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니라(요6:63.)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복음과 율법-설교2

제9강, 자유

윤주만목사 2018. 10. 17. 15:54



9, 자유

요한복음 8:32절을 보겠습니다. (159)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진리이십니다, 또 진리의 하나님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진리를 알아야 자유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기들이 자유하다고 말을 하고 있으면서 율법을 지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을 정말 바로 보시기 바랍니다.

 

진리가 자유케 합니다.

그것은 진리를 알 때 가능한 일입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에 이 진리에 대해서 전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다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진리를 전해서 자유하고 있는 그 교회 안에 다른 복음을 가진 거짓 형제들이 들어와 그 자유를 엿보고 율법을 지키게 함으로 해서 종을 삼으려고 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참 이상합니다.

율법을 지키는 그들이 자유하다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온전히 지키지도 못하고 무거운 멍에를 매고 있는 그들이 자유하다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자유라는 것은 자유를 누리 수 있어야 자유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이 말로 자유 한다고 해서 무슨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자유 하는 것이 아니라 구속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자유하고 있습니까?

그러면 그가 자유를 행하고 있어야 합니다. 구속이 되어 있으면서 종이 되어 있으면서도 자유 한다고 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율법에 의해서 종으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 자유 한다는 것은 성립이 될 수 없는 말이라는 것을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진리를 알아야 합니다.

그 진리가 무엇입니까? 조금 전에 말씀을 한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받을 자 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는 것이 진리입니다, 이런 말씀을 깨닫지도 못하는 그가 어떻게 자유 할 수 있습니까? 성경에서 진리가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 진리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이루신 모든 구속의 일들이 포함이 되고 있습니다.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야고보서의 말씀도 이해를 못하는 그들이 어떻게 자유 할 수 있습니까? 아니 어떻게 진리를 안다고 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이루신 중요한 일 중에 한 가지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자유하게 하는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자유하게 하는 율법이 무엇인가를 모르고 오히려 율법을 지키면서 자유 한다고 아주 이상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진리를 아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주님을 아는 것입니다, 또한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이루신 구속의 일들을 알고 믿는 그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유 하는 율법대로 심판 받을 자처럼 말을 하고 행하기도 해야 하는데 이 시대는 이 말씀을 보고 오히려 거꾸로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들이 자유하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그것은 한 마디로 희극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을 보면 뭐 합니까?

그리고 성경을 문자적으로 아무리 많이 알면 뭐 합니까? 또 히브리어를 알고 헬라어를 알면 뭐 합니까? 그것은 다 이 세상의 초등학문이라는 것을 바로 깨닫고 있어야 합니다. 성경의 문자는 진리가 아닙니다, 그것을 진리라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림자입니다.

그리고 비유와 은유입니다, 그것을 아는 것을 가지고 마치 진리를 아는 것으로 오해를 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말씀에서 그림자를 걷어내고 또 은유와 비유를 바로 알아야 진리가 보일 수 있습니다. 이 시대 교회는 진리에서 벗어났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자유를 빼앗기고 있고 종교에 의해서 종이 되어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모르면 죽습니다.

그러나 알면 삽니다. 성경에서 진리를 모르면 죽고 진리를 알면 살게 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성경의 문자는 절대로 진리가 아닙니다, 그것은 이 세상의 책과 마찬가지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 것을 아는 것으로 자기가 마치 진리를 아는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다 보니까 종이 되어 있으면서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11:20절을 보겠습니다. (298)

누가 너희로 종을 삼거나 잡아먹거나 사로잡거나 자고하다 하거나 뺨을 칠지라도 너희가 용납하는도다

 

종으로 삼고 있습니다,

복음이 전해진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는 종으로 삼으려고 하는 자들이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 시대는 스스로 종이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아니 종이 안 되면 안 되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고 종이 되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아주 잘 용납을 하고 있습니다.

 

용납합니다.

그것은 스스로 종이 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거짓 형제가 들어와서 종을 삼기도 전에 스스로 종이 되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이 말씀은 복음이 전해진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에 해당이 되는 말씀입니다, 지금 이 시대는 이미 313년을 지나오면서 아니 그 이전부터 종이 되었다는 것을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미 용납을 했습니다,

너그럽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종을 삼거나 잡아먹거나 사로잡거나 자고하다 하거나 뺨을 칠지지도 너그럽게 용납을 했다는 말씀입니다, 사실 이것이 말이 됩니까? 이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자기를 종으로 삼고 자기의 뺨을 치는데도 그것을 너그럽게 받아들인 다는 것이 어떻게 상식으로 이해가 됩니까?

 

하지만 그렇게 됩니다.

왜 그렇게 되는가 하면 그것이 바로 육체의 자랑이기 때문입니다. 종을 삼거나 잡아먹거나 사로잡거나 뺨을 칠지라도 너그럽게 받아들이는 이유는 그것이 사람의 이성으로는 너무도 좋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지키게 하고 있고 그 율법으로 자기 육체가 더 좋아지는 것을 사람들이 보기 때문에 오히려 스스로 종이 되기를 원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다 무엇입니까?

육체의 자랑이라는 말씀입니다. 종이 되는 것도 육체의 자랑입니다. 잡아먹는 것도 육체의 자랑입니다 사로잡히는 것 역시도 육체의 자랑입니다, 뺨을 치는 것 역시 육체의 자랑입니다. 이 모든 것이 다 교회 안에서 육체의 자랑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너그럽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육체대로 싸우는 것입니다.

육체대로 싸우려고 종이 되고 있고 육체대로 싸우다 보니까 잡아먹히고 육체대로 싸우다 보니까 사로잡히고 육체대로 싸우다 보니까 뺨을 맞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에서 나쁜 의미로 기록된 말씀들은 사람의 이성으로는 좋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이 다 육체로 싸우는 것에서 나옵니다.

또 그 싸워서 이긴 것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교회 안에서 너무도 좋은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너그럽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복음이 전해진 초대 교회에 벌써 이런 현상들이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지금의 교회는 초대 교회와 비교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지금은 복음을 전하는 교회가 없다는 것을 먼저 깨달아야 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교회가 있습니까?

물론 어딘가에는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제 눈으로 보고 있는 지금 한국에 있는 교회에서는 없다는 것을 말씀을 드립니다, 제가 이 판단을 잘못 했다면 그것은 제가 주님으로부터 받을 벌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편지에 있는 설교를 보고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그저 좋은 것이 좋다고 하는 사람은 결국에는 사망에 이르게 됩니다.

 

초대교회는 복음이 전해졌습니다.

그런데 다른 복음이 들어오니까 너그럽게 받아들였습니다, 왜 그렇게 쉽게 너그럽게 받아들였는가 하면 사람의 이성으로 논리적으로 이야기를 하니까 그것이 옳기 때문에 받아들였다는 말씀입니다 율법을 지키라는 것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라고 하는 것 하나님을 믿기 위해서 은사가 나타내는 것을 누가 나쁘다 할 수 있습니까?

 

율법은 백해무익입니다,

그러나 은사는 필요악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제가 은사 자체를 전혀 부정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은사가 필요악이라는 것을 여러분이 모르면 사망에 이르게 되어 있습니다. 예배도 필요악이 되고 있고 기도도 필요악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 이 시대 부르고 있는 찬양이라고 하는 것은 백해무익하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고 있어야 합니다,

 

제가 복음을 전하는 것도 은사입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이 은사가 필요는 합니다, 하지만 이 은사가 악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모르게 되면 결국에는 악으로 변해서 사망에 이른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이 백해무익하고 필요악인 그것들이 너무도 좋기 때문에 자기 스스로 종이 되기를 원하고 있고 그런 것을 행하는 것을 너그럽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다릅니다.

복음이 전해지지도 않는 상태에서는 너그럽게 받아들이고 말 것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한 교회에서 너그럽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지 이 시대 교회는 이미 오래 전부터 복음이 없고 다른 복음만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죄송합니다.

구원을 받을 사람 없습니다. 장로교인도 안 되고 감리교인도 안 되고 침례교인도 안 되고 성결 교인도 안 됩니다, 이단은 아예 제가 말씀을 드리지도 않겠습니다. 거짓 형제들은 이렇게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유를 엿보고 종교로 만들어서 모든 사람을 사망으로 끌고 가고 있습니다,

 

그것이 요한계시록 13장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교회가 짐승이 되어서 모두가 사망이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이방의 교회가 또 짐승이 되었습니다. 성도가 얼마나 적다는 것을 깨닫기 바랍니다. 이미 이방의 교회는 짐승에게 절하고 있고 그에게 표를 받아서 매매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짐승에게 들어가고 있습니다.

복음이 있는 주님의 교회가 없기 때문에 지금 이 시대 교회에 나간다는 것은 그대로 짐승에게 사로잡힌다는 것을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복음이 있는 교회가 있어야 그 안에서 복음을 듣고 그 이후에 짐승에게 사로잡히고 말 것이 있는데 이 시대는 교회에 들어가는 순간에 모두가 짐승에게 사로잡히게 된다는 것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복음이 없습니다.

이것은 너무도 불행한 사실입니다, 차라리 이 나라에 기독교가 전파되지 않는 것이 더 유익하다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복음이 들어와도 구원을 받는다는 보장이 없는데 기독교라는 종교가 들어와서 인구의 3분의 1일 다 짐승에게 사로잡히게 만들고 있습니다.

 

종이 되었습니다.

사로 잡혔습니다. 그러면서도 너그럽게 용납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너무 좋아서 그 안에서 그렇게 사는 것을 기쁨으로 여기고 있고 자기들이 성도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작은 소자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매이우고 바다에 들어가는 것이 더 낫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무서운 말씀입니까?

그런데 그 짐승에게 사로잡혀서 그 안으로 많은 소자들을 경쟁적으로 이끌어 들이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는 사람이나 그것을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나 차라리 예수를 안 믿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왜 주님께서 차라리 연자 맷돌을 목에 매고 바다에 던지는 것이 낫다고 하셨는가 하면 그들이 받을 형벌이 너무 크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종이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거대한 짐승은 이스라엘을 다 종으로 삼고 사로잡았습니다. 또 다른 짐승 하나가 이방의 교회 안에 들어온 사람들을 종으로 삼고 사로잡았다는 것을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짐승에게 사로잡히는 자는 차라리 그가 낳지 않는 것이 좋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 교회 안에서 누리고 있는 그 기쁨이 반드시 통곡의 날로 다가올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5절을 보겠습니다, (303)

우리가 일시라도 복종치 아니하였으니 이는 복음의 진리로 너희 가운데 항상 있게 하려 함이라

 

새 번역을 보겠습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잠시도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복음의 진리가 언제나 여러분과 함께 있게 하려고 한 것입니다.”

 

공동번역을 보겠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에게 전한 복음의 진리를 보존하려고 우리는 조금도 양보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복음입니다.

그들은 거짓 형제입니다. 그들이 무엇을 가지고 성도들을 미혹을 하고 있는가 하면 아주 타당성이 있는 율법 한 가지를 가지고 들어와서 그것을 지키게 함으로 해서 종을 삼고 있습니다, 그 하나에 종이 되는 순간에 점점 더 많은 율법을 지키게 되어 있고 결국에는 짐승에게 사로잡히게 된다는 것을 성경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잠시도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조금도 양복하지 않았습니다, 새번역이나 공동번역이나 똑같이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한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에 거짓 형제들이 들어왔지만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으로 믿음에 든든히 서 있어서 잠시도 굴복하지 않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양보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갈라디아서를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이 가지고 들어온 것이 무엇인가 하면 할례입니다. 앞에서 말씀을 드렸지만 유월절을 먹으려면 반드시 이방인이라도 할례를 받고 먹어야 한다는 구약의 율법을 문자 그대로 보고 거짓 형제들이 들어와서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에 있는 성도들을 종으로 삼고자 했다는 말씀입니다,

 

초대 교회입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에 격려를 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 중에는 분명히 일시라도 복종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일부는 할례를 받았습니다. 여러분이 복음을 어떻게 지켜야 한다는 것을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아주 작은 것 양보 하나가 결국에는 종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조금도 양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제 그리스도편지를 통해서 복음을 듣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많은 것으로 넘어진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단 한 가지의 양보가 결국에는 짐승의 종이 되고 그에게 사로잡혀서 사망으로 가게 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성경을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이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알면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성경은 또 다른 양면이 있습니다. 이 성경을 보고 이스라엘이 율법주의가 되었다는 것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이 시대 역시 율법주의가 되었고 이스라엘에 하나를 더 얹어서 은사주의까지 성행을 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 하나가 지금의 교회를 만들어 놓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 이 시대는 너무 많은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육체의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믿음이라고 말을 하지만 실제로는 육체의 싸움이라는 것을 바로 깨닫고 있어야 합니다. 자기 육체로 행하면서 그것을 믿음이라고 하는 사람은 성경을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이 그렇습니다.

거짓 형제가 무엇을 가지고 이야기를 합니까? 그들이 무엇을 가지고 종으로 삼으려고 하고 있고 굴복을 하게 만들고 있습니까? 성경에 있는 말씀을 가지고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없는 말씀을 가지고 하면 절대로 종이 되지도 않고 사로잡히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있는 말씀을 가지고 이야기를 하기 때문에 종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할례 얼마나 타당성이 있습니까?

아브라함에게 이미 말씀을 하셨습니다. 네 집에 있는 종이라도 다 할례를 받게 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또 할례를 받은 사람만이 유월절을 먹을 수 있습니다. 이제 막 이방에 복음이 전파되기 시작한 때에 할례는 그들에게 있어 너무도 당연한 표징이었습니다.

 

이 말씀을 지금 이 시대와 같이 이야기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시대는 너무 많은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기들이 지키고 있는 율법을 믿음이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사단에게 세뇌가 되어 있는지 율법이 믿음이 되어 있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지만 사람들은 지각이 없어 성경을 보면서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단 한 가지의 율법이고 단 한 가지의 행위고 단 한 가지의 은사가 그렇게 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조금도 양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무엇에 대해서 양보하지 말라는 말씀입니까? 다른 복음에 대해서 양보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지금 교회는 양보하고 말 것이 없습니다, 이미 율법을 지키고 있고 그 안에서는 은사를 서로 자랑하고 있고 그 은사를 통해 감성적으로 감동을 받는 그것으로 자기가 은혜를 받았다고 하면서 이성을 상실하게 만들어서 복음을 알지 못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내가 진리에 서 있을 때입니다,

그때 양보하는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이미 진리에서 멀어진 사람들은 양보라는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이미 종이 되어 있고 사로잡혀 있는 사람은 양보라는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이미 다른 복음에 복종을 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지금 갈라디아서의 이 말씀이 해당이 안 됩니다.

 

율법을 모릅니까?

성경에 문자적으로 기록이 되어 있는 613가지 율법을 모릅니까? 그것을 믿음이라는 말로 복종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가 아무리 믿음이라고 강변을 해도 하나님께서 그것을 율법으로 정하셨으면 율법입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이라고 말씀을 하는데 내가 믿음이라고 한다면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겠다는 사람입니다.

 

안 믿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그것을 믿음이라고 말을 합니까? 그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성경 어디에도 율법을 믿음으로 했다는 말씀이 없습니다. 누가 그런 말씀을 기록했는지 성경에서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왜 성경에도 없는 말을 자기들이 만들어서 하고 있는지 이해가 안 되고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로마서 10:3절을 보겠습니다. (253)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복종치 않았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의에 복종을 해야 합니다. 나의 의와 하나님의 의는 동전의 양면이라고 늘 말씀을 드렸습니다. 내 의가 나타나면 하나님의 의는 사라지고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면 내 의는 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내 의와 하나님의 의는 함께 공존할 수 있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지금 로마서에서 그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는 하나님의 의에 복종했습니다.

하나님의 의에 복종을 하니까 내 의에 복종을 하지 않았다는 말씀입니다 내 의가 어디서 나오는가 하면 율법에서 가장 먼저 나오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에서도 나오고 있고 은사에서도 나옵니다, 그러나 가장 먼저 나오는 것이 율법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어느 것에 복종을 하는가 하는 싸움입니다.

내 의를 세우려고 율법에 복종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의를 세우려고 복음에 복종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내 의도 세우고 하나님의 의도 세운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얼마나 사람의 이성으로는 좋게 받아들여집니까? 그래서 사람들이 쉽게 종이 되고 사로잡히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의 이성으로는 옳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아니라고 하면 아닌 것입니다, 성경이 아니라고 말씀을 하고 있는데 왜 사람의 이성을 이야기 합니까? 그는 하나님을 믿지 않겠다고 하는 사람입니다. 어느 것에 복종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이 구원을 받기도 하고 또 저주를 받기도 합니다,

 

할례 사람의 의입니다.

그것이 사람의 육체를 통해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정말 복음에 복종을 하고 있는 성도는 이런 사람의 육체를 통해서 나타나고 있는 그 의에 복종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지금 그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에 복종을 하니까 사람의 육체를 통해서 나타나고 있는 그것에 복종치 아니하였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에 할례입니다.

그것은 율법을 대표하는 한 가지입니다. 할례에 복종을 하는 것은 그 할례 한 가지에 복종을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율법에 복종을 하게 되고 율법에 종이 된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에 하나님의 의를 가르쳤습니다, 이 복음을 들었기 때문에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는 다른 복음에 복종치 아니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의입니다.

율법 외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입니다, 그러면 다른 복음은 무엇인가 하면 바로 내 의입니다. 내가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내가 성화가 되기 위해서 성도로서 살아가는 모양을 내고 있습니다, 내 육체를 통해서 은사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것이 다른 복음이라는 말씀입니다.

 

율법을 지켜라

은사를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하는 것 내 육체를 통해서 나타나고 있는 모든 것을 하라고 하는 것이 다른 복음이라는 말씀입니다.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도는 주님께서 부탁하신 말씀과 같이 복음을 전하는 일에 힘써 행해야 합니다. 제가 그것까지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복음을 전합니까?

그러면서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까? 그것이 다른 복음입니다 쉽게 말씀을 드립니다. 어느 교회는 선교사를 많이 파송을 하고 있습니다. 자기 교회 건물도 짓지 않고 외국에는 교회를 짓고 또 선교사들을 파송하면서 복음을 전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가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선교사들을 지원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들이 해외에서 복음을 잘 전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율법에 있는 십일조를 하고 있습니다. 그 교회 안에 있는 교인들은 자기들이 하는 십일조를 아까워하지 않고 있습니다, 자기가 내고 있는 십일조를 통해서 복음이 전파된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정말 하나님을 진심으로 믿으면서 그 일에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십일조를 냈습니다, 그것은 내가 믿음으로 했든 아니면 하나님께 감사를 해서 했든 아니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든 내가 했으면 내 의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더구나 십일조는 분명히 율법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십일조에 대한 율법이 많이 있습니다,

 

그것이 복음입니까?

그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은 다 다른 복음을 듣고 있고 그 다른 복음에 복종을 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선교 좋습니다. 제가 그것을 반대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그러나 다른 복음을 가지고 하는 그 선교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것을 통해서 영혼이 구원을 받습니까? 기독교라는 교인을 많이 교회 안으로 불러들일지 몰라도 성도는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미 다른 복음에 복종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그들이 복음을 전파하겠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자기들은 다른 복음에 복종을 하고 있으면서 어떻게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까? 다른 복음에 복종이 되어 있는 사람은 아니 짐승에게 사로 잡혀 있는 사람은 성경을 도무지 깨달을 수 없습니다. 아니 종교인으로 평생을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살다가 지옥으로 가서 고통 중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얼마나 안타깝습니까?

그 십일조를 내기 위해서 얼마나 힘쓰고 있습니까? 정말 그 십일조를 내서 다른 나라에 교회가 하나 세워지는 것을 보고 얼마나 감동을 받고 있습니까? 하지만 그것은 내 의고 다른 복음이라는 것을 바로 깨닫고 있어야 합니다. 십일조를 믿음으로 드린다는 정신 나간 말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율법을 지키고 있는 것이지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내 의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진심으로 믿어서 했다고 해도 그것은 내 의고 율법을 지키는 다른 복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이루신 구속의 일이며 그것을 오직 믿음으로 역사하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나에게 임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율법으로 기록이 되어 있으면 율법입니다.

그것을 믿음으로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며 그것을 믿음이라고 하는 것이 바로 다른 복음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 다른 복음에 복종을 해서 한다고 하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용납 하시겠습니까? 그것은 잘하는 일이 아니라 저주를 받을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복음에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복음에 복종을 하면 저주를 받는다고 사도 바울이 분명히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싸움입니다.

내의와 예수 그리스도의 의와의 싸움입니다. 어느 것에 복종을 하느냐에 따라 그 영혼이 구원을 받기도 하고 진노를 받기도 합니다. 이 두 가지를 함께 한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그것은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반드시 하나에 복종을 하면 하나는 복종치 않게 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시편 40:11절을 보겠습니다. (831)

여호와여 주의 긍휼을 내게 그치지 마시고 주의 인자와 진리로 나를 항상 보호하소서

 

다른 복음에 복종치 마시기 바랍니다.

이는 복음의 진리로 너희로 항상 함께 있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복음의 진리로 있어야 하는데 다른 복음이 이 시대는 교회 안에 가득차 있어 종이 되어 버렸습니다. 거짓 형제의 종이 되어 있으면서도 자기가 누구의 종이라는 것조차 모르고 있습니다.

 

다른 복음

이것을 사람의 이성으로는 분별하지 못 합니다. 그래서 시편에서 주의 긍휼을 네게 그치지 마시고 주의 인자와 진리로 나를 항상 보호해 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얼마나 쉽게 다른 복음에 빠지는 가를 알아야 하는데 이 시대는 다른 복음이 무엇이라는 것을 모르고 오히려 스스로 그 다른 복음 안으로 들어가기를 좋아하고 있습니다.

 

주의 인자와 진리로 나를 항상 보호하소서

정말 주님의 은혜가 아니고는 우리가 복음의 진리로 항상 함께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지금 성경을 보고 복음을 깨달았습니까? 또 그 복음을 듣고 있습니까? 이것을 표현할 수 있는 언어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은혜를 모르고 있습니다.

그저 기독교라는 종교가 세상에 전파되는 것을 보면서 다수가 그 종교에 들어가 있는 것을 보고 그 안에서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구한다 해서 사람들은 자기들이 복음 안에 있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이스라엘을 통해서 계속해서 가르쳐 주고 있지만 자기들은 다르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분명히 이 세상에 죄인을 찾아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다른 복음에 미혹이 되어서 율법주의가 되었고 의인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율법주의가 되어 자기의 의를 가지고 있는 것을 주님께서는 부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시대 역시 다른 복음에 미혹이 되어 자기들의 의로 부자가 되어 있으면서도 전혀 깨닫지를 못하고 그것을 믿음으로 행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다른 복음이었습니다.

그들은 진리를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서 다 계시를 해 주셨지만 그 성경을 문자 그대로 보다가 결국에는 스스로 율법주의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주의 은혜로 복음 안에 있어야 하는데 성경을 보면서 스스로 다른 복음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 사람입니다.

 

항상 있어야 합니다.

복음의 진리가 항상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양보를 하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복음의 진리에 든든히 서 있지 않으면 반드시 다른 복음에 굴복하게 되어 있다는 말씀입니다. 다른 복음에 굴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복음의 진리가 항상 우리 가운데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복음도 모르고 있고 진리도 모르고 있습니다.

 

그저 종교만 있습니다.

자기들의 필요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를 부르고 있고 그 외에 모든 것은 종교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 종교가 되어 있는 교회로 사람들을 전도하고 있고 그 종교가 되어 있는 교회가 또 다른 나라에 선교를 하러 가고 있습니다. 그 종교가 우리나라에 기독교라는 종교를 전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씀을 드립니다.

복음과 다른 복음은 동전의 양면입니다 이 두 가지가 함께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물론 그들의 입으로는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를 주여 주여 하고 부르고는 있지만 실상은 믿음이 없는 다른 복음에 의해서 종이 되었고 사로잡혀 있든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들은 기독교인이지 그리스도의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복음의 진리가 항상 있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반드시 다른 복음에 복종을 해서는 안 됩니다, 단 한 가지의 율법이 그리고 행위가 또 은사가 다른 복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 나타나고 있는 그 모든 것이 다른 복음입니다. 할례만 다른 복음이 아니라 율법에 어느 한 가지라도 다른 복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시대는 율법에다가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또 다른 행위들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7:26절을 보겠습니다. (178)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저희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저희 안에 있고 나도 저희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

 

아버지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여호와 입니까? 물론 그것도 맞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이름은 나를 구원하실 자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아버지는 이 세상을 사랑 하셨습니다. 그 사랑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확증하셨다고 로마서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이름입니다,

주의 이름입니다. 성경에서 그 이름의 뜻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여기서 그것을 다 설명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 이름의 결국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신 사랑이 우리 안에 있고 또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을 알게 해 주시고 있습니다.

 

주님은 진리입니다.

진리가 항상 있어야 합니다. 성경은 이 진리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율법을 보고 있습니까? 거기서 예수 그리스도를 은혜를 깨닫지 못하고 그저 문자적으로 보고 그것을 우리의 몸으로 행하라고 하면 그것은 다 다른 복음입니다.

 

이 다른 복음에 복종치 아니하였습니다.

조금이라고 양보를 하지 않았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항상 우리 안에 있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면서 또 다른 복음이 무엇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다른 복음에 복종하지 않게 조금도 양보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진리가 항상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에 있는 성도들에게 있게 하기 위해서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진리를 아는 것 중요합니다. 그러나 다른 복음이 무엇이라는 것도 또한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사실 진리를 아는 것만큼 다른 복음을 아는 것도 어렵습니다. 아니 이 두 가지는 늘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항상 진리 안에 있어야 합니다.

그런 성도만이 다른 복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진리 안에 있지 않으면 반드시 다른 복음에 종이 되게 되어 있습니다.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는 그래도 사도 바울이 진리를 전하니까 다른 복음이 들어왔을 때 그것에 굴복하지도 않았고 잠시도 양보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 교회는 이미 313년이 지나면서 다른 복음이 전해지기 시작을 했습니다. 그 다른 복음이 1700년 가까지 계속해서 전해졌다고 생각을 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바로 이 시대 기독교라는 종교임을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복음의 진리가 항상 있게 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도 나도 저희 안에 있는 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사도 바울과 같이 우리에게도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가 되어 있는 성도는 거짓 형제가 다른 복음을 가지고 가만히 들어올 때 잠시도 굴복하지 않을 수 있고 양보 하지 않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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