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강, 요한복음 3:1절을 보겠습니다. (신 145쪽)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관원이라”
영생입니다
사도 요한은 계속해서 영생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는 이 생명에 대해서 바로 알아야 합니다.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을 알아서 믿음으로 해서 그 생명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역사가 하나님으로부터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2장입니다
가나 혼인에 주님이 참석을 하셨습니다. 그 혼인에 청함을 받아서 참석을 했는데 혼인 잔치를 하는데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마리아가 주님께 말을 하고 있고 주님께서 물론 된 포도주를 만드시는 것을 우리가 사도 요한의 말씀을 통해서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육적인 혼인입니다
그것을 비유로 해서 우리 영의 일을 가르쳐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천국에 가는 영생의 일을 혼인으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육적인 혼인 잔치에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것은 그들에게 있어 영의 구원의 기쁨이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를 하고 있습니다.
혼인에 참석을 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의 결례에 따라 두 세통 드는 항아리에 물을 담아 두었고 그것을 다 사용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율법을 지키고 있었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고 그렇게 율법을 지키고 있는 이스라엘에게 포도주가 떨어짐으로 해서 구원의 기쁨이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적으로 가르쳐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기쁨입니다.
그것이 이미 유대인들에게는 사라졌다는 것을 주님이 혼인 잔치에 참석을 하심으로 해서 의미적으로 보여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영의 일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유대인의 결례를 따라 혼인 잔치를 하고 있는 그들에게는 기쁨이 사라졌습니다. 이 시대도 마찬가지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천국입니까?
요한계시록에서 신부가 신랑을 위해서 단장한 것 같더라고 천국에 대해서 우리 인생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기쁨으로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모두가 영생에 대해서 그리고 천국 복음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그들의 기쁨이 사라졌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그들의 기쁨이 사라졌는가 하면 유대인의 결례를 따라 행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기쁨은 사라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저 육체의 기쁨을 누리면서 자기들이 하나님을 믿는 백성이라고 생각을 하면서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그 기쁨입니다.
영의 생명에 대해서 기쁨입니다. 그것을 주시기 위해서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포도주가 떨어져 있는 가나 혼인에 주님께서 물로 된 포도주를 만드심으로 해서 그들이 기쁨을 다시 찾았다는 것을 의미적으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이제 천국복음을 전파를 하시고 있습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그러니까 짐승과 같이 살다가 안개와 같이 사라지는 우리 인생들에게 내세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영의 생명을 주시고 그 생명으로 영생을 얻을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주님께서 오셨다는 것을 사도 요한은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입니다
그들은 지금 이 시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 이방인의 비유와 그림자라는 것을 알고 성경을 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가나 혼인 잔치를 통해서 이 세상에 왜 오셨는가를 가르쳐 주고 있지만 사람들은 그저 주님께서 물로 된 포도주를 만드신 그 기적만을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복음입니다
기쁜 소식이라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기쁨을 주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 이방인들에게도 천국의 기쁨을 주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통해서 그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유대인의 유월절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성전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파는 자들과 돈을 바꾸는 자들을 보시고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셔서 성전에서 내어 쫓아 내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모두가 성경에 예언이 되어 있는 그대로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이 일을 하고 계시고 있습니다.
장사하는 자입니다
다른 복음서에서는 매매하는 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산에서 성전의 식양을 보이시고 그 기구의 식양을 보이시고 그대로 지으라고 말씀을 하시고 모세가 그대로 지었습니다.
성전입니다
저의 육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식양대로 그 기구의 식양대로 지으라고 하신 것은 그 성전을 보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하시는 일을 알아 믿음으로 해서 구원을 받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그들은 그 성전에서 모세가 기록한 대로 율법을 지키는 일에 열심을 내고 있었습니다. 광야에서 지은 성막까지 4번의 성전이 지어졌지만 그들은 단 한 번도 그 성전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 믿은 것이 아니라 율법을 지키는 일에 열심을 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고 생각을 하고 제사장들과 레위인은 더욱 열심을 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그런 그들에게 말씀을 하십니다.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보이는 성전을 보고 있는 유대인들은 주님께서 하시는 영의 말씀을 전혀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주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이 말씀을 기억하고 성경과 및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하고 있습니다.
그런 유대인들에게 주님께서 표적을 보이시니까 그들이 그 행하시는 것을 보고 믿었더라 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표적을 보고 믿었다고 하는 것은 실제 믿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늘 말씀을 드리지만 믿음이라는 것은 성경을 아는데서 부터 출발이 된다고 말씀을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은 전능하신 하나님입니다 이스라엘이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 이름을 믿는다고 했지만 주님께서는 그 몸을 저희에게 의탁지 아니하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의탁지 아니하셨는가 하면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시기 때문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입니다
우리 모든 사람을 친히 다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누가 하나님의 아들들인가를 다 알고 계십니다.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했지만 어느 누구에게도 증거를 받지 아니하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받지 않으셨는가 하면 그들이 증거를 하지 않아도 친히 모든 사람에 대해서 다 아시기 때문이라고 사도 요한은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바리새파 사람 가운데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유대 사람의 한 지도자였다.”
사도 요한입니다
우리가 4복음서를 보고 있습니다. 마태는 왕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그리고 마가는 종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누가는 인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그리고 사도 요한은 하나님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을 하고 있다는 것을 말씀을 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처음부터 영생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입니다
우리가 내세에 들어간다는 것은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을 말씀을 하는 것이고 그것은 하나님과 같은 존재로 살아간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이 내세에 들어가는 생명에 대해서 우리에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이스라엘은 이 영의 생명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자기들이 어떻게 구원을 받는가를 모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영이시라는 것조차 모르고 하나님의 아들들이 그러니까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을 전혀 모르고 그저 육적으로만 생각을 하면서 살았습니다.
이스라엘입니다
그들은 구약 성경을 보았습니다. 구약 성경을 보고 이 영의 일을 안다는 것은 사실 거의 불가능하다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그들이 모르는 것은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물론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받은 선지자들은 이 영생에 대해서 말씀을 하지 않았어도 자기들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아 천국에 간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그런데 이방입니다
이제 모든 성경이 다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신약 성경에서 이 영의 생명에 대해서 얼마나 많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사도 요한은 처음부터 이 생명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못 보던 성경을 보고 있는 이방인들 역시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빌립보서3:5절을 보겠습니다. (신 321쪽)
“내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바리새인입니다
바리새인이라는 말이 언제부터 등장을 했는지는 정확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오시기 전에 그러니까 말라기 시대를 지나오면서 이스라엘에 종교적으로 영향력이 있고 지도력이 있는 사람들이 이스라엘의 재건을 위해서 태동이 된 종파라고 생각을 하면 됩니다.
이스라엘입니다
그들은 모두가 하나님을 믿는 백성이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하나님에 대해서 열심이 있었고 성경을 많이 보면서 성경대로 살려고 했던 사람들이라고 해도 별로 틀리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성경의 문자를 중요시 했고 성경의 문자 그대로 율법을 지키면서 경건하게 살고자 했던 사람들이라는 것을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다시 말씀을 드립니다. 그들이 출애굽을 하고 난 후에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사사 시대를 거쳐 다윗과 같은 왕이 나와서 당시 가장 강한 나라로 우뚝 서 있었던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자기들이 하나님을 잘 믿으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자기들을 가장 강한 나라로 세워주신다는 사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들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하신 그대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가나안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무엇이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의 일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지만 그들은 육적으로 모든 것을 생각을 하고 있었고 그것이 자연스럽게 율법주의로 발전을 하게 되었습니다.
율법주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광야에서 물론 모세를 통해서 율법을 반포를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들의 체질을 알고 계십니다.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지키라고 율법을 반포하신 것이 아니라 그것을 보고 죄를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사람들은 성경을 문자 그대로 보면서 율법을 지키는 일에 열심을 냈습니다.
선지자를 보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정말 열심히 이스라엘에게 선지자를 보내서 영의 일에 대해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이스라엘은 더욱 더 율법주의에 빠지고 말았던 것을 성경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율법으로 말미암아 나라가 망하고 성전이 훼파가 되면서도 그것을 깨달을 수 있는 지혜가 없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은 구약만 보았기 때문에 모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방인은 어떻습니까? 이제 신약을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구속의 일을 이루시고 영으로 부활하시고 우리에게 영의 생명에 대해서 천국 복음에 대해서 다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그 성경을 보면서도 이스라엘과 똑같은 길을 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히브리 사람입니다
그리고 히브리어를 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그들이 히브리어로 된 성경을 보면서도 전혀 깨닫지를 못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리새인들이고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들은 정말 종교 지도자로 살면서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을 정도로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반포하신 율법을 지키는 일에 열심을 냈습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입니다.
내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율법으로는 흠이 없는 자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이 어떻게 살았는가를 이 말씀을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의 삶입니다.
그들은 종교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삶의 전부는 종교라 해도 별로 틀리지가 않습니다. 마치 우리나라 조선 시대에 유림들이 있었던 것과 같이 그들의 삶과 별로 다르지 않다고 생각을 하면 됩니다. 단지 유림들은 도덕적으로 자기들의 사상을 따랐고 바리새인들은 성경을 보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를 원했던 사람들입니다
바리새인입니다
복음서에서 이 바리새인들이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구속의 일을 하셨을 때 가장 많이 반대를 했던 사람들이 이 바리새인들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단 한 번도 주님의 말씀에 동의를 했던 적이 없을 정도로 대적을 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가장 잘 믿는다고 하는 이스라엘의 바리새인이 단 한 번도 주님의 말씀에 따르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는 바로 알아야 합니다. 얼마나 아이러니컬한 상황입니까? 스스로도 그렇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모든 사람도 가장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했던 그들이 막상 자기 땅에 오신 하나님을 앞서서 대적을 했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진행형입니다
이스라엘이 그렇게 했습니까? 그런데 우리 이방인은 전혀 다르고 하나님을 잘 믿고 있습니까? 정말 착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바리새인들을 통해서 이 시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을 그대로 보여주시고 있습니다. 종교가 되어 있는 바리새인들을 통해서 앞으로 기독교가 될 이방인들의 미래를 보여주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바리새인입니다
그들은 유대교의 독실한 신자들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들이 유대교의 모든 것을 주관을 하고 유대교를 이끌어 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들이 왜 주님이 오실 때 나타나났는가 하면 앞으로 우리 이방인들이 그 바리새인들과 같이 될 것을 미리 예표로 보여주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습니다.
그들이 성경을 어떻게 보았는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를 통해서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미 구약에서도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사람들은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일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악하다는 것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더러운 행위라는 것을 신약 성경을 보고 있는 이방인들이 더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내가 율법으로는 흠이 없는 자라고 말씀을 하면서 그 흠이 없는 율법의 의를 예수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서 배설물과 같이 버린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똥입니다
성경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율법을 문자 그대로 지키는 것을 똥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똥으로 회를 칠하고 있는 사람들이 그것을 의라고 자랑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바로 바리새인들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이 시대 기독교를 보시기 바랍니다. 율법을 지키지 않는 교회가 있습니까? 물론 바리새인들과 같이 율법을 지키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에서 율법 하나를 지키면 온 율법을 지킬 의무가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입니다
단 하나의 율법도 율법입니다 그리고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모든 율법도 율법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단 하나를 지켜도 율법을 지킨 사람이고 온 율법을 지켜도 율법을 지킨 사람입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면 단 하나를 지켜도 똥이 묻은 사람이고 온 율법을 지켜도 똥이 묻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바리새인입니다.
그들은 종교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종교가 되는 것을 가장 싫어하십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결국에는 종교가 되고 말았고 그 정점에 주님께서 오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기독교인입니까?
그것이 자랑스러운 말인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은 기독교인이라고 아주 당당하게 자랑스럽게 말을 하고 있습니다. 실상은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바리새인이라고 당당하게 말을 하고 있는 것과 같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도행전15:5절을 보겠습니다. (신 213쪽)
“바리새파 중에 믿는 어떤 사람들이 일어나 말하되 이방인에게 할례 주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바리새파입니다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지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시고 사십일 동안 제자들에게 보이시다가 하늘로 올라 가셨습니다. 이 일이 있은 후에 오순절에 성령이 오시고 제자들에게 의해서 복음이 전파가 되기 시작을 했습니다.
왜 성경에 바리새인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그것은 우리에게 바리새인과 같이 되지 말라는 경계를 하고 있는 말씀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이 오셨을 때 바리새인들이 있었고 그들은 유대교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앞으로 이방의 교회가 그렇게 될 것을 미리 아시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예표로 보여주시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바리새인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에 대한 열심이 얼마나 대단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들은 정말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었던 사람들이고 하나님을 잘 섬기기 위해서 자기들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했던 사람이라는 것을 우리가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 그들입니다
그들은 성경을 연구를 했습니다. 그리고 성경에 있는 말씀들을 다 알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 그들이 주님이 오셨을 때 영접을 하지 않았습니다. 왜 영접할 수 없었는가 하면 그들은 종교가 되어서 율법을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그 율법을 완전케 하시는 분이 오시니까 영접할 수 없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종교가 되어 있는 모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종파는 다 율법을 지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 역시 인간적으로는 하나님을 정말 진심으로 믿고 있습니다. 그들의 인간적인 마음을 제가 비난을 하고 또 의심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들은 바리새인들과 마찬가지로 정말 하나님을 잘 믿고 싶은 사람이라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믿음을 모르고 있습니다.
아니 성경에서 영생을 어떻게 해야 얻을 수 있는가를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영생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모르니까 어떻게 하고 있는가 하면 율법을 지키는 일에 열심을 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상이 권선징악(勸善懲惡)입니다 그러니까 선을 행하면 좋은 곳으로 가고 악을 행하면 나쁜 곳으로 간다는 사상이 있습니다.
그것이 사람의 사상입니다.
그런 사상에서 믿음이라는 것은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바로 바리새인도 그런 사상이 있었습니다. 아니 성경의 문자를 보면 그렇게 말씀을 하고 있는 것과 같이 보이기 때문에 당연히 그렇게 생각을 하면서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사람의 생각입니다
죄를 지면 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저 역시도 그것에 대해서 부정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 죄를 지면 당연히 그 죄에 대해서 처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해야 세상이 조금 더 편안해 질 수 있다고 저 역시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입니다
성경은 그런 세상의 일이 아니라 내세의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모르고 성경을 보면 바리새인이 될 수밖에 없고 종교인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그 구속의 일을 모르면 자연스럽게 세상의 사상에 따라 종교인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자입니다
율법에는 당연히 돌로 쳐 죽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문자는 그렇게 되어 있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영의 일을 비유로 해서 말씀을 한 것이지 실제 이 세상에서 여자와 남자가 간음을 하는 것을 말씀을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바리새인입니다
당연히 돌로 쳐 죽이기 위해서 주님께 그 여자를 끌고 왔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말씀을 하시면서 그 여자에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정죄를 하지 않는가 하면 주님께서 마음대로 정죄를 하고 안 하고 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영의 일을 말씀을 하기 때문에 정죄를 하시지 않은 것입니다
나중에 다시 말씀을 드릴 기회가 있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을 하는가 하면 주님은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은 사랑이 많으신 분이기 때문에 정죄를 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고 자기도 그런 죄를 지어도 정죄를 받지 않는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법대로 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그 말씀을 하면서 죄를 지어도 법을 마음대로 하실 수 있는 분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법대로 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왜 정죄를 하지 않았습니까?
법대로 하셨기 때문에 정죄를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마 제가 이런 말씀을 하면 이제 처음 그리스도편지를 보고 있는 사람들은 도무지 무슨 말씀을 하는지 모를 수 있습니다. 아니 제가 성경을 마음대로 풀면서 궤변을 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율법의 간음입니다
그것은 육적인 간음을 말씀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간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여자는 비록 육적인 간음을 했지만 영적인 간음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니 지금 이 상황은 영적인 간음에 대한 말씀이 아니기 때문에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을 바로 알 수 있습니다. 율법을 모르면서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것은 다 거짓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반포를 하신 그 율법은 생리적인 남자와 여자가 간음을 하는 것을 말씀을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하고 있는 간음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간음입니다
여자가 이 간음을 했는지 안 했는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지금 상황은 육체적인 간음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서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겠다고 말씀을 하신 것이지 만약에 그가 영적인 간음을 했는데 정죄를 하지 않겠다고 하신다면 하나님 스스로가 율법을 폐기하는 것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바리새인입니다
그들은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율법을 전혀 몰랐습니다. 그러니까 1장에서 말씀을 하는 것과 같이 빌립과 나다나엘과 같이 모세가 기록한 율법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전혀 못 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문자 그대로 보면서 실제 간음한 여자를 끌고 와서 돌로 쳐 죽이려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리새인입니다
아니 이것이 종교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시대 역시 종교인들은 똑같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종교인이 되는 것을 싫어하시고 있지만 사람들은 성경을 보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다 종교인이 되고 있습니다.
아니 이미 거대한 종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종교 안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종교가 만든 신학교에서 그들이 사람의 이성을 가지고 만든 교리를 배우고 있습니다. 그 교리가 성경보다 더 우선이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나오는 바리새인들을 통해서 이 시대 기독교인을 보아야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사도행전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에 있는 지방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 안에 유대로부터 온 거짓 형제가 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에 있는 사람들에게 율법을 지키게 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문제입니다
결국에는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사도들과 이 문제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었던 것을 사도행전15장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방인들에게 율법을 지키지 말라고 가르쳤고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는 율법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주님이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믿는다고 했습니다. 그 중에서는 바리새파에 있었던 사람들도 많이 있었던 것으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다른 사도들과 교회의 지도자들과 이 문제를 가지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바리새파입니다
그들의 사상이 어떠한가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바리새파 중에서 믿는 사람들이 이방인에게 할례를 주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 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미 종교가 되어 있고 조상 대대로 율법을 지켜온 그들에게 있어 너무도 당연한 말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러니까 사도들이 성령을 받고 복음을 전함으로 해서 바리새파에 있었던 사람들이 믿고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들은 당연히 이방인들도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키는 것이 마땅하다. 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 말을 듣고 사도 베드로와 주의 형제 야고보가 이방인들에게 우리가 지었던 멍에를 매게 하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결론으로 내렸습니다.
사도행전의 바리새파입니다.
그들도 사도들의 회의에서 결론을 낸 그대로 따랐을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들이 복음을 듣고 성령을 받았지만 아직까지는 이 율법에 대한 문제를 바로 깨닫지를 못하고 있었습니다. 또 성령이 오신다고 해서 모든 것이 한꺼번에 다 알아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리새인입니다
유대교의 한 종파가 바로 바리새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이렇게 주님이 오시기 전에 유대교라는 종교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을 믿기 위해서 율법에 열심을 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종교는 그런 사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성경에서 바리새인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이 바리새인들에게 마태복음 23장에서 7번을 말씀을 하면서 화 있을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고 있는 그들에게 외식을 하고 있는 그들에게 화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화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이스라엘의 바리새인들에게만 하시는 말씀으로 생각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 이방인들이 바리새인과 같이 종교가 될 것을 미리 아시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성경을 그렇게 보고 있지를 않습니다. 아니 자기들은 바리새인과는 전혀 다르다고 생각을 하면서 교회 안에서 율법을 지키는 일에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3장입니다
주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정말 이 말씀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내가 여기에 단 한 가지라도 해당이 되고 있다면 그들과 같이 화를 당한다는 것을 명심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율법을 지키고 있고 외식이 넘쳐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입니까?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그들보다 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외식하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이 시대 기독교인들이 얼마나 많은 외식에 빠져 있습니까? 아니 외식이 무엇이라는 것도 모르고 주님께서 마태복음에서 하신 말씀은 바리새인에게만 하신 말씀으로 알고 자기들에게는 해당이 안 되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유대교의 한 종파입니다
이스라엘은 유대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방인은 기독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과 같이 여러 종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나름대로 교리를 가지고 있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교회 안에서 여러 가지 행위를 하면서 천국 문을 막아서고 있다고 주님께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이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니 유대교인이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시대 기독교라는 종교가 이방에 세워졌습니다. 그리고 그 중에는 여러 종파가 존재를 하고 있습니다. 정통이라고 하는 기독교 안에서도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 성결교 등 여러 종파가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그들이 어떻습니까?
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열심이 얼마나 대단한가를 우리가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모든 종파가 율법을 지키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외식에 빠져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 그들입니다
영생에 대해서 관심이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는 하고 있지만 그저 이 세상에서 어떻게 행복을 누리면서 살아갈까를 생각을 하고 있고 그런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이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교회 안에서 율법을 열심히 지키고 있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는 외식을 하고 있습니다.
나타내고 있습니다.
자기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는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바리새인과 같은 행위를 하면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고 있지만 실상은 그들은 영생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그런 그들이 천국을 간다고 자신 있게 말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니고데모입니다
그가 유대인의 관원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가 어떤 사람인가를 사도 요한은 충분히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가 바리새인이라는 것도 말씀을 하고 있고 유대인의 관원이라는 것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2:8절을 보겠습니다. (신 265쪽)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독생하신 하나님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우리와 같은 육체를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우리를 사랑하심으로 해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러나 1장에서 사도 요한이 말씀을 하는 것과 같이 빛이 어두움을 비추매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예언입니다
모세가 율법에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여러 선지자가 성경에 기록을 했습니다.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것을 육의 일로 받아들이고 다윗과 같은 왕이 와서 자기 나라를 강대한 나라로 이끌어 줄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몰랐습니다.
영생에 대해서 전혀 몰랐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시고 계속해서 선지자들을 보내주시면서 하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 인생들을 구원을 해 주시겠다는 것을 말씀을 하셨지만 사람들은 성경을 보면서 영의 일을 본 것이 아니라 거의 다 육의 일로 보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가 독생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아마도 어느 누구라도 십자가에 못 박으시는 것을 막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의 관원도 그렇고 이 세상의 관원도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지만 알지 못해서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악한 일을 했습니다.
누가 주도를 했습니까?
이스라엘의 바리새인들이 그렇게 했다는 것을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충분히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들이 왜 그렇게 했는가 하면 하나님을 믿는다고는 했지만 영의 일을 모르고 성경을 문자 그대로 보면서 율법을 지키려고 하다가 율법을 완전케 하시려 오신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고 말았습니다.
모릅니다.
이 시대 누가 알고 있습니까? 이 복음에 대해서 누가 알고 있습니까? 영의 생명에 대해서 누가 알고 있습니까? 이 시대 목사들이 알고 있습니까? 그들은 주님께서 어떻게 부활하셨는지도 모르고 있고 자기들이 어떻게 영생을 얻는지도 모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도 몰랐습니다.
우리는 정말 성경을 잘 보아야 합니다. 종교에 빠져 있는 사람들은 아무리 성경을 보아도 소경이 되어서 성경에서 어떻게 말씀을 하고 있는가를 전혀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그러니까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되는가를 자세하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시대입니다.
그리고 호세아 시대입니다 그뿐 아닙니다. 거의 모든 시대가 같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 성에서 진리를 찾고 공의를 구하는 자를 하나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을 사하시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바벨론으로부터 공격을 받아 멸망 직전에 있는 예루살렘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그냥 보지마시기 바랍니다.
성경이 그렇다고 하면 그런 것으로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성경에서 말씀을 하고 있는데 나는 아니라고 하는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인가를 알아야 하고 그것이 결국에는 자기를 망하게 하는 길로 가게 해서 주님의 말씀과 같이 바깥 어두운 곳에 쫓겨나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말이 됩니까?
모두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도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구약에 이스라엘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신약에 와서도 사도 바울이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다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관원입니다
물론 세상의 관원도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유대교에 있던 사람들도 역시 관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들이 얼마나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했던 사람들이었습니까? 자기들만이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믿으려면 자기들과 같이 믿어야 한다고 했던 그들이지만 사도 바울은 이 지혜를 하나도 알지 못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계속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설교나 강해에서 계속해서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실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얼마나 적은가를 성경이 말씀을 하고 있기 때문에 계속해서 말씀을 할 수밖에 없고 성경은 우리에게 경계의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안타깝습니다.
그리고 가슴이 아픕니다. 제 주변 사람들을 보아도 너무도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면 그들이 듣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이단이라고 공격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종교의 포승에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묶여서 끌려가고 있으면서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안 봅니까?
절대로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들 역시 성경을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많은 목사들은 저 보다도 성경을 많이 읽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는 솔직히 그렇게 성경을 많이 읽은 사람은 아닙니다. 그래도 70대 이상 된 목사들은 최소한 성경을 100번 이상은 읽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니 그 정도는 읽어야 한다는 것을 그 시대 사람들은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그렇게 많이 성경을 읽으면 뭐 합니까? 젊어서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되어서 수십 년을 성경을 보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들 역시 이스라엘의 바리새인과 조금도 다르지 않게 성경을 문자적으로 보고 있고 그 문자를 통해서 알고 있는 지식으로 율법을 지키는 일을 하면서 하나님을 믿고 있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이 시대 관원이 하나도 없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면 이 백성은 어떻게 됩니까? 관원이 알지 못하는 것을 백성이 알 수 있다고 생각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바리새인들이 알지 못하는 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알 수 있다고 생각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종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말씀을 하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을 하는가 하면 그 시대 관원은 알지 못했어도 그 시대 바리새인들은 종교지도자들은 알지 못했어도 지금은 알고 있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입니다
이 세상의 지혜로도 그렇습니다. 어느 나라 사람이 머리가 좋은가를 조사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이스라엘 사람들이 세상 모든 사람들보다 머리가 좋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시대 부도 거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 세계 경제를 좌지우지할 정도로 그들은 머리가 좋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어떻습니까?
그들이 성경을 매일 읽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은 성경만 보고 산다고 해도 별로 틀리지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영의 생명에 대해서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성경을 문자 그대로 보면서 세상 초등학문으로 하나님을 믿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이 오셨을 때입니다
그 시대 관원 중에 하나라도 지혜가 있었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않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지금 이 시대 그래도 이름이 있는 목사 한 사람이라도 복음을 알고 있다면 이 시대 교회는 이렇게까지 되지 않는다는 것을 비유적으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로마서 강해를 통해서 알았습니다.
사도 바울이 무엇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내가 증거 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의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한다고 말씀을 하면서 하늘에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우리의 지혜가 우리의 이성이라는 것이 어떻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교회 안에서 자기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고 있고 이 시대 목사들은 자기가 신학을 공부를 하고 목사 안수를 받았다고 하면서 마치 생명에 대해서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과 같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니고데모입니다
이 시대로 하면 목사 정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의 관원이니까 그러니까 유대교에서 유대인들을 가르치고 있는 사람이니까 그래도 하나님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고 자부를 하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 그가 주님께 찾아왔습니다.
요한복음3:2절을 보겠습니다. (신 145쪽)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가로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이 사람이 밤에 예수께 와서 말하였다. "랍비님, 우리는, 선생님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임을 압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지 않으시면, 선생님께서 행하시는 그런 표징들을, 아무도 행할 수 없습니다."”
유대인의 관원입니다
지금으로 하면 목사정도는 된다고 생각을 하시면 됩니다. 그러니까 유대교에서는 사람들을 가르치고 있는 지도자에 속한 사람이라는 것을 사도 요한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유대인의 관원이 당시에 주님을 찾아온다는 것은 파격적인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당시 세례 요한이 세례를 베풀었던 것을 아마도 알고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 역시 성경을 늘 보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아니 하나님에 대해서 알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주님을 찾아올 수 있었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보시기 바랍니다.
당시 바리새인이고 유대인의 관원이 주님을 만나로 온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4복음서를 보아서도 잘 알고 있지만 유대인의 관원이 주님을 찾아온 사람은 아마도 이 니고데모가 유일하지 않은가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을 찾아왔습니다.
주님을 찾아올 정도의 사람이라면 저는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성경을 많이 읽었고 성경에서 영생을 얻기 위해서 상고를 했던 사람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주님을 만나고도 돌아간 사람도 있지만 어찌되었든 주님을 찾아와서 만날 정도의 사람이라면 자기 영혼에 대해서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당시 상황입니다
이스라엘은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는 사상이 팽배해 져 있던 시대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때에 세례 요한이 와서 세례를 주면서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고 말을 하면서 광야에서 외치고 있으니까 사람들은 당연히 주님을 보고 그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입니다
표적을 행하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 니고데모도 말을 하고 있지만 아마도 예루살렘 성전에서 주님께서 행하시는 표적을 보았던 것으로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니고데모 역시 주님을 찾아오게 되었고 그가 밤에 찾아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입니다
그들은 종교 사회라 해도 별로 틀리지가 않습니다. 그들은 종교가 생활이고 그들의 신앙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종교 지도자라고 할 수 있는 관원이 주님을 낮에 찾아온다는 것은 사실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에 밤에 찾아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밤입니다
아무도 모르게 왔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는 그래도 자기가 유대인의 관원이라는 사회적인 위치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당시 사회에서 출교를 당한다는 것은 쉽게 말을 해서 매장을 당하는 것과 같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은 도시 사회입니다
그래서 누가 나를 비난을 하고 그와 마주치기 싫으면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그 당시는 그런 사회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사를 하는 것도 쉽지 않고 한번 소문이 나면 그 사람은 거의 매장을 당하고 살 수 없을 정도로 핍박을 받을 수도 있었던 때라는 것을 알고 성경을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밤에 왔습니다.
니고데모가 어떻게 죽었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전해지는 것으로는 유대인들에 의해서 순교를 당했다고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럴 정도이기 때문에 니고데모가 주님을 밤에 찾아오는 것은 어쩌면 당시에는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직 복음이 전파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성령이 오시지도 않은 상태라는 것을 알고 성경을 보아야 합니다. 단지 자기가 성경을 보고 메시아가 오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행하시는 표적을 그가 보았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혹시 주님이 자기들이 기다리고 있는 메시아가 아닌가 하여 만나보러 왔던 것으로 보여 지고 있습니다.
당시 유대인입니다
그들이 얼마나 종교에 묶여 있었는가를 쉽게 알 수 있는 일입니다 그래서 더욱 니고데모는 밤에 주님을 찾아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종교의 자유가 있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는 이해가 잘 안 될 수 있지만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앞에서도 말씀을 했지만 종교가 그들의 삶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니고데모가 밤에 주님을 찾아왔다고 사도 요한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23:8절을 보겠습니다. (신 39쪽)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요한복음1:49절을 보겠습니다. (신 144쪽)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랍비
나의 주라는 뜻이 있는 히브리어라고 보면 맞습니다. 여러 가지로 사용을 했습니다. 유대교에서 자기들의 큰 스승을 말할 때도 랍비라는 언어를 사용을 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할 때도 성경에서 랍비라는 단어를 쓰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당시 유대인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종교의 지도자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연구를 하고 성경에서 하나님에 대해서 백성들에게 가르치는 선생으로 살았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랍비 교육을 했고 그 교육을 통해서 바리새인으로 살았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랍비 교육입니다
이 시대에 신학교와 거의 비슷하다고 보면 맞습니다. 그들은 오직 성경만 연구를 하고 사는 사람들이며 백성들에게 하나님에 대해서 그리고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대해서 가르치면서 살았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오셨을 당시에 자기들이 존경을 하는 선생이 있으면 랍비라고 불렀던 것을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그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에서 주님께서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유대교인들과 같이 세상 지식으로 가르치면서 선생이라고 칭함을 받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복음을 알아야 합니다.
랍비라는 것은 이 세상에서 사람의 이성을 가지고 성경을 연구를 해서 그것을 가르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당시 유대교인들은 그렇게 랍비 교육을 했고 그들이 선생이 되어서 가르쳤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듯이 우리가 진리로 인도함을 받아서 듣고 믿는 복음은 누가 인간의 이성으로 연구를 해서 가르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지금 그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입니다 사람들은 신학이라는 곳에 가서 공부를 하고 목사 안수를 받고 자기가 이제 성경을 보고 거기서 지식으로 알 수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이라는 것은 절대로 그렇게 신학이라든지 랍비 교육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드립니다.
제가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예언의 은사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진리로 인도함을 받고 있습니다. 그것은 순전히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제게 성령을 보내 주셨기 때문에 그리고 예언의 은사를 주셨기 때문에 성경을 볼 수 있고 그 성경에서 진리로 인도함을 받아서 여러분에게 전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선생이 됩니까?
절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제가 이 세상에 있는 선생과 같이 여러분을 가르쳐서 여러분이 진리로 인도함을 받아서 복음을 듣고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제가 먼저 성령을 받고 예언의 은사를 받아서 성경을 바로 풀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에게 그것을 전했습니다.
여러분이 듣습니다.
제가 비록 예언의 은사를 받아서 성경을 풀어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가 인간적으로 선생이 되어서 가르침으로 해서 여러분이 이 복음을 듣고 믿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절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먼저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럼 어떻게 됩니까?
분명히 저는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예언의 은사도 받았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풀어서 여러분과 교제를 하고 있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가르친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렇게 가르친다고 해서 여러분이 이 복음을 듣고 믿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안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어야 합니까? 제가 성령을 받고 예언의 은사를 받아서 성경을 풀어서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럼 그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리고 제 인간적인 지적인 능력도 아니고 오직 하나님께서 저에게 이 시대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주신 은혜입니다
그렇게 복음을 전합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스도편지를 보다가도 다시 돌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바로 이 말씀입니다 제가 아무리 복음을 전한다 해도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님들에게 성령을 보내 주시지 않으면 그것을 제가 이 세상에 선생과 같이 되어서 아무리 가르친다 해도 사람들이 그것을 듣고 믿을 수 없습니다.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제가 먼저 성령을 받았고 예언의 은사를 받아서 성경을 풀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제가 아니더라도 우리 중에 하나님께서 만약에 누군가에게 먼저 성령을 보내 주시고 예언의 은사를 주셔서 성경을 풀게 하셨다면 저와 우리 성도님들의 입장이 바뀔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제가 잘났습니까?
제가 인간적으로 지혜가 성도님들보다 더 뛰어 납니까? 저는 단 한 번도 그렇게 생각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우리 중에 어느 다른 사람에게 성령을 보내 주시고 예언의 은사를 주셔서 성경을 풀게 역사를 하시고 저를 구원하시고자 한다면 저는 그 사람에게서 복음을 듣고 믿어서 구원을 받는다고 믿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정말 잘 이해를 해야 합니다. 겸손의 모양을 나타내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에게 성령을 보내주시고 이 시대 예언의 은사를 주셨다면 저는 그 사람에게 듣고 믿어서 구원을 받습니다. 저는 지금도 저 보다 복음을 더 잘 전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렇게 해야 한다고 믿고 있는 사람입니다
제가 선생입니까?
절대로 저는 선생이 아닙니다. 우리 그리스도편지에서 교제를 하고 있는 한 형제라는 것을 한시도 잊지 않고 있습니다. 저는 단지 하나님께서 먼저 성령을 보내 주시고 예언의 은사를 주심으로 해서 성경을 풀어서 복음을 전하게 하신 것밖에 없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것은 제 능력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서 역사를 하신 일입니다
내가 가르치고 있습니까?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까? 우리 중에는 그런 사람이 없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치 자기가 다 아는 것과 같이 선생과 같이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볼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 주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선생은 누구입니까?
오직 예수 그리스도 그분만이 선생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분이 이 세상에 오셔서 천국 복음에 대해서 전파를 하셨습니다. 영의 일에 대해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영의 생명을 얻는데 있어서는 선생은 오직 한 분이라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성경은 그렇게 말씀을 하기도 합니다.
우리에게 선생이라고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복음을 전하는 일에 있어서 그렇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먼저 복음을 알았고 그것을 가르치는 자의 입장에서 선생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의 말씀과 같이 선생이 아니라 다 형제라는 것을 생각하고 있어야 합니다.
니고데모가 말을 하고 있습니다.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 줄 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말을 하고 있는가 하면 니고데모도 역시 당시 유대인의 관원이었기 때문에 성경을 많이 보았습니다. 그리고 당시 상황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고 주님께서 더구나 예루살렘 성전에서 표적을 행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랍비여
물론 나다나엘과 니고데모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앞에서 나다나엘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그는 이미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오실 것인가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만나고 나서 말씀을 듣자마자 주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고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니고데모입니다
그 역시도 성경을 많이 보았습니다. 유대인의 관원이었기 때문에 아마도 성경을 많이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나다나엘과 같이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만약에 주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생각을 하고 자기가 기다리는 사람이라고 어느 정도 확신이 섰다면 그는 굳이 밤에 찾아오지 않고 낮에 와서 주님께 영생에 대해서 물었을 것입니다
니고데모입니다
나다나엘과 같이 주님을 랍비라고 칭하고는 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보내신 선생인 줄 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안다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표적을 아무라도 행할 수 없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창세기39:2절을 보겠습니다. (구 60쪽)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니고데모입니다.
그도 유대인의 관원이고 성경을 많이 보았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사람들을 통해서 어떻게 역사를 하시는 가를 아주 잘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지금 니고데모는 성경을 보고 하나님께서 육적으로 이스라엘을 어떻게 함께 하셨는가를 알고 있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을 많이 보았습니다.
그가 창세기부터 해서 성경의 모든 말씀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선지자들과 어떻게 함께 하시는가를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지금 니고데모는 그 말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께 밤에 와서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줄 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왜 이 말을 하고 있습니까?
예루살렘 성전에서 주님께서 행하시는 표적을 보았습니다. 그것을 보고 하나님께서 함께 행하시지 않으면 그런 표적을 행할 수 없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니고데모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선생을 만나러 왔다는 말씀입니다. 그것도 자기가 유대인의 관원이기 때문에 밤에 찾아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요셉을 잘 알고 있습니다.
성경을 본 사람들이라면 하나님께서 요셉과 어떻게 함께 하셨는가를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물론 그가 처음에는 보디발의 집에 가서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그를 높이는 것을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알고 있습니다.
노예입니다
그 형들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기 전에 노예로 팔려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비록 노예가 되어 갔지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으로 해서 그가 형통하게 되었다는 것을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알고 있습니다. 그가 보디발의 아내에게 모함을 당해서 감옥에 갇혀 있는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그와 어떻게 함께 하시는 가를 성경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입니다
그들은 늘 성경을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선지자가 오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물론 대부분의 선지자들을 이스라엘이 배척을 했지만 그래도 엘리야라든지 엘리사 같은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을 모든 백성들이 다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를 존경하였고 그의 말을 들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니고데모입니다
그가 예루살렘 성전에서 주님이 행하시는 표적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표적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함께 행하시지 아니하면 그러한 일을 행할 수 없다는 것을 성경을 통해서 그는 알고 있었기 때문에 밤에 주님을 찾아와서 말을 하고 있습니다.
유대인입니다
2장에서도 말씀을 했습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한다고 말씀을 했습니다. 왜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는가 하면 그들은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해서 어떠한 표적을 행하셨는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선지자라면 당연히 표적이 나타난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 표적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나타난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 시대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아마도 이 시대 대형 교회 중에 대부분의 교회는 여러 가지 표적을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특히 병이 치유가 된 것을 간증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전도를 할 때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다는 것을 스스로 표적으로 삼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며칠 전에도 한 사람과 대화를 했습니다.
전도를 하기 위해서 열심을 내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가 전도를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을 위해서 열심히 기도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뜻밖에도 그 사람에게서 연락이 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를 초청을 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전했다고 합니다. 특히 그 사람은 남의 이야기를 듣지 않는 사람인데도 세 시간 동안이나 자기가 전하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말을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무엇입니까?
이 시대 다 표적이 되고 있습니다. 그 사람에게 전도를 하러 방문을 하기 전에 기도를 하면서 갔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자기가 가서 할 말이 생각나게 해 달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집을 방문하자 그 사람의 입에서 전도하러 왔느냐고 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했다고 말을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이 시대 기독교인들에게 그런 것들이 표적이 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유대인입니다
그들은 표적을 구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 기독교인들 역시 많은 표적을 구하고 있습니다. 기도를 하는데 성경 말씀이 떠올랐다든가 하는 등 그들이 간증으로 하는 이야기들이 기독교인들에게는 다 표적이 되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어떻게 생각을 합니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고 믿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들과 함께 하시기 때문에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요셉이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형통했던 것과 같이 자기들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하면서 간증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표적
2장에서도 말씀을 드렸지만 겉으로 나타난 흔적이라고 사전에서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표적을 구하고 있는 것을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런 표적을 보고 마치 하나님을 믿는 것과 같이 생각을 하고 있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들과 함께 하시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알아야 합니다.
물론 여러 선지자들에게서 표적이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오셔서 표적을 행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도들도 역시 복음을 전하면서 표적을 행하는 것을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성경이 다 기록이 되었다는 것을 우리가 늘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더 이상의 표적이 우리에게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이미 지난 시간에 말씀을 드렸습니다.
표적입니다
지금 니고데모는 주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찾아왔습니다. 사실 이것은 니고데모만이 그런 것이 아니라 이 시대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만약에 누군가가 교회 안에서 표적을 보게 되면 아니 세상에서라도 표적을 보면 마치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12:38절을 보겠습니다. (신 20쪽)
“그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 주시기를 원하나이다”
유대인입니다
그들은 표적을 구하고 있습니다. 니고데모 역시 예루살렘 성전에서 주님께서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것으로 알고 주님을 밤에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렇게 표적을 보고 찾아 온 니고데모에게 거듭남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니고데모는 주님이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하나님께로 오신 선생이라고 하면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고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유대인입니다
지금 이 시대 기독교인도 마찬가지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표적을 보고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주님께서는 표적을 보고 네가 나를 하나님께로 오신 선생인 줄 알고 있느냐 그리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이런 표적을 행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느냐고 하면서 거듭남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표적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에 표적을 행할 수 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니고데모의 생각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선생이라는 정도로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니고데모에게 주님께서는 전혀 뜻밖에 말씀을 이제 하고 있습니다.
표적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표적은 자기가 생각할 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으면 할 수 없다고 생각을 하면서 주님을 랍비라고 부르면서 찾아왔습니다. 그런 니고데모에게 주님께서는 네가 표적을 보고 내가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심으로 표적을 행하는 것을 보고 왔느냐고 하면서 그것이 아니라 더 중요한 것이 있는데 거듭남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거듭남입니다.
이제 주님께서 표적을 보고 온 니고데모에게 거듭남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니고데모는 표적을 보고 하나님께로 오신 선생을 만나러왔는데 주님으로부터 뜻밖에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ne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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