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계1:3.)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119:105)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복음과 율법-설교2

제29강, 열심​​​

윤주만목사 2018. 10. 22. 21:14


29, 열심​​​

갈라디아서 4:18절을 보겠습니다. (307)

좋은 일에 대하여 열심으로 사모함을 받음은 내가 너희를 대하였을 때뿐 아니라 언제든지 좋으니라

공동번역을 보겠습니다.

그들이 좋은 동기로 여러분에게 열성을 보인다면야 얼마나 좋겠습니까? 내가 여러분과 함께 있을 때뿐만 아니라 언제나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사도 바울의 심정입니다.

이제까지 복음을 전한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가 유대로부터 온 거짓 형제에 의해서 율법을 지키는 것을 보면서 너무도 안타까웠습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뿐 아니라 복음을 알고 전하는 모든 성도의 마음이 같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얼마나 안타깝습니까?

사도 바울은 좋은 일을 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이방에 전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다른 복음이 교회 안에 들어오니까 그들이 속히 떠나는 것을 보면서 안타까워했습니다. 그들이 좋은 일로 여러분에게 열심을 보인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에 사람들은 그들이 좋은 일로 열심을 내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사람의 이성으로는 율법을 지키라고 하는 것이 좋은 일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고 있는 표징인 할례를 행하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구약에서 유월절을 먹을 때는 이방인이라도 할례를 받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제까지 자기들에게 어떤 표징도 없었는데 할례를 행함으로 해서 이제 진짜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 같이 생각이 되었습니다.

안타까워하는 마음입니다.

사람의 이성으로는 이것을 설명할 방법이 없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이 저주를 받는 일이라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제가 이 말씀을 전하면 사람들이 다 당황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니 도무지 받아들이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정말 부탁드립니다.

저 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율법을 지키는 일이 하나님을 믿는 성도로서 조금 더 잘 살기 위한 성도의 도리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천국에서 더 큰 상을 받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율법을 지키게 하는 것이 좋은 일에 대한 열심이 아니라는 것을 사도 바울이 반어적으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좋은 일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율법을 지키게 하는 거짓 형제는 좋은 일에 대해서 열심을 내게 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율법을 지키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한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자체가 좋은 일이 아니라는 것을 반어적으로 묻고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모릅니다.

이 시대는 성경을 거꾸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어느 한 말씀을 거꾸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거의 모든 말씀을 다 거꾸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어느 정도라도 복음에 근접한 사람이 있으면 그나마 다행인데 전혀 그런 사람이 없다는 것이 너무도 큰 불행입니다, 그런데도 자기들이 하나님을 잘 믿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니 천국에 갈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성경을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노아의 시대가 어떻고 소돔과 고모라가 어떻고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에 들어갈 때가 어떻고 예레미야 시대가 어떻다는 것을 안다면 이 시대가 어떠하다는 것을 어느 정도는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시대는 하나님을 잘 못 믿었어도 우리는 잘 믿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바랍니까?

사도 바울이 좋은 일을 바라고 있습니다. 내가 여러분과 함께 있을 때 뿐 아니라 항상 그랬으면 좋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한 갈라디아 교회에 벌써 다른 복음이 들어와 그들이 할례를 받고 있었습니다.

생명의 문제입니다.

정말 냉정하게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이 시대 천만이라는 기독교인이 구원을 받을 것 같으면 아마도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이 모두가 가나안에 들어갔을 것입니다. 아니 소돔과 고모라가 불과 유황으로 멸망을 당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고 난 후에 이스라엘이 멸망을 당해 디아스포라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언제나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정말 얼마나 간곡한 말씀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이 말씀과는 전혀 다르게 갈라디아교회는 율법주의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율법의 종이 되어서 저주를 받는 사람들이 되고 있는 것을 보면서 사도 바울이 안타까움에서 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저 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편지를 통해서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 편지를 보는 모든 사람들이 율법을 지키지 않고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구원을 받는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자리에서 복음을 듣다가도 이 세상의 초등학문에 빠져 다시 돌아가는 것을 볼 때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 줄을 모르겠습니다.

가슴이 아픕니다.

사도 바울이 어떻게 복음을 전했습니까? 그런데 그 교회가 율법주의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사도 바울을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영접을 했던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에 유대에서 온 거짓 형제가 들어와 다른 복음을 전하니까 속히 떠나고 있습니다. 그들이 좋은 일로 열심을 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안 그렇다는 말씀입니다,

언제나 좋은 일에 열심을 낸다면 참 좋겠는데 갈라디아에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는 그렇지가 않다는 말씀입니다, 율법주의에 얼마나 쉽게 사람이 미혹이 되는 가를 알아야 합니다, 성경이 계속해서 그것을 가르쳐 주고 있지만 사람들은 성경을 보면서 더욱 더 율법주의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4:19절을 보겠습니다. (307)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나의 자녀 여러분, 나는 여러분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기까지 다시 해산의 고통을 겪습니다.”

얼마나 좋겠습니까?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가 좋은 일에 열심을 내고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탄식으로 반문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시대 역시 이 성경을 보면서도 도무지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얼마나 수고를 해서 복음을 전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수고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을 했습니다. 그 수고가 어느 정도인가 하면 해산하는 고통이 있을 정도의 수고를 했다는 말씀입니다, 어머니들이 아이를 낳을 때 배속에 있을 때부터 해서 해산할 때까지 얼마나 수고를 합니까? 사도 바울이 그렇게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에 복음을 전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교회가 율법주의에 빠졌습니다.

아이를 낳습니다.

저는 남자라서 잘은 모릅니다. 그러나 해산을 할 때는 모든 여자들이 그 고통이 너무 커서 두려워하기도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 해산의 고통을 사도 바울이 또 감내를 해야 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정말 복음이 전해진다는 것이 얼마나 큰 고통이라는 것을 알아야 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복음 그냥 전해진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편지의 지금의 말씀이 있기 까지는 정말 많은 고통이 따랐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 많은 말씀들이 하루아침에 써진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제가 자랑하고자 이 말씀을 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은 정말 고통 중에서 전해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집니다.

성경에서 그리스도가 온전히 나타나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편지에 있는 설교를 보신 분들은 알고 있습니다. 이 복음이 완전히 내 안에서 역사하기 까지는 그냥 되는 것이 아닙니다, 수백편이 넘는 설교와 강해 그리고 강의를 보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습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내 안에서 믿음으로 역사를 합니다.

사도행전20:31절을 보겠습니다. (223)

그러므로 너희가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에베소 교회와 고별을 하면서 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어머니가 아이를 가져 해산하고 혼자 자립할 때까지의 시간이 정말 오래 걸립니다. 물론 성년이 될 때까지 돌아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래도 어느 정도 자기 앞가림을 하기 까지는 최소한 7-8년 이상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솔직히 그리스도편지의 말씀을 다 보고 그것이 내 안에서 믿어지기 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사도 바울입니다,

그가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에게 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말이 삼년이지 사실 사도 바울에게는 너무도 힘든 시간이었습니다. 혹시라도 그 중에서 다른 복음에 미혹이 되는 사람이 있을까 하여 정말 눈물로 훈계를 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의 마음입니다.

내가 받은 복음의 은혜가 너무 크기 때문에 그것을 바로 전하고 또 그들이 믿음에 든든히 서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어머니가 아이를 낳았는데 그가 죽는다고 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마도 생각하기도 싫은 끔찍한 일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런 마음으로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에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입니다.

이 말씀은 그들이 구원에 확신이 있을 때까지라는 말씀입니다, 복음을 하루아침에 전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편지에 있는 모든 것을 다 합치면 아마도 설교로 하면 천여 편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천편이 넘는 설교를 하루아침이 볼 수도 없습니다, 또 본다 해도 사람의 이성과 수많은 싸움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복음을 듣고 있는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루아침에 이 복음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 아닙니다, 정말 그리스도편지에서 전하고 있는 복음이 성경과 맞는가 하면서 많은 고민을 했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을 전도하고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까지는 정말로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사도 바울입니다.

그는 정말로 복음을 위해서 산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열심으로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 해산의 수고를 한 사람입니다. 저 역시 복음을 전하고 있지만 사도 바울의 그런 고통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솔직히 눈물을 흘려 보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마음에서 안타까워하는 심정은 있습니다.

눈물로 훈계했습니다.

아마도 이방에 처음 복음을 전한 사도 바울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런 면에서는 아직 많이 부족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런 마음을 솔직히 전하고 싶습니다, 저는 이 자리에 왔다가 돌아가는 사람을 보아도 그들에게 눈물로 호소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냥 주님의 뜻이라고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안타까워하고는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눈물로 그것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복음을 떠나는 사람들을 보아도 그들을 붙잡으려고는 하지 않습니다. 아니 어쩌면 그런 시간까지도 저에게는 아깝기도 합니다. 저는 이 시대 주님이 제게 주신 이 복음을 성경에서 더 많이 설교로 기록해 놓고 싶은 마음이 강해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어찌되었든 사도 바울은 정말 영혼을 위해서 눈물을 흘릴 정도로 안타까워했던 사람이었음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밤낮 쉬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삼년을 전했는데도 사도 바울이 뭐라고 말씀을 합니까? 내가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가 너희에게 들어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복음을 전했는데도 사도 바울이 떠나니까 실제로 흉악한 이리가 와서 양 떼를 죽였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거의 모든 교회가 다 그렇게 되었습니다.

지금 이 시대를 보시기 바랍니다.

물론 사도 바울과 같이 복음을 전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다 흉악한 이리에게 잡혀 죽고 있으면서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밤낮 쉬지 않고 삼년이나 가르쳤는데도 사도 바울이 떠나니까 흉악한 이리에게 잡혀 먹혔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처음 복음을 전한 이방의 교회가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모두가 다 다른 복음에 빠져 있습니다. 다른 복음이 무엇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아니 자기들이 할례를 안 받는 것으로 율법을 지키면서도 다른 복음에 미혹이 되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부지런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늘 깨어 있으시기 바랍니다. 사단은 우는 사자와 같이 지금도 삼킬 자를 찾아다니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는 정말 많은 고통이 따른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마치 어머니가 해산의 고통을 하는 것과 같은 그런 고통이 따르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아무 감각이 없이 율법을 지키고 있고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율법이 들어왔습니다,

사도 바울이 해산의 고통을 다시 해야 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방에 복음을 전했는데 그들이 속히 율법주의에 빠지는 것을 보면서 너무도 안타까운 마음에 내가 해산의 수고를 다시 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제까지 해온 수고를 다시 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고린도후서11:23-27절을 보겠습니다, (298)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 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사도들입니다.

그들이 어떻게 복음을 전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보고 있는 성경이 어떻게 기록이 되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종교가 되어 버렸습니다. 사도들이 이 해산의 수고를 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성경을 볼 수도 없고 또한 구원을 받을 수도 없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누군가를 통해서라도 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창조주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이 복음을 전하기까지는 사도들이 너무도 큰 고통을 받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시대는 너무 편하게 종교인으로 살아가고 있어서 잘 실감이 나지 않고 있습니다. 아니 그것을 알면서도 자기들이 당연하게 받은 복음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옥에 갇혔습니다.

지금과 같은 감옥이 아닙니다, 2000년 전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은 그래도 인권이라는 것이 있었지만 그때에는 죄를 진 사람이 갇히는 감옥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최소한의 인권도 보장이 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이방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그 복음을 우리가 지금 성경을 통해서 보고 있는데 다른 복음을 만들어 버렸습니다.

매도 수없이 맞았습니다.

그래도 지금은 얼마나 감사합니까? 종교의 자유가 있다 보니까 이런 매를 맞을 이유는 거의 없어졌습니다. 그리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들이 이방에 복음을 전할 때 로마에 의해서 극심한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잡히는 순간에는 거의 다 죽음을 면치 못했던 시대입니다. 더구나 사도들은 더욱 그랬습니다.

유대인에게 사십에 하나 감하는 매를 다섯 번 맞았습니다.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이러한 고통을 당했는가 하면 그것은 복음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얼마나 많은 핍박을 받았는가를 잘 가르쳐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유대인이 누구입니까?

율법주의자입니다. 그리고 거짓 형제입니다. 다른 복음에 미혹이 되어 있는 사람들입니다. 아니 유대인들은 아예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지만 율법을 지키지 않는 것으로 해서 사도 바울을 이렇게 핍박을 했습니다. 단지 율법의 문제 때문에 이런 고난을 유대인들에게서 당했습니다.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까?

그들은 아무리 주여 주여 하고 있을지라도 유대인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는 이유로 유대인들이 이렇게 사도 바울을 핍박을 했는데 이 시대는 율법을 지키는 것이 바르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방인이라고 하지만 실제는 표면적 유대인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해산의 고통입니까?

어느 정도 고통을 당했는가를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에 복음을 전했는데 율법주의자들이 들어오니까 속히 다른 복음에 미혹이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에서는 좋은 말로 해산의 고통이지 그가 어떻게 복음을 전했는가를 알고 있어야 합니다.

복음입니다.

사도 바울이 쓴 성경을 왜 보고 있습니까? 사실 율법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은 사도 바울이 쓴 성경을 볼 자격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 성경을 보면서 다른 복음을 만들어서 율법을 지키라고 강요를 하고 있습니다. 이제 점점 더 그 강도가 더 세지기 시작을 하고 있고 자기들이 정한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이제는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할 수 없는 시대가 되고 있습니다.

해산의 고통이 아닙니다.

그보다 더한 고통을 당하면서 사도 바울이 이방에 복음을 전했습니다. 정말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면서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든든히 서기를 바랐습니다. 그렇게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했지만 사도 바울이 다른 곳으로 떠나니까 흉악한 이리가 와서 잡아먹었습니다. 이 흉악한 이리가 바로 율법주의자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골로새서3:9-10절을 보겠습니다. (327)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말라 옛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시기 바랍니다.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야 합니다. 그런 성도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저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문자를 아는 것으로 그리스도를 안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아는 것 역시 이 세상 초등학문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거짓말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율법을 지키는 사람이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서 났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저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왜 거짓의 아비에서 났는가 하면 율법을 지켰기 때문입니다. 사단은 이스라엘을 감동해서 율법을 지키게 했습니다.

그 율법의 의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했습니다. 성경을 보면 너무도 쉽게 알 수 있는 일을 이 시대도 역시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자가 거짓이라는 것을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고 있지만 보는 눈이 감겨져서 도무지 안 보입니다.

옛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옛사람이 무엇입니까? 내가 육체적으로 살았던 모든 것이 옛사람입니다. 새사람이 있고 옛사람이 있습니다. 육체적으로 사는 사람은 옛사람이고 아들이 영이 내 안에 거하는 것은 새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종교 안에서 하고 있는 모든 행위는 다 옛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옛사람이라고 하니까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담으로 말미암은 사람은 옛사람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아들의 영을 내 안에 보내 주신 것은 새사람입니다. 마치 예전에 하던 행위를 하는 것을 옛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이제는 교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것을 새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아닙니다.

아담의 자손은 옛사람입니다. 그 옛사람을 이제 벗어버리고 새사람을 입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는 옛사람과 새사람이 있습니다. 아담의 자손으로 그 육체가 교회 안에서 하나님을 위해서 하는 모든 열심은 다 옛사람입니다, 그것을 마치 새사람이라고 이야기를 하니까 사람들이 복음을 도무지 깨달을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통해서 무엇을 말씀하고 있습니까?

율법과 복음을 계속해서 비교를 하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아담의 자손으로 태어나 육체로 교회 안에서 율법의 행위를 하는 것은 옛사람입니다. 그리고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내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거하시는 것이 새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옛사람은 보입니다.

그리고 느끼고 사람의 이성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새사람은 오직 성령이 오셔야지만 내 안에 거한다는 것이 믿어지는 역사가 있습니다. 성도는 이제 옛사람을 버리고 새사람을 입으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새사람을 입는다고 하면서 도리어 옛사람으로 더 멀리 가고 있습니다.

옛사람은 율법의 행위를 합니다.

그러나 새사람은 오직 믿음으로 역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믿음의 비밀을 모르는 교회 안에 있는 절대 다수의 사람들은 옛사람을 벗어버리지 못하고 아직까지 옛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아담의 자손으로 태어난 육체가 교회 안에서 하는 모든 행위는 옛사람입니다. 성도는 그 옛사람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율법을 버려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을 버리지 않고는 새사람이 내 안에 거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깨닫고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옛사람과 새사람을 비교해서 말씀을 하고 있지만 사람들은 이런 말씀들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마치 세상에 있는 사람은 옛사람이고 교회 안에 들어와 있는 자기들은 새사람인 것처럼 이야기를 하고 있고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나는 두 사람이 있습니다.

아담으로 탄생이 된 내가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내 안에 거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의 사람이 있습니다. 이 영의 사람은 내가 느끼거나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내 안에서 믿음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옛사람을 벗어버리라고 말씀합니다.

그 말씀은 다시 말해서 내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는 말씀과 같습니다. 이렇게 내 육체를 죽여야 옛사람을 벗어버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이 시대 교회 안에 있는 거의 모든 사람들은 옛사람의 행위를 벗어버리지를 못하고 도리어 옛사람의 행위를 하는 것을 보고 믿음이 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해석이 안 됩니다.

이 시대는 거의 다 거꾸로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있다 교회 안에 와서 율법을 지키는 자기들을 보고 새사람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기초적인 말씀들이 해석이 안 되니까 도무지 복음에 대해서 깨달을 수 있는 지혜가 그들에게는 없습니다.

옛사람의 행위를 벗어버리시기 바랍니다.

그런 성도만이 새사람을 입고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아담의 형상을 벗어버리지 못하는 사람은 절대로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쫓을 수도 없고 지식에 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을 수도 없습니다. 이런 영의 비밀을 깨닫지 못하면 교회 안에서 옛사람으로 살다가 지옥에 갑니다,

율법과 복음입니다,

그것은 옛사람과 새사람입니다. 옛사람은 교회 안에서 율법의 행위를 보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고 있고 새사람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으로 충만한데 까지 지식으로 자라서 자기를 창조하신 형상을 이루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이루는 성도 안에 아들의 영을 보내 주셔서 그 영이 주님이 오실 때 새사람과 하늘의 형상을 입어서 천국에서 영원한 축복을 받으면서 산다는 것이 성경에서 가르쳐 주고 있는 복음입니다.

그리스도의 형상입니다.

겉으로 입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아들의 영이 거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교회에 옛사람을 입고 있는 율법주의자들이 들어왔습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이 말씀하면서 다시 새사람을 입게 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내가 해산하는 수고를 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역사입니다.

성도는 행위를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계속해서 말씀을 드리지만 구원을 받는 성도는 다릅니다. 내 평생의 시간동안에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도 시간이 부족합니다. 내가 언제 교회 안에서 신앙생활을 할 시간이 어디 있습니까? 수많은 예배를 드리고 기도를 하고 찬양을 배우고 부를 시간이 어디 있다고 생각합니까?

그럴 시간이 없습니다.

성도는 광야 사십년 동안 그러니까 교회 안에서 청년의 때 사십년 동안에 다른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지식에까지 자라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것을 하기에도 시간이 부족한데 이 시대는 다른 제사에 너무 많은 시간을 빼앗기면서도 그런 제사를 보고 하나님을 믿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율법주의에 빠집니다,

그런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를 사도 바울은 너무도 안타까워하면서 내가 다시 해산하는 수고를 하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보고 옛사람 육의 사람이 되는 것은 아주 쉽습니다. 그러나 새사람 영의 사람이 되는 것은 무척이나 힘이 든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정말 해산하는 수고가 있어야 복음이 전해지고 그것을 듣고 믿을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4:20절을 보겠습니다. (307)

내가 이제라도 너희와 함께 있어 내 음성을 변하려 함은 너희를 대하여 의심이 있음이라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이제라도 내가 여러분을 만나 어조를 부드럽게 바꾸어서 말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여러분의 일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당황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책망입니다.

이제까지 갈라디아서를 보면 사도 바울이 율법주의에 미혹이 되어 있는 갈라디아교회에게 아주 강하게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정말 심하게 저주를 받는다는 말씀까지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안타깝겠습니까?

사도 바울이 어떻게 수고를 해서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에 복음을 전했는데 그 교회가 너무도 쉽게 다른 복음에 미혹이 되는 것을 보면서 아마도 사도행전의 말씀과 같이 눈물을 흘렸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수고로 복음이 전파가 된 갈라디아 교회가 너무도 속히 율법주의에 빠지는 것을 보면서 아마도 참담함을 금할 수 없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원수가 되는 일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가 되기 위해서 복음을 전했고 그들을 의심하지 않았는데 그들이 속히 율법주의에 빠져서 이제는 원수가 되었습니다. 정말 그 마음의 표현을 다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제라도 내가 부드러운 어조로 말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안 됩니다.

그가 복음을 듣다가도 한번 율법주의 사상이 그 안에 들어오면 그들이 다시 복음으로 돌아온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정말 해산하는 수고를 해도 그들이 다시 돌아온다는 보장이 없다는 것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차라리 처음부터 복음을 듣지 않았다면 몰라도 많은 복음의 말씀을 듣다가 율법주의로 빠지는 사람은 절대 돌아오지 못한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도 다혈질입니다.

그가 얼마나 이 복음에 대해서 다혈질을 가지고 있었는가를 사도행전을 통해서도 알고 있습니다. 그는 한번 자기가 아니라고 하면 그것으로 끝을 볼 정도로 단호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성질을 가지고 있는 사도 바울로서는 자기가 복음을 전한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가 율법주의에 빠지는 것을 보면서 참을 수 없는 분노를 가졌을 것이 분명합니다.

아마도 그런 성질이 있었기 때문에 복음의 일군이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사실 복음을 전하는 일은 타협을 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아주 작은 타협하나가 사망에 이른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지금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에 이 서신을 보내고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성도는 이 율법에 대해서 사도 바울과 같이 단호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저 역시도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내가 한 가지라도 타협을 하는 순간 망한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능한 옛사람의 행위를 모두 버리려고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것이 사람의 이성으로는 불가능하지만 내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영이 그렇게 감동을 해 주고 있는 줄 믿고 있습니다.

찬양 부르는 것이 어떻습니까?

식사할때 기도 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사람의 이성으로는 당연하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도 하나님을 믿는 성도라면 이 정도는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옛사람을 버리지 못하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정말 그것까지도 버릴 수 있습니다. 제가 그것을 버리는 것은 사도 바울이 할례라는 율법 한 가지와 싸우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복음입니다,

성도는 그것과 강하게 싸워야 합니다, 그 싸움에서 지는 사람은 절대로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것을 알기 때문에 갈라디아서를 통해서 아주 강하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제라도 내가 부드러운 어조로 바꾸어서 말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나는 의심하고 있다고 말씀합니다.

다른 번역을 보면 나는 여러분의 일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당황하고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나는 여러분의 일이 걱정스러워 안절부절못하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를 얼마나 걱정하고 있는가를 잘 표현을 해 주고 있습니다. 정말 막막하다는 표현이 맞을 것입니다.

돌아올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사도 바울이 아무리 강경하게 말씀을 한다 해도 이미 율법주의로 돌아간 사람들은 다시 복음을 받아들인다는 것이 사실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도 그것을 알기 때문에 지금 반어적으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갈라디아서를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어느 누구 한 사람도 이 갈라디아서를 바로 해석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초대 교회를 지나오면서 313년 이후에 보이는 교회사를 볼 때 거의 복음이 보이지가 않고 있습니다. 그것은 갈라디아서를 바로 해석하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실입니다. 율법과 복음에 대해서 바로 정립을 해서 가르쳐도 구원을 받는 사람이 적은데 다른 복음을 가르쳤다는 것은 그 안에는 구원이 없었다는 말과 같습니다.

내가 이제라도

얼마나 간곡한 표현입니까? 너희가 이제라도 이 복음을 다시 받아들였으면 좋겠다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사도 바울이 다시 해산하는 수고를 한다 해도 아마 거의 모든 사람은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정말 이 심정은 복음을 전하는 사람만이 알 수 있습니다. 복음을 듣는 사람과 복음을 가르치는 사람의 차이가 얼마나 큰 가를 여러분이 바로 깨닫고 있어야 합니다,

정말 참담합니다.

복음을 듣다가 다시 다른 복음에 미혹이 되는 것을 보면 어떻게 말로 표현을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참된 것을 전하는데 오히려 그것이 원수가 되는 것을 보면 안타깝기만 합니다. 사도 바울의 그런 심정이 잘 표현이 되어 있는 말씀들을 보고 있습니다. 성경을 바로 알아서 내 영혼의 구원을 어떻게 받는가를 깨닫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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