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계1:3.)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119:105)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복음과 율법-설교2

제10강, 할례

윤주만목사 2018. 10. 17. 15:56


10, 할례

고린도전서 7:18-19절을 보겠습니다. (270)

할례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무할례자가 되지 말며 무할례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할례를 받지 말라 할례 받는 것도 아무것도 아니요 할례 받지 아니하는 것도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따름이니라

 

할례가 무엇입니까?

이 말씀은 율법이 무엇이냐고 묻고 있는 말씀입니다 성경은 대표성이 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 한 사람을 말씀을 하셨을 때는 그 한 사람은 대표성을 갖는 한 사람입니다. 그저 어느 한 사람을 말씀을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대표하는 한 사람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대표성을 할례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말씀을 보고 마치 할례 한 가지를 말씀하는 것으로 오해를 해서는 안 됩니다, 갈라디아서도 그렇고 고린도전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 바울이 할례를 말씀을 했다고 해서 마치 할례 한 가지로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유대인들이 할례만 행했습니까?

 

할례자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무할례자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이 말씀은 율법을 지키는 이스라엘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말씀과 율법을 지키지 않는 이방인으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뭐라고 말씀합니까? 할례도 아무 것도 아니요 무할례도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일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이방인이 되어서 율법을 안 지키는 것 역시도 아무 것도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베드로는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도 아무 것도 아니고 이방인도 아무 것도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들이 율법을 지켰어도 아무 것도 아니고 또 율법을 안 지켰다고 해서 자랑할 것도 없다는 말씀입니다,

 

왜 율법을 가지고 다투고 있습니까?

성경은 분명히 율법은 헛된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는데 왜 그렇게 헛된 것에 집착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그들이 다 다른 복음에 미혹이 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 편지를통해서 복음을 전해도 사람들은 지식으로만 알고 있지 율법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율법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것을 지킨다고 해서 달라질 것도 없고 그것을 안 지킨다고 해서 달라질 것이 없습니다, 할례자로 부르셨다는 말씀은 유대인들은 율법을 조상 대대로 지켰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방인들은 무할례자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말씀은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 다른 복음에 대해서 조금도 양보하지 않았다는 말씀입니다,

 

당시는 조상 대대로 율법을 지킨 유대인들이 있었습니다.

우리 이방인은 유대인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자기들이 유대인이나 된 것처럼 율법을 지키고 있고 그것을 너무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사도들은 할례자냐 무할례자냐 따지지 않았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절대로 오직 믿음에 더하지 않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들입니다.

계명이라고 하니까 율법이라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계명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의롭다 함을 얻고 구원을 받아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계명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할례자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고 무할례자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습니다.

 

할례를 받았습니다.

굳이 무할례자가 되려고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실제 할례 그것을 말씀을 하는 것이 아니라 너희는 유대인이다 라는 말씀입니다 굳이 이방인이 될 필요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이방인도 역시 유대인이 될 필요가 없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는 말씀입니다.

오직 믿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입니다, 베드로도 그것을 유대인들에게 전했고 사도 바울도 그것을 이방인에게 전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이방인이 자기들이 유대인이나 된 것같이 육체의 모양을 내면서 다른 복음에 깊이 빠져 들어서 재앙의 길로 가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2:8절을 보겠습니다. (303)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에게 사도로 삼으셨느니라

 

공동번역을 보겠습니다.

곧 하나님께서 할례받은 사람들을 위한 사도직을 베드로에게 주신 것같이 이방인들을 위한 사도직을 나에게 주셨다는 사실을 인정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입니다

왜 갈라디아에서 계속해서 사도 바울의 사도직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당시 다른 복음을 가지고 들어온 거짓 형제들이 사도 바울의 사도직에 대해서 계속해서 의문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사도 바울은 주님의 제자인 사도들과 교제를 하지 않았습니다.

 

누가 사도로 세웠습니까?

주님께서 사도로 세우셨습니다. 그것을 증거 할 만한 유명한 자들이 없었다는 말씀입니다. 베드로나 그 외의 사도들 그리고 야고보만 해도 그들이 누구인가를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주님이 살아계실 때 주님께서 직접 부르셔서 사도로 삼으셨습니다, 그리고 야고보 같은 경우에는 주님의 형제로서 주님이 말씀하시는 복음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어떻습니까?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후에 승천하셨습니다. 그 후에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고 난 후에 사도들로부터 예루살렘에서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 그때 까지만 해도 사도 바울은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었을 정도로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었던 사람입니다,

 

또 어떻습니까?

스데반 집사가 유대인들에 의해서 순교를 당할 때도 마땅히 죽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것도 모자라서 그리스도인을 잡아서 죽이려고 다메섹으로 가던 중에 주님을 만났습니다, 사실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었습니다. 도리어 사람들이 사도 바울을 피했다고 성경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상태에서 자기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방의 사도로 세우시기 위해서 기뻐하심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유명하다고 하는 사람들을 만나지 않고 이방에 복음을 전하러 갔습니다, 그렇게 세워진 교회들을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알고 있습니다.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다른 복음이 들어오기 시작을 했습니다. 그들이 누군가 하면 그래도 유명하다고 하는 자들 중에서도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방에 복음을 전한다는 것을 듣고 당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다고 하는 유대인들이 이방에 와서 교회에 들어와 보니까 율법을 전혀 지키지도 않고 있습니다. 더구나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표징인 할례도 받지 않았습니다.

 

이 문제 때문에 예루살렘에 갔습니다.

우리가 사도행전 15장을 보아서 알겠지만 당시만 해도 바리새파 중에서는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실제 율법을 지키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과의 논쟁에서 사도 바울은 조금도 양보를 하지 않고 끝까지 복음을 지켰습니다.

 

예루살렘에 갔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이방에 복음을 어떻게 전했는가를 말을 했고 또 유대인들이라고 하는 거짓 형제가 들어와서 어떻게 하고 있는가를 말했습니다, 그 모든 이야기를 듣고 사도 바울과 베드로는 서로 동일한 복음을 전한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이제까지 모든 사람이 베드로를 알고 있습니다. 그가 사도가 된 것은 하나님의 직분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베드로를 할례 받은 사람들의 사도로 세웠습니다.

그가 어떻게 사도가 된 것은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어떻게 사도가 되었는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에서 율법에 대해서 서로 이야기를 하다 보니까 이제는 유명하다는 그 사람들도 인정을 하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을 인정했습니다.

만약에 예루살렘에서 사도 바울이 이방에 전하는 복음이 다른 복음이었다면 아마도 그 유명하다고 하는 사람들은 사도 바울을 이방의 사도로 인정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들과는 비록 다르게 사도로 세움을 입었다 해도 주님께서 사도 바울을 세우신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이방인의 사도로 인정을 했다는 말씀입니다.

 

고린도전서 9:2절을 보겠습니다. (272)

다른 사람들에게는 내가 사도가 아닐지라도 너희에게는 사도니 나의 사도됨을 주 안에서 인친 것이 너희라

 

다른 사도들은 다 알고 있습니다,

주님이 계실 때에 그들을 부르시고 사도로 세우셨습니다. 그것을 예루살렘에 있던 유명한 자들도 다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것을 부인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전혀 예수님과는 상관이 없는데 어느 날 갑자기 자기가 사도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내가 사도가 아닐지라도 너희에게는 사도니 나의 사도됨을 주 안에서 인친 것이 너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유대인들에게는 사도가 아닐지라도 너희에게는 사도라 왜 사도인가 하면 너희가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있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이렇게 이방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있는 것을 보고 사도 바울은 이방의 사도로 삼았다는 것을 예루살렘에서도 인정을 했다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다른 사도들과는 달랐습니다,

그는 주님으로부터 복음을 들은 사람이 아닙니다, 정말 성령의 감동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자기 안에 나타나기 까지 하나님께서 기뻐하심으로 말미암아 사도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계시가 된 예수 그리스도를 이방에 전했고 내가 전한 복음을 너희가 믿지 않고 있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내가 사도 된 것은 너희가 주 안에서 인친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인정했습니다.

이방에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것을 보고 인정을 했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도 이방인들에게 내가 왜 사도 인가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복음을 전해서 너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는 그 자체가 내가 사도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사도가 없습니다.

사도라는 직분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기 위해서 주님께서 사도들을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이방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후에 사도 바울을 부르셨습니다. 이제 사도의 직분은 더 이상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다 전했습니다,

그것을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보고 있습니다, 더 이상 성경 외에 것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 이 시대 신사도 운동이 일어나고 있는데 사도는 더 이상 있을 수 없습니다. 주님이 오시고 난 후에 이스라엘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제자들을 부르셨고 또 이방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사도 바울을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기록했습니다.

그들이 기록한 성경을 지금 우리가 보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방에 복음을 전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또 베드로가 설교를 할 때 이스라엘 사람들이 삼천 명이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제는 사도가 없습니다.

사도들을 통해서 이스라엘에게 복음이 전파되었고 또 사도 바울을 통해서 이방에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 그 복음을 우리가 이제는 성경을 통해서 보고 있습니다. 이제는 오순절의 성령 강림과 같은 역사로 인하여 사도들이 기록한 성경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습니다. 성령이 오셔서 모든 진리가운데로 인도함을 받으면 믿어서 영생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성경을 다 깨닫게 해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성령의 감동을 받아 가르치는 은사를 받은 사람을 통해서 동일한 성령 안에서 믿는 역사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방에 복음을 전할 때 얼마나 어려운 일이 많았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또 다른 복음에 싸우기 위해서 자기가 어떻게 사도가 되었는가를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2:9절을 보겠습니다. (303)

또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기둥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나와 바나바에게 교제의 악수를 하였으니 이는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저희는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그래서 기둥으로 인정받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은,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은혜를 인정하고, 나와 바나바에게 오른손을 내밀어서, 친교의 악수를 하였습니다. 그렇게 하여, 우리는 이방 사람에게로 가고, 그들은 할례 받은 사람에게로 가기로 하였습니다.”

 

은혜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가 어떻게 은혜를 받았는가를 말 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기둥 같이 인정을 받는 야고보와 게바 그리고 요한이 그 은혜를 인정을 하고 교제의 악수를 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정말 이 시대는 어떻게 은혜를 받는지 조차 모르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에게 주신 은혜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와는 아무 상관이 없이 십자가를 지심으로 말미암아 값없이 의롭다 함을 얻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은혜라는 것을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값없이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이 은혜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받았습니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은혜를 받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과는 아무 상관이 없이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구속의 일을 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이며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이루신 모든 일입니다.

 

주님이 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의롭다 함을 얻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는데 주님께서 이 세상에서 오셔서 구속을 이루셨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루신 구속으로 말미암아 사도 바울이 은혜를 입었고 그것을 사도들에게 말을 하니까 그들이 인정을 했다는 말씀입니다, 그 말씀은 사도들도 동일하게 은혜를 입었다는 말씀입니다,

 

은혜를 어떻게 받았습니까?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구속을 이루셨습니다.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를 입었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사도 바울에게 주신 은혜이고 또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에게 주신 은혜이고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성도들이 받은 은혜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을 인정했기 때문에 교제의 악수를 할 수 있었습니다.

 

은혜를 받은 자입니다.

성도는 다 은혜를 받는 자입니다. 그것은 말로만 하는 은혜가 아니라 내가 무엇을 해서 얻은 것이 아니라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이루신 그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어떤 은혜입니까? 값없이 의롭다 함을 얻는 은혜를 입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은혜를 받았습니다.

우리와 상관이 없이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이루신 구속의 은혜입니다 그러나 이 은혜를 받아들이지를 않고 있습니다, 은혜가 무엇이라는 것조차 모르고 그저 말로 은혜라고 떠들고 있습니다. 아니 아무 것이나 다 은혜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목사의 설교를 듣고도 찬양을 하는 노래를 듣고도 은혜를 받았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은혜를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방의 사도로서 자기가 누구라는 것을 확실하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특히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과 교제를 하면서 그들에게 어떻게 은혜를 받았는가를 말하고 인정을 받고 있습니다. 아무 것에나 은혜를 인정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니 사람이 하는 행위를 보고 은혜를 받았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은혜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이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이루신 구속으로 말미암아 내가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이 은혜라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렇게 받는 은혜를 인정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은혜를 인정했습니다.

그리고 교제의 악수를 했습니다. 제자들도 오순절에 성령을 받았습니다. 사도 바울도 자기가 한 성령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가 되었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도는 이렇게 자기가 받은 은혜를 서로 이야기함으로 해서 교제하고 악수를 할 수 있습니다.

 

빌립보서 1:5절을 보겠습니다. (318)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에서 너희가 교제함을 인함이라

 

교제의 악수를 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기둥으로 있는 야고보와 베드로와 요한과 교제의 악수를 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사도 바울이 전하는 복음이나 예루살렘 교회에서 전하는 복음이나 동일하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복음은 다를 수 없습니다.

 

성도의 교제입니다.

교회가 인간적인 교제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그런 교제가 물론 필요할 수도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그런 인간적인 교제를 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에서 교제해야 합니다, 복음이 아닌 다른 것으로 교제를 하려고 하는 순간에 종교가 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 시대 교회를 보면 복음에서 교제하는 것이 아니라 거의 인간적인 교제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성도의 교제를 인간적인 교제로 만들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시대 이 교제 때문에 목사들이 성경을 볼 시간도 없는 것을 보게 됩니다, 왜 인간적인 교제에 매달리고 있습니까? 종교가 되어서 사람의 숫자를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대형교회는 안 그렇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교회에서 가장 많은 헌금을 하는 사람을 목사들이 인간적으로 교제하고 있지 않습니까?

 

교제의 악수를 했습니다.

그것은 복음으로 교제를 했다는 말씀입니다 사람과의 연을 만들려고 하는 자체가 종교입니다, 그래서 전도서에서 마음이 올무와 그물 같고 손이 포승 같은 여인은 사망보다 독한 자라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는 저를 피하려니와 죄인은 저에게 잡힌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인간적인 교제를 하는 사람은 반드시 사망보다 더 독한 이 여인에게 잡히게 되어있습니다.

 

왜 사람의 만남을 만들고 있습니까?

이 시대는 교회가 사람의 교제로 인하여 포승으로 묶여 있는데도 그것을 교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하고 있는 교제는 사실 복음으로 하는 교제가 아니라 종교적인 교제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 교제를 하는 이유는 사망보다 독한 여인에게 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주례도 봐줍니다.

교인들의 애경사를 다 챙기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이 시대 교회는 그것을 위해서 존재를 하고 있습니다. 사도들이 어떻게 했는가를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모든 일은 세상에서 사는 것같이 살면 되는 것입니다 왜 목사가 주례를 해야 하고 또 애경사에 가서 기도를 해야 하고 예배를 드려야 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복음으로 교제하지 않기 때문에 인간적으로 교제하는 것입니다, 물론 형제 중에 어려운 사람이 있으면 교회가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자기를 자랑하기 위해서 하는 그런 것은 다 세속적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신부가 주례를 서는 것과 스님이 주례를 서는 것과 또 세상에서 유명한 사람이 주례를 서는 것과 목사가 주례를 서는 것이 무엇이 다릅니까?

 

세속입니다.

세속이 무엇입니까? 세상과 같이 하는 것이 세속입니다. 왜 자꾸 다른 것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습니까? 저는 솔직히 목사가 주례를 서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장례 절차를 하는 것 역시도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 장례를 도와 줄 수는 있어도 장례를 하기 위해서 많은 예배를 드리는 것을 보면 얼마나 외식에 빠져 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복음으로 교제하시기 바랍니다,

성도는 다른 이유로 만날 필요가 없습니다, 이 바쁜 세상을 살아가면서 왜 그런 것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조금 냉정하게 생각이 될 지라도 우리는 복음으로만 교제를 하시기 바랍니다, 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버리는 성도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에게 주신 은혜를 알았습니다.

그러자 예루살렘에 있는 기둥과 같은 사도들이 사도 바울에게 교제의 악수를 했습니다. 그것은 사도 바울의 믿음을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동일한 믿음을 가진 사도 바울을 인정하고 그들은 할례자에게 복음을 전하고 사도 바울은 이방에 복음을 전하기로 했습니다. 반드시 은혜를 받은 자만이 복음을 전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세우셨습니다.

그가 있었기 때문에 지금 우리 이방인들이 복음을 듣고 구원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심지어는 이 시대 신학자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사도 바울이 이방인들에게 율법에 대해서 너무 관대하게 복음을 전했다고 비판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성경말씀 자체를 부인하겠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고 또 믿음이 없다는 것을 스스로 증거하고 있습니다.

 

은혜를 받은 자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사도 바울이 기록한 서신들을 보고 비판을 하고 있습니까?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받은 자입니다, 그런 자는 오직 주님을 찬양하고 감사만 하고 있고 또 자기가 받은 은혜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생명까지도 아까워하지 않고 살아갑니다.

 

사도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입니다.

물론 우리는 성경을 다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이방인들이 사도 바울이 기록한 성경도 모르고 있습니다. 아니 종교가 되어서 사도들이 받은 것 외에 더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질 시키고 있습니다. 늘 깨어 종교에 빠지지 마시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2:10절을 보겠습니다. (303)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 생각하는 것을 부탁하였으니 이것을 나도 본래 힘써 행하노라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다만, 그들이 우리에게 바란 것은 가난한 사람을 기억해 달라고 한 것인데, 그것은 바로 내가 마음을 다하여 해 오던 일이었습니다.”

 

그들이 누구입니까?

야고보, 베드로, 요한 등 예루살렘 교회에 기둥과 같은 이들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교회에 가만히 들어온 율법주의자들의 문제를 가지고 예루살렘 교회에 갔습니다. 그리고 율법에 대해서 교제를 하고 악수를 했습니다. 이 말씀은 예루살렘교회의 사도들과 사도 바울이 동일한 믿음을 가졌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 안 됩니다,

우리가 사도행전 15장을 보기만 해도 쉽게 알 수 있는 일입니다. 지금 갈라디아서와 사도행전 15장은 같은 말씀입니다. 유대인의 사도와 이방의 사도가 모여서 복음에 대해서 교제를 했습니다. 그 결론이 자기 조상들의 무거운 멍에를 이방인들에게 지게 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어떻습니까?

성경을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모르다기보다는 이미 종교가 되어 있는 신학에서 공부를 한 그 사람들이 소경이 되어 있다 보니까 진리가운데도 인도함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무엇을 말씀하는 가를 모르고 종교가 되어 있는 신학교들이 가르치는 교리를 그대로 따라가고 있어서 율법주의에서 벗어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들이 무엇을 부탁했습니까?

다만 가난한 자들을 부탁했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성경을 너무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거의 문자적으로 보고 있다 보니까 성경에서 말씀을 하는 뜻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자를 부탁을 하니까 이 세상에 가난한 자를 생각하고 있고 교회가 그 가난한 자들을 돕는 것을 마치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너무 부자가 되었습니다.

강도짓을 해서 수많은 헌금을 요구하다 보니까 교회에 돈이 넘치고 있고 그것을 사람의 이성으로 옳은 곳에 사용하는 것을 보이고자 세상에 진짜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 교회가 구제를 하고 있습니다. 제가 그것이 전혀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성경적으로 볼 때 교회가 세상의 가난한 자를 도울 정도로 부자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 가난한 자가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돈이 없어 가난한 자를 부탁한 것이 아니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의가 없는 가난한 자를 부탁했습니다. 인생은 어느 누구도 부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율법의 의로 가난한 자를 부탁하는 이 말씀을 보고 물질적으로 가난한 자들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미국과 캐나다에서 우리나라에 복음이 전파가 되었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시 우리나라가 얼마나 가난했는가를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당시 전쟁이 끝나고 나서 우리나라는 폐허와 같았습니다. 그리고 일을 하고 싶어도 일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모든 국가적 기반이 무너져 있었고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에 하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복음을 전파하면서 도와주었습니다.

사실 그들은 복음을 가지고 들어왔다기보다는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가난한 자들을 돕기 위해서 왔다고 해도 별로 틀린 말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런 가난한 자들을 돕는 선교를 하면서 아마도 그 나라의 교인들은 마음에서 한껏 부자가 되어 있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거의 대부분이 우리나라보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국가에 가서 복음을 전한다고 하면서 그들에게 아주 작은 음식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이성으로 생각할 때 그것이 얼마나 옳은 일입니까? 제가 이것이 나쁘다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이렇게 하는 것을 비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누구에게 전해야 하는 줄을 모르고 있는 사람들에게 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런 가난한 자가 아닙니다.

솔직히 우리나라에 복음이 들어왔습니까? 절대로 아닙니다. 기독교라는 종교는 들어왔을지 몰라도 복음은 안 들어왔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문자적으로 보고 그 당시 전쟁의 폐허에서 신음하고 있는 가장 가난한 나라 중에 하나인 우리나라에 자기들의 종교에서 이야기 하는 가난한 자들을 돕기 위해서 그리고 자기들이 알고 있는 다른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왔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미국과 캐나다를 비판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그들은 분명히 우리나라가 근대화를 이루는데 분명한 일조를 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세상의 생각입니다, 성도는 하늘의 일을 생각하는 사람이지 이 세상 육체의 일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 것을 모르고 그저 세상의 가난한 자들에게 자기들에게 넘치는 재물을 가지고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사실 그 자체가 다른 복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도들이 그런 가난한 자들을 부탁했습니까?

50년대 우리나라와 같이 그런 가난한 자들을 부탁하셨습니까? 그런 가난한 자가 아니라 심령이 가난해서 천국을 가기를 원하는데 갈 수 있는 방법을 모르는 가난한 자들을 부탁했습니다. 기독교라는 종교는 이미 313년 이전에 타락을 했습니다. 그리고 종교개혁을 했다는 프로테스탄트교회 역시도 타락이 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들은 종교인으로서는 타락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진리에서는 분명히 타락을 했습니다. 우리가 아는 신학자들은 이 세상의 이성으로는 정말 존경을 받을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한 존경받을 행위들이 오히려 그들을 부자로 만들었고 그 부자를 따라가느라 지금까지 교회는 계속해서 타락의 길로 가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4:18절을 보겠습니다. (94)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이사야의 말씀입니다.

주님이 오셔서 하실 일을 이사야가 예언을 했고 주님께서 복음을 전파하시면서 이사야의 말씀을 가지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에서 처음 복음을 전파하시면서 하신 말씀이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가난한 자들입니까?

심령이 가난한 자들을 부탁했습니다. 물론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육체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전부가 그랬던 것이 아니라 부자도 있었습니다. 그럴지라도 이 모든 사람들의 심령이 가난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누가 가난합니까?

내가 어느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은 그 율법을 지키지 않고 있습니다. 내가 정말 하나님을 믿는 신실함에 있어서 그렇게 했을지라도 그 율법을 지키는 순간에 내가 원하든 원치 않던 마음에서는 부자가 되는 것이 사람이라는 것을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율법을 지키면 그것을 안 지키는 사람에 비해서 무조건 부자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선교를 합니까?

가난한 나라에 가서 정말 때로는 생명의 위협까지 느끼면서 선교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복음이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라는 종교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들이 가서 전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물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것만 전합니까?

그들을 계몽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자기들의 율법의 의를 따라오게 하려고 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 율법의 의를 따라오게 하려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 율법을 어떻게 지켜야 하고 또 그 율법을 지킴으로 해서 기독교인이 되고 그러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서 이 세상에서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입니까?

그들은 심령이 가난한 자가 아니라 육체가 가난한 자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도들은 자기 조상들의 무거운 멍에인 율법을 폐하고 심령이 가난한 자를 부탁했는데 이 시대는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돈을 가지고 육체가 가난한 자들에게 가서 다른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을 나도 본래 힘썼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도 심령이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셨고 사도들도 심령이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그런데 종교가 되어 있는 교회는 육체가 가난한 자들에게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다른 복음을 전파하고 있고 그렇게 하는 일로 점점 더 부자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가난한 자를 도우면 뭐합니까?

물론 육체의 유익은 조금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영혼이 구원을 받지 못한다면 그는 하나님의 일을 했다고 하지만 실상은 악만 행하다가 사망의 길로 가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사람의 이성으로는 너무 옳은 일이라 할지라도 내가 해야 하는 일을 바로 알고 하는 것이 성도의 사명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세상에는 가난한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야 하는 대상은 그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이 세상 사람들도 돌아보고 있습니다. 성도는 그렇게 재물이 많은 사람도 아닙니다, 정말 이 세상에는 영혼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기가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천국에 들어가야 하는 줄을 모르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주님께서도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셨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입니다.

그렇게 자기 심령이 가난해서 복을 받은 성도는 이 세상에 있는 또 다른 심령이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 복음을 전할 때 유대인들이 조상 대대로 무겁게 멍에를 맸던 그것을 버리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전해서 그가 복음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사도들은 정말 해산의 수고를 했습니다.

 

부자는 안 받아들입니다.

이 시대도 부자들에게 가 보시기 바랍니다, 오히려 이단이라고 공격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음을 들으면 받아들입니다, 이렇게 심령이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것이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성도들에게 주님께서 하신 부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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