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계1:3.)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119:105)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복음과 율법-설교2

제27강, 외모

윤주만목사 2018. 10. 22. 18:21


27, 전도자​​

갈라디아서 4:14절을 보겠습니다, (306)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그리고 내 몸에는 여러분에게 시험이 될 만한 것이 있는데도, 여러분은 나를 멸시하지도 않고, 외면하지도 않았습니다. 여러분은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해 주었습니다.”

병입니다,

그것이 사람을 얼마나 초라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누구나 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사실 몸에 병이 있으면 모든 것을 정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생각을 합니까? 우선 네 병이나 고치고 일을 하더라도 하라고 말을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것이 세상일이 아닙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세상 일 같으면 먹고 살기 위해서 아픈 몸을 가지고도 일을 하고 있고 그것을 사람들이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얼마나 먹고 살기가 힘이 들면 병든 육체를 가지고 일을 하느냐고 하면서 도리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집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것은 먹고 사는 일이 아닙니다.

아마도 그럴 것입니다

이 시대 사도 바울과 같은 사람이 있어서 안질이 심해서 병이 들어 있는데 복음을 전한다고 하면 사람들이 우선은 병을 치유하라고 할 것입니다 그것이 사람의 이성입니다. 그런 것을 알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왜 이 말씀을 하고 있는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율법은 외모입니다.

그리고 병도 외모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내가 그렇게 병이 들어 있을 때에 너희에게 복음을 전했고 그것을 듣고 믿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때에 너희가 율법을 알았다면 아마도 내가 전하는 복음을 듣지를 않았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너희가 율법을 보는 것과 같이 나를 보았다면 내가 전하는 복음을 듣지도 않았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분명히 시험을 합니다.

복음이 처음부터 있었다면 시험을 당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처음 듣는 복음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사도 바울의 안질은 당연히 시험을 받을 수밖에 없는데 그런 시험을 받는 상태에서도 사도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갈라디아에 있는 성도들이 듣고 믿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 시험이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너희가 나를 업신여기지도 않았고 버리지도 않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낮추어 보거나 하찮게 여기지 않았다는 말씀입니다, 왜 이 말씀을 하고 있는가 하면 너희가 복음을 듣고 믿어 성령을 받은 것이 내 외모가 병이 들었을 때인데 너희가 이제 다시 외모로 돌아가려느냐고 하면서 사도 바울이 처음 갈라디아에 복음을 전했을 때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시험하는 것이 육체에 있습니다.

그러면 당연히 업신여기는 것이 사람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에 복음을 전했을 때 그들은 업신여기거나 사도 바울을 버리지 않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런 상태에서 복음을 전했지만 갈라디아 교회의 성도들은 듣고 믿었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욥기19:18절을 보겠습니다. (779)

어린아이들이라도 나를 업신여기고 내가 일어나면 나를 조롱하는구나

욥이 누구입니까?

그는 순전하고 정직하여 악에서 떠난 자입니다. 그가 율법을 잘 지킬 때는 어느 누구도 욥을 업신여기지 않았습니다. 아니 그 당시 욥과 같은 족장은 왕과도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더구나 욥은 아주 율법적으로 하나님이나 사람이나 모두가 인정을 할 정도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누가 감히 욥을 업신여기겠습니까?

그런 욥이 고난을 받고 있습니다,

그가 모든 소유를 다 잃고 그리고 자녀들이 죽고 자기 몸도 병이 들어 기와 조각으로 몸을 긁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를 보면서 사람들이 대하는 것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왕과 같이 살아가던 욥이 자기 소유로 인하여 징계를 받고 있습니다,

그것을 보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합니까? 저가 무슨 죄를 지었으니까 하나님으로부터 벌을 받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욥의 세 친구도 와서 욥과 이야기를 하면서 잘 생각해 보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욥은 아무리 생각해도 자기가 고난을 받을 이유가 없다고 말하자 욥의 친구들이 네가 이렇게 고난을 당하면서도 네 순전함을 이야기 한다고 책망하고 있습니다.

업신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자기들은 잘 살아서 하나님으로부터 징계를 받지 않고 있고 욥은 자기들은 모르지만 무엇인가 잘못해서 모든 소유를 다 잃고 이제는 병까지 들어서 회복할 수 없다는 것을 눈으로 보면서 욥이 아무리 자기 순전함을 이야기해도 도리어 업신여기고 있습니다.

그것이 사람의 이성입니다.

이렇게 시험을 받는 것이 사도 바울에게도 있었습니다. 물론 욥과 같이 그런 정도는 아닐 지라도 분명히 사도 바울도 남들이 볼 때는 시험을 받을만했다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갈라디아에 있는 복음을 듣고 믿은 성도들은 전혀 그렇게 하지 않고 도리어 사도 바울을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영접을 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업신여기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들이 생각하는 기준이 있습니다. 솔직히 우리가 아카데미 강의를 통해서 교제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까울 때가 많이 있습니다. 이 시대 교인들이 생각하는 기준이 있습니다, 말씀을 전하는 곳이라면 자기들이 생각하는 기준이 있습니다. 그런 기준을 가지고 와서 아카데미를 하고 있는 이 사무실을 보면서 업신여기고 있습니다.

물로 겉으로는 표현을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왜 나오지를 않고 있습니까? 물론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카데미를 하고 있는 사무실을 보고 업신여기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아카데미를 통해서 성도들이 적은 숫자지만 예배를 하고 있습니다. 이 예배가 얼마나 귀하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복음을 들으면 뭐 합니까?

그리고 지식으로 알고 있으면 뭐 합니까? 만약에 지금까지 다니던 그런 근사한 교회라면 아마도 업신여기지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저 그리스도편지에 올려 있는 말씀만 보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볼 때는 여기가 업신여김을 받을 장소와 같을지라도 분명히 이 시대에 교회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왜 안 나옵니까?

멀어서입니까? 시간이 없어서입니까? 그런 것은 다 핑계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마음이 업신여기는 것이 있기 때문에 굳이 나가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을 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피치 못해서 못 나오는 사람들에게 제가 이 말씀을 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제가 그런 형편에 있는 사람을 판단하고 있다면 그것은 영적인 죄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알아야 합니다,

내 생명이 걸린 문제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이 교회를 통해서 생명을 탄생 시키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정말 그리스도편지에서 복음이 전해지고 있다고 믿고 있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나온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부탁하신 일이기 때문입니다,

예배를 업신여기고 있습니다.

지금 이 아카데미에는 멀리 홍천에서도 오고 있습니다, 사실 서울에 사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다 경기도 지역에 사시는 분들이 한 시간 넘게 차를 타고 오고 있습니다. 자기 육체의 생명이 걸린 문제라면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는다고 믿고 있습니다. 하물며 영적인 생명의 말씀이 전해지고 있는 곳을 외면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가슴이 아픕니다,

정말 이런 말씀을 드리고는 싶지 않지만 그분들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말씀을 드리고 있습니다. 아카데미를 하고 있는 교회가 만약에 일반 교회와 같이 모든 것을 갖추고 있다면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외모로 보고 업신여기기 때문에 복음이 전해지고 있지만 아니 그것을 알면서도 안 나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 무슨 마음이 있습니까?

업신여기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사도 바울의 말씀과 같이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했을 때 갈라디아에 있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그리고 그리스도와 같이 영접을 한다면 절대로 그런 일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복음입니다,

그 복음을 전하는 예배에 참석을 하는 일을 하찮게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가 참석을 함으로 해서 주님이 우리에게 부탁하신 일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물론 제가 세상 교회와 같이 많은 숫자를 모아서 무엇을 하겠다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그러나 그리스도편지에 처음 오는 사람들은 눈으로 본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저는 복음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정말 가슴이 아플 때가 많이 있습니다. 어떻게 자기 생각만 하고 그렇게 이기적인가를 모르겠습니다. 그리스도편지를 통해서 은혜를 받고 있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들이 오지 않은 이유는 단 한 가지입니다, 그리스도편지에서 전하고 있는 복음을 업신여기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세우신 교회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곳이 주님이 세우신 교회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환경과 처지를 보는 것이 아니라 성도는 복음을 듣고 믿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에 갔을 때 교회라는 건물이 있었습니까? 그렇다고 건강했습니까? 모두가 시험을 받을 만한 일인데도 갈라디아에 있는 성도들은 영접을 했고 복음을 듣고 믿었습니다.

복음이 없는 곳은 교회가 아닙니다.

아무리 세상 적으로 근사한 교회를 지어 놓고 정통이라는 간판을 내 걸었다 해도 그것은 교회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복음을 보면서도 업신여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제가 율법을 페하라고 했지 성도의 교제 예배까지도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율법을 폐했다고 하니까 주의 만찬을 먹는 교제까지도 하지 않아도 되는 것으로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몰라서입니까?

그렇다면 이제 아시기 바랍니다. 제가 이런 말씀은 거의 안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편지를 통해서 어느 정도 말씀을 통해서 장성한 자가 되었으면 내가 해야 하는 의무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무리 그리스도편지가 인터넷을 통해서 전해진다고 하지만 분명히 아카데미를 하고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예배입니다,

복음이 전해지고 있는 예배를 업신여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제까지 몰라서 그랬다면 아니 제가 율법을 폐했다고 해서 그렇게 해도 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면 다시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정말 여러분의 영혼을 위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제가 여러분을 해롭게 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갈라디아에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병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아무 것도 없습니다. 정말 버린다 해도 누구 하나 마음에 거리낄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에 성도들은 사도 바울을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영접을 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어느 곳이 교회입니까?

율법을 지키는 곳이 교회입니까? 율법을 폐하고 복음을 듣고 믿을 수 있는 곳이 교회입니까? 욥이 고난을 받는 것을 보면서 업신여기고 조롱하는 것과 같이 행동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제가 주일과 같이 매주 참석하라는 것도 아닙니다, 아카데미에 참석하는 분들은 언제든지 자유롭게 참석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말씀 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복음을 보면서 혹시라도 업신여기는 사람이 있어서 다시 멸망의 길로 가는 사람이 있을 까봐 말씀을 드리고 있습니다, 아니 그 분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픕니다. 제가 너무 율법을 폐하라는 것만 말씀을 드려서 그런 것은 아닌가 하는 마음도 듭니다,

갈라디아에 있는 성도들을 본으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저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영접을 하라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그들은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고 나서도 장로가 세워졌고 교회를 통해서 주의 만찬을 나누었습니다, 아무리 인터넷이라는 매체가 발달을 해서 복음을 집에서 볼 수 있다고 해도 최소한 성도는 서로 어느 정도는 교제를 해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복음입니다,

여러분이 보고 있는 이 말씀이 복음이 아니라면 제가 이렇게 말씀을 드리는 자체가 죄입니다, 하지만 저는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도 그리스도편지를 통해서 말씀을 보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저는 아니더라도 복음이 전해지고 있으면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그리고 그리스도와 같이 영접을 하고 함께 주의 만찬을 나누어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마태복음10:40절을 보겠습니다, (16)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업신여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제자들이나 사도들이 이 시대 목사들처럼 부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정말 가난했습니다. 사람들이 볼 때는 정말 시험을 받을 만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사도들이 복음을 전할 때 영접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인터넷이라는 매체가 발달을 했습니다.

저도 그것을 통해서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편지를 통해서 저 멀리 지방에 계시는 분들이 복음을 보고 있고 영접을 하고 있습니다, 그분들은 아카데미에 참석을 하고 싶어도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감사한 것은 인터넷이라는 매체가 있어서 복음 안에서 교제할 수 있다는 것이 정말 감사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입니다.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인터넷이라는 매체를 통해서 복음을 보았다 해도 영접해야 합니다, 제가 가장 안타까운 것은 서울이나 근교에 있으면서도 참석을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물론 특별히 장사를 해서 도저히 시간을 내실 수 없는 분들은 충분히 이해를 하고 있습니다. 제가 그분들에게 강요를 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갈라디아에 있는 성도들은 사도 바울을 영접했습니다.

사도 바울의 외모를 보고 시험을 받을 만한데도 그들은 사도 바울을 영접해서 복음을 듣고 믿었습니다, 그렇게 해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리스도편지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다면 자기 영혼의 생명을 위해서 그렇게 해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사람이 얼마나 쉽게 넘어지는 가를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그리스도편지를 통해서 복음을 보았고 그것을 지식으로 알고 있습니까? 그래서 구원을 받았고 확신하고 있습니까? 물론 주님이 하시면 그렇게 됩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우리에게 교회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교회를 통해서 주의 만찬을 나누게 하셨습니다. 물론 그리스도편지에 올리는 말씀을 그대로 나누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릅니다,

참석을 하시는 분과 그렇지 않은 분은 다릅니다. 제가 한 마디 대화를 해봐도 역시 다르다는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를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주의 만찬을 성도들과 함께 나누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여러분에게 유익이 되기 때문에 이렇게 간곡하게 말씀을 드리고 있습니다.

저를 위해서가 아닙니다,

저는 이 아카데미 강의를 하고 있지만 할 수만 있다면 다른 목사님에게 설교를 하게 맡기고 싶습니다. 강해를 쓰고 설교를 작성하는 것만으로도 정말 육체적으로 힘이 듭니다, 제가 지병이 있어서 때로는 너무 힘에 버거울 때가 많이 있습니다,

부탁드립니다,

저를 위해서가 아니라 제가 수고한 것이 헛될까봐서 부탁을 드리고 있습니다. 아니 제가 수고한 것은 헛되도 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헛될까봐 부탁을 드립니다. 저는 이 일을 하지 않아도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고 주님이 저를 주님의 나라로 인도하시는 줄을 믿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가 헛되지 않게 하시기 바랍니다.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내시를 보시기 바랍니다.

그가 얼마나 먼 길을 왔습니까? 그러나 예루살렘에는 예배하는 자가 없어서 혼자 되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예배를 하고 싶어서 그 먼 길을 왔는데 예배하는 자가 없어서 돌아간다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거리 시간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경기도에 살고 있습니까?

얼마든지 올 수 있습니다. 물론 특별한 일을 하는 사람에게 강요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그러나 그리스도편지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다고 믿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가 영혼 구원을 받은 성도라면 주의 만찬을 나누는 일을 함께 할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육체 잠깐입니다

그러나 영혼은 영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을 왜 세상에 두셨습니까? 예수님께서 하나님께서는 이제도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리스도편지의 말씀으로 예배하고 있다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교회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갈라디아서4:15절을 보겠습니다, (306)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내가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를 주었으리라

공동번역을 보겠습니다,

그 때의 여러분의 그 감격은 다 어디로 갔습니까? 분명히 말하지만 그 때 여러분은 만일 할 수만 있었다면 눈이라도 뽑아서 나에게 주지 않았겠습니까?”

사도 바울을 영접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영접을 했습니다, 어느 정도로 영접을 했는가 하면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영접을 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감격이 얼마나 대단했는가를 사도 바울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저 역시도 처음에 복음을 들었을 때는 감격했습니다. 저도 어려서부터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나 솔직히 잘하지는 못 했습니다 아니 어느 때는 잘 했고 어느 때는 그저 그렇게 살았습니다, 기독교인 집안에서 태어나 교회를 다닌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신학을 공부하라는 권유까지 받았습니다.

저는 정말 자신이 없었습니다.

목사들을 보면 저는 그들과 같이 그렇게 살 수 있는 자신이 없어서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된다는 것을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도하셔서 신학교를 가게 되었습니다. 그것도 저를 그 신학교로 인도한 선배가 몇 개월을 계속해서 권유를 해서 한번 가보자는 심정으로 갔는데 거기서 정말 복음과 같은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공부를 했습니다.

저는 그것이 복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정말 처음 신학교에서 말씀을 들을 때는 이곳에 복음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렇게 공부를 하고 나서 혼자 골방에 틀어박혀서 성경을 보기 시작을 했고 인터넷이라는 매체를 통해서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때에 저는 제가 복음이 있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지금부터 4-5년 전에 강해를 쓰기 시작하면서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 여러분과 복음으로 교제를 나눌 수 있었던 것은 그런 과정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고 이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라고 믿고 있습니다. 저 역시 설교를 작성하면서 감동을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설교를 통해서 교제를 하는 성도님들이 함께 감동을 나누고 있습니다.

복음입니다,

정말 가슴이 벅찹니다, 성경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깨닫게 해 주신다는 것이 얼마나 큰 감격인가는 복음을 들은 성도만이 알고 있는 것이라 믿고 있습니다. 물론 종교적인 행위를 통해서 감격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이 내 안에서 역사를 해서 그것이 믿어지는 놀라운 일이 내 안에서 일어날 때의 감격은 복음을 아는 성도만이 누리는 기쁨입니다.

정말 힘이 듭니다.

앞에서도 말씀을 드렸지만 제 육체적으로는 너무 힘이 들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 고통은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잘 모릅니다, 그 정도로 고통이 찾아오고 있습니다. 어느 때는 조금 안정이 되었다가 또 어느 때는 너무 힘이 들어서 정말 그만두고 싶을 때가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감격이 있습니다.

내 안에서 역사하는 감격이 그 모든 고통을 이기게 해 주시고 있습니다. 저는 정말 적은 숫자지만 아카데미를 통해서 그리고 그리스도편지를 통해서 복음 안에서 교제한다는 것이 너무도 기쁩니다, 다른 복음이 아닌 복음을 전할 수 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감격합니다, 그리고 설교를 작성하면서도 많은 힘을 얻고 있습니다.

복음이 그렇습니다.

왜 안 그렇겠습니까? 정말 세상에서 짐승과 같이 살다가 죽어야 하는 나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속량해 주심으로 율법 아래 있는 나를 은혜를 받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아들의 영을 보내 주셔서 천국을 유업으로 얻은 성도가 된다는 것은 너무도 큰 감격입니다

이 감격은 언제 옵니까?

반드시 율법 아래 있는 나를 속량해 주셨다는 것이 믿어질 때입니다. 그리고 더 이상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될 때입니다, 신앙생활을 통해서 자기들의 행위로 감격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믿어지는 역사가 있을 때 감격을 누리게 됩니다.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에 성도들이 이렇게 사도 바울로부터 복음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복음을 듣고 믿어서 구원을 받아 그들에게 아들의 영이 임했고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고 하늘의 기업을 유업으로 받았다는 것이 확신이 있었습니다, 언제 그랬는가 하면 사도 바울이 병이 들어서 정말 볼품이 없을 때 복음을 듣고 그런 역사가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갈라디아에 있는 성도들입니다,

정말 할 수만 있었다면 자기들의 눈이라고 뽑아서 줘서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데 어려움이 없게 했을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정말 사도 바울을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영접을 한 그들은 그것보다 더한 것이라고 했을 것입니다, 아니 실제 사도들이 순교하기 전에 그들을 피난시키기 위해서 성도들이 대신 죽었을 정도였습니다.

왜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사도 바울이 너무 안타까워서 지금 예전에 내가 너희에게 처음 복음을 전할 때의 일을 생각하라고 하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는 이렇게 복음을 들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누구입니까? 그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아무 것도 전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알지 않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모든 성경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사도 바울은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해서 그것을 전했습니다. 그 복음을 들으면 너무 가슴이 벅찹니다. 아니 설교를 작성하고 있는 저 역시도 감동을 받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육체적으로는 병이 있어 때로는 정말 힘이 들더라도 이 일을 기쁘게 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천국의 유업이 없다면 저는 못 합니다,

안 그렇습니까?

우리가 왜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까? 더구나 지금 한국교회와는 전혀 다른 복음을 듣고 교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믿음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율법을 폐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교제한다는 것이 사실은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모두가 왼 쪽으로 갈지라도 우리는 오른쪽으로 가면서 기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복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에 사람들은 사도 바울을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영접을 했고 할 수만 있다면 자기들의 눈이라도 빼서 주었을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복음을 듣고 믿을 때 감동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말씀입니다,

갈라디아서4:16절을 보겠습니다. (306)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

공동번역을 보겠습니다.

그런데 이제 내가 진실을 말한다고 해서 나를 원수로 여기는 것입니까?”

할 수만 있었다면 눈이라도 빼 주었습니다.

그것이 사도 바울로부터 처음 복음을 듣고 감격을 누린 갈라디아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이었습니다. 아니 실제 그럴 정도로 사도 바울을 영접했습니다, 그런데 유대로부터 온 거짓 형제가 와서 할례를 받으라고 하니까 미혹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참된 말을 했습니다.

복음을 전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에 율법주의가 들어오니까 이제 원수가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이 누구를 원수라고 하는지를 바로 아시기를 바랍니다. 율법의 행위를 하는 사람을 지금 원수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 할례를 받는 갈라디아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제 원수가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참입니다,

그것은 복음입니다, 거짓입니다, 그것은 다른 복음입니다, 다른 복음이 무엇인가 하면 유대로부터 온 거짓 형제가 가지고 들어온 할례라는 율법을 행하는 것이 다른 복음이라는 말씀입니다, 그 할례를 함으로 해서 사도 바울과 갈라디아에 있는 사람들이 원수가 되어다는 말씀입니다,

원수를 모릅니다,

에베소서에서 원수된 것 의문에 쓴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페하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는 원수가 무엇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예수를 안 믿는 사람이 원수입니까?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이 원수입니까? 물론 원수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원수는 교회 안에 있습니다, 교회 밖에 있는 사람이 원수가 아닙니다, 나를 저주에 빠뜨리는 그 사람이 원수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율법 아래 속한 자들은 저주를 받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이 왜 원수인가 하면 저주를 받게 하기 때문에 원수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그 원수를 너무도 좋아하고 있습니다.

아니 지켜야 한다고 말 합니다.

지키지 말라고 하면 도리어 원수처럼 대하고 있습니다, 자기들을 저주에 빠뜨리고 있는 원수가 율법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율법을 지키라고 하는 사람은 원수입니다. 지금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많은 율법이 아닙니다.

할례라는 단 한 가지의 율법입니다 내가 참된 말을 함으로 이제 너희와 원수가 되었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참된 말이 무엇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저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문자를 이야기하면 참된 말을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거짓 형제가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 있습니다,

그들이 무엇을 말 합니까?

성경을 가지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예수를 믿지 말라고 합니까? 오직 예수를 믿으라고 침을 튀어가면서 큰 소리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거짓 형제는 오직 예수를 이야기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직 예수를 믿어서 구원을 받는다고 이야기를 하면서 율법을 가만히 끌어 들여서 지키게 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다른 복음을 전합니까?

그들이 교회 안에서 전혀 다른 것을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를 믿으라고 말 합니다. 이 세상에 있던 사람이 교회에 가면 뭐라고 하는 줄 압니까? 목사가 예수 믿으라는 말 밖에는 안 한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럴 정도로 그들도 예수를 믿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이 와서 들으면 목사는 예수 믿으라는 말 밖에는 안하는 것으로 들려진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요한복음6:55절을 보겠습니다. (154)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사도 바울은 참된 말을 했습니다.

정말 그는 이방에 복음을 전할 때 이것만을 말씀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라는 것을 전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만 전했고 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전했습니다,

사도 바울만 그렇습니까?

이 시대 목사들도 세상 사람들이 볼 때는 그렇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는 목사들은 예수에 미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거짓이 들어가 있습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에 거짓이 들어와 사도 바울이 참된 것을 전하니까 이제 원수가 되었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그 거짓이 무엇입니까?

바로 할례입니다, 많은 율법이 아닙니다. 안식일 교회만 안식일을 지킨다 해서 율법주의라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이 할례 단 한 가지지를 가지고 갈라디아서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할례라는 단 한 가지의 율법이 들어와도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살이 될 수 없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오직 예수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해야 합니다. 거기에는 반드시 누룩이 빠져 있어야 합니다, 그 누룩을 섞으면서 참된 살이라고 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사도 바울은 그런 것을 다 제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전했습니다. 그것이 복음입니다

율법과 복음입니다

이 두 가지를 함께 전하는 것이 거짓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냐고 묻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을 듣고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영접을 하면서 사도 바울이 안질이 심하니까 자기들의 눈이라고 빼 줄 것 같던 갈라디아에 있는 사람들이 할례라는 단 한 가지의 율법으로 원수가 되었습니다.

잘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복음을 전합니다. 그리고 그 안에 율법이 들어옵니다. 서로 원수가 된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누가 예수 그리스도를 죽였는가를 알기만 해도 답은 쉽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이스라엘의 율법주의자들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원수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과 율법은 원수입니다, 그러니까 율법주의자들이 주님을 죽인 것 아닙니까? 그런데도 율법을 지키고 싶습니까? 내가 지키고 있는 것은 율법이 아니라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에 율법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모든 것은 다 율법입니다. 그리고 종교 안에서 외식으로 나타나고 있는 모든 것 역시도 율법입니다,

삼가 지키는 것입니다.

사실 할례는 삼가 지키는 것이라고도 할 수 없습니다. 일생에 한번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에 기록이 되어 있고 또 남자에게는 반드시 하고 있기 때문에 율법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율법이 들어옴으로 해서 갈라디아에 있는 사람들이 할례를 받았고 사도 바울이 오직 복음을 전하는데 원수가 되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 지키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람의 이성에는 분명히 율법을 지키는 것이 옳습니다. 그리고 이제까지 모든 교회가 율법을 지켜왔기 때문에 사람들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참된 말을 하고 있는 복음과 원수가 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율법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분명히 내 살과 내 피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이 주님의 살이고 주님의 피 입니까?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어도 그것은 주님의 살이 될 수도 없고 주님의 피도 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깨닫고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율법을 지키면서도 그저 오직 예수라는 그 말에 모두가 다 미혹을 당하고 있습니다,

생명을 주는 것이 참입니다.

그리고 저주를 받게 하는 것은 거짓입니다, 무엇이 생명을 주고 무엇이 저주를 받게 하는 줄을 알면 답은 간단합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기초도 안 서있다 보니까 무엇이 참이고 무엇이 거짓인 줄을 모르고 종교에 들어가서 그 짐승이 시키는 대로 율법을 지키면서 저주를 자청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이 시대는 성경을 너무 쉽게 봅니다. 왜 그렇게 쉽게 보는가 하면 그렇게 배워왔기 때문입니다, 내 원수가 누구라는 것을 모르고 그저 성경을 보고 있습니다. 분명히 에베소서에서 원수된 것 의문에 쓴 계명의 율법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사람들은 성경을 보면서도 자기 원수가 누구인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복음입니다.

그것이 참된 것입니다,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언약의 피를 아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에 이것을 전했을 때 그들이 얼마나 감격했는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안질이 걸려 눈이 잘 안 보이니까 자기 눈이라도 빼서 사도 바울에게 주려고 했습니다. 그런 그들이 할례라는 율법을 지키고 나니까 이제 원수가 되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입니다,

주님께서 이 성경이 내게 대해서 기록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보고 있습니까? 그것을 보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면 복음이 됩니다, 그러나 그 율법을 문자 그대로 지키면 다른 복음이 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너무 쉽게 성경을 보다보니까 문자 그대로를 보면서 다른 복음에 빠져서 예수 그리스도와 원수가 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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