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강, 저희가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전도서 4:9-12절을 보면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저희가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혹시 저희가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하나니 삼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너무도 평범한 말씀입니다
등산을 해 본 사람은 간혹 가다가 경험을 하게 됩니다
갑자기 관절이나 인대가 삐끗해서 도저히 걸어갈 수 없는 형편이 되면 옆에서 그를 부축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없다면 그는 그 자리에서 꼼짝도 못하고 설령 혼자 움직인다 해도 너무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세상사가 거의 다 그렇습니다.
가정이 있고 또 사회가 형성되고 국가가 있고 하는 것은 그 구성원들이 서로 도울 수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혼자 있는 사람은 자기 몸이 아프면 서럽습니다. 그러나 곁에서 자기를 돌보아 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있는 것 자체로만도 마음에 평안함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굳이 성경 말씀이 아니더라도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이 되는 말씀이며 그래서 사람들은 혼인을 해서 가정을 꾸리고 또 사회를 그리고 국가를 만들어서 서로가 서로를 돕고 있습니다. 이 지구상에는 물론 가정을 이루지 못해 쓸쓸하게 사는 사람들도 있지만 국가가 불안해 떠도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국력이 약한 나라를 보세요.
우리나라도 불과 반세기 전에는 국력이 약해져서 일본에게 나라가 수탈을 당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일본에 의해 자유를 빼앗기고 또 고통을 당했던 것을 알고 있습니다. 지금도 이 지구상에는 그런 나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심지어는 인종 청소를 하기 위해 그 종족을 다 죽이는 일까지 벌어지는 것이 세상입니다 모두가 힘이 약하기 때문에 또 나라를 든든하게 세우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박해를 받으면서도 대항을 하지 못하고 자기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스스로 방어를 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나라가 든든하게 세워져 있으면 국방이 든든하면 모든 국민이 평안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무슨 일을 하더라도 혼자서 하면 힘이 듭니다.
그러나 여러 사람이 함께 하면 일의 능률도 오르고 서로가 서로를 격려하면서 자기가 목적한 일을 달성할 수 있게 됩니다. 한 사람 보다 두 사람이 낫다는 것은 세상의 이치입니다.
복음을 전하는데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사람이 하는 것 보다는 두 사람이 또 두 사람 보다는 더 많은 사람이 서로 유기적으로 협력을 한다면 한 사람이 수고를 하는 것 보다 쉽게 복음이 전파될 수 있습니다.
물론 혼자서도 할 수 있습니다.
복음에 대해서 완전하게 깨닫고 성령의 감동을 받아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함을 받은 사람이라면 혼자서도 얼마든지 복음을 전파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은 잘못하면 실수를 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인생이기 때문에 혼자서 그 일을 감당하다 보면 자기가 실수를 해도 그것이 실수인지 아니면 바른 것을 전하는지 때로는 모르면서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을 12명이나 세우셨습니다.
또 그 외에도 70인을 세우시고 그들을 보낼 때 혼자 보내시기 않고 두 사람씩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 보냈습니다. 왜 두 사람씩 보내셨는가 하면 한 사람이 가서 넘어지면 일으켜 세워 줄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6:7절을 보면
“열두 제자를 부르사 둘씩 둘씩 보내시며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세를 주시고”
열두 제자를 열두 고을로 보내면 더 많은 고을로 보내 복음을 더 효율적으로 전파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둘씩 짝을 지어서 보내셨습니다. 한 사람이 간다 해서 복음을 전하는 일에 문제가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직접 능력을 주시고 보내는데 한 사람이 가도 충분히 넘어지지 않고 여러 고을에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하시지 않았습니다.
한 사람이 가도 귀신을 쫓아내고 천국이 가까웠다고 복음을 전할 수 있지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둘씩 보내셨습니다. 이 시대에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의미가 크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지금 이 시대는 거의 혼자서 복음을 전파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능력을 주신 제자들도 둘씩 다른 마을로 가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했는데 지금 이 시대는 제왕적은 목사에 의해서 교회가 운영되어 지고 있다는 것은 문제가 심각할 수밖에 없는 원인이 되고 복음이 타락을 할 수밖에 없는 직접적인 요인이 되기도 합니다.
지금 한국 신학교가 수도 없이 많습니다.
아마 평신도들은 거의 경험이 없어 어떻게 운영되어 지는 것을 모르겠지만 특히 중소 신학교들은 총장이나 학장과 신학적인 뿌리가 다르거나 또 그들의 입맛에 맞지 않는 말씀을 학생들에게 가르치면 그날로 그 교수는 짐을 싸야 합니다.
교회는 더 합니다
만약 담임 목사의 생각이나 그가 전하는 말에 대해서 어떤 비판과 판단을 해서는 안 되고 만약에 그런 일이 있다면 그 목사는 그 다음날로 아니면 다음 해에는 더 이상 그 교회에 있을 수 없게 됩니다. 그 교회에 목사가 여러 명이 있다고 협력을 한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넘어지는 것조차 모릅니다.
설령 진리에 대해서 넘어져 있다 해도 만약 부목사가 담임 목사에게 그것을 지적했다가는 아마 견디지 못할 것이 뻔합니다. 두 사람이 협력을 하고 세 사람이 함께 동역을 한다는 것은 서로가 서로의 넘어지는 것에 대해서 잡아 일으켜 세워 줄 때 협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 교회는 제왕적인 교회입니다
어느 누구도 목사가 진리에 대해서 넘어 진 것을 지적할 수 없고 만약 지적을 했다가는 심지어는 이단으로 몰려 그 교회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고 말 것입니다.
이 시대는 직접 계시가 있는 시대가 아닙니다.
이미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모든 경륜을 다 나타내셨습니다.
성경이 다 기록이 되기 전에는 제왕적인 선지자가 나타나서 이스라엘을 이끌 수 있었지만 지금은 그런 시대가 아니라 성령의 감동하심을 한 성령 안에서 서로가 붙들어 주어야 하는 시대입니다
어느 한 사람만이 성령의 감동을 받는 그런 시대가 아닙니다.
제가 교회 안에 질서를 무시해도 좋다는 뜻으로 이 말씀을 하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교회에는 분명히 질서가 있어야 하고 설령 모든 성도가 성령의 감동을 받는다 해도 허락이 된 질서 안에서 표현해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 교회는 거의 한 사람이 성령의 감동을 받고 다른 사람은 그것을 무조건 받아들이며 따라가고 있습니다.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저희가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수고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자기 육신의 이익을 위해서 수고하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복음에 빚진 자로서 그 은혜에 따라 수고하는 것이 있습니다. 본문에서 말씀을 하고 있는 수고는 그 은혜에 따라 수고를 하면서 나중에 천국에서 좋은 상을 받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가장 좋은 상이 무엇입니까?
바로 하늘에서의 상급입니다 이 세상에서 많은 수고를 해서 모든 것을 다 누린다 해도 하늘의 것을 누리지 못한다면 그는 좋은 상을 얻지 못한 사람이 됩니다. 이 세상에서 만 명이 넘는 교회를 이끌고 있다 해도 그가 하늘의 상을 얻지 못한다면 그는 좋은 상을 얻지 못한 사람입니다
내 상이 무엇인가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저 이 세상에서 보이는 좋은 것을 보고 자기가 마치 천국에서도 좋은 상을 얻을 것으로 오해를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이 세상을 다 얻는다 해도 그래서 뭇 사람들로부터 선망의 대상이 된다 해도 그가 하늘의 상을 얻지 못한다면 그는 불쌍한 사람입니다.
성도는 복음을 위해 수고해야 합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 내가 수고함으로서 무엇을 얻는 것이 아니라 천국에서 얻는 좋은 상을 위해서 하는 수고입니다. 그러나 이 시대를 보면 이 세상에서 좋은 것을 얻기 위해서 수고를 하는 사람들로 교회 안에 가득 차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얻은 상을 자랑하느라 정신이 팔려 있습니다.
이 세상의 것은 모두 썩어 없어질 것입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그 날에 이 지구는 종말을 맞게 됩니다.
이 지구에서 그 어떤 가장 귀한 것을 받았다 해도 그것은 모두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성도가 수고하는 것은 그런 사라지는 것을 얻기 위해서 수고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상을 얻기 위해서 수고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기복주의에 빠져 있는 교회는 이 세상의 썩어질 것을 얻기 위해서 수고를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자기가 무엇을 얻기 위해 수고를 하는 가를 모릅니다.
아니 무엇이 좋은 상인 줄을 모르고 사라지고 마는 것을 얻기 위해서 수고를 마다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 수고는 자기 영혼을 파멸로 이끌 뿐 아니라 이 세상에서 받은 많은 상으로 인하여 천국에서 받을 상이 없게 될 것입니다 사도들 중에 누가 이 세상에서 상을 받아서 누리면서 살았습니까? 그러나 이 시대는 이 세상의 상을 받고 그것을 즐거워하고 또 자랑하고 싶어서 안달을 합니다.
천국의 상을 받기 위해서는 두 사람이 수고를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제자들을 열둘이나 택하셨고 또 초대 교회는 어느 한 사람에 의해 모든 것이 결정 되어 지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혹시라도 누가 넘어지는 것을 보면 반드시 일으켜 주었습니다. 그것은 두 사람이 수고를 했기 때문에 일으켜 세워 줄 수 있었습니다.
“혹시 저희가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혼자 있으면 넘어져도 모릅니다.
육체는 자기가 넘어진 것을 알지만 영혼은 넘어진 것을 모릅니다.
혼자서 하게 되면 넘어져도 일으켜 세워 줄 사람이 없습니다. 물론 넘어지기 않을 수 있다면 다행이겠지만 사람인지라 때로 넘어지게 되고 그렇게 되었을 때 일으켜 세워 줄 사람이 없게 됩니다.
육적인 것은 쉽게 압니다.
그러나 영적인 넘어짐은 자기가 넘어 졌으면서도 그것을 깨닫지 못 합니다 그것은 반드시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아서 다른 사람으로부터 책망을 받아야 하는데 제왕적 위치에서 혼자 수고하는 사람은 넘어 져도 다른 사람의 책망을 받을 수 없을 뿐 아니라 설령 다른 사람이 책망을 하게 되면 그 사람을 오히려 공격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일으켜 세워 주고 싶어도 못 합니다
만약 그가 넘어진 것을 알고 일으켜 세워 주려고 하다가는 그로부터 심하게 공격을 받게 되고 심지어는 모든 관계가 끊어지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영적인 부분은 아주 민감하게 반응을 하고 있고 자기가 영적으로 넘어 졌다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 보여 졌다는 것만으로도 치욕으로 알기 때문에 일으켜 세워주기가 쉽지 않습니다.
목사도 사람입니다
때로는 실수를 해서 말씀을 잘 분별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때 누군가 그것을 지적을 해 주어야 하는데 지금과 같은 제왕적인 목회를 하고 있는 교회의 형태에서는 그것이 불가능 합니다. 그것을 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만약 하게 된다면 목사는 자기 영적인 것에 대해 치명적 약점을 보이기 때문에 그 사람을 그냥 두려 하지 않게 됩니다.
물론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습니다.
제가 전혀 없다는 뜻으로 말씀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현재 교회의 형태에서는 누가 그 손을 잡아서 일으켜 세워 줄 수 도 없고 감히 그럴 생각도 하지 못 합니다 그 한 사람이 넘어지는 것으로 끝나면 괜찮습니다.
그러나 목사가 넘어지면 그 교회 전체가 다 넘어진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목사가 제왕적 위치에 있는데 그 목사가 영적으로 넘어 졌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어느 누구도 일으켜 세워 주고 있지 않다면 결국 그 목사로부터 가르침을 받는 그 교회의 모든 사람은 사망에 이르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더욱더 목회는 혼자서 하면 안 됩니다. 제왕적인 목회는 넘어질 수밖에 없고 그런 교회에서는 진리가 바로 설 수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깨달아야 합니다.
그를 누가 일으켜 세워 줄 것입니까?
교인의 수가 만 명이 되고 부 목사들이 수십 명이 된다 해도 그가 넘어 졌다는 것을 지적할 수 없는 교회는 재앙과 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넘어진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데 독불장군이 되어 교회를 이끌어 가고 있다면 그 교회에 다니는 모든 사람은 결국 사망의 길로 빠져 들어가게 됩니다.
너무 중요합니다.
아니 심각하게 생각을 해야 합니다.
초대 교회는 이렇게 넘어지면 일으켜 세워 주기 위해서 사역을 하더라도 서로 긴밀한 관계 속에서 혹시 누군가 넘어지면 바로 일으켜 세워 주었습니다. 그렇게 했기 때문에 진리가 바로 설 수 있었고 많은 순교자들이 나오면서도 그들이 하늘에 있는 좋은 상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갈라디아서 2:11-14절을 보면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할 일이 있기로 내가 저를 면책하였노라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저희가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남은 유대인들도 저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저희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 그러므로 나는 저희가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로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을 좇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
게바가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입니다
바나바 또한 사도 바울 보다 예수 그리스도를 먼저 영접한 사람이며 바나바를 통해서 사도들과 교제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저 변방에서 복음을 전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도 바울하면 대단한 것으로 생각을 하지만 이때는 사실 사도 바울은 어쩌면 지금으로 하면 부 목사나 마찬가지라고 보아야 합니다. 그런 사도 바울이 베드로를 책망하고 있습니다. 물론 사도 바울이 베드로를 정죄하지를 않았고 면책을 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면책을 했다는 말씀은 그가 잘못을 했지만 그 책임을 묻지 않았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책망은 분명히 했습니다.
그것도 감히 예수님의 수제자인 베드로를 책망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 앞에서 베드로를 사도 바울이 책망을 하고 있습니다. 아마 지금 누군가 책망을 하면 책망을 받은 사람이 그렇게 이야기 할 것입니다 둘이 있을 때 조용히 책망을 하면 되지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가 하면서 책망한 사람을 도리어 책망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모든 사람이 있는 곳에서 지금으로 하면 한국 교회에 총회장 같은 사람을 책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일개 목사가 한기총의 총회장을 책망한다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마 그 자체로도 난리가 날 것이고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아무 거리낌이 없이 베드로를 책망하고 있습니다.
바로 초대 교회의 모습입니다
베드로가 잠시 넘어 졌지만 사도 바울의 이 책망으로 인하여 다시 일어 설 수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말씀입니다 비록 예수님의 수제자인 베드로지만 자기가 넘어 졌을 때 사도 바울이 일으켜 주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을 보게 됩니다.
왜 두 사람이 수고를 해야 하는 가를 알 수 있습니다.
만약 베드로가 이 사건으로 넘어졌을 때 사도 바울이 베드로를 책망하지 않았다면 베드로는 이것으로 영원히 넘어 질 수도 있는 일입니다 물론 한번 구원을 받은 사람은 절대로 넘어지는 일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을 통해 주변에서 넘어 졌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 가를 분명히 깨닫고 또 넘어진 사람은 자기 자신을 어떻게 돌아보아야 하는 가를 성경을 통해 배워야 합니다.
베드로에게 사도 바울은 친구입니다
그런 친구가 곁에 있다는 것은 물론 하나님의 섭리이지만 베드로 자신을 돌아 볼 때는 감사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 시대 제왕적인 목사들은 절대 책망을 받으려 하지도 않고 또 누군가 책망을 했다가는 어떻게 하든지 그 사람을 다시 공격을 할 것입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수시로 넘어집니다.
그러나 내 주변에 사도 바울과 같은 사람을 보내 주시고 또 성경을 통해 성령의 감동으로 깨닫게 하고 또 여러 가지 환경을 통해 깨닫게 해 주심으로 일어설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렇게 내가 넘어 졌을 때 일으켜 줄 수 있는 사람이 내 곁에 있어야 합니다. 영적인 일은 더구나 한 사람의 전횡으로 이끌어 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 교회는 타락을 할 수밖에 없으면 자기가 넘어져 있으면서도 도무지 깨닫지를 못 합니다
넘어진 것을 책망하는 것을 창피하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히려 그런 창피함이 있기 때문에 다시는 그 일로 넘어지지 않을 수 있는 것이지 만약 조용히 두 사람이 있는 가운데서 이야기를 한다면 또 넘어질 가능성이 아주 많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특히 지도자일수록 더욱더 영적으로 넘어지는 일에 대해서는 외부적인 충격이 강해야 다시는 자기가 넘어지지 않으려고 더욱더 조심을 하게 됩니다.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육적인 말씀을 통해 우리 영적인 문제를 가르쳐 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지으셔서 하나 보다는 둘이 낫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너무도 평범한 말씀이지만 사람은 자기 혼자서 무슨 일이든지 하려고 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나 혼자는 넘어집니다.
또 내 몸을 따스하게도 덥힐 수 없습니다.
영적으로 말씀을 드리면 불길 같은 성령의 은혜를 깨달을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사도 바울이 베드로를 책망 했을 때 성령의 감동이 있었기 때문에 책망할 수 있었으며 그 책망으로 인하여 베드로도 다시 자기 자신을 돌아 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했습니다.
제왕적인 교회는 반드시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초대 교회를 보아도 사도들이 서로 유기적으로 맡은바 사역을 했지 어느 사도가 자기가 개척을 했다고 내 교회에 제왕적 위치에서 교회를 치리했습니까? 고린도교회를 보아도 사도 바울이 개척을 했지만 베드로도 그리고 아볼로도 고린도교회에 와서 말씀을 전하고 가르쳤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도들도 그런데 오히려 이 시대 목사들이 신사도 운동을 벌이면서 자기들이 초대 교회의 사도 적 위치에 서서 교회를 독단적으로 치리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어느 교회를 막론하고 제왕적 권위를 어느 한 사람이 가지게 되는 순간 그 교회는 타락의 길로 갈 수 밖에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하나니 삼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한 사람은 패합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능히 당하고 세 사람이면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삼겹줄과 같은 그런 지도자들의 의해서 치리가 되어야 끊어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주님의 은혜에서 끊어지지 않으려면 반드시 삼겹줄과 같은 교회의 지도자가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갈라디아서 5:4절을 보면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사람은 자연스럽게 율법주의가 됩니다.
아니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의 사고에는 율법주의가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 율법주의와 싸워서 은혜에서 떨어지지 않으려면 삼겹줄과 같이 여러 명이 교회를 치리해야 어느 한 사람이 넘어지더라도 그를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습니다.
내가 주님의 은혜에서 끊어지지 않으려면 율법과 싸워서 이겨야 합니다.
바로 베드로도 율법에 의해서 넘어지려고 했던 것을 사도 바울의 책망을 듣고 다시 일어설 수 있었고 그래서 주님의 은혜에서 끊어지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외식을 한 그것은 바로 유대인으로 율법에 따라 행하려고 했던 그것이 외식이었으며 사도 바울이 그것을 책망 했습니다.
나를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게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문제는 영적인 것이기 때문에 육적으로 교회에 나온 것으로는 그가 끊어졌는가 아닌가를 분별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아야지만 영적으로 끊어졌는가를 분별할 수 있는 일입니다
신사도 운동은 결국 그 교회 전체를 파멸로 이끌고 말 것입니다
교회에서 말씀을 가르치는 자가 어느 한 사람의 사상에 의해 전혀 제제를 받지 않고 그가 말하는 것이 마치 모든 것이 옳은 것으로 생각을 하고 그것을 따라간다는 것은 한 마디로 사단에게 패하겠다는 것과 다를 것이 없으며 그런 교회는 겉으로는 편안하게 보일지 몰라도 반드시 패하게 되어 있습니다.
교회가 어떻게 가야 하는 가를 분명하게 가르쳐 주는 말씀입니다
지도자가 세 명이 되어도 그들이 서로 평행하게 서로 긴장 관계를 늦추지 않아도 사단은 얼마든지 넘어뜨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제왕적 목회를 하고 있다는 것은 내 영혼 뿐 아니라 그 교회 안에 들어 온 모든 사람의 영혼을 죽이는 가장 악한 일을 행하고 있다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두 사람이면 당 합니다.
그리고 삼겹줄은 끊어지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에서 끊어지지 않으려면 지금 내가 다니고 있는 교회에 최소한 세 사람 정도가 서로 긴장 관계 속에서 치리를 해야 하고 그것이 성령의 뜨거운 가운데 이루어 질 때 그 영혼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전도서의 말씀을 다시 한 번 묵상을 하시고 자기 영혼을 보존하는 지혜로운 성도가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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