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계1:3.)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119:105)

누구든지 귀가 있거든 들을찌어다(계20:9.)

복음과 율법-설교2

제8강, 표적

윤주만목사 2018. 10. 17. 15:30


8, 표적

사도행전 15:12절을 보겠습니다. (213)

온 무리가 가만히 있어 바나바와 바울이 하나님이 자기들로 말미암아 이방인 중에서 행하신 표적과 기사 고하는 것을 듣더니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에 왔습니다.

그리고 그가 이제까지 복음을 전한 것에 대해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함께 하심으로 말미암아 표적과 기사가 나타나서 이방에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표적과 기사라고 하니까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물론 은사가 나타난 것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구원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방에 복음을 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이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그 성도들로 하여금 여러 교회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아서 잘 알겠지만 사도 바울은 그 당시 여러 나라를 다니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물론 거의 모든 나라가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 나라의 특성을 다 가지고 있었습니다.

 

지금과 같은 국가가 아닙니다.

지금 우리나라로 하면 삼국 시대 이전의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물론 왕들이 있었지만 이제 겨우 나라의 형태를 갖추기 시작한 때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어느 성을 중심으로 나라가 세워졌고 그 나라는 지금과 같은 거대한 나라들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그 중에서는 거대한 나라도 있었지만 사실 로마라는 나라도 처음에는 별로 그렇게 크지 않았습니다.

 

처음에 예루살렘에 왔습니다.

그때는 베드로와 야고보를 만나고 나서 이방에 복음을 전하려고 갔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복음에 대한 문제로 예루살렘에 왔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보고 유식한 말을 쓰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냥 기록이 되어 있는 대로 말씀을 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더 바르다는 것을 깨닫고 자기 유식한 지식으로 도리어 망하는 길로 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왜 왔습니까?

바로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에 율법주의자들이 들어와서 할례를 받게 하고 있고 그들이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로부터 복음을 들었다고 하기 때문에 사도들과 이 문제에 대해서 확실하게 정의를 내리고 싶어서 왔습니다, 사도바울은 내가 이방 사람들에게 전하는 복음을 그들에게 설명하고, 유명한 사람들에게는 따로 설명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입니다.

이 시대 신학자들을 마치 사도들과 같이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이미 기독교라는 신학을 공부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유대교인과 별로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 시대 어느 신학자가 그리고 어느 총회가 복음을 바로 전하고 있습니까?

 

다른 복음입니다.

그들에게 가서 복음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가는 반드시 이단으로 정죄가 될 것이 분명합니다. 아니 복음에 대해서 이야기를 들으려고도 하지 않을 것이 분명합니다.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에 간 것은 당시 주님으로부터 천국복음을 배웠던 제자들이 있었고 그들은 오순절에 성령을 받은 제자라는 것을 성경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초대교회입니다.

이 시대 그런 교회는 없습니다. 이미 교회는 이스라엘이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오셨을 당시보다 더 타락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지금의 교회는 예수님이 오셨을 때 유대교와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스스로 기독교라는 종교를 만들어서 그렇게 지칭을 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에 다른 복음이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갔습니다. 그것은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에 사도바울이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의 사도들과 한 성령 안에서 인도함을 받고 있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서 배운 유대인들이 와서 다른 복음을 전하니까 직접 예루살렘으로 가서 사도들을 만난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그럴 수도 없습니다.

누가 그리스도편지에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을 한 성령 안에서 교제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지금은 그런 시대가 아닙니다. 이미 교회는 모두가 종교가 되어버렸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와 같이 사도들이 있는 것도 아니고 또 함께 진리 안에서 교제할 수 있는 성도가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말씀 그대로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러나 이 성령도 자기들 마음대로 이야기를 하고 있어서 누가 성령을 받았는지 아니면 거짓인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 믿는 것이 되고 성령을 받았다고 하면 받은 것이 되는 것이 이 시대 교인들의 모습입니다. 성경 안에서 성령의 감동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그것을 분별해야 하는데 어느 누구도 그렇게 하지 않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수고했습니다.

어느 정도 수고를 했는가는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복음성가를 부르면서 예수님처럼 바울처럼 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얼마나 헛되지 않게 했는가를 알고 있기 때문에 그들이 그런 노래를 부르고 있지만 실상은 자기들이 얼마나 헛되게 살아가고 있는가를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빌립보서 2:16절을 보겠습니다. (320)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도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나로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

 

사도 바울이 무엇으로 달음질을 했습니까?

사도 바울은 이방에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것은 생명의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생명을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한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에 다른 복음이 들어왔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가 하나님으로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 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실제입니다.

사도 바울은 계속해서 말씀을 하고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시기 까지 하나님께서 기뻐하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자기 스스로도 이미 복음에 대해서 확실하게 정의를 내릴 수 있는 사람이고 굳이 다른 사람들과의 교제가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 안에 예루살렘으로부터 온 다른 복음을 거짓 형제들로 하여금 사도 바울의 달음질이 헛되게 되었습니다.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는 혼란을 겪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아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으로부터 온 유대인들이 자기들이 사도들로부터 집적 복음을 들었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실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있고 그들로부터 들었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방의 교회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가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가장 큰 교단에 있는 사람이 와서 다른 복음을 전해보시기 바랍니다. 아마도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다 넘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더구나 그 당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있는데 그 제자들이 아직까지 살아 있고 그들에게서부터 배웠다고 하면서 다른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유대로부터 온 거짓 형제들이라는 말씀은 그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서 뭐라 했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제자가 아니라고 이야기를 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더구나 그들과 다툼과 변론이 있었다면 말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아마도 정통성 문제까지도 이야기를 하면서 다른 복음에 미혹을 시키려 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또 그때만 해도 사도들 역시도 율법에 대해서 바르게 정의를 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을 성경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15장을 보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이 가서 자기들이 이방에 복음을 전한 것을 말씀을 하니까 심지어는 바리새파에 있었던 사람들이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예루살렘 교회의 실상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을 전하는 것으로 이제까지 일을 해 왔는데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 안에서 율법의 문제가 발생이 되니까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율법 한 가지입니다.

그것이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을 헛되게 만들고 있습니다, 생명의 말씀을 전했는데 유대에서 온 사람들이 율법을 지키라고 했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다툼과 변론이 있었지만 결론이 나지 않아서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갔지만 역시 그곳에서도 쉽게 결론이 나지 않았습니다.

 

그 결론을 내고 있습니다.

누가 결론을 내고 있는가 하면 야고보가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하면서 이방인들에게 멍에를 메게 하지 말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베드로가 이야기를 하고 그 다음에는 야고보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야고보는 이미 사도행전 15장에서 율법을 지키지 않는 것이 맞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그가 기록한 야고보서를 율법을 행하라는 말씀으로 보고 있습니다, 만약에 야고보가 그렇게 기록을 했다면 우리는 성경을 볼 필요도 없고 야고보는 사도 바울의 말씀과 같이 저주를 받아야 마땅합니다. 분명히 사도행전에서 야고보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믿음에 대해서 말씀을 했습니다, 그런데 야고보서를 마치 로마서와 반대가 되는 성경으로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정말 안타깝습니다.

사도행전 15장을 보기만 해도 야고보가 어떤 믿음을 가졌는가를 알 수 있고 율법을 행하라는 것이 절대로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지만 사람들은 거꾸로 해석을 해서 다른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때에 다른 복음 때문에 야고보가 야고보서를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에게 기록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하지만 그 야고보서를 보고 지금까지의 교회사를 보면 거의 다 율법을 행하라고 가르쳤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로부터 들었습니다.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이 율법을 지킨다는 것을 들었고 그들이 교회 안에 가만히 들어와 이방의 성도들에게 율법을 지키라고 하는 것을 듣고서 야고보서를 통해서 행함이 있는 믿음을 보여라 행함이 있는 믿음이 없다면 너희가 가진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동일한 믿음입니다,

한 성령 안에서 역사를 받고 있는 모든 성도는 동일한 믿음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로마서도 오직 예수를 그리고 야고보서도 오직 예수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로마서는 오직 예수 야고보는 오직 예수라고 하면 행위를 아무렇게나 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면서 그것을 깨우치기 위해서 야고보서를 기록했다고 거짓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래서 왔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과 사도 바울이 전하는 복음이 같다는 것을 갈라디아서를 통해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 중에서 아직 율법을 지키고 있는 그들에게 미혹이 되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이제까지 이방에 복음을 전한 것이 헛되게 되는 일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할례 단 한 가지입니다.

많은 것으로 헛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주의자들이 들어올 때 모든 율법을 지키라고 강요를 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아주 타당성이 있는 단 한 가지를 지키게 합니다, 그것이 표징이 되다 보면 아주 조금씩 율법의 행위를 더 하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주일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것이 사람의 이성으로 생각할 때 나쁩니까? 하나님을 믿는 성도라면 당연하게 하는 것이 예배입니다, 그런데 그 주일이라는 것으로 인하여 수많은 율법들이 가만히 들어오고 있지만 사람들은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한 가지가 마약이 되서 사람들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헛되게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생명의 말씀이 헛되게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안타깝게도 이 시대는 이미 헛되게 되었습니다, 너무 많은 율법을 지키고 있으면서도 종교에 취해서 비틀거리고 있습니다, 아니 사람의 이성에는 기독교라는 종교가 너무 바르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 종교에 들어가게 되어 있고 그 안에 있는 자기가 하나님을 믿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빌립보서 2:12절을 보겠습니다, 320)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사도 바울은 이방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자기 모든 것을 다 드렸습니다, 자기 생명까지도 아깝지 않을 정도로 이방을 사랑했습니다. 그들에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나의 수고가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지금 나 없을 때도 항상 복종하며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복종하라고 말씀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복종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정말 교회 안에는 다른 복음이 아주 쉽게 들어온다는 것을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 다른 복음이 사람의 이성에는 너무도 바르게 보이고 있어서 사람들이 아주 쉽게 빠져 들어가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을 드립니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이루신 구속의 일을 믿는 그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성령의 감동으로 나타나는 역사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일은 오직 하나님께서 기뻐하셔야지 만 가능한 일이지 사람의 이성적 지식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가 신학을 공부를 하고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해도 안 되는 일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다른 복음입니다.

그 첫째가 율법입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서 하고 있는 모든 행위를 통해서 나타나고 있는 내 의입니다, 성경은 이 두 가지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내의와 예수 그리스도의 의와의 싸움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믿음으로 내 것으로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자기의 의를 나타낼 것인가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복음에 복종을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믿음으로 받아 의롭다 함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사람은 교회 안에서 자기의 의를 나타내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사도 바울은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두려워하시기 바랍니다,

정말 사람이 얼마나 쉽게 다른 복음에 미혹이 되는 가를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사람의 이성으로 옳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그것을 반대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에 있는 성도들이 우리보다 지혜가 없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더구나 사도 바울로부터 복음을 들었습니다.

그들은 지금과 같은 목사들로부터 복음을 들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정말 오직 예수만이 나타났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오직 예수만을 전했는데도 이미 초대교회 안에서 다른 복음이 많이 들어왔다는 것을 성경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비단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 뿐 아니라 모든 교회가 다 그렇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구원을 이루시기 바랍니다.

물론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우리가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다른 복음에 미혹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교회 안에서 다툼과 허영으로 하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거듭 말씀을 드리지만 율법은 다툼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 교회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자기가 전한 복음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왜 이렇게 했는가 하면 초대교회에 다른 복음을 가진 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가만히 들어와서 성도들의 자유를 빼앗고 있었기 때문에 예루살렘으로 가서 사도들과 자기 안에 계시가 되어 있는 예수 그리스도가 같다는 것을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에 편지로 보내고 있습니다.

 

정말 다시 말씀을 드립니다.

교회가 얼마나 쉽게 타락을 하는가를 생각하시지 바랍니다. 이 문제는 생명에 대한 것입니다, 주님이 가르쳐 준 제자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방의 사도로 세우신 사도 바울입니다. 이들이 복음을 전한 그때에도 교회는 다른 복음에 미혹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내가 달음질을 한 것이 헛될까 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2000년이 지났습니다.

과연 이 시대 복음을 전하는 교회가 있다고 생각합니까?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를 성경을 통해서 배우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시고 가나안에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얼마나 빨리 타락을 했는가를 사사기를 통해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약 1700년 후에 주님이 오셨습니다.

그때 이스라엘이 어떻게 되었는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니 400년 전에 말라기가 기록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말라기에서 우리가 보면 쉽게 알겠지만 이스라엘과 하나님은 동문서답을 하고 있습니다. 이미 주님이 오시기 전 400년 전에 이스라엘은 완전히 타락을 해서 더 이상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육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의 일을 말씀을 하고 있지만 이스라엘은 육의 말로 동문서답을 하면서 자기들이 얼마나 악에 빠져 있다는 것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영혼의 구원이 무엇인가를 몰랐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자기들을 사랑하시는 줄을 전혀 몰랐습니다.


성경은 그때 그 일이 반복이 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이방의 예표라는 것을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그들이 이미 말라기 시대에 완전히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다면 이 시대는 이야기를 하나마나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이스라엘의 일로만 치부를 해 버리고 있고 자기들은 그저 성경에 문자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예수를 아주 잘 믿고 있다고 착각에 빠져 있습니다.

 

다르지 않습니다,

이 시대는 이스라엘보다 더 타락했습니다. 왜 성경에 이스라엘을 기록하셨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언제 한번이라도 하나님을 믿었던 적이 있는가를 생각하면 정말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2:3절을 보겠습니다. (303)

그러나 나와 함께 있는 헬라인 디도라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아니하였으니

 

새 번역을 보겠습니다.

나와 함께 있는 디도는 그리스 사람이지만, 할례를 강요받지 않았습니다.”

 

함께 있습니다.

한데 어우러져 있다는 말씀입니다, 늘 말씀을 드리지만 성도의 교제는 사람의 만남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가 타락을 하는 가장 큰 이유 중에 하나가 바로 자기들의 동질성을 육적으로 찾으려고 하는데서 부터 출발이 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늘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있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했고 그 복음을 믿는 성도들에게 주님께서 함께 하시고 있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함께 라는 단어의 뜻에서도 말하고 있지만 성경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있다는 것을 계속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라는 말씀입니다.

누가 함께 있습니까? 지금 한국교회를 보시기 바랍니다. 이단이라고 하는 교회도 있고 정통이라고 하는 교회도 있습니다. 정통에서 이단이라고 하는 교회도 정통을 보면서 이단이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자기들의 교리를 이야기하면서 정통은 자기들 밖에 없다고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종교가 점점 통합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이단이라고 했던 교회도 언제 보면 정통 안에 들어와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이단이라고 공격하는 교회가 정통이라는 교회에 들어와 함께 있지는 않습니다. 그것이 어느 정도 서로 동질성을 찾기 까지는 함께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사실 장로교의 교리와 감리교, 성결교, 침례교. 순복음주의 등의 교회와는 교리적으로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아니 함께 있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그들이 한기총이라는 거대한 조직을 만들어서 함께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왜 그런 일이 있습니까?

바로 종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교리조차도 서로 다르면서도 함께 있다는 것은 스스로 서로가 이단이라는 증거가 되기도 합니다. 마치 안식일 교회나 여호와 증인이 함께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불과 5-60년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함께 자기들이 만든 종교 안에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함께 라는 것을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만약에 디도가 누구에게서 할례를 받으라고 강요를 해서 할례를 받았다면 사도 바울과는 함께 있을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육체에 할례를 받는 것을 다른 복음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는데 디도가 할례를 받았다고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디도가 할례를 받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고 그것으로 육체의 모양을 내려고 했다면 사도 바울은 디도와 함께 있지 않을 것이 분명합니다.


사도행전 15:39절을 보겠습니다. (214)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

 

사도 바울은 이방에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 와서 제자들과 함께 자기가 전하는 복음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다시 이방에 복음을 전하러 가려고 합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늘 함께 이방에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마가를 데리고 가는 문제로 심하게 다투었습니다.

 

성경에서 심하게입니다.

실상은 언성이 크게 높아졌고 사도 바울은 마가를 믿음이 있는 성도로 인정을 하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왜 이런 일이 있는가 하면 먼저 이방에 복음을 전하러 갔을 때 마가는 너무 힘이 드니까 도중에 돌아서 왔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마가와 함께 다시 복음을 전하러 간다는 것을 사도 바울은 받아들이지를 못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사람입니다.

물론 마가가 믿음이 없었다는 것이 아니라 육체적으로 너무 고통스러우니까 되돌아 왔습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그런 마가를 보고 함께 갈 수 없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실제 마가는 믿음이 있는 성도였고 나중에 사도 바울이 이 마가를 얼마다 특별하게 생각했는가를 성경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때는 어떻게 했습니까?

마가의 믿음에 대해서 사도 바울이 오해를 했습니다. 함께 라는 것을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믿음이 있는 성도만이 함께 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을 우리가 성경에서 누누이 보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오직 예수를 말씀하였고 만약에 오직 예수가 아닌 사람은 함께 있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나와 함께 있는 핼라인 디도입니다.

사도 바울은 헬라인 디도가 자기와 함께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이것은 인간적인 관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있다는 말씀이며 그것은 사도 바울과 디도가 동일한 믿음으로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빌립보서 4:21절을 보겠습니다. (323)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성도에게 각각 문안하라 나와 함께 있는 형제들이 너희에게 문안하고

 

빌립보 교회입니다.

그 시작도 역시 빌립보에 사는 성도들에게 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에게 문안을 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나와 함께 있는 형제들이 너희에게 문안을 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에게 함께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아닙니다.

물론 초대 교회는 분명히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기독교가 되어 버린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교회는 교회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짐승이 되었던 것과 같이 이 시대 역시 짐승이 되었다는 것을 사도 요한이 환상을 통해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부른다고 해서 함께 있는 사람이라고 해서도 안 되고 형제라고 해서도 안 됩니다.

 

함께 있지 못 합니다.

교회 안에는 분명히 두 사람이 있습니다, 믿음이 있는 성도와 믿지 않고 있는 가라지가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은 자기가 다 믿고 있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아니 믿지 않고 있는 그들이 더 잘 믿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성경은 영의 일입니다.

정말 믿어진다는 것은 기적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역사를 하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비유에서는 믿음이 있는 성도와 그렇지 않은 자들이 함께 있는 것으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초대교회와 같이 복음이 전해지는 교회를 비유로 말씀하고 있는 것이지 복음이 없는 교회를 말씀하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복음이 전해지는 교회입니다. 그 교회 안에는 믿음이 있는 성도도 있고 아직 단단한 식물을 먹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이 전해지지 않고 율법을 지키고 있는 교회 안에는 가라지만 있고 성도가 없다는 것을 분명히 깨닫고 있어야 합니다,

 

음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짐승이 되었습니다. 그 교회에서 구원을 받을 성도가 있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곳에서는 아무리 많은 사람이 있다 해도 구원을 받을 성도는 없습니다, 진리가 전해지고 있는 교회 안에서의 비유지 그렇지 않은 교회에서는 그 비유도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바로 알고 있어야 하고 지금 내가 다니고 있는 교회가 어떤 교회인가를 잘 분별해야 합니다.

 

유대인이냐 헬라인이냐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여야지 함께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편지를 보고 가끔 사람들로부터 전화를 받습니다. 그러나 함께 하는 사람은 아주 적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멀리 지방에 있는 성도는 함께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함께 있지를 못 합니다.

분명히 그리스도편지를 보고 감동을 받고 있지만 함께 있지를 못하고 있는 것을 보면 너무도 안타깝기만 합니다, 그 교회 안에 있으면서 지식으로 알고 있는 그리스도편지의 말씀을 보면서 자기가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분들의 믿음을 폄하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혹시라도 이 말씀을 보고서 오해를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분명한 것은 내가 지식으로 복음을 배웠다면 반드시 그 지혜에 따르는 행함이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지혜를 아는 것으로 끝이 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행함이 따라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물론 처음부터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제 장성한 분량에 이르렀으면 그렇게 해야 합니다. 또한 성도의 교제가 전혀 없는 분들을 생각할 때마다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제가 지방에 계시는 분들에게 하는 말씀이 절대로 아닙니다. 서울 근교에 사시는 분들로서 그리스도편지에서 말씀을 보고 성령의 감동으로 이 말씀이 복음이라고 받아들여지는 사람에게 하는 말씀입니다.

 

함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나 혼자 있다면 그것 역시 문제입니다, 성도는 분명히 교회 안에서 교제를 해야 합니다, 저는 절대로 무교회주의를 주장하고 있지 않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교회를 말씀을 하고 있고 복음이 있는 성도는 그 교회에서 함께 주님의 만찬을 나누어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시편 17:9절을 보겠습니다. (813)

나를 압제하는 악인과 나를 에워싼 극한 원수에게서 벗어나게 하소서

 

사도 바울은 유대인입니다.

그는 어려서 할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할례를 자기 조상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하는 표징으로 삼았고 할례를 받는 자기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주님을 만나고 나서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가 되고 난 이후에는 그것을 표징으로 삼지 않았고 오히려 자기에게 있던 그런 것을 해가 되기 때문에 버렸습니다.

 

압제하는 악인입니다.

누구입니까? 이스라엘 안에 있는 악인입니다. 그 악인이 무엇으로 압제를 하고 있습니까? 바로 우리의 원수가 되는 율법으로 압제를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나를 에워싼 극한 원수에게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이 있습니다.

그것을 보고 이스라엘은 억지로 지키게 했습니다. 사실 율법을 왜 하나님께서 주셨는가를 모르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은 반드시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율법을 지키게 하는 것이 압제고 그것이 억지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할례를 말씀을 하면서 나와 함께 있는 디도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지 않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디도는 그리스 사람입니다.

그런 디도에게 억지로 할례를 받지 않게 했다는 말씀입니다, 갈라디아서는 지금 할례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는 이 할례를 억지로 하라고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율법의 어느 한 가지를 예로 들어서 말씀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율법을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사람을 압제하고 있습니다, 압제라는 것으로 끝이 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 인하여 사망이 오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의문에 쓴 계명의 율법을 원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율법을 지키라고 하는 것이 어떠한 결과를 가져오는 가를 알아야 합니다. 왜 원수인가 하면 진노를 받게 하기 때문에 원수입니다.

 

율법을 감동 받아서 지킵니까?

성경 어디에 그런 말씀이 있습니까? 율법을 내가 자원해서 지키고 있습니까? 성경은 그렇게 말씀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내가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고 그 백성과 같이 살고 싶어서 지킬 지라도 율법이 교회에서 단 한 가지라도 세워지는 순간에 그것은 억지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십일조를 자원한다고 합니다.

아니 하나님의 은혜에 감동을 해서 드리고 있다고 말 합니다, 물론 제가 그들의 마음을 폄하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물론 사람의 이성으로는 분명히 그렇게 드리고 있을지라도 그것은 억지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목사가 십일조를 강요한다고 해서 십일조를 내고 있다고 생각합니까?

 

우리가 기도 한 가지만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처음 교회에 나온 사람이 식사 기도를 하는 것을 모르다가 모두가 하니까 자기도 따라하고 있습니다. 꼭 강제로 시켜서가 아니라 억지가 아니라 다수가 그렇게 하는 행동이 억지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에서 식사 기도를 하는데 누가 기도를 하지 않고 먹을 수 있습니까? 이미 모든 사람이 하고 있다면 그것은 억지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시켜도 억지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다수의 힘이 억지가 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다수가 십일조를 하는데 내가 안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다수가 하나님의 은혜에 감동을 해서 십일조를 내고 있습니까? 그러나 그것이 누군가에게는 억지가 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율법을 세우면 그 자체가 억지가 됩니다.

할례라는 말을 하지 않았으면 누가 할례를 받을 생각이나 하고 또 누가 할례를 이야기 했겠습니까? 이렇게 다수의 힘이 또 누군가의 강한 자의 말이 억지가 된다는 것을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감동이라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율법을 지키면서 감동이라고 하는 말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할례 한 가지도 디도에게 억지로 하게 하지 않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어느 것도 억지로 하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교회 인에 들어가면 그 거대한 힘에 의해서 눌려서 억지로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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