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14:19절을 보겠습니다. (신 259쪽)
“이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나니”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시기 바랍니다.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하고 있는 말씀이 아니라 구원을 받은 우리 성도들에게 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교회 안에 있는 자기들이 그리스도를 섬긴다고 하면서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대적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섬깁니까?
그것을 모릅니까? 로마서14장을 보고도 그것을 모른다면 그는 아직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 성도가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섬길 수 있는가를 아주 자세하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성경을 보면서도 어떻게 섬겨야 하는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어떻습니까?
앞뒤에 있는 말씀은 전혀 보지를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섬기라는 그 말씀만 가지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이로써 섬기라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앞에서 말씀을 하고 있는 이로써를 모르고 그저 막연하게 섬기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의 이성입니다
그것으로는 그리스도를 섬길 수 없습니다. 세상에서 그가 아무리 지혜가 있다 해도 그리스도를 섬길 수 없습니다. 이 시대를 보더라도 그리스도를 섬기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그저 세상 초등학문에 빠져 사람의 이성을 가지고 자기들이 생각에 따라 이렇게 섬기면 된다고 생각을 하고 섬기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대로 하시기 바랍니다.
성경에서 이렇게 섬기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냥 막연하게 섬기라고 하지 않고 정확하게 섬기는 것을 말씀을 하고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성경을 보면서도 이로써 섬기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이성적 판단을 가지고 그리스도를 섬기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도의 교제입니다
우리 성도가 이 세상에서 아니 교회 안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가르쳐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왜 이 말씀을 하고 있는가 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복음을 듣고 믿는 성도들이 절대로 망하는 길로 가게 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아니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해서 죽으신 형제를 망하게 하는 일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가 교회 안에서 어떤 행위를 조금 실수하는 것은 용납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 형제가 나로 인하여 망하게 된다면 그것은 너무 안타까운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막기 위해서 사도 바울을 통해서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지금 이 시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가 거의 없습니다. 그것은 너무도 당연합니다. 그들은 복음을 아예 듣지를 못하고 있기 때문에 이로써 섬기고 싶어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런 불행한 일을 하고 있으면서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도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듣고 믿고 있는 성도입니다 이 복음을 듣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이 복음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됩니까? 우리가 복음을 전해도 종교에 빠져 있는 사람들은 듣지를 않고 있습니다.
바다모래 같습니다.
그 중에서 아주 적은 수의 사람이 이 복음을 듣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형제를 망하게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복음을 듣는 사람이 아주 많다면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에게 이 말씀을 하라고 하시지 않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적습니다.
적어도 아주 적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복음을 들었습니다. 그렇게 복음을 들은 성도가 얼마나 귀하겠습니까? 사실 복음을 전하는 저 역시도 이 복음이 얼마나 무미건조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복음을 듣고 믿고 있습니다. 그런 성도가 하나라도 망하게 된다면 그것은 너무도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만 명 중에 백 명이 듣습니다.
그것도 귀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천만 명 중에서 겨우 몇 십 명이 듣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 성도가 얼마나 귀하겠습니까? 이것을 너무도 잘 알고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이 무엇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을 드립니다.
복음을 듣고 믿는 성도는 아주 적습니다. 정말 한 영혼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기적과도 같은 일입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 중에서 구원을 받는 성도를 센다면 얼마나 귀하겠습니까? 아마도 번개를 맞을 확률보다 더 낮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어렵게 복음을 들었는데 우리가 그리스도를 잘못 섬긴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어떻게 섬겨야 합니까?
이로써 섬겨야 합니다. 그것을 로마서14:13-17절까지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말씀을 하고 있고 그것을 섬기는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섬김으로 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도 칭찬을 받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무엇으로 기뻐하십니까? 그 어느 것으로도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단 한 가지 우리가 구원을 받는다면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우리 구원을 받은 성도를 통해서 어느 한 사람도 망하지 않는다면 그 또한 기뻐하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구원입니다
정말 아무리 강조를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을 다 얻었다 해도 구원이 없다면 그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아무 것도 얻지 못했다 해도 구원을 받았다면 그는 모든 것을 얻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기뻐하심을 받습니다.
또한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습니다. 얼마나 칭찬을 받을 일입니까?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가 구원을 받을 수 있게 그리스도를 섬기면서 살아가고 있다면 그로 인하여 구원을 받는 사람은 아무리 칭찬을 해도 아깝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교회 안에서 행위를 잘 해서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바람에 날리는 겨와 같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잘 섬김으로 해서 내 형제가 구원을 받는다면 그 형제는 아무리 칭찬을 해도 아깝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구원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 화평을 도모하는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에 힘을 씁시다.”
성도입니다
구원을 받은 우리 성도들에게 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섬겨야 하는가를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로마서14장13-18절까지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라고 말씀을 해 주고 있습니다.
이로써 섬기는 성도입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섬긴다는 이야기를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시대는 자기들의 겸손의 모양을 나타내기 위해서 자기가 섬기고 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섬긴다는 말은 거의 하지 않고 교회를 섬긴다는 말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교회를 섬깁니까?
그 말은 내가 교회와 간음을 하고 있다는 말과 같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성도는 사도 바울이 로마서14장에서 말씀을 하는 그대로 그리스도를 섬기고 있습니다. 그런 성도가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받고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듣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섬기는 성도입니다
그런 성도들에게 이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에 힘쓰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일을 하는 그것으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에 힘쓰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성도입니다
성도는 교회 안에서 이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더구나 복음을 다 듣고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믿음이 있는 성도는 이렇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이러한 일은 하지 않고 자기들의 이성에 따라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를 섬기고 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섬긴다는 말보다는 교회를 섬긴다는 말을 더 많이 하고 있습니다.
왜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구원입니다 교회 안에는 여러 사람이 있습니다. 복음 안에서는 하나가 되어 있지만 삶에 대해서는 약간의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사도바울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성도들에게 그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에 힘쓰자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시편120:7절을 보겠습니다. (구 897쪽)
“나는 화평을 원할지라도 내가 말할 때에 저희는 싸우려 하는도다”
고린도후서6:14-15절을 보겠습니다. (신 292쪽)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화평
개인 간이나 나라 사이에 충돌이나 다툼이 없이 평화로운 상태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에 힘쓰자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누구에게 하고 있는 말씀인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은 성도들에게 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로마서14장은 구원을 받은 성도들의 삶입니다.
화평에 대해서 잘 알아야 합니다.
세상은 적이라도 언제든지 자기들의 필요에 따라 화평할 수 있습니다. 실제 그러한 일이 너무 많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내 적이지만 다른 적과 싸움을 할 때는 적의 적이 되어서 오히려 화평을 함으로 해서 싸움에서 유리하게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 그렇습니다.
자기가 싸움에서 질 것 같으면 어떻게 해서라도 화평을 하려고 합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이성적으로 알고 있는 상식이고 세상을 살아갈 때는 필요에 따라서 이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실제 우리의 삶에서 이러한 일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성경입니다
우리의 영의 일을 가르쳐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화평에 대해서 성경이 어떻게 말씀을 하고 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저 세상의 상식만을 생각해서는 안 되고 성경이 말씀하는 것을 알고 이 화평에 대해서 말을 하고 또 화평의 일에 힘써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아무나 화평합니까?
세상은 그것이 가능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의 일은 절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어야 합니다. 세상은 아무리 원수가 되어 있어도 때로 얼마든지 화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모르고 화평이라는 단어만 생각을 하다가는 도리어 망하는 길로 갈 수 있습니다.
시편입니다
나는 화평을 원할지라도 내가 말할 때에 저희는 싸우려 하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복음을 세상에 전하고 있습니다. 아니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이스라엘에게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복음을 전하자 이스라엘은 주님과 싸우려고 했습니다. 아니 진짜 싸움이 되어서 결국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는 악을 행하고 말았습니다.
영의 일이 그렇습니다.
내가 화평을 원한다고 상대가 화평을 받아들입니까? 복음을 알고 있다면 절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사람들끼리는 혹시 화평할 수 있을지 몰라도 우리 복음을 가지고 있는 성도와는 우리가 화평을 원할지라도 그들이 싸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복음을 전합니다.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된다고 생각합니까? 시편의 말씀과 같이 저희는 반드시 싸우려고 합니다. 왜 싸우려고 하는가 하면 우리가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악하다고 말을 하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지키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말을 하기 때문에 당연히 싸우려고 합니다.
아무나 화평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아무리 선한 마음으로 복음을 전할지라도 율법주의에 있는 사람들은 반드시 싸우려고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무에게나 화평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가 화평을 원한다고 해서 그것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을 고린도후서에서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믿는 자입니다 그리고 믿지 않는 자입니다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느냐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함께 할 수 없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화평입니까?
우리가 믿지 않는 자와 화평할 수 있습니까? 절대로 화평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제가 복음을 전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럴지라도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복음을 전하더라도 지혜롭게 해야 합니다. 이미 율법주의로 인하여 이익을 취하고 있는 자에게 복음을 전하면 반드시 싸우게 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과 함께하는 일은 다릅니다.
아직 복음을 듣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은 반드시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그가 분명히 율법주의에 있을지라도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러나 율법주의와 함께하는 일은 안 된다는 것을 알고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예배를 합니다.
우리가 율법주의와 함께 예배할 수 있습니까? 그들도 우리 예배에 참석할 수 없고 우리 역시 그들이 드리고 있는 예배에 함께할 수 없습니다. 그들과는 사귈 수도 없고 그들과는 조화가 될 수도 없다는 것을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들과 화평할 수 있습니까?
로마서14장의 말씀을 오해를 해서 우리가 화평의 일에 힘쓰자고 하니까 무조건 화평을 하면 아니 세상의 이성을 따라 화평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복음을 가진 성도들은 그들과는 절대로 사귈 수도 없고 함께 할 수도 없고 조화가 될 수도 없습니다.
그들끼리는 가능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최근에 일고 있는 일이 교회 일치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교회는 하나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실제 이렇게 세상의 이성을 따라 화평 하는 일에 힘쓰고 있습니다. 그런 것이 세상의 이성에는 좋게 보이고 있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로부터는 칭찬을 듣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서로 교리가 다릅니다.
그리고 서로 이단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교회 일치 운동을 하면서 화평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이 왜 화평할 수 있는가 하면 서로 교리는 조금 다르더라도 율법을 지키는 일에 있어서는 같기 때문에 화평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 믿는 성도는 율법을 지키지 않기 때문에 절대로 화평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안 됩니다
우리 믿는 성도입니다 그리고 율법을 지키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을 믿지 않는 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둘이 어떻게 화평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완전케 하셨다는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있고 그들은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 둘은 절대로 화평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로마서14장입니다
지금 누구에게 하고 있는 말씀입니까?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분명히 로마서13장까지 모든 복음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 믿음으로 해서 이제 우리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었습니다. 그런 성도들에게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입니다
먼저 누구에게 하고 있는 말씀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성경을 보면서도 누구에게 하고 있는 말씀인가를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지도 않은 사람들이 이 화평이라는 단어만 보고 아무 것이나 다 화평을 하려고 하고 있고 실제 율법을 지키고 있는 자기들끼리는 화평을 하고 있습니다.
왜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이 말씀의 본문은 로마서14장3-12절까지입니다 그 말씀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 말씀에 대해서 그런즉 으로 말씀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 말씀을 생각하면서 이 말씀을 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목사들이 성경을 그렇지 보지 않고 있습니다. 앞에 있는 말씀은 생각하지도 않고 이제 문장의 말씀만 보고 있습니다. 그 말씀만 보니까 성경을 문자적으로 볼 수밖에 없고 세상의 화평을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서 자기들이 화평하고 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화평하시기 바랍니다.
구원을 받은 성도들에게 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교회 안에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고 있는 말씀이 아니라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는 성도들에게 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왜 하고 있는가 하면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듣고 믿는 성도들이 망하는 것을 원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툼이 있으면 안 됩니다.
그리고 서로 충돌이 있으면 안 됩니다 어느 것으로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먹는 자가 있습니다. 그리고 먹지 못하는 자가 있습니다.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는 자가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날을 같게 여기는 자가 있습니다.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있습니다. 이들에게 화평의 일에 힘쓰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인생입니다
때로 고집을 피울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사도행전을 보아서 잘 알겠지만 바나바와 사도 바울이 심하게 다투었습니다. 다투었다고 해서 어느 누가 잘못을 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둘 다 맞습니다. 그러나 그런 인간적인 다툼이 있다 보면 복음을 전하는 일에 아니 성도가 교제를 하는 일에 방해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지금 로마서를 통해서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시편37:37절을 보겠습니다. (구 829쪽)
“완전한 사람을 살피고 정직한 자를 볼지어다 화평한 자의 결국은 평안이로다”
화평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우리 성도들은 화평에 힘써야 합니다. 그런데 어디에서 화평에 힘써야 하는가를 사도 바울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복음을 전해야 하는 일은 로마서에서 말씀을 하고 있는 화평하는 일과는 조금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것을 하지 말라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우리는 할 수만 있다면 복음 전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 로마서14장에서 말씀을 하고 있는 화평 하는 일은 그런 것이 아니라 구원을 받는 성도들 안에서 있는 일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복음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화평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서 상당히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적은 숫자입니까? 바다 모래 같이 많은 사람들 중에서 남은 자만이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있습니다. 그렇게 적은 숫자의 사람이 구원을 받는데 그들이 서로 다투고 반목을 하고 있다면 복음을 듣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은 그만큼 더 적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을 보시기 바랍니다.
모든 교회가 다 율법주의가 되어서 종교가 되어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과 같은 모임이 세상에 여러 곳이 있다면 굳이 이런 말씀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 시대를 보더라도 얼마나 적은 숫자의 사람이 구원을 받는가를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는 더욱 더 화평의 일에 힘써야 합니다.
누구와 화평해야 합니까?
그것을 시편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완전한 사람을 살피고 정직한 자를 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화평한 자의 결국은 평안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화평에 힘쓰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면 먼저 완전한 자를 살피고 정직한 자를 보아야 합니다.
완전한 자입니다
누가 완전한 자입니까? 성경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노아는 당대의 의인이라 완전한 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노아가 완전한 자라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입니다
우리 교회 안에는 그러니까 복음이 전해지고 있는 교회 안에는 완전한 자가 있습니다. 율법의 행위로 완전하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입어서 믿음으로 완전한 자가 있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완전한 자를 살필 수 있는 사람만이 화평할 수 있습니다.
누가 살필 수 있습니까?
구원을 받은 사람만이 이 완전한 자를 살필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은 자인가를 알 수 있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완전한 자를 살피는 성도만이 아니 볼 수 있는 성도만이 화평의 일에 힘쓸 수 있습니다. 성도는 완전한 자와 화평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고 그렇게 함으로 해서 평안할 수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누가 정직한 자입니까?
잠언에서 악을 떠나는 것은 정직한 사람의 대로니 그 길을 지키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보전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늘 말씀을 드리지만 이 시대는 아니 기독교인들은 이 악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악을 행하면서도 잠언의 말씀을 보고 자기들이 정직하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정직한 자입니다
정직한 자를 볼 수 있는 사람이 화평한 자고 평안을 누릴 수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려면 반드시 악에 대해서 알아야 합니다. 누누이 말씀을 드리지만 이 악에 대해서 모르면 그는 교회 안에서 평생을 악만 행하다가 사망에 이르고 만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화평에 힘쓰고 있습니까?
화평한 자의 결국은 평안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화평한 자는 정직한 자를 볼 수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고 정직한 자는 잠언에서 악을 떠나는 사람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성도들이 하고 있는 화평에 힘쓰는 일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화평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문자를 보고 화평에 힘쓴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에서 이렇게 화평에 힘쓰는 것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로마서14장은 구원을 받은 성도들 가운데서 화평에 힘쓰는 일을 말씀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화평에 힘쓰는 일을 해야 합니다.
성경대로 사시기 바랍니다.
그저 문자만 보고 성경대로 산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모든 성경은 그 뜻을 성경에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시대 목사들은 성경에서 그것을 찾으려고 하지 않고 있습니다. 화평한 자가 누군가를 이렇게 성경에서 가르쳐 주고 있지만 그저 자기들의 이성적 지식에 의지를 해서 성경을 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도입니다
이제까지 정말 하나님의 은혜로 복음을 들었습니다. 얼마나 많은 시간 동안 수고를 하면서 이 복음을 들었습니까? 그리고 믿음으로 해서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거하시고 있습니다. 그런 성도들끼리 화평을 해야 한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합니다. 그렇게 함으로 해서 우리가 한 사람도 잊어버리지 않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12:14절을 보겠습니다. (신 367쪽)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화평하는 일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계속해서 말씀을 드리지만 로마서14장은 구원을 받은 우리 성도들에게 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말씀도 아니고 또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말씀도 아니고 구원을 받은 성도 안에서의 일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로마서14장입니다
복음을 듣지도 못한 사람들은 이 말씀을 볼 자격도 없는 사람입니다. 구원도 받지 못한 사람들이 이 말씀을 보아야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들은 화평하는 일에 힘쓰고 싶어도 할 수 없습니다. 그들이 무엇을 어떻게 해서 화평하는 일에 힘쓰는 일을 할 수 있습니까?
히브리서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화평을 하는 일은 성경에서 많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우리 성도들은 화평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는 사람들이 사도들이 말씀하고 있는 화평하는 일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복음을 들었기 때문에 더욱 이 화평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왜 화평하는 일에 힘써야 합니까?
그것을 히브리서에서 이것이 없이는 주를 뵈옵지 못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앞에서 시편의 말씀을 통해서 누가 화평하는 일을 하는가를 말씀을 했습니다. 완전한 사람을 살피고 정직한 자를 볼 수 있어야 한다고 말씀을 했습니다. 이것도 보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화평할 수 있습니까? 절대로 화평하는 일에 힘쓸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히브리서11장입니다
우리가 믿음의 장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믿음의 장을 말씀을 하고 나서 이제 12장에서 믿음의 주인 예수 그리스도를 믿자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믿음이 있는 성도들에게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서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새번역입니다.
모든 사람들과 화평하게 지내라고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왜 화평하게 지내라고 말씀을 하고 있는가 하면 혹시 너희 중에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한 자가 있는가 두려워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화평하게 지내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완전한 자를 살피고 정직한 자를 볼 수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충족이 되지 못하면 화평할 수 없습니다.
아니 화평하는 일에 힘쓰고 싶어도 할 수 없기 때문에 히브리서에서도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서 화평하게 지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너희 중에 완전한 자를 살피고 정직한 자를 봄으로 해서 화평하게 지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완전한 자가 누군가도 모릅니다.
그리고 정직한 자가 누군가도 모릅니다. 그가 화평할 수 있습니까? 그가 어떻게 주를 뵐 수 있습니까?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주를 뵐 수 있습니까? 아니 모든 사람으로 화평하게 지낼 수 없는 사람은 주를 뵐 수 없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구원을 받은 사람들과 화평하게 지내지 못하는 사람은 구원을 받은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모든 사람입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을 말씀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는 모든 사람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앞에서도 말씀을 드렸지만 우리는 아무나 하고 화평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 인생의 일이 아니라 영의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영의 일은 화평하지 못하면 대적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골로새서1장:20절을 보겠습니다. (신 325쪽)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마태복음5:9절을 보겠습니다. (신 5쪽)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화평하는 일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먼저 화평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과 우리는 화평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과 화평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점도 흠도 없는 완전하신 분입니다 그런데 우리 죄인이 어떻게 하나님과 화평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어떻게 해도 하나님과 화평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오셨습니다.
우리 죄인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삼일 만이 영으로 부활하시고 사십일 만에 하늘에 올라가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영을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흠도 없고 점도 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우리 죄인은 하나님과 어떻게 해도 화평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셨다고 하니까 그래서 화평하게 하셨다고 하니까 우리 죄 있는 인생들이 하나님과 화평케 된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절대로 하나님과 화평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주님이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주셨습니다. 그리고 영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영으로 부활하셨다는 말씀은 죄가 없는 존재로 부활을 하셨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영을 우리에게 보내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을 하신 영과 같은 영을 우리에게 보내주심으로 해서 하나님과 화평을 이룰 수 있게 되었다는 말씀을 하고 있지만 사람들은 이 영의 일을 전혀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먼저 주님이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아니라면 우리는 어떻게 해도 하나님과 화평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주시고 영으로 부활을 하심으로 해서 우리 안에 영이 거하시는 역사가 있고 그 영이 있음으로 해서 하나님과 화평할 수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영의 일입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영의 일이라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이 영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성경을 보는 사람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니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싶어도 믿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화평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어떻게 우리를 화평케 하셨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영의 일을 전혀 알지 못함으로 해서 이 화평의 일을 전혀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이 영의 화평한 일을 모르니까 자기들이 육체로 그 일을 하려고 하다가 모두가 망하는 길로 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주님이 어떻게 우리를 화평케 하셨는가를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화평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도들끼리도 이 일을 해야 합니다.
또 어떻습니까?
세상 사람들에게도 이 일을 해야 합니다. 아직 복음을 듣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주님이 화평케 하신 일을 전해야 한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일을 알고 있기 때문에 더욱 화평한 일에 힘써야 합니다. 특히 교회 안에서 우리 성도들끼리는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런 성도들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화평하는 일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화평케 하신 것을 전하는 일도 화평하는 일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로마서14장은 우리 성도들에게 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구원을 받은 성도들이라도 약간의 생각차이가 있을 수 있는데 그런 것에서 화평하는 일에 힘쓰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나는 먹습니다.
그런데 형제는 먹지 않습니다. 먹는다고 해서 먹지 않는다고 해서 우리가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우리는 복음의 말씀을 듣고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소한 문제로 인간적으로는 서로 반목할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화평하는 일에 힘쓰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화평하는 일에 힘써야 합니까?
그렇게 함으로 해서 우리가 평안할 수 있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살다보면 이견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구원을 받은 성도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형제의 구원을 위해서는 화평하는 일에 힘쓰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4:29절을 보겠습니다. (신 314쪽)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성도입니다
우리는 구원을 받은 성도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 성도들에게 사도 바울이 이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에 힘쓴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가르쳐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구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성도가 끝까지 구원을 받는 것을 원하시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로마서14장을 통해서 우리 성도 간에 있을 수 있는 일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구원을 받은 성도지만 혹시라도 형제를 망하게 하는 일을 하는 일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람입니다
구원은 우리 영의 일이고 우리는 아직 육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형제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교제를 하고 있고 예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잊어버리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덕을 세우는 일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그런 덕을 말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성경은 그런 세상의 일이 아니라 우리가 구원을 받는데 있어서의 일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는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로써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받고 있고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으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화평의 일과 덕을 세우는 일에 힘쓴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덕을 세우는 일이 무엇인가를 에베소서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더러운 말입니다
그것이 무엇인가를 성경을 통해서 알아야 합니다. 무릇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더럽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육체로 하는 모든 일이 더럽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이 더러운 말을 너무도 많이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목사들의 설교입니다
이 더러운 말이 안 들어가면 설교가 안 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니 자기들이 하고 있는 말이 더럽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그저 사람의 이성을 따라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더러운 말은 입 밖에도 내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목사들부터가 더러운 말이 무엇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덕이 없습니다.
더러운 말을 입으로 하면 덕을 세울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성경을 보면서도 더러운 말이 무엇이라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육체로 하고 있는 행위를 하라고 하는 그 말이 더럽다는 것을 모르고 오히려 육체의 행위를 조장하는 말을 너무도 많이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것이 참 좋은 말로 들려지고 있습니다. 사람이 육체로 하는 모든 행위를 하라고 하는 말은 다 더럽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 더러운 말이 교회 안에 넘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는 절대로 그런 더러운 말을 하지 않음으로 해서 덕을 세우는 일에 힘쓰고 있습니다.
그리스도편지입니다
우리 교제 중에 더러운 말이 있습니까? 우리 설교 중에 더러운 말이 있습니까? 우리는 무엇이 더럽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할 수 없습니다. 그런 말들이 얼마나 더럽고 그 말을 함으로 해서 성도를 망하게 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더러운 말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입 밖에도 내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서로 덕을 세우는 일에 힘쓰는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육체로 하는 행위를 가능한 하지 말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혹시라도 누군가 이 육체의 일을 하려고 하면 우리는 바로 그것이 행위라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 안에서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덕을 세우는 일입니다
선한 말을 해야 합니다. 선한 말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한분 이외는 선한 것이 없다는 것을 말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얼마나 선하신가를 말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더러운 자기들의 행위를 자랑하면서 그것을 선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입니다
선한 자가 하나도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인생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다면 그는 선한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더러운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특히 목사들이 설교를 하면서 인생들이 한 일을 예화로 많이 하고 있는데 그런 모든 것이 다 더러운 말이 되어서 사망에 이르게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만 선하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서만 말을 해야 합니다. 선한 말이라고 하니까 이 세상의 이성을 가지고 선한 것을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아니라 선하신 이는 하나님 한분 밖에 없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해서 말을 하는 것이 선한 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은혜를 끼치게 하는 말입니다
그것이 덕을 세우는 일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게 하는 그 말이 덕을 세우는 일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이 시대는 자기들이 한 더러운 행위를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라고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은혜를 끼치는 말입니다
사람이 한 행위가 은혜를 끼치는 말입니까? 그것은 더러운 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어느 목사의 이야기를 예화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 목사가 인간적으로 아무리 선한 일을 했다 해도 그것이 더럽다는 것을 모르면 그는 덕을 세우는 자가 아닙니다.
아니 목사들이 모르고 있습니다.
은혜를 끼치는 말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는 것이 덕을 세우는 일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덕을 세우는 일에 힘쓰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더러운 말만 교회 안에서 하고 있습니다. 자기들이 하고 있는 말이 얼마나 더럽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입니다
우리는 은혜를 끼치는 말만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대해서만 성경에서 알아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만을 이야기를 하는 것을 덕을 세우는 일에 힘쓰는 것이라고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성경을 알아야 합니다.
단어를 아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 안에 무슨 의미의 말씀이 있는 가를 정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덕을 세우는 일에 힘쓴다고 말씀을 하고 있으면 어떻게 하는 것이 우리가 덕을 세우는 일인가를 성경에서 알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를 섬기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그리스도를 섬기는가를 로마서14장13-17절까지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받으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덕을 세우는 일에 힘쓰고 있다고 우리 성도들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로마서14:20절을 보겠습니다. (신 259쪽)
“식물을 인하여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말라 만물이 다 정하되 거리낌으로 먹는 사람에게는 악하니라”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이룩해 놓으신 것을 음식 때문에 망치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모든 것이 다 깨끗합니다. 그러나 어떤 것을 먹음으로써 남을 넘어지게 하면, 그러한 사람에게는 그것이 해롭습니다.”
구원을 받은 성도입니다
우리는 이 구원을 늘 생각하고 있어야 합니다. 특히 교회 안에서 말을 너무 쉽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도가 교제를 할 때도 정말 말을 조심해야 합니다. 왜 그런가 하면 우리가 하는 말로 인하여 하나님의 사업이 무너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입니다
무슨 사업을 하고 계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들이 모두가 구원을 받기를 원하시고 있습니다. 그 일을 주님께서 이 세상 오셔서 다 이루어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이 시대 우리가 그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해서 구원을 받은 성도로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받았습니까?
정말 바다 모래 같이 많은 사람들 중에서 우리는 남은 자로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우리의 숫자가 많다면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통해서 이 로마서14장을 말씀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는 정말 수고를 하면서 이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어느 정도입니까?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를 떠나면서 내가 삼년 동안 밤낮없이 눈물로 훈계를 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이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그가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는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어느 정도 어려운가 하면 갈라디아에서는 해산의 수고를 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해산입니다
어머니가 아이를 열 달 동안 뱃속에서 태교를 해서 낳고 있습니다. 그런 수고가 있기 때문에 건강한 아이가 태어나고 있습니다. 그 수고를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바로 그렇게 복음을 듣고 구원을 받는 성도라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도는 압니다.
한 사람이 복음을 듣고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알고 있습니다. 아니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은혜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을 하나님께서 이 시대도 하시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을 은혜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는 말로 인하여 형제가 망하게 된다면 그는 하나님의 사업을 망하게 하는 자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정말 이것을 생각하면 우리는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 성도들의 모임에서 가장 조심해야 하는 일이 바로 이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나는 무심하게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내 형제가 망하게 된다면 그는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하는 자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사업을 우리가 세우지는 못할망정 무너지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이 무엇으로 그렇게 되는가 하면 식물로 그렇게 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식물입니다
이것을 먹는 식물로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것도 식물로 생각하고 있다면 그는 대책이 없는 사람입니다 아니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게 그에게도 유익하고 또 다른 사람을 위해서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업입니다
사업이라고 하니까 무슨 일을 하는 것으로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게 모든 일을 다 이루어 놓으셨습니다. 이 사업을 성경을 통해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이 사업에 대해서 알아야 하고 그것을 믿어야 합니다.
요한계시록21:6절을 보겠습니다. (신 421쪽)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성경입니다
무엇을 말씀하고 있습니까? 이 시대는 성경이 무슨 말씀인가도 모르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들을 어떻게 구원하시는가를 가르쳐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 구원을 다 이루어 놓으셨습니다. 그것을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자세하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루었습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할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사업을 다 이루셨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믿기만 하면 됩니다.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루셨는가를 보고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그것이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믿지를 않고 있습니다. 아니 믿음이 무엇이라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할 것이 하나도 없게 모든 구원에 대한 것을 다 이루어 놓으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이 성경을 보면서도 이것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왜 율법을 지킵니까?
하나님께서 율법을 지키셨다는 것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셨다는 것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아니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키신 그 율법의 부요함을 우리에게 주고 있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왜 열심을 내고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하셨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또 하나는 자기들이 뭔가 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 잡혀 있기 때문에 행위에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다 이루셨다고 믿는 성도는 절대로 율법을 지키지 않고 외식하는 행위를 하지 않습니다.
값없이 주고 있습니다.
나는 율법을 하나도 지키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완전하게 지키셨습니다. 그리고 그 지키신 것을 값없이 주고 있습니다. 그것으로 인하여 우리가 구원을 받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으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도 똑같은 영이 거하시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업입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 인생이 구원을 받아 영광에 참에를 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 죄인들을 사랑하셔서 이 사업을 하고 계십니다.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받는가를 늘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성경은 그것을 모두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정말 우리 한 사람까지도 사랑하시고 있지만 그것을 사람들이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아니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하는 일을 너무 많이 하고 있습니다.
누가 무너뜨립니까?
물론 사단이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생이라는 것을 또한 알고 있어야 합니다. 어느 것으로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하고 있는가 하면 사람들이 이성으로 알고 있는 지식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하고 있습니다. 그런 일이 우리 믿음의 형제들 안에도 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을 통해서 로마서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을 드립니다.
이제까지 복음을 듣고 믿어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고 하는 성도들입니다 그들이 얼마나 소중합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여기까지 인도하시기 까지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우리의 식물로 사업을 무너지게 하고 있다면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여기까지 오기까지 우리가 한 일이 무엇이 있습니까? 물론 우리 역시 복음을 듣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우리가 복음을 듣고 믿는다 해도 하나님께서 이 모든 일을 이루어 놓지 않았다면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시편136:25절을 보겠습니다. (구 903쪽)
“모든 육체에게 식물을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식물을 인하여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하지 말라
성도들에게 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이제까지 복음의 말씀을 듣고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성도들에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성도들이 이제 교회 안에서 교제를 하면서 자기들이 성경에서 안 말씀을 하고 있고 그것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사업이 무너지게 하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식물입니다
이 식물이 무엇인가 하면 이제까지 우리가 들었던 복음입니다 또 교회 안에서 성도들이 말하고 있는 성경에 대한 말씀입니다 성도는 교제를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예배를 하고 있고 주의 만찬을 나누게 되어 있습니다. 이때에 나오는 모든 말씀이 식물입니다
부딪힐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거칠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말씀은 듣는 사람에 따라 속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때로는 우리가 하고 있는 선한 것이 비방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지금 사도 바울은 식물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고 그 식물로 인하여 하나님의 사업이 무너지게 하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말씀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들에게 주신 식물입니다 우리 모든 육체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식물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영의 단단한 식물이 있습니다. 장성한 자가 먹고 믿음으로 해서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을 수 있는 식물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우리 성도는 장성한 자입니다 그 장성한 자가 실수를 해서 부딪힐 것이나 거칠 것을 형제 앞에 놓고 있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또 먹는 자가 있고 먹지 못하는 자가 있습니다. 그러면 이것을 듣는 사람이 그것을 속되다고 생각을 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다 식물이 되고 있는데 이것으로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하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계속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로마서14장은 구원을 받은 우리 성도들에게 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우리 중에는 약한 자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처음 교회에 나온 자가 있습니다. 또 복음의 말씀을 많이 듣고 있지만 아직 믿음에 든든히 서지 못하고 있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들과 교제를 합니다.
무엇으로 하고 있는가 하면 성경 말씀을 가지고 하고 있다는 말씀이며 그것이 식물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식물로 인하여 하나님의 사업이 무너지게 하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씀인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모든 구속의 일을 다 이루셨는데 그것을 헛되게 하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정말 주의해야 합니다.
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조금 잘못 말을 해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특히 교회 안에서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 말하는 것은 더욱 그렇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제가 한 마디 실수를 하면 제가 전하는 말씀을 듣고 따르는 사람 중에는 그것으로 하나님의 사업이 무너질 수 있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전합니까?
정말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저 역시도 늘 확인하고 또 확인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교제를 할 때도 제가 모르는 말씀에 대해서는 솔직하게 모른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성경의 모든 말씀을 다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제 체면을 생각해서 마치 모든 것을 아는 척 했다가 그것이 부딪힐 것이나 거칠 것이 된다면 하나님의 사업이 무너지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실수라도 이런 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
내 이성을 믿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내 지적인 능력을 믿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런 것을 조금이라도 의지하다가 형제 앞에 부딪힐 것이나 거칠 것을 놓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제가 한편의 설교를 하기 까지 정말 살피고 또 살핀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업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시면서 이루신 사업입니다 그런데 그 사업을 우리가 하는 말로 인하여 무너지게 하고 있다면 그것은 너무도 불행한 일입니다. 더구나 이제까지 복음을 듣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렇게 하고 있다면 더 불행하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단 하나의 식물이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시편11:3절을 보겠습니다. (구 810쪽)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할꼬”
마태복음7:25절을 보겠습니다. (신 10쪽)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구원입니다
이 성경은 우리 인생들이 어떻게 구원을 받는가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시는가를 말씀을 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세상에 오셔서 이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성경의 모든 기초가 되고 있습니다.
터입니다
우리가 성전을 지어가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터가 무너지면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기 까지는 정말 성경에서 이 복음을 많이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터로 든든히 서 있고 또 우리의 주초가 되어서 든든히 서 있을 때 무너지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주초입니다
그것을 반석 위에 놓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반석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든 성경에서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가고 있으며 믿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을 주님께서 마태복음에서 주초를 반석 위에 놓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업입니다
이 사업을 무너지게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이 복음의 말씀을 다 듣고 있는 성도들입니다 마태복음의 말씀과 시편의 말씀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하고 있는 말씀이지만 우리는 이미 성경에서 복음을 듣고 터를 세우고 있고 주초를 반석 위에 놓았습니다. 그런 성도들에게 로마서에서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하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들었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듣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그 복음을 듣고 이제 믿음 안에서 역사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누군가 식물로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하고 있다면 그는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얼마나 안타깝습니까?
복음을 아예 듣지를 않았다면 모르겠습니다. 이제까지 사도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다 들었습니다. 그런데 식물로 하나님의 사업이 무너지게 하고 있다면 그것은 너무 불행한 일입니다 저는 그런 일이 있을 수 없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그런 일이 있을 있다는 의미에서 말씀을 하는 것이 아니라 경계로 말씀을 하고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문제는 믿음이 연약한 자입니다
복음의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초를 반석 위에 세우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말씀을 듣다가 부딪히는 것이나 거치는 것이 자기 앞에 놓인다면 그것으로 인하여 사업을 무너지게 할 수 있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우리 안에는 그런 사람이 없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제 까지 복음을 듣고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고 있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않고 있는 우리는 없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왜 이 말씀을 하고 있는가 하면 아직 교회 안에는 믿음이 연약한 자가 있기 때문에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업입니다
왜 무너지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의인이 누군가를 모르기 때문에 무너지고 있습니다.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그 말씀을 모르기 때문에 아니 믿음을 모르기 때문에 터가 무너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반석 위에 주초를 놓지 않고 있기 때문에 무너지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도입니다
우리는 이 일에 이제까지 힘써왔습니다.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을 누리기 위해서 수고를 마다하지 않고 왔습니다. 정말 바라고 바라는 구원을 받기 위해서 반석 위에 주초를 놓기를 수고해 왔습니다. 그 일을 함으로 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업을 이루었습니다. 물론 그것까지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사도행전8:36절을 보겠습니다. (신 201쪽)
“길 가다가 물 있는 곳에 이르러 내시가 말하되 보라 물이 있으니 내가 세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뇨”
만물이 정합니다.
그런데 거리낌으로 먹는 사람에게는 악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정말 바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제가 세례를 행하는 것을 행위라고 말씀을 했습니다. 지금 이 시대 교회 안에서 행하고 있는 모든 세례는 분명히 말씀을 드리지만 종교적인 행위라고 말씀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악한 행위입니다
종교적인 행위입니다
그것은 악한 행위라는 것을 우리가 이제까지 복음을 들으면서 들었던 말씀입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을 보니까 오순절 성령이 오시고 난 후에 빌립이 에디오피아 간다게의 내시에게 복음을 전하고 나서 실제 물이 있는 곳에 가서 세례를 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말을 합니다.
내가 세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냐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 빌립이 물 있는 곳에서 이 내시에게 세례를 주고 홀연히 떠나가는 것을 성경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 때문에 사람들은 교회 안에서 세례를 주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을 하고 있고 저 같은 사람이 세례를 반대를 하면 아마도 이단이라고 공격할 것이 분명합니다.
다시 묻습니다.
세례를 주는 것이 옳습니까? 세례를 주지 않는 것이 옳습니까? 분명히 말씀을 드리지만 이 시대 교회 안에서 세례를 주는 것은 종교적인 행위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행위를 하는 사람은 반드시 망하는 길로 간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누가 저를 이단이라고 해도 저는 같은 말씀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정말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분명히 성령이 오셨습니다. 그리고 난 후에 빌립이 에디오피아 간다게의 내시와 예배를 하고 난 후에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제가 빌립이 구원을 못 받았다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간다게의 내시가 구원을 못 받았다는 말씀도 아닙니다.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제가 성경을 제 마음대로 해석하고자 하는 말씀이 절대로 아닙니다. 분명히 성령이 오신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바로 알아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성령이 오셨다고 해서 모든 것이 한꺼번에 다 알아진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성령이 오시는 것을 마치 도깨비 방망이를 뚝딱하고 두드리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절대 아닙니다.
성령이 오셨다고 해서 한꺼번에 모든 것이 다 알아지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면 우리가 갈라디아서를 보아서 잘 알고 있지만 사도 베드로가 외식을 하는 것을 사도 바울이 책망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사도 베드로입니다
그도 분명히 성령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외식을 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예수님의 수제자라고 하는 사람이 성령을 받았는데도 외식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비록 외식을 했지만 사도 바울이 책망을 함으로 해서 그것이 잘못 되었다는 것을 알았고 그 후로는 절대로 외식을 하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성령이 왔다고 해서 다 아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외식하는 것을 계속해서 한다는 것도 아닙니다. 분명히 자기가 하고 있는 외식이 잘못 되었다면 그것에 대해서 어느 말씀을 보거나 어느 사건을 통해서 깨닫게 되리라고 믿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빌립도 성령을 받았지만 세례를 주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아직까지는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이제 사도행전10장에서 성령세례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아직 성령 세례를 어느 누구도 받지 못한 때입니다 그때 복음을 듣고 예배를 한 간다게의 내시가 세례를 받은 것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세례를 받으면서 무슨 거리낌이 있겠느냐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만약입니다
빌립이 알았습니다. 물세례는 성령 세례의 예표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것을 알고 있었는데 간다게의 내시가 내가 세례를 받는 것이 무슨 거리낌이 있겠느냐고 말을 했다면 아마도 빌립은 안 된다고 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성령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말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여기까지 알았습니다.
그래서 빌립도 그렇고 간다게의 내시도 무슨 거리낌이 있느냐고 하면서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이렇게 거리낌이 없이 먹는 것은 아무 문제가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먹으면 그것은 악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세례를 받으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세례를 받아도 된다는 뜻으로 드리는 말씀도 절대로 아닙니다. 우리는 이것이 종교적인 행위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반드시 거리끼는 것이 되고 있습니다. 그렇게 거리낌으로 먹는 그 사람에게는 악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모르고는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빌립도 그렇고 간다게의 내시도 나중에 이것을 알았을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로 뒤에 사도행전10장에서 성령세례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에 대해서 사도 바울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모든 것이 정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어느 말씀을 보고 거리낌으로 먹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악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런 사소한 것까지도 자세하게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우리가 어느 말씀을 먹는데 있어서 거리낌으로 먹고 있다면 그것이 악하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까지 복음을 듣고 믿는 성도들에게 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복음을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들이 다 정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성경의 모든 말씀들이 우리를 구원하는 말씀들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알고 있는 성도가 거리낌으로 먹고 있다면 먹는 사람에게는 악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만물이 다 정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모든 말씀은 정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정하다는 것을 알고 있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정한 것을 먹는데 그것으로 남을 넘어지게 하고 있다면 그것이 해롭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는 무엇이라도 다 먹을 수 있지만 그것으로 남을 넘어지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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