몸을 가렸습니다. 그러나 무화과나무 잎사귀는 금세 말라 버리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가죽 옷을 지어 입혀 주셨습니다.

이 가죽 옷은 구원을 상징하는 옷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에서 입은 옷은 구원의 옷입니다 그들이 수치를 가리기 위해 스스로 만든 무화과나무 잎사귀는 말라비틀어지니까 하나님께서 아담을 부르시고 가죽 옷을 지어 입혀 주셨습니다.

 

시편25:20절을 보겠습니다. (구 820쪽)

“내 영혼을 지켜 나를 구원하소서 내가 주께 피하오니 수치를 당치 말게 하소서”

 

내 영혼을 지켜 나를 구원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반포 속옷은 우리가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하는 옷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수치는 다른 말로 하면 부끄러움이 될 수 있습니다. 교회에 나와 있지만 구원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는 절대로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구원의 옷입니다

이 옷이 벗겨지면 우리는 수치를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누가 수치를 당하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수치를 당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 교회 안에서 주여 주여 했지만 구원을 못 받는 사람들이 수치를 당합니다. 아론이 입었던 반포 속옷은 구원에 있어 우리가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아담은 수치가 보여 무화과나무 잎사귀로 그것을 가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통으로 짠 속옷이 벗겨지면서 그 수치가 드러나셨습니다. 그 수치가 드러나면서 우리의 수치를 주님께서 다 가져가셨습니다. 우리가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게 하시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십자가에 부끄러움을 당하셨습니다.

 

시편22:18절을 보겠습니다. (구 817쪽)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뽑나이다”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리고 속옷을 벗기고 제비 뽑아 가져갔습니다. 이 에언 그대로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로마의 군병들이 제비를 뽑아 가져가갔습니다. 주님께서 수치를 당하심으로 우리가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하시기 위해서 예언을 그대로 성취하셨습니다.

 

죽으셨습니다.

그것은 수치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살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대제사장의 옷을 통해서 하나하나 실체를 그대로 보여 주시고 있습니다. 반포 속옷을 흰 세마포로 짠 것은 우리의 구원에 있어서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하시기 위해서 입니다.

 

대제사장의 옷입니다

그 속옷 까지도 모두의 구원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셨습니다. 그것을 이스라엘을 통해서 보여 주셨지만 이스라엘은 이 옷을 보고도 지혜가 없어서 깨닫지를 못 했습니다. 성경이 얼마나 오묘한 가를 우리가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너무 쉽게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대충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메시아입니다 분명히 히브리서에서 우리의 대제사장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이 시대도 역시 구약을 보면서 전혀 깨닫지를 못하고 있고 그저 문자에 갇혀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띠를 만들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너는 가는 모시 실로 줄무늬 속옷을 지어라. 가는 모시 실로 제사장이 쓰는 관을 만들고, 수를 놓아 예복의 허리띠를 만들어라. 아론의 아들들에게 입힐 속옷을 만들어라. 그들이 띨 허리띠도 만들고, 그들이 쓸 관도 만들어서, 그들이 영화롭고 아름답게 보이도록 하여라.”

 

예복의 허리띠를 만들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허리띠는 수를 놓아 만들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저도 어떤 수를 놓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수가 어떤 문양인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아론의 예복에 허리띠를 만들어서 띠게 하셨습니다.

 

에베소서6:14절을 보겠습니다. (신 316쪽)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진리로 허리띠를 띠라고 말씀합니다.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복은 모두가 구원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 예복의 허리띠를 진리로 띠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제사장의 옷을 허리띠로 띠는데 그 허리띠가 진리입니다

 

오직 예수입니다.

제사장의 옷을 통해서 다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진리로 허리띠를 매지 않고 있습니다. 아론이 입었던 대제사장의 예복을 진리로 띠를 띠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대제사장의 예복을 신약에 와서 다 보여주시고 있지만 사람들이 믿지를 않고 있습니다.

 

구원의 다른 길이 있습니까?

진리는 오직 하나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시대는 예수 그리스도를 왜 믿고 있는지 조차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모든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얻으라고 가르쳐 주고 있지만 사람들은 종교에 빠져 헤어 나오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성경입니다

이 모든 성경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알고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내게 대해서 기록하였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구원의 길이 진리 말고는 다른 길이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진리로 허리띠를 띠지 않고는 구원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왜 믿는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오직 구원입니다. 이 성경은 영의 일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 영의 일을 우리가 알아들을 수 없기 때문에 이런 예표들을 통해서 깨닫게 하시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영의 일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거의 육에 빠져 육체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늘의 일입니다

그것은 이 세상의 지식으로는 깨달을 수 없습니다. 제가 늘 말씀을 드리지만 세상에서 가장 지혜가 있는 자도 하나님의 지혜를 자기 스스로는 깨달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욱 겸손해야 하고 늘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지혜로운 영으로 채워준 자들이 이 대제사장의 옷을 만들었던 것과 같이 지혜로운 영을 보내 주셔야 이 시대 우리가 이 옷을 보고 구원을 깨달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관을 만들라 말씀합니다.

제가 굳이 말씀을 안 드려도 이 관은 면류관을 상징하고 있다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관과 투구는 머리에 쓰는 것입니다 에베소서에서 구원의 투구를 쓰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서1:12절을 보겠습니다. (신 371쪽)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

 

생명의 면류관입니다

아론이 쓰고 있는 관은 생명의 면류관입니다 대제사장의 옷은 전부 이렇게 구원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구원에 대해서 너무도 소홀히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아니 구원에 대해서 말씀을 하면 마치 자기들이 다 구원을 받은 것으로 생각을 하고 이제 구원을 받은 성도로서 살아가야 한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물론 구원은 단번에 주시는 은혜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늘 이 구원에 대해서 성경을 보아야 합니다. 구원을 사모하고 있는 성도는 구원에 대한 말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들으려 할 것이고 구원을 받지 못한 교회 안에 있는 가라지들은 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자기들이 선민이라고 하면서 자기들을 통해서 나타나고 있는 여러 가지 표징들을 보면서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왜 성경을 봅니까?

이해가 안 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얻기 위해서 성경을 보고 있습니다. 그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우리는 늘 성경을 상고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구원에 대해서 말씀을 하면 심지어는 이단으로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 이 시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스라엘이 왜 버림을 받았습니까?

그들은 하늘의 일을 생각하기 보다는 땅의 일을 생각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영의 일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지만 그들은 도무지 그 말씀에 대해서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들 조상 대대로 하나님을 믿는다고 했지만 영이신 하나님을 믿었던 것이 아니라 육의 생각대로 성경을 보았던 것입니다

 

출애굽기28:2절을 보겠습니다. (구 124쪽)

“네 형 아론을 위하여 거룩한 옷을 지어서 영화롭고 아름답게 할찌니”

 

거룩한 옷입니다

이 옷은 이스라엘이 본 옷입니다 그러나 이 옷은 앞에서 말씀을 드렸지만 생명에게 삼킨바 된 옷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대제사장이신 예수께서 얼마나 거룩하신 가를 제사장의 옷을 통해서 가르쳐 주시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바로 알아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믿을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7:26절을 보겠습니다. (신 360쪽)

“이러한 대제사장은 우리에게 합당하니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 하늘보다 높이 되신 자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거룩하신 분입니다 이 거룩하신 분이라는 말씀을 잘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이 거룩이라는 단어를 누구에게 사용하고 있는 가를 우리는 바로 알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거룩하시고 하늘 보다 높은 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거룩한 옷을 지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거룩하신 분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거룩하신 분으로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많은 말씀들이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가를 가르쳐 주고 있지만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폄하하고 있습니다. 이 거룩은 썩지 않고 깨끗한 생명을 가지신 분에게 사용할 수 있는 말씀입니다.

 

하늘보다 높은 자가 누구입니까?

이 문제는 나중에 지성소 안에 있는 속죄소를 강의를 할 때 다시 한 번 성도님들과 말씀을 상고해 보는 시간을 갖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시대 교리에 묶여서 사람들이 성경을 바로 볼 수 있는 눈이 가려지고 있습니다.

 

이 거룩한 옷을 지어서 영화롭고 아름답게 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영화는 창세전에 이미 하나님께서 가지셨던 영화입니다. 만세 전부터 우리 인생들을 창조 하시고 또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경륜으로 구원해 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가 얼마나 아름다운 가를 늘 생각해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을 대제사장의 옷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 주시고 있습니다.

 

거룩하신 분입니다

그리고 영화롭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아름답습니다. 대제사장의 옷을 지어서 우리에게 그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라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성막에서 제사를 드리면서도 땅의 것만을 보았지 하늘의 것을 알기 위해서 지혜를 구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이 세상의 대제사장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에 따르는 대제사장이 아니라 모세가 본 하늘의 모형의 실체였습니다. 그분이 오셔서 이 옷을 입고 거룩한 대제사장의 직분을 행하셨습니다. 거룩하시고 영화로우시고 아름다우신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옷을 입고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시기 위해서 휘장 안으로 들어가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아론은 일 년 일 차례 지성소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그는 영원한 대제사장이 아니라 그가 살아 있는 동안에만 대제사장의 직분을 수행하고 나서 그가 죽은 후에는 그의 아들에게 대제사장의 직분을 넘겨주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영원히 살아 계셔서 하늘에 올라 가셨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기 위해서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거룩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거룩하면 우리도 역시 거룩합니다. 우리 육체가 거룩하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 안에 거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거룩하다는 말씀입니다. 이 옷은 하늘의 모형과 그림자라고 분명히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실제 우리가 눈으로 보는 것이 거룩한 것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거룩하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도 이 옷을 입어야 합니다.

베드로전서에서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 옷을 입혀 주시고 있습니다. 이 옷을 입을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에게는 이 거룩한 옷을 입혀 주셔서 영화롭게 해 주시고 아름답게 해 주시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었습니다.

내가 지금 어떤 옷을 입고 있는 가를 냉정하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은 성도가 있고 율법의 의로 옷 입고 있는 가라지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어서 견고하고 든든한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휘장 안으로 들어가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아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에 영접을 받아 천국의 모든 축복을 누리는 성도가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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