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새 언약
예레미야31:31-34절을 보겠습니다. (구 1102쪽)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하였음이니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언약
말로서 약속하는 것을 말합니다. 성경은 약속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들에게 약속을 해 주시고 있습니다. 그런 언약을 해 주시고 또 그 언약에 대해서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를 형성하면서 이 성경의 모든 인물들을 세우고 기록하셨습니다.
인생은 약속입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자체가 약속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약속에 의해서 살다가 약속에 의해서 죽고 있습니다. 다만 그것이 사람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다 보니까 사람들은 그 약속이라는 것에 대해서 별로 가슴 깊이 생각을 하지 않고 있고 또 어느 약속이 자기와 상관이 있는 줄을 모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약속을 중요시 합니다.
속담에 시간을 지키지 않은 사람과는 일을 같이 하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실 생각해 보면 쉽게 넘어 갈 수 있는 일이기도 하지만 그 작은 약속도 지키지 못하는 사람은 모든 일을 하는데 있어서 약속을 지키지 않을 수 있다는 의미로 사람들은 그렇게 약속에 대해서 중요하게 생각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약속 지켜야 합니다.
그러나 인생은 약속을 지킬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내가 약속을 지키고 싶어도 환경과 처지가 따라주지 않으면 도저히 할 수 없는 것이 인생의 약속입니다 아무리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이라도 해도 약속을 지키러 가다가 갑작스러운 일이 있다면 어쩔 수가 없습니다.
언약에 집착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상대가 그 언약에 대해서 지키지 않으면 판단을 하고 그 사람을 불신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사람이 언약을 했다면 그것을 지켜야 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인생이라는 것을 모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인생이 지킬 수 있는 언약은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내가 지키고 싶다 해서 언약을 지킬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인생은 자기들이 언약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자기들의 능력을 너무 과대평가를 하고 있습니다. 인생이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미약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이 지구상에서 그래도 인생들이 만물의 영장이기 때문입니다
인생이 다 합니다.
문명의 꽃도 피우고 있고 또 이 지구의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고 있습니다. 또 때로는 자기들이 호언을 한 대로 이루어지는 일들을 보고 있기 때문에 자기를 너무 높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실제 이 지구에서는 인생들이 미물을 다 다스리기 때문에 그런 생각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너무 모릅니다.
자기가 어떤 존재인가를 너무 모르다 보니까 언약에 대해서도 쉽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아니 자기가 성장을 하면서 율법의 의를 가지다 보니까 언약을 다 지킬 수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인생들은 자기들이 뭔가 할 수 있게 되면 그때부터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기 보다는 노력에 의한 행위를 보게 됩니다.
에스겔16:22절을 보겠습니다. (구 1170쪽)
“네 어렸을 때에 벌거벗어 적신이었으며 피투성이가 되어서 발짓하던 것을 기억지 아니하고 네가 모든 가증한 일과 음란을 행하였느니라”
인생의 모습입니다.
어렸을 때 핏 덩이로 발버둥 거리던 것을 잊고 있습니다. 물론 부모가 있어 어린 아이를 잘 성장하도록 돌아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생 자체는 이 핏덩이와 같다는 것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이 핏덩이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하나님이 보실 때는 이렇게 핏덩이가 같은 인생들이 호기를 부리고 있습니다. 자기 행위가 조금 보이기 시작을 하면 핏덩이들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죽을 때 까지 이렇게 핏덩이로 살아가고 있는 인생들이 자기 처지를 모르고 있고 이 지구라는 틀 안에 갇혀서 만물의 영장이라고 떠들고 있습니다.
바로 나입니다
이 핏덩이가 나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지금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많은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고 있다 할지라도 우리 인생은 사단과 하나님의 사이에서 이 핏덩이 같은 존재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사단이 마음만 먹으면 이 핏덩이를 사망에 이르게 할 수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늘 같은 말씀입니다
나를 모르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은 거짓에 불과합니다. 성경을 통해 먼저 자기가 어떤 존재인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자기 존재를 너무 과대평가를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스스로 사망으로 끌려 들어가는 율법주의에 빠지게 된다는 것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가증한 일을 합니다.
그리고 음행을 합니다. 차라리 핏덩이로 있을 때는 하나님께서 잘 보살펴 주고 있는데 이 핏덩이가 무엇인가를 할 수 있을 때가 되면 어김없이 가증한 일을 하고 음란한 행위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스라엘은 자기들이 어떻게 음란한 행위를 했는가를 몰랐고 또 이 시대 역시 그것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반복이 됩니다.
구약에 이스라엘을 그대로 답습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 교인들을 보면 어쩌면 그렇게도 육적인 이스라엘이 되고 싶어 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됩니다. 그들이 어떻게 멸망을 했는가를 성경이 가르쳐 주고 있지만 역시 그들이 했던 그 일들을 하면서 음란을 행하고 있습니다.
왜 음란을 하고 있습니까?
그것은 언약에 대해서 바른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언약을 바로 이해를 하지 못하면 반드시 음란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교회에 나와서 이 언약에 대해서 바른 정립이 안 되어 있는 사람은 반드시 음란한 행위를 하게 되어 있고 그것이 자기들의 영혼을 사망케 한다는 것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음란이 무엇입니까?
두 남편을 섬기는 것을 음란이라고 합니다. 이 세상은 두 남편을 두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한 남편은 이 세상 사람들이 모두가 알고 있는 율법의 남편이고 다른 한 남편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 두 남편은 생명을 주기도 하고 빼앗기도 합니다.
정확하게 말씀을 드립니다.
율법의 남편은 생명과 사망이 있습니다. 온전히 다 지키면 생명을 주지만 만약에 조금이라도 흠이 있다면 반드시 진노가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율법이라는 남편의 기능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도 그랬고 이 시대도 역시 이 남편의 기능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음란한 행위를 하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율법의 남편에 대해서 오해를 합니다.
그것이 단지 자기들이 이 세상에서 조금 더 의롭게 사는 것에 대한 기능을 가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율법은 그런 기능이 아니라 생명과 사망이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율법에 대해서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느냐에 따라서 그 영혼이 결정이 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음란을 행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생명을 얻어야 합니다. 예수 안에는 생명만 있고 사망은 없습니다. 그러나 율법에는 생명과 사망이 함께 있고 이 세상에 어느 누구도 율법의 의로는 생명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이 성경의 정의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율법을 생명과 사망으로 받아들이지를 않고 있기 때문에 음란한 행위를 하면서도 그것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31:31-32절을 보겠습니다. (1102쪽)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하였음이니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대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옛 언약이 있었는데 이제 새 언약을 세우겠다고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와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 것과 같이 아니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언약이 둘입니다
먼저 언약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광야에서 이스라엘과 세운 언약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언약을 이스라엘과 하나님 사이에 맺고서는 이스라엘이 그 언약을 파기 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 이 문제인데도 오히려 그들은 율법에 더욱 빠져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첫 언약에 대해서 잘 알아야 합니다.
지금 이 시대 문제가 되는 것이 첫 언약입니다 물론 이스라엘도 이 언약으로 인하여 그들이 사망의 길로 갔지만 역시 이 시대도 첫 언약을 바로 깨닫지를 못하고 있어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언약을 누가 했는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두 가지의 언약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과 이스라엘과 언약을 한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언약입니다 사람과 하나님의 언약이 있고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일방적으로 하신 언약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상호 언약은 반드시 그 사람과의 언약입니다 그 언약은 다른 사람이 지킬 의무가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내가 보증을 섰습니다.
그것은 반드시 내가 지켜야 합니다. 그러나 내 형제가 보증을 선 것에 대해서는 내가 지킬 의무가 없습니다. 상호 언약이라는 것은 이렇게 언약을 한 당사자만이 지키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언약을 하지 않았는데도 그 언약을 지키겠다고 한다면 그는 멍청한 사람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내 형제가 보증을 섰다면 나는 그것을 지킬 의무가 전혀 없습니다. 물론 형제를 위해서 도와 줄 수는 있어도 그것에 대한 의무는 없다는 것을 먼저 생각을 하고 이 언약에 대해서 이해를 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자기들이 언약을 하지도 않은 것에 대해서 너무 열심을 내고 있고 그것이 자기 영혼을 사망에 빠뜨리게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바보입니다
자기 형제의 언약을 자기가 책임을 지겠다고 하는 것은 바보입니다 더구나 그것을 책임을 질 능력도 없는 사람이 그렇게 하겠다고 하는 것은 바보입니다 언약에 대해서 모르게 되면 이렇게 되고 또 율법주의에 빠지게 된다는 것을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먼저 첫 언약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출애굽기19:5-6절을 보겠습니다. (구 111쪽)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지니라”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왔습니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아직 율법을 반포하기 전입니다
율법에 대해서 말씀을 하시기도 전에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에게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로서는 너무도 좋은 말씀을 해 주시고 있습니다. 열국 중에 내 소유가 되겠고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고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반포하기 전에 너무 좋은 것을 먼저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셨습니까?
우리는 이것을 통해서 깨달아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이 시대 역시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해 준다고 하면 사람들은 정신이 거의 혼미해 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을 해 주신다고 하면 사람들은 자기들이 누구라는 것을 잊어버리게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대답을 보겠습니다.
출애굽기19:7-8절을 보겠습니다. (구 111쪽)
“모세가 와서 백성의 장로들을 불러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 그 모든 말씀을 그 앞에 진술하니 백성이 일제히 응답하여 가로되 여호와의 명하신 대로 우리가 다 행하리이다 모세가 백성의 말로 여호와께 회보하매”
모세가 율법을 반포를 했습니다.
그 율법을 이제 20장부터 말씀을 합니다. 그 율법을 반포를 하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일제히 응답해 우리가 여호와의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겠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도 첫 언약을 보는 사람들의 마음이 같다고 보면 맞습니다. 지금도 교회에 나와서 은혜를 받다가 율법을 보면 자기가 다 지키겠다고 다짐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다 지킬 수 있습니까?
이 세상 어느 누구도 이 율법을 다 지킬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자기들이 핏덩이라는 것을 모르고 율법을 너무 쉽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해 주겠다고 하니까 자기들이 어떤 존재인지도 모르고 이스라엘은 우리가 다 행하겠다고 대답을 하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대답을 합니까?
자기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고 하니까 정신을 못 차리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이 언약에 대해서 하지 말았어야 합니다. 아무리 좋은 조건을 제시 했더라 해도 이스라엘이 자기들이 어떤 존재인가를 알았다면 절대로 언약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거지 나사로 같으면 이 언약을 했겠습니까? 설령 이 이상의 조건을 제시 했다 하더라도 거지 나사로는 이 언약을 하지 않았을 것이 분명합니다. 내가 너무 약한 것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도둑질을 한다고 합니다. 자기가 아무리 안 하려고 해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어느새 도둑질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에게 하나님께서 이 조건을 제시 했습니다.
그리고 도둑질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이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하면 언약을 하겠습니까? 자기는 절대로 그 언약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얼고 있기 때문에 언약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언약을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일단 언약을 해 놓고 봅니다. 그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 줄을 모르고 언약을 일단 합니다.
달리기를 꼴찌 하는 학생이 있습니다.
그 학생에게 제일 좋은 컴퓨터를 사 주겠다고 하면서 달리기에서 일등을 하라고 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아마도 그 학생이 지금 장난하느냐고 하면서 도리어 화를 낼 것이 분명합니다. 컴퓨터 가지고 나를 놀리느냐고 하면서 내가 어떻게 달리기를 해서 일등을 할 수 있느냐고 하면서 놀리지 말라고 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일반 학생이 있습니다.
운동에는 전혀 소질이 없습니다. 그런 아이에게 금메달을 따며 연금을 주고 또 포상금을 10억 주겠다고 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마도 그 학생이 주기 싫으면 관두라고 하면서 도리어 그 제안을 한 사람에게 화를 낼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차라리 이야기를 하지나 말지 사람 가지고 장난을 치는 것이 분명합니다.
갈라디아서3:11절을 보겠습니다. (신 305쪽)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니라”
분명합니다.
율법을 다 행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이 율법을 듣고 다 행하겠다고 대답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이 시대 역시 성경을 보고 자기들이 이스라엘이 된 것으로 오해를 하고 율법을 지키겠다고 자기 마음에 다짐을 하고 있습니다.
안 됩니다
성경이 안 된다고 말씀을 하고 있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자기들이 다 지켜 행하겠다고 대답을 하고 있습니다. 어느 정도로 안 되는 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단 한 가지 살인하지 말라는 율법을 주면 그것을 지킬 수 있습니까? 아마도 거의 모든 사람은 자기는 지킬 수 있다고 대답을 할 것입니다
그것이 문제입니다
율법을 다 지킬 수는 없어도 그래도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 하지 말라 하는 것은 지킬 수 있다고 장담을 할 것입니다 아니 이 시대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에 교회에서 그렇게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이 지키고 있는 율법의 몇 가지 모양을 보면서 다 지켜 행하고 있다고 자부를 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말씀을 잘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율법을 다 지키는 것을 말씀을 하는 것이 아니라 단 한 가지의 율법으로도 우리는 의롭게 되지 못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아마도 제 말씀이 이해가 안 될 것입니다
그래도 내가 이성이 있는 사람인데 어떻게 단 한가지의 율법도 지킬 수 없다는 말을 할 수 있느냐고 따질 사람도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살인을 안 하고 살다가 죽는 사람이 많은데 어떻게 살인을 다 할 수 있느냐고 저를 이상하게 생각을 할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안 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이 몇 가지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성경학자들이 613가지로 말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이 일만 가지가 된다 해도 마찬가지고 또 단 한 가지라도 우리는 지킬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아직까지도 이 첫 언약에 매여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호세아6:7절을 보겠습니다. (구 1262쪽)
“저희는 아담처럼 언약을 어기고 거기서 내게 패역을 행하였느니라”
아담은 한 가지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613가지입니다 죄를 한 번도 안 져본 아담이 단 한가지의 첫 언약에 실패를 하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613가지가 아니라 단 한가지입니다 에덴에 있는 모든 실과는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고 하는 그 단 한 가지를 어겼습니다.
우리는 죄악의 종자입니다
아담이 단 한 가지의 언약을 어겼는데 우리가 살인을 안 할 수 있다고 생각을 하고 있다면 자기가 아담보다 더 대단한 존재로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스스로 신이 되겠다고 하는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지켜 주시고 있기 때문에 내가 살인을 안 하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지 내가 능력이 있어서 살인을 안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율법을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첫 언약에 대해서 우리는 바로 이해를 해야 합니다. 내가 지킬 수 있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몇 가지 지키고 있는 것을 보면서 마치 자기가 그것을 지킬 수 있는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핏덩이와 같은 존재라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율법에 대해서 우리 인생이 얼마나 연약한가를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왜 모릅니까?
자기가 몇 가지를 지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살인을 안 하니까 아담이 에덴에서 선악과를 따 먹은 것이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것입니다 죄를 한 번도 안 지어본 아담도 실패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것을 다 지켜 행하겠다고 대답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이 자기에게 얼마나 강한 존재인가를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첫 언약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에 대해서 모르다 보니까 이스라엘이 자기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고 하니까 그것을 듣자마자 고민도 하지 않고 모세에게 다 지켜 행하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도 율법을 보면서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다 지켜 행하겠다고 자기들의 마음에 스스로 다짐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골로새서2:14절을 보겠습니다. (신 326쪽)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성경을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율법 물론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에게 반포를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율법이 무엇인가를 성경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대적이 누구냐면 바로 율법이라는 말씀입니다
대적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율법이 대적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아니 그들이 모르는 것은 너무도 당연합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밝히 드러내셨는데도 그것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분명히 율법을 대적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받아들이려고 하지를 않고 있습니다.
에베소서2:15절을 보겠습니다. (신 312쪽)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원수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맺은 그 언약이 무엇이냐면 원수라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율법에 대해서 이 시대는 너무도 모르고 있습니다. 그 율법이 우리의 대적이고 또 우리의 원수가 된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원수 된 것을 모르는 것이 어쩌면 너무도 당연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닙니다.
성경이 분명히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맺은 첫 언약이 어떤 것인가를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제가 율법을 전혀 보지도 말고 연구도 하지 말라고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우리는 율법이라는 그림자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깨달아야 하기 때문에 율법을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육적으로는 원수입니다
그리고 대적입니다 자기들의 원수고 대적이라는 것을 이스라엘이 알았다면 과연 첫 언약을 하나님과 그렇게 쉽게 맺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고 하니까 그것이 너무 좋아서 율법에 대해서 생각도 하지 않고 지키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율법이 왜 우리의 원수고 대적인가를 성경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로마서7:10절을 보겠습니다. (신 248쪽)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언약의 기능입니다
성경에서 말씀을 하고 있는 첫 언약에 대한 기능입니다. 그 첫 언약은 생명에 이르게도 하고 또 사망에 이르게도 한다는 말씀입니다 율법의 기능은 다른 것이 없습니다. 갈라디아에서는 분명히 의롭게 되지 못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의롭게 되지 못한다는 말씀은 사망을 당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율법을 바로 알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의 기능은 이것입니다 생명 얻느냐 사망을 당하느냐 입니다. 이 기능을 모르면 다 죽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주셨다고 다 좋은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율법도 거룩한 것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것은 율법으로 죄를 깨달았을 때입니다 이 문제가 교회 안에 들어와 있는 사람들에게 바른 정립이 되지 못하면 결국 첫 언약에 의해서 모두가 사망에 이른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율법 분명히 생명을 줍니다.
그러나 또한 사망을 준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율법은 내가 지켜도 되고 안 지켜도 되고 하는 그런 문제의 것이 아닙니다. 율법을 내가 단 한 가지라도 지키는 순간에는 아담과 같이 생명이냐 사망이냐를 따지게 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것이 첫 언약입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아직도 첫 언약에 대해서 너무 모르고 있고 그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아담이 선악과를 안 따먹었으면 생명나무 과실을 먹고 영생을 했을 수 있었지만 선악과를 따 먹는 순간 사망이 그에게 찾아왔습니다. 율법의 기능이 이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도로서 의롭게 산다고 말 합니다
아니 기쁨으로 이 율법을 지킨다고 말 합니다. 그런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사람들이 지어낸 말장난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로마서에서 분명히 율법은 생명에 이르게 하는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율법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다고 사도 바울이 정의를 내려 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몰랐습니다.
몰랐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께서 내 백성이 되고 제사장 나라가 되게 해 주신다고 하니까 율법의 기능을 모르고 그것을 언약을 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만약에 그들이 율법의 기능에 대해서 알았다면 절대로 율법에 대해서 언약을 하지 않을 것이 너무도 분명합니다.
이스라엘은 불행합니다.
사실 그들이 애굽에서 나와서 이 율법을 주실 때 율법의 기능이 무엇이라는 것을 알기가 쉽지가 않습니다. 그럴지라도 그들은 율법에 대해서 조금 더 심사숙고를 했어야 했는데 그것을 모세를 통해 말씀을 하자마자 자기들이 어떤 존재라는 것을 모르고 다 행하겠다고 언약을 하고 있습니다.
신명기30:19-20절을 보겠습니다. (구 311쪽)
“내가 오늘날 천지를 불러서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말씀을 순종하며 또 그에게 부종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시니 여호와께서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하리라”
율법은 그림자입니다
물론 다 영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율법은 생명과 사망이 있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이제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에 모세가 마지막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율법에 대해서 이스라엘에게 분명하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잘 이해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시고 난 후에 그들이 언약을 했을 때 그들이 모두가 사망을 당할 것을 너무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살리기 위해서 바로 성막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너무 모르고 있었고 율법에 대해서도 너무 몰랐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생명과 사망이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실제 그들이 광야에서 율법을 어겼을 때 하나님께서는 율법대로 그들을 죽이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안식일을 어긴 사람을 모든 회중이 돌로 쳐 죽이는 것을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욱 이스라엘은 율법을 자기 육체로 지키는 것에 빠져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림자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실체로 보고 있었습니다. 율법에 대해서 생명과 사망이 있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난 후에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말씀을 순종하며 또 그에게 부종하라 그러면 너희들이 가나안 땅에 거할 수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보고 거의 모든 사람들이 율법을 잘 지키려고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이 무엇을 요구하는 가를 성경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하는 줄을 몰랐습니다. 지금 이 시대도 역시 이스라엘과 같이 율법을 보면서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말하니까 율법을 잘 지키라고 말씀을 하는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는 사람들의 너무도 많이 있습니다.
요한일서5:3-4절을 보겠습니다. (신 393쪽)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우리의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그의 계명은 무거운 것이 아니라고 분명히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은 무거운 계명이라고 성경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 절에 그의 계명이 무엇인가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입니다.
성도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그의 계명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생명을 얻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아닙니까? 그러나 이스라엘은 자기들이 율법을 잘 지켜서 하나님을 사랑하려고 했습니다. 그 결과는 율법으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어서 모두가 사망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신명기에서 말씀을 하는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씀을 이스라엘은 깨닫지를 못 했습니다.
이스라엘만 그렇습니까?
지금 이 시대도 신명기를 보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모세를 통해서 율법을 반포한 그것을 잘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이 있습니다. 생명과 사망이 있는데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무거운 율법을 지키다가 의롭게 되지 못해서 사망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성막을 통해 보여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생명을 얻는 그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임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무엇이 사랑하는 것입니까?
내 생명이 죽는 것이 사랑하는 것입니까? 내가 정말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다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내 생명이 구원을 얻어야 하는 그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율법을 통해서 그것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그 율법을 잘 지켜서 자기들이 생명을 얻으려고 하다가 결국에는 의롭게 되지 못해서 다 사망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그의 말씀에 순종하며
이런 말씀에 거의 다 넘어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모세가 지금 하고 있는 말씀을 우리가 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의 말씀에 순종을 하라는 것이 율법을 지키라는 것입니까? 율법을 지켜서는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성경이 분명히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신명기의 말씀을 보면서 순종하라고 하니까 그 말만 보고 있습니다. 그 뒤에 분명히 가나안 땅에 거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순종이 율법의 순종입니까?
아마 신명기의 이 말씀을 보면서 거의 다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에 순종을 해서는 절대로 가나안 땅에 거할 수 없습니다. 그의 말씀이라고 하니까 율법으로 생각을 하고 있고 또 순종이라는 단어가 나오니까 자기 몸으로 순종을 하려고 하면서 율법을 지키는데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 역시 그렇게 살다가 이스라엘과 같이 망하는 길로 가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2:7-8절을 보겠습니다. (신 378쪽)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의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또한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었다 하니라 저희가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저희를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
그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율법을 지키라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율법에 순종을 한 이스라엘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어서 다 사망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성막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하는데 이스라엘은 율법에 순종을 함으로 해서 스스로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가나안 땅에 거하려면 어떻게 순종을 해야 합니까?
그것은 율법에 순종을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율법을 주셨지만 그것에 순종을 해서는 절대로 가나안 땅에 거할 수 없다는 것을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명기 30장의 말씀을 보면서 이스라엘은 율법에 더욱 순종을 했고 지금 이 시대도 율법에 순종을 하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말씀에 순종치 아니하였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도 말씀에 순종치 아니하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율법에는 어린 양과 같이 아주 잘 순종을 하면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말씀에는 대적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도 율법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는 분명히 부딪치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말씀에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율법을 아무리 잘 지킨다 해도 율법으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다고 정의를 내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율법을 지켜서 의롭다 함을 얻어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면 분명히 율법을 지켜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사망으로 끌고 간다고 로마서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오직 믿음입니다.
그것만이 말씀에 순종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믿음이 있는 성도만이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에서도 저희가 믿지 않아서 광야에서 죽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믿으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을 하지 않고 역시 이 시대도 이스라엘의 길을 따라서 율법에 순종을 하고 있습니다.
또 그에게 부종하라
그에게 충성을 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충성이라는 단어도 율법을 지키라고 하는데 사람들이 너무 많이 사용되어 지고 있습니다. 충성하라고 하니까 맹목적으로 율법을 지키고자 하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이 있습니다. 거듭 말씀을 드리지만 신명기 30장의 말씀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 사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충성이 무엇입니까?
이 세상의 이성적 지식으로 성경을 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물론 그의 말대로 하는 것이 이 세상의 충성입니다 그가 말한 그대로 행하는 것이 충성이라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말한 그대로가 무엇인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것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 거하는 것입니다 가나안에 거하려면 어떻게 충성을 해야 하는 가를 우리가 생각해야 합니다.
성경을 문자로 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왜 이 말씀을 했는가 그리고 앞뒤에 어떤 말씀이 있는가를 늘 살펴야 성경을 바로 볼 수 있습니다. 신명기30장에 생명과 사망에 대해서 그리고 가나안 땅에 거하는 것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영혼 구원을 받아 천국에서 사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 충성을 율법을 잘 지키는 것으로 또 교회 안에서 신앙생활을 잘 하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이 있습니다.
내가 천국에 가려면 무엇이 있어야 합니까?
내 안에 반드시 생명이 있어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거하는 것과 같이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새 생명이 있어야 합니다. 이 생명이 없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모든 사람이 볼 때는 하나님께 정말로 충성을 하는 사람과 같이 보일지라도 그는 반역을 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충성을 했다면 반드시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살아야 합니다.
마태복음25:21절을 보겠습니다. (신 44쪽)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달란트의 비유입니다
이 충성된 종이 무엇에 충성을 했습니까?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생명을 얻는데 있어 충성을 했습니다. 이 충성은 우리 몸으로 하는 그런 충성이 아니라 진리 안에 있어 내 안에 새 생명이 탄생이 되게 하는 것을 충성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충성을 안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육적으로는 너무 충성을 잘 하고 있습니다. 자기 먹을 것 안 먹고 입을 것 안 입으면서 까지도 충성을 하고 있지만 실제 그들이 천국에 들어가야 하는 충성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내 육체적인 행위로 충성을 해서는 절대로 가나안 땅에 거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생명입니다
반드시 생명이 있어야 우리는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이 시대는 생명에 대해서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아니 미혹이 되어서 자기가 교회 안에 있는 그것을 보면서 마치 생명을 얻는 것으로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전혀 믿음의 비밀을 모르고 있는 사람들이 세뇌가 되어서 자기가 믿음이 있어 천국에 들어가는 것으로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첫 언약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가나안을 목전에 두고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어떻게 해야 하는 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자기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고 또 어떻게 그의 말씀에 순종을 해야 하고 또 어떻게 충성을 해야 하는 줄을 몰랐습니다.
다 가르쳐 주셨습니다.
성경은 이미 그들에게 어떻게 해야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는 가를 가르쳐 주고 있지만 자기들이 생각도 하지 않고 언약을 맺은 첫 언약에 매여서 거기서 빠져 나오지를 못하고 결국에는 율법에 의해서 진노를 받는 불행한 민족이 되었습니다.
이제 첫 언약을 어떻게 맺었는가를 보겠습니다.
출애굽기24:3절을 보겠습니다. (구 119쪽)
"모세가 와서 여호와의 모든 말씀과 그 모든 율례를 백성에게 고하매 그들이 한소리로 응답하여 가로되 여호와의 명하신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모세가 여호와의 모든 말씀과 그 모든 율례를 전했습니다.
출애굽기 20장에서는 십계명이 있고 그 뒤로 율법과 절기에 대한 말씀들이 있습니다. 이 말씀을 백성들에게 전하니까 백성들이 자기들을 하나님의 백성을 삼아주고 제사장 나라가 되게 해 주시겠다고 하니까 생각하지도 않고 모두가 한 목소리로 응답하여 여호와의 명하신 말씀을 준행하겠다고 대답을 하고 있습니다.
한 목소리입니다
한 사람도 그것에 대해서 내가 못 지키겠다고 대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 율법의 결과가 어떻게 된다는 것을 모르고 이스라엘은 그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제사장 나라가 되고 이 세상에서 으뜸이 되는 민족이 된다고 하니까 자기들이 다 준행을 하겠다고 대답을 합니다.
이스라엘만 그렇습니까?
안타까운 것은 이 시대 교인들도 이 출애굽기를 보면서 이스라엘과 똑 같이 자기들이 다 준행을 하겠다고 마음으로 다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은 안 된다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지금도 사람들은 할 수 있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못 하면 어떻게 됩니까?
사망이라는 것을 성경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단순히 율법을 지키느냐 안 지키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율법은 생명이냐 사망이냐는 것을 가져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율법을 몰랐습니다. 또 신명기 30장에서 말씀을 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 가를 몰랐습니다.
그리고 언약을 했습니다.
출애굽기 24:7-8절을 보겠습니다. (구 119쪽)
“언약서를 가져 백성에게 낭독하여 들리매 그들이 가로되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모세가 그 피를 취하여 백성에게 뿌려 가로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
이스라엘이 언약을 했습니다.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피로서 언약을 했다는 말씀입니다 피로 언약을 했다는 것은 생명을 걸고 언약을 했다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이 율법을 다 준행하겠다고 했을 때 그것을 지키지 못할 때는 피를 요구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겁이 없습니다.
지금 이 시대도 역시 교회에만 나오면 사람들은 이성을 잃어버리고 겁이 없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자기들이 지키고 있는 율법이 어떤 결과를 가지고 오는 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언약은 이렇게 생명을 걸고 하는 것임을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두 가지 언약이 있습니다.
첫 언약도 생명을 걸고 있고 두 번째 언약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첫 언약은 사망이 함께 있고 두 번째 언약은 생명만 있다는 것을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 첫 언약을 지키고자 하는 사람은 반드시 이 언약이 어떻게 맺어지고 있는 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피로서 언약을 맺은 것임을 바로 알고 이 언약을 내가 행해야 하는 가 그렇지 않은 가를 냉정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지키지 못 합니다.
세상에는 이 첫 언약으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다고 분명히 가르쳐 주고 있지만 이스라엘은 이 첫 언약에 대해서 피로 맺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이 첫 언약에 매이는 순간 모두가 사망에 이른다는 것을 아시고 바로 뒤에 성막을 그들에게 주시고 있습니다. 이 첫 언약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이스라엘을 살리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을 바로 보여 주시고 그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게 은혜를 주셨습니다.
이제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이 언약을 누가 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 시대 교인들이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이 언약이 자기들과 상관이 있는 것으로 오해를 하면서 이스라엘의 육의 모습을 따라가는 어리석은 일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3:23절을 보겠습니다. (신 40쪽)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이 시대 가장 문제가 되는 말씀 중에 하나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에 걸림이 되어서 율법을 지키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너희가 근체와 박하와 회향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잘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율법이 폐해졌습니까? 안 폐해졌습니까?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율법이 폐해졌다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율법인 십일조를 말씀을 하면서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 때문에 지금 한국교회가 다 십일조를 드리고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더구나 율법인 십일조를 율법이 아니라 믿음이라고 이상한 논리를 말하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출애굽기 24장에서 누구와 누가 언약을 했습니다.
이스라엘과 하나님이 언약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십일조의 율법을 지키라고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만약에 그렇다면 우리는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 십일조를 내야 한다면 우리는 절대로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왜 이렇게 말씀을 합니까?
이 십일조에 대한 율법은 이스라엘과 하나님이 피로서 맺은 언약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아직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이므로 이 언약에 대해서 예수님이 폐할 수 없기 때문에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언약을 한 것을 예수님이 페할 수 있습니까? 물론 나중에 십자가로서 이것을 폐하셨지만 지금 살아서 계실 때는 율법을 폐하시지 않았기 때문에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첫 언약은 폐해졌습니다.
골로새서와 에베소서에서 그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분명히 이 언약이 폐해 졌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왜 주님께서 이 첫 언약을 폐하셨느냐면 그것으로는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자기 육체로 그것을 폐하시고 우리에게 새 언약을 주셨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히브리서8:7절을 보겠습니다. (신 360쪽)
“저 첫 언약이 무흠하였더면 둘째 것을 요구할 일이 없었으려니와”
첫 언약은 우리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만약에 첫 언약으로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었다면 새 언약이 우리에게 필요치 않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첫 언약으로는 아무도 구원을 받을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은 흠이 있는 언약이기 때문에 새 언약을 우리에게 주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으로는 안 됩니다.
이 율법을 지켜도 되고 안 지켜도 되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율법은 생명과 사망을 주는 기능이 있기 때문에 내가 그것을 지키고 있는 순간에는 우리도 이스라엘과 같은 언약을 하는 것과 같이 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언약은 반드시 흠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사망을 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성경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율법은 죄가 드러납니다.
죄가 드러나는 상태에서는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갈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물론 성막에서 제사를 통해 그들의 죄를 사하는 의식을 행하기는 했지만 그것으로는 흠이 없을 수 없다는 것을 성경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첫 언약은 안 됩니다
어떤 방법으로 해도 첫 언약으로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성경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물론 첫 언약에 대한 의미를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첫 언약을 그림자로 보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보고 있어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8:12-13절을 보겠습니다. (신 361쪽)
“내가 저희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저희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새 언약이라 말씀하셨으매 첫 것은 낡아지게 하신 것이니 낡아지고 쇠하는 것은 없어져 가는 것이니라”
새 언약을 주셨습니다.
첫 언약은 죄가 생각이 나게 만들고 있습니다. 율법 아래 있으면 반드시 죄가 생각이 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두 번째 언약을 세우시고 저희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않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첫 언약은 어떻게 해도 죄가 생각이 나는데 둘째 언약은 아예 죄가 생각나지 않게 하셨습니다.
첫 것은 낡아 졌습니다.
폐해졌다는 말씀입니다 낡아지는 것은 쇠하고 그것은 없어져 가는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없어져 가는 것을 지금 이 시대 교인들이 교회 안에서 그것을 행위로 지키고 있습니다. 첫 언약으로는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새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예레미야31:33절을 보겠습니다. (구 1102쪽)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날 이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첫 언약은 의문에 쓰고 돌로 써서 법궤 안에 두었습니다. 그러나 새 언약은 하나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새 언약입니다.
여기서 말씀을 하고 있는 이스라엘은 육적인 이스라엘을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이스라엘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과 새 언약을 세워서 하나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고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서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첫 언약은 폐해 졌습니다.
이스라엘은 첫 언약을 자기들이 지키겠다고 했지만 그것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더 이상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예레미야를 통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너무 중요한 말씀입니다. 누구의 하나님이고 누가 하나님의 백성인가를 분명히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쇠하고 사라져 가는 그것을 언약으로 삼고 있는 자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첫 언약을 어떻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시고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지키면 내 백성이 되리라고 하시면서 그들과 피로서 언약을 했습니다. 그것은 돌 판에 새긴 십계명과 그리고 글로 기록해 놓은 율법 책이었습니다. 그들은 실패를 했기 때문에 더 이상 그들의 하나님이 아니고 또한 그들도 하나님이 백성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법이 그들의 속에 있고 마음에 기록되어 있어야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또한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과 다른 새 언약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언약을 자기 속에 두지 않고 있고 또 마음에 두지도 않고 있습니다.
그 법이 무엇입니까?
로마서3:27절을 보겠습니다. (신 243쪽)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믿음의 법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우리를 거스르고 대적을 하는 첫 언약을 폐하시고 이제 새 언약을 주시고 그것을 마음으로 믿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시대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밝히 보고 있으면서도 믿음의 법이 그들의 마음에 없습니다.
안 믿습니다.
아직까지도 첫 언약에 매여 있습니다. 이 두 언약을 함께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분명히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첫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폐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영적인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하나님의 법을 성도들의 속에 두고 성도들의 마음에 기록하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26:27-28절을 보겠습니다. (신 46쪽)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두 번째 언약은 예수님의 피로 세우셨습니다.
첫 언약은 이스라엘과 하나님 사이에 양을 잡고 그 피로 언약을 세웠지만 이제 두 번째 언약은 예수님의 피로 세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을 위해 흘리는바 언약의 피라고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언약과 두 번째 언약은 다릅니다.
첫 번째 언약은 이스라엘이 다 지켜 행하겠다고 하고 나서 하나님과 피로서 언약을 했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언약은 우리의 어떤 동의도 없이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언약을 해 주셨습니다. 첫 번째 언약은 그 언약을 한 당사자가 반드시 지켜야 하는 언약이고 두 번째 언약은 우리에게 아무 것도 요구하는 것이 없이 이 언약의 피를 믿으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안타깝습니다.
사람들은 이 두 번째 언약을 믿기 보다는 아직까지도 첫 번째 언약을 지키려고 하고 있습니다. 자기들이 언약을 하지 않은 것을 이 시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그것을 어렵게 지키면서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더 쉬운 두 번째 언약이 있는데 사람들은 너무 쉬워서 그것을 믿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 속에 있는 믿음의 법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에 우리를 위해서 피를 흘리심으로 우리 죄를 깨끗하게 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이 피를 마시기를 거절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첫 언약의 행위를 그대로 하고 있습니다.
언약입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계약을 할 때도 첫 번째 언약을 했다가 다시 언약을 할 때는 이제 첫 번째 언약은 모든 시효가 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새 계약서가 쓰여 있는데 아직도 옛날 계약서대로 하고 있다면 그것은 새 계약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집을 지었습니다.
물론 그 집을 죽을 때 까지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정이 생기면 집을 사고 팔 수 있습니다. 계약에 의해서 사고팝니다. 그런데 10년 전에 누군가가 사고팔았고 주인이 몇 번 바뀌었습니다. 십년 전에 계약서를 가지고 와서 이 집이 내 집이라고 주장을 한다면 그는 아마도 정신이 이상한 사람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 계약서는 가지고 있어도 쓰레기입니다
그 계약서는 새 계약이 어떻게 되어졌는가를 누가 이 집에 살았었는가를 아는 정도의 역할 밖에는 못 합니다. 그 계약서를 가지고 지금 그 계약이 살아 있다고 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마도 미친 사람이라고 하면서 그 집 주인이 쫓아 낼 것이 분명합니다. 바로 첫 언약과 두 번째 언약이 그렇다는 것을 우리가 깨달아야 합니다.
율법은 그림자입니다
쓰레기 보다 못한 그림자입니다 이제 참 빛이 비추니까 그림자는 온데 간데 없어졌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 시대 많은 사람은 그 그림자를 보고 있습니다. 정말로 안타까운 것은 아직도 첫 언약을 지키려고 하고 있고 그것을 안 지키면 심지어는 이단이라고 공격을 하고 있습니다.
새 언약을 우리 마음에 두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십자가의 피를 믿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믿음의 비밀을 모르기 때문에 아직까지도 이스라엘과 같이 쇠하고 없어지는 그 첫 언약에 매여서 스스로 사망의 길로 가고 있습니다.
더구나 이 첫 언약은 우리가 한 언약도 아닙니다.
이스라엘과 하나님이 한 언약입니다 남의 집 계약서를 가지고 그것도 쇠하고 없어져 가는 계약서를 가지고 지금 이 시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그것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바보가 아닌 이상에는 첫 언약을 지키겠다고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옛 계약서를 가지고 내 집이라고 하면 누가 그 집을 내어 주겠습니까?
지금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이미 파기가 되어 있는 계약서를 가지고 그것을 보면서 자기들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 옛 언약을 하나라도 지키고 있는 사람은 절대로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제 두 번째 언약은 우리가 행위로 지키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대속의 피를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마음에 있는 믿음이 법입니다
히브리서9:20절을 보겠습니다. (신 362쪽)
“이르되 이는 하나님이 너희에게 명하신 언약의 피라 하고”
피는 언약을 할 때 사용하는 것입니다
첫 번째 언약에도 피가 들어갔고 두 번째 언약에도 피가 사용 되었습니다 첫 번째 언약에는 짐승의 피가 사용되었고 두 번째 언약은 예수님의 피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첫 번째 언약이 흠이 있어서 우리를 구원할 수 없다고 히브리서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것으로 하지 않으시고 예수를 믿음으로 하신 원인이 있습니다.
이 첫 언약을 세우고 이스라엘 백성 모두가 다 행하겠다고 맹세했지만 이 언약은 실패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첫 언약으로 주신 언약은 모든 사람이 실패 했습니다 아담으로부터 이스라엘 모든 백성이 다 실패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첫 번째 언약을 주셨을 때 그 언약을 그들이 모두 지킨다고 했지만 실패 했습니다
아담은 한 번도 죄를 안 져본 사람입니다
죄를 안 져본 사람도 첫 언약에 실패 했습니다 죄를 져 보지도 않고 모르던 자가 첫 언약에 실패 했는데 실패한 언약을 또 주고 우리를 살리시겠습니까? 우리에게 주면 또 우리도 실패 할 것 아닙니까? 아담도 실패했는데 우리가 어떻게 승리 할 수 있겠습니까?
히브리서7:22절을 보겠습니다. (신 360쪽)
“이와 같이 예수는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느니라”
예수님은 새 언약의 보증이 되셨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가 죄로 원수가 되었는데 중간에 중보자가 계서서 우리를 화해 시키셨습니다. 하나님께나 우리 편에서나 완전한 화해를 하게 하셨습니다. 새 언약은 예수님께서 자기피로 우리를 건지신 것입니다 이렇게 하실 것을 예언 했습니다.
예레미야가 예언을 했습니다.
이제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 것과 같지 않은 더 좋은 언약을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세우시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첫 언약은 반드시 폐해야 합니다. 만약에 아직도 첫 언약에 속한 것을 우리가 행위로 하고 있다면 그는 절대로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해서 그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예레미야31:34절을 보겠습니다. (구 1102쪽)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새 언약을 받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새 언약을 주셨습니다. 그 언약을 우리가 지금 마음으로 믿고 있습니다. 이렇게 마음으로 믿는 성도를 하나님께서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또 하나님의 백성, 성도라 부르시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이제는 굳이 하나님을 알라고 하지 않아도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임재를 하셔서 모든 진리가운데로 인도를 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가고 있습니다. 이 새 언약을 통해서 우리가 완전한 자가 되어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믿게 역사를 해 주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얼마나 감사합니까? 새 언약은 우리의 죄를 우리가 용서를 하기도 전에 사해 버리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가 죄를 자백하기도 전에 아니 우리가 죄를 짓기도 전에 그것을 사해 버리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는 이제 사라지는 첫 언약을 버리고 이제는 두 번째 언약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를 믿어야 합니다.
그 언약은 우리 죄를 기억지 않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죄를 짓기도 전에 내 죄를 기억지 않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 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언약의 피라는 말씀입니다 너무도 감사하고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은혜가 얼마나 큰 가를 쉽게 알 수 있는데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죄를 짓기도 전에 그 죄를 사해 버리시고 또 기억지 않는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그러나 이 둘째 언약을 믿지를 못하고 있고 아직까지 사라져 가고 있는 첫 언약을 지키느라 교회 안에 교인들이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첫 언약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과 하나님 사이에 피로서 맺은 언약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이것을 지키지 못해서 파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 옛 언약을 버리고 우리 속에 둔 믿음의 법에 따라 새 언약을 마음으로 믿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은혜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첫 언약은 폐해 졌습니다.
이제 우리에게는 더 좋은 언약이 있습니다. 그것은 돌에 쓴 것도 아니고 또 의문에 쓴 것도 아닙니다. 우리 마음에 성령께서 임재를 하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언약의 피를 믿게 감동을 해 주고 있습니다. 첫 언약을 폐하고 이제 새 언약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천국에 들어가서 모든 축복을 누리는 성도가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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