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계1:3.)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119:105)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방황하는 교인들에게

33강,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 함이로다

윤주만목사 2019. 3. 19. 08:22


33,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

 

고린도전서 9:27절을 보겠습니다. (274)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

 

고린도전서 8장도 참으로 어려운 말씀이었습니다.

또한 고린도전서 9장도 그렇습니다. 8장보다 더 어려운 말씀이 아닌가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볼 때마다 내 자신이 얼마나 미련한 가를 새삼 깨닫게 됩니다. 예전에 해석을 했던 말씀들과 비교를 할 때 너무도 차이가 나고 있는 것을 보면서 지식을 자랑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성경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정말 성경을 보면서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내 지식을 자랑해서도 안 되고 또 내가 이제까지 해온 신앙생활의 경력을 자랑해서도 안 됩니다 성경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어렵고 난해 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성령의 감동을 받지 않고는 이 성경을 해석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너무 쉽게 성경을 봅니다.

그리고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떤 분야에 있는 전문가라 해도 단 한 번의 실수가 용납이 되지 않는 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건물을 건축하는 사람에게 있어 단 한 번의 실수는 자기 생명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생명까지도 빼앗아가게 만들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단 하나입니다

나를 죽게 하는 원인이 많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에서 모든 것을 다 안다고 자부를 하던 사람도 단 한 가지에서 잘못된 해석을 하게 되는 순간에 그는 사망에 빠지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마치 이와 같다는 것을 깨닫기 바랍니다.

 

약이 있습니다.

새로운 병이 늘 발견이 되기 때문에 과학자들은 신약을 개발하느라 지금도 밤잠을 설치면서 개발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약이 개발이 되었습니다. 그 약이 개발이 되었다고 해서 그 약을 사람에게 직접 투여하지를 않고 있습니다. 먼저 그 약에 대해서 정말 조금이라도 부작용이 없는가를 과학적으로 증명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반드시 시험을 해 봅니다.

그 성분이 사람에게 해가 되는 것이 없는가를 과학적으로 살펴보고 난 후에도 그것을 먼저 사람이 먹지 않고 동물들의 실험을 통해서 안전하다고 확신이 되었을 때 그것을 먹고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신약이 개발이 되었어도 충분한 임상실험을 한 후에 그 약에 대해서 인정을 하고 환자들에게 투여를 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얼마나 방대합니까?

그리고 그 안에 담겨져 있는 말씀들이 거의 다 시적인 언어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신약을 개발하는 것보다도 더 조심스럽게 성경을 보아야 하고 성령의 감동이 없이는 그것을 함부로 자기 이성적 지식으로 해석을 해서는 안 된다고 믿고 있습니다.

 

영혼을 살린다고 합니다.

그런데 살린다고 한 그 일이 성령의 감동을 받지 않으면 영혼을 죽이는 일로 변하는 것이 되고 맙니다. 영혼을 살리기 위해서 성경을 가르치는 그 일이 잘못된 이해로 말미암아 오히려 영혼을 망하는 하는 일을 하고 있음에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성경을 보고 오해를 했던 것과 같이 이 시대도 역시 아주 작은 틈이 결국에는 영혼을 죽이는 일이 되고 맙니다.

 

하나를 잘못 봅니다.

그것이 너무 강하게 자기 안에서 임팩트가 되어 있으면 모든 것을 그것에 따라 보게 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내가 한 구절의 성경을 잘못 본 그것이 결국에는 진리에서 벗어나게 하고 있고 또 그것으로 말미암아 성경을 보는 시작이 전혀 다르게 변질이 되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바로 알고 성경에 대해서 주의 깊게 보아야 합니다.

 

베드로후서1:19절을 보겠습니다. (385)

또 우리에게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 데 비취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가하니라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강조를 해도 지나치지가 않습니다. 이것은 생명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 주의를 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그런 문제라면 어차피 잠깐 보이다가 사라지는 인생인데 주의하고 말 것도 사실은 없습니다.

 

그러나 생명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대해서 선지자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나로 인하여 세상 사람이 죽을 수도 있고 살 수도 있다는 것을 심각하게 생각을 하고 있어야 합니다.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만약 내가 어떤 일을 하는데 우리 육체의 생명이 걸린 일이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아무라도 손이 떨리고 발이 떨려서 그것을 하는데 얼마나 주의를 하겠습니까?

 

내 아들이 죽는다고 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내 아내가 죽는다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로 인하여 내 아이가 죽고 내 아내가 죽는 그 일이라면 얼마나 그 일에 대해서 주의를 하겠습니까? 정말 까딱했다가는 죽을 수 있는 그 일이라면 숨 쉬는 것조차 힘이 들 정도로 우리는 그 일에 최선을 다해서 살리려 할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육체의 생명보다 더 귀한 영혼의 생명인데도 전혀 주의를 하지 않고 있습니다. 아니 그 생명이 얼마나 귀하다는 것을 모르고 무감각하게 일을 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육체의 생명이라면 손이 떨려서 그 일을 어떻게 해야 하는 가를 심각하게 주의를 할 텐데도 영혼의 생명에 대해서 너무 무식하게 대들고 있습니다.

 

겁이 없습니다.

생명이 걸린 문제인데도 너무 겁이 없이 교회 안에서 선지자 노릇을 하고 있고 자기가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조차 주의를 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저 이 세상에서 인정을 하면 모든 것이 맞다 생각을 하면서 세상의 통념적인 상식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9:27절을 보겠습니다. (274)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

 

9장의 마지막 절입니다.

우리가 버림을 당합니까? 사도 바울이 지금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하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지금까지 저하고 교제를 나눈 분들은 절대로 버림을 당하지 않는 다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버림을 받는다면 그 사람은 믿음이 없는 사람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내가 남에게 복음을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바림이 됩니까? 안 됩니까? 사도 바울이 지금 자기가 복음을 전파한 후에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에 대해서 복음의 말씀에 올려 있는 것을 보신 분들은 답을 알고 있습니다. 다시 묻겠습니다. 도리어 버림이 됩니까? 안 됩니까?

 

버림이 됩니다.

아마 여러분이 이 말씀을 보셨기 때문에 뜻밖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복음에 대해서 상당히 혼란을 겪을 수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오늘 이 문제에 대해서 고린도전서 9장에서 자세히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사도 바울이 왜 자기가 복음을 전파한 후에 왜 도리어 버림이 될까를 두려워했는가 하는 문제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고린도전서 9장은 두 가지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사도 바울이 사도로서 어떻게 사역을 했는데 사도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가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강하게 복음을 전하다 보니까 교회 안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이 되었습니다.

 

무슨 말씀이냐면 우리가 고린도전서 8장에서 우상의 제물에 대해서 들었습니다. 우상의 제물은 교회 안에서 행하고 있는 율법주의 그리고 은사 그리고 교회 안에서 헌신을 하고 있는 행위라고 들었습니다. 그 말씀을 하다 보니까 교회 안에서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우상의 제물에 대해서 말씀을 하니까 이제 아무 것도 안 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 있었던 것입니다

 

정말 중요합니다.

율법을 폐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함을 주셨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고린도교회 안에 이상한 사상이 싹트기 시작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복음의 은혜를 나만 누리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복음에 대해서 전혀 헌신을 할 생각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교회 안에 있는 율법주의자들이 얼마나 열심을 내고 있습니까? 그들이 천국에 가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을 하고 있습니까? 영혼을 죽이는 일을 하고 있는 그들도 그렇게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물론 그렇게 하는 이유는 자기들이 잘 하고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영혼을 살려야 하는 성도들이 우상의 제물에 대해서 말씀을 듣다 보니까 이제 아무 것도 하지 않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바로 영지주의입니다

복음을 들은 초대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이 얼마나 헌신을 했는가를 우리가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는 오히려 그 복음을 이용하려고 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율법이 폐해졌고 또 굳이 교회에서 헌신을 하지 않아도 오직 믿음으로 천국에 간다고 하니까 이제 아주 편하게 복음의 은혜만을 자기 혼자 누리려고 하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왜 우리에게 복음을 주셨습니까?

천국이라는 어마어마한 선물을 주셨을 때는 그 선물을 받은 자는 의무는 아니더라도 그 선물의 가치를 안다면 자기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 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9장을 통해서 자기가 어떻게 사역을 했는가를 이야기 하면서 반어법으로 고린도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9:1-2절을 보겠습니다. (272)

내가 자유자가 아니냐 사도가 아니냐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 주 안에서 행한 나의 일이 너희가 아니냐 다른 사람들에게는 내가 사도가 아닐찌라도 너희에게는 사도니 나의 사도 됨을 주 안에서 인친 것이 너희라

 

자기를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자유자가 아니냐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진리 안에서 자유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보다 더 진리를 알고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분명히 진리 가운데서 자유 하는 생활을 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진리를 안다고 하면서 자유하지 않고 있다면 그는 진리가 없는 사람입니다

 

잘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이 왜 이 말씀을 하고 있는 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내가 자유자다 이 말씀은 나도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이 말씀을 하고 있는 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고린도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사도 바울을 통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 하라는 말씀을 듣다 보니까 그 도가 지나치고 있습니다.

 

무슨 말씀입니다

물론 이 세상에서 우리는 자유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도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율법이나 종교적인 것에서 우리에게 자유를 주신 것은 분명하지만 우리에게 주신 자유를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유함 가운데서 우리는 더욱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헌신을 해야 합니다 솔직히 율법주의자 보다 더 우리는 복음에 내 생명까지 아까워하지 않을 정도로 헌신을 해야 합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다른 복음을 가진 그들도 잘못된 지식을 가지고 살아가면서도 그렇게 열심을 내고 있는데 성도가 되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도 그것을 자기 혼자만 누리려고 하고 복음을 전하는 일에 있어서까지 자유하려고 한다면 저는 잘못되었다고 생각을 합니다.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제가 율법을 지키라고 이 말씀을 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또 종교인이 되라고 하는 것도 절대로 아닙니다. 만약 그것을 제가 주장을 한다면 저는 더 이상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전하는 일에 있어서 아무 것도 하지 않으려고 한다면 그는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그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 역시도 그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다 보면 율법에 대해서 자유 하는 것까지는 좋은데 자기들이 은혜를 받은 복음을 전하는 일에 대해서까지 자유를 하려고 하는 것을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사도가 아니냐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이 말씀을 하느냐면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사도로서 일을 해서 너희가 지금 이 복음 안에 있지 않느냐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나는 종교인이 아니라 주님께서 나를 사도로 부르셔서 내가 복음을 전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말 합니다

내가 사도됨은 주님 안에서 인친 것이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는 사도가 아닐 지라도 너희에게는 사도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고린도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에게 복음을 바로 전했고 그들이 구원을 받아 천국에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지 않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나는 사도다.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은 진실이라는 것을 분명히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고린도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내가 다른 복음을 전한 것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 인 쳐서 내가 사도로서 부름을 받아 이방에 복음을 전하고 있고 너희가 지금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고 하늘의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주의 경계를 해야 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과 같이 복음을 전하다 보면 또 그 반대로 성도로서 이 세상에서 자기가 해야 하는 일을 모르고 살아가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율법주의에 빠져 있는 그들보다 우리는 더욱 헌신을 하면서 이 복음을 전하는 일에 협력을 해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9:3절을 보겠습니다. (272)

나를 힐문하는 자들에게 발명할 것이 이것이니

 

사도 바울을 비판을 하고 있습니다.

왜 비판을 하고 있느냐면 우상의 제물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나서 성도들에게 헌신을 하라고 하니까 이제 자기들이 들은 복음을 가지고 비판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지금 이 말씀이 왜 나오고 있느냐면 고린도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전혀 헌신을 하지 않고 자기 혼자만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왜 다른 말 하느냐는 것입니다

우상의 제물을 먹지 말라고 했으면 안 먹으면 되지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이 있느냐고 하면서 사도 바울을 힐문을 하고 있습니다. 고린도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사도바울로부터 강한 복음을 듣다 보니까 복음을 위해서 하는 아주 작은 일까지도 반대를 하고 있고 그저 예수만 믿고 천국에 가면 된다고 주장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9:4-5절을 보겠습니다. (273)

우리가 먹고 마시는 권이 없겠느냐 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자매 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이 없겠느냐

 

이제 사도 바울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어떻게 사역을 했는가를 바로 알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을 힐문하는 자들에게 사도 바울이 내가 이렇게 복음을 전했다고 말씀을 합니다.

 

말씀이 참 어렵습니다.

쉽게 기록을 했으면 좋을 텐데 고린도전서 9장의 말씀은 참으로 어렵게 비틀어서 기록을 했습니다. 잘 이해를 하고 이 말씀을 보아야 합니다. 지금 무슨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자기를 힐문하는 자들에게 질문을 계속해서 하고 있습니다. 13절까지 사도 바울이 계속해서 질문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먹고 마실 권이 없겠느냐.

사도 바울이 얼마나 헌신적으로 복음을 전했는가를 잘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마실 권이 없겠느냐 우리도 마실 수 있다 하지만 내가 남들과 같이 흥청망청 마시지 않는 이유는 내가 한 영혼이라고 더 구원을 하기 위해서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로서 권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나도 안다고 지금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도 먹고 마시면서 내가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을 잘 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얼마나 헌신적으로 복음을 전했는가를 지금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나도 먹고 마시는 것을 권리로 알고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잘 이해를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도 먹고 마시는 권리가 있는 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너희에게 먹고 마시겠다고 한들 너희가 나를 힐문하겠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내가 복음을 전하면서 먹고 마시는 것이 당연한 권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정말 거의 아무 것도 요구하지를 않았습니다.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이 있습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복음에 방해가 될까봐 바나바와 둘이 다녔습니다. 왜 이런 말까지 하느냐면 사람이 가장 기본적인 사랑까지도 포기를 하고 이방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내가 사도로서 복음의 사역자로서 그렇게 했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9:7절을 보겠습니다. (273)

어찌 나와 바나바만 일하지 아니할 권이 없겠느냐 누가 자비량하고 병정을 다니겠느냐 누가 포도를 심고 그 실과를 먹지 않겠느냐 누가 양 떼를 기르고 그 양 떼의 젖을 먹지 않겠느냐

 

계속해서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나와 바나바가 일하지 않을 권이 없겠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나도 복음이 있기 때문에 솔직히 일하지 않아도 천국에 간다는 말씀입니다 잘 이해를 하셔야 합니다. 지금 고린도교회 안에 있는 영지주의 사상에 빠져 들어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저도 국어를 잘 모르겠습니다.

이것을 무슨 화법이라고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한 것을 가지고 마치 다른 사람에게 질문을 하듯이 사도 바울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누가 자비량을 하고 병정으로 다니겠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누가 포도를 기르고 그 실과를 먹지 않겠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누가 양 떼를 기르고 그 양 떼의 젖을 먹지 않겠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당연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이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자기는 자비량을 하면서 복음의 군사로서 일을 했고 또 포도를 심었지만 그 포도나무의 실과를 먹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고 양 떼를 길렀지만 그 젖을 먹지 않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13절까지의 질문에 대해서 바로 이해를 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그렇게 했지만 그럴 권리가 있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권리입니다

포도나무를 심었으면 그 나무의 열매를 먹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권리입니다 사도 바울은 포도나무를 심었지만 포도를 먹지 않았고 또 양 떼를 길렀지만 그 양에게서 젖이 나오는 것을 먹지 않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한 이유는 단 한 가지 자기가 그렇게 함으로 해서 혹시라도 복음에 방해가 될까를 염려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9:8-9절을 보겠습니다. (273)

내가 사람의 예대로 이것을 말하느냐 율법도 이것을 말하지 아니하느냐 모세 율법에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기록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어찌 소들을 위하여 염려하심이냐 전혀 우리를 위하여 말씀하심이 아니냐 과연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밭가는 자는 소망을 가지고 갈며 곡식 떠는 자는 함께 얻을 소망을 가지고 떠는 것이라

 

상식입니다

사람의 도리로서 이런 말을 하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율법에도 이렇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이런 말씀을 하고 있는가를 처음부터 말씀을 드렸습니다. 고린도교회는 복음을 받아들이고는 있었지만 성도로서 자기들이 어떻게 헌신을 해야 하는 가를 몰랐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내가 이렇게 율법에 기록되어 있는 것 당연한 권리도 다 포기를 하고 너희에게 복음을 전했는데 오히려 영지주의로 빠지고 있다는 것을 책망을 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9장은 사역자들에게도 너무 중요합니다.

사도 바울이 어떻게 사역을 했는가를 이 말씀을 통해서 깨달아야 합니다. 이 시대 사역자들이 너무 호화롭게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율법에 기록된 대로 자기들의 권리를 다 사용하는 것 역시 저는 문제가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진짜 복음을 위해서 일을 하고 있는 사역자라면 자기 권리보다는 한 영혼이라도 어떻게 하면 더 구원을 할 수 있을까 생각을 하게 되어 있다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모세의 율법에 기록되었습니다.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것이 어찌 소를 위해서 그렇게 율법에 기록했겠느냐 우리 사역자들을 위해서 기록한 말씀이 아니겠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소는 일하는 것에 있어서 대표적인 동물입니다

 

복음의 일입니다

이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을 소로 비유로 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곡식 밟아 떠는 소에 망을 씌우지 않는 것은 너무도 타당하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에 기록이 되어 있어서가 아니라 정말 복음을 위해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먹을 것이 제공이 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합니다.

 

제가 안타깝습니다.

그리스도편지에서 설교를 보는 사람이 약 400명 이상이 됩니다. 그러나 그 중에 후원을 하는 사람이 불과 한두 명에 불과합니다. 제가 목사로서 아무 일도 안하고 그 일에 헌신을 하고 있다면 제가 먹고 사는 것은 바라지 않더라도 그 사이트를 운영할 정도는 후원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모르겠습니다.

제가 전하고 있는 복음의 말씀이 그저 그런 말씀이라면 저도 충분히 이해를 합니다. 아니 저는 그 일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도 감동을 받고 있다면 그럴 수는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물론 인간적인 생각입니다. 그것 역시 하나님께서 역사를 하셔야 되는 줄 알고 있기에 또 저에게 이 일을 할 수 있게 도와주시고 있기 때문에 아직까지는 하고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 시대 목사들은 너무 풍족하게 누리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분명히 문제가 있다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의 사역을 하는 사람이 그것에만 마음을 다 쏟아 부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합니다. 복음의 일을 하면서 자비량 한다는 것은 사실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가 깨달아야 합니다.

 

이 시대 자비량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사람의 도리로서는 대단하게 보여 지는 것은 분명합니다. 물론 그 일이 사역을 하는데 있어 방해가 되지 않는다면 저는 적극적으로 권해보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 일로 사역에 방해가 되고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 문제가 되고 있다면 그는 차라리 어느 한 편을 선택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돈을 벌어서 사역을 하는 사람을 돕든지 아니면 조금 힘이 들어도 복음에 전념을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그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곡식 밟는 소의 망을 씌우지 말라고 율법에 기록한 것은 소를 위함이 아니라 우리를 위함이라고 분명히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밭가는 자와 곡식 떠는 자가 다 그것을 위해서 일을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사실 그것을 전혀 바라지 않고 한다면 그것은 거짓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저 역시도 그것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인생이라는 것을 말씀을 드립니다.

 

잘 이해를 하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이 계속해서 하는 말씀을 우리가 바로 이해를 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권리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권리가 있지만 나는 그런 권리를 쓰지 않고 복음을 전했다 그렇다고 너희가 그것을 받기만 하고 사도에게만 그것을 강요할 수 있느냐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주의교회는 문제가 전혀 안 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우상의 제물에 대해서 말씀을 하다 보니까 교회가 성도로서 직무를 잃어버리고 있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9:11-12절을 보겠습니다. (273)

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 육신의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 다른 이들도 너희에게 이런 권을 가졌거든 하물며 우리일까보냐 그러나 우리가 이 권을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라

 

당연합니다.

사도 바울은 사람의 도리 그리고 율법의 예를 지금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의 사역자로서 이방인이 고린도교회에 복음을 전했으므로 너희 육신의 것을 거두는 것이 너무도 당연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다른 이들도 이런 권리를 가져서 너희에게서 이런 권리를 누리고 있는데 하물며 우리일까 보냐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는 이런 말씀을 굳이 하지 않아도 됩니다.

율법주의에 빠져 있기 때문에 율법대로 십일조를 내고 있고 율법을 만들어서 헌금을 강요를 하고 있기 때문에 사실 고린도전서 9장의 말씀을 들을 필요도 없습니다. 문제는 우상의 제물에 대해서 정확히 알고 있고 진리 안으로 깊이 들어와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그 복음을 누리고는 있으면서도 성도로서 해야 하는 일도 하지 않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사실 저도 그렇습니다.

이 말씀을 준비를 하면서 괜한 오해가 될까 조심스럽기만 합니다. 저도 가능한 제가 복음을 전하고 있지만 성도님들에게 이런 것에 있어서 자유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이 너무 지나쳐 사도 바울이 어떻게 복음을 전하고 있는지 조차 잊어버리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묻고 있습니다.

내가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에게 육신의 것을 구하는 것이 과하다고 생각을 하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다른 이들도 이런 권을 가졌거늘 하물며 우리일까 보냐고 묻고 있습니다. 이 다른 이들이 누구입니까? 율법주의자들은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권리를 가지고 누리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율법주의자들도 이 권리를 씁니다.

그들은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망하게 하고 있는데도 이 권리를 쓰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희에게 복음을 전하고 있는데 이 권리를 사용하는 것이 과하다고 생각을 하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왜 이런 말씀이 나오느냐면 사도 바울은 어떻게 하든지 이방에 복음을 더 많이 전하고 싶었습니다.

 

고린도교회는 안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사역을 하는데 있어 전혀 돕지를 않았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사도 바울이 권리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내가 이런 권리가 있지만 이것을 쓰지 않는 이유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방애가 되지 않게 하려고 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렇게 하다 보니까 고린도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그것을 너무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사도바울 혼자만 감당하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사역자로서의 일입니다

자기가 이런 권리를 쓰지 않는 것은 사역자로서 정말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고린도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자기들이 성도라는 것을 잊고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의 복음에 장애가 되지 않게 하려고 우상의 제물에 대해서 분명하게 말씀을 하다 보니까 고린도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복음의 사역을 하는 사도 바울을 전혀 도우려고 하지를 않고 자기들만 복음을 들으면 된다고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 혼자 할 수 있습니까?

로마서 강해를 보셔서 알겠지만 사도 바울이 사역을 하는데 있어서 도움을 주고 수고를 한 사람들을 16장에 그 이름을 일일이 거론하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로서는 사역자로서 정말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사도 바울 혼자에게만 맡기고 자기들은 그저 복음을 듣기만 하는 것으로 즐거움을 찾으려고 한다면 저는 말이 안 된다고 생각을 합니다. 복음의 사역자가 있으면 그를 어떻게 하든지 도와서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을 할 수 있게 함께 수고하는 것이 성도의 본분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9:13-14절을 보겠습니다. (273)

성전의 일을 하는 이들은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으며 제단을 모시는 이들은 제단과 함께 나누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

 

누가 성전에서 일을 합니까?

레위인을 하나님께서 장자로 삼으시고 그들로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기업이 없다 보니까 다른 지파를 통해서 그들이 먹을 수 있는 것을 드리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성전에서 일을 했음으로 성전에서 나는 것으로 먹고 살았다고 구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명령입니다

복음을 위해서 일하는 사람은 복음으로 살라고 주님께서 명하셨다고 사도바울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가 다른 일을 하고 있다면 바른 복음을 전하기가 쉽지가 않습니다. 복음 하나에만 몰두를 해도 그것을 바르게 전할까 말까 한데 다른 일을 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마음을 빼앗기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합니다.

그것으로 너무 과분한 권리를 누리고 있다면 그는 복음을 전하는 자가 아니라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지금 사도 바울이 이 말씀을 하면서 그들이 과분하게 누렸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초대 교회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노예나 종들이었기 때문에 과분하게 누릴 수 있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복음 전하는 자는 복음전하는 것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부를 축척하는 순간에 그는 타락을 할 것이 너무도 분명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 시대 목사들이 너무 많은 것을 누리고 있는 그 자체가 사실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그들에게 없기 때문에 그렇게 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왜 이런 말씀까지 하겠습니까?

아마도 제가 알기로는 사도 바울이 이 말씀을 하는 것은 정말 죽기보다 싫었을 것이라 저는 믿고 있습니다. 물론 사도 바울 개인을 위해서만 이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앞으로도 사도 바울이 같이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있으면 반드시 이런 어려운 일을 당하게 될 것을 알고 있기에 이 말씀을 기록했습니다.

 

성도가 해야 하는 일입니다

이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가 있으면 그가 정말로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살게 해 주어야 합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기 위해서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다만 혹시라도 성도로서 이 세상에서 헌신을 해야 하는 것을 잊어버리고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 있을까 염려되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9:15절을 보겠습니다. (273)

그러나 내가 이것을 하나도 쓰지 아니하였고 또 이 말을 쓰는 것은 내게 이같이 하여 달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차라리 죽을찌언정...... 누구든지 내 자랑하는 것을 헛된 데로 돌리지 못하게 하리라

 

4-13절까지가 권리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이 권리를 하나도 쓰지 않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권리가 비록 주님의 명령이라고 할지라도 사도 바울은 자기가 당연히 받아야 하는 권리를 하나도 쓰지 않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의 복음에 장애(障礙)가 되는 것을 얼마나 조심하면서 복음을 전했는가를 잘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권리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내가 이 권리를 너희에게 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죽을찌언정 이 권리를 쓰지 않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누구든지 내 자랑하는 것을 헛된 대로 돌리지 못하게 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심정입니다

내가 죽을지언정 내가 이제까지 말한 당연한 권리를 너희에게 요구를 하지 않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이 권리를 말했다고 해서 너희가 우상의 제물과 같이 해서 복음을 위해서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오히려 이제까지 말한 모든 것이 헛된 대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정말 잘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율법주의로 우상의 제물을 듣는 사람에게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과 같이 자기 권리가 있다 해도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을 하기 위해서 일하는 사역자에게 배우는 사람들에게는 그 복음을 오히려 이용해서 성도로서 전혀 헌신을 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에 있어서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저 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복음을 안 전하면 말지 여러분에게 구차하게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정말 저는 저에게 이런 문제가 발생이 된다면 저는 차라리 복음을 전하는 것을 잠시 쉬는 편을 택할 것입니다 아마도 다시는 이런 말씀을 드리지도 않을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9:16절을 보겠습니다. (273)

내가 복음을 전할찌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자기 권리를 하나도 쓰지 않고 사도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장애가 되지 않게 사도로서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내가 이렇게 할지라도 이것이 내 자랑거리가 될 수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 자기가 복음을 위해 일을 하면서 얼마나 자랑을 하고 있습니까? 그러나 사도 바울은 자기가 복음의 사도로서 일을 하면서 권리가 있지만 그것을 하나도 안 쓰고 했다 할지라도 그것을 내 자랑으로 삼지 않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자랑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바로 안다면 자기가 어떤 일을 했다 해도 그것을 자랑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 간증을 너무 많이 하고 있습니다. 그 간증이라는 것이 하나님을 말로는 높이면서 결국에는 자기를 자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주 작은 일을 한 것을 가지고 그것도 자기들의 종교적인 의식을 한 것을 가지고 자랑하느라 바쁩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이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화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사도 바울이 이 복음을 전하는 일을 안 한다 해서 화가 있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자기가 받은 은혜가 너무 크고 자기가 받은 계시가 너무 크기 때문에 그것을 자기에게 주신 주님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내가 그것을 안 하면 화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령을 받았습니다.

내 안에 진리의 성령이 임재를 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서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함을 받고 있습니다. 당연히 그런 성도라면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것이 구원 문제와는 별개라 해도 우리는 나에게 주신 은혜를 헛되이 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고린도전서 9:17-18절을 보겠습니다. (273)

내가 내 임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임의로 아니한다 할찌라도 나는 직분을 맡았노라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인하여 내게 있는 권을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라

 

내가 자진해서 이 일을 하면 당연히 상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내가 자진해서 이 일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게 직무를 맡겨 주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사도로서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하는 것은 내가 자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이방의 사도로 선택을 하셔서 직무를 주셨기 때문에 하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선택입니다

이방의 사도로 사도 바울을 주님께서 선택을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 스스로 이 일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이 직분을 맡겨 주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자는 정말 하나님께서 이렇게 선택을 하셔서 직무를 행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직무를 맡기셨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그 일에 대해서 자기 권리를 다 쓰지 않고 복음의 사역자로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새번역입니다

그리하면 내가 받을 삯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을 전하는 데에 따르는 나의 권리를 이용하지 않는다는 그 사실입니다.”

 

내가 받을 삯이 무엇이냐고 말씀을 합니다.

사도 바울은 앞에서 말씀을 한 그런 권리를 다 이용하지 않고 값없이 복음을 전했을 때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정말 이 시대 여러 가지 일로 교회 안에서 복음을 위해서 일을 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다 누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물론 사도 바울과 같이 모든 것을 다 쓰지 않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피치 못해서 쓰는 것을 빼고 자기가 권리를 주장하면서 다 쓰고 있다면 그는 하늘의 상을 받기가 어려울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 교회 안에서 사역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이 말씀을 정말 주의 깊게 보아야 합니다.

 

거저 전하시기 바랍니다.

물론 초대 교회와 같은 시대가 아닙니다. 그러나 가능한 거저 전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물론 이 일로 인하여 복음을 전하는 자가 어려움을 겪게 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정말 복음을 위해서만 일을 하고 있다면 그들이 이 세상에서 최소한의 살아갈 수 있는 것은 교회가 어느 정도 능력이 되는 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지금 이 시대 여러 가지 사역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교회에서 어떤 특별한 은사가 있으면 그것을 가지고 돈 벌이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어느 찬양 팀도 자기들은 복음을 위해서 일을 하고 있다고 하지만 그들이 한번 교회에 나가서 집회를 하면 보통 3-500만원을 받는다는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먹고 살아야 합니다.

그들이 사무실도 운영을 하고 또 단원들이 함께 먹고 살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교회가 영리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꼭 그런 것을 안 해도 우리는 진리 안에서 천국의 기업을 얻을 수 있는데 자기들은 그 일이 복음을 전하는 일이라 하면서 그렇게 받는 것을 너무도 당연하게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값없이 하시기 바랍니다.

물론 부득이 하게 어쩔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지고 그런 장사를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 시대 부흥 강사들이 얼마나 많은 돈을 받고 있습니까? 그들은 그런 일들을 너무 당연하게 생각하고 또 권리라고 생각을 하면서 그것을 아무 거리낌이 없이 교회 안에서 행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죽을지언정 내가 사도로서 그런 권리를 가지고 있지만 사용하지 않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장사를 하는 곳이 되었고 강도의 굴혈로 다시 변하고 말았습니다. 사실 이 시대 그렇게 누리고 있는 것이 다 교인들의 피 같은 헌금 아닙니까? 사실 칼만 안 들었지 강도와 다를 것이 없이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9:19절을 보겠습니다. (273)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오직 구원입니다

사도 바울의 마음에는 영혼 구원만이 있습니다. 이것을 위해서 자기 생명까지도 아까워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이 시대 교회를 보면 구원이 사라졌습니다. 종교적인 행위만 있을 뿐이지 그들이 영혼 구원에 대해서 이만큼 절박한가 하는 것에 있어서는 많은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교인 하나 더 얻으면 뭐합니까?

그리고 교회가 대형 교회로 성장을 하면 뭐 합니까? 그렇게 겉으로 드러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차라리 세상 종교를 믿든지 세상에서 친목 단체를 만들어서 자기들끼리 기쁨을 나누는 것이 더 좋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9장에서 보면 자기가 얼마나 구원을 위해 일을 했는가를 잘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아니 사도 바울이 기록한 성경을 보기 바랍니다.

그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 가를 쉽게 알 수 있는데도 성경을 보면서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내가 모든 사람들에게 자유 했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어떻게 하든지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을 하기 위해서 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착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교인과 성도는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교인은 많은 수 있지만 성도는 아주 적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성경이 그것을 계속해서 가르쳐 주고 있지만 이 시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그래도 자기 교회 안에 있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 안일한 생각이 스스로를 망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종이 되었습니다.

사실 교인 하나를 만드는 것은 쉽습니다. 물론 그것이 얼마나 어렵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한국 교회가 천만에 가까운 교인들이 있다는 것은 쉬운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성도가 한 명이 탄생이 된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우리가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주님께 영광이 되는 가를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빌립보서2:6-7절을 보겠습니다. (319)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하나님의 본체이십니다.

그러나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바로 이해를 해야 합니다. 쉽게 말씀을 드리면 개를 구원하기 위해서 사람이 스스로 개가 되었다는 말과 같습니다.

 

개가 될 수 있습니까?

여러분이 아무리 개가 불쌍하고 예쁘고 사랑스러워도 그를 구원하기 위해서 개가 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하나님과 본체이시지만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사람의 형체를 가지고 이 세상에서 오셔서 사람들의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이렇게 하신 이유가 우리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종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직 모르는 사람에게 여러분은 정말 이와 같은 심정으로 그들에게 나가야 그들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종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그러나 사도 바울은 자기가 자유자나 구원을 받아 아무 것도 안 해도 되지만 직무를 맡았기 때문에 종으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얕은꾀로 사람을 설득하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진짜 종과 같이 일을 하지 않으면 여러분에게 그 마음이 없다면 절대로 내가 가지고 있는 복음을 전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사람은 다 이성이 있기 때문에 그가 어떻게 행하고 있는 가를 안 보아도 어느 정도는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을 어떤 모양으로 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종의 심정으로 다가가 내가 가지고 있는 복음을 가지고 그를 섬겨야 그 영혼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고린도전서 9:20절을 보겠습니다. (273)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유대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기 조상 대대로 지켜온 규례가 있어서 그것대로 하나님을 믿어왔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아서 너무 잘 알고 있지만 유대인들이 예수님 앞에서 어떻게 행했는가를 보았습니다. 유대인이 되어서는 안 되지만 사도 바울은 그들을 얻기 위해서 유대인과 같이 되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 시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들을 얻기 위해서 율법 아래 있는 자들과 같이 되어서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으려고 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자기가 가지고 있는 복음을 그들에게 전하기 위해서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율법을 그들과 같이 그들의 모양을 내면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이 계속해서 율법을 지켰다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그 당시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다니는 것을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에 보면 유력한 자들이 사도 바울을 청해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씀을 듣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자리에 가서는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마치 율법 아래 있는 자들과 같이 그들과 같이 행했다는 말씀입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군가 저를 청해서 말씀을 듣고자 한다면 그들이 아직까지 율법 아래 있다면 그들이 행하고 있는 율법을 처음부터 나는 자유하다고 하면 그들은 제가 말하는 것을 아예 들으려 하지를 않을 것입니다 내가 비록 자유할지라도 아직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기 위해서는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그들과 같이 율법 아래 있는 것 같이 하면서 복음을 전해야 그들이 내가 전하는 복음을 들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유자입니다

그는 정말로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을 하기 위해서 유대인에게 가서는 유대인과 같이 했고 또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율법 아래 있는 것과 같이 하면서 복음을 전했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을 계속해서 했다는 것이 아니라 일시적으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그렇게 하지 않으면 복음 자체를 들으려 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했다는 말씀입니다

 

고린도전서 9:21절을 보겠습니다. (273)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 율법이 없는 자가 아니라고 하니까 사도 바울이 율법을 지켰다고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얼마나 도덕적으로 깨끗하게 살려고 노력을 했는가를 성경을 통해서 알고 있습니다.

 

지금 그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비록 율법주의자들이 지키는 그런 율법에서는 자유하고 있지만 분명히 사도 바울은 도덕적으로 흠이 없이 살아서 자기에게서 복음을 듣는 사람들에게 책이 잡히지 않게 하려고 살았습니다. 지금 사도 바울이 그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라고 하는 말씀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얼마나 이 세상에서 선하고 의롭게 살았는가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쉽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우리가 지금 식사를 할 때 식사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 기도는 결코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방인들에게는 그것조차 이상하게 느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때 사도 바울은 기도를 안 하고 이방인과 같이 식사를 했다는 말씀입니다 혹시라도 자기가 기도하는 것으로 이방인들이 자기가 전하는 복음에 장애가 될까봐 그런 것까지도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서 철저하게 그들 가운데로 들어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고린도전서9:22-23절을 보겠습니다. (274)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예하고자 함이라

 

무엇이 약 합니까?

다른 번역 성경에서는 믿음이 약한 자들로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교회 안에 있지만 아직 믿음이 약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을 얻기 위해서는 사도 바울은 자기도 믿음이 약한 것 같이 보였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오직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했다고 성경에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구원입니다

어떻게 하든지 그들 가운데서 몇이라도 구원을 하기 위해서 사도 바울은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하면서 이방의 사도로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 장애가 되는 것이 있다면 모든 것을 다 버리면서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다 각자가 사상이 다르고 생각이 다릅니다. 사도 바울은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그들이 원하는 것을 하면서 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어떻게 하든지 몇몇을 얻고자 수고를 했고 그렇게 한 것은 사도 바울 역시 복음에 참여를 하고 싶어서 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위해서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서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면서도 자기 권리를 사용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자기 역시 복음에 참여를 하고 싶어서 그랬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몇이라도 구원을 하기 위해서 아니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을 하기 위해서 사도 바울은 이방에 복음을 전했습니다.

 

23절 공동번역을 읽어드리겠습니다.

나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라도 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과 다 같이 복음의 축복을 나누려는 것입니다

 

나는 복음을 위해서 무슨 일이라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의 심정입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율법에 갇혀서 아무 것도 못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위해서는 무슨 일이라도 하는 그들이 정작 복음을 전하는 일에 있어서는 자기들이 지키고 있는 율법이 장애가 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무슨 일이라도 해야 합니다.

생명을 구원하는 일이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내 아들이 죽어가고 있다면 여러분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정말 무슨 일이라도 해서 그 아들을 살리고 싶은 것이 모든 사람의 마음입니다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 걸림이 되는 것이 있다면 그는 아직 복음을 모르고 있는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가 그들에게 가서 복음을 전할 때 그들의 어떤 모양이라도 따라서 하면서 그들 중에 몇이라도 구원을 하려고 수고를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9:24절을 보겠습니다. (274)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찌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이제 결론을 말씀을 하기 시작합니다.

고린도교인들에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운동장에서 달음질을 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도 오직 상 얻는 자가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너희도 이렇게 상을 얻도록 달음질을 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달음질을 안 합니다.

복음을 듣고 그 기쁨은 누리고 있지만 고린도교회는 달음질을 안 하고 있습니다. 정말 성도라면 우리가 어떻게 달음질을 해야 하는 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자기가 가진 권리를 다 쓰지 않고 너희에게 복음을 전했는데 지금 너희는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너희도 이제 복음을 들었으면 달음질을 해서 상을 받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헌신하시기 바랍니다.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다른 복음에 미혹이 되어 있는 율법주의에 빠져 있는 사람들도 자기들이 천국에 갈 것이라고 달음질을 얼마나 열심히 하고 있는데 복음을 듣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함을 받고 있는 성도가 달음질을 안 한다면 그것은 솔직히 문제가 있다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라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종교인이 되라는 것도 절대로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도 거룩한 성도입니다 그 성도가 천국을 바라보고 있으면서도 헌신을 하지 않고 있다면 과연 상을 받을 수 있겠느냐고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인들에게 지금 묻고 있는 것입니다

 

천국 거저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가 복음을 듣고 나 혼자만 이 복음의 은혜를 누리고 천국에 가겠다고 하는 것은 너무 이기적입니다 사역자도 사도 바울과 같이 영혼의 구원을 위해 수고를 해야 하겠지만 역시 성도들도 천국의 상을 바라보고 있다면 이 세상에서 복음을 위해 헌신을 해야 합니다. 고린도교인들에게 상 받으려면 그렇게 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9:25절을 보겠습니다. (274)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이겨야 합니다.

이 세상도 운동장에서 달음질을 할 때 어떻게 하든지 이기려고 자기를 절제를 해서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운동선수들이 시합을 앞두고는 얼마나 자기를 절제를 하는 가를 알아야 합니다. 특히 체중이 문제가 되는 선수들은 정말 어지러울 정도까지 자기 체급을 유지하기 위해서 절제를 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 면류관입니다

세상에서 운동을 하는 사람도 그렇게 면류관을 받기 위해서 자기를 절제를 하고 있는데 우리는 썩지 아니할 영원한 면류관을 받기 위해서 성도로서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 운동선수들이 그리고 세상의 어떤 상을 받기 위해서 자기를 절제를 하는 사람들이 받는 면류관은 썩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것을 얻기 위해서도 절제를 합니다.

성공을 한다는 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정말 자기를 절제하지 않고는 도무지 안 된다는 것을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알고 있습니다. 썩을 면류관도 그런데 하물며 우리가 받을 면류관을 얻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 가를 사도 바울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썩지 않을 면류관입니다

물론 이 면류관은 선물로 거저 주고 있습니다. 그것에 대해서 어느 누구도 반대를 해서는 안 됩니다 만약 반대를 한다면 그는 이단이고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선물이라고 해도 우리는 그것을 얻기 위해서 이 세상에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성도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가를 제가 굳이 말씀을 안 드려도 잘 알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렇게 했습니다.

썩지 않을 면류관을 얻기 위해서 자기 권리가 있지만 그것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성도들도 사도바울과 같이는 하지 않을지라도 역시 썩지 않을 면류관을 얻기 위해서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전하는 일에 어떤 모양으로든 헌신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성도가 이 세상에 존재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고린도전서9:26절을 보겠습니다. (274)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같이 아니하여

 

분명하시기 바랍니다.

이 시대 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달음질을 하는 사람이 아무데로나 뛰고 있습니까? 그들은 반드시 정해진 코스를 따라 뛰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세상도 달음질을 할 때는 반드시 정해진 길로 뛰고 있고 결승선을 분명히 알고 있는데 지금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자기가 왜 뛰고 있는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왜 예수를 믿습니까?

방향을 모르고 뛰는 자가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허공을 치는 것과 같이 아무 데나 자기 주먹을 휘두르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아니 분명히 성경을 통해서 보여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얻기 위해서 이 세상에서 성도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한 시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 세상에서 잘 살기 위해서 입니까?

이 세상에서 선하고 의롭게 살기 위해서 입니까?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사람과 같이 살아가기 위해서 입니까? 만약 그렇게 말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달음질을 할 때 어디로 가야 하는 줄을 모르고 뛰는 사람과 같고 주먹을 휘두를 때 아무데나 허공에 휘두르고 있는 사람과 같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가나안입니다

꿩 잡는데 매라고 우리는 어떻게 하든지 가나안에 들어가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자기가 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는지 조차 모르고 있습니다. 가나안을 바라보고 가는 사람은 곁에 있는 것에 눈을 주지 않고 오직 가나안만 바라보고 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아무리 하나님의 사람과 같이 살면 뭐합니까? 이스라엘이 그렇게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부를 하면서 살았지만 결국에는 광야에서 다 죽고 말았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무엇을 보고 했습니까?

자기가 그렇게 사도로서 마땅히 그 일을 했지만 분명히 천국을 바라보고 했다는 말씀입니다 나도 내 영혼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 내 권리를 다 쓰지 않고 사역을 했다 하면서 너희도 분명한 방향을 보고 이 세상에서 달음질을 하고 주먹을 휘두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1:9절을 보겠습니다. (377)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목적입니다

내가 영혼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설령 그것이 내 권리라 해도 그것을 다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권투를 하는 자는 절대로 허공을 치지 않습니다. 상대와 싸울 때 정확하게 상대를 쳐서 그를 쓰러 뜨려야 이길 수 있기 때문에 허공을 치지 않습니다.

 

다시 말씀을 드립니다.

율법주의자가 되라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또한 종교인이 되어서도 절대로 안 됩니다 제가 복음을 전하는 것은 오직 영혼 구원에 있습니다. 우리는 방향을 아는 성도입니다 그리고 또 성도로서 당연히 이 세상에서 복음을 위해서 헌신을 해야 합니다. 나만 구원을 받으면 그만이라고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이기적입니다 또한 그는 영지주의로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늘 말씀을 드리지만 복음주의와 영지주의는 종이 한 장 차이라는 것을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9:27절을 보겠습니다. (274)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

 

버림이 됩니까?

물론 우리가 그런 권리를 다 사용한다 해도 믿음이 있는 성도는 절대로 버림을 당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내가 내 몸을 쳐서 복종케 하지 않으면 내가 남에게 전파를 한 후에 버림이 될까 두려워한다고 분명히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두려워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절대로 버림을 당하지 않는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자기를 절제한 것과 같이 성도들도 자기를 절제를 해서 이 복음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질 수 있게 해야 합니다. 그것은 사도 바울만의 몫이 아니라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성도들이 절제를 해야 하는 일입니다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만 자기를 쳐서 자기 몸을 절제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자기 권리를 다 말씀을 하면서 자기가 얼마나 자기 자신을 쳐서 복종케 했는가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한 이유는 한 영혼이라도 더 얻기 위해서 했지만 또한 자기 자신의 영혼 구원을 위해서 그렇게 했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5:13절을 보겠습니다. (308)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

 

우리 성도는 자유자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율법에 대해서 그리고 종교에 대해서 자유자라는 말씀입니다 그 자유를 우리에게 주신 것이지 성도로서의 직무까지도 자유 하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초대 교회의 성도들이 얼마나 헌신을 했는가를 성경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않고는 반드시 버림을 당하게 됩니다. 아니 한번 구원을 받은 성도가 버림을 받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하고 있는 사람은 아직 구원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우리가 깨달아야 합니다.

 

기회로 삼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도는 이 세상에서 내가 받은 은혜의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 더욱 헌신을 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왜 이렇게 까지 자기 자랑을 하면서 말씀을 하고 있느냐 하면 바로 고린도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이 복음을 듣고 그것을 육체의 기회로 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더욱 헌신을 해야 하는 그들이 복음의 일에 전혀 마음을 쓰지 않았습니다.

 

권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무리 정당하다 하더라도 혹시라도 그것으로 인하여 다른 사람이 실족이 된다고 하면 정말로 사도 바울과 같이 권리를 포기할 수 있는 성도가 되어야 한다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에게만 권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 성도에게도 권리가 있습니다. 복음을 듣고 자유 하라는 권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육체의 기회를 삼아 누리려고 하고 복음을 위해서 헌신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사도 바울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천국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하지만 우리는 감당하기 벅찬 것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 성도가 이 세상에서 자기 권리만 주장을 하면서 복음을 이용하려고 한다면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자기가 어떻게 사역을 했는가를 말씀을 하고 있고 내가 그렇게 사역을 한 것은 내가 이 복음을 다른 사람에게 전한 후에 버림이 될까 두려워한다는 말씀입니다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저는 성도님들이 이 세상에서 절제를 하고 살아가고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복음을 위해서 함께 협력을 하고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성도는 이 세상에서 아무리 많은 것을 가졌다 해도 그것을 다 누려서는 안 됩니다 내게 많은 것을 주신 것은 나를 통해 다른 영혼을 구원하라는 하나님의 뜻이기도 합니다.

 

사도 바울의 심정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내 주변에 있는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헌신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내 몸을 쳐서 오직 영혼 구원을 위해 복음의 사역에 함께 하셔서 썩지 않는 면류관을 얻는 성도가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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