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계1:3.)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119:105)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복음과 율법-설교2

제6강, 선택

윤주만목사 2018. 10. 17. 01:11


6, 선택

갈라디아서 1:15절을 보겠습니다. (302)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공동번역을 보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내가 나기 전에 이미 은총으로 나를 택하셔서 불러주셨고

 

선택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방에 복음을 전하게 하기 위해서 사도 바울을 어떻게 부르셨는가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 어머니 태로부터 나를 부르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선택에 대해서 반박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특히 알미니안주의 신학을 공부한 사람들은 이 선택에 대해서 부정을 하고 있습니다.

 

전적인 부정은 아닙니다.

그러나 자기도 선택에 부응하기 위해서 무엇인가를 했다는 것을 강조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부정을 하기 위해서 가장 많이 인용을 하는 말씀이 갈라디아서 115절 말씀입니다. 선택이라는 것을 어떻게 하든지 부정을 하려다 보니까 이 말씀이 가장 적절하게 사용이 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을 어머니 태로부터 택정을 하셨습니다.

이것을 부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이 말씀을 가지고 사도 바울에게만 해당이 되는 것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일반 교인들을 이렇게 택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도 바울은 이방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사도로서 특별히 택정을 하셨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말을 얼마나 잘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사도로서 택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방에 복음을 전할 사도로서 택한 것이지 우리 성도들은 어머니 모태에서부터 택한 것이 아니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이야기를 하면서도 아니 자기들이 하는 말이 성경과 배치가 되어 뒤죽박죽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억지로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부정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특별한 사람입니까? 물론 이방에 복음을 전한 특별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어떻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엘리야도 우리와 성정이 같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이기 때문에 어머니 태로부터 택정함을 받은 것이 아니라 구원을 받는 성도는 모두가 창세전에 이미 택함을 입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로마서 1:1절을 보겠습니다. (239)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로마서도 같은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까 사람들은 하나님의 선택에 대해서 이상하게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선택을 받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사도와 같이 특별한 사람이 선택을 받는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이 선택에 대해서 바로 전하지도 않고 있고 그저 막연하게 선택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사도는 직분입니다.

그 직분을 가지고 택정함을 입었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설령 그렇다 해도 사도 역시 택함을 입은 사람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성경에서 선택에 대해서 말씀을 할 때는 물론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일을 하기 위해서 선택을 받은 것과 그리고 성도로서 선택을 받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이 두 가지 다 어머니 태로부터 택함을 받았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니까 자꾸 이상한 이야기들을 하고 있고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서 침해를 하는 말을 하면서도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정립이 안 되다 보니까 성경 자체가 이때는 이렇고 저때는 저런 것같이 보이고 있습니다.

 

분명 맞습니다.

갈라디아서에서 말씀을 하고 있는 그리고 로마서에서 말씀을 하고 있는 택정은 사도로서 택하셨습니다. 하지만 먼저 알아야 하는 것은 사도 이전에 그가 성도로서 택함을 입지 않았다면 이 택정함 자체도 모순이 된다는 것을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어머니 태로부터입니다.

사도로서 택정함을 입었습니다. 그러나 사도 이전에 사도 바울 역시도 성도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일을 하기 위해서 먼저 택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성도로서 택함을 받아야 일을 할 수 있는 사도로서 또는 장로로서 택함을 받는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먼저 누가 되어야 하는 가를 생각하면 쉽게 받아들일 수 있지만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일을 위해서 택하십니다.

구약에서 모세를 그렇게 선택을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셔서 이스라엘을 인도하게 하셨습니다. 모세 뿐 아니라 모든 선지자들을 하나님께서는 택정을 하셨습니다. 그들이 어느 날 불쑥 튀어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그 선지자를 통해서 일을 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모든 선지자들은 이미 구원에 대해서 선택을 받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은혜로 부르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사도 바울이 먼저 은혜를 입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입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모태에 있을 때부터 이미 은혜를 받았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다 은혜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합니다.

사도들을 아주 특별하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것을 부정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사도들 역시도 은혜를 입지 않았다면 그는 사도로서 부름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먼저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은혜를 받는 것이 먼저라는 말씀입니다.

 

창세기에서 노아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노아 역시 방주를 짓는 사역을 했습니다. 그가 방주를 지었다는 것은 복음을 전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방주를 짓기 전에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은 자가 되었습니다. 은혜를 입은 노아이기 때문에 그가 방주를 질 수 있었습니다. 은혜를 입었다는 말씀은 구원을 받았다는 말씀입니다.

 

은혜로 부르셨습니다.

이 말씀은 먼저 구원을 받았다는 말씀입니다. 사도로 택정함을 입기 전에 사도 바울은 은혜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로 부르심을 받았기에 사도로서 택정함을 입고 일을 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어야 합니다.

 

선택. 택정, 택하심. 다 같은 말씀입니다.

여럿 가운데서 골라서 정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사도로서도 여럿 가운데서 골라 택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성도는 여럿 가운데서 골라 택하셔서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성경을 볼 때 늘 말씀을 드리지만 일보다는 구원이 먼저입니다. 일을 먼저 생각하기 때문에 이 선택에 대해서 부정을 하고 있습니다.

 

예정을 부정하고 있습니다.

사실 선택과 예정을 말씀할 때 은혜가 아니고는 설명이 안 된다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어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믿는 것은 아주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이 선택과 예정을 알게 되면 내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 불가능한 일을 가능케 하시는 하나님을 능력을 믿게 하기 위해서 선택과 예정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내 안에서 있는 믿음의 역사로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이성이 있어서도 아니고 지혜가 있어서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여럿 가운데서 택하심으로 부르셨습니다. 이렇게 택하심을 받는 것을 은혜라는 단어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2:8절을 보겠습니다. (311)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은혜로 부르셨습니다.

사도 바울이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방인들에게 이 구원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은혜로 부르신 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말씀입니다, 물론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 택정함을 입었지만 은혜로 부르심을 받은 것은 사도 바울은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만약에 사도 바울로부터 이 모든 것이 났다면 그것은 은혜가 아니지만 사도 바울로 택정함을 입은 것도 구원을 받은 것도 역시 은혜라는 말씀입니다. 이 은혜는 사도라서 특별하게 받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성도들도 받고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은혜는 구원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자기 안에 생명이 있는 자만이 생명에 대해서 전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생명이 없는 사람은 절대로 복음을 전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이 복음을 모르다 보니까 그저 성경말씀을 전하는 그것으로 마치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택정하셨습니다.

만약에 사도 바울이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받지 않았다면 그가 아니라 이 세상에서 지혜가 있는 자라 해도 택정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먼저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계속해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으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2:9절을 보겠습니다. (37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사도 바울만 택정하신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이미 사도 바울은 성경을 기록하고 순교를 당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보고 있는 성경은 영의 말씀입니다. 모든 사람이 이 성경을 보고 성령의 감동을 받아 깨달을 수 있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만약 그럴 수 있다면 사도 바울을 어머니 태로부터 택정을 하셨다는 것이 맞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떻습니까?

이 시대 택정함을 받은 사람이 몇이나 됩니까? 저도 목사들의 숫자를 정확하게는 모르겠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목사들 그러니까 복음을 전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다 세어 본다면 어림잡을 수도 없는 것 같습니다. 과연 그들이 이 성경을 보고 다 복음을 전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성도입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도 이렇게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은혜로 선택을 받아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만 복음을 전했습니까?

그가 아들이라고 말하는 디모데도 전했습니다. 그 뿐 아니라 디모데 후에 사람들도 역시 복음을 전했습니다. 물론 사도 바울이 이방에 복음을 전하고 성경을 많이 기록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사도 바울과 같은 사람만의 택정함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시대 역시도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전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성도입니다.

목사만 하는 일이 아닙니다. 성도도 예수 그리스도를 전할 수 있습니다. 아니 어쩌면 성도를 통해서 더 많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사실 목사는 사람을 만나는 일을 그렇게 많이 하지 않습니다. 솔직히 저 같은 경우에도 설교를 쓰는 시간이 많아서 사람과 만나서 복음을 전한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물론 아카데미 강의를 통해서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이 말씀은 사도 바울과 같이 어머니 태로부터 택정을 하셔서 은혜로 부르셨다는 말씀입니다, 실제 성경을 보면 그것을 디모데가 했고 또 디도가 똑같이 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니 그들만 한 것이 아니라 초대 교회에 집사들은 거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택정함을 입었다니까 내가 어느 성경을 조금 안다고 해서 마치 나 역시도 사도 바울과 같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 복음의 일군이 되는 것으로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베드로전서에 말씀과 같이 모든 사람들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 성경을 보고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 아름다운 덕을 선전한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디모데는 어떻게 했습니까?

분명히 사도 바울에게서 배웠습니다. 물론 디모데 역시도 성령의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디모데나 디도는 사도 바울로부터 복음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그 배운 것을 통해서 성경 안에서 성령의 감동을 받아 그의 기이한 빛 가운데 들어가 아름다운 덕을 선전했습니다.


택하신 족속입니다,

그들이 언제부터 택하심을 받았습니까? 창세전부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심을 받았습니다. 정말 이 선택에 대해서 믿어야 합니다, 만약 이 선택을 믿지 않으면 결국에는 내 의를 주장하게 되고 그것이 있다 보면 부자가 되어 사망에 이르게 되어 있습니다. 내 의를 버리라고 가르쳐 주기 위해서 성경에서 은혜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성경을 기록한 선지자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성경을 보고 영의 일을 깨달아 알 수 있는 것 역시도 택하심을 입은 성도라는 것을 베드로전서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성령의 감동을 받은 성도를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시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만 아닙니다.

우리도 역시 지금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어두운데서 불러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고 있는 성도는 어머니 태로부터 택정하시고 은혜로 부르신 이의 뜻을 따라 이 시대 복음을 전하는 자로 일을 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 복음을 전하는 사람과 함께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 모든 일들이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을 은사라고 합니다. 그래서 로마서 12장에서 어떻게 하는 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구는 가르치고 누구는 섬기고 누구는 성실함으로 누구는 부지런함으로 해서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고 있습니다.

 

선택에 대해서는 이미 아카데미 강의에서 설교를 했습니다.

그것을 보시면 되리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택정함을 받는 것에 대해서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특히 알미니안주의 사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이 선택에 대해서 부정을 하고 있고 또 갈라디아서의 말씀을 이용하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들이 말이 옳다 해도 문제입니다.

베드로전서에 있는 말씀이 또 걸리게 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일관성이 있어야 합니다. 사람의 이성적 사고로 이런 말씀들을 이해하려고 하다가는 결국에는 모든 성경이 얽히게 되어서 성경에서 말씀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을 잃어버리고 소경으로 헤매게 되어 있습니다.

 

갈라디아서1:16절을 보겠습니다. (302)

그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실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그 아들을 이방에 전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방에 복음을 전했습니다.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성도 역시도 똑같이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 사람으로서 이방에 복음을 전했지만 이 시대 역시 사도 바울과 같이 어머니 태로부터 택정하시고 은혜로 부르심을 받은 성도들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당시는 이스라엘만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민족은 이방에 하나님을 전하지를 않았습니다. 자기들만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을 원했고 이방인들은 지혜가 없어서 하나님을 믿을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가장 걸림이 되었던 것이 율법의 문제였습니다.

 

사도 바울입니다.

이 시대 역시 복음을 전하는 성도가 있습니다. 역시 사도 바울과 같이 어머니 태로부터 택정하셔서 은혜로 부르신 성도들이 복음을 전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물론 이 말씀은 사도 바울의 개인의 말씀일 수도 있지만 역시 이 시대도 사도 바울과 같이 복음을 전하는 성도들도 이렇게 전한다는 것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성경입니다.

사람들은 성경을 너무 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니 자기들이 문자를 보는 그리고 그 문자의 뜻을 아는 이성적 지혜가 있는 것으로 보다보니까 아주 쉽게 성경을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너무 쉽게 성경을 전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지금은 미디어 시대입니다.

꼭 자기가 목회를 하지 않아도 인터넷이라든지 여러 매체를 통해서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전하는 그들이 사도 바울과 같이 어머니 태에 있을 때부터 택정하시고 은혜를 부르셨다는 것을 믿지를 않고 있습니다. 먼저 내가 복음을 전하려면 반드시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택정하시고 또 어떻게 부르셨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말로만 해서는 안 됩니다.

말로는 누구든지 다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을 언어적으로 보면 그런 말은 다 할 수 있습니다.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내 마음에서 믿어지는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내 어머니 태로부터 택정하시고 은혜로 부르셨다는 것이 믿어지는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모르고 있습니다.

어떻게 택정하신 것도 모르고 있고 은혜도 모르고 있습니다, 그저 자기 입으로 은혜라는 말을 하면 은혜인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이 아니라 반드시 구원에 대해서 은혜가 임해야 합니다, 구원을 받은 것이 어떻게 받았는가 하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은혜로 받았다는 것을 알아야 하고 실제 그것을 자기 행함으로 보여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은혜를 말합니다.

그런 그가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고 있는 그가 은혜에 대해서 말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율법의 한 모양이라도 지키고 있다면 그는 은혜를 거절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가 아무리 진심으로 아니 모든 사람이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은혜를 이야기한다 해도 율법을 지키고 있다면 그는 은혜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복음을 전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그리고 또 여러 매체를 통해서 복음을 전한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은혜 자체를 거절하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가 아무리 사람의 말로 감동을 주는 정말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하는 사람과 같이 받아들여진다 해도 그는 다른 복음에 미혹이 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은혜로 부르심을 입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복음을 전합니까?

반드시 어머니 태로부터 택정함을 입어야 합니다. 그것은 창세전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을 하신 하나님의 놀라우신 경륜입니다. 그것이 믿어지는 것이 은혜입니다, 그러나 이 은혜조차도 모르고 있는 사람들이 이 시대 복음을 전한다고 하면서 그저 성경에 있는 문자를 전하는 것으로 마치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덕이 무엇입니까?

그 아들을 이방에 전하는 것입니다, 그 시작을 사도 바울이 했습니다, 그리고 이 시대 역시 사도 바울과 같이 성령의 감동을 받는 성도들이 그 일을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고 있는가 하면 만세전부터 예정하셔서 그리스도 안에서 택정하심을 받아 은혜로 부르심을 입어서 복음을 전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복음 그냥 전해지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내가 이 시대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가르치는 자를 통해서 복음을 듣고 있습니까? 그 모든 일들이 다 하나님의 은혜로 부르심에 따라 되는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방에 복음을 전했고 우리는 내 형제와 가족과 그리고 이웃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을 부르셨습니다.

지금 이 시대 복음이 있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은혜로 부르셨습니다. 복음이 어떻게 전해지고 있는가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은혜로 부르심을 입은 자가 복음을 전해야 하는데 이 시대는 신학을 공부를 하고 목사 안수를 받으면 마치 모두가 복음이 있는 것으로 성경을 보고 그 문자를 전하면서 복음을 전한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3:5절을 보겠습니다. (312)

이제 그의 거룩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성령으로 나타내신 것같이 다른 세대에서는 사람의 아들들에게 알게 하지 아니하셨으니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다고 말씀합니다.

어떻게 나타내셨습니까? 사람들은 성령에 대해서 너무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에서 복음을 아는 것에 대해서 샤머니즘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느 사람들은 자기가 성령을 받았다고 하면서 어느 말씀을 보면 그냥 깨달아진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버리시기 바랍니다.

그런 샤머니즘적인 사고는 다 버리셔야 합니다, 특히 은사자들에게서 그런 것이 더 많이 나타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정말 자기가 다 알지도 못하면서 마치 성경을 보면 다 깨달아지는 것 같이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을 보면 안타깝습니다. 그리고 어느 한 가지를 아는 것으로 마치 전부를 다 아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성도는 샤머니즘적인 것을 버려야 합니다.

그 아들을 우리에게 어떻게 나타내시고 있는가를 바로 알아야 내가 정말 복음을 알고 있고 성령의 감동을 받고 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분명히 사도 바울이 그 아들을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실 때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다른 것 아닙니다.

반드시 그 아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사도 바울의 속에 나타내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고 교회 안에 다른 복음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 나와서 미혹을 하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아들을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시지 않으면 다른 복음이 됩니다.


성경은 그 아들을 기록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알고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에 내게 대해서 기록했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이 성경을 보았지만 그들에게는 예수 그리스가 나타나지를 않았습니다. 왜 나타나지를 않았는가 하면 성경을 사람의 이성으로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성막입니다. 주님께서 성전을 보시고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르쳐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이 성전에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 성전이 주님의 육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 성전에 있는 모든 기구 하나하나가 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고 있고 그것을 알아야 그 사람 만에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를 보시기 바랍니다.

성막론에 대해서 무수히 많은 책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를 정확하게 나타내고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자기들의 말로도 성막은 주님의 육체라고 하면서도 나타나지가 않고 있습니다. 물두멍, 등대, 분향단, 언약궤, 속죄소 등은 거의 모든 성막론의 책을 볼 때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지를 않고 있습니다.

 

내가 번제단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냈습니까?

그리고 성막의 문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냈습니까? 그것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났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막 전체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지 않고 있다면 그는 복음을 전해서는 절대로 안 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성경의 문자입니다.

그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성막에 있는 모든 기구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지 않고 있다면 그는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아니 모든 것을 다 안다 해도 속죄소 하나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지 않고 있다면 복음이 없는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시기 까지라는 말씀을 왜 하는 가를 잘 이해를 해야 합니다.


성령입니다.

성령이 오시지 않고는 도무지 깨달을 수 없습니다. 성령이 오셔서 성경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속에 나타나야 합니다, 그 말씀은 성령의 감동으로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함을 받는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것을 거룩한 선지자들과 사도들을 통해서 나타내셨습니다. 나타내셔서 기록한 것이 성경이라는 말씀입니다.

 

성막론에서도 안 나타납니다.

그런 그들이 율법을 보고 어떻게 나타낼 수 있습니까?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모든 율법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속에 나타나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 성도만이 복음을 전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율법은 고사하고 주님께서 내 육체라고 말씀하신 성막에서도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지를 않고 있습니다.

 

성령을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반드시 진리의 성령이 우리에게 오셔야 합니다. 그렇게 성령이 오셔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속에 나타나시게 되면 구원을 받고 그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성령에 대해서도 모르고 있고 성막에 대해서도 모르고 있습니다.

 

새 번역을 보겠습니다.

그 아들을 이방 사람에게 전하게 하시려고, 그를 나에게 기꺼이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그 때에 나는 사람들과 의논하지 않았고,”

 

마태복음 16:17절을 보겠습니다. (2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혈육과 의논하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이 자기 혈육과 의논하지 않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이 알고 있는 혈육이 누구입니까? 이스라엘의 바리새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속에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시기 까지 기뻐하셨는데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자기 혈육과 의논하지 않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진짜 혈육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이제까지 사도 바울이 알고 있는 바리새인의 사상이었습니다. 그것과 의논하지 않았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그 사상과 타협을 하지 않았다는 말씀입니다, 오직 성령의 감동으로 성경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갔다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까?

이것은 이 세상 이성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정말 예수에 미치지 않고는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사도 바울 속에 나타나게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혈육과 의논하지 않았다고 하니까 진짜 자기가 이제까지 만나왔던 사람들과 의논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이성과 의논을 하지 않고 성령의 감동을 받았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을 주님께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묻고 있습니다. 내가 누군가를 묻고 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주님께서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오직 성령이 오셔야지만 내 안에 그리스도가 나타난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은 이 세상의 이성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 수 없는데 네가 그것을 아는 것을 보니 복되다고 말씀을 하시면서 알게 하신 이는 하나님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그렇다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 나타내시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을 통해서 복음을 듣고 믿는 그 사람 역시 나타난다는 말씀입니다. 이런 말씀을 보고 자기가 성경을 조금 아는 것으로 마치 성령의 감동을 받는 것으로 생각하고 하나님께서 역사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갈라디아서 1:17절을 보겠습니다. (302)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오직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새 번역을 보겠습니다,

또 나보다 먼저 사도가 된 사람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도 않았습니다. 나는 곧바로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마스쿠스로 되돌아갔습니다.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런 말씀을 보고 지금도 마치 사도 바울과 같이 그렇게 역사를 하는 줄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전혀 없다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이 왜 이 말씀을 하고 있는가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지금 사도 바울 속에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는 일은 초대교회라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오셨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신 후에 하늘에 올라가셨습니다. 아직 신약 성경이 기록이 안 되었던 때입니다. 성경이 완전히 기록이 되기 전에는 분명히 선지자나 사도들에게 하나님께서 성경을 기록하게 하시고 있습니다.

 

아직 초대교회입니다.

사실 사도들이 복음을 안다고 해도 이제 성령이 임한 그때입니다, 사도 바울을 통해서 이방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특별히 그에게 감동을 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신약 성경에서 많은 부분을 기록할 수 있었습니다. 왜 이 말씀을 하고 있는가 하면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에 다른 복음이 들어왔고 자칭 사도라고 하는 자들이 나타났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어떻게 사도가 되었고 어떻게 복음을 알아서 그리스도가 내 속에 나타났는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기는 이 세상의 이성적인 사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 주셔서 구약 성경을 보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나게 하셨고 그래서 지금 복음을 전하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아라비아에 갔습니다.

이 아라비아가 정확히 어느 지명을 말하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어느 기간 동안에 있었는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다메섹에서 주님을 만나고 사도 바울은 아라비아라는 곳으로 가서 그의 속에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났다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령의 감동을 받아 아라비아에서 구약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알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마 성경을 보았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미 문자적으로 아는 성경은 능통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에게 성령을 보내 주시자 그가 아라비아로 가서 그 문자적으로 알고 있는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났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아무나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미 사도 바울은 성경에 대해서는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바리새인입니다.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그가 성경을 얼마나 많이 알고 있었는가를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기 때문에 성령이 오시자 이제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가는 시간이 필요 했고 그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구약 성경은 어느 누구보다도 이성적으로는 잘 알고 있는 사도 바울이었기 때문에 성령이 오시자 그것을 확증하기 위해서 아라비아로 갔을 것이 분명합니다.


샤머니즘에 빠지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구약에 대해서 너무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오셔서 감동을 하니까 그 구약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기 위해서 이 모든 성경이 예수에 대해서 기록한 말씀이라는 것을 자기 속에 나타내기 위해서 그런 시간을 가졌을 것이 분명합니다. 먼저 사도된 자들을 만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성경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고 성령의 감동으로 그것을 자기 속에 나타내는 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먼저 아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난 후에 성령의 감동을 받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사도 바울 안에 나타내시기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과 같이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반드시 자기 속에 그리스도가 나타나야 합니다, 그런 성도만이 다른 복음을 전하지 않을 수 있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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