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강, 요한복음 2:12절을 보겠습니다. (신 145쪽)
“그 후에 예수께서 그 어머니와 형제들과 제자들과 함께 가버나움으로 내려가 거기 여러 날 계시지 아니하시니라”
가나의 혼인입니다
그것을 교회를 예표를 하고 있는 말씀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실제 교회 안에서는 지금도 가나의 혼인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혼인 잔치에 참석을 하는 것과 같이 교회 안에서 잔치를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교회입니다
앞에서 말씀을 드렸지만 주님의 아내입니다 그 교회가 우리 성도들이라는 것은 다 알고 있습니다. 그 교회와 주님은 사랑을 나누고 있습니다. 아가서에서 나의 누이 나의 신부야 네 사랑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 네 사랑은 포도주에 지나고 네 기름의 향기는 각양 향품보다 승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처럼 사랑을 합니다.
교회는 이렇게 주님의 사랑의 넘쳐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라는 것을 바로 알고 우리는 교회에 대해서 바로 알아야 합니다. 교회라고 하니까 이 시대에 어느 건물로 지어진 것을 보고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을 말씀을 하는 것으로 생각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도들의 모임입니다.
그 자체가 교회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한 사람을 말씀할 때는 성도라고 하지만 우리가 여럿이 모여서 교제를 할 때는 그 장소와 상관이 없이 교회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교회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만이 넘치고 있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네 입은 좋은 포도주 같을 것이니라
교회의 입입니다 그러니까 교회에서 전하고 있는 모든 말씀은 좋은 포도주 같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시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아가서의 말씀을 도무지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좋은 포도주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그저 자기들이 지어 놓은 건물 안에서 예배를 하는 것을 보면서 교회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성경을 전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이성에 따라 성경을 보고 사람의 이성에 좋은 말만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좋은 포도주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 영의 일을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이지 이 세상에 이성을 따라 도덕을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좋은 포도주입니다
연회장이 하인들이 돌 항아리에 있는 물을 퍼서 갖다 주니까 맛을 보고 이제까지 좋은 포도주를 남겨 놓았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 좋은 포도주는 우리가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기쁨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좋은 포도주를 만들어서 가난 혼인 잔치에서 첫 번째 표적을 나타내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어린 양의 혼인 잔치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영생을 얻어 천국에 가는 것을 의미적으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반드시 좋은 포도주룰 먹어야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 시대 교회가 어떻게 하고 있는가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유대인들입니다
그들은 결례에 따르는 돌 항아리에 물을 채워 놓고서 혼인 잔치에 손님들이 오자 그 결례를 따라 물을 모두 사용을 했습니다. 그것은 교회 안에서 율법을 지켰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율법을 지키는 교회는 반드시 포도주가 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포도주가 떨어진다는 것은 기쁨이 사라졌다는 것이고 그것은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를 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주님의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과 사랑을 나누어야 합니다. 그것을 우리가 보고 있는 아가서를 통해서 충분히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아가서에서 포도주를 어떻게 말씀을 하고 있는가를 보시기 바랍니다. 배꼽은 섞은 포도주를 가득히 부은 둥근 잔 같고 허리는 백합화로 두른 밀단 같다고 말씀을 하면서 이 세상 최고의 언어로 사랑을 표현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사랑이 사라졌습니다. 아니 좋은 포두주가 없다는 것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가장 처음에 가나 혼인 잔치에 참석을 하셔서 물로 된 포도주를 만들어서 그들에게 기쁨을 주셨지만 사람들은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을 율법과 비교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그들의 결례를 따라 쓰는 항아리를 두는 것과 같이 이 시대 교회 안에는 그들이 만든 교리가 가득하고 그 교리에 따라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유대인의 결례입니다
그것이 주님이 만드신 포도주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만이 좋은 포도주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교회 안에서 율법을 지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율법을 지키지 말고 좋은 포도주를 먹으라고 가나 혼인에 청함을 받아서 첫 번째로 표적을 행하여 그 영광을 나타내셨지만 사람들은 율법주의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영생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받는가를 가르쳐 주고 있는 말씀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성경을 자기들이 왜 보고 있는지를 모르고 그저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보고 물이 변해서 포도주를 만들었다고 하면서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종교적 행위에서 빠져 나오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기쁨입니까?
그런 것은 우리 육체가 누리는 그런 것은 기쁨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영의 일을 말씀을 하고 있고 우리에게 믿음으로 역사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비록 우리 성도는 그런 종교적인 기쁨은 누리지 못하고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습니다.
어떻게 믿습니까?
앞에 있는 즐거움을 바라보면서 믿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영의 일을 내세의 일을 지금은 사람의 이성으로는 느끼고 알 수 없지만 그러나 믿음으로 역사를 하기 때문에 우리는 앞에 있는 즐거움을 바라보면서 성경대로 믿음으로 역사를 하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물로 된 포도주입니다
주님께서는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참석을 하라고 하면서 그 기쁨을 주시겠다고 하면서 물로 된 포도주를 만드셨습니다. 그 표적을 보고 제자들이 그를 믿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제자들 중에서는 1장에서 말씀을 드린 빌립과 나다나엘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모세가 기록한 율법에서 그리고 여러 선지자가 성경에 기록한 예수 그리스도를 보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그들이기 때문에 주님께서 혼인 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지자 물로 된 포도주를 만드시는 표적을 보고 제자들이 믿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믿음입니다.
아는 것에서부터 출발이 된다고 말씀을 했습니다. 모르겠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어떠했는지 모르겠지만 빌립과 나다나엘 정도는 이미 아가서를 보고 모든 성경을 보고 예수 그리스도를 보았기 때문에 물로 된 포도주가 의미를 하고 있는 표적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었고 그렇게 때문에 믿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이 일이 있은 뒤에, 예수께서는 그의 어머니와 형제들과 제자들과 함께 가버나움에 내려가셔서, 거기에 며칠 동안 머물러 계셨다.”
가나 혼인입니다
물론 이스라엘의 아주 평범한 집에서 있었던 혼인입니다 그러나 그 혼인을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말씀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주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셔서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우리를 부르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것을 첫 번째 표적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성경의 의미입니다
이스라엘의 실제 있었던 혼인을 통해서 교회에 대해서 주님께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어떻게 해야 하는 가를 주님께서 첫 번째 표적을 나타내심으로 해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그런 의미를 모르고 그저 가나 혼인에 주님이 청함을 받아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다는 그 기적만을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입니다
교회와 장로와의 관계를 혼인으로 비유로 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이 세상에 교회를 세우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미 종교가 되어 있어서 그들은 그들의 결례를 따라 모든 것을 행했다는 것을 이미 성경을 통해서 충분히 깨달을 수 있습니다.
혼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교회라는 곳에서 주님과의 사랑을 나누어야 합니다. 그때 반드시 좋은 포도주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결례를 따르는 돌 항아리에 물을 채워 놓고 율법을 지키고 있었고 그것은 진노의 포도주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유대인들의 결례에 따라 쓰던 그 돌 항아리에 물을 가득 채우게 하시고 좋은 포도주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제 주님은 이 세상에 신랑으로 오셨다는 것을 의미적으로 가르쳐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교회의 혼인은 좋은 포도주를 먹이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입니다
반드시 좋은 포도주를 먹여야 합니다. 그런데 이 시대 기독교 역시 그들의 결례에 따르는 것을 마치 유대인의 집에 돌 항아리에 물을 채워 놓은 것과 같이 하고서 쓰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을 드려서 그들의 교리에 따라 쓰고 있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반드시 사망입니다
언젠가는 포도주의 기쁨이 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아니 반드시 기쁨을 주는 포도주가 떨어지게 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율법을 지키고 있는 교회는 반드시 그렇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기독교의 결례를 따라 이 시대도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기독교입니다
유대교와 다르다고 생각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똑같이 종교가 되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기독교인들 스스로가 종교인이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는 종교인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은 도리어 종교인이 되는 것을 지극히 경계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거대한 종교에 의해서 블랙홀과 같이 빨려 들어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좋은 포도주입니다
우리가 교제를 하고 있는 교회의 입에는 이 포도주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좋은 것이 어떤 것인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성경은 이 좋은 것이 무엇인가를 많은 말씀을 통해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깨닫지를 못하고 있으면서 도리어 율법을 지키는 일에 열심을 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율법입니다
장차 오는 좋은 일에 그림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림자라는 것은 좋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장차 오는 좋은 일에 그림자는 될 수 있어도 좋은 것은 아닙니다. 그림자의 실체를 보면 율법은 좋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성경이 분명하게 말씀을 하고 있지만 이 시대 교회를 보더라도 율법을 지키지 않는 교회가 없습니다.
성경을 아시기 바랍니다.
그저 문자를 많이 아는 것으로 성경을 안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실제로 이 시대 교인들을 보면 참으로 머리가 좋습니다. 저는 기억력이 부족해서 성경의 문자를 잘 기억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대화를 나누다보면 문자적으로는 저 보다 더 많이 알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어떻게 생각합니까?
자기가 그렇게 문자적으로 아는 것을 가지고 마치 구원을 받은 성도나 되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 가나 혼인이 우리에게 의미를 하고 있는 것이 무슨 말씀인가를 전혀 모르고 있으면서도 문자를 아는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빌립과 나다나엘입니다
그들이 성경을 문자적으로 알았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들은 절대로 주님을 만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세가 기록한 율법에서 그리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을 만나자 주님께서 한 마디를 말씀을 하자 바로 알아보고 주님을 영접할 수 있었습니다.
나다나엘입니다
주님께서 빌립이 너를 부르러 가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는 것을 보았다고 말씀을 하니까 바로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이스라엘의 임금이라고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요 영존하시는 아버지시요 기묘자라 모사라 평강의 왕이라고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가나의 혼인입니다
그 표적을 주님께서 나타내셨습니다. 그것을 이 시대 기독교인들이 보면 뭐합니까? 그 표적이 의미를 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그저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니까 물로도 포도주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을 하고 있는 그들이 어떤 믿음을 가질 수 있는가 하면 맹목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까?
성경을 모르면서 믿는다고 하는 것은 다 거짓에 속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제 5장에서 주님께서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해서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내게 대해서 기록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율법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전혀 못 보고 있습니다. 그런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빌립과 나다나엘입니다
그들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너무도 크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미 초대교회가 지나가면서부터 교회사 책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빌립과 나다나엘이 보는 것과 같이 성경을 보면 어떻게 했는가 하면 알레고리하다고 하면서 이단이라고 공격을 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50년 전후입니다
사도들이 죽고 난 후에 이미 교회는 그렇게 되어가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이후에 기독교라는 종교가 태동이 되고 난 후에는 어느 누구도 감히 빌립과 나다나엘과 같이 성경을 본다는 것을 상상할 수 없게 기독교는 막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은 좋은 포도주를 만드셨습니다.
그러니까 유대인의 결례를 따라 쓰는 돌 항아리에 있는 물이 비어 있는 것을 보고 거기에 물을 채우게 하시고 난 후에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고 하니까 그것이 좋은 포도주가 되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 주님이 오셔서 우리에게 좋은 포도주를 먹이시겠다고 표적으로 나타내시고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가 막았습니다.
그것도 불과 서기 150년 전후부터 교회가 그것을 막기 시작을 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지금이 2019년입니다 거의 2000년 가까이 교회는 성경을 유대인과 같이 풀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들과 같이 종교가 되어서 요한계시록에서 말씀을 하는 두 짐승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속의 일을 대적을 하면서 우상을 섬기게 만들고 있습니다.
좋은 포도주를 먹으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우리가 영생을 얻기 위해서 성경을 상고하고 있고 그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찾아 말씀을 하는 것이 좋은 포도주입니다 그 포도주를 먹는 성도만이 요한계시록에서 사도 요한이 환상으로 본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참예를 한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가나 혼인입니다
성경을 그냥 기록했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겨우 가나 혼인에 포도주가 떨어져서 주님께서 그것을 만드시기 위해서 가나 혼인에 청함을 받아서 가셨다고 생각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혼인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고 반드시 혼인 잔치에서는 좋은 포도주를 먹어야 한다는 것을 표적을 통해서 나타내 주셨습니다.
이 일 후입니다.
주님은 가나의 혼인에 청함을 받아 우리에게 좋은 포도주를 먹으라고 표적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그렇게 하고 난 후에 주님은 제자들과 마리아와 함께 가버나움으로 가서 여러 날 계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하신 모든 일은 우리 영생에 관한 일이며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는 일이라는 것을 알고 성경을 보아야 합니다.
요한복음2:13절을 보겠습니다. (신 145쪽)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더니”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유대 사람의 유월절이 가까워져서,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다.”
유월절입니다
성경에서 이 유월절에 대해서 많은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가나 혼인 잔치에 참석을 하셨다가 이제 가버나움으로 가셔서 그 어머니와 형제들과 제자들이 함께 여러 날 계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때부터 주님께서는 제자들과 거의 동고동락을 하셨던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우리는 성경을 잘 보아야 합니다.
이 시대는 성경을 너무 쉽게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한글개역성경이 얼마나 잘 번역이 되어 있는가를 모르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저는 우리가 보는 성경을 볼 때마다 하나님께서 방언의 은사를 주신 사람을 통해서 성경을 우리가 보고 영생을 얻을 수 있게 기록을 했다고 믿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사람들의 알량한 지식이 성경을 폄하를 하고 있습니다. 특히 히브리어나 헬라어를 조금 안다고 하는 사람들이 성경의 번역에 대해서 문제를 삼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솔직히 말을 해서 그들이 국어나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인가를 묻고 싶습니다.
국어도 모릅니다.
그런 그들이 마치 자기들이 히브리어나 헬라어를 아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인이라고 하는 유대인들도 성경을 보고 그 뜻을 몰라서 모두가 사망의 길로 가고 말았다는 것을 성경을 보면 빤히 알 수 있는데도 성경을 보는 목적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겸손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는 영생을 사모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같은 성경을 보았지만 빌립과 나다나엘은 모세가 기록한 율법과 여러 선지자들이 기록한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았고 주님을 만나자 그들을 단번에 알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나머지 수많은 이스라엘의 바리새인과 제사장과 서기관과 종교인이라고 하는 그들이 과연 자기들의 언어로 기록이 되어 있는 성경을 보면서 빌립과 나다나엘과 같이 성경을 보았느냐는 것입니다 조상 대대로 히브리어를 사용하는 그들도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 신학교에서 교수라는 사람들이 히브리어를 조금 아는 것으로 마치 모든 것을 다 아는 것과 같이 신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묻습니다.
그들이 국어를 알고 있습니까? 국어도 모르고 있습니다. 조사, 부사, 부사격조사, 명령어, 명사, 형용사 등 국어가 얼마나 어려운 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 국어도 모르는 그들이 아니 모르니까 히브리어를 배우겠다고 하면서 성경을 외곡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도 의입니다
이 세상의 지식도 의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나타내고자 하는 것 역시 의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의가 악으로 변해서 결국에는 사망으로 간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데 이 시대는 아니 이제까지 기독교는 그 의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무지하게도 악을 행하면서 하나님의 백성을 떡 먹듯이 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을 드립니다.
겸손하시기 바랍니다. 지식이 있다고 해서 그가 성경을 알 수 있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인생의 지식이라는 것은 쓰레기보다도 못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깟 지식을 가지고 성경을 본다고 하면서 스스로 생각을 하면서 억지로 성경을 풀다가 모두가 망하는 길로 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민수기9:4-5절을 보겠습니다. (구 210쪽)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유월절을 지키라 하매 그들이 정월 십사일 해질 때에 시내 광야에서 유월절을 지켰으되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것을 다 좇아 행하였더라”
유월절입니다
이 유월절에 대해서는 이미 그리스도편지에서 많은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리는 유월절을 먹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을 했고 실제 구약의 율법대로 유월절을 먹는 것이 아니라 그 의미를 알고 유월절을 먹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을 했습니다.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참 성경을 이상하게 번역을 해 놓았습니다. 그냥 유월절이 가까웠다고 하면 되지 왜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웠다고 하는지를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그 의미가 있기 때문에 은사자가 그렇게 번역을 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유월절의 규례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유월절에 대해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러 가지를 말씀을 하셨습니다. 성경을 보면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는 말씀입니다. 오늘은 유대인의 유월절에 대해서만 말씀을 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성경에 유월절이 있습니다.
그러면 그것을 지키면 유월절이라고 하면 되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다른 이방에 있는 나라가 유월절을 지키는 것도 아니고 유월절을 지키는 나라는 오직 이스라엘 밖에는 없다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방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은 유대인의 유월절이라고 번역을 해 놓았습니다.
유대인의 유월절이 무엇입니까?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문자 그대로 지키는 유월절을 지금 유대인의 유월절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사도 요한이 그렇게 성경을 기록했기 때문에 방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이 번역을 할 때 유대인의 유월절이라고 번역을 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어린 양을 잡습니다.
그리고 애굽에서 나올 때는 문설주에 피를 바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밤에 어린 양과 무교병과 쓴 나물을 먹게 하셨습니다. 그것도 지팡이를 짚고 급히 먹으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고기를 하나도 남기지 말고 다 먹으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입니다
그들은 실제 모세가 말씀을 한 그대로 유월절을 지켰습니다. 그리고 이제 광야로 나왔습니다. 또 정월 14일이 되니까 모세가 이스라엘에게 유월절을 지키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정월 십사일 해질 때에 시내 광야에서 유월절을 지켰으되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것을 다 좇아 행하였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3대절기입니다
유월절, 맥추절, 수장절입니다 이 절기는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문자 그대로 이스라엘이 절기를 지켰습니다. 그들은 조상 대대로 이 절기들을 잊지 않고 지켰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문자 그대로 지키고 있는 절기를 유대인의 유월절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성경에 문자로 기록이 되어 있다고 해서 그것이 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지켜 행하라고 하신 것과 같이 생각을 하면 안 됩니다 물론 이 시대는 어느 특별한 교회를 제외하고는 유월절을 지키지 않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3대절기입니다
그 절기에는 이스라엘의 남자들은 모두가 하나님께 얼굴을 보이기 위해서 성전에 갔던 것을 우리가 성경에서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유대인의 유월절이 오면 성전에는 사람들이 많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의 신앙은 너무도 철저했기 때문에 이 유월절을 지키지 위해서 어린 양과 무교병과 쓴 나물을 먹기 위해서 성전에 모여서 유월절을 지켰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에 유월절을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그것을 유대인들은 문자 그대로 지켰습니다. 그것을 사도 요한은 유대인의 유월절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지키라고 하시는 유월절이 아니라 유대인들이 지키고 있는 유월절이라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성경에 문자로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그대로 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 요한은 그것을 유대인의 유월절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렇게 구약 성경에 율법으로 기록이 되어 있는 절기를 지켰고 그것을 유대인의 유월절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럼 신약에서는 무엇이 있겠습니까?
성찬이 있을 수 있습니다. 아마도 이 성찬에 대해서 말씀을 하면 도무지 깨달을 수 없는 사람이 더 많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편지에 있는 성도님들은 이제 이 성찬이 무엇이라는 것을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깨닫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성경의 문자를 보고 그대로 성찬식이라고 하면서 행하고 있습니다.
성찬식입니다
성경에서는 주의 만찬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찬식을 누가 만들었는가 하면 아니 주의 만찬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기독교인들이 만들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유대인의 유월절과 같이 성경의 문자를 보고 성찬식이라는 것을 만들어서 행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유대인의 유월절입니다
그들이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그대로 어린양을 먹고 무교병을 먹고 쓴 나물을 먹었습니다. 7일 동안 유월절을 지켰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물론 의미를 알고 7일 동안 성경을 낭독을 하면서 성경에서 하나님을 알았다는 기록도 남아 있습니다. 어찌되었든 이 모든 것이 다 유대인의 유월절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시대 기독교입니다
기독교인들의 성찬식이 있습니다. 주의 만찬을 기념하라고 말씀을 하니까 그것을 문자 그대로 보면서 떡을 떼고 포도주를 마시면서 그것을 그대로 행위로 하고 있습니다. 유대인의 유월절과 같이 기독교인들의 성찬식이 있다는 것을 우리가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성경의 문자를 보고 그대로 행하는 것을 사도 요한은 유대인의 유월절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인입니다
그들 역시 유대인의 유월절과 같은 성찬식을 행하고 있습니다. 그런 행위를 하면서 자기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 의미를 알게 하기 위해서 절기를 정하시고 주님께서는 그 유월절의 의미를 알고 먹은 것을 기념하라는 것을 말씀을 하셨는데 그것을 유월절의 의미도 모르고 먹지도 않은 그들이 기념한다고 하면서 교회 안에서 행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같습니다.
지금 교회 안에서 하고 있는 성찬식이라고 하는 행위는 사실 유대인의 유월절과 같은 행위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늘 말씀을 드리지만 우리는 종교인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유대인들은 유대교가 되어서 성경의 문자를 그대로 지켰습니다. 그것이 그들의 죄악이 되어서 사망의 길로 갔지만 깨닫지를 못하고 있었습니다.
성찬식입니까?
성경에는 물론 주의 만찬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 역시 기독교인들의 성찬식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주의 만찬이 무엇이라는 것을 깨닫고 주의 만찬을 먹는 성도가 되어야지 유대인들과 같이 성경의 문자를 의식적인 행위로 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이 바로 유대인의 유월절이고 기독교인들의 성찬식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의미입니다
우리에게 행위를 하라고 요구를 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성경의 문자를 보면 그것을 다 행위로 하고 있습니다. 특히 종교는 그것을 의식으로 더욱 발전을 시켜서 그 안에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것을 보고 자기들이 하나님을 믿는 것과 같은 착각 속에 빠지게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유대인의 유월절입니다
이 시대 기독교인들의 절기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제가 이 글을 쓰고 있는 날이 그들이 말을 하고 있는 성탄절이라고 하는 날입니다 기독교인의 성탄절입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는 성경에도 없는 이런 절기를 그리고 세상의 즐거움을 누리는 성도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기독교인의 성탄절입니다
우리는 그들과 같이 이 성탄절을 보내서는 안 됩니다 물론 우리 중에는 그런 성도님들이 없다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우리는 기독교인이 되어서도 안 되고 세상 사람들이 되어서도 안 됩니다 정말 성도의 삶이라는 것은 그런 모든 세상의 즐거움을 그러니까 한 부자와 같이 연락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고린도전서5:8절을 보겠습니다. (신 268쪽)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도 말고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도 말고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떡으로 하자”
유대인의 유월절입니다
그것은 율법에 따라 지키는 유월절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미 우리 성도님들은 유월절의 의미를 다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의미에 따라 유월절을 먹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우리는 종교인이 되어서는 절대로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입니다
고린도전서5장에서 음행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음행에 대해서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이 시대는 성경을 거의 문자적으로 보기 때문에 성경에서 말씀을 하고 있는 의미를 전혀 모르고 있고 그저 자기들의 행위를 보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음행입니다
교회와의 음행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의 말씀과 같이 이 시대 교회와의 음행이 얼마나 성행을 하고 있습니까? 그들은 성경을 보면서도 자기들이 교회와 음행을 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아니 고린도전서5장의 말씀을 진짜 문자 그대로 보면서 아비의 아내를 취한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생각을 거기까지 하고 있다는 그 자체가 대책이 없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들게 만들고 있습니다.
세상입니다
아무리 악한 세상도 아비의 아내를 취하지 않습니다. 하물며 교회 안에서 그런 일이 있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비유를 통해서 교회와 음행을 하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이 시대는 교회와 음행에 깊이 빠져 고린도전서5장의 말씀이 그대로 나타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말씀을 합니다.
사도 바울은 유월절을 먹는 것을 비유로 그러므로 명절을 지키자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이 의미적으로 유월절을 먹는 것을 명절을 지키자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주의 만찬을 나누는 것을 명절을 지키는 것으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사도 바울이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도 말고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도 말고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떡으로 하자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교회 안에서 율법의 행위를 하지 말자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유대인입니다
그리고 기독교인입니다 그들이 다른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율법을 지키고 행위를 한다는데 있어서는 같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자기들이 유대인들과는 다르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유대인이 유월절을 지키는 것과 같이 이 시대 교회 안에는 온갖 율법의 행위가 성행을 하고 있지만 그것이 묵은 누룩이고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이라는 것을 어느 누구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성도의 명절입니다
명절이라고 하니까 마치 유대인들과 같이 절기를 지키는 것으로 생각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누룩 없는 떡을 먹는 것을 사도 바울은 명절을 지키는 것으로 비유적으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어떤 명절도 지켜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니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문자를 행위로 해서는 안 됩니다
육의 사람입니다
그리고 영의 사람입니다 이 두 사람은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육의 사람은 성경의 문자를 보고 그대로 행하는 사람들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영의 사람은 성경의 문자를 보고 그 안에서 의미를 깨달아서 영의 일을 믿는 성도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유대인의 유월절을 지켜서도 안 됩니다
그리고 기독교인들의 절기도 지켜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 행위를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해서도 안 되고 절대로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도 요한은 처음부터 영의 생명에 대해서 우리에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영의 생명입니다
우리의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행위로 말미암지 않는다는 것을 성경은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오직 성령이 오심으로 해서 우리 안에서 믿음으로 역사를 해서 우리 안에 그 생명이 거하시고 있습니다. 유대인의 유월절을 지키는 사람은 기독교인의 절기를 지키는 사람은 이 생명이 거할 수 없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 계셨습니다.
이제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이 오니까 주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올라 가셨는가는 이제 뒤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지키고 있는 유월절을 책망하시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요한복음2:14절을 보겠습니다. (신 145쪽)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의 앉은 것을 보시고”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그는 성전 뜰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어 주는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유대인의 유월절입니다
그들이 어떻게 유월절을 지키고 있는가를 성경을 보면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그러니까 율법에 기록이 되어 있는 그대로 문자 그대로 유월절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유대인들만의 행위라고 생각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시대 역시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그대로 성찬식을 행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입니다
이스라엘입니다 그들이 얼마나 성경의 문자에 철저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들은 성경의 문자에서 토씨 하나도 틀리지 않게 성경을 보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정도로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데 있어서 철저하게 믿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것이 다 그림자라는 것을 그들은 깨닫지를 못했습니다. 율법이 그림자를 것을 알았으면 그 뒤에 있는 실체를 보기 위해서 노력을 했고 그랬으면 그들은 구원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의 언어 히브리어로 알고 있는 그 뜻을 아는데 급급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지금 기독교입니까?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믿는 것과는 게임이 안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들이 성경을 얼마나 철저하게 보았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 시대와 같이 성경을 자기들 마음대로 편리한대로 해석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들은 철저하게 문자에 입각을 해서 성경을 보았습니다.
절기입니다.
그들은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그대로 지켰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어떻습니까? 참으로 이해가 안 되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신학교에서 교리로 어떻게 배우고 있습니까? 구약의 율법을 보면서 자기들이 정한 대로 해서 제사법과 시민법은 폐하여졌다고 말을 하고 있고 도덕법은 살아 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신학교에서 배운 교리입니다
그런 그들이 교회 안에서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수많은 절기들을 지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에 있는 절기도 지키고 자기들의 필요에 따라서 만든 절기도 지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은 완전히 무시가 되고 있고 자기들의 종교에서 정해서 하면 성경도 더 이상 필요가 없는 그런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중적입니다
말로는 목사들이 교인들에게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자기들이 신학교에서 배운 그대로 제사법과 시민법은 폐하여졌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 그들이 제사는 드리지 않고 있지만 절기는 지키고 있습니다. 그것도 자기들의 필요에 따라 절기를 지키고 있고 심지어는 성경에도 없는 것을 만들어서 지키고 있습니다.
제가 이 설교를 쓰고 있는 오늘이 성탄절입니다
이 성탄절을 누가 만들었습니까? 아니 성경에 성탄절이라는 절기가 있습니까? 주님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히브리서에서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시작한 날을 만들었습니다.
정말 성경대로 하시기 바랍니다. 성경대로 하지 않으면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을 하는 그 자체가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분명히 주님을 하나님으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신 날이 어디 있습니까?
이 세상에 육신을 입고 오신 날입니까?
그것도 전혀 근거도 없는 날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육신을 믿는 성도가 아니라 영의 일을 믿는 성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를 믿는 성도가 아니라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삼일 만에 영으로 부활을 하셔서 하늘에 올라가신 주님을 믿고 있습니다.
성탄절을 지킵니까?
아마 그들은 그들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해서 거룩하게 이 날에 예배를 드릴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자기들이 만든 시작한 날도 없는 그분이 태어났다고 하면서 이 날을 만들어서 지키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 시대 모든 기독교인들이 오늘 성탄절에 교회에 나가서 예배를 드리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 자기들이 구원을 받았다고 믿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알아야 합니다.
유대인의 유월절입니다 그것은 그래도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반포를 하신 이스라엘의 삼대 절기 중에 하나입니다 그런데 성탄절은 하나님께서 반포를 하신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종교 안에서 만들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입니다
그 외에 것을 더하는 자는 어떻게 된다는 것을 요한계시록 마지막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구원을 받는데 있어서 모든 말씀이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이 성경이 부족해서 성경 외에 것을 만들어서 지키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겠다고 하는 것과 같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안타깝습니다.
오늘날 모든 교회가 오늘 성탄절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것이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이라는 것을 모르고 사람에 의해서 만든 절기를 교회 안에서 지키고 있습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5장에서 아비의 아내와 음행을 하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사람들은 아비의 아내와 음행하는 것에 빠져 쾌락을 누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절기입니다.
율법대로 행하고 있는 이스라엘을 주님께서는 책망을 하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파는 자들을 내어 쫓으시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마도 주님께서 이 시대 오셨다면 성탄절이라고 하면서 거룩하게 예배를 드리는 그들에게 똑같이 하셨을 것이 분명합니다.
신명기14:25절을 보겠습니다. (구 285쪽)
“그것을 돈으로 바꾸어 그 돈을 싸서 가지고 네 하나님 여호와의 택하신 곳으로 가서”
유대인의 유월절입니다
그들은 성경을 억지로 풀었습니다. 그들이 왜 그렇게 성경을 억지로 풀었는가 하면 종교성이 너무도 강했기 때문에 성경을 억지로 풀면서 자기들이 하나님께 제사를 하는 것을 최고의 것으로 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신명기14장의 말씀입니다
십일조에 대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 십일조의 문제는 우리나라 기독교에서는 부딪치는 것이나 거치는 것이 되어서 결국에는 이 십일조로 인하여 모두가 사망의 길로 가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십일조에 대해서 깨닫고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 십일조에 대해서 말씀을 하지 않겠습니다.
이미 그리스도편지에 설교로 말씀을 했기 때문에 그것을 보시면 충분히 알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종교성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어떻게 섬겼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이 십일조에 있는 말씀을 보고 예루살렘에서 먼 곳에 사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절기를 지키거나 제사를 드리러 올 때에 돈으로 가져와서 바꾸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왜 그렇게 했습니까?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강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최고로 좋은 것을 드리려고 했습니다. 또 율법에도 흠 있는 것은 드리지 말라고 받지 않으신다고 분명히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먼 곳에 있습니다. 지금과 같이 교통이 발달이 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는 보름 이상을 걸어서 와서 제사를 드려야 했습니다.
그런 그들입니다
오는 도중에 제물이 병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다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 앞에 드릴 수 없다는 것을 그들은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다시 가서 좋은 것으로 흠 없는 것으로 가져와야 합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십일조의 율법에 보니까 행로가 멀면 그것을 돈으로 바꾸어서 그곳에 가서 그 돈으로 사서 십일조를 먹으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율법을 모든 것에 적용을 시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성전 앞에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자와 돈을 바꾸어 주는 자가 있었던 것으로 성경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종교성입니다
그들이 얼마나 하나님을 잘 믿으려고 했는가를 알 수 있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이 시대에 있는 기독교인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그들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데 조금도 흠이 없게 드리려고 했고 그래서 성전 앞에는 좋은 소와 양과 비둘기파는 자가 있었고 돈도 좋은 것으로 바꾸어 주는 자가 있었습니다.
기억이 있을 것입니다
최소한 4-50년 신앙생활을 한 사람들은 한번쯤은 다 그렇게 해 보았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헌금을 할 때 미리 준비를 하고 심지어는 하나님께 드린다고 하면서 다리미로 다려서 아주 깨끗하게 잘 보관을 해서 봉투에 넣어서 드렸던 경험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저 역시 복음을 모르고 그저 종교에 의해서 끌려가고 있을 때는 정말 하나님을 진심으로 믿고 싶어서 그런 행위까지 했던 기억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로 이런 것이 종교성입니다 그리고 목사가 그런 이야기를 하면 순진한 교인들은 정말 그런 것으로 생각을 하고 실제 그렇게 해서 헌금을 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유대인의 유월절에도 그렇게 했습니다. 아니 유대인들은 제사를 드리러 올 때 다 그렇게 했습니다. 하나님께 가장 좋은 것을 드리기 위해서 성전 앞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파는 자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가장 좋은 것을 골라서 비싼 값을 주고 사서 제사장에게 끌고 가서 제사를 드렸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성경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영생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성경은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해서 기록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종교가 되어 있는 유대인들은 육체의 행위를 통해서 사람의 이성을 따라 가장 좋은 것으로 제사를 드리려고 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가 믿음이 있다고 생각을 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드리는 것에 있어서 아까워하지를 않고 있고 가장 좋은 것으로 드리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모든 사람들의 심리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좋은 것으로 드려야 하나님께서 내 정성을 받으신다고 생각을 하기 때문에 그런 행위를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종교입니다
그런 행위가 다 종교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율법을 통해서 이미 1장에서 말씀을 드린 것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 주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것을 문자 그대로 보면서 행위에 열심을 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흠 없는 것입니다
그것을 드리는 것이 믿음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사실 무당이 하는 것과 무엇이 다릅니까? 무당들이 무엇을 하다가 조금이라도 잘못이 되면 부정이 탄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과 같이 유대교인들도 그렇게 생각을 했고 이 시대 기독교인들도 그런 생각이 자기 이성을 사로잡고 있기 때문에 똑같은 행위를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10:1절을 보겠습니다. (신 362쪽)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이스라엘입니다
그들은 몰랐습니다.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정말 율법대로 최선을 다 해서 하나님을 믿으려고 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이제 성경에 분명히 밝히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참 형상이 아닌 그림자에 매달려서 그것을 지키느라고 이스라엘과 같은 열심을 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입니다
그들이 율법을 보고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자들을 성전 앞에 두고 돈을 받고 바꾸어 주었던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그들이 왜 그렇게 했는가 하면 어떻게 해서라도 하나님께 더 좋은 제물로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물론 이 시대는 성전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자기들이 이러한 행위를 하지 않는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소와 양과 비둘기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어 주는 사람들은 없을지라도 역시 가장 좋은 것으로 교회 안에 가지고 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또한 알아야 합니다.
옷입니다.
남자들은 거의 정장을 입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자들은 단정한 옷을 입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물론 헌금으로 모든 것을 다 하고 있지만 그 헌금을 얼마나 정성을 다 해서 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목사들은 가운을 입고 있고 성가대는 가운을 입고 노래를 연습을 하면서 종교적인 의식을 행하는데 있어서 최선을 다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모두가 무엇입니까?
율법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성전 안에서 했던 모든 행위가 다 율법이었고 이 시대 교회 안에서 하고 있는 모든 행위가 다 율법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율법은 참 형상이 아니라고 분명하게 말씀을 하고 있지만 유대인들도 그렇고 기독교인들도 역시 율법을 지키는 일에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그들이 하는 모든 행위입니다
그들은 율법이 아니라고 할지 몰라도 자기 육체로 하고 있다면 다 율법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하신 것만 의고 우리가 하고 있는 교회 안에서 행하고 있는 모든 것은 율법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장차 오는 좋은 일에 그림자라는 것을 알아야 하는데 아직까지 그 그림자로 행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이 이 세상에 오셔서 이루신 모든 것은 의입니다 그분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신 구속의 모든 일은 의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모든 행위는 다 율법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의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의가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그것을 악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도 그렇고 이 시대 역시 의와 악에 대해서 전혀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내가 우리가 옳은 일을 했어도 그것은 의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이 교회 안에서 하는 모든 행위는 다 악하다는 것을 알아야 하지만 사람들은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만이 의를 행할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인생은 의를 행할 수 없습니다. 의를 행할 수 없는 우리가 교회 안에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하는 모든 행위는 다 악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하지만 사람들은 종교적인 열심으로 세뇌가 되어서 자기들이 하고 있는 행위가 의롭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영의 생명입니다
우리 인생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생명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느끼고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이 더 어렵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시대마다 복음을 전하는 자를 세우시고 있고 또 성령을 보내 주심으로 해서 듣고 믿을 수 있게 역사를 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문자입니다
그것은 그림자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 문자를 보고 상고를 해서 그 의미를 알아서 생명에 대해서 깨달아야 합니다. 아니 하나님께 깨어 지혜를 구하고 성령을 구해야 합니다. 그런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이 시대도 은혜를 주시고 있고 이 영의 생명을 얻을 수 있게 역사를 하고 있다는 것을 믿고 사모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종교적인 행위입니다
그것이 아무리 하나님을 믿는 행위라 해도 그것은 의로운 일이 될 수 없고 선한 일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을 오해를 했기 때문에 아니 문자만을 보고 더 이상 깊이 상고를 하지 않고 지혜를 구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종교적인 열심으로 성전 앞에 소와 양과 비둘기파는 자와 돈을 바꾸어 주는 자가 있었습니다.
제사장입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어른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제사를 드리면서도 의미를 모르다보니까 소와 양과 비둘기파는 자와 돈을 바꾸어 주는 자가 있는 것을 허용을 했습니다. 그리고 실제 그런 좋은 것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려고 했고 그것이 이스라엘로 하여금 행위에 빠져 사망의 길로 가게하고 있지만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열심입니다
그것이 자기를 사망으로 끌고 간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일이라면 사람들은 물불을 가리지 않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자기가 믿는 신이고 또 바알의 사상까지 있어서 축복을 받는다고 믿고 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보이는 성전입니다
주님께서 그 보이는 성전에서 음행을 하고 율법을 지키는 것을 보시고 그 성전을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게 무너지게 하셨습니다. 그들이 성전 된 주님의 육체에서 주님을 알아가는 것이 아니라 행위에 빠지는 것을 보고 로마에 의해서 완전히 훼파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방의 교회가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자기들이 율법으로 성전을 지을 수 없으니까 교회를 세우고 있습니다. 종교적인 열심으로 교회를 세우고 있고 그 교회가 관광지가 되었고 성지 순례를 한다고 하면서 다니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현대 사회에서도 사람들은 할 수만 있다면 모든 것을 다 해서 교회를 거대하게 세우는 일에 열심을 내는 종교적인 열심에 깊이 빠져 있습니다.
사람이 하는 일입니다
이 지구 안에서 우리가 하는 모든 일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믿는 행위라 해도 그것은 의로운 일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교회를 세우고 있습니다. 더 크고 더 높은 교회를 세우기를 경쟁을 하고 있고 그렇게 하는 자기들의 행위를 보면서 마치 믿음이 있는 것으로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2:15절을 보겠습니다. (신 145쪽)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양과 소와 함께 그들을 모두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돈 바꾸어 주는 사람들의 돈을 쏟아 버리시고, 상을 둘러 엎으셨다.”
이스라엘입니다.
그들은 율법주의에 빠져 있었습니다. 왜 율법주의에 빠져 있는가 하면 하나님에 대한 열심이 그들을 율법주의에 빠지게 만들었습니다. 성경에서 영생을 얻기를 상고해야 하는데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다는 행위를 보이려고 하다가 결국에는 율법주의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주님께서 예배를 하는 자는 신령과 진정으로 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육체가 되어서 모든 것을 다 육체로 했고 그것이 율법의 행위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 그들을 보고 주님께서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셔서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어 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셨습니다.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지금 이 일이 상상이 된다고 생각을 합니까?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나와서 성막을 짓고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면서 하나님을 섬겨왔습니다. 그리고 최고의 제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것을 너무도 당연하게 생각을 해 왔고 천년 이상을 이러한 행위를 당연하게 생각을 하면서 했는데 주님께서 그것을 채찍으로 때리면서 쫓아내시고 있습니다.
주님의 일입니다
사실 이 일을 다른 선지자가 와서 했다면 아마도 그는 살아 있지 못했을 수 있습니다. 아니 제사장들이 가만히 두지를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이 일을 하시니까 감히 어느 누구도 나서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만약입니다
제가 여의도 순복음 교회 앞에서 채찍을 들고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우상의 집에 들어가지 말라고 하면서 휘둘렀다고 생각을 해 보시기 바랍니다. 물론 경찰이 와서 제지를 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마도 테러를 당하지 않을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입니다
그는 먼저 1장에서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고 그분이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2장에서 가나 혼인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의 혼인 잔치가 아니라 주님이 주시는 기쁨으로 천국의 혼인 잔치에 참예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성전입니다
그들이 또 성전에서 율법에 따라 종교적인 열심으로 제사를 드리고 있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렇게 율법으로 제사를 드리고 있는 이스라엘을 깨우치시기 위해서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서 소와 양과 비둘기파는 자와 돈을 바꾸어 주는 자들의 상을 엎으시고 그들을 성전에서 쫓아내시고 있습니다.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당시는 절대적인 종교적인 국가였습니다. 정말 누군가 돌로 친다 해도 어느 누구도 말리지 않을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하나님께 좋은 것으로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소와 양과 비둘기파는 자들과 돈을 바꾸어 주는 자들이 있었는데 그들을 내어 쫓으시고 있습니다.
이 말씀입니다
4복음서에 다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거의 비슷하게 기록이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이 가장 자세하게 기록을 했습니다. 자세하게 기록을 했다는 말씀은 사도 요한은 계속해서 말씀을 드리지만 영생에 대해서 말씀을 하기 때문에 자세하게 기록할 수밖에 없습니다.
잠언19:29절을 보겠습니다. (구 932쪽)
“심판은 거만한 자를 위하여 예비된 것이요 채찍은 어리석은 자의 등을 위하여 예비된 것이니라”
에베소서5:17절을 보겠습니다. (신 315쪽)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채찍으로 내어 쫓으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성전에서 하나님께 좋은 것으로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행위에 열심을 내는 것을 보고 주님께서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셔서 소와 양과 비둘기파는 자와 돈을 바꾸는 자들의 상을 엎으시고 내어 쫓으시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이스라엘이 어리석음에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지혜가 없고 어리석음에 빠져 영생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영생에 대해서 깨닫지를 못하고 있는 그들에게 주님께서 오셔서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들의 상을 엎으시고 채찍을 만드셔서 내어 쫓으시고 있습니다.
채찍입니다
어리석은 자의 등을 위한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이스라엘이 성전 앞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파는 자와 돈을 바꾸어 주는 자들이 있는 것을 보고 그들의 어리석음을 깨우치기 위해서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셔서 그들의 상을 엎으시고 내어 쫓으시고 있습니다.
실제 때리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의 등을 실제 때리지는 않았지만 채찍이 의미를 하고 있는 뜻이 잠언의 말씀과 같습니다. 이스라엘이 영생에 대해서 너무도 어리석음에 빠져 율법의 문자를 보고 행위를 하고 있는 것을 보고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셔서 성전에서 내어 쫓으시고 있습니다.
제사를 잘 드리기 위한 일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율법의 행위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다고 하면서 하는 모든 행위가 다 율법의 행위라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어리석어서 율법의 행위를 하고 있는 것을 보고 소와 양과 비둘기파는 자와 돈을 바꾸는 자들을 성전에서 내어 쫓으시고 있습니다.
어리석은 자입니다
이 시대도 모두가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어리석음에 빠져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는 일에 빠져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제사를 기뻐하시지 않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그들은 성전에서 하나님을 아는 것을 하지 않고 제사를 드리는 일에 열심을 내고 있었습니다.
이 시대는 다릅니까?
똑같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물론 성전은 없어졌습니다. 아니 이방인들은 제사장이 없기 때문에 성전을 지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교회라는 건물을 지어 놓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교회라는 건물을 지어 놓고서 그 안에서 역시 마찬가지로 수많은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왜 교회를 짓습니까?
다 하나님에 대한 열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교회를 짓고 있습니다. 유럽에 있는 천주교의 성당들을 보시기 바랍니다. 얼마나 대단하게 지어 놓았습니까? 그렇게 짓고서 모두가 그 안에서 율법의 행위를 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셔서 이스라엘의 어리석은 자들을 성전에서 내어 쫓으셨습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에게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누가 어리석은 자인 줄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셨습니다.
이스라엘만 어리석다고 생각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방의 교회 역시 어리석은 자들로 가득하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 어리석은 자들에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를 이해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누가 어리석습니까?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예하는 자를 어리석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무슨 열매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영생을 얻지 못하는 그런 일에 참예하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에베소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에게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 중에 벌써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예를 하는 자가 있기 때문에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영생을 얻지 못하는 일입니다
그 일에 참예하는 자가 되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셔서 성전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파는 자와 돈을 바꾸는 자들을 내어 쫓으신 것은 그들이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예를 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도 그렇고 이방인들도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이 무엇인가를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교회입니다
그 안에서 어두움의 열매 없는 일에 참예를 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음행하는 자나 탐하는 자나 우상숭배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예를 하는 자는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얻을 수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 일입니다.
이스라엘이 이렇게 예루살렘 성전에서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예를 하는 것을 보고 예수님께서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셔서 그들의 등을 때리시는 것과 같이 비유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스라엘은 그렇게 했어도 자기들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이 에베소교회에 사람들에게 같은 말씀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전도서12:11절을 보겠습니다. (구 960쪽)
“지혜자의 말씀은 찌르는 채찍 같고 회중의 스승의 말씀은 잘 박힌 못 같으니 다 한 목자의 주신 바니라”
성경은 진행형입니다
이스라엘만 잘못을 했다고 생각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지금 이 시대 성전이 없다고 해서 이방의 교회는 이스라엘과 다르다고 생각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전은 물론 주님의 육체입니다 그러나 그 성전에 모여 있는 이스라엘은 교회라는 것을 또한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스라엘이라는 교회입니다
모두가 율법주의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런 이스라엘을 주님이 오셔서 성전에서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시고 율법의 행위를 하고 있는 그들의 모든 것을 내어 쫓으시고 있습니다. 그것을 전도서에서는 지혜자의 말씀은 찌르는 채찍 같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영의 일입니다
물론 이스라엘에게는 실제 있었던 일입니다 그들은 우리 이방인을 위한 예표가 되기 때문에 실제로 모든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일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을 예표로 해서 성경의 영의 일이 다 기록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실제로 우리 교회 안에서 채찍으로 등을 때리는 것과 같은 일은 없지만 우리는 성경을 보고 등을 맞는 것과 같은 심정으로 깨달아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전입니다
이제 뒤에서 말씀을 하고 있지만 예수는 성전 된 자기 육체를 말씀을 하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성전을 왜 이스라엘에게 짓게 하셨는가 하면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하실 일들을 이 성전의 기구 하나하나에 다 비유로 보여주시고 있습니다. 그것을 보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게 성전을 짓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이스라엘은 그 성전에서 율법을 지키는 어리석음에 빠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이스라엘에게 주님께서 오셔서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셔서 율법을 지키는 그들을 내어 쫓으시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 하시는가 하면 성전 된 자기 육체를 보고 영생을 얻게 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ne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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