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강, 믿음
데살로니가전서 3:10절을 보겠습니다. (신 331쪽)
“주야로 심히 간구함은 너희 얼굴을 보고 너희 믿음의 부족함을 온전케 하려 함이라”
주의 형제 야고보를 보았습니다.
왜 보았는가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믿음과 야고보의 믿음과 사도 바울의 믿음이 동일하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베드로, 야고보, 사도 바울은 서로 다르게 주님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서로 다르게 주님을 알았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래서 베드로를 보았고 야고보를 보았습니다.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에게 왜 이 말씀을 쓰고 있는가를 깨닫기 바랍니다. 굳이 사도 바울이 누구를 보았다는 것을 기록할 필요가 있습니까? 그러나 주님의 제자들의 대표인 베드로를 만난 것은 그들과 동일한 믿음을 받았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고 또 주의 형제 야고보를 만난 것은 지금 이 시대 야고보서를 보는 사람들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믿음입니다.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에게 내가 너희 얼굴을 보고 믿음을 온전케 하기 위해서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너희 믿음의 부족함을 온전케 하기 위해서 얼굴을 본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도 바울은 야고보를 보았습니다.
야고보도 복음을 전하는 자입니다.
사도 바울도 역시 복음을 전하는 자입니다, 서로 얼굴을 보았다는 것은 복음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는 말씀이고 다른 말씀이 없으면 동일한 믿음이 있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이 시대 야고보서를 다른 복음으로 만들고 있는 모든 사람은 사도 바울의 말씀과 같이 저주를 받게 됩니다. 야고보도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같은 성경을 보고 있지만 저주를 받을 자는 율법을 행하라는 말씀으로 보고 있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는 율법을 버리는 행함을 보이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 말씀 하나 때문에 결국 그 생명이 구원을 받기도 하고 있고 또 저주를 받기도 합니다.
사도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형제입니다, 그들이 만나서 무엇을 했겠습니까? 사사로운 감정을 가지고 만난 것이 아니라 복음에 대해서 서로 이야기를 했을 것이 분명하고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를 통해서 야고보가 동일한 믿음을 가졌다는 것과 그가 쓴 야고보서 역시 복음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기록한 시기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성경이 답을 해 주고 있습니다, 만약에 야고보가 정말 율법을 지키는 행함이 있는 믿음을 보이라고 요구를 했다면 아마도 사도 바울은 야고보를 더 이상 보지도 않았을 것이 분명합니다. 서로 만났다는 말씀의 의미는 바로 동일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1:20절을 보겠습니다. (신 303쪽)
“보라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이 아니로라”
공동번역을 보겠습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써 보내는 이 말이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알고 계십니다.”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에게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왜 갈라디아서를 쓰고 있는가 하면 다른 복음이 교회 안에 들어와서 미혹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복음을 주장하는 자들은 앞에서 말씀을 드린 대로 사도 바울의 정통성까지 의심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살아계실 때 사도들을 다 알고 있는데 사도 바울은 그때에 바리새인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정말로 진심으로 영혼을 생각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에 복음을 전했고 그 복음이 변질이 되는 것을 안타까워했습니다. 더구나 자기가 복음을 전한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들이 너무도 쉽게 다른 복음에 빠져 들어가는 것을 보고 그들에게 다른 복음에 빠지지 말라고 경계를 하고 있습니다,
솔직합니다.
아마도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복음이라는 것이 누구나 쉽게 알 수 있게 전하면 아마 사도 바울이 이 갈라디아서를 쓰지 않아도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복음이 너무도 타당성이 있고 사람의 이성으로는 그것이 옳기 때문에 사람들이 쉽게 다른 복음에 미혹이 되는 것을 보면서 안타까워했습니다,
율법을 다 지키라고 하면 차라리 분별하기가 쉽습니다.
그것이 아니라 교회에 들어와서 아주 타당성이 있는 율법 단 한 가지를 가지고 지키게 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갈라디아서는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이스라엘과 같이 모든 율법을 지키게 하는 사람들이 들어온 것이 아니라 단 한 가지 할례라는 율법을 성경을 통해서 사람의 이성으로 이해가 되게 설명을 하니까 사람들이 거의 다 미혹이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복음을 듣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듣고 믿음에 굳게 서는 사람은 적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미혹하는 자들이 복음에 대해서 다 반대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전하는 복음에 대해서 인정을 합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 단 한 가지를 성경적으로 이해를 시키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리고 율법을 폐하였습니다, 그런데 아주 사소한 단 한 가지를 가지고 그것을 지키게 만들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는 바로 이 단 한 가지의 율법을 지키려고 하는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에 있는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단 한 가지의 율법을 가지고 이성적으로 접근을 하다 보니까 사람들이 쉽게 미혹이 되고 있습니다.
지금 교회를 보시기 바랍니다.
얼마나 많은 율법이 지켜지고 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처음부터 그렇데 되었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처음부터 십일조를 내고 주일을 지키고 새벽 예배를 드렸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단 한 가지의 율법을 사람의 이성에 납득이 되도록 설명을 해서 지키게 하니까 그것이 결국에는 지금의 율법으로 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십일조가 어디서 왔습니까?
유럽의 교회가 십일조를 냈습니까? 그리고 미국의 교회들이 십일조를 냈습니까? 착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십일조를 내지도 않고 십일조는 이미 폐해진 율법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행함이 있는 믿음으로 보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미국에서 우리나라에 복음이 전파될 때 온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주일이라는 것이 왔고 또 성탄절과 추수감사절이 왔습니다. 그런 누룩이 단 한 가지가 오니까 초대교회를 지나오면서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십일조에 열광을 하는 한국교회가 탄생이 되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 안에 헌금의 종류만 해도 십여 가지가 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왜 이런 일이 있습니까?
십일조를 하다 보니까 성전을 건축한다고 하면서 헌금을 하고 있고 선교를 한다고 하면서 선교헌금을 하고 있고 또 추수 감사절이 너무 감사해서 추수감사절 헌금을 하고 있고 심지어는 성경에 있는 문자를 보고 일천번제 헌금을 만들어서 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교회는 계속해서 헌금을 만들어 낼 것이 분명합니다,
이것이 바로 다른 복음의 폭발력입니다,
하나가 들어오면 온 덩이가 퍼지게 만들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 할례 하나 때문에 이 갈라디아서를 기록했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할례를 시작으로 해서 여러 가지 다른 율법들이 들어올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지금 다른 복음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고 내가 사도로서 너희에게 복음을 전했다고 하면서 내가 전한 것이 참말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할례를 받는 것이 타당합니까?
할례를 받지 않는 것이 타당합니까? 물론 이 시대는 할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지 않고 있습니다. 주일을 지키는 것이 타당합니까? 주일을 지키지 않는 것이 타당합니까? 제가 이런 질문을 하는 자체가 잘못된 일입니다, 사람의 이성으로는 그것이 타당하게 생각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을 드립니다,
성찬식을 하는 것이 타당합니까? 성찬식을 하지 않는 것이 타당합니까? 이 성찬식 하나만을 생각해도 이 시대는 아마도 저를 이단이라고 공격할 것이 너무도 분명합니다, 성찬식을 하는 것은 사람의 이성으로 생각할 때 너무도 타당합니다, 더구나 주님께서 너희가 이것을 행하여 기념하라고 말씀을 하니까 지금 이 시대 모든 교회가 다 성찬식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이성입니다.
그것이 나쁘다면 절대로 다른 복음이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너무도 그것이 타당성이 있기 때문에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너무도 쉽게 그들에게 미혹을 당하고 있습니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일이라는 것이 어떤 행위가 없다 보니까 때로는 내가 믿음이 있는 가 또 내가 하나님을 믿는 성도가 맞는가 하는 의구심을 갖게 됩니다.
사도 바울이 그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니까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한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것이 이성적으로 나쁜 것이 아니라 행위로 하는 것이 더 좋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믿음보다는 확실하게 보일 수 있는 그런 행위들을 따라가게 되어 있습니다.
요한일서 1:6절을 보겠습니다, (신 388쪽)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
사도 바울은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에 보내는 이 편지가 거짓말이 아니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초대 교회에 벌써 거짓말을 하는 자들이 들어왔는데 그들이 말이 사람의 이성으로는 너무도 옳게 보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누가 거짓을 말하는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거짓말이라고 하니까 사람들이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하는 거짓말로 생각을 하기도 하고 또 마치 전체가 거짓을 말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앞에서 말씀을 드렸지만 거짓을 말하는 자들이 단 한 가지를 가지고 거짓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이성적으로 받아들여지기 시작을 하면 이제까지 자기가 들어왔던 복음이 다 거짓으로 들려진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카데미에서도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다시 생각해도 너무도 안타까운 일입니까? 정말 지난 몇 년 동안 너무도 잘 복음을 배워왔습니다. 그리고 믿음에 서가는 것같이 보였습니다. 그런데 거짓말하는 자의 단 한 가지 이론에 빠져 그냥 넘어지는 것을 우리가 똑똑히 보았습니다.
이성적입니다.
사람의 이성으로 그렇게 판단이 됩니다, 아니 누가 생각을 해도 그것이 맞습니다. 그런 것 한 가지가 사람을 그냥 미혹하게 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 말이 성경적인가 하면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람의 이성에는 너무도 옳기 때문에 이제까지 배워왔던 복음이 헛된 것이 되고 만 것을 우리가 보았습니다.
무엇이 거짓말입니까?
사도 바울이 보라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이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이 아니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말씀은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이 어두움의 일을 가르친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 아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안타까우면 이렇게까지 말씀을 하겠습니까?
어두움입니다.
이런 것 까지 일일이 설명을 드리지 않으면 안 되는 시대입니다, 주님께서 이 세상에 참 빛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에게 빛을 비춰 주셨는데 이스라엘이 어두움을 더 사랑해서 믿지 않았다고 요한복음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빛이 어두움을 비추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어두움 가운데 행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이 어두움을 더 사랑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악을 행했습니다, 그가 거짓말을 하는가 참말을 하는가를 알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것이 어두움에 있는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어두움이 무엇인가를 이 시대 교인들은 모르고 있고 이스라엘과 같이 어두움을 더 사랑하고 있습니다,
세상에는 두 가지 빛이 있습니다.
두 가지 영광이 있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하나는 율법의 빛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빛입니다, 이 두 가지는 다 빛입니다 성경에서 이 두 가지 빛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는 우리 눈에 보이는 빛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 눈에 보이는 빛이 아니라 마음으로 믿어지는 빛입니다,
율법이 빛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사람의 이성입니다
이 눈에 보이는 빛이 참으로 보입니다. 그렇데 보이는 것이 아니라 이성적으로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성경을 보면서도 또 설교를 들으면서도 어두움의 빛이 참으로 판단이 되기 때문에 그렇게 쉽게 어두움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율법은 어두움입니다,
그리고 거짓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는 참 빛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비춰 지시면 어두움의 빛은 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마치 해가 뜨면 어두운 밤을 비춰 주었던 달과 별의 빛들이 사라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아니 달과 별의 빛은 사실은 태양에 의해서 반사되는 빛을 내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고 율법도 그와 같습니다,
복음은 참 빛입니다.
그리고 율법은 어두움의 빛입니다. 사도 바울이 내가 하나님 앞에서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는 말씀은 어두움의 빛을 지키라고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갈라디아서를 우리가 바로 알아야 합니다. 많은 율법을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단 한 가지의 율법을 사도 바울이 말씀을 하고 있고 할례라는 율법을 자기 육체로 행하는 그것이 다른 복음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거짓을 말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지금 이 시대 교회 안에서 얼마나 많은 거짓을 말하고 있습니까? 쉽게 말씀을 드려서 사람이 하는 모든 행위가 다 어두움의 빛이고 그것이 거짓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은사를 나타내게 하고 있고 율법을 지키게 하고 있고 성도로서 살아가라고 하는 행위들을 가르치는 말들이 다 거짓이라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만 전했습니다.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거짓이 아니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누구에게도 그리고 그가 쓴 어느 성경을 보더라도 율법을 지키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행위를 요구하는 성경이 없다는 것을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성경을 잘못 해석해서 마치 행위를 하는 것으로 보고 있지 실상은 복음만 전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율법을 지키라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교회 안에서 단 한 가지라도 지키라고 하는 것은 거짓말을 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시대는 율법의 행위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교인들이 더 싫어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그동안 거짓에 미혹이 되어 있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는 교회의 현실이기도 합니다.
갈라디아서 1:21-22절을 보겠습니다. (신 303쪽)
“그 후에 내가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에 이르렀으나 유대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들이 나를 얼굴로 알지 못하고”
새 번역을 보겠습니다.
“그 뒤에 나는 시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으로 갔습니다. 그래서 나는 유대 지방에 있는 그리스도의 교회들에게는 얼굴이 알려져 있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의 행적입니다.
사도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아라비아로 가서 구약 성경을 보고 하나님께서 그의 속에 그리스도가 나타나는 것을 보시고 기뻐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아라비아에 가서 있을 때 그가 복음을 알았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사도 바울이 처음 이방에 복음을 전했을 때는 성도들에게는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다메섹으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거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이방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떠났습니다. 그리고 삼년 만에 예루살렘으로 와서 베드로를 만났습니다. 베드로를 만나서 베드로가 주님께로부터 들은 천국 복음과 자기가 구약 성경을 통해서 알고 있는 복음과 같은가를 십오일 동안에 교제를 했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야고보를 만났습니다.
지금 이 시대 가장 문제가 되는 행함이 있는 믿음입니다. 사도 바울은 야고보의 믿음에 대해서 얼굴을 보고 서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어떻게 복음을 깨달았는가는 성령이 오셔서 깨달을 수 있었다는 것을 말씀을 하면서 이 두 사람을 만난 것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방의 교회들이 생겨나기 시작을 했습니다. 이방에 복음을 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이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이런 말씀을 하는 것은 내가 전하는 복음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하나님께서 알고 계신다는 것을 강조를 하고 있습니다, 정말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복음에 대해서 자세하게 말씀을 해 주고 있습니다.
그 후에 바로 전도 여행을 떠났습니다.
성령의 감동을 받아 알고 있는 복음이 확실하다는 것을 베드로와 야고보와의 교제를 통해서 확신을 했고 한 성령 안에서 역사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사도 바울은 또 이방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시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으로 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방에 복음을 전하는 사도입니다.
그가 이방에 복음을 전하기까지의 행적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에 다른 복음이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한 교회에 다른 복음이 들어와서 사도 바울이 오직 믿음에 대해서 말씀을 하니까 그것을 비판하면서 다른 복음을 사람의 이성에 합리적으로 이해하게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복음을 전한다는 것이 참 어렵습니다.
앞에서 말씀을 드렸지만 다른 복음에 얼마나 사람들이 쉽게 미혹이 되는 가를 알아야 합니다,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말씀을 가지고 그것을 사람이 이해할 수 있게 이성적으로 접근을 하면 거의 모든 사람이 다 넘어간다는 것을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통해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정말 복음을 전하는 일만 했습니다.
한 명이라도 더 구원을 하기 위해서 그가 얼마나 수고를 했는가를 성경을 통해서 알고 있습니다. 그는 사람과의 교제보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해서 알게 된 복음을 이방에 전하는데 모든 생각을 집중했습니다. 그런 사도 바울이었기 때문에 이방에 복음이 전파가 되었습니다. 물론 그것 역시 하나님의 섭리이지만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그렇게 사용하셨습니다.
참 안타깝습니다,
저에게 전화를 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가끔 찾아와서 얼굴을 마주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답답하기만 합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저에게 어느 목사를 아느냐고 묻고 있고 어느 교회를 아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저는 모릅니다.
만약에 복음을 전하시는 목사라면 알고 싶습니다. 그런데 복음을 전하지도 않고 다른 복음에 미혹이 되어 있는 목사를 제가 어떻게 압니까? 그가 조금 세상 적으로 볼 때 알려져 있을지라도 저는 그 사람에 대해서 알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솔직히 대형 교회에 아니 뉴스에 언급이 되는 목사 이름 정도는 알고 있어도 제가 아는 목사는 거의 없다고 보면 맞습니다.
알 수도 없습니다,
만약에 그들이 저를 안다고 하면 아마도 이단이라고 할 것이 너무도 분명합니다. 직접적으로는 공격을 하지 않더라도 저를 더 이상 만나려고도 알려고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정말 정치를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족보 이야기를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들을 아는 것과 복음을 전하는 것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당시 유대에 있는 그리스도 교회입니다,
그들은 사도들과 그리고 복음을 믿는 성도들이었습니다. 그럴지라도 사도 바울은 그들을 얼굴로 알려 하기 보다는 이방에 복음을 전하는 일에 수고를 했습니다, 이 시대 자기가 조금 복음을 알고 있다고 하는 사람들이라면 이런 쪽에 관심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어떻게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에 복음을 전했는가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복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속에 그리스도가 나타나시기를 기뻐하시는 가운데서 진리로 인도함을 받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알고 난 후에 그는 주님께서 말씀을 하신 그대로 이방의 사도로서 복음을 전하러 갔습니다.
물론 다 사도 바울과 같을 수는 없습니다.
왜 사도 바울이 이 말씀을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에게 편지를 하는가 하면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에 다른 복음이 들어와서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을 어지럽게 만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이 거짓이라고 하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더욱 더 내가 하나님 앞에서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고 말씀을 하면서 어떻게 복음을 전했는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1:23절을 보겠습니다. (신 303쪽)
“다만 우리를 핍박하던 자가 전에 잔해하던 그 믿음을 지금 전한다 함을 듣고”
새 번역을 보겠습니다.
“그들은 다만 "전에 우리를 박해하던 그 사람이, 지금은 그가 전에 없애버리려고 하던 그 믿음을 전한다" 하는 소문을 들을 따름이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에서 어떻게 알았습니까?
사도 바울은 그들과 직접적인 교제는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미 베드로를 만났고 또 주의 형제 야고보를 만났습니다. 그들을 통해서도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서는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무엇을 전합니까?
믿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왜 사도 바울이 처음에 그리스도인을 핍박을 했습니까? 사도 바울도 분명히 하나님을 믿는 이스라엘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믿지를 않았습니다. 믿지를 않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을 핍박을 했던 것입니다.
로마서4:14절을 보겠습니다. (신 244쪽)
“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후사이면 믿음은 헛것이 되고 약속은 폐하여졌느니라”
성경을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영의 생명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이성으로 볼 때는 율법에 속한 자들이 하나님의 백성과 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믿음을 가진 자들이 후사라는 말씀입니다, 율법에 속한 자들은 하나님을 믿는 것을 다 겉으로 보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을 가진 성도는 하나님께서 그 마음에서 역사를 하고 있기 때문에 보일 수 없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율법에 속한 자들은 반드시 믿음에 있는 성도들을 박해하게 되어 있다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도 율법에 속해 있을 때는 믿음에 있는 성도들을 박해하려고 다메섹으로 갔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을 잡아서 죽이려고 열심을 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믿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열심을 냈습니다.
기업입니다.
교회 안에서는 그 싸움이 영적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율법주의는 늘 복음을 전하는 성도를 핍박을 했습니다. 주님께서도 이스라엘이 선지자들을 얼마나 핍박을 했는가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율법주의에 있을 때는 이렇게 믿음이 있는 천국의 백성들을 핍박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를 주님께서 부르셔서 이방의 사도로 삼았습니다.
전에 핍박하던 믿음입니다.
이 시대도 믿음에 대해서 핍박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편지를 통해서 오직 믿음에 대해서 말씀을 하면 심지어는 이단이라고 공격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왜 그렇게 하고 있는가 하면 바로 율법에 속한 자들이기 때문에 자기들과 원수가 되고 있는 믿음에 있는 자를 핍박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했던 사도 바울이 오직 믿음을 전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 잔해하던 믿음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방에 복음을 전하니까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들이 전에 잔해하던 믿음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하는 복음을 전하고 있다는 말씀을 소문으로 들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와 직접적으로 교제가 없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오직 믿음이라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이 자기가 복음을 전하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베드로와 야고보를 만나고 나서 이방에 복음을 전하는데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가 전에 핍박을 하던 그 믿음을 전하고 있다고 소문을 들었다는 말씀입니다, 예루살렘의 교회에서도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복음을 전하고 있다는 소문이 났다는 말씀입니다.
율법주의에 빠지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가 지키고 있는 단 한 가지의 율법이 복음이 있는 성도를 핍박하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앞으로 갈라디아서를 통해서 사도 바울이 그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율법이 무엇이라는 것을 모르고 그저 세뇌가 되어서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왜 율법을 지키는가 하면 사람의 이성으로는 그것이 너무도 옳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5:1절을 보겠습니다, (신 245쪽)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그 믿음이 무엇입니까?
그저 교회에 나와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그런 것은 종교적인 믿음입니다. 교회에 나와서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모든 행위들은 불교에서 부처를 믿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 믿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얻는 그것입니다.
사람의 이성입니다.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이 의롭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씀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전한 믿음이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의롭다 하심을 얻는 믿음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사람의 이성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믿음이 없이는 안 됩니다.
율법을 지키고 있는 사람은 이 성경 말씀을 문자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그저 맹목적으로 인정을 하고 있습니다. 문자적으로 알고 있어서 성경이 그렇다고 하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서 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가를 알아야 하고 그것이 또 율법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믿음을 전했습니다.
그 믿음은 영생을 얻는 믿음입니다, 율법 외에 나타난 한 의를 통해서 의롭다 하심을 얻고 영생을 얻는 그것입니다, 율법 외에 나타난 한 의를 믿으면 율법을 지켜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것을 문자적으로 알고 있고 그저 앵무새처럼 이야기를 하면서 교회 안에서 다른 의 율법을 지키는데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고 그렇게 의롭게 된 성도가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의롭다 하심을 받은 성도는 당연히 또 다른 의를 말하는 율법을 지키지 않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사도 바울이 전에는 율법을 지키면서 믿음이 있는 성도들을 핍박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핍박을 하던 그 믿음을 가진 성도들의 믿음을 전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율법을 행위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율법 외에 나타난 한 의로 의롭게 되어서 천국에 들어가는 그 믿음을 전파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 믿음입니다.
성경은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 사람들이 혼동을 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종교적인 믿음이 있고 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두 가지를 잘 알고 있어야 하는데 성경을 너무 좋은 것이 좋다고 생각하면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 믿음을 전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전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종교적인 포괄적인 믿음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영생을 얻는 그것을 전해야 합니다. 그 믿음이 아닌 다른 것을 전하면 모두가 다른 복음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교회 안에 들어온 사람들이 복음과 다른 복음을 분별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믿음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다른 복음을 분별할 수 있습니까? 세상에서 아무리 지혜가 있다 해도 또 그가 모태서부터 신앙생활을 했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 주시지 않으면 분별할 수 없습니다.
성경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어떠한 행위를 하고 또 율법을 지키고 은사를 행하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영생을 얻으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려면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야 합니다. 아는 것은 사람이 평생을 이것만을 생각하며 지혜를 구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지금 한국 교회입니다.
아니 세계의 교회입니다. 그리고 이단이다 정통이다 할 것이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전한 그 믿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복음을 전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기 바랍니다, 그렇게 다른 복음을 듣고 있고 그것을 행하는 사람은 반드시 주님께서 오실 때 바깥 어두운 곳에 쫓겨나 슬피 울며 이를 가는 날이 온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편지의 말씀이 그저 어느 목사의 주장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그런 날이 오게 됩니다, 더구나 그리스도편지에서 말씀을 보고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모르고 다른 복음에 빠져 있다면 그 날에 더욱 더 통곡을 하게 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늘 지혜를 구해서 복음이 무엇인가를 바로 알고 믿으시기 바랍니다. 매너리즘에 빠져 내가 잘 믿고 있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도 그랬습니다.
갈라디아서 1:24절을 보겠습니다. (신 303쪽)
“나로 말미암아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니라‘
공동번역을 보겠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내가 하는 일을 두고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왜 하나님을 찬양했습니까?
사도 바울이 전에 자기들을 잔해하던 그 믿음을 전하는 것을 보고 하나님을 찬양을 했다는 말씀입니다. 이방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가 되고 그를 통해서 성도들이 있는 교회가 생겨나고 그 안에 구원을 받는 성도들이 더해졌다는 것을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는 말씀입니다.
그 믿음을 전해야 합니다.
다른 것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이방에 전해지는 그 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지금 교회 안에서는 그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하는 행위를 보고 그것으로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다. 아니 그 믿음에 대해서 전해지도 않고 있습니다.
입에 바른 말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는 그 말 한마디 하고 오직 예수라고 크게 떠들고 있으면서 거의 대부분의 설교가 다른 복음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인들은 그저 예수를 믿으라는 그 한마디를 듣고 마치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것을 듣고 예루살렘에 있는 먼저 믿었던 교회의 성도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지금 이 시대는 복음이 사라졌습니다. 아니 오직 예수는 분명히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오직 예수를 자기들의 종교를 위해서 떠들고 있는 말이지 실상은 오직 예수가 무엇이라는 것조차 모르고 다른 복음만 전해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의 일입니다.
이 시대 교회 안에서 목사들이 하는 일입니다, 그것이 같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했지만 이 시대 목사들은 다른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솔직히 주일이라는 날을 지키라고 하는 그 자체가 아니 지키고 있는 자체가 이미 그 안에서 전해지고 있는 모든 말들이 다른 복음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전도를 합니까?
그리고 세상에 나가서 선교를 합니까? 그런 모양들을 보면서 마치 그 교회가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미 기독교라는 종교에 미혹이 되어서 자기들의 종교를 전하고 있는 사람들에 불과합니다. 그저 예수라는 이름을 자기들이 전하는 종교를 위해서 사용하고 있을 뿐이지 실제로는 기독교라는 종교를 전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 보시기 바랍니다.
아주 작은 교회도 자기들이 선교사를 지원한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 하고 있는가 하면 사도 바울과 같이 자기들도 이방에 복음을 전하고 있다고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교인들은 그런 선교를 하는 것을 보면서 마치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것으로 영광을 돌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다른 복음이 전해지고 있고 기독교라는 종교가 전해지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그 영광을 기뻐하시겠습니까? 예수는 그저 자기들의 종교를 위해서 필요한 이름에 불과하지 실제로는 세상의 모든 교회는 이미 짐승이 되어서 기독교라는 종교를 믿고 있습니다, 마치 이스라엘이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은 것과 같이 이 시대도 역시 그렇습니다.
복음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거짓 선지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늘 깨어 성경을 보면서 지혜를 구하는 성도들에게 이 복음을 계시해 주실 줄 믿습니다. 그런 성도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고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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