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강, 요한복음2:16절을 보겠습니다. (신 145쪽)
“비둘기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유대인의 유월절입니다
우리 성도는 유대인의 유월절을 지키는 자가 아닙니다. 또 이 시대 교회에서 교리로 만든 교회법으로 만든 절기를 지키는 사람도 아닙니다. 사도 요한이 왜 유대인의 유월절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는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것은 율법을 지키고 있는 성전에서 율법을 지키고 있는 유대인들은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우리 성도입니다
사도 바울이 명절을 지키자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명절을 지키는가 하면 묵은 누룩도 말고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도 말고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떡으로 하자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성경을 보면서도 어떻게 명절을 지켜야 하는 줄을 모르고 있고 유대인의 유월절과 같이 율법의 행위에 빠져 있습니다.
성경은 생명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경을 주신 것은 이 성경을 보고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해서라고 말씀을 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성경을 보고 유대인의 유월절을 지켰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상고해서 영생을 얻어야 하는데 그들은 유대인의 유월절을 지킴으로 해서 율법주의에 빠져 사망의 길로 가고 말았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종교가 되면 똑같이 되게 되어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그들의 유월절을 지킨 것과 같이 이 시대 역시 기독교라는 종교가 만든 교리에 의해서 교회법에 의해서 절기를 지키고 있습니다. 그 절기를 지키면서 수많은 율법의 행위가 성행을 하고 있지만 자기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조차 모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입니다
절대로 종교인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마치 하나님을 믿으면 다 기독교인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절대로 기독교인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성경을 상고하고 있고 그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감으로 해서 듣고 믿음으로 해서 영생을 얻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지 마시기 바랍니다.
어느 것 한 가지라도 안 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율법을 지키라고 말씀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도 그렇고 이방인도 역시 마찬가지로 성경의 문자를 보고 하나님에 대한 열심으로 율법을 지키는 일에 행위를 하는 일에 열심을 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믿음입니다.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믿음을 모르게 되면 사람들은 자기들의 육체의 행위로 이 믿음을 보이려고 하고 있고 그것이 행위가 되고 있습니다. 그 행위가 스스로를 죄악에 빠지게 만들고 있지만 사람들은 자기들의 이성에 따라 생각을 하면서 하나님을 위해서 행위를 잘 하려고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입니다
모세를 통해서 성전을 짓게 하셨습니다. 그 성전 안에는 모든 기구들이 있고 그 기구들은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구속의 일을 비유로 보여 주시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하늘에 있는 형상을 보게 하시고 짓게 하신 것이 바로 이 성전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이스라엘은 그 성전에서 제사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어떻게 하면 율법에 기록이 되어 있는 그대로 제사를 더 잘 드릴 수 있을까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성막을 짓게 하신 목적과는 전혀 다르게 이스라엘은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는 일에 열심을 냈고 정말 이 세상의 이성에 따라 정성을 다 해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정성을 다 해서 제사를 드리고 싶은 사람들의 마음입니다 가장 좋은 것으로 제사를 드리고 싶은 사람들의 마음입니다 그것을 성경에서 보고 억지로 풀어서 성전 입구에는 소와 양과 비둘기파는 자들이 있었고 돈을 바꾸어 주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왜 그렇게 했습니까?
다 이 세상의 샤머니즘에서 나온 생각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자기들이 좋은 것으로 제사를 드리면 하나님께서는 갚아 주신다고 생각을 하기 때문에 그런 생각에서 가능한 더 좋은 것으로 제사를 드리기 위한 사람들의 탐욕적인 생각에서 성전 앞에는 소와 양과 비둘기파는 자들과 돈을 바꾸어 주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우리 인생의 생각이 거기까지 밖에 미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생에 대해서 내세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지만 사람들은 우선 보이는 것으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을 나타내고 싶은 마음이 더 강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초대교회를 지나고 나서 교회는 급속하게 타락의 길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교회를 거대하게 짓기 시작을 했습니다. 주님께서 오셔서 성전이 무너짐으로 해서 이제 더 이상 겉으로 나타나는 것이 없으니까 사람들은 교회를 짓기 시작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교회를 짓기 위해서 자기들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했습니다.
심지어는 어떻습니까?
몇 백 년을 걸쳐 지은 성당도 있습니다. 그것이 이 시대 기독교에 어떻게 전해지고 있습니까? 더 크고 더 높고 더 화려하게 교회를 짓는 것을 경쟁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교회를 지어 놓고서 그 안에 이 세상에서 최고로 좋은 것들을 갖다 놓고서 성물이라고 말을 하면서 교회와 마음껏 음행에 빠져 그 안에서 율법의 행위를 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의 성전입니다
그것을 보시고 주님께서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셔서 그들의 등을 때리는 것과 같이 소와 양과 비둘기파는 자들과 돈을 바꾸는 자들을 내어 좇으셨지만 이 말씀을 보고도 사람들은 깨닫지를 못하고 교회를 지어 놓고서 더욱 더 율법주의에 빠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입니다
그들이 어리석음에 빠져 있다는 것을 사도 바울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어리석어서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방의 교회 역시 어리석음에 빠져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 빠져 있습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자기들이 하고 있는 교회 안에서 하고 있는 모든 행위가 무엇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자기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행위로 정성을 다 해서 하고 있지만 그것이 음행이 되고 있고 그것이 어두운 일이 되고 있고 탐하는 일이 되고 있고 우상 숭배하는 일이 되고 있지만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생명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교회 안에서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예를 하는 사람은 하나님나라를 유업으로 얻을 수 없다고 분명하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을 하고 있으면서도 자기들이 하나님을 아주 잘 믿고 있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입니다
계속해서 말씀을 하고 있지만 문자를 아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 문자를 보고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그런 성도만이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예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자들은 자기가 하고 있는 그 일이 무슨 일인지를 모르고 그저 거대한 종교의 포승에 묶여서 끌려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는 "이것을 걷어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아라" 하고 말씀하셨다.‘
성전입니다
우리는 정말 이 성전에 대해서 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자기들의 손으로 성전을 짓고도 성전이 무엇이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그저 제사를 드리는 일에 열심을 냈습니다. 그 제사를 잘 드리기 위해서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일을 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을 하십니다.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장사를 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마태나 마가는 매매를 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장사를 하는 것이나 매매를 하는 것이나 같은 말씀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비둘기파는 자들입니다
그들에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말씀은 내 아버지의 집을 율법을 지키는 곳으로 만들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내 아버지의 집에서 율법을 지키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스가랴8:9절을 보겠습니다. (구 1319쪽)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만군의 여호와의 집 곧 전을 건축하려고 그 지대를 쌓던 날에 일어난 선지자들의 입의 말을 이 때에 듣는 너희는 손을 견고히 할지어다”
시편11:4절을 보겠습니다. (구 810쪽)
“여호와께서 그 성전에 계시니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음이여 그 눈이 인생을 통촉하시고 그 안목이 저희를 감찰하시도다”
성전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제 신약에 와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라고 말씀을 하는가를 굳이 말씀을 안 드려도 이제는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을 할 때는 하나님으로 믿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을 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성전입니다
성경은 여호와의 전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호와는 성전에 계신다는 말씀이 많이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성전은 당연히 하나님의 집이라는 생각이 되어 있습니다. 이제까지 이스라엘에게는 성전에 하나님이 계시는 것으로 믿었고 하나님의 집으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알고 있는 그대로입니다
주님께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성전만 생각해 보아도 하나님과 주님은 하나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구약에서는 분명히 하나님의 집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신약에 와서 처음으로 예수는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을 하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는 곳입니다
다윗도 시편에서 여호와께서 그 성전에 계시니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음이여 그 눈이 인생을 통촉하시고 그 안목이 저희를 감찰하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생각에는 당연히 성전에 하나님이 계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니 그렇게 믿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주님께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내 아버지의 집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아버지라고 부를 때 그리고 다른 사도들이 아들이라고 말씀할 때는 그분이 하나라는 것을 늘 생각을 하면서 성경을 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성경은 도무지 풀릴 수 없고 유일하신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만든 삼위일체를 믿을 수밖에 없습니다.
성전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지었는가를 히브리서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가라사대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좇아 지으라 하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전은 저의 육체입니다
하나님입니다 그러니까 직접 볼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산에서 본을 보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형상을 보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지시하심을 얻어서 성전을 지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모세에게 보이던 본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지었던 성전은 바로 이렇게 지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세가 산에서 보았던 본을 좇아 지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늘에 있는 본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집이라고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계신다는 의미입니다
이스라엘은 성전에 하나님이 계신다고 믿었습니다. 그것을 주님께서 그대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집을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는 곳을 너희가 장사를 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입니다
우리 인생은 누구나 집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집에 거한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인생들의 생각을 이해시키기 위한 언어적인 말씀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사실 집이라는 것이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내세의 일도 모르고 있고 하나님은 영이시라는 성경 말씀만 알고 있습니다.
어떻게 거하시는지도 모릅니다.
늘 말씀을 드리지만 내세는 우리의 상상으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에 대해서 말씀을 할 때는 그리고 내세에 대해서 말씀을 할 때는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전입니다
주님께서 아버지의 집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적인 말씀이라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저 역시 내세를 가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내세는 모릅니다. 저 역시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주님께서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게 말씀을 하고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구약의 선지자들 역시 성전을 여호와의 집이라고 말씀할 때는 다 그렇다고 믿고 있습니다.
천국입니다
우리의 이성으로 상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도무지 상상이 안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이 내세의 일을 믿게 하기 위해서 이스라엘을 예표로 해서 하나님께서 구속의 일을 이루셨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보고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고 있습니다. 그 믿음도 도무지 사람의 이성으로는 믿을 수 없어서 성령을 보내 주심으로 해서 역사를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영의 일입니다
그리고 성전입니다 하나님의 집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사람의 언어로 정의를 해서 이해를 시키려고 하는데 절대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믿게 하기 위해서 이스라엘이라는 예표가 있었고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구속의 일을 하셨고 선지자들이 성경을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오직 믿음입니다.
이 믿음으로 역사를 하지 않으면 우리는 성경을 볼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니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싶어도 믿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종교가 되었고 이 시대 이방인들 역시 종교가 되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 아버지의 집입니다
주님께서 물론 이스라엘이 손으로 지은 보이는 성전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세가 지시하심을 좇아 지은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이 성전도 짓게 하시고 그 성전에서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이루시는 구속의 일을 보고 믿을 수 있게 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집입니다
하늘에 있는 본을 좇아 지은 집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 성전을 장사를 하는 집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장사를 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고 마태와 마가는 매매를 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성전에서 매매를 하는 것으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장사를 하고 무엇을 매매를 하고 있는가를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 영생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요한계시록13:17절을 보겠습니다. (신 412쪽)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이 표는 곧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라”
성전입니다
내 아버지의 집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솔로몬은 여호와께서 성전에 계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 성전은 그들의 신앙의 중심이고 그 성전에는 하나님께서 계시는 것으로 믿고 살아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 보이는 성전은 없어지고 보이지 않는 성전이 우리 안에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고린도전서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알지 못하느뇨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을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보이는 성전입니다
그 성전을 더럽히는 일을 이스라엘이 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서 소와 양과 비둘기파는 자들과 돈을 바꾸어 주는 자들을 다 내어 좇으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주님께서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입니다
그들은 우리의 예표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그들의 육을 통해서 우리의 영의 일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육을 보고 있는 이 시대 이방인들은 자기들의 영의 일은 전혀 모르고 살아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내 아버지입니다
그곳에서 이스라엘은 장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왜 장사를 했는가 하면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 장사를 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마태와 마가는 매매를 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장사를 했다는 말씀과 매매를 했다는 말씀은 같은 말씀입니다 그것으로 인하여 그들은 율법을 지키는 일을 했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장사가 아닙니다.
그들이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그런 장사를 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살아가기 위해서 장사를 하는 것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매매를 하는 것으로 성전에서는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제사장들이 율법을 지키는 일을 했고 그것은 이스라엘 전체를 율법주의에 빠지게 만들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보이는 성전입니다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보이는 성전을 짓게 하신 목적입니다 그 성전을 보고 그 안에 있는 모든 제사 제도와 기구들을 보고 하나님을 알게 하기 위해서 성전을 짓게 하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그들은 그 성전에서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문자 그대로 행위를 하는데 그치고 말았습니다. 성전에 들어가서 제사를 드리면 그것이 어떻게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무슨 일을 하신 것에 대해서 우리가 그러한 행위를 하고 있다는 것을 제사장들은 이스라엘에게 가르쳐 주어야 했는데 그들은 행위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런 그들이 어떻게 했습니까?
장사를 하는 사람들을 성전 앞에 두었습니다. 물론 성경에는 기록이 안 되어 있지만 그들이 장사를 할 때 그냥 할 수 있었다고 생각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다 제사장들과의 어떤 거래가 있었다는 것을 사람이 살아가는 일에서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집입니다
그 집에서 이스라엘은 매매를 했습니다. 그 매매를 통해서 무엇을 했는가 하면 제사장들은 더욱 하나님을 정성스럽게 섬긴다고 하면서 제사를 드리는 일에 열심을 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제사와 전제를 기뻐하시지 않는다고 했지만 그들은 이미 종교가 되어서 그 일에서 어느 누구도 빠져 나올 수 없게 되었습니다.
구약 성경입니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을 통해서 제사에 대해서 말씀을 했습니다. 시편에서 다윗도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않으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 아니하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자기들의 이성을 따라 더 거룩한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성전 앞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파는 자들과 돈을 바꾸어 주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매매를 했습니다.
왜 그들이 매매를 했습니까? 율법을 더 잘 지키기 위해서 매매를 했다는 것을 우리는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더 좋은 소와 더 좋은 양과 비둘기로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매매를 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보고 주님께서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서 그들을 좇아내시고 있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입니다
13장에서 짐승 두 마리가 나오고 있습니다. 이 짐승 두 마리가 누군가를 이 시대는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자기들은 짐승이 아니라고 말을 하고 있고 자기들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 다른 곳을 짐승이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 짐승에 대해서는 이미 말씀을 했습니다.
유대교입니다
그리고 이방의 기독교입니다 먼저 나온 짐승은 유대교가 되어 있는 이스라엘을 짐승으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뒤에 나온 짐승은 기독교가 되어 있는 교회를 짐승으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두 짐승이 표를 주고 매매를 하게 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짐승입니다
매매를 하게하고 있습니다. 어떤 매매를 하게하고 있습니까? 이스라엘이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매매를 했습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면 율법을 지키게 하기 위해서 매매를 했습니다. 매매는 바로 이와 같이 율법을 지키게 하는 것을 비유적으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입니다
이스라엘이 율법을 지켰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오시고 난 후에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삼일 만에 영으로 부활하시고 난 후에 하늘에 올라가셨습니다. 초대교회가 시작이 되었고 사도들은 성령을 받아서 이방에 복음을 전하는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는 그때에 벌써 가만히 들어온 거짓 이단이 교회 안에 들어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사람의 이성으로는 들어와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교회 안에 가만히 들어와 있었고 그들로 하여금 율법이 교회 안에서 지켜지게 되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서기150년입니다
그때를 전후로 이방의 교회는 급속도로 율법주의에 빠지고 말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제 거의 200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습니다. 지금의 교회를 보면 요한계시록의 말씀이 실감이 나고 있습니다. 어느 한 교회도 율법을 지키지 않는 교회가 없는 것으로 보여지고 있습니다.
율법을 안 지킵니까?
그런 교회가 있으면 말씀을 해 보시기 바랍니다. 물론 몇 사람이 모여서 교제를 하는 교회는 율법을 지키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 역시 기독교 전체 율법을 안 지켜도 역시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단지 여건이 안 되어서 할 수 없어서 그렇게 하고 있을 뿐이지 그들이 나누고 있는 말씀을 보면 율법주의 사상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매매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짐승 두 마리에 의해서 교회는 이미 다 율법주의가 되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요한복음의 이 말씀을 보면서도 자기들의 교회는 매매를 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실상은 그들 역시 교회 안에서 수많은 율법을 지키고 있으면서도 깨달을 수 있는 지혜가 없습니다.
짐승의 수입니다
지금 이 시대 기독교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은 짐승의 수를 받아 있습니다. 그들은 그 안에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매매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제사를 드리는 것과 같이 예배를 드리고 있고 그 예배 안에는 수많은 율법이 들어가 있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집입니다
이스라엘은 그 집이 매매를 하는 집으로 바뀌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율법을 지키고 있다는 것을 비유적으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더 잘 지키기 위해서 성전 앞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파는 자들과 돈을 바꾸어 주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성경입니다
그대로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도 요한이 요한계시록에서 본 환상이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미 유대인들은 그들의 유월절에 성전에서 매매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유대교라는 짐승이 되어서 매매를 하고 있었고 그 매매를 하는 것으로 율법을 지키는 일에 열심을 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을 보면 뭐합니까?
영의 일이 안 보이면 그는 소경이나 다름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니 소경이 되어서 소경을 인도하다가 둘 다 구덩이로 빠진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율법을 지키는 행위가 어떻다는 것을 유대인들도 그렇고 이방인들도 역시 전혀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3:17절을 보겠습니다. (신 266쪽)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보이는 성전입니다
이스라엘은 그 보이는 성전에서 매매를 하면서 그들의 이성에 따라 하나님께 정성을 다 해서 제사를 드리고자 했습니다. 그것이 다 율법의 행위가 되어서 점점 더 율법주의로 빠져 들어가고 있었지만 어느 누구도 그것을 깨달을 수 있는 지혜가 없었습니다.
제사장입니까?
그가 무엇을 하는 사람입니까? 그것을 베드로전서2장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제사장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왜 자기들을 제사장 삼으셨는가를 전혀 모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율법에서 벗어나야 하는데 율법을 더 잘 지키기 위해서 있는 제사장들이었습니다. 성전에서 제사장으로 있으면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덕을 선전을 해야 하는데 율법을 지키는 일에 열심을 내고 있었습니다.
매매를 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이 왜 있었다고 생각을 합니까? 만약에 제사장들이 자기들이 해야 하는 일을 바로 알고 있었다면 주님이 오셔서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서 성전에서 매매를 하는 자들을 내어 쫓으시기 전에 그들이 먼저 했어야 하는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그들은 이미 짐승이 되어 있었습니다. 유대교라는 짐승으로 변해 있었고 그 짐승이 그들 모두를 율법주의로 빠지게 만들었고 그 짐승에 의해서 제사장을 하려고 하니까 그들은 율법을 지킬 수밖에 없었고 그 율법을 더 잘 지키기 위해서 성전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용납을 하고 있었습니다.
영생의 문제입니다
짐승의 표를 받아 매매를 하는 자는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것을 이 시대 교인들이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짐승의 표가 무엇이라는 것도 모르고 매매를 어떻게 하는 줄도 모르고 있습니다. 그저 성경을 문자적으로 보려고 하니까 성경이 풀리지가 않아서 자기들이 교회 안에서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전혀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우리의 예표입니다
그들이 어떻게 했는가를 보면 이 시대 기독교인들이 어떻게 하고 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이제는 성전이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소와 양과 비둘기파는 자들과 돈을 바꾸어 주는 자들이 없습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는 역시 매매를 하는 자들로 가득 차 있고 그 짐승에 의해서 매매를 하면서 이스라엘과 같이 하나님에 대한 열심을 가지고 율법을 지키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어떻게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게 했습니까? 그들이 성전 앞에서 매매를 함으로 해서 제사를 잘 드리기 위해서 하는 행위로 인하여 성전을 더럽게 했습니다.
우리 몸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인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보이는 성전이 이제 우리 안으로 들어왔다는 것을 사도 바울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이 이제 우리 몸으로 들어왔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게 하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의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우리의 의는 더러운 옷과 같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매매를 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아니 있는 정도가 아니라 모두가 짐승에게 사로 잡혀서 표를 받아서 매매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율법을 지키고 있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성전에서 매매를 했습니다.
그것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은 제사를 제사장들이 하나님께 드린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제사와 번제를 기뻐하시지 않는다고 선지자들을 통해서 말씀을 하고 있지만 이스라엘의 제사장들은 그들의 제사로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게 하는 일을 하고 말았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독교는 짐승이 되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짐승의 표를 받아서 교회 안에서 모두가 매매를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매매를 하고 있는가 하면 율법을 지키는 일을 하고 있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 모든 기독교의 교회가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것을 사도 요한이 요한계시록에서 환상으로 보고 매매를 하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매매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게 하는 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게 하는 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율법을 지킴으로 해서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게 하는 자를 멸하시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두 짐승입니다
이 짐승에 대해서 목사들이나 신학자들은 여러 가지 주장들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잘 보시기 바랍니다. 앞에 나오는 짐승은 이스라엘을 의미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뒤에 나오는 짐승은 이방의 교회를 의미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실제 이 짐승의 표를 받아서 매매를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은 비유입니다
표라고 하니까 진짜 어떤 표를 받는 것으로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세상에서 만든 베리칩이 이 표라고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어리석어도 너무 어리석은 자들입니다 성경이 이 세상의 일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교회 안에 있는 일입니다
그것이 요한계시록의 종말의 일이라도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 세상의 문명을 마치 성경에서 예언을 한 것과 같이 이야기를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생체 이식을 받는다 해도 그것은 구원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의 과학이고 문명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생체 이식입니다
기독교인들이 반대를 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무지함이 과학과 현대 문명의 발전을 방해를 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성경은 그런 세상의 일을 말씀을 하는 것이 아닌데도 목사들이 억지로 성경을 풀면서 스스로 망하는 길로 가고 있습니다.
진짜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교회 안에서 하고 있는 매매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어디서 보여주고 있습니까? 지금 요한복음에서 성전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통해서 보여주시고 있습니다. 그들이 매매를 하는 것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일을 율법을 지키는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입니다
기독교라는 교회는 이미 짐승이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성전 앞에서 장사를 해서 매매를 해서 율법을 지키는 것과 같이 지금 이 시대 교회 안에서 하고 있는 모든 예배에는 수많은 율법이 들어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짐승의 표를 받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 그들이 세상의 문명인 베리칩을 반대를 하고 있고 그것을 받는 것을 마치 구원과 상관이 있는 것으로 말을 하고 있습니다.
신체가 구원을 받습니까?
그렇다면 그들의 주장이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영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우리 육체에 무슨 짓을 한다 해도 그것은 구원과는 아무 상관도 없습니다. 아니 그 육체는 죽어서 썩어 없어진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매매를 하고 있습니다.
그 매매로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게 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의 의는 더러운 옷과 같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교회 안에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모든 행위는 더럽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짐승에게 미혹이 되어 있는 사람들은 이렇게 교회 안에서 율법을 행하면서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게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종교가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두 종교를 사도 요한이 요한계시록에서 환상으로 보고 두 짐승으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매매를 하면서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것으로 자기를 더럽게 함으로 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진노를 받게 되고 있지만 그것을 깨달을 수 있는 사람이 이 시대는 없는 것 같습니다.
고린도전서7:30-31절을 보겠습니다. (신 271쪽)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같이 하며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같이 하라 이 세상의 형적은 지나감이니라”
성도입니다
우리는 영생을 바라보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착각을 하는 것이 있습니다. 이 세상의 것과 하늘의 것을 함께 얻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이 있습니다. 아니 거의 모든 사람이 다 그렇게 생각을 하면서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씀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영생이 무엇인가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이 영생은 우리 언어로 표현이 안 되고 있습니다. 저 역시도 설명을 하려고 해도 인생의 언어로 여러분을 설득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고 이 정도까지 밖에는 말씀을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영생입니다
마치 이와 같습니다. 이 지구의 모든 것을 내가 가지고 있습니다. 아니 내가 이 지구의 왕이라서 모든 것을 내 마음대로 다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모든 것을 다 주고 영생을 사고 싶어도 살 수 없는 것이 바로 영생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비교가 안 됩니다.
하나님이 바꿔주시지를 않습니다. 마치 무엇과 같은가 하면 길가에 있는 돌멩이와 수백 캐럿이 되는 다이아몬드와 같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실 그 정도로도 비교가 되지 않는 것이 우리가 얻는 영생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 성도가 은혜로 받는 영생입니다
그 영생을 받은 성도가 다른 것에 욕심을 부린다면 그것은 성경에서 말씀을 하는 탐욕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미 그 모든 것을 다 받았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내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죽었어도 그것이 더 소중하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교회 안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탐욕에 찌들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이기 때문에 우리는 끊임이 없이 우리 안에서 그런 욕심이 일어나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그것을 죽이라고 성경은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영생을 얻은 성도는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같이 하며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같이 하라 이 세상의 형적은 지나감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우리가 보고 느끼고 하는 모든 것은 지나간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없어진다는 말씀입니다
그 없어지는 것에 마음을 두고 있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아니 마음은 두지 않을 수 없겠지만 그것을 자기 육체로 하려고 가지려고 하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매매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 얼마든지 율법을 지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는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율법을 지킬 수 있지만 매매할 것이 없어서 매매를 못하는 것과 같이 율법을 지키지 않고 살아가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입니다
우리 역시 육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 얼마든지 율법을 지키면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지를 않고 있습니다. 왜 하지 않고 있는가 하면 그것은 다 지나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형적은 다 지나간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의롭습니까?
율법을 정말 잘 지켰습니까? 그것이 남아 있습니까? 아니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갈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정말 열심을 다 해서 율법을 지켜야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렇게 말씀을 하지 않고 그것은 그저 세상에서 지나가 버린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장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율법을 지키지 말라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율법을 지키지 말아야 하는가 하면 그것을 지킨 것이 하나라도 남아서 하늘에 우리가 가져갈 수 있다면 당연히 지켜야 합니다. 그러나 마치 안개와 그림자와 같이 사라진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육체는 반드시 썩어 없어진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국어가 이해가 안 됩니까?
이 세상 형적은 다 지나간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썩어 없어진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잠시 보이다가 사라지는 안개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국어의 의미를 모르고 있습니까? 그것이 우리 인생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매매를 하면 뭐합니까?
아니 장사를 해서 하나님께 정말 정성껏 제사를 드리면 뭐 합니까? 그것이 남아 있다면 우리가 천국에 가서 하나님 앞에서 그것을 이야기를 할 수 있다면 당연히 그렇게 해야겠지만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고 가져갈 수도 없는데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우리 인생입니다
더구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누구나 다 선하게 살고 싶어 하고 의롭게 살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굳이 율법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그렇게 살려고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고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정말로 악한 사람이고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매매를 합니다.
거기에 마치 휘발유를 끼얹고 불을 붙이는 것과 같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하나님의 성도로서 잘 살고 싶어 하는 우리에게 율법을 지키라고 하는 것은 마치 불구덩이에 섶을 지고 들어가라고 하는 것과 같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이스라엘은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것이 이스라엘만의 일이라고 생각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보이는 성전이 이제 우리 안에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이스라엘과 같이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고 있습니다.
어떻게 더럽히고 있습니까?
교회 안에서 매매를 하고 있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율법을 지키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 형적은 다 지나가 사라져 버리는데 사람들이 깨닫지를 못하고 아니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니까 믿지를 못하고 매매를 함으로 해서 그렇게 되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의입니다
우리가 율법을 지키는 행위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더럽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더러운 것으로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행위에 열심을 내면서 의롭다고 생각을 하고 있고 그것이 하나님을 믿는 성도의 도리라고 하면서 강요를 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입니다
이스라엘에게만 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똑같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게 하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매매를 함으로 해서 하나님의 성전이 더러워지면 하나님께서 너희를 멸하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경고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아무런 의식이 없습니다. 아니 그 일에 더욱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게 하는 일을 하면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짐승이 되어 있는 기독교는 교회 안에서 수많은 매매를 하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무엇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고 그것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멸하심을 받는데도 아주 담대하게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요한복음2:17절을 보겠습니다. (신 145쪽)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집을 생각하는 열정이 나를 삼킬 것이다' 하고 기록한 성경 말씀을 기억하였다.”
이스라엘의 성전입니다
그것은 보이는 성전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 성전은 없어졌습니다. 주님께서 이 보이는 성전에서 이스라엘이 매매를 하고 율법을 지키는 것을 보시고 그 성전을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게 무너지리라고 말씀을 하심으로 해서 로마에 의해서 완전히 훼파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 성전입니다
완전히 사라졌다고 생각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보이던 성전이 이제 우리 안에 들어옴으로 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이 되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입니다
그들은 보이는 성전에서 매매를 했습니다. 그러니까 율법을 지켰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이방인들입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의 성전이 들어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의 말씀과 같이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성전을 더럽히는 자를 하나님께서 멸하시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무서운 말씀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을 어떻게 더럽히고 있습니까? 율법을 지킴으로 해서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서도 이런 의미를 전혀 모르고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아니 이제까지 기독교인들은 모두가 율법을 지키는 일에 열심을 냈습니다.
어느 정도 열심입니까?
이스라엘과 같이 하나님께 좋은 것으로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소와 양과 비둘기파는 자들과 돈을 바꾸어 주는 자들이 있는 것과 같이 자기 육체로 율법을 지키는 일에 최선을 다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으로 행위에 열심을 내면서 보이는 모습으로 거룩하게 보이려고 교회 안에서 정말 그런 행위에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목사들은 어떻습니까?
거룩하게 보이려고 가운을 입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가대도 거룩한 찬양을 부르기 위해서 가운을 입고 있습니다. 교인들은 하나님 앞에 간다고 하면서 모두가 정장을 입고 있습니다. 저도 열심이 있을 때는 정말 양복을 드라이를 맡겼다가 일요일에 입었습니다.
왜 그렇게 했습니까?
하나님을 잘 믿고 싶은 마음이 너무도 강하기 때문에 할 수만 있다면 모든 것을 다 해서 하나님을 믿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 인생들의 마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율법의 행위에 깊이 빠져서 헤어 나오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성전입니다
그 성전을 주님께서 유대인의 유월절에 올라 가셨습니다. 그리고 매매를 하는 자들을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셔서 성전에서 쫓아내시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내 아버지의 집에서 율법을 지키는 행위를 하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행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율법을 지키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반포를 하신 목적은 율법을 보고 죄를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라고 반포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이 율법을 다 지키심으로 해서 그의 의로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율법에 의미를 다 두시고 그 율법대로 하시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그 성전에서 이스라엘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렇게 하지를 못 했습니다. 그리고 그 성전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드는 이스라엘을 보고 직접 이 세상에 오셔서 주의 전을 사모하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시고 있습니다.
시편69:9절을 보겠습니다. (구 851쪽)
“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이 나를 삼키고 주를 훼방하는 훼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잘 보아야 합니다. 성경은 누구에 대해서 기록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이런 예언의 말씀을 보고 그것이 또 실제 이루어짐을 보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성경에 이렇게 인용이 된 말씀만 보고 있어서 성경을 바로 풀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아니 이단이라고 합니다.
성경에 인용이 안 되어 있는 말씀을 가지고 성경을 인용을 하면 이상하게 성경을 해석한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거의 모든 성경은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하시는 일을 말씀을 하고 있지만 사람들은 성경을 보는 눈이 소경이 되어서 안 보이고 있습니다.
더 심각한 문제입니다.
지금 이 말씀과 같이 시편의 말씀이 인용이 되었다는 것을 성경에 첨삭을 해 놓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을 하고 있는가 하면 그렇게 첨삭이 되어 있는 말씀만 성경에서 인용을 해야 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빌립과 나다나엘입니다
우리가 1장에서 보았습니다. 그들은 모세가 기록한 율법에서 그리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성경에서 말하는 그 이를 보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때도 말씀을 드렸지만 거의 모든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고 우리는 할 수 있다면 인용이 되는 말씀을 찾아서 복음을 밝히 보이게 해야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내세의 일입니다
그리고 영의 생명에 대한 일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믿을 수 있습니까? 우리 인생의 이성으로는 믿고 싶어도 믿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이렇게 예언의 말씀을 성취하는 것을 보고 우리가 믿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요한복음의 말씀입니다
시편에서 미리 예언이 되어 있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 그대로 주님은 오셔서 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을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인하여 주님을 삼키는 계기가 되고 말았습니다. 실제 이 일이 계기가 되어서 이스라엘의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에 의해서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시고 말았습니다.
주를 훼방합니다.
이스라엘은 율법을 지킴으로 해서 하나님을 훼방을 했습니다. 그 훼방이 주님께 미쳤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시편의 말씀 그대로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이 얼마나 하나님의 일을 훼방을 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입니다.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 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가 율법주의에 있을 때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율법을 지키는 모든 사람은 주를 훼방하는 자들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입니다
그들은 모두가 훼방자가 되었습니다. 복음이 이 세상에 오셨지만 그들은 훼방을 했습니다. 주님이 오셔서 하시는 일마다 반대를 하고 훼방을 했다는 것을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일을 얼마나 훼방을 했는가를 아니 그렇게 한다는 것을 이미 시편에서 예언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다릅니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지금도 교회는 모두가 율법주의가 되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주의 전을 사모하고 있습니다. 그 성전이 더럽혀지는 것을 그 성전에서 매매를 하는 것을 참지 못하시고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서 그들을 쫓아내셨습니다.
주님의 열성입니다
시편의 예언 그대로 주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가장 먼저 성전에 오셔서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성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들이 그 안에서 율법을 지키는 것을 보고 그들의 어리석음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셔서 쫓아냈지만 그것이 도리어 주님을 삼키는 일이 되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시대라고 다르다고 생각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이 내가 전에는 훼방자였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시편의 말씀과 같이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일에 훼방을 하는 자로 살아가고 있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가 무엇으로 그렇게 했습니까?
그가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요 베냐민 지파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흠이 없는 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성전에 가서 율법을 지키는 훼방자로 살아가고 있었다는 것을 성령이 오시고 난 후에 깨달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시대도 성령이 오시지 않으면 절대로 깨달을 수 없습니다. 자기가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교회 안에서 훼방자로 살아가면서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 일에 열심을 내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시대 모든 교회가 이스라엘과 같이 율법을 지키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것을 보고 주님께서 시편의 말씀과 같이 주의 집을 사모하는 열성을 보이셨습니다. 그러나 그 일이 주님을 십자가에 죽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이 훼방을 하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입니다
늘 말씀을 드리지만 현재진행형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그렇게 했으면 우리 역시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것을 성경을 통해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것을 이스라엘의 일로만 치부를 하고 있고 자기들은 하나님을 아주 잘 믿고 있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주의 전입니다
이제 뒤에서 다시 말씀을 하겠지만 주의 전은 저의 육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저의 육체를 통해서 주님을 알아가야 하는데 거기서 하나님이 기뻐하시지도 않은 제사를 드리는 일에 열심을 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성도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 그 성전이 우리 안에 들어왔습니다. 어떻게 들어왔는가 하면 성경에서 주의 전을 보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구속의 일을 이루신 것을 그 성전에서 보고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그 하나님의 성전을 이스라엘과 같이 더럽히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그래도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문자 그대로 더럽히는 일을 했다면 이 시대는 성경에도 없는 것을 교회 안에 끌고 들어와 완전히 종교를 만들어서 더럽게 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입니다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1장에서 보았습니다. 빌립과 나다나엘 같은 사람은 정말 성경을 많이 상고를 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모세가 기록한 율법에서 그리고 여러 선지자들이 기록한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았습니다.
시편의 말씀입니다
저는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은 모르겠지만 빌립과 나다나엘은 시편의 말씀을 알고 있었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이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말씀입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우리는 할 수만 있다면 빌립과 나다나엘과 같이 성경을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 시대 우리가 성경을 볼 때도 그와 같이 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떤 말씀을 보더라도 그 말씀을 보고 성경말씀에 있는 것을 기억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가능한 모든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물론 모든 말씀을 다 기억할 수는 없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을 기억해야 성경을 바로 풀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시대는 성경을 그저 그 문장의 문자만 보고 있습니다.
기억하지를 않고 있습니다.
아니 인용 자체를 하지 않고 있습니다. 신학자들이 성경을 편찬하면서 각주로 달아 놓은 것만 인용이 되는 것으로 알고 성경을 보다보니까 그 이상을 생각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아니 이 각주가 성경인 것으로 오해를 해서 내가 다른 말씀을 인용을 하면 안 되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각주입니다
성경에 밑에 달려 있는 참고 내용입니다 그것을 성경으로 받아들이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성경이 아닙니다. 어느 신학자들이 성경을 편찬하면서 자기들이 알고 있는 것만 성경에 그렇게 각주를 달아 놓았습니다. 자기들이 모르는 것은 각주로 달아 놓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정말 바로 알아야 합니다.
사도 요한이 성경을 기록할 때 이 각주를 달았다고 생각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도 요한은 우리가 보고 있는 성경에서 제목이라든지 밑에 인용이 되는 말씀이라든지 그런 각주를 전혀 달아 놓지를 않았습니다. 그런데 후세 사람들이 성경을 편찬을 하면서 이렇게 각주를 달아 놓았습니다.
진리를 아는 일입니다
그것에 있어서 이 각주가 얼마나 방해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에 첨삭이 되어 있는 제목이라든지 이 각주로 인하여 사람들이 성경을 더 깊이 상고를 할 수 없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것을 마치 성경으로 생각을 해서 그 이상을 생각을 하면 안 되는 것으로 만들었고 실제 이 시대 목사들이 성경을 그렇게 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성경입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텍스트만 보시기 바랍니다. 말씀 외에 각주라든지 그리고 제목이라든지 그런 것은 가능한 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기록한 말씀이 아니라 사람들이 자기들의 이성에 따라 하나님에 대한 열심으로 그렇게 성경을 편찬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next
주님의 제자들입니다
주님께서 유대인의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가셔서 소와 양과 비둘기파는 자들과 돈을 바꾸어주는 자들을 성전에서 내어 쫓으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시편의 말씀을 생각하면서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말씀입니다
우리는 늘 상고를 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도 기억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다른 말씀을 볼 때 성경말씀을 알면 그 말씀이 인용이 되었다는 것을 이 말씀이 그 선지자가 예언을 한 말씀이라는 것을 기억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기억을 하는 성도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이 시대는 성경을 그렇게 보고 있지를 않습니다. 아니 서기150년을 전후로 해서 벌써 성경을 그렇게 보는 것을 반대를 하는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을 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들의 세력이 커지면서 기독교가 탄생이 되었고 나중에는 성경을 그렇게 보는 것을 아니 성경 말씀에 선지자가 기록한 말씀을 기억하는 것을 이단이라고 정죄까지 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 말씀을 인용을 하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아니 성경말씀을 기억하는 것 자체를 반대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이 있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습니까? 믿고 싶어도 믿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디모데후서2:8절을 보겠습니다. (신 344쪽)
“나의 복음과 같이 다윗의 씨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
성경말씀입니다
너희가 영생을 얻고자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해서 기록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먼저 성경을 상고를 해야 합니다. 지혜를 구하면서 성경을 상고를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아야 합니다.
좀 억지입니까?
억지라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말씀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볼 수 있다면 최소한 잘못된 길로 가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하신 일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모든 성경은 거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지만 사람들은 그 성경이 먼저 풀어지지가 않고 있습니다.
구약의 율법입니다
그리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성경 말씀입니다 이 모든 성경에서 우리는 가능한 예수 그리스도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다 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도 가능한 볼 수 있을 때까지 우리는 지혜를 구하면서 성경을 상고를 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입니다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씀한 것을 복음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까지는 철저하게 문자 그대로 성경을 보면서 율법주의자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만나고 난 후에는 그는 성경에서 복음을 볼 수 있는 계시를 받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계시를 받았기 때문에 그가 신약 성경의 거의 모든 말씀을 기록할 수 있었다고 믿고 있습니다.
나의 복음입니다
사도 바울은 구약 성경에서 복음을 보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어느 누구 보다도 더 강하게 전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구약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본 성도는 다른 성경을 보면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볼 수 있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디모데에게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너에게 복음을 전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복음과 같이 다윗의 씨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기억을 하고 있는 성도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성경의 문자를 기억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아이큐가 높은 사람이 있습니다. 기억력이 좋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보면 정말 성경의 모든 말씀을 잘 기억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바로 알아야 하는 것은 그런 기억력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성경말씀입니다
그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하실 일에 대해서 선지자들이 기록을 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고도 그것이 주님에 대한 말씀이라는 것을 모르면 아무리 요한복음의 말씀을 보아도 기억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시편63:6절을 보겠습니다. (구 846쪽)
“내가 나의 침상에서 주를 기억하며 밤중에 주를 묵상할 때에 하오리니”
에스겔 선지자의 파수꾼에 대한 말씀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악하다고 말씀을 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에스겔 선지자의 파수꾼에 대한 말씀을 보고 그것이 주님이 오셔서 하실 일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파수꾼에 대한 말씀은 문자적으로는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하실 일이라는 것을 모르면 그것은 기억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 뒤에서 요한복음에서 말씀을 합니다.
내가 세상을 악하다고 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파수꾼의 말씀을 보고 그것이 주님이 하실 일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다면 요한복음의 말씀을 보고도 에스겔 선지자의 말씀을 기억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성경의 문자입니까?
그것을 아는 것을 가지고 기억한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겨우 성경에 인용이 되어 있는 것을 보면서 기억한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빌립과 나다나엘은 모세가 기록한 율법에서 그리고 여러 선지자들이 기록한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씀을 한 것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에 주님을 만나자 마자 그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기억하는 것은 그렇게 중요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기억을 하는가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습니다. 이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그 의미를 알고 기억을 하면 믿음에 든든히 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저 성경의 문자를 알고 기억을 하면 믿고 싶어도 믿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시편에서도 내가 나의 침상에서 주를 기억하며 밤중에 주를 묵상할 때에 하오리다 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말씀입니다
먼저 그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말씀을 하시고자 하는 뜻을 알고 기억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그저 성경의 문자를 아는 것으로 그것을 기억하는 것으로 자기들이 하나님을 믿고 있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어려서부터 성경을 보고 성경에 있는 거의 모든 말씀을 기억했지만 그것이 도리어 그들을 사망의 길로 끌고 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 말씀입니다
모든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문자적으로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의미적으로 그렇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그 의미를 기억하고 있는 성도는 다른 성경을 보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든든히 설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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