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한번 비췸을 얻고
히브리서 6:4-6절을 보겠습니다. (신 358쪽)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타락
교회 안에서 신앙생활을 하다가 타락한 자들에 대해서 서로 의견이 분분합니다. 그리고 대 다수의 사람들이 한번 구원을 받은 사람이 다시 타락을 할 수 있는 것 같이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그런 말씀들이 많이 있고 또 오늘 말씀도 그 중에 대표적인 말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실제 그렇게 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잘 믿는다고 하는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예수 그리스도를 반대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제 주변에도 어려서부터 신앙을 가졌는데 어느 순간에 그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전적으로 부인을 하고 있고 심지어는 예수는 사생자라는 말까지 서슴지 않고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왜 그런 일이 있습니까?
그것은 교회가 바른 진리를 전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가장 큰 원인은 교회에 문제가 있고 또 하나님께서 그를 처음부터 택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교회에 나와서 진짜 신앙인과 같이 살아가고는 있었지만 실제 그의 마음에는 믿음이 없었던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타락할 수 있습니까?
이 문제를 먼저 바로 알고 가야 합니다. 구원을 받은 사람이 타락해서 진리에서 멀어져 갈 수 있습니까? 아마도 교회 안에 있는 다수는 그렇다고 대답을 합니다. 그 이유는 실제 그런 일들이 보여 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바로 깨달아야 하는 것은 성도는 다시 타락할 수 없다는 것을 성경이 분명히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육이 아닙니다.
육을 보고 있느냐 영을 보고 있느냐에 따라 그 생각이 전혀 다르다는 것을 우리는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타락을 한다는 것은 우리가 태어났다가 다시 죽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또 그 타락한 자가 다시 태어 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가능한 일입니까?
생명의 종교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볼 때 늘 주의 깊게 보아야 하는 것은 성경은 우리에게 생명에 대해서 가르쳐 주고 있다는 것을 알고 보아야 합니다. 생명이 어떻게 다시 죽을 수 있고 또 다시 태어날 수 있습니까? 교회 안에서 성도가 타락할 수 있다고 주장을 하는 것은 그리고 그가 다시 믿음을 가질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한 마디로 생명이 태어났다 죽었다 를 반복할 수 있다는 말과 같습니다.
안 됩니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성경은 단 한 번의 거듭남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죽었다 살아났다 하는 것은 이 거듭남을 부정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이단적인 주장이라는 것을 우리가 기초로 가지고 있어야 진리에서 흔들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어떤 사람이 믿음을 가졌다가 타락을 할 수도 있고 그가 다시 믿음을 가질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생명이 태어났다가 다시 죽었다 하는 것을 반복할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우리육체의 생명도 한번 죽으면 끝이 나는 것과 같이 영의 생명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이 다시 태어나고 다시 죽을 수 없습니다.
영은 죽지 않습니다.
한번 태어난 영은 절대로 죽지 않습니다. 만약 그것이 죽는다면 우리는 사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스스로는 그 영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먼저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영을 보호해 주시고 있기 때문에 그 영이 탄생이 된 성도는 절대로 죽을 수 없고 그 영이 탄생이 된 성도는 다시 타락할 수도 없다는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은사,
하늘의 은사가 있습니까? 여러분이 받았다고 하는 아니 지금 이 시대 교회 안에서 행해지고 있는 은사가 땅의 은사입니까? 하늘의 은사입니까? 아마 이 부분을 바로 정립을 하고 있는 사람이 거의 없을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은사 하면 다 같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6장4절에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바 되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앞에 은사가 있고 뒤에 성령이 있습니다. 앞에 은사는 무엇이고 뒤에 성령은 무엇입니까? 만약 같은 것이라면 이렇게 굳이 나누어서 말씀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그냥 기록된 것이 없습니다.
다 이유가 있습니다.
앞에 은사와 뒤에 성령은 분명히 다릅니다.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앞에 은사는 우리가 통상적으로 알고 있는 은사를 말씀하고 뒤에 성령은 진리의 성령을 말씀하는 것을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이 문제를 바로 이해를 하고 히브리서의 말씀이 해석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성경 참 어렵습니다.
그러나 어렵다고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이렇게 어렵게 기록한 것은 반드시 그 이유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런 말씀들을 잘못 해석 하면 또 자의적으로 해석을 하게 되고 전혀 성경에서 말씀을 하고자 하는 뜻을 이해할 수 없게 되고 그것은 영혼의 문제와 직결이 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성경을 너무 쉽게 보고 있습니다.
아니 저 부터가 그렇습니다.
저 역시도 예전에는 그런 습관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제가 진리를 다 아는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었습니다. 성도는 말씀을 하나 볼 때도 그냥 무심히 보는 것이 아니라 왜 하나님께서 이렇게 기록하게 하셨는가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지 우리가 다시 타락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에는 들어와 있지만 다시 타락을 해서 옛날 이 세상의 이성적 지식으로 돌아가 있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이 있습니다.
늘 말씀드립니다.
성경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하는 말씀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에게 하는 말씀이 아니라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하는 말씀이며 이 말씀을 바로 깨달아야 내가 어디에 있는 가를 분명히 분별할 수 있고 그런 성도만이 주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결론을 말씀드립니다.
뒤에 성령에 참예한바 되고 이 말씀은 우리가 교회 안에서 보고 있는 은사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늘의 은사가 아니라 땅에 은사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눈으로 보고 또 교회 안에서 우리가 느끼고 하는 것을 성령에 참예한바 되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땅의 은사라고 말씀을 하면서 성령에 참예한바 되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늘의 은사가 있습니까?
아마 이 부분에 대해서 생각해 본 사람이 거의 없을 것이라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혹시라도 교회 안에서 하늘의 은사에 대해서 들어 본 사람이 있습니까? 한번 대답을 해 보시기 바랍니다. 성경에 하늘의 은사에 대해서 히브리서 여기에 단 한번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아마 이 말씀을 들으면 무슨 이상한 말을 하려고 하느냐고 생각할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의 은사가 있습니다.
성경이 분명히 하늘의 은사에 대해서 가르쳐 주고 있지만 사람들은 그 은사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아니 은사라고 생각을 하고 있지를 않습니다. 오늘 히브리서를 통해서 하늘의 은사가 무엇인가를 아는 성도가 되시고 또 이 하늘의 은사를 반드시 받아야 합니다. 하늘의 은사를 맛보면 안 되고 그 은사가 내 안에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면 안 됩니다.
이 은사는 반드시 우리에게 있어야 하고 이 은사를 은혜로 얻어야 합니다. 이 은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사이며 이 은사가 내 안에 있다는 것은 구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성도에게는 누구나 이 은사가 있지만 그것을 잘 모르고 있습니다.
로마서6:23절을 보겠습니다. (신 247쪽)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하늘의 은사입니다
우리가 통상적으로 은사라고 하는 것은 성령의 은사로서 그것은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보고 느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생이 하늘의 은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영생이 어디에 있습니까?
이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보는 은사는 하늘의 은사가 아닙니다. 하늘의 은사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생을 하늘의 은사라고 합니다. 성도는 당연히 이 하늘의 은사를 얻었습니다. 이 하늘의 은사를 얻은 성도만이 구원을 얻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은사 하면 성령의 은사만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히브리서에서 말씀을 하고 있는 하늘의 은사는 우리가 천국에서 영원히 사는 그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하늘의 은사를 가져야 합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 있는 다수는 이 하늘의 은사를 가지지 못하고 있고 그저 참예한바 되었다가 타락을 하고 있습니다. 잠깐 구원의 기쁨을 누렸지만 그것은 실제 그들에게 구원이 임한 것이 아니라 잠깐 참예한바 되었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13:33-35절을 보겠습니다. (신 210쪽)
“곧 하나님이 예수를 일으키사 우리 자녀들에게 이 약속을 이루게 하셨다 함이라 시편 둘째 편에 기록한 바와 같이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너를 낳았다 하셨고 또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저를 일으키사 다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을 가르쳐 가라사대 내가 다윗의 거룩하고 미쁜 은사를 너희에게 주리라 하셨으니 그러므로 또 다른 편에 일렀으되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시리라 하셨느니라”
너는 내 아들이다 오늘 너를 낳았도다.
이 거룩하고 미쁜 은사는 하나님께서 영생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시고 있습니다.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는데 그것이 하늘의 은사라는 말씀입니다 이 은사가 우리 성도에게는 분명히 임했습니다. 그저 한번 맛을 본 것이 아니라 영원히 주어졌다는 말씀입니다
이 은사를 받아야 합니다.
성경은 성도들에게 이 은사를 받으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이 은사를 너무 소홀히 하고 있고 이 은사가 얼마나 중요한 가를 모르기 때문에 그저 한번 멋을 본 것으로 마치 자기가 이 은사를 받은 것으로 착각을 하고 있는데 그것이 타락이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영생 쉽습니다.
그러나 이 쉬운 것을 한번 맛을 보고 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계속해서 우리는 이 은사를 내 안에 있게 하기 위해서 성경을 통해 영생에 대해서 알아가야 하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저 한번 멋을 본 것을 가지고 구원을 받은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로마서1:11절을 보겠습니다. (신 239쪽)
“내가 너희 보기를 심히 원하는 것은 무슨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눠 주어 너희를 견고케 하려 함이니”
사도 바울이 왜 복음을 전했습니까?
다른 이유 없습니다. 하늘의 은사를 이방인들에게 전해 주기 위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로마서를 기록한 이유도 바로 이 신령한 은사, 하늘의 은사를 나눠주기 위해서 기록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성경 전체가 이 하늘의 은사를 주기위해서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는 사람들은 하늘의 은사를 구하지를 않고 있습니다.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까?
그가 만약에 이 신령한 은사를 주기 위해서 말씀을 전하고 있지 않다면 그는 거짓 선지자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사도바울이 기록한 성경, 아니 모든 선지자가 기록한 성경은 다 이 하늘의 은사를 나눠 주기 위해서 기록이 되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너무 중요합니다.
아니 아무리 강조를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평생을 이 하늘의 은사에 대해서 전해도 이 은사를 받는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무엇을 듣고 있는 가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저 예수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 그 말 한마디 듣는 것으로 자기에게 영생이 있는 것으로 오해를 해서는 안 됩니다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지금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끊임없이 경주를 해도 하나님께서 나를 택하시지 않았으면 받을 수 없는 것인데도 이 하늘의 은사를 너무 쉽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내가 무엇에 대해서 듣고 있는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을 봅니다.
아무리 많이 보고 그 안에서 지식을 얻는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하늘의 은사는 그렇게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사도 바울과 같은 사람에게서 성경을 배운다면 그만큼 가능성은 높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하늘의 은사에 대해서 전하고 있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저 립 서비스 수준으로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듣고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늘의 은사를 맛보았습니다.
이 말씀은 교회에 나와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서 자기가 마치 구원을 얻는 것 같이 믿어졌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실제 그들의 영혼에는 하늘의 은사가 임하지 않았지만 그것을 전혀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말씀을 들은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구원의 말씀을 듣고 나왔다가 다시 율법주의로 돌아간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복음은 들었지만 진리를 아는데 힘써서 생명을 얻는 것이 아니라 그저 잠깐 복음의 말씀을 들은 것으로 끝이 난 그 사람들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진리에 대해서 전하고 있습니다.
어떤 때는 이제 구원이라도 받은 것 같이 저에게 전화를 하고 감사하다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참 그때는 저도 기쁩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 보면 그가 전혀 보이지를 않고 있습니다. 또 더 이상 말씀을 보지도 않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가 만약에 하늘의 은사를 얻은 성도라면 계속해서 진리의 말씀을 보고 있을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가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구원이라는 것은 분명히 단회적인 사건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한 번 비췸을 받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이 있습니다. 마치 몇 편의 설교를 보고 자기가 구원을 받은 것으로 착각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분명히 구원을 받았다는데 있어 제가 이의를 제기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아는 것이 설교 몇 편을 보고 알 수 있다고 생각을 하면 그것은 너무도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성경은 전체가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전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설교 몇 편을 보고 알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물론 교회에서 설교를 듣는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에서 전하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거의 율법의 행위를 전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기억해야 하는 것은 우리가 누룩이 없는 떡을 평생을 먹어도 구원을 받을까 말까 합니다. 아니 구원을 받는 성도는 누룩이 섞여 있는 떡을 먹지 않고 있습니다. 그것을 분별해서 자기가 먹어야 하는지 아니면 먹지 말아야 하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성경을 전하면 다 누룩이 없는 떡으로 알고 있습니다.
설교 시간에 예수 믿으라는 단 한마디만 있어도 마치 예수를 전하는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한번 비췸을 받았다는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더 이상 진보를 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그냥 예수 믿으면 구원 받는다고 하더라 하는 정도로 비침을 받았다는 말씀입니다
신령한 은사입니다
우리가 교회 안에서 보고 있는 은사는 신령한 은사가 아닙니다. 그 은사는 연약한 지체를 세우는데 필요한 은사입니다 그 성령의 은사를 받은 것은 구원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이 시대 어리석은 사람들은 그런 성령의 은사를 받은 것으로 자기가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비췸을 받아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하늘의 신령한 은사를 맛보기만 해서도 안 됩니다. 우리는 이 세상사는 동안에 이 구원에 대해서 이 생명에 대해서 끊임없이 성경을 통해서 확증해 나가야 합니다. 이것을 게을리 하는 사람은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다시 율법주의로 돌아가 있는 사람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에 나오면 누구나 이 은사를 맛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기쁩니다.
또 은혜에 감사를 해서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평생을 주님을 위해서 살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수의 사람은 그렇게 맛보고 그것으로 자기가 영생을 얻은 줄 착각을 하고 다시 종교인들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렇게 타락을 한 사람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아니 처음부터 그들에게는 진리의 성령이 임재하지 않았다는 말씀입니다
요한일서5:13절을 보겠습니다. (신 393쪽)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성경을 왜 봅니까?
우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기 위해서 성경을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불행하게도 이 영생이 있음을 알기 위해서 보는 것이 아니라 마치 자기들이 성도나 된 것으로 오해를 하고 이제는 성도로서의 삶을 강조하는 행위에 대해서만 보고 있습니다.
영생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는 단 하나의 이유입니다 그저 한번 비췸을 받았다고 하늘의 은사를 받은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이 영생이 내 안에 정말 있는가를 늘 확증해 나아가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을 게을리 하는 사람은 성도라 할 수 없고 그저 이 세상의 어느 종교를 믿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교회라고 하는데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고 있을 뿐입니다
성도는 다릅니다.
교회 안에 미련한 자는 자기의 행위가 바른 줄로 알고 그 미련함을 더욱 나타내고 싶어서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마치 구원을 받은 성도나 되는 것 같이 이스라엘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자신 있게 말하고 있는 것 같이 교회라는 건물에 들어와 있으면 더구나 그 교회가 이 세상에서 모두가 인정을 하는 정통이라고 하면 더욱 그들은 영생에서 멀어져 가고 있습니다.
성령에 참예한바 되고
고린도전서12:7-11절을 보겠습니다. (신 277쪽)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어떤이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이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다른이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이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이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이에게는 예언함을, 어떤이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이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느니라”
고린도전서 12장은 모든 은사가 나와 있습니다.
또 로마서 12장에 은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교회 안에서 행해지고 있는 여러 가지 은사가 있습니다. 나를 통해 나타나고 있는 거의 모든 것이 은사라고 생각을 하면 됩니다. 성령에 참예한바 되었습니다.
이것이 하늘의 은사입니까?
아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물론 성령이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것은 분명하지만 하늘의 은사가 아니라 이 땅에서 나타나고 있는 은사입니다. 하늘과 땅에 대해서 바로 아시기를 바랍니다.
지금 이 시대 은사주의가 너무 성행을 하고 있습니다.
어느 교단에서는 이 은사가 있는 것으로 마치 구원을 받은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 그렇게 주장하고 있는 것이 심각한 문제가 된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이런 은사에 참예를 한 사람은 자기가 구원을 받은 것으로 오해를 하고 더 이상 영생에 대해서 알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방언을 하는 것으로 자기가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새번역입니다.
“한번 빛을 받아서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을 나누어 받고,”
나누어 받았다고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이 은사는 성령이 각 사람에게 나누어 준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진리의 성령이 임재를 한 것이 아니라 은사를 나누어 받았다는 말씀입니다 이 은사를 받은 것과 구원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을 성령론에서 은사에 대해서 말씀을 했습니다.
은사를 나누어 받았습니다.
누구는 지혜의 말씀을, 누구는 지식의 말씀을, 누구는 병 고치는 은사를, 누구는 능력을 행하고 있고 누구는 방언을 하고 있습니다. 이 외에도 로마서에서 나오는 은사를 교회 안에 행하면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은사를 가지고 있다 해서 그가 구원을 받은 것으로 오해를 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성령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보혜사를 받은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이런 말씀을 오해를 해서는 정말로 큰일이 납니다. 보혜사 성령을 받은 성도는 절대로 타락할 수 없고 또 타락하지도 않습니다. 그것은 내가 타락을 하고 싶다고 해도 안 되는 일이라는 것을 성경이 가르쳐 주고 있고 우리는 그렇게 믿어야 합니다.
이런 말씀을 바로 이해를 못하기 때문에 문제가 됩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도 다시 타락을 해서 지옥에 갈 수 있는 것 같이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성령론을 통해서 진리의 성령이 임한 사람은 절대로 다시 지옥에 갈 수 없다고 배웠습니다. 제가 처음에 말씀을 드렸지만 복음은 생명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볼 때 그것을 바로 분별을 해야 합니다.
진리의 성령이 임한 사람은 타락을 하고 싶어도 못 합니다 그렇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진리에 대해서 너무 모르고 있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히브리서에서 말씀을 하고 있는 성령에 참예한바 되었다는 말씀은 은사를 받은 것이지 진리의 성령이 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은사는 진리의 성령이 임재하지 않아도 받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이 시대 거짓 선지자들에게도 이런 은사들이 나타나고 있는 것을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성경에도 이미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령을 받지 않고도 얼마든지 은사를 행하고 있다는 것을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7:7절을 보겠습니다. (신 270쪽)
“나는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원하노라 그러나 각각 하나님께 받은 자기의 은사가 있으니 하나는 이러하고 하나는 저러하니라”
은사는 한사람은 이렇고 한사람은 저렇고 각각 받은 것이 다릅니다.
히브리서에 나오는 성령에 참예한바 되었다는 말씀은 은사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이 은사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성령론에서 이미 말씀을 드려서 알겠지만 이 은사는 분명히 성령이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은사가 잘 드러나는 사람도 있고 감추어져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이 은사를 성령만 역사를 하는 것이 절대로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성경에 기록되었다고 해서 마치 그것을 모두 성령이 역사를 하는 것으로 오해를 해서는 안 됩니다 이 은사는 사단도 똑같이 우리 가운데서 역사를 해서 은사가 나타나게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거짓 선지자에게도 나타납니다.
마태복음7:22절을 보겠습니다. (신 10쪽)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은사 다 나타납니다.
이 세상 사람에게도 나타나는 것이 은사입니다 모든 사람이 이 은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서 아직 성령이 역사를 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은사가 나타나지를 않고 있습니다. 그가 진리의 성령을 받았느냐 안 받았느냐 하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이 교회 안에 있으면 이 은사를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은사는 성령이 각 사람에게 나누어 줍니다.
그렇다고 그 은사가 나타난다고 해서 그가 바르게 진리를 전하는 자라고 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실제 이 시대 그런 은사가 나타나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타락을 했는가를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오히려 그 은사로 인하여 진리를 버리고 있습니다.
내게 은사가 있습니다.
마치 그것이 구원의 증표나 되는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고 이 은사가 나타나는 사람을 모두가 성도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론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성령론에 대해서 바로 알지 못하면 이런 말씀들이 더 이상 해석이 안 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시대는 교회 안에서 이런 은사가 있다는 그것으로 마치 그를 성도로 생각을 하고 있고 그 은사를 통해서 자기가 구원을 받았다고 증명을 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성령이 주셨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은 그것을 사단도 역사를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렇게 사단이 역사를 하고 있고 또 은사를 너무 빛나게 하고 있지만 사람들은 그 은사를 보고 그가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신학적으로도 교계에 문제가 되고 있는 중요한 말씀입니다
장로교는 기본적으로 칼뱅주의를 표방하고 있습니다. 한번 구원받은 사람은 멸망치 않는 다는 것이 기본 교리입니다 그런데 현재 장로교 안에서도 구원받았다가도 잘못하면 지옥 간다고 말합니다. 현대교회는 칼뱅주의의 오대 강령이 거의 사라지고 있다고 봐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설교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의 말씀을 잘못 해석을 해서 구원받았다가도 잘못하면 지옥 간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주장하는 것은 바로 이런 말씀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령론에 대해서 바로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은사와 성령을 바로 분별을 하지 못하고 있고 성령이 우리에게 어떻게 역사를 하는 가를 모르기 때문에 이런 말씀을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절대 아닙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은 다시 타락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은사에 참예한 사람은 언제든지 타락을 할 수 있습니다. 이 시대 은사주의가 팽배해져 있어 그 은사로 인하여 진리에서 타락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은사를 바로 알지 못하면 결국 자기를 통해 나타나고 있는 은사로 인하여 진리에서 벗어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히브리서6:5절을 보겠습니다. (신 358쪽)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악과 선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전체가 우리의 구원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선하시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 선하심을 우리에게 보여주시고 있습니다. 선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구원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시편119:50절을 보겠습니다. (구 892쪽)
“이 말씀은 나의 곤란 중에 위로라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음이니이다”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도다.
내 영혼을 살려 주는 주의 말씀이 선한 말씀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하나님의 선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가 하는 모든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바로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다고 시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단은 악합니다.
악한 자가 임해서 우리가 다 사망에 이르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한 말씀을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배우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선한 말씀을 알고 그 선하심에 감사를 하다가도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 가를 모르고 다시 육체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 영혼의 구원을 말씀을 하고 있고 그것이 하나님의 선한 말씀이지만 사람들은 육체로 돌아가서 사망의 길로 가고 있습니다.
나를 살렸습니다.
구원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를 하시고 있는가 하는 것을 성경을 통해서 배웠습니다. 지금 이 시대도 성경에서 그런 말씀들을 간혹 가다가 듣고 있습니다. 그렇게 선한 말씀을 들으면 마치 지금 자기가 구원을 받은 것으로 아주 기뻐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1:25절을 보겠습니다. (신 378쪽)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복음입니다
성경을 통해서 복음에 대해서 듣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복음을 들으면 자기가 구원을 얻은 것 같이 하나님이 얼마나 선하신가를 알고 기뻐하고 있습니다. 실제 교회에 처음 나온 사람들에게 이런 말씀들은 너무도 큰 기쁨을 주는 말씀이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시편에 주의 인자하심과 선하심에 감사하라는 말씀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선합니다.
죄인을 구원하는 그 말씀이 얼마나 선하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잠시 그것을 느끼고 배웠다가 다시 율법으로 은사로 돌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 너무도 많이 있습니다. 이 복음을 알기 위해서 더욱 성경을 연구를 해야 하는데 복음을 너무 단순하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듣습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그것이 금세 다른 복음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어느 정도로 빨리 변하고 있느냐면 아주 달려갈 정도로 빨리 다른 복음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계속해서 하나님의 선한 말씀을 듣는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나면 하나님이 슬슬 무서워지기 시작을 하고 심지어는 너무 냉정한 것 같이 생각이 됩니다.
그것이 왜 그렇습니까?
바로 율법을 보다보니까 하나님의 선한 말씀이 도무지 선하지 않게 보이기 시작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으면 금방이라도 구원을 받은 것 같이 그 기쁨을 맛보다가도 어느 새 다시 율법의 무거운 짐을 지고 힘들게 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복음입니다
다른 복음에 빠지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이 전도를 했을 때 이미 갈라디아 교회는 다른 복음에 빠졌고 고린도 교회는 은사주의에 빠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하나님의 선하신 말씀을 못 보게 소경을 만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 눈이 율법의 의와 은사를 보는 순간 진리에 대해서 소경이 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시편34:8절을 보겠습니다. (구 825쪽)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선하심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어느 한 부분에서 아는 것이 아니라 또 한 번 아는 것으로 족한 것이 아니라 성경을 통해서 계속해서 선하심을 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선한 말씀이 무엇입니까?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에게 피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선한 말씀은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는 것이 없이 너희가 나에게 피하기만 하면 내가 구원을 해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런 말씀을 어느 정도 알면 그 당시에는 자기가 마치 하늘을 얻은 것 같이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잠깐입니다
지금 이 시대도 교회 안에 들어오면 그런 말씀을 듣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한 말씀이 계속해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느 순간부터는 하나님이 선하다는 것을 전혀 느끼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율법을 지키다 보면 하나님이 선하셔서 자기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율법의 의가 자기가 잘 믿어서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얼마나 선합니까?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 죄인을 위해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셔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아무 조건도 없이 내가 무슨 일을 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오직 은혜로 나를 구원해 주시고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한분 외에는 선하신 이가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묻습니다.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네가 어찌하여 선한 것을 찾느냐고 하면서 하나님 한분 이외는 선한 이가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선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하고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부자 청년과 같이 자기가 율법을 잘 지킨 사람은 하나님의 선한 말씀보다 자기들이 지키고 있는 율법의 의가 더 선하게 보이고 있습니다.
내세의 능력을 맛보았습니다.
사도행전13:30절을 보겠습니다. (신 210쪽)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저를 살리신지라”
부활을 믿습니다.
이제까지 이 세상에는 부활이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이 부활에 대해서 성경을 통해서 알고 또 자기도 죽은 후에 내세에 부활할 것을 배웠습니다. 교회에 나온 사람들이 다 이 부활을 믿고 있습니다. 이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부활을 하신 것은 믿지만 자기 자신에게는 자신이 없는 것입니다
성경은 부활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구약에서부터 그것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 제사를 요제로 드리게 하셨습니다. 모든 사람이 이 부활에 대해서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을 저버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능력을 믿기 보다는 이스라엘과 같이 가나안에 자기들이 싸워서 들어가려고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말씀을 통해서 내세를 맛보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것 같이 우리도 하나님께서 그 능력으로 부활을 하게 해 주신다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믿음을 저버렸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신 것과 같이 자기를 살리신다는 것에 대해서 확신을 가지지 못합니다.
히브리서6:6절을 보겠습니다. (신 358쪽)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타락한 자들입니다
교회에는 나왔지만 이런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지금 히브리서에서 무슨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한번 비췸을 얻어 하늘의 은사를 맛보았습니다. 영생에 대해서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구원의 확신이 자기 안에 새 생명이 탄생이 되기도 전에 진리에서 타락을 했다는 말씀입니다 구원에 대해서 정말 끝까지 성경을 통해서 확증을 해 나가야 하는데 그저 예수 믿으면 구원받는다 하는 정도를 들으니까 타락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령의 은사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을 들었고 내세에 우리가 어떻게 부활을 할 것인가 하는 능력을 못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어떻습니까? 그저 맛만 본 사람들입니다 이 시대 이렇게 맛만 보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다. 그 맛을 본 것으로 자기가 마치 모든 것을 아는 것으로 오해를 하고 지혜를 구하고 있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성령의 은사를 보고 자기가 성령을 받은 것으로 압니다.
성령의 은사가 오히려 진리의 성령을 아는데 있어서 방해가 되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잘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속담에 선 무당이 사람 잡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바로 히브리서가 그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성경에 있는 복음의 말씀을 맛은 보아서 안다고는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진리가 있지를 않습니다. 선무당이 마치 모든 것을 아는 것으로 오해를 해서 더 이상 자기가 알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타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타락 안 하겠습니까?
아마 이 말씀을 바로 이해를 하고 있다면 이 사람들은 타락을 안 할 수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왜 타락을 할 수밖에 없는 가를 다음 절에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한번 타락한 자들은 다시 회개케 할 수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다시 새롭게 할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바로 율법주의에 빠져 있고 은사주의에 빠져 있기 때문에 그것이 이들에게는 더 믿음의 증표가 되기 때문에 다시 회개를 해서 새롭게 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선무당이 되어서 율법주의로 들어가 있고 은사주의로 빠져 있는 그들이 다시 진리로 돌아선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십자가에 못 박고 있습니다.
지금 이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신령한 은사를 거절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지는 그 은사를 거절하고 있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고 또 그것은 다시 욕보이고 있는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구원에 대한 확신이 없습니다.
교회에 나와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구원을 얻는다는 확신이 없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십자가에 못 박겠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구원을 못 받으니까 이제 다른 것을 찾겠다는 것이고 그것은 현저히 욕을 보이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구원을 받는 것에 대해서 확신이 없다면 그것은 다시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겠다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말씀입니다
정말 부탁입니다
선무당이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자기만 죽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까지 살인을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 사람들은 은사는 있었지만 처음부터 진리에 대해서 없었던 사람입니다 그저 맛을 보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지금 이 시대 교회 안에 부지기수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성경을 보면 뭐합니까?
교회에 나와서 설교를 들으면 뭐합니까? 이제는 미디어 시대라서 언제든지 설교를 들을 수 있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진리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은 영생에 대해서 확신이 없는 사람들은 결국 다시 타락할 수밖에 없다는 말씀입니다
히브리서6:7절을 보겠습니다. (신 358쪽)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가는 자들의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땅에 자주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비를 흡수하지를 않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하나님께서 내려주시는 단비를 흡수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맛을 보지 말고 그 비를 흡수해서 자라가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 나와 있으면 자기가 설교를 듣고 있으면 구원을 받은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비를 흡수하시기 바랍니다.
비가 오다 그치면 채소가 다 죽습니다. 하늘의 은사를 맛보는 것으로 끝이 나면 죽습니다. 그렇게 맛본 사람은 자기가 구원을 받은 것으로 생각하고 자기가 맛본 것이 마치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으로 여기고 더 이상 들으려 하지 않고 있습니다. 제가 구원에 대해서 말씀을 강하게 전하면 마치 이단인 어떤 이상한파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단 파들이 구원을 전하는 사람들입니까?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정통의 교회가 구원에 대해서 바르게 전해야 합니다.
비를 흡수해야 합니다.
그래서 밭가는 자들이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그저 맛만 본 그것으로 자기가 구원을 얻은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맛을 본 것은 채소를 내는 것이 아니라 엉겅퀴를 낸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시편65:10절을 보겠습니다. (구 847쪽)
“주께서 밭고랑에 물을 넉넉히 대사 그 이랑을 평평하게 하시며 또 단비로 부드럽게 하시고 그 싹에 복 주시나이다”
단비를 주시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단비로 흡족하게 채우지를 않고 있습니다. 자기가 맛본 아주 조금 자기를 적신 그것이 마치 모든 것을 아는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 교회 안에 있는 다수가 그렇게 조금 적셔서 맛본 그것을 가지고 자기가 영생을 얻은 것으로 생각을 하고 율법주의에 빠지고 은사주의에 빠지고 성화주의에 빠져 다시 회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있지만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밭고랑에 물을 넉넉히 대시고 있습니다.
이 성경 전체를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구원을 얻기에 무엇이 부족한 것이 있습니까?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되는데 이 성경이 모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는데 이 시대는 예수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율법의 행위와 성화의 행위와 은사에 빠져서 나오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단비를 주시고 있습니다.
성경을 보시기 바랍니다. 정말 우리에게 은혜의 단비를 내려 주시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생명을 얻기에 부족함이 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모든 것을 채워 주시고 있지만 사람들은 복음을 듣고도 다시 타락해서 회개할 수 없는 지경에 까지 이르렀는데도 그것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신명기32:2절을 보겠습니다. (구 313쪽)
“나의 교훈은 내리는 비요 나의 말은 맺히는 이슬이요 연한 풀 위에 가는 비요 채소 위에 단비로다”
성경을 모릅니다.
선무당이 아는 정도로 알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이성적인 지식으로 성경을 보고 단비를 흡족히 흡수하지를 않고 있습니다. 성경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다 보여 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있습니다. 교회 밖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생명의 은사를 맛보고도 이스라엘과 같이 율법주의에 빠져 있습니다.
교훈이 무엇입니까?
바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구원에 이르라고 교훈해 주시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맛보고도 율법주의와 은사주의에 빠져 있는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자이며 현저히 욕을 보이고 있는 사람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영생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구원을 얻으라는 말씀입니다 성경 전체에서 그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단비 같이 내려주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잠시 맛만 보고 더 이상 그것에 대해서 알려고 하지 않고 이제는 자기들이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서 행위로 빠지고 은사로 빠지고 요즘은 복음주의라고 하면서 큐티라는 이름으로 성경을 묵상하며 그날 그날내게 주시는 교훈을 실천하는 것이 의의 사람이라고 하면서 성화주의에 빠져 있습니다. 모르면 죽습니다. 성경은 영의 생명에 대한 말씀입니다
영의 생명입니다
요한복음 6장63절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니라
채소가 물이 없으면 어떻습니까?
금세 말라 죽고 맙니다. 채소는 늘 물을 잘 대주어야지 물이 없으면 자라지를 못하는 것이 채소입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하나님의 교훈과 말씀을 듣지를 않고 있습니다. 그저 교회만 나오면 마치 자기가 다 된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타락을 했다는 것이고 그런 사람들은 다시 회개케 할 수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맛본 것으로 다 되었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도는 늘 이렇게 단비를 흡족히 맞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교훈과 말씀으로 영생에 대해서 진보를 해 나가야 합니다. 그런 성도만이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기 바랍니다. 이 시대 교회가 율법주의와 은사주의와 성화주의에 완전히 미혹이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타락을 한 자는 다시 회개할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히브리서6:8절을 보겠습니다. (신 358쪽)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와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
가시와 엉겅퀴가 있습니다.
비가 없어도 아주 잘 자라는 식물입니다 하나님의 교훈을 받지 않아도 교회 안에서 잘 자라고 있습니다. 진짜 가시와 엉겅퀴가 아니라 단비를 맞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고 있고 더 이상 생명에 대해서 알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의 마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7:16절을 보겠습니다. (신 10쪽)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구원을 상징합니다.
포도 열매와 무화과 열매는 이스라엘을 상징합니다.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려 주시는 단비를 흡수하지 않고 있는 사람들은 절대로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된다고 말씀합니다.
이 시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교회는 나와 있지만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의 은사에 참예한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을 배워서 부활의 능력을 알고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마지막은 불사름이라고 말씀합니다.
영생입니다
아무리 강조를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아니 성도라면 당연히 성경을 통해서 이 영생에 대해서 늘 깨어 지혜를 구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그것을 맛만 보고 있습니다. 비를 흡수하는 것과 같이 흡족하게 내 안에 지혜로서 충만해져야 하는데 비를 흡수하지 않아서 그 심령에 가시 열매가 그리고 엉겅퀴가 자라고 있는데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누구로 인하여 그렇게 됩니까?
거짓 선지자로 인하여 그렇게 됩니다. 교회 밖에 거짓 선지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 거짓 선지자가 있습니다. 이들이 전하는 말을 듣게 되면 그 역시도 가시와 엉겅퀴를 내게 되어 결국에는 그 마지막에 불사름이 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누가 이런 가를 보겠습니다.
왜 이런 일이 있는 가를 이제 히브리서 6장1절부터 다시 보겠습니다. 교회 안에 이런 사람들이 있어서 가시와 엉겅퀴를 내게 해서 타락을 하게 만들고 있고 그들이 다시 회개할 수 없는 그런 진노의 자녀들이 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히브리서6:1-2절을 보겠습니다. (신 357쪽)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데 나아갈찌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고...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말씀의 초보를 버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5장의 마지막 절에서 연결이 되어 있는 말씀입니다 지금 이제까지 말씀을 한 본문의 내용은 결국 그리스도의 말씀의 초보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하는 말씀입니다
초보입니다
신앙생활을 수십 년을 했어도 이 초보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초보가 무엇인가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까지 말씀을 드렸던 것이 초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이 초보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초보에 있으면서도 자기가 다 아는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예수 믿으면 구원 받는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말씀의 아주 초보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 거의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저 맹목적으로 이 말씀을 믿고 있습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내려 주시는 비를 흡족히 받아먹어야 좋은 채소를 낼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사실 이 시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이 이단이라고 지칭하는 교회와 그들과 무엇이 다릅니까? 심지어는 이단보다도 더 성경에 대해서 모르고 있습니다. 지금은 신앙은 없고 그저 맹목만이 있는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를 믿어 구원을 받는다고 하면 그 다음에 무슨 말을 해도 아멘이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오직 예수 밖에는 구원이 없습니다. 십일조를 내야 한다고 하면 그것이 오직 예수로 구원을 받는 것입니까? 이제는 초보에서 벗어나 내가 행해야 하는 일이 무엇이고 버려야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성경을 통해 알아야 하는데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고 하면 어떤 말을 해도 그것이 진리에 반하는 것인가를 분별할 수 있는 지혜가 없습니다.
초보를 버리시기 바랍니다.
이제는 정말 내 생명에 대해서 더 깊게 알아야 합니다. 이제 초보와 같이 젖을 먹는 것이 아니라 영혼에 대해서 단단한 식물을 먹을 수 있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초보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이 타락의 길로 가고 있으면서도 깨닫지 못 합니다 이 초보가 무엇인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새번역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교의 초보적 교리를 제쳐놓고서, 성숙한 경지로 나아갑시다. 죽은 행실에서 벗어나는 회개와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죽은 행실을 벗어나는 회개를 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죽은 행실에서 벗어나는 회개를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행실에 더욱 깊이 빠져 들어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타락을 하고 있습니다.
죽은 행실이 무엇입니까?
율법주의는 죽은 행실입니다 그러나 이 죽은 행실에서 회개를 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이 율법주의에 빠져 다 멸망 가운데로 가면서도 그 행위에서 벗어나는 회개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 회개를 하지 않는다는 것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지 않겠다고 주장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을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율법주의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어느 누구도 이 율법주의에서 벗어나는 회개를 하지 않고는 진리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아무리 그가 성경을 아는 지식으로 뛰어나다 해도 이 죽은 행실에서 벗어나는 회개를 하지 않고는 절대로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야고보서2:17절을 보겠습니다. (신 373쪽)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행함이 없는 믿음을 여기서 다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제가 올려 드린 야고보서 2장의 강해를 보면 행함이 없는 믿음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아직도 율법을 지키고 있는 그것이 행함이 없는 믿음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죽은 행실 율법의 행위를 버리겠다고 율법의 속박에서 벗어나겠다고 하는 회개를 하지 않고는 진리에 이를 수 없습니다.
이 문제는 너무 중요합니다.
만약에 누구라도 율법의 한 모양이라도 지키고 있다면 그는 믿음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는 죽은 행실을 아직 회개 하지 않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 문제는 저를 이단이라고 공격을 해도 좋습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 판단해 주실 것을 믿고 있고 또 성경이 그렇게 우리에게 가르쳐 주기 때문에 이 문제가 제가 알고 있는 것이 바르지 않다고 하면 저는 예수를 안 믿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이미 죽었습니다.
그런데도 믿지를 않고 아직도 율법의 죽은 행실을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차라리 안 믿는 것이 더 유익할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이 죽은 행실을 버리지를 못하고 있다면 여러분은 이스라엘과 같이 멸망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를 보면 너무도 안타깝고 답답하기만 합니다.
누구를 위해서 이 죽은 행실을 하고 있습니까?
자기라는 우상을 위해서이고 또 교회라는 우상을 위해서 이 죽은 행실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 죽은 행실을 버리고 오직 믿음만으로도 우리는 얼마든지 이 세상에서 선하고 의롭게 살아갈 수 있고 또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점점 더 이 죽은 행실로 빠져 들어가고 있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입니다.
그것은 죽은 믿음이라고 야고보가 전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버리지 않고 믿는다고 하는 것은 죽은 믿음이라고 분명히 가르쳐 주고 있지만 이 시대는 성경을 바로 해석하지를 못해서 오히려 이 말씀을 보면서 죽은 행실로 빠져 들어가고 있습니다. 죽은 행실에서 벗어나는 회개를 과연 이 시대에 하고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다시 회개케 할 수 없습니다.
이 죽은 행실에 빠져 있는 사람은 아니 이것을 주장하는 사람은 절대로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이 죽은 행실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시대도 이 죽은 행실에서 벗어나는 회개를 하지 않으면 또 십자가에 못 박겠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기초입니다
이것을 다시 거론하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또 하나님에 대한 신앙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인가를 아는 것은 이제 우리가 그것을 다시 정립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일을 다시 배울 필요가 있습니까? 이미 성경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믿음을 원하시고 있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히브리서6:2절을 보겠습니다. (신 358쪽)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데 나아갈찌니라"
세례 모릅니까?
아직도 세례의 의미를 모르고 있습니까? 이미 성경에서 세례가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 세례에 대해서 다시 이야기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대해서 이런 기초적인 교리를 다시 배우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때가 오래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아직도 이런 기초적인 교리를 세우는데 힘쓰고 있다면 그가 어떻게 영의 딱딱한 것을 배울 수 있겠느냐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터를 닦지도 않았습니다. 교회에는 나와 있지만 그리스도의 말씀의 초보도 닦지 않은 사람이 너무도 많이 있습니다. 심지어는 세례에 대해서도 모르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이 있습니다.
매일 이런 것만 가르쳐야 합니까?
그러나 이 시대는 이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히브리서에서는 이제 이런 초보적인 것은 다시 교리를 세우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이 초보적인 교리를 너무도 모르고 있습니다. 참으로 암담하다고 보아야 합니다.
이런 교리조차 모르고 있습니다.
세례를 어떻게 받아야 하는지도 모르고 있고 심지어는 성령 세례를 계속해서 받아야 한다고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자기들이 은사 집회를 할 때마다 성령 세례를 받으라고 거의 모든 목사들이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세례의 기초도 모르는 사람들이 이 시대 목사라고 하면서 가시와 엉겅퀴를 내게 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죽은 자의 부활은 어느 정도 압니다.
하지만 영원한 심판에 대해서도 거의 모르고 있습니다. 과연 이 시대 목사들이 영원한 심판에 대해서 바로 가르치고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됩니까? 그런 기초도 모르면서 사람을 가르친다고 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이 얼마나 쉽게 타락을 할 수 있는 가 생각해 보면 답은 아주 쉽게 나옵니다. 영원한 심판에 대해서는 곧 강의를 해 드리겠습니다.
죽은 행실의 회개함,
하나님에 대한 신앙, 세례들과 안수,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 이것들에 대해서 바로 전하고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된다고 생각을 합니까? 이것이 기초인데 이것도 바로 전하지를 않고 있습니다. 이것은 너무 기초적인 것이라 다시 배우는 일이 없도록 하자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배웠어야 다시 배우고 말 것이 있는데 배우지도 않았습니다. 아니 배웠다고 해도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과 다르게 알고 있습니다.
기초를 모릅니다.
그런 그들이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아야 무엇을 하겠습니까? 이 기초도 바로 세우지 않고 있는 그들이 타락을 할 것이 너무 뻔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이 시대는 기초도 배우지 않고 결국에는 타락의 길로 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은 교리입니다
그런데 이 교리 자체를 부정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만 믿으면 된다고 주장을 합니다. 예수를 믿는데 있어서 바로 이런 교리들이 기초가 되지 않으면 그들이 믿는다고 하는 믿음이라는 것이 변질이 되게 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교리의 중요성입니다
교리라는 것이 성경에서 벗어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성경에 기초가 되는 말씀을 기초로 두고 있는 것이 교리입니다 교리를 모르고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것은 사상누각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마치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바른 교리의 기초에 든든히 서서 그것을 기초로 해서 성경을 해석해야 합니다.
저는 믿고 있습니다.
칼뱅주의의 5대 강령이 기초가 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가 성경을 해석하는 기초가 바로 5대 강령을 기초로 두고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관성이 있게 복음을 주장할 수 있습니다. 기초가 든든하면 든든할수록 복음은 더욱 강해집니다.
히브리서6:3절을 보겠습니다. (신 358쪽)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이것을 하리라”
성숙해 져야 합니다.
우리 성도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로 기초가 되어 있습니다. 이제 그 기초는 더 이상 우리의 논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죽은 행실을 버리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들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대한 기초가 우리에게 있으니까 이제는 더욱 성숙하게 성경 안에서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야 합니다.
성숙해 지기 바랍니다.
이제 영의 일을 힘써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 이 시대 교회를 보면 아직도 육의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의 초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율법의 행위를 하고 있고 또 은사를 통해서 자기를 나타내고자 하는 이 모든 일이 초보입니다
이제 단단한 식물을 먹기 바랍니다.
언제까지 이 세상 사람들이 알고 있는 그런 식물을 먹고 있을 것입니까? 그것은 초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 식물을 먹는 사람은 결국에는 타락을 하게 된다는 것을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아니 타락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은 처음부터 믿음이 없었습니다. 교회에 나와서 신앙생활은 하고 있지만 믿음이 없이 행위로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영의 식물은 단단합니다.
사실 육을 가지고 있는 우리 인생들이 그것을 받아들이기가 쉽지가 않습니다. 율법을 버린다는 것이 사실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 세상 이성을 가지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교회가 그것을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마찬가지로 교회는 절대로 율법을 버리지를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지 말라고 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 하나만으로도 지금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단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단단한 식물을 먹을 수 있는 성도는 반드시 율법을 버려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성경을 통해서 알고 있습니다.
영의 일입니다
내 영혼이 죽고 사는 일입니다 자기 육체의 생명에 대해서는 그렇게 조심하는 사람들이 영혼의 생명에 대해서는 너무도 안일하게 대하고 있습니다. 앞에서 말씀한 기초를 가지고 이제 우리는 더욱 성숙하게 영의 일에 대해서 성경을 통해서 알아가야 합니다. 이 영의 일에 게으르지 말고 정말 부지런하게 깨어서 늘 진보를 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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