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강, 가난한 자는 거짓말하는 자보다 나으니라
잠언19:22-23절을 보면
“사람은 그 인자함으로 남에게 사모함을 받느니라 가난한 자는 거짓말하는 자보다 나으니라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사람으로 생명에 이르게 하는 것이라 경외하는 자는 족하게 지내고 재앙을 만나지 아니하느니라”
성경을 보시기 바랍니다.
어느 정도까지 보아야 하느냐면 나 혼자서 성경을 보아도 그 말씀이 무슨 말씀인가를 알 수 있을 정도까지 보아야 합니다. 마치 성경은 목사들이나 신학자들이 보는 것으로 오해를 해서는 안 되고 또 그들이 전하는 말을 전적으로 신뢰를 해서도 안 됩니다
저 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을 전하는 사람은 역시 사람이기 때문에 사람의 생각이 들어가게 되어 있고 또 어려서부터 자기가 살아온 환경이나 그리고 가지고 있는 사상을 첨가할 수 있기 때문에 더욱이 본인이 성경을 보아야 하고 그런 말에 미혹이 되어서는 안 되며 내 스스로 분별을 해야 합니다.
왜 신앙생활을 합니까?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라면 차라리 다른 종교를 믿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이 세상의 종교 중에서 가장 잘 먹고 잘 사는 종교인이 있다면 아마 유대교인들일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믿는 유대교를 믿는 것이 제일 잘 사는 현명한 길이라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기독교의 본질을 모르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경을 모르기 때문에 그런 기복주의에 빠져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뿐 아니라 교회가 정치에 너무 결탁이 되어 있고 심지어는 목사들이 무슨 정당 홍보원이나 되는 것 같이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전하는 것을 빙자해서 자기 사상을 그리고 지지하는 정당을 홍보하는 아주 이상한 행태를 보이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성도는 나라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위정자들을 위해 기도를 해야 하지만 어떤 특정한 정당을 위해 그리고 홍보원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하고 있다면 그는 참 진리를 전하는 자가 아니라 자기 이익을 위해 종교를 이용하는 있는 거짓말을 하는 자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성경은 오묘합니다.
어느 한 말씀을 그냥 보아서는 안 되고 그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생각을 해야 하고 또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단지 그 문장의 말씀만 보았다가는 거짓말을 하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사람이 거짓말을 안 하고 살 수는 없습니다.
육적으로는 우리는 늘 내가 원하든 원치 않든지 거짓말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느 누가 거짓말을 하고 살고 싶겠습니까? 더구나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들이라면 누구라도 정직하게 살아가고 싶을 것입니다
육적인 거짓말을 늘 하고 살아갑니다.
그 이유는 나는 진실 되게 이야기를 했어도 바로 내일이라는 날에 무슨 일이 있을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또 사회가 바뀌고 사상이 바뀌다 보니까 지금 진실이라고 하는 그것도 거짓이 되고 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조선 시대만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불과 100년 전만해도 양반과 천민 그리고 노예가 있어서 그것을 아주 당연하게 받아들이면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지금 누구라도 어떤 사람을 노예로 취급을 한다면 아마 지탄의 대상이 되고 법에 의해 처벌을 받게 됩니다. 지극히 정상적이었던 그것이 이제는 거짓이 되고 말았습니다.
고려시대는 불교가 국교였습니다.
그러나 조선이라는 나라가 세워지고 그 불교의 패악을 정치가들이 정죄를 하면서 불교는 거짓으로 바뀌고 유교가 성행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모든 사람은 불교가 참 종교로 알고 있었지만 세월이 흘러 그리고 국가에서 그 종교를 탄압을 하고 유교를 세우니까 불교는 거짓으로 바뀌고 말았습니다.
세상은 그렇습니다.
지금 내가 참이라는 하는 그것이 세월이 지나고 나면 거짓으로 변하고 마는 것이 세상이기도 합니다. 그러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인생이 과연 거짓말을 안 하고 살아가고 있다고 누가 장담을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사는 자체가 거짓이며 늘 거짓말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정직합니까?
지금 내 눈에 보이고 내 사상에서 정직할 뿐입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또 사상이 바뀌고 나면 내가 정직이라고 확신을 하면서 평생 그렇게 산 모든 것이 다 거짓으로 바뀌고 말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지금 북한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이 자기들이 살아가고 있는 그것이 정직이고 진실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볼 때는 그들의 사상은 모두가 거짓으로 보입니다. 그럼 우리가 옳다고 생각하는 그 사상이 과연 참 일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또 다른 사상에서 보면 우리는 거짓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그렇습니다.
또한 인생의 모든 생각도 그렇습니다. 나는 진실이라고 단 한 번도 의심을 하지 않았던 그것이 거짓으로 변하고 마는 것이 바로 인생입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예수님을 죽이면서 과연 그것이 거짓이라고 생각을 했다면 그렇게 할 수 있었겠습니까?
절대 아닙니다.
그러나 자기들은 정직하고 예수님은 거짓을 증거하고 있다고 확신을 했기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일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역시 내가 믿고 있는 그 신앙이 이스라엘과 같을 수 있다는 것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미를 모르고 그것을 부정하고 있는 행위들을 하고 있다면 이스라엘과 똑 같습니다.
모르면 그렇게 합니다.
자기는 진실이라고 하는 그 행위가 모르고 그저 이스라엘의 군중 심리에 의해 따라가고 있다면 그것은 너무도 불행한 일입니다. 그런 불행을 전혀 생각하지도 않고 성경을 볼 생각도 안하고 연구할 생각도 안 하고 남이 가르쳐 주는 대로 따라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자기 영혼을 사람에게 맡기고 있는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이해가 안 됩니다
그렇게 천국을 소망한다고 말로는 하면서도 실제 그들의 행동을 보면 전혀 천국과는 딴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저 이생에서 신앙생활을 잘하고 또 육신의 축복을 받고 살아가고 있는 그것으로 만족을 하고 그것이 마치 천국 티켓을 받은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너무도 게으릅니다.
신앙생활에는 그렇게도 부지런한 그들이 자기 영혼의 문제에 있어서는 너무도 게으른 것을 보게 되고 또 너무도 태평합니다. 그리고 자기는 삶에 바빠서 성경을 굳이 연구를 하고 또 생각할 필요성도 못 느끼는 것 같습니다. 그런 삶은 이 세상 사람들의 삶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오셨을 당시 거의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은 바리새인의 사상에 빠져 자기들이 하나님을 바르게 믿고 있다고 확신을 했습니다.
무엇이 다릅니까?
그들이 바리새인의 사상을 그대로 수용을 한 것이나 지금 내가 목사들이 전하는 그 말을 맹목적으로 아멘으로 화답하는 것이나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그들도 자기들은 삶에 충실하고 바리새인들이 전하는 그 말을 따르기만 하면 천국에 간다고 확신을 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받아 들였습니다.
내가 모르면 안 됩니다.
설령 내가 다니고 있는 교회의 목사가 바른 복음을 전한다 해도 내가 모르면 그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내가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면 그는 그저 육적으로 따라가고 있는 사람에 불과합니다. 성경은 늘 다수를 버렸는데도 지금 이 시대 역시도 자기가 다수 안에 있다는 그것으로 위안을 삼고 있고 그 다수 안에 있는 자기가 바르다고 믿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10:5절을 보면
“그러나 저희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신 고로 저희가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이 다수가 누구입니까?
바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자손입니다
당연히 가나안에 들어가야 하는 사람임에 틀림이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다수를 기뻐하시기 않고 오히려 멸망을 시키고 말았습니다. 어디서 멸망을 당했습니까? 광야입니다 그 광야는 바로 지금의 교회입니다
교회 안에 있는 다수가 멸망을 당했습니다.
자기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자손이라고 하는 아주 정통의 사람들이 교회라는 광야에서 멸망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자기가 정통이라는 다수 안에 있는 그 자체만으로 가나안에 무조건 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도 다수를 멸망시키신 하나님이신데 지금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들도 아까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을 하나님께서 아까워하실 것이라 생각합니까?
모르면 이스라엘과 같이 광야에서 죽습니다. 믿음을 모르면 아브라함 자손이라고 하는 이스라엘이 죽은 것 같이 영적인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믿고 있는 이 시대 교인들도 마찬가지고 죽임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 화를 면하려면 내가 알아야 합니다.
지금은 성경이 문자화 되어 있어서 자기가 정말 간구하는 마음이 있으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깨달을 수 있게 지혜를 주시고 있습니다. 다만 사람들이 세상에 바빠서 그리고 너무 사람을 믿는 그것이 문제지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지금도 가까이 가셔서 그들을 가나안으로 인도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기 바랍니다.
“사람은 그 인자함으로 남에게 사모함을 받느니라 가난한 자는 거짓말하는 자보다 나으니라”
사람이 인자함으로 남에게 사모함을 받느니라...
성경 아래에 보면 이 말씀을 인자를 베푸는 것이 사람의 즐거움이라고 기록해 놓았습니다. 마음이 어질고 자애롭게 행하는 것이 사람의 즐거움이라는 말씀입니다 누가 인자할 수 있느냐면 절대로 율법주의자는 인자할 수 없다는 것을 먼저 깨달아야 합니다.
겉으로는 합니다.
인자의 모양은 내고 있지만 그들은 그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에 그것이 겉으로는 나타난다 해도 모양만 낼 뿐이지 인자를 베풀지 못하고 있습니다. 정말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면 절대로 율법을 강요하거나 그것을 지키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달리기를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에게 건강을 위해서는 마라톤을 해야 한다고 하면서 자기들이 하고 있는 그 마라톤을 시킨다면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율법주의자들은 자기들이 하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못한다고 하는 그 사람이 이상하게 보입니다. 그리고 못한다고 하면 노력도 하지 않는다고 정죄를 하고 억지로 끌고 갑니다.
그 결과는 어떻습니까?
반드시 죽게 되어 있습니다. 물론 사람들이 볼 때 마라톤을 완주하는 것은 너무도 근사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그 처지를 이해해야 하는데 그들은 그런 처지보다는 근사한 모습이 더 좋게 보이기 때문에 억지로 요구를 합니다. 바로 여러분이 지키고 있는 율법이 그와 같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사랑이 없습니다.
아니 사랑한다고 하는 그들의 그 행위가 다른 사람을 오히려 힘들게 하고 있습니다. 자기들이 해 보니까 너무 근사하니까 그를 사랑한다면 하면서 그의 처지를 전혀 생각하지 않고 억지로 끌고 가고 있고 그것을 못하면 이제는 정죄를 하기 시작합니다. 그것이 여러분이 그토록 지키고자 하는 율법의 속성이라는 것을 깨닫기 바랍니다.
사랑한다면 그의 처지를 먼저 이해를 해야 합니다.
나와 똑 같이 행하는 그의 모습을 사랑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은 나와 전혀 다를지라도 또 내가 하는 그것을 못할지라도 그를 인정해 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러나 인자함이 없기에 그것을 하지 못하고 오히려 자기들과 같아지기만을 요구합니다.
가난한 자를 용납하지 못 합니다
지적으로 가난하거나 물질적으로 가난하거나 또 선하고 의롭지 못해 가난한 그것을 이해하지 못 합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은 나와 다르게 보이는 그 가난이 오히려 거짓말 보다 낫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정죄를 하고 있는 세상 사람들 보다 정죄하는 내가 더 나쁘다는 말씀입니다
누가 더 나쁩니까?
거짓말 하는 자보다 가난한 자가 낫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거짓말하는 자보다 가난한 자가 나은 가를 알아야 하며 그래야 우리는 거짓말 하는 자가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가난한 자는 되어도 거짓말하는 자는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다 가난합니다.
무엇으로 가난하냐면 율법의 의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의로는 모두가 가난한 사람입니다 자기가 아무리 의롭게 살았다 해도 그 역시도 가난한 사람일 수밖에 없습니다. 다윗도 시편에서 자기를 가난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한 분 이외에는 아브라함도 사도 바울도 성경에 나오는 그 누구라도 다 가난합니다. 가장 의롭게 산 욥도 역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부자는 아니었습니다.
인정해야 합니다.
그런데 가난한 것을 인정하기 보다는 어떻게 하든지 부자가 되려고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의 한 모양을 지키면서 그것을 보면서 자기 스스로 부자가 되려고 하는 것이 바로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죄인이라고 말하는 그들이 죄인임을 인정하기 보다는 의인이 되려 하고 있습니다.
누가 거짓말하는 자입니까?
죄인이 노력하면 의인이 될 수 있는 것처럼 이야기하는 사람이 거짓말하는 자입니다 겨우 몇 가지 지키고 있는 율법에 취해서 마치 그런 율법의 의로 인하여 천국에 갈 수 있는 것처럼 주장하는 사람들이 거짓말 하는 자입니다
우리는 죄인입니다
죄인이 죄인답게 사는 것이 아니라 죄인이 의인답게 살려고 하는 것 자체가 거짓말이라는 말씀입니다 제가 죄를 마음 놓고 지라고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죄인은 가난하지만 죄인이 의인과 같이 되려고 행동을 하는 것은 거짓말하는 것입니다 개는 어떻게 해도 개입니다. 그런데 죄인이 자기 행동을 조금 잘한다고 해서 의인이 될 수 있는 것으로 말하는 것은 정말 거짓말 장이입니다
개가 사람 된다고 해도 믿는 것이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제가 여러분이 선하게 살고 의롭게 사는 것 자체가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복음을 위해서 분명히 그렇게 살아야 하지만 마치 그것이 천국에 가는 증표인 것처럼 말을 하고 모든 사람이 그렇게 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다
누가 그렇게 주장합니까?
바로 율법주의자들은 자기들이 하는 행위를 다른 사람에게 하도록 요구를 하고 있고 그런 행위를 하는 사람들을 칭찬하면서 그것이 믿음인 것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정말 바로 깨닫기 바랍니다.
내가 선하고 의롭게 사는 것과 율법을 지키는 것은 전혀 다른 본질의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다수의 사람들은 율법을 지키는 것이 마치 선하고 의롭게 사는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물론 자기들끼리는 그것이 선하고 의롭게 보일 수 있어도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하나도 의롭지 않다는 것을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교인들에게 의롭게 보이려고 하는 것은 율법주의입니다
성도는 교인들에게 의롭게 보이기보다는 아직 복음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의롭게 보여야 합니다. 그래야 그가 내가 가진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 아닙니까? 내가 주일을 지키고 십일조를 내고 하는 것은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전혀 의롭지 않다는 것을 깨닫기 바랍니다. 내가 교회 안에서 찬송을 부르고 기도를 하고 하는 모습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전혀 선하게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기 바랍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부자가 되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하지 않는 것을 자기들은 한다는 그것을 보면서 마치 천국을 예약을 한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과 비교를 해서 엄청난 부자가 되어 있다는 말씀입니다 실제로는 세상 사람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가난한 자들이 율법에 취해서 스스로 부자가 되어 있습니다.
거짓말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율법의 의로 가난한 자임을 모르고 마치 세상 사람들과 다르다고 말하는 그것이 거짓말입니다 가난한 자는 구원을 받을 수 있지만 거짓말을 하는 자는 결단코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무엇이 거짓말하게 만듭니까?
여러분이 교회 안에서 지키고 있는 그 율법이 세상 사람과 차별을 두고자 하는 그 행위들이 거짓말을 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전혀 그렇지 않으면서도 마치 세상 사람들과 다른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깨달아야 하는 것은 세상 사람은 죄인이지만 교회 안에는 의인과 악인이 있다는 것입니다. 죄인은 구원을 받을 수 있지만 악인은 절대로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의인이 되려고 하는 자는 악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말미암지 않고 율법으로 의인이 되려고 하는 자는 그것으로 세상 사람들과 차별을 두고자 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다 악인입니다 그리고 거짓말하는 자입니다 내가 지키고 있는 단 한가지의 그 율법이 나로 거짓말을 하게 만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방해하는 것이 바로 율법입니다
율법이 없이도 얼마든지 선하고 의롭게 살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할 수 있는데 교회 안에 있는 다수의 율법주의자들은 율법이 없이는 선하고 의롭게 사는 방법을 모르고 있습니다. 아니 율법이 없이는 선하고 의롭게 살 수 없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사실 그 율법으로 말미암아 자기 마음에서는 부자가 되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그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전혀 선하지도 않고 전혀 의롭지도 않은 그것을 지키겠다고 노력합니다.
거짓말하는 자가 되지 마세요.
내가 거짓말을 하고 싶어서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지키다 보면 나도 모르게 거짓을 말하게 됩니다. 아니 참 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볼 수 없게 하는 그 율법으로 말미암아 방해를 받아서 거짓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내 행동은 모두 거짓입니다
교회 안에 있는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이 다 칭찬을 한다 해도 내가 하는 모든 행위는 다 거짓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서 오셔서 하신 모든 행위는 다 참입니다. 그런데 그 행위를 주장하면 그것은 거짓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나는 가난한 자로 살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해야하지 거짓을 말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23절,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사람으로 생명에 이르게 하는 것이라 경외하는 자는 족하게 지내고 재앙을 만나지 아니하느니라”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 몸을 통해 나타나고 있는 신앙생활의 모든 행위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그것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아니라 성도가 이 세상에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선하고 의롭게 사는 것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복음이 방해를 안 받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행위로는 구원을 받을 자가 없다고 분명히 가르치고 있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사람으로 생명에 이르는 것이라는 이 말씀의 결론은 행위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사람이 생명에 이르는 단 한 가지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것입니다 율법의 행위로는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단 한사람도 없습니다.
거짓말하는 자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습니다.
그는 이 세상을 살면서 일반적인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부정하는 거짓말을 하고 있으며 그렇게 거짓말을 하는 자는 결국에는 재앙을 만나게 됩니다.
오직 예수가 아닙니다.
그들의 말을 들으면 예수만 믿어서는 절대로 천국에 갈 수 없는 것처럼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그것을 부정하고 행위를 강조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은혜 되지 못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 행위를 보면서 자꾸 부자로 만들어서 자기가 가난하다는 것을 잊어버리게 만들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과 비교하면 분명히 자기는 천국에 갈 사람입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가 아니라 자기가 하고 있는 신앙생활의 여러 가지 모습들을 보면서 세상 사람들과 비교를 하면서 자기 스스로 분명히 천국에 갈 수 있을 것으로 오해를 합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 스스로 서로를 격려하면서 자꾸 거기에 빠져 들어가고 있습니다.
거짓말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가 세상 사람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내가 하고 있는 신앙생활을 보면서 비교하는 것 자체가 거짓말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가난한 자나 부자나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은혜를 주시고 있는데 차별을 두고 있고 자기가 가난하다고 느끼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가난하다는 것을 모르게 하는 것이 바로 교회 안에서 지키고 있는 율법입니다
복음이 있는 성도는 자기가 아무리 선하게 살고 의롭게 살아서 모든 사람이 칭찬을 한다 해도 그것으로는 자기가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자기 스스로 가난하다고 믿고 있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더욱 구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가난하기에 세상에 가난한 자들을 이해하고 그들을 더욱 불쌍히 여기기에 자기도 불쌍히 여김을 받을 수 있습니다.
나를 아시기 바랍니다.
조금 지키고 있는 율법에 눈이 가려서 자기를 모르는 사람은 가장 어리석은 자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거절하는 주장을 하면서 거짓을 말하게 되어 있습니다. 나를 부정하고 예수를 인정하는 것이 은혜이고 참이며 나를 인정하고자 하면 거짓을 참이라 말하기 때문에 거짓이 됩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천국이 저희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자기 존재를 아는 성도는 늘 가난한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사모하고 있습니다. 은혜를 사모해서 그 은혜로 말미암아 천국에 들어가는 성도가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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