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계1:3.)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119:105)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방황하는 교인들에게

56강, 고아

윤주만목사 2019. 4. 6. 06:29


56, 고아

 

신명기 10:18절을 보겠습니다. (279)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신원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사 그에게 식물과 의복을 주시나니

 

하나님

인생이 하나님을 안다는 것이 사실 쉽지가 않습니다. 물론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을 통해 스스로를 나타내시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고는 있지만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모르고 있고 자기들의 이성적 지식으로 하나님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늘 말씀을 드립니다.

우리 성도는 성경을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성경에서 무슨 말씀을 하고 있는 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내 생각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성경에서 어떻게 말씀을 하고 있는 가를 늘 깨어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기들의 생각으로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성경에 나타나고 있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 지식에 의해서 만들어진 하나님을 믿고 있다고 해도 별로 틀린 말이 아닙니다.

 

우상입니다

그리고 다른 신을 믿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알고 있는 하나님과 성경에서 말씀을 하고 있는 하나님이 다르다면 그것은 다른 신을 섬기고 있는 영적인 죄를 범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바로 알아야 합니다. 내가 교회에 나와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있다 해도 하나님이 누구인가를 알지 못하고 있다면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 성도라 말할 수 없습니다.

 

신앙생활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물론 제가 그것을 전적으로 무시를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가 아무리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다 해도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하고 있다면 그를 성도라 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은 한 마디로 희극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하고 늘 성경에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얻어야 합니다.

 

아는 것이 영생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모른다고 했는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자기들만이 하나님을 알고 있다고 자부를 하면서 살았던 민족이었습니다. 그러나 자기들만 하나님을 알고 있다고 생각을 했던 그 민족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몰랐습니다.

그들은 성경에 대해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지만 실제 하나님이 누구인가를 전혀 몰랐기 때문에 스스로 사망의 길로 가고 말았습니다. 성경을 많이 본다고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성령이 오셔서 임재를 해야 그들이 진리 가운데로 인도함을 받아서 하나님의 사랑을 바로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는 어떻습니까?

거의 이스라엘과 같다고 보면 맞을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이 알고 있던 하나님을 지금 이 시대도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세상의 지적인 수준이 있다 보니까 성경을 스스로 보고 있고 그런 사람들이 성경을 너무 자의적으로 해석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이성적 지식으로 먼저 하나님을 만들어 놓고 나서 성경을 보다 보니까 하나님에 대해서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영생이 무엇입니까?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요한복음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성경에서 하나님을 알려고 하지를 않고 있습니다. 안다고 하니까 내가 성경을 많이 보아서 아는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성경을 많이 보아서 알 수 있을 것 같았다면 이스라엘이 절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않았을 것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을 계시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누구라는 것을 계속해서 가르쳐 주고 있지만 사람들은 성경에서 말씀을 해 주고 있는 하나님을 믿지를 않고 있습니다. 이 시대도 거의 이스라엘과 같이 자기들의 생각에 있는 하나님을 믿고 있다고 해도 별로 틀린 말이 아닙니다.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하나님을 믿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생각에서 하나님은 이렇다는 것을 명제로 두고 성경을 보다 보니까 심각한 문제가 발생이 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가르쳐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의 하나님인가를 알아야 하고 그 사람이 되어서 내 하나님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고아와 과부를 신원하여 주시고 나그네에게 양식과 의복을 주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씀을 하고 있는 하나님을 바로 알고 또 내가 누구인가를 바로 알아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갈라디아서1:11-12절을 보겠습니다. (302)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사도 바울의 고백입니다

내가 전한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는 말씀을 바로 이해를 하시기 바랍니다. 사람의 이성적 지식으로 가지고 있는 하나님은 이런 분이다. 라고 하는 그런 지식으로 된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아는 것으로 된 것이 아니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자기 지식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처음부터 복음에 대해서 듣지를 못하고 있다 보니까 하나님을 이상한 하나님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잘못 알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교회 안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예수를 믿으면 복을 받는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 복을 받고 천국도 갈 수 있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왜 그런 생각을 하느냐면 성경에서 하나님을 안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서 그렇게 들어왔기 때문에 교회에 나와서 하나님을 그런 하나님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것이 세뇌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생각을 가지고 성경을 보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과연 성경을 볼 때 하나님에 대해서 바로 알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절대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미 자기들의 생각에 사람의 뜻에 따라 복을 받고 싶어 하는 마음을 가지고 성경을 보다 보니까 모든 성경이 다 그렇게 보여 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배우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 시대 처음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이 다 그렇게 배우고 있습니다. 이런 사상으로 가득 차 있는 그들이 아무리 성경을 본다 해도 그것은 사람의 뜻을 가지고 성경을 보고 있기 때문에 성경에서 말씀을 하고 있는 하나님을 절대로 바로 알 수 없습니다.

 

내 생각 버리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내 이성으로 자리하고 있는 상태에서는 절대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 수 없습니다. 내 생각에 있는 하나님에 대한 상상을 버리시고 오직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이 누구의 하나님인가를 바로 알아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너무 자기들의 생각을 가지고 성경을 보고 있고 그것이 이 시대 기복주의로 나타나고 있고 또 그것이 실제로 하나님을 믿기보다는 바알을 섬기는 것이 되는데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외모를 보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뇌물을 받지 않으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모르기 때문에 자꾸 외모로 보이려고 하고 있습니다. 외모가 무엇입니까? 바로 행위입니다 내가 교회 안에서 행하고 있는 거의 모든 행위가 다 외모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화 있을찐저

예수님께서 마태복음에서 계속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화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화가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이스라엘이 외식을 하는 것을 보고 예수님께서 그들의 외식으로 인하여 화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 역시 외식으로 자기들의 겉을 꾸미는 것을 이스라엘과 똑같이 하고 있습니다.

 

외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겉으로 나타나는 행위를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제가 아무 것도 하지 말라고 이 말씀을 하는 것이 아니라 솔직히 이 시대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을 너무도 많이 하고 있습니다. 그런 신앙생활의 행위들이 다 외식이라는 것을 모르고 이런 외식을 가지고 하나님을 믿으려고 하고 있고 그것이 자기들 스스로 그물에 걸리는 일이라는 것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 하나님을 모릅니까?

바로 이런 외식이 하나님을 아는 것을 방해를 하고 있습니다. 특히 이 외식을 하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하고 있는 외식을 가지고 하나님을 믿고 있는 것으로 판단을 하기 때문에 심각한 문제를 가져오고 있지만 이 시대 역시 이스라엘과 똑같이 외식에 빠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만 외식을 했습니까?

이 시대도 그들 못지않게 외식에 빠져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그래도 율법을 가지고 외식을 했는데 이 시대는 성경에도 기록이 안 되어 있는 것들을 가지고 외식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보다 더 큰 악을 행하고 있으면서도 역시 이스라엘과 같이 그것이 하나님을 믿는 도리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외식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그런 성도만이 하나님에 대해서 알 수 있습니다. 내게 외식이 있는 상태에서는 절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받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성령이 내 안에 임재를 해서 계시를 해 주어야 내가 성경을 바로 볼 수 있고 그 안에서 하나님이 누구의 하나님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고아(孤兒)와 과부(寡婦)를 신원해 주시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먼저 고아와 과부를 신원해 주시는 하나님이라고 성경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고아와 과부를 공정하게 재판을 해 주시는 하나님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고아와 과부는 공정한 재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솔직히 이 시대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이 실감이 날 정도로 사법부가 공정을 잃었다 해도 별로 틀린 말이 아닙니다.

 

왜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세상에는 물론 고아와 과부가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고아와 과부를 신원해 주신다고 말씀을 하고 있는 가를 알아야 합니다. 성경이 하나님은 고아와 과부를 신원해 주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세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왜 하나님께서는 하필이면 고아와 과부를 신원해 주시는 가를 알아야 합니다.

 

부자들도 있지 않습니까?

그럼 부자는 신원을 해 주시지 않는다는 말씀입니까? 물론 육적으로 부자도 신원을 해 주십니다. 지금 이 말씀은 영적인 말씀입니다 영적인 고아와 과부를 신원해 주시겠다는 말씀이지 육적인 고아와 과부를 신원해 주시겠다고 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성경을 오해를 합니다.

고아와 과부라는 말씀이 나오니까 정말 이 세상에 있는 고아와 과부를 말씀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금 신명기 말씀을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이 다 고아고 과부고 또 나그네라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자기가 고아라는 것을 모르고 있고 또 과부라는 것을 모르고 있고 나그네라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은 모두가 고아입니다.

그러나 자기가 고아라는 것을 모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더구나 교회 안에서 자기 양친이 다 있는 상태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은 이 고아라는 것을 도무지 이해를 못하고 있습니다. 인생 모두는 다 고아라는 것을 먼저 이해를 하고 있어야 합니다.

 

시편 68:5절을 보겠습니다. (849)

그 거룩한 처소에 계신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

 

하나님은 누구의 아버지입니까?

고아의 아버지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다면 나는 고아라는 말씀입니다 자기가 고아라는 것을 모르고 있다면 그는 절대로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없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고 과부의 재판장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고아가 누구입니까?

부모가 없는 아이들을 고아라고 합니다. 이 세상에서 부모가 없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을 보고 고아라고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고아의 아버지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부모가 없는 아이들의 아버지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영적으로 아버지가 없는 아이들의 아버지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누구입니까?

영적으로 고아라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반드시 고아가 되어야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고아가 되려고 하지 않고 있습니다. 자기들 스스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자기들이 스스로 하나님을 찾고 있습니다. 고아는 자기들 스스로 아버지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을 먼저 이해를 해야 합니다.

 

이 세상의 고아가 있습니다.

그가 스스로 자기 부모를 찾을 수 있습니까? 아니 부모가 죽었다면 자기들이 부모를 만들 수 있습니까? 누군가 그 고아를 보고 불쌍히 여겨서 입양을 해야 부모를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고아가 결정을 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가 될 사람이 고아를 보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그를 양자 삼아야 부모가 생길 수 있습니다.

 

고아는 자기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어떤 고아가 있는데 자기가 마음에 든다고 해서 내 부모 해 달라고 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부모가 되어 줄 수 있습니까? 고아를 입양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지만 부모가 되어 주겠다고 하는 그 사람이 받아 들여야 고아의 아버지가 될 수 있는 일입니다.

 

입양을 하고 있습니다.

남의 아이를 부모도 없는 아이에게 부모가 되어 준다는 것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닙니다. 부모가 되어 줄 사람도 그런데 어떻게 고아가 자기 부모를 스스로 찾을 수 있습니까? 고아는 그저 처분만 바라고 좋은 사람이 자기를 데려다가 아들로 삼아 주어야 합니다. 고아가 이렇다는 것을 먼저 이해를 하고 있어야 합니다.

 

지금은 고아가 거의 없습니다.

물론 이 시대도 부모가 일찍 죽는 일이 있고 또 살아 있어도 형편이 안 되어서 버림을 받는 아이도 있습니다. 그렇게 고아가 된 아이는 자기 스스로 부모를 찾을 수도 없고 또 누군가 자기에게 부모가 되어 준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고아의 아버지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하필이면 고아의 아버지인가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예레미야50:6절을 보겠습니다. (1133)

내 백성은 잃어버린 양 떼로다 그 목자들이 그들을 곁길로 가게 하여 산으로 돌이키게 하였으므로 그들이 산에서 작은 산으로 돌아다니며 쉴 곳을 잊었도다

 

아담이 범죄를 했습니다.

그리고 에덴에서 쫓겨났습니다. 에덴에서 쫓겨나는 순간 이 아담의 자손들은 하나님을 잃어버린 고아가 되었습니다. 인생은 모두가 고아가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을 스스로 찾을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계시를 해 주지 않으면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찾을 수 없는 고아와 같은 처지가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내 백성은 잃어버린 양 때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은 이렇게 잃어버린 양 때가 되었습니다. 그 이유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이 곁길로 가게 해서 다 잃어버린 양 때가 되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고아입니까?

물론 아담에 범죄를 함으로 해서 다 고아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을 보내 주셔서 아버지를 찾게 해 주시고 있습니다. 하지만 선지자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양 때를 바른 길로 가게 하는 것이 아니라 다 곁길로 가게 해서 잃어버린 양이 되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이 세상 모든 사람은 고아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고아입니다

나 역시도 고아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영적으로는 우리 스스로는 하나님을 찾을 수 없기 때문에 다 고아입니다 그래서 선지자들을 보내 주셨는데 그들이 곁길로 인도를 해서 오히려 고아를 더 어렵게 만들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선지자는 고아인 사람들에게 아버지를 찾아 주어야 하는데 오히려 곁길로 가게하고 있습니다.

 

고아가 가장 서러운 것이 무엇입니까?

물론 배 고품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서러운 것은 부모가 없다는 것입니다 또래가 같은 아이와 싸울 때 다른 아이들을 부모가 와서 도와주거나 또 설령 다쳤을 때 부모가 위로를 해 줍니다. 그러나 고아는 누구도 자기를 위로해 주지를 않고 도와주지도 않습니다. 사실 배 고품보다 더 서러운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저도 고아가 안 되어 봐서 잘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시설 같은 곳에 있으면 배 고품만은 면할 수 있습니다. 고아는 늘 자기에게 부모가 없다는 것에 대해서 서러워하고 지내고 있습니다. 부모가 있는 아이가 가장 부럽습니다. 어떻게 고아가 되었더라도 고아는 자기를 위로해 줄 부모가 있는 것을 가장 바라고 있습니다.

 

목자들에 의해서 곁길로 가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계속해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 시대도 목자들에 의해서 다 곁길로 가고 있으면서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고아는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고아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에게 누군가 인도를 하고 있다면 따라 갈 수밖에 없습니다. 더구나 그가 양식을 제공해 준다면 따라가게 되어 있습니다. 자기가 먹는 양식이 무엇인 줄도 모르고 고아는 주는 대로 먹게 되어 있습니다.

 

누가복음19:10절을 보겠습니다. (128)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주님이 왜 오셨습니까?

바로 이렇게 목자들에 의해서 곁길로 가고 있는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아버지를 찾지 못해 고아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찾아서 구원하기 위해서 오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이신데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잃어버린 고아와 같은 우리를 찾아 구원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왜 오셨습니까?

아버지를 찾아 주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우리는 다 고아가 되어서 스스로 하나님을 찾을 수 없는 인생인데 주님께서 오셔서 고아인 우리를 찾아서 아버지를 만나게 해 주시려고 이 세상에 오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을 하시고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고아(孤兒)입니다

아버지를 잃어버린 자가 고아입니다 이 고아는 어느 누구를 특정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자기가 고아라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자기들이 행하고 있는 종교적인 행위를 보고 스스로 영적 이스라엘이라고 자부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오셔서 누구를 찾으셨습니까?

고아는 가난합니다. 주님은 이렇게 가난한 자를 찾아 구원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 역시 이스라엘과 같이 신앙생활의 행위로 그 마음들이 다 부자가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목자가 곁길로 인도를 하고 있는데도 자기 목자가 누구인줄을 모르고 사람을 너무 의지하고 또 너무 신뢰를 하고 있습니다.

 

나를 아시기 바랍니다.

우리 인생 모두는 고아입니다 교회에 나와 있지만 목자가 곁길로 인도를 하고 있다면 그는 자기가 고아인 줄을 모르고 살아가는 자입니다 교회 안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다 해서 자기가 마치 아버지를 만난 것으로 오해를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종교적인 행위가 아니라 주님께서 내 안에 찾아 오셔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오셔야 합니다.

지금 이 시대는 주님이 오실 수 없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보혜사를 보내 주셔서 우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고 있습니다. 아버지를 만날 수 있게 해 주시고 있습니다. 그러나 진리의 영이 오셨는지 안 오셨는지를 분별을 못하고 있습니다. 마치 교회 안에만 있으면 성령을 받을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8:15절을 보겠습니다. (249)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교회 안에 두 사람이 있습니다.

똑같이 고아지만 율법의 종이 되어 있는 사람은 자기가 행하고 있는 율법의 행위를 보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 사람은 종의 영을 받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또 다른 보혜사를 보내 주셔서 양자의 영을 받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양자가 되었습니까?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 해 주시고 있습니다. 우리가 양자의 영을 받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성령이 우리 가운데 임재를 해서 친히 증거를 해 주시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령이 오시지 않고는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인생은 모두가 고아입니다.

이 고아의 아버지가 바로 하나님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이렇게 고아로 살아가다가 성령이 오심으로 말미암아 친히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를 해 주시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고아였는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양자로 삼아 주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잃어버린 자를 찾아서 아버지께로 인도를 해 주시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 모두는 잃어버린 자입니다

그런 인생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셔서 그리스도의 영으로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양자의 영을 받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고아로 살아가고 있는 우리 인생들을 양자로 삼으시고 우리로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종의 영을 받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은 모두가 종의 영을 받았습니다. 사도 바울이 분명히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있지만 아직까지 율법을 지키고 있다면 그는 종의 영을 받아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는 있지만 종의 영을 받은 사람은 절대로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모릅니다.

자기가 종의 영을 받았는지 양자의 영을 받았는지를 이 시대 교인들은 모르고 있습니다. 내게서 한 가지라도 율법을 지키고 있다면 그는 아직까지 종의 영을 받고 있는 사람입니다 교회 안에서 단 한 가지라도 율법을 지키고 있다면 그는 양자의 영을 받은 성도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가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고 있다 해도 그가 종의 영을 받아서 종과 같이 일을 하고 있다면 그는 절대로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초등학문에 종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가장 기초가 되는 학문이 무엇인가 하면 바로 율법입니다 이 세상 나라의 제도나 그리고 모든 종교가 이 율법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종노릇하는 데서 해방을 시켜 주신 분입니다 죄의 종에서 해방이 되어 의에 종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시대 교인들은 이 율법에서 해방이 안 되고 있습니다.

 

종이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이제 종에서 해방이 되었습니다. 거듭 말씀을 드리지만 정말 나에게서 율법의 한 모양이라도 나타나고 있다면 양자의 영이 절대로 내게 임하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교회 안에서 수많은 율법을 지키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죄의 종이 되었습니다.

아담이 죄의 종이 되는 순간에 하나님을 잃어버리게 되었고 에덴에서 쫓겨났습니다. 그런데도 이 시대는 아직까지 종의 영에 매여서 해방이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잃어버린 우리를 찾아서 구원하기 위해서 오셨지만 사람들은 스스로 고아가 되기를 거절을 하고 있습니다. 아니 자기가 고아라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영적인 고아입니다

먹을 것이 없고 입을 것이 없는 고아입니다 그런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의 양식이고 구원의 옷을 입혀 주셨습니다. 그러나 율법을 지키게 되면 그의 마음이 부자가 되어서 자기가 고아라는 것을 모르게 됩니다. 고아는 자기가 부모를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주님께서 또 다른 보혜사를 보내 주셔야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주님이 아니고는 어느 누구도 양자의 영을 받을 수 없습니다. 성령이 친히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 하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령이 아니고는 하나님의 양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로마서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고아와 같이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주님께서 성령을 보내 주셔서 믿음을 주시고 하나님의 양자됨을 친히 증거를 해 주셔서 확신을 하게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고아입니다

이 고아를 위해 주님께서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을 하시고 하늘에 올려 가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고아와 같이 내 버려두지 않고 성령을 보내 주셔서 우리로 양자의 영을 받아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우리 안에서 확증을 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이십니다.

고아는 자기가 부모를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부모가 되어 주려고 하는 이가 선택을 해야 부모를 만날 수 있습니다. 그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선택하셔서 고아인 우리의 부모가 되어 주시겠다고 스스로 자청을 하시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아서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양자의 영을 보내 주셔서 우리 안에서 확증을 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선택을 모릅니다.

아니 안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 자체가 고아라는 것을 거부하고 있고 하나님의 양자가 되는 것을 거부를 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내가 고아라면 반드시 하나님께서 내 부모가 되어 주시겠다고 하는 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것은 내 편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시고 고아의 아버지가 되어 주셨을 때 가능한 일입니다

 

지금 이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고아의 아버지가 되어 주시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기가 고아라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아니 고아가 무엇인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고아로 살아가고 있으면서도 자기가 고아라는 것을 모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내가 고아라는 것을 아는 성도는 하나님의 선택을 받아들이고 믿을 수 있습니다.

 

양자(養子)의 영을 주셨습니다.

고아가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누군가 고아를 입양을 한다 해도 쉽게 아버지라고 부르지를 못합니다. 그러나 성령이 친히 증거를 해 주심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다고 로마서 8장에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양자의 영을 주셨기 때문에 성령이 친히 증거를 해 주시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과부(寡婦)의 재판장입니다

남편이 없는 여자를 과부라고 합니다. 남편이 죽은 여자를 과부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과부의 재판장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고아와 과부를 신원하여 주시는데 하나님께서는 고아의 아버지가 되시고 과부의 재판장이 되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과부의 재판장입니까?

이 세상의 모든 과부가 재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과부의 재판장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의 상식으로는 잘 이해가 안 되는 말씀입니다 과부라고 해서 모두가 재판을 하는 것이 아닌데 하나님께서는 과부의 재판장이라고 스스로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과부는 누구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재판장이십니다.

우리 인생은 하나님의 재판자리에 서면 모두가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왜 죽을 수밖에 없는가 하면 율법에 요구를 다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반드시 율법에 의해서 죽어야 합니다. 이렇게 율법에 의해서 죽어야 하는 자를 과부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대로 하면 반드시 죽어야 하는 모든 사람은 다 과부입니다

 

누가복음18:3절을 보겠습니다. (125)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과부는 원수에 대한 원한이 있습니다.

이 원수로 인하여 죽게 되어 있는 사람을 과부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다는 말씀은 우리 성도를 과부로 보시고 비유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도는 남편이 없는 과부로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왜 남편이 없는 과부인가 하면 내 스스로는 영의 생명을 탄생을 시킬 수 없기 때문에 과부라고 합니다.

 

왜 탄생을 시키지 못합니까?

그것은 원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원수가 너무 강하기 때문에 우리가 그 원수로 인하여서는 생명을 얻을 수 없습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은 다 이 원수에 의해서 영생을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욥과 같은 순전하고 정직한 자도 역시 이 원수로 인하여 생명을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원수로 인하여 구원을 받지 못해 원한이 있는 사람을 과부라고 합니다.

 

에베소서2:15절을 보겠습니다. (312)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과부의 원수가 무엇입니까?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이 과부의 원수입니다 잘 이해를 하시기 바랍니다.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다 지키지 못해 구원을 받을 수 없는 이 세상 모든 사람이 다 과부라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율법으로는 우리는 과부가 되어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영의 종교입니다

그리고 생명의 종교입니다 우리가 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가 하면 바로 이 생명을 위해서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원수가 너무 강해서 도무지 생명을 얻을 수 없고 그 원수로 인하여 원한이 있는 모든 이 세상 사람은 다 과부라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원수가 무엇인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자기 원수가 누구인줄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한 과부가 재판장에게 가서 내 원수의 원한을 풀어 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원수를 에베소서에서는 의문에 쓴 계명의 율법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원수로 인하여 원한이 있는 모든 사람이 다 과부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나 자기가 과부라는 것을 모르고 있고 또 자기 원수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정말 코미디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네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시니까 의문에 쓴 계명의 율법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를 보면 성경을 몰라도 너무 모르고 있고 코미디도 이런 코미디가 없습니다. 이 세상이 육적인 원수는 사랑하지 않고 자기 영혼을 죽이는 원수를 사랑해서 자기 원한에 대한 것을 재판장이신 하나님께 호소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율법을 너무도 사랑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과부의 재판장이 되어 주시겠다고 하고 있지만 사람들은 자기가 과부라는 것을 도무지 모르고 있습니다. 아니 오히려 과부의 원수가 되어 원한이 있는 율법을 너무도 사랑해서 그것을 안 지키면 잠을 자지 못할 정도가 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의 과부는 남편이 없는 여자를 과부라고 하지만 성경에서 말씀을 하고 있는 과부는 원수로 인하여 원한이 있는 사람을 과부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원수입니다

율법은 우리 인생들이 생명을 얻을 수 없게 하는 원수입니다 그러나 이 원수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자기 원한을 하나님께 호소를 해서 재판을 하게 해 달라고 해야 하는데 이 시대는 오히려 자기들 스스로 사망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오셨습니까?

과부의 재판장이신 하나님께서 과부의 원한을 풀어 주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과부의 재판장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과부의 원한을 풀기 위해서 이 세상에 주님이 오셔서 의문에 쓴 계명의 율법을 십자가에서 폐하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율법을 폐하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과부의 재판장이 되셔서 그 원한을 풀어 주실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에덴에서 쫓겨났습니다.

인생은 다시 에덴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그것은 원수가 너무 강해서 율법에 의해서 다 죽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에덴으로 돌아가지를 못하는 인생을 과부로 말씀을 하고 있고 천국에 갈 수 없는 과부가 원한이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실제 율법이 없었다면 아담은 에덴에서 쫓겨나지를 않았을 것입니다

 

첫 언약입니다

호세아서에서 아담이 첫 언약을 범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율법을 죄를 한 번도 안 져본 아담도 어겨서 결국에는 에덴에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아담이 범죄를 함으로 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고 에덴에서 쫓겨났습니다. 이것이 이 세상 사람들이 원수에게 져서 사망을 당해야 하는 원한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로마서3:20절을 보겠습니다. (243)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습니다.

원수가 너무 강해서 우리 인생은 어느 누구도 율법으로는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없어서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것이 우리 인생이 원수에게 있는 원한이라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자기가 과부라는 것을 모르다 보니까 이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자기와 원한이 있는 원수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정말로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이것은 코미디입니다 어떻게 자기와 원한이 있는 원수를 사랑해서 그것을 지키고 있습니까? 그것은 자기가 과부라는 것은 모르고 있고 과부의 원수가 무엇인가를 모르고 어떤 원한이 있는 줄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율법 지키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가 과부라는 것을 아는 성도는 자기와 원한이 있는 율법을 안 지키려고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율법으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고 구원을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이 시대는 율법에 깊이 빠져서 헤어 나오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과부라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이 시대는 과부가 되기를 싫어하고 있습니다.

 

과부의 재판장이 되셨습니다.

이 말씀은 과부가 원수로 인하여 죽게 된 것을 하나님께서 재판을 하셔서 살려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이 원수를 폐하셔야지 하나님께서 재판장이 되셨을 때 과부에게 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원수가 살아 있으면 하나님께서 아무리 재판장이 되신다 해도 그는 자기가 원하는 판결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공정하신 분입니다

법대로 재판을 하시는 분입니다 과부라고 해서 봐 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가난한 자라고 해서 봐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에 공정한 재판을 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과부라 해도 죄가 있으면 반드시 죄에 의해서 판결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과부의 원한을 갚아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십자가를 믿지 않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그들이 십자가에서 의문에 쓴 계명의 율법을 폐하신 것을 믿지를 않고 있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도 방법이 없습니다. 믿는 사람에게는 의롭게 재판을 할 수 있는데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재판을 할 때 방법이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율법으로 하나님 앞에 서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반드시 죽게 되어 있습니다. 율법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서서 재판을 받으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스스로 사망을 자초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과부의 재판장이 되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셔서 원한을 풀어 주셨지만 그것을 믿지 않고 있는 사람에게는 어떻게 해 줄 도리가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 로마서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으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물론 그들의 말로는 의롭다 함을 받기 위해서 지키는 것이 아니라고 할지 몰라도 율법은 그 기능이 의롭냐 죄인이냐를 가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과부는 원수에게 원한이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도 자기가 과부라고 믿고 있는 사람은 원수에게 원한이 있습니다. 그러나 과부가 아닌 사람은 원수와 원한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원수를 사랑해서 그것을 잘 지키고자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깨달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은 과부의 재판장이라는 것을 모르면 나중에 원수에 의해서 진노를 받게 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요한계시록18:7절을 보겠습니다. (417)

그가 어떻게 자기를 영화롭게 하였으며 사치하였든지 그만큼 고난과 애통으로 갚아 주라 그가 마음에 말하기를 나는 여황으로 앉은 자요 과부가 아니라 결단코 애통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하나님은 과부의 재판장이십니다.

그러나 이 시대 율법을 지키고 있는 자들은 교회 안에 있으면서도 자기가 과부라는 것을 인정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아니 자기가 과부라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율법의 의를 보면서 자기를 영화롭게 하고 있으며 사치를 하면서 자기가 과부라는 것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다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과부의 재판장이 되시겠다고 하셨지만 이 시대 교인들은 자기들이 왜 과부냐고 묻고 있습니다. 그리고 과부라는 것을 모르다 보니까 자기 원수도 모르고 있고 자기에게 원수로 인하여 어떤 원한이 있는 것도 모르고 오히려 율법에 흠뻑 취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애통하게 됩니다.

아마도 이 시대 율법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지키고 있는 율법을 보면서 자기는 결단코 애통을 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원수가 무엇인가를 모르고 있다가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그 날에 반드시 원수에 의해서 애통한 일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안 믿습니다.

그러니까 의문에 쓴 계명의 율법이 폐하여 졌다고 말씀을 하고 있어도 그 말씀이 가슴에 와서 감동을 주지를 않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 스스로가 과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서 여황과 같이 영화롭게 사치를 하면서 자기들이 지키고 있는 율법의 의를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것으로 인하여 애통하고 진노를 받게 된다는 것을 모르고 이 시대 거의 모든 교인들이 다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과부입니다

우리 성도는 모두가 과부입니다 이 세상의 과부라는 것이 아닙니다. 원수로 인하여 원한이 있는 과부라는 말씀입니다 그 원수로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없어서 원한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 시대는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 율법을 폐하지 않고는 자기의 원한을 풀 수도 없고 하나님께서 재판장이 될 수도 없는데 스스로 진노를 자초하고 있습니다.

 

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셨는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과부가 되어 원수와 원한이 있는데 그 원한을 우리 인생들 스스로는 도무지 풀 수가 없기 때문에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그 과부들의 원한을 풀어주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 원한을 풀어 주어야지 하나님께서 과부의 재판장이 되신다는 것을 성경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자기들이 과부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18:7절을 보겠습니다. (126)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과부입니다

자기가 과부라는 것을 아는 성도는 밤낮 부르짖으면서 자기의 원한을 풀어 달라고 기도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과부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기에게 무슨 원한이 있는 줄을 모르기 때문에 그 원한에 대해서 기도를 하지 않을 것이 분명합니다.

 

천국에 가야 합니다.

그러나 원수 때문에 우리는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없어서 절대로 가지 못 합니다 과부는 자기 원한을 하나님께 풀어 달라고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시지 않겠느냐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택하신 자들은 자기가 과부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러나 택하심을 받지 못한 자들은 영화롭게 사치를 하면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과부입니다

원수로 인하여 도저히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과부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원한이 있는 성도는 늘 하나님께 부르짖으면서 자기 영혼을 위해서 간구를 하고 있습니다. 불의한 재판관이 귀찮아서 과부의 청을 들어 줄 정도로 부르짖는 성도를 하나님께서는 재판장이 되셔서 그 원한을 풀어 주시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선택입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을 하셨지만 이 과부는 바로 택하신 자들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자기가 선택을 받은 자인가 아닌가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선택을 받은 자들이 어떻게 하는가를 잘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모르게 되면 자기가 선택을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를 전혀 모르게 되어 있습니다.

 

과부의 재판장입니다

이 말씀은 선택한 자들을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이 시대도 역시 하나님께서 선택한 자들을 구원해 주시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는 이 선택에 대해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나를 선택해 주신 것에 늘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원한을 풀어 주셨습니다.

우리 인생들의 원한은 단 한가지입니다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고 또 이 세상에서 어떤 사람과의 관계를 말씀을 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에덴에서 쫓겨나는 순간 사단의 의해 원한이 있다는 것을 아시고 그 원한을 풀어 주시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에게 어떤 원한이 있는 줄을 모르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1:27절을 보겠습니다. (263)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과부입니다

고아도 물론 약한 자입니다 그러나 과부도 역시 이 세상에서 약한 자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물론 과부 중에는 세상에서 강한 자들도 있지만 성경은 모든 것을 비유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의 통상적인 것을 비유로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시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누가 택함을 받았습니까?

고아와 과부가 택함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누구를 찾아 다니셨는가 하면 바로 이 고아와 같은 사람과 과부와 같은 사람들을 찾아 다니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택하셔서 그들에게 구원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약한 것들을 택하셔서 강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과부가 얼마나 약합니까?

송사가 들어오면 무조건 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과부가 밤낮 부르짖으면 하나님께서 그 원한을 풀어 주시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자기에게 무슨 원한이 있는 줄을 모르고 있고 그 원한에 대해서 기도를 하지 않고 있습니다.

 

인생은 약합니다.

사단과 인생을 성경이 비유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마치 사자와 양과 같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상대가 안 되는 싸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상대가 안 된다는 것을 아시고 창세전부터 우리 인생을 지으시기 전부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자기가 약하다는 것을 아는 성도가 과부입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자기들이 지키고 있는 율법의 의를 보면서 너무도 강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나는 과부입니다

어떤 과부인가를 다시 말씀을 드립니다. 원수에 의해서 송사를 당해서 원한이 있는 과부입니다 그 원한이 너무 사무쳐서 재판장에게 가서 매일 부르짖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그런 과부들이 있는 것을 아시고 하나님께서는 과부의 재판장이 되시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재판장이 되셔서 이 세상에 살아가고 있는 과부들의 원한을 풀어 주시고 있습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러나 교회 안에 있으면서도 이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거의 모든 성경을 육적으로 보고 있기 때문에 소경이 되어서 도무지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내가 부르짖으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우리의 원한을 풀어 주시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원한을 풀어 주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지 않고 있습니다.

 

과부가 되어야 믿습니다.

약한 자가 되어서 율법에 의해서 도무지 자기가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처절하게 느끼고 있는 사람만이 자기가 과부라는 것을 알고 자기 원한을 풀어 달라고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성도는 이렇게 늘 자기 영혼을 위해서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과부는 다른 것 생각하지 않고 오직 자기가 원수로 인하여 원한이 된 것을 기억하고 그것을 위해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영을 모릅니다.

거의 모두가 육적인 것을 가지고 기도를 하고 있고 영의 일을 모르다 보니까 자기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그저 자기 육체의 것을 가지고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마치 원한이 있는 것 같이 서럽게 자기 육체의 것을 가지고 기도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성도는 육체의 것을 가지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영혼을 위해서 기도를 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나그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나그네에게 양식과 옷을 주시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나그네입니다 그들이 세상에서 이리저리로 여행을 하고 있다면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양식과 옷입니다 지금이야 여행을 하더라도 이 모든 것을 준비를 하고 다니지만 옛날에 나그네는 그런 것이 없이 다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창세기47:9절을 보겠습니다. (75)

"야곱이 바로에게 고하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일백삼십 년이니이다 나의 연세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세월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하고"

 

야곱의 고백입니다

바로에게 와서 자기가 나그네로 이 세상을 살아갔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아브라함으로부터 이삭 야곱까지는 자기 땅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목축을 하면서 나그네로 살았던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우리 인생은 모두가 나그네로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험악한 세월입니다

인생은 모두가 이렇게 험악한 세월을 보내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이 세상의 주인이 누구인가를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물론 온 우주의 창조주는 하나님입니다 그것을 부인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이 지구를 창조하시고 난 후에 아담에게 이 지구를 주었지만 아담이 죄를 짐으로 해서 사단에게 이 지구를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교인들이 오해를 합니다.

이 지구의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지구에 있는 것을 달라고 기도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지구는 모두가 사단이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사단에게 시험을 당하실 때 사단이 천하만국을 다 보여 주면서 내게 절을 하면 이 모든 것을 다 주겠다고 했습니다. 자기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에게 주겠다고 한 것임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사단이 주인입니다

예수 믿으면 부자가 된다는 말이 얼마나 어리석은 말인가를 바로 이해를 하시기 바랍니다. 야곱의 말 그대로 험악한 세월을 산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 성도는 이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다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실제 초대 교회의 성도들이 얼마나 많은 고난을 당했는가를 우리가 역사를 통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나그네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주인이 되어 있습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우리나라에서 주인으로 행세를 하고 있습니다. 사실은 타락의 증거를 보여 주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나그네로 험악한 세월을 살아야 하는데 한국교회는 모든 것을 다 누리면 살아가고 있다 해도 별로 틀린 말이 아닙니다.

 

사단이 주인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유대인들을 사단의 회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지구의 부를 누가 가장 많이 가지고 있습니까? 유대인이 이 세계 경제를 좌지우지하고 있다 해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미국이라는 거대한 국가도 유대인의 의해서 운영이 되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예수를 믿으면 부자가 된다고 하는 말이 얼마나 허구인가를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사단은 이 지구의 주인이고 하나님께서는 천국의 주인이십니다.

 

사단은 이 지구의 것을 줍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천국의 것을 주시고 있습니다. 이 한 가지만 바로 알아도 성경을 어느 정도 볼 수 있는 눈이 열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 교인들을 보면 나그네로 살려 하기 보다는 주인이 되려고 하고 있고 세상에 너무 집착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 그들이 과연 성도인가를 생각해 보게 됩니다.

 

성도는 이렇게 나그네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나그네가 어느 지방으로 왔습니다. 그러면 그 토박이들에게 잘 보이지 않으면 해코지를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입니다 나그네로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그 지방에 갔을 때 음식을 구하는 것입니다 주인들이 음식을 나눠주지 않으면 나그네는 굶어야 합니다.

 

험악합니다.

어느 정도로 험악한 가를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히브리서에서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나그네로 살면서 당하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악형을 당합니다. 희롱을 당합니다. 채찍을 맞습니다. 결박과 옥에 갇히기도 합니다.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칼로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당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이런 학대를 당합니까?

그것은 바로 나그네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주인인 사단이 가만히 두지를 않습니다. 예수 믿으면 모든 것이 평안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히브리서의 말씀과 같이 사단에 의해서 여러 가지 험악한 일을 당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것이 나그네입니다

그러나 이런 고난을 당하면서도 견딜 수 있는 것은 앞에 있는 즐거움이 너무 크다는 것을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나그네인가 주인인가를 바로 분별을 해야 합니다. 이 시대 교회는 주인입니다 정치도 자기들 마음대로 좌지우지하고 있고 정치인들도 종교인들의 눈치를 보느라 정책을 함부로 결정을 할 수 없는 지경에 까지 이르렀습니다. 성경에서 말씀을 하고 있는 나그네와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 이 시대의 교회입니다.

 

이 나그네에게 양식과 옷을 주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나그네로 살아가고 있는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서 양식과 옷을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그네에게 양식과 옷을 주시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나그네가 되어야 하나님께서 주시는 양식을 먹을 수 있고 옷을 입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요한복음6:55절을 보겠습니다. (154)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참된 양식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영의 양식을 주셨습니다.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본향을 바라보면서 나그네로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성도들의 양식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나그네를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세 전부터 예정을 하셔서 선지자들을 통해서 보여 주시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왜 이 세상에 오셨습니까?

바로 이 나그네들에게 참된 양식을 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나그네로 살아가고 있는 성도만이 이 참된 양식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도는 다른 것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그네는 자기가 거쳐 지나가는 곳이 아무리 아름답고 또 살기에 좋다고 해도 그것에 마음을 주지 않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가야 하는 본향이 너무 좋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때로는 세상의 아름다운 것을 가질지라도 그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습니다.

 

참된 양식입니다

그 양식을 나그네들에게 주고 있습니다. 교회에 있다고 다 나그네가 아닙니다. 내가 나그네인가를 알 수 있는 것이 바로 내가 먹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면 됩니다. 성도는 이 세상에서 나그네로 살면서 본향을 사모하기 때문에 참된 양식만을 먹고 있습니다.

 

그러나 가라지는 어떻습니까?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다고 다 참된 양식으로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문자적으로 기록이 되어 있는 것은 참된 양식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들은 독이 있는 음식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의 대표적인 것이 바로 교회 안에서 지키고 있는 율법과 은사입니다 그런 것들이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다고 해서 그냥 먹고 있는 사람들은 나그네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나그네에게만 양식을 주고 있습니다.

 

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에 주인에게는 양식을 주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나그네에게 양식을 주시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 성도를 나그네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본향은 천국입니다 그 천국을 가고 있는 성도는 이 세상에서 나그네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명심하고 있어야 합니다.

 

나를 잘 생각하시 바랍니다.

나그네는 어떻게 하든지 빨리 자기 집으로 가고 싶어 합니다. 자기가 머물고 있는 곳에서 많은 것을 누리고 있더라도 그것을 뿌리치고 일어설 수 있는 사람이 나그네입니다. 설령 천국과 같은 곳에서 모든 것을 누리며 살아가고 있을지라도 나그네는 그것에 마음을 주지 않습니다.

 

하지만 지금 어떻습니까?

자기 본향을 바라보면서 걸어가고 있는 사람이 너무 적습니다. 교회에 나와서 이 세상의 것을 위해서 기도를 하고 있고 이 세상에서 평안을 누리기 위해서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나그네는 그런 기도를 안 합니다. 어떻게 하면 빨리 자기 본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내가 나그네인가 아닌가는 그 기도만 들어 보아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나그네는 양식을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아무리 좋은 것을 준다 해도 그것을 얻으려 하기 보다는 자기가 가서 쉼을 얻을 수 있는 본향만을 생각하게 되어 있습니다. 본향을 생각하고 있는 성도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습니다. 아니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에 힘쓰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고 분명히 말씀을 하셨습니다.

 

천국입니다

나그네는 오직 천국에 가는 것만을 생각합니다. 더구나 이 세상에서 험악한 세월을 살아가고 있다면 당연히 천국을 사모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 주셔서 이렇게 나그네는 생명의 양식을 먹게 해 주시고 있습니다.

 

교회 나왔다고 다 생명의 양식을 먹는 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물론 예수를 믿으라고 합니다. 그것은 기독교라는 종교가 예수를 믿는 것을 부정을 하면 기독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말로는 예수를 믿어서 천국에 가라고 하지만 그들은 생명의 참 떡을 먹고 있지 않습니다. 나그네로 살아가고 있다는 그들이 이 세상의 것을 너무도 탐을 내고 있고 그것을 구하고 있습니다. 사단이 가지고 있는 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하고 있고 그것을 사단이 주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로마서13:14절을 보겠습니다. (258)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옷을 주십니다.

나그네에게만 주시는 옷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나그네에게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게 해 주시고 있습니다. 나그네만이 이 옷을 입기를 사모하고 있습니다.

 

혼인잔치의 비유를 알고 있습니다.

혼인 잔치에 초대를 받아 참석을 한 사람들 중에 한 사람이 예복을 입지를 않았습니다. 초대를 받지 않은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예복이 없어서 왕이 모든 사람들의 예복을 준비를 해서 입도록 주었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이 예복을 입지를 않고 참석을 했습니다. 임금이 물어 보니까 유구무언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거저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옷을 거저 주셨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이 이 예복을 입지를 않았습니다. 성경에서 한 사람이라고 하니까 자기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으로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교회에 나와 있는 거의 모든 사람이 이 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왜 예복을 안 입었습니까?

그 이유는 단 한 가지 자기가 입은 옷이 괜찮았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도 이렇게 율법의 의로 옷을 입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절대로 예복을 받아 입지를 않습니다. 나그네와 같이 여행을 하면서 옷이 다 떨어진 사람만이 예복을 주면 감사하게 받아 입지 자기 옷이 깨끗하다고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은 예복을 줘도 안 입습니다.

 

육신의 일을 도모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을 생각을 하지 않고 육신의 일을 도모하고 있습니다. 육체의 행위로 옷을 입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부자와 같이 자기 육체의 행위로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지를 않고 있습니다.

 

나그네는 자기 옷이 떨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 주인이 되어 있는 사람들은 자기들의 육체로 행위의 옷을 근사하게 입고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도 부자와 같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호화로이 연락을 하고 있으면서도 전혀 자기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 줄을 깨달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단 한가지의 율법이 자기를 그렇게 옷 입게 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부자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나그네가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나그네에게 양식과 옷을 주시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나그네가 되지 않으면 절대로 이 양식을 먹을 수 없고 또한 옷을 입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나그네의 마음이 어디에 있습니까? 자기가 가야 하는 본향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양식을 구할 것이고 또 구원의 옷을 입기를 사모하고 있을 것입니다

 

옷을 안 입습니다.

거저 주고 있는데도 그 옷을 안 입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의에 옷을 거저 주고 있는데도 안 입습니다. 그 이유는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나와서 예수 그리스도의 의에 옷을 입을 생각은 하지 않고 거의 모두가 정욕을 위해서 육신의 일을 도모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그네가 되기를 싫어하고 있습니다. 아니 자기가 이 세상의 나그네라는 것을 인정을 하지 않고 정욕에 빠져서 육신의 일을 도모하느라 교회 안에서 그 일을 하느라 모두가 깊이 빠져 들어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정욕에 빠져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의 의에 옷을 입으라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도무지 듣지를 않고 있습니다.

 

시편146:9절을 보겠습니다. (908)

여호와께서 객을 보호하시며 고아와 과부를 붙드시고 악인의 길은 굽게 하시는도다

 

성도는 고아입니다

성도는 과부입니다 성도는 나그네입니다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신원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사 그에게 양식과 의복을 주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반드시 고아가 되어야 합니다. 또한 과부가 되어야 하고 나그네가 되어야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하여 신원하여 주시고 또 양식과 옷을 주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객을 보호해 주십니다.

그리고 고아와 과부를 붙들어 주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악인의 길을 굽게 하시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는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가 있고 또한 악인이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는 악인이 더 많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악인이 많기 때문에 그 악인들 가운데서 객을 보호해 주시고 있고 고아와 과부를 붙들어 주시고 있습니다.

 

너무 많습니다.

이 세상에는 악인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악인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다고 하는 그들이 악인이 되어서 고아와 과부의 송사를 억울하게 하고 있고 또 나그네를 압제를 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도 교회 안에는 그런 악인들이 부지기수로 있으면서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힘들게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입니다

하나님은 과부의 재판장입니다 하나님은 나그네를 위해 양식과 옷을 주시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성도가 누구인가를 말씀을 해 주고 있습니다. 내가 영적으로 아버지를 잃은 고아지만 하나님께서 양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또 원수에 의해서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원한을 진 과부고 또 이 사단에 의해 압제를 당하고 환난을 당하고 있는 나그네라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나를 아시기 바랍니다.

그런 성도만이 하나님께 간절히 구할 수 있습니다. 그런 성도를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셨습니다. 주님 안에서 오직 믿음으로 천국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그런 성도가 되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천국에 들어가서 모든 축복을 누리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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