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 겸손과 교만
잠언18:12절을 보겠습니다. (구 931쪽)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
겸손
남을 존중하고 자기를 낮추는 태도가 있는 것을 겸손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세상이 말하는 겸손입니다 성도가 이 세상을 살면서 복음을 전하려고 하면 누구보다도 더 이 세상에 대해서 겸손해야 합니다. 겸손하지 않고는 내가 은혜로 받은 복음을 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겸손해야 합니다.
물론 사람 앞에서도 우리는 겸손해야 하겠지만 무엇보다도 하나님 앞에서 겸손을 해야 합니다. 사람 앞에서는 때로 복음을 가지고 있는 성도는 교만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솔직히 진리를 가지고 있는 성도는 진리를 가지고 있지 않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과 대화를 하다 보면 그들로부터 교만하다는 말을 듣게 되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런 겸손과 교만은 사실 우리에게 있어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진리를 가진 자가 조금 교만하고 또 그렇지 않은 자가 겸손하다고 해서 그것이 구원과 직접적으로 연결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행위의 겸손과 교만은 우리가 가진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 필요한 것이지 실제 성경에서 말씀을 하는 교만과 겸손이 무엇을 말씀을 하고 있는 가를 알아야 합니다.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이 어떻게 해야 겸손하고 또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교만하기 때문에 멸망을 당하는 가를 성경을 통해서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있지만 어떤 사람은 겸손하여 존귀함을 받게 되고 어떤 사람은 교만하여 멸망을 당하게 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이 세상 사람들에게 쓴 말씀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보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 중에 겸손한 사람이 있고 또 교만한 사람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교만하면서도 자기가 교만한 것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겸손해야 합니다.
교만 하는 순간에 그는 멸망의 선봉이 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바로 보고 누가 겸손하고 누가 교만한가를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자를 높이시고 또 그를 이 세상에서 구원을 해 주시고 있다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것이 교만이고 어떤 것이 겸손인가를 바로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가 않습니다.
우리가 가장 조심을 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사람 앞에서 겸손의 모양을 내고 있는 것을 보면서 자기가 겸손하다고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교회 안에서 누가 무엇을 말하든지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을 겸손이라고 생각을 하면 안 됩니다. 교회도 이 세상이고 목사도 사람이라는 것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겸손과 교만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겸손의 모양을 나타내고 또 때로는 교만한 모양이 나타나고 하는 그것은 사실 구원과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말씀을 나누는 것은 구원과 직접적으로 상관이 있고 겸손하면 구원을 받고 교만하면 멸망을 당하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구원 문제라는 것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성도는 주님과의 관계입니다
설령 이 세상 사람들이 다 나를 교만하다고 해도 주님이 나를 겸손하다고 하면 나는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성도가 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사람이 보는 눈과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보시는 가는 너무도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을 우리가 바로 알아야 하며 다시 한 번 강조를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구원은 내 개인의 문제입니다
다른 사람이 관여할 수도 없고 또 다른 사람이 나를 판단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오직 주님과의 관계에서 내가 겸손한 사람이 되어야 주님으로부터 성도라 부르심을 받는 존귀한 자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믿음은 내 개인의 문제입니다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를 말씀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말씀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물론 성도와 성도와의 관계를 어떻게 형성하느냐도 중요합니다. 그것을 전혀 무시하면서 성도의 교제를 나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의 구원은 개인의 문제라는 것을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신부입니다
그것은 주님과 나와의 관계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나” 라는 개인을 어떻게 보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볼 수 없기 때문에 사람과의 사이에서 겸손의 모양을 내려고 노력을 하고 있고 그것을 보면서 겸손하다고 말 합니다.
먼저 주님께서는 어떻게 하셨는가를 보겠습니다.
이사야53:4절을 보겠습니다. (구 (1033쪽)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이사야가 예언을 했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만세전부터 예정을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이루셔야 하는 사역에 대해서 이사야 선지자가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선지자들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어떻게 고난을 받아야 하는 가를 예언을 하셨습니다. 그는 우리를 대신해서 이러한 고난을 당할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고 실제 주님께서는 이 예언 그대로 이 세상에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인생의 모습을 입고 오셨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일은 육체를 그대로 입고 있는 인생으로서는 너무도 힘에 겨운 일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볼 때는 예수님께서는 징벌을 당해서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하는 것과 같이 보였습니다.
예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면 그대로 하라고 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을 통해 예언을 하시고 예수님에게 그대로 이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의인입니다 사실 이런 고난을 안 당하셔도 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자기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겸손한가를 보여 주셨습니다.
겸손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겸손이라는 것을 먼저 바르게 이해를 해야 합니다. 사람 앞에 겸손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겸손한 것이 겸손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사람 앞에 겸손한 것은 모든 사람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겸손한 것은 성경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성경을 모르면 그가 겸손한지 교만한지 도무지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것을 이사야 선지자가 성경에 기록을 했습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이스라엘에 의해서 당하실 것을 그대로 예언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주님께서 모르셨다면 주님이 어떻게 하셨겠습니까? 주님은 우리의 질고를 지지도 않았을 것이고 또 우리의 슬픔을 당하시지도 않았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가 채찍에 맞습니다.
그리고 그가 창에 찔림을 당합니다. 만약에 성경에서 이렇게 하라고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주님이 몰랐다면 주님은 결코 이 일을 하지 않았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통해서 예언하신 말씀이 당신이 이 세상에서 오셔서 이루실 구속의 일이라는 것을 아시고 그대로 하셨습니다.
겸손입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모든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쉽게 말씀을 드리면 고난을 당하실 때 일곱 영이 되는 천사를 부르셨다면 주님은 결코 십자가를 지시기 않아도 되셨습니다. 아마 일곱 영이 되는 천사가 나타났다면 주님을 때리려고 했던 사람들이 모두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을 것이고 어느 누구도 주님을 만지지도 못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주님은 자기를 죽이는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시면 서도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예언하신 그 말씀 그대로 채찍으로 맞고 또 창으로 수치를 당하시면 서도 모든 것을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셨습니다. 겸손이란 내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순응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인간적으로 끔찍한 고통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그대로 행하셨습니다.
마태복음26:39절을 보겠습니다. (신 47쪽)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잘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이 시대 고통을 받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과 많은 대화를 하고 있습니다. 상담을 할 때 그들이 육체적으로 고난을 당하는 것을 들을 때 마다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겸손이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보여 주시고 있습니다.
이사야가 예언을 했습니다.
주님은 그대로 이스라엘에 의해서 채찍을 맞고 또 징계를 받고 상함을 입었습니다. 주님은 이 모든 것을 하지 않아도 되는 분입니다 사실 그 당시 십자가형은 인생들이 받기에는 너무도 큰 고통의 형벌이었습니다. 우리가 지금 영화에서 보는 것으로 잠시 그것을 느끼고 있지만 실제 그 십자가형은 너무도 끔찍한 형벌이라는 것을 고대사를 통해서 알고 있습니다.
주님도 인생입니다
우리와 똑같은 육체를 입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겸손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주님은 이 십자가를 안 당하셔도 되는 분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이 십자가를 당해야 한다고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육체를 입고 오신 예수님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이 있습니다.
주님은 피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성경에 이미 예언을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찔림으로 해서 우리의 허물이 깨끗해 질 수 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상함으로 우리의 죄악을 도말하시고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맞음으로 우리를 낫게 하신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모든 것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시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원입니다
주님의 원은 십자가의 고통을 벗어나고 싶은 것입니다 겸손은 내 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원대로 하는 것이 겸손입니다 주님께서 만약에 내가 죄가 없는데 왜 십자가를 지어야 합니까? 하면서 하나님의 원을 거절을 했다면 주님은 교만하신 분입니다
겸손과 교만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하셨으면 그대로 하는 것이 겸손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모르게 되면 자기가 겸손한지 교만한지를 모르게 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 이사야의 말씀을 내가 아니라고 하면 그것은 교만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바로 이해를 해야 합니다. 먼저 성경말씀을 바로 알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말씀을 하는 가를 알아야 겸손한 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주님이 그것을 기도하고 있습니다.
성경말씀에 기록이 되어 있는 예언에 대해서 아시기 때문에 주님은 이 잔을 내게서 옮겨 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해 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겸손이란 이렇게 하나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말씀을 하는 가를 알고 그것에 따라 행하는 것이 바로 겸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인생들이 고난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여러 가지 모양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고난에 대해서 성경이 무엇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성경은 우리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고난을 당할 것을 분명히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고난에 대해서 너무 하나님께 원망을 많이 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을 가집니다.
주님이 본을 주셨습니다.
십자가의 모든 고난을 당하시면서 주님은 정말 인간적으로 할 수 있다면 이 잔을 내게서 옮겨 달라고 기도를 했습니다. 얼마나 간절히 기도를 했는가 하면 땀방울이 핏방울과 같이 되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하나님 앞에서 겸손했습니다. 자기가 의롭다고 주장을 하지 않고 선지자가 예언한 그대로 하나님의 원대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빌립보서2:5-8절을 보겠습니다. (신 319쪽)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겸손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추하시지 않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과 같이 되었다는 말씀을 바로 이해를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입니다
사람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낮아진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천사가 있습니다. 그 천사가 얼마나 강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천사가 타락을 해서 사단이 되었고 그 천사와 우리는 마치 사자와 양과 같다는 것을 성경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사가 되신 것도 아니고 사람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습니다.
비교 자체가 안 됩니다
제가 사람이 지렁이가 되는 것으로 비교를 했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형체를 입고 오신 것은 그보다 더 낮게 되었다는 것을 우리가 바로 이해를 해야 합니다. 지렁이는 우리와 같이 살고 있는 미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우리는 함께 살고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먼저 이해를 하고 이 말씀을 보아야 합니다.
겸손입니다
이것은 겸손하지 않고는 도무지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사람이 자기 명예와 지위가 있는데 그것을 감추고 연약한 사람과 같이 되는 것도 얼마나 겸손하게 보고 있습니까? 지위에 높은 사람이 일반 사람들 앞에서 겸손의 모양을 내 보이는 것도 사람들이 그를 얼마나 겸손한 사람으로 보고 있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본체이신 주님께서 우리 육신의 모습을 입고 오셨다는 것은 비교 자체가 안 되는 일입니다
그리고 죽기 까지 복종을 하셨습니다.
선지자들의 예언대로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겸손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께서 죽으라고 하시면 죽어야 하는 것이 겸손입니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죽으라 하시니까 죽는 것이 바로 겸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죽기 까지 복종을 하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겸손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자기를 낮추고 복종하는 것이 겸손입니다 그러나 이 시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자기를 낮추기 보다는 드러내고 있습니다. 아니 자기를 낮춘다는 것의 의미를 모르고 있습니다. 그가 아무리 세상에서 겸손의 모양을 갖추었다 해도 하나님께 복종하지 않고 있다면 그는 겸손한 자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복종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라고 하면하고 저렇게 하라고 하면 저렇게 해야 합니다 복종을 하라고 하니까 오해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저 막연하게 복종을 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오히려 겸손이 아니라 교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우리가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죽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에서 십자가를 지셔야 하는 것이 복종입니다
아무나 복종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생들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시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자기가 십자가를 지겠다고 한다면 그는 겸손한 사람이 아니라 교만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십자가는 주님이 지셔야 하는 것이지 이사야의 말씀을 보고 내가 십자가를 지겠다고 하는 것은 겸손이 아니라는 것을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성경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것을 내가 하는 것으로 오해를 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이 하실 일을 자기가 하겠다고 하는 것은 사실은 겸손이 아니라 교만이라는 것을 우리가 바로 이해를 하고 있어야 합니다. 성경을 통해 주님께서 어떻게 겸손하셨는가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복종하는 것이 겸손입니다
아무 것에나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님에게 십자가를 지라고 하신 것을 복종한 것과 같이 또 우리에게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을 복종하는 것이 겸손입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복종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데살로니가후서1:8절을 보겠습니다. (신 334쪽)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
주 예수의 복음
복음에 복종치 아니하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기 까지 하나님께 복종을 하셨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그만큼 하나님 앞에 겸손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주신 것입니다 우리 역시 겸손이 무엇인가 하면 우리 주 예수의 복음에 복종을 하는 것이 겸손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의 복음입니다
아무 것에나 복종을 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교회에 나왔다고 다 예수의 복음에 복종을 한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미 사도들이 복음을 전했을 때부터 복음에 복종치 아니라는 자들이 교회 안에 있었다는 것을 성경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예수의 복음에 복종을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으라는 말씀입니다
십자가에서 이루신 사건이 있습니다.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복종하는 성도고 그런 성도가 겸손한 성도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교회에 나와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모르면 복종을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성경에 있는 말씀을 문자 그대로 복종을 한다고 해서 마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복종을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정말 착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복종을 해야 합니다. 성경에 문자로 기록이 되어 있다고 해서 아무 것에나 복종을 하는 것은 성경을 모르는 일이고 오히려 그것이 교만한 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서 말씀을 드립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이 겸손입니까? 교만입니까?
가장 기초가 되는 이것부터가 이 시대는 잘못 알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이 율법을 지키고 있다면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복종치 않는 아주 교마한 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모르면 그렇게 된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자기 딴에는 교회 안에서 율법을 지키는 그 모습이 겸손하게 보일지 몰라도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거절하는 교만한 행위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교만한 자는 복종치 않습니다.
교회에 나와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아무리 그가 진심으로 신앙을 가지고 있다 해도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복종치 않는 사람은 그 자체로 교만하다는 것을 우리가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복음이라는 것은 기쁜 소식입니다 율법의 종이 되었던 우리를 율법에서 해방을 시켜주시고 주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게 하는 것이 복음입니다 그러나 이 복음을 모르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겸손하시기 바랍니다.
육체로 겸손하라고 이 말씀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성도가 이 세상에서 겸손해야 한다는 것을 모르고 있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내가 아무리 복음의 모든 비밀을 다 알고 있다고 해도 마치 이 세상에서 독불장군과 같이 모든 것을 나 혼자만 아는 것으로 다른 사람에게 말을 하면 내가 전하고자 하는 복음을 사람들이 들으려 하지 않을 것이 분명합니다.
성도는 겸손해야 합니다.
그러나 너무 겸손의 모양을 내려고 하다가는 오히려 복음이 가려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때로는 겸손보다는 담대함이 있어야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서는 정말 주님의 말씀과 같이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슬기로워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골로새서2:18절을 보겠습니다. (신326쪽)
“누구든지 일부러 겸손함과 천사 숭배함을 인하여 너희 상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저가 그 본 것을 의지하여 그 육체의 마음을 좇아 헛되이 과장하고”
겸손을 모르고 있습니다.
목사들 중에 그리고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 중에 참으로 겸손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 겸손의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감동을 하고 있고 마치 그런 겸손이 하나님 앞에 겸손한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사실 사람 앞에서 아무리 겸손하다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 겸손하지 않은 사람이 많다는 것을 우리가 깨달아야 합니다.
교인들이 목사를 봅니다.
그리고 그가 참으로 겸손하다고 말 합니다. 물론 분명히 겸손하게 보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율법을 지키고 있다면 그는 그 자체로 하나님 앞에 겸손한 자가 될 수 없습니다. 사람 앞에서는 겸손하게 보일 수 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절대로 겸손한 자가 아니라 오히려 교만한 자라는 것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인간적인 겸손이 아닙니다.
그것은 얼마든지 자기 육체를 쳐서 겸손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 교육을 통해서 겸손의 모양을 나타낼 수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그런 겸손한 모습을 보고 마치 그가 하나님 앞에 겸손한 것으로 생각을 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그런 육체의 겸손이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복종을 하는 자가 겸손하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공동번역을 보겠습니다.
“여러분은 겸손한 체하거나 천사를 숭배하는 자들에게 속아서 여러분이 받을 상을 빼앗기지 마십시오. 그들은 보이는 것에만 정신을 팔고 세속적인 생각으로 헛된 교만에 부풀어 있습니다.”
겸손한 체하고 있습니다.
육체적으로 보이는 겸손의 모습은 다 사실은 겸손한 체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물론 천성적으로 겸손이 몸에 익숙한 사람도 있겠지만 사실은 다 학습에 의해서 겸손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실 우리가 이 겸손한 체 하는 것에 대해서 이 세상에서 다 배우고 있지 않습니까?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들이 나를 겸손하다고 합니다. 그럼 그것은 내가 이제까지 학습에 의해서 배운 것을 나타내고 있을 뿐입니다 이렇게 해야 사람들이 겸손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지금 사도 바울이 겸손한 체 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모임에 갔습니다.
주님께서도 말씀을 하셨습니다. 상석이 앉지 말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말씀이 아니더라도 이 세상에서 그렇게 학습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내가 겸손을 나타내려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겸손한 체하라면 말단에 가서 앉아 있으면 저 사람 참 겸손하다는 말을 듣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웬만한 어린 아이도 아는 것입니다
이런 것에 속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사실 다 이런 것에 속고 있다고 해도 별로 틀린 말이 아닙니다. 이렇게 겸손한 체 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솔직히 교회 안에서 목사가 이런 겸손의 모양을 나타내고 있으면 교인들은 아주 맛이 간다고 해야 맞을 것입니다
자기 목사가 너무 겸손하다고 말 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그런 겸손한 체 하는 것에 속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겸손한 체 하는 것에 대해서 다 속고 있습니다. 그에게서 겸손의 모양이 나타나고 있다는 자체가 겸손한 체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복음이 있는 성도는 겸손한 체 하고 말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복음이 없는 사람은 다릅니다.
자기가 하나님 앞에 겸손하다는 것을 보이려고 겸손한 체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기억하고 있어야 하는 것은 겸손한 모양이 나오고 있는 것 자체가 그가 일부러 겸손한 체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겸손한 체 하고 있으니까 그에게서 겸손의 모양이 나오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겸손한 체 하고 있지 않으면 사람들에게 그렇게 보이지 않습니다.
미혹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니 그런 겸손을 눈으로 보려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자체가 이미 복음이 없다는 증거가 될 수 있습니다. 성도는 굳이 겸손한 체 하지 않아도 이미 주 예수의 복음에 복종을 하고 있습니다. 겸손의 모양을 너무 나타내고 있다는 것 자체가 문제라는 것을 바로 알고 그 겸손의 모양에 속지 마시기 바라니다.
상을 빼앗깁니다.
이 말씀은 구원을 빼앗긴다는 말씀입니다 겸손한 체 하는 것을 보고 그가 겸손하다고 생각을 하고 있다가는 여러분의 상을 빼앗기게 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 교회 안에서 사람들이 얼마나 겸손한 체 하려고 하고 있습니까?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되는데도 겸손하게 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자연스럽게 하면 되지 않습니까?
왜 굳이 겸손의 모양을 내려고 하고 있습니까? 그것은 그가 아직 하나님 앞에 겸손하지 않고 있다는 증거가 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그 겸손을 보고 그것을 따라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사도 바울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바로 보시기 바랍니다.
겸손을 따라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저가 그 본 것을 의지하여 그 육체의 마음을 좇아 헛되이 과장하고 머리를 붙들지 아니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육체에 겸손을 보고 그것을 의지하고 그것을 좇아 헛되지 과장을 하게 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교회 안에서 사람들이 이렇게 하고 있습니다. 더욱 더 겸손의 모양을 나타내려고 그 육체의 마음을 좇아 헛되이 과장을 하고 있습니다.
모양 내지 마시기 바랍니다.
자기상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교회 안에서 그렇게 겸손의 모양을 내려고 하는 자체가 그것을 의지하게 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을 의지해야 하는데 그 겸손의 모양이 마치 하나님을 믿는 것같이 보여 져서 그것을 의지하게 되어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머리를 붙들지 않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복종을 하지 않고 사람들은 자꾸 겸손한 체 하려고 하면서 그것을 보고 저 사람은 믿음이 참 좋아 하고 있고 자기가 믿음이 좋은 사람이 되려고 하면 더욱 더 겸손의 모양을 내려하고 있고 그것을 따라가게 되어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늘 말씀을 드립니다.
우리는 영의 성도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영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복종을 하는 자가 겸손한 성도입니다 그는 굳이 자기 육체로 겸손한 체 하려고 하지 않아도 됩니다. 이미 주님 앞에서 겸손하고 있는데 왜 굳이 사람 앞에서 그렇게 겸손을 나타내려고 하고 있습니까? 우리에게서 겸손의 모양이 나타나고 있다는 자체가 사실은 일부러 과장을 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을 해야 합니다.
겸손이 무엇인가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런 일부러 과장을 하는 것이 겸손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그렇게 일부러 과장을 해서 나타나고 있는 것을 보고 참 겸손하다고 생각을 하고 있는데 성경에서는 그것이 겸손하다고 하지 않고 있고 오히려 그 겸손에 속지 말라고 말씀을 하면서 너희가 속으면 상을 빼앗긴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2:11-14절을 보겠습니다. (신 303쪽)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할 일이 있기로 내가 저를 면책하였노라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저희가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남은 유대인들도 저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저희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 그러므로 나는 저희가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로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을 좇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
겸손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이 전도 여행을 갔다가 오면서 사도들을 만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이방인과 함께 먹고 있다가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사람들이 오니까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음식을 먹는 중에 빨리 자리를 피하고 또 같이 있었던 사람들도 그렇게 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베드로가 누구입니까?
사도 바울과 베드로는 인간적으로 보면 상대가 안 됩니다. 쉽게 말씀을 드리면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제자입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자기가 스스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다고 하면서 복음을 이방에 전하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성도들의 입장에서 보면 베드로와 사도 바울은 비교가 안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우리는 이 말씀에서 교만과 겸손에 대해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아마 이 시대 담임 목사가 조금 실수를 했습니다. 그런데 부목사라고 하는 사람이 모든 사람이 듣고 보고 있는 가운데서 왜 외식을 하고 있느냐고 면책을 했다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누구의 잘못을 떠나서 우선 그렇게 모든 사람이 있는 가운데 사도 바울이 베드로를 면책한 것 자체가 교만하다고 말할 것이 분명합니다.
지가 알면 얼마나 안다고 나도 그만큼은 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너는 실수를 안 하느냐 꼭 이렇게 사람이 많은 곳에서 망신을 주어야 하느냐고 하면서 사도 바울이 오히려 책망을 받았을 것이 분명하고 또 그 일로 서로가 원수가 될 수도 있습니다. 만약에 담임 목사라면 그 부목사를 그냥 두지 않고 잘라 버릴 것이 분명합니다.
사도 바울이 교만합니까?
우리는 주 예수의 복음에 대해서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 가를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절대로 교만한 사람이 아닙니다. 만약에 베드로가 외식을 하는 것을 보고도 그것을 그냥 눈 감아 버렸다면 사도 바울은 비겁한 사람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이것은 교만이 아닙니다.
복음에 대해서 담대한 것입니다 이 시대 복음의 담대함과 교만함을 분별을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가 목사라도 그렇습니다. 아니 지금 이 시대 교단의 총회장이라고 해도 그가 외식을 했다면 당연히 면책을 해야 하는 것이 복음을 가진 자의 담대함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물론 그가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인가 아니면 척을 지고 원수가 될 사람인가를 잘 판단을 해서 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베드로와 바나바를 면책을 하고 있습니다.
인간적인 위치로는 사도 바울이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또 이것을 보고 사람들은 그렇게 말할 것입니다 조용히 두 사람을 불러서 면책을 하면 되지 굳이 모든 사람이 있는 곳에서 면책을 하느냐고 말할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왜 이렇게 했는가를 우리가 바로 알아야 합니다. 외식이라는 것은 정말 이렇게 담대하게 하지 않으면 그가 깨닫지를 않기 때문입니다 또 모든 사람에게 경계를 주기 위함이기도 합니다.
사도 바울은 겸손한 자입니다
절대로 교만해서 자기가 아는 것을 가지고 지금 베드로와 바나바가 하고 있는 외식을 보고 면책을 하고 있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주 예수의 복음에 누구보다도 겸손한 자라는 것을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 앞에서 면막을 주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 시대 이렇게 누군가 했다면 사도 바울을 보고 아주 교만한 사람이라고 말할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바로 알아야 하는 것은 이것은 교만이 아닙니다. 주 예수의 복음에 오히려 겸손하기 때문에 담대하게 면박을 줄 수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바나바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얼마나 겸손한가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성경에는 그들이 어떻게 했다는 것이 나오지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은 사도 바울이 면박을 주었을 때 자기들이 외식을 한 것에 대해서 그대로 받아 들였습니다. 만약에 그들이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분명히 성경에 그 내용이 기록이 되었을 것입니다
겸손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복음에 복종을 하는 것이 바로 겸손입니다 그가 누구든지 내가 외식을 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 면박을 주었다면 바로 깨닫고 그것에 복종을 하는 것이 겸손입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아마도 누군가 사도 바울과 같이 그렇게 대 놓고 면박을 주었다면 설령 자기가 외식을 한 것을 알고 있다 해도 사도 바울을 교만하다고 오히려 책망을 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겸손과 교만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복음에 복종치 않고 있는 것을 보고 그것을 그냥 두는 것이 겸손이 아닙니다. 그가 어떤 사람일지라도 그가 복음에 복종치 아니하면 그것에 대해서 담대하게 책망을 하는 것이 믿음을 가지 성도의 담대함이고 또 그 책망에 대해서 그대로 받아들이는 그 사람이 겸손한 사람이라는 것을 우리가 바로 알아야 합니다.
지금 이 시대 얼마나 외식이 많이 있습니까?
아니 자기들이 외식을 한다는 것 자체를 모르고 있습니다. 오히려 그 외식하는 것을 책망을 했다가는 이단으로 몰릴 것이 분명합니다. 겸손한 자들은 책망을 듣고 있습니다. 정말 창피한 상황이라 해도 자기가 실수를 한 것에 대해서 책망을 듣고 그것에 복종을 하는 사람이 바로 주 예수의 복음에 복종을 하는 겸손한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잠언6:23절을 보겠습니다. (구 917쪽)
“대저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요 훈계의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라”
책망은 곧 생명의 길입니다
사도 바울이 베드로와 바나바가 외식을 하는 것을 책망을 한 것은 그들의 생명을 위해서입니다. 그 외식으로 인하여 생명이 버림을 받는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무엇을 가르쳐 주고 있는가 하면 생명에 대한 책망을 성도는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것이 사도 바울과 같이 모든 사람이 듣는데서 면박을 주는 일이라 해도 생명을 얻을 사람은 그것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안 듣습니다.
이 시대 얼마나 많은 외식이 있습니까? 그리고 얼마나 많이 주 예수의 복음에 복종치 않고 있습니까? 그러나 아무리 책망을 해도 전혀 들으려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것이 곧 생명의 길인데도 사람들이 완고해 져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복종치 않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겸손한 자입니다
반드시 책망을 듣게 되어 있습니다. 이 책망이 이 세상 도덕에 대한 책망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가 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런 책망이 아니라 주 예수의 복음에 대해서 책망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세상 도덕에 대해서 책망을 한 것이 아니라 생명에 대해서 책망을 했고 베드로와 바나바가 겸손하게 이 책망에 대해서 들었습니다.
알아야 합니다.
자기가 외식을 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외식을 하면서도 사실 외식을 안 한다고 책망을 하고 있습니다. 거꾸로 돼서 외식을 하는 그들이 외식을 하지 않는 사람들을 책망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주 예수에 복음에 대해서 모르면 그렇게 됩니다.
식사 기도를 합니다.
제가 그것을 반대를 하고 싶지 않습니다. 주기도문에서도 있지만 일용한 양식에 대해서 기도를 하는 것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을 합니다. 물론 그 일용한 양식이 우리가 먹는 양식이기도 하지만 영의 양식이기도 합니다. 어찌되었든 지금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그 기도 하나만 봐도 너무 외식을 하고 있습니다.
과자 하나를 먹어도 기도를 합니다.
식사 기도를 하는 것까지는 충분히 이해가 되지만 간식을 먹는 것도 기도를 하고 있고 심지어는 차에 타서도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 것이 사실은 다 외식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오히려 기도를 안 하면 이상하게 생각을 하고 있고 믿음이 없는 사람으로 취급을 하고 기도를 하라고 권면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외식에 대해서 책망을 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마도 책망을 하는 사람을 오히려 이단이라고 공격을 할 것이 분명합니다. 그들이 집에서도 남이 안 볼 때도 그렇게 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상황에 따라 하고 있는 그런 외식을 하고 있으면서도 전혀 깨닫지도 못하고 그런 외식들이 지금 교회 안에 너무 많이 있습니다. 그런 겸손의 모양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 상을 빼앗기는 일인 줄을 모르고 더욱 더 겸손의 모양을 보이고 싶어 합니다.
겸손하시기 바랍니다.
그 사람은 책망을 듣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책망을 전혀 듣지를 않고 있습니다. 성령께서 책망을 하고 있지만 이 시대는 성령에 대해서 그 기초도 모르고 있기 때문에 전혀 들으려 하지 않고 있습니다. 성령에 대해서 모르면 자기가 겸손한지 교만한지를 전혀 모르게 되어 있습니다. 성령을 알아야 그 책망이 바른가를 분별할 수 있는데 성령이 자기 마음에 임재를 하지 않으면 절대로 책망을 듣지 않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5:5절을 보겠습니다. (신 382쪽)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다 겸손함으로 허리를 동이라고 말씀을 합니다.
여기서 장로는 지금의 목사라고 보면 맞습니다. 그러나 목사라 해서 다 장로라 할 수 없습니다. 반드시 그가 주의 복음을 가르치는 자라야 장로라 할 수 있습니다. 아무에게나 순복하라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거짓 선지자에게 순복을 하면 그는 반드시 죽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지금 배우고 있는 그 사람이 주의 복음을 전하는 자인가 아니면 거짓 선지자인가를 바로 분별을 해야 순복을 하든지 대적을 할 수 있습니다.
순복해야 합니다.
그러나 반드시 조건이 있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목사라 해서 그가 주의 복음을 전하는 자라고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더구나 그가 이 세상 알려져 있는 유명한 목사일 때 더욱 더 조심을 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교회 안에서 그런 자들에게 순복을 하다가 결국에는 자기 영혼이 사망의 길로 가고 있으면서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주의 복음입니다
지금 이 시대 주의 복음을 전하고 있는 목사가 과면 얼마나 되는 가를 정말 하나님께 구해야 합니다. 이 문제는 자기 영혼의 생명이 걸려 있다는 것을 늘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거짓 선지자를 하나 세우면 그에게 배우는 사람이 십만 명이면 사단은 그냥 쉽게 십만 명을 죽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무조건 순복을 하고 있습니다.
아니 감히 교회 안에서 목사에게 순복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상상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주의 복음을 가지고 있는 목사인가 아니면 거짓 선지자인가를 일반 교인들이 분별을 할 수 없어서 사망의 길로 끌려가고 있지만 사람들은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어리석은 자입니다
교회에 있는 모든 목사가 아니 정통이라는 간판을 내 건 교회의 목사가 마치 주의 복음을 다 가지고 있는 것으로 오해를 해서는 안 됩니다 늘 세상은 진짜 보다는 가짜가 더 많았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청함을 받은 자보다 택함을 입은 자가 아주 적다고 분명히 가르쳐 주시고 있습니다.
장로 잘 만나시기 바랍니다.
그가 거짓을 전하는데 내가 바른 믿음을 가질 수 있다고 착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이 바른 복음을 전했는데도 다른 복음에 미혹이 되었습니다. 하물며 거짓을 전하는 자에게서 자기가 믿음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을 하고 있다면 그는 너무도 어리석은 자입니다 장로가 거짓 선지자이면 그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은 절대로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나만 잘 하면 구원을 받는다는 생각하는 자체가 교만한 사람입니다. 절대로 그런 일은 없습니다.
장로입니다
디모데전서와 디도서에서 장로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바로 알아야 지금 내 앞에 있는 목사가 성경에서 말씀을 하고 있는 장로인가 아인가를 분별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내 생명이 걸린 문제이기 때문에 늘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고 또 자기를 가르치는 자가 누구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성령을 받은 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성령의 감동을 받고 있는 자에게 순복을 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거짓 선지자에게 순복을 하면 그는 어리석은 자입니다 반드시 주의 복음을 전하는 장로에게 순복을 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장로를 대적하면 하나님이 대적을 하십니다.
주의 복음을 전하는 목사를 대적을 하면 그 자체가 교만한 자이고 하나님께서는 그런 자를 대적하시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시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주의 복음을 전하는 장로의 말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에게는 은혜를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이 시대는 어떻습니까?
무조건 순복을 하고 있습니다. 자기 생명을 죽이는 자에게도 무조건 순복을 하고 있습니다. 아니 주의 복음을 전하는 자에게는 대적을 하고 있고 거짓 선지자에게는 너무도 잘 순복을 하고 있습니다. 먼저 내가 누구에게서 복음을 듣고 있는 가를 바로 분별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 늘 하나님께 자기 영혼을 위해서 기도를 해야 합니다.
참으로 이상합니다.
율법으로 자기들을 꼼짝 못하게 묶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잘 순복을 하는 사람들이 복음을 전하고 자유를 주면 오히려 순복을 하기 보다는 자기가 조금 아는 것을 가지고 오히려 대적을 하고 있고 자기 목소리를 높이려고 하고 있습니다. 자기를 압제하는 자에게는 꼼짝도 못하는 그들이 자유를 주려고 복음을 전하는 장로에게는 있는 말 없는 말을 다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주의 목사에게는 말 한마디도 못 합니다.
아니 감히 그에게 말하는 것을 상상도 못 합니다. 그런 그들이 자유 하는 복음을 전하는 목사들에게는 자기의 아주 적은 지식을 가지고 대적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자들을 대적하시고 반드시 그 벌을 내리실 것으로 저는 믿고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2:15-16절을 보겠습니다. (신 330쪽)
“유대인은 주 예수와 선지자들을 죽이고 우리를 쫓아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아니하고 모든 사람에게 대적이 되어 우리가 이방인에게 말하여 구원 얻게 함을 저희가 금하여 자기 죄를 항상 채우매 노하심이 끝까지 저희에게 임하였느니라”
대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주의 복음에 대적을 하는 자에게 대적을 하신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지식이 없다 보니까 자기가 누구를 대적해야 하는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에 예수 그리스도와 선지자를 죽인 것은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주의 복음에 순종을 했더라면 절대로 그런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가장 교만한 자가 누구입니까?
지식이 없는 자입니다 지식이 없으니까 주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가를 모르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유대인들만 그랬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시대도 지식이 없어 아직까지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모르고 믿지를 않고 있는 사람들 역시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누가 대적을 합니까?
이 세상 사람이 교만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선민이라고 하는 유대인들이 교만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세상 사람은 교만하고 말 것이 없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 자체를 모르고 세상에서 죄인으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교회 안에 있으면서도 예수를 안 믿고 있는 그들이 교만하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복음을 방해를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이 세상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교회 안에 있는 교만한 자들이 자기들이 알고 있는 아주 적은 지식을 가지고 주의 말씀을 대적을 하고 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아주 잘 지키고 있는 것으로 보여 질지 몰라도 그들은 영적으로 주의 말씀을 대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행위들을 하면서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18:5-6절을 보겠습니다. (신 218쪽)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서 내려오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거하니 저희가 대적하여 훼방하거늘 바울이 옷을 떨어 가로되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나는 깨끗하니라 이 후에는 이방인에게로 가리라 하고”
누가 대적을 합니까?
지금도 주의 말씀을 대적을 하고 있는 사람은 사실은 교회 안에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교회에 잘 다니고 교회에서 하는 일을 잘 한다고 해서 마치 자기가 주의 말씀에 순복을 하는 것으로 오해를 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는 그리스도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를 믿어야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주의 말씀에 대적을 하고 있고 오히려 주님께서 자기 육체로 십자가에서 폐하신 율법에 순복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잘 지키고 있는 자기 행위를 보고 마치 주의 말씀에 순복을 하는 것을 생각을 하고 그 일에 더욱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자기가 교만하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자기 육체의 모양이 겸손하니까 그것을 보고 마치 겸손한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자기 육체의 겸손한 모양은 하나님 앞에 겸손한 것이 아니라 사람 앞에 겸손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 육체를 보고 누군가 겸손하다고 하면 그것은 사람 앞에 겸손한 것임을 바로 깨닫기 바랍니다.
유대인들은 교만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사도 바울이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전했지만 오히려 대적을 했습니다. 다른 것으로 대적을 한 것이 아니라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그것으로 대적을 했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 말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찾고 있지만 실제 그들의 행위들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대적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겸손한 자가 누구입니까?
성경 전체가 무엇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겸손한 사람이고 이 말씀에 대적을 하고 있는 사람은 교만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받아들이고 있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무슨 뜻입니까?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나 이 시대를 보시기 바랍니다.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로 받아들이지를 않고 있습니다. 자기들이 죄를 안 지려고 노력을 하고 있고 또 그 죄를 안 짓기 위해서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제가 죄를 지라고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죄를 안 지려고 율법을 지키고 있는 자체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받아들이지를 않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
구원자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어떻습니까? 구원자로 받아들이지를 않고 있습니다. 구원자라는 뜻은 내가 무엇을 해서가 아니라 오직 구원하는 이로 말미암아 구원을 해 주는 것입니다 내가 죄인이든지 아니면 살인자이든지 간음을 한 자이든지 구원해 주시는 것이 구원자입니다 율법에는 그런 죄인을 어떻게 하라고 합니까? 살인자를 반드시 죽이라고 했고 간음한 자는 돌로 쳐 죽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셨습니다.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혀온 여자를 정죄하지 않고 살려 주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어가는 한편 강도에게 오늘 나와 함께 낙원이 있으리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반드시 죽어야 하는 사람을 오직 구원자의 능력으로 구원해 주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그렇게 믿지를 않고 있고 자기들이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는 그리스도입니다
이 사실을 믿는 성도는 겸손한 자이고 이 사실을 믿지 않는 사람은 교만한 자입니다 이 교만한 자가 교회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믿지를 않고 있습니다. 내가 교만한 자인가 아니면 겸손한 자인가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육체의 모습으로 나타나서 사람들이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교만입니다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것을 안 받아들이고 있다면 그는 교만한 사람입니다 그가 아무리 교회 안에서 모든 사람들로부터 겸손하다는 말을 듣고 있다 할지라도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면 그는 하나님 앞에 교만한 자라고 사도 바울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유대인이 그랬던 것과 같이 이 시대도 교회 안에 있는 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안 믿고 있습니다.
디도서1:16절을 보겠습니다. (신 348쪽)
“저희가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치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
유대인들은 예수가 그리스도인 것을 전적으로 부인을 했습니다.
그리고 사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면 대적을 하면서 훼방을 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어떻습니까? 예수가 그리스도인 것을 어느 누구도 대적하지 않고 또 훼방하지도 않습니다. 그것은 기독교 자체가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것을 기본으로 하기 때문에 이것을 시인을 하지 않으면 누구든지 이단이 되고 있습니다.
다 시인을 합니다.
유대인과 같이 대적을 하고 훼방을 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합니까? 그렇게 시인을 하고 있지만 행위로는 훼방을 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잘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저희가 하나님을 시인한다는 말씀은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교회에 들어와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신앙생활은 잘 하고 있지만 행위로는 부인을 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너무 중요합니다.
이 시대 자기가 교만한 자인 줄을 모르고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시인하고 있지만 행위로 부인을 하고 있다면 그는 정말로 교만한 자라는 것을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율법을 폐하셨다고 분명히 정의를 내려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 있으면서도 아직까지 율법을 지키고 있다면 그는 하나님을 시인을 하면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만 행위로는 부인을 하고 있는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종교적으로는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것을 분명히 시인을 합니다.
그런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들을 부인을 하면서 악한 행위들을 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가장 기본이 무엇인가 하면 바로 율법을 폐하신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거스리고 대적을 하는 의문의 쓴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다고 분명히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합니까?
안 믿습니다. 주의 말씀에 복종치를 않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복종치를 않고 행위로 부인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지를 않고 유대인들과 같이 율법을 지키면서 행위로는 부인을 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교만한 일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을 안 받아들이는 것은 최고의 교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들의 마음이 교만하기 때문에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을 안 믿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믿으라고 하고 있지만 이 시대 예수 그리스도를 시인을 하고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는 그들이 행위로는 거절을 하고 있습니다.
최고의 교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안 믿는 것이 최고의 교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안 믿으니까 행위로 십자가에서 폐하신 계명의 율법을 아직도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만세 전부터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셔서 우리를 거스리고 대적을 하는 율법을 폐하게 하셨는데도 그 구속의 은혜를 안 받아 들이고 있다면 그는 가장 교만한 자라는 것을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오직 믿음입니다.
성경을 우리에게 주신 이유는 성경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 믿게 해 주신 것입니다 예수를 믿어 이 세상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시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교회에 나와서 신앙생활은 열심히 하고 있지만 예수를 안 믿고 있습니다. 아니 입으로는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를 시인을 하고 있지만 그들의 행위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거절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율법, 은사, 찬양, 기도, 예배, 제사 등 이런 모든 것이 다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다 가하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의 것을 가지고 들어와서 행위로 거절을 하는 것도 몰론 있지만 그보다는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말씀을 가지고 행위로 부인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이 있습니다.
모릅니다.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 말씀에 기록이 되어 있다 보니까 사람들은 그 행위가 십자가를 거절하고 있는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어도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하는 행위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모르면 그는 자기가 하나님 앞에 교만하면서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가 주님께서 오실 때 버림을 받는 불쌍한 인생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지식이 중요합니다.
이 세상의 이성적인 교만과 겸손이 성경에서 말씀을 하고 있는 겸손과 교만이라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의 이성으로는 분명히 교만한 것이 겸손한 것이 될 수 있고 또 이 세상에서는 정말로 겸손한 그것이 하나님 앞에는 교만한 것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바로 분별을 하지 못하면 그는 교회 안에서는 겸손한 사람일지 몰라도 하나님 앞에는 교만한 자가 됩니다.
야고보서4:6절을 보겠습니다. (신 374쪽)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교만한 자를 물리치십니다.
이 교만한 자가 어디에 있는가 하면 교회 안에 있습니다. 교만한 자는 자기가 교만하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교회 안에서 겸손을 내 보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모르면 그렇게 자기에게서 나타나는 것을 보고 겸손하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 앞에 겸손한 것이고 하나님 앞에서는 교만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버림을 받습니다.
성경에 누가 버림을 받는가를 다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혼인 잔치의 비유에서도 예복을 받지 않은 사람들이 버림을 받았습니다. 혼인 잔치에 초대를 받았으면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의에 옷을 입기를 거절하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물리치시고 있습니다.
또 누가 물리치심을 받았습니까?
열 처녀의 비유에서 기름을 준비하지 않은 다섯 처녀가 물리치심을 받아 주님께서 문을 안 열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달란트의 비유에서 자기 생명의 달란트를 남기지 않은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이 바깥 어두운 곳에 쫓겨나 슬피 울며 이를 간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거절을 하고 있는 교만한 자들이 어떻게 되는 가를 가르쳐 주고 있지만 사람들이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왜 그들이 버림을 받았습니까?
그 이유는 단 한 가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받으라고 했지만 교회에 나와서 신앙생활은 아주 열심을 내어 잘 하고 있었지만 그들에게는 믿음이 없었기 때문에 주님께서 오시는 날에 다 버림을 받고 만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말씀들을 보고도 전혀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안 믿는 그 사람이 교만한 사람입니다 교회 밖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교회 안에 있으면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안 믿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교회 안에서 율법에는 복종을 하고 있지만 주의 복음에는 전혀 복종을 하고 있지 않고 십자가를 거절을 하면서 행위에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사실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의 이성적 생각으로는 누가 교만 했습니까? 사도 바울이 교만했습니다. 그는 유대인들을 대적을 했습니다. 유대인들이 볼 때는 사도 바울은 정말로 교만한 사람이었습니다. 또 예레미야 선지자를 보시기 바랍니다. 당시 제사장과 선지자들이 모두와 전혀 다른 말을 하고 있었습니다. 다수가 볼 때 선지자들은 교만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 다수가 교만 했고 선지자들은 하나님께 겸손해서 진리를 바로 전했습니다.
누가 많습니까?
교회 안에 겸손한 자가 많겠습니까? 교만한 자가 많겠습니까?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교만한 자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교만하다는 것을 전혀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왜 망했는가를 성경이 가르쳐 주고 있지만 이 시대 역시 성경을 보면서도 전혀 깨닫지를 못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교회에 나와서 십자가를 거절하는 행위를 하고 있습니다.
나라의 본 자손들이 쫓겨났습니다.
이 시대도 교회 안에서 정통이라고 하는 그들이 쫓겨난다는 것을 예표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제가 이단은 안 쫓겨난다고 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저는 이단이라고 하는 데는 더 이상 언급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나라의 본 자손들이 쫓겨나 바깥 어두운 곳에서 슬피 운다고 말씀을 하셨으면 지금 정통이라는 교회도 역시 그렇게 될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교만 멸망의 선봉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안 믿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들이 멸망을 하는 단 한 가지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를 안 믿는 그것입니다 다른 어떤 이유로도 우리는 멸망을 당하지 않습니다. 교만이 멸망의 선봉이라는 말씀은 교회 안에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안 믿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성경을 그렇게 많이 보고도 예수 그리스도를 안 믿었습니다.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아니 이 시대는 지적인 수준이 있어서 누구나 성경을 볼 수 있는 그런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성경을 보고도 또 복음을 듣고도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안 믿고 있다면 그는 이 세상 사람보다 더 교만한 사람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아예 모르니까 안 믿는다고 하지만 교회 안에서 자기가 그래도 성경을 보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면서 시인을 하며 믿지 않고 있다는 것은 그가 얼마나 교만한 자인가를 스스로 증명을 하는 것입니다
은혜를 주시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은혜를 은혜로 받아들이지를 않고 있습니다. 아니 은혜가 무엇인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셨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 인가를 모르고 아직도 초등 학문에 매여 이 세상의 이성적 지식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말하면서 그들의 행위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부인을 하고 있습니다.
은혜를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그런 성도가 겸손한 자입니다. 교회 안에서 아무리 겸손한 자 같이 보인다 할지라도 은혜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면 그는 교만한 자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거저 주시는 은혜를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성도만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그를 구원해 주신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시편149:4절을 보겠습니다. (구 910쪽)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기뻐하시며 겸손한 자를 구원으로 아름답게 하심이로다”
자기 백성을 기뻐하십니다.
이 자기 백성은 혈통으로나 육정으로 난 사람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 로서 난 사람이라고 요한복음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도 이스라엘과 같이 혈통으로나 육정으로 난 자기의 모습을 보고 교회 안에 있는 자신을 보고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착각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로서 난 자들입니다
그런 성도만이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그 안에 있기 때문에 성령의 감동을 받아 겸손할 수 있습니다. 성령이 그 안에 오시지 않으면 절대로 겸손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령이 오시지 않고는 예수를 그리스도라 믿을 수 없습니다. 말로는 종교 안에서 그렇게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성령이 오셔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함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겸손하시기 바랍니다.
인생의 이성으로 겸손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성도가 이 세상에서 복음을 전하려면 겸손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런 겸손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보이는 모습이 아니라 교회 안에 있는 교인들이 아니라 반드시 하나님께 로서 낳아야 그 백성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예수 그리스도를 안 믿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스스로 자부를 하던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안 믿었습니다. 지금 이 시대도 역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의 다수가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안 믿고 있다는 것을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그들은 분명히 시인을 하고 있지만 행위로 부인을 하면서 안 믿고 있다는 것을 성경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겸손은 주의 복음에 복종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 성도를 구원으로 아름답게 하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안 믿고는 어느 누구도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복음을 듣고도 성경을 보면서도 교만한 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안 믿고 있고 겸손한 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만을 바라고 있습니다. 그런 성도를 하나님께서 구원으로 아름답게 하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오직 예수입니다
겸손과 교만이 무엇인가를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교회에 들어와서 복음을 듣고 육체의 행위가 아니라 마음으로 믿는 성도가 겸손한 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겸손한 자를 기뻐하시고 있습니다. 그렇게 모든 사람들이 겸손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받기를 원하시고 있습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께서 주시는 아름다운 구원을 받아 천국에서 모든 축복을 누리는 성도가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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